성령론의 역사
1. 초대 교회와 고대 교회의 성령론
교회의 초기 시대에는, 성령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거의 언급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성령론은 일반적으로 (1)세례 의식문 (2)사도신경 (3)초기의 찬양과 예배 기도문 (4)초기의 교리적 오류에 대한 교회의 반응 속에서 실제적이고 영적으로 반영되어 있었다. 2세기 후반에는, 성령의 신성을 점차로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2세기의 성령론의 가장 큰 쟁점은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에 관한 것이었다.
이그나티우스(Ignatius. 35-107)는 마리아가 잉태되셨을 때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였으며, 성령의 인격성과 사역을 분명히 증거하였다. 순교자 폴리캅(Polycarp, 69-155)은 순교 당할 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불렀으며,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96년 로마의 3대 주교)는 삼위일체의 세 위격을 한 문장 속에서 묘사하였다--“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 것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시고, 성령이 살아계신다.” 또한 그는 “우리에게는 한 분 하나님과 한 분 그리스도와 우리에게 부어지신 한 분 은혜의 성령이 계시지 않는가?”라고 질문하였다. 순교자 져스틴(Justin Martyr, 100-165)도 성령에 대해서 수없이 언급하면서 “성령의 뚜렷한 인격성의 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하였다. 그의 제자였던 타티안(Tatian)도 성령을 믿었다.
아프리카의 카르타고 출신의 교부였던 터툴리안(Tertullian, 160-225)은 아들과 성령이 공통으로 아버지와 함께 갖고 계시는 한 본질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성령을 하나님으로 불렀고 성령의 신성과 인격성을 인정하였다. 그는 군주신론을 반대하였으나, 몬타누스주의자들의 성령론을 후대에 받아들였다. 그러나 양태론자였던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 3세기의 안디옥의 이단 주교)에게 있어서 성령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 부어주셨던 은혜에 대한 명칭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사벨리우스를 따랐던 또다른 양태론도 역시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을 부정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한 하나님의 세가지 현현 양태로 이해하였다. 2세기에, 이레네우스(Irenaeus,, 130-200)는 성령을 신적인 지혜와 동일시하면서, 사실상 하나님의 한 속성으로서 간주하였다. 그는 성자의 성부에 대한 종속과 성령의 성부와 성자에 대한 종속을 이야기 했지만, 성령의 신성과 영원성을 분명히 증거하였다. 선지자들은 성령을 통하여 예언하였고 사람들은 성령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았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0-215)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거룩한 세분’(Holy Triad)으로 부르면서 성령은 구별되지만 연합된 분이라고 하였다. 오리겐(Origen, 185-254)은 성령이 존재적인 삼위일체의 한 부분이라는 개념에서 훨씬 더 멀리 나아갔다. 그는 성령이 “말씀을 통하여 존재하게 된 모든 존재들 가운데 가장 영광스러운 존재이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로 말미암아 창조된 모든 존재들의 최고 우두머리”라고 단언하였다. 성령이 피조물 가운데 가장 높고 으뜸간다는 이러한 신념은 아리우스주의자들이 나중에 아들에 대해서 주장하였던 견해와 다르지 않다. 삼위일체를 강조하고, 세 구분되는 본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도, 오리겐은 삼위를 너무 날카롭게 구분함으로써 삼신론에 가깝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또한 그는 초월하시는 성부에 대하여 아들과 성령을 종속적으로 언급하였다. 주후 175년의 안디옥의 테오필루스(Theophilus)는 처음으로 ‘삼일적 존재’(Trias)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성령의 신성을 인정하였으나, 성령을 지혜라고 함으로 성령의 고유한 인격이 분명히 나타나지는 않았다.
초기의 또다른 강조점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산출하도록 역사하시고 인도하시는 성령에 대한 것이었다. 오리겐(Origen)은 성경을 “성령에 의하여 기록된” 것으로 말하였다. 당시에 성경에 있는 모든 내용은 성령의 특별한 사역에 의해서 전해진 것으로 생각되었다. 일반적인 견해는 성경이 어떤 오류나 어떤 불필요한 것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비록 어떤 완전한 영감론도 제시되지 않았지만, 성경의 저자들이 실제로 그들의 집필 작업에서 성령에 의하여 사로잡혔다는 필로(Philo)와 다른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다수의 기독교 신학자들이 있었다. 변증론자인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는 음악가가 관악기를 통하여 숨을 불어 넣듯이 성령이 그들을 통하여 호흡하실 때에, 선지자들이 황홀경의 상태에 사로잡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부들은 저자들을 순전히 수동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피하였다. 어거스틴(Augustine)은 성경 저자들이 사건들에 대한 그들 자신의 기억을 사용했다고 강조하였다. 성령의 역할은 이러한 기억들을 생각나게 하고 그것들을 오류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다.
성부와 성자의 관계 속에서, 성령에 대한 완전하고 충분한 교리적 이해를 가져오게 된 것은 4,5세기에 이루어졌던 기독론 작업의 부속물이요 부산물이었다. 이것은 성령의 신성의 문제가 어떤 의미에서 아들의 신성의 문제 속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만약 신적인 제 2위격이 존재할 수 있다면, 존재론적인 신성의 일원이며 하나님께만 드려야 하는 예배와 복종이 그에게 드려져야 하는 제 3위격도 그만큼 쉽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리겐의 시대 이후로, 성령의 본성에 대한 신학적인 성찰은 신앙적인 실천에 뒤쳐지게 되었다. 성령은 경배되었지만, 그의 정확한 지위는 불분명한 채로 남아 있었다. 안디옥 출신으로 알렉산드리아의 교회의 장로였던 아리우스(Arius: 250-336)는 성령을 본질이라고 말했지만, 그의 본질은 아들의 본질이 아버지의 본질과 전혀 다른 것처럼 아들의 본질과 전혀 다른 것으로 간주하였으며, 성자의 구별된 인격을 인정하였지만 성자와 성령을 피조물로 간주하고 성자와 성령을 성부에 종속된 것으로 보는 오류를 범하였다. 아리우스파의 대표로서 니케아 회의에 참여했던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는 성령을 “세번째 등급에 있는”, “제 3의 능력,” 그리고 “지고한 원인에서 나온 제 3위”라고 언급하였다. 그는 요한복음 1:3절에 대한 오리겐의 주석을 따랐으며, 성령을 “아들을 통하여 존재하게 된 실재들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아리우스파의 주장은 알렉산더 감독을 따라 니케아 회의에 참가하였던 교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5-373)에 의해서 니케아 공의회에서 격퇴되었다. 그는 알렉산더 감독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 되었으나, 아리우스파가 황제와 결탁하여 그에게 대항하였을 때, 17년 동안 다섯 차례나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아리우스파를 물리칠 수 있었다.
아타나시우스는 “비유”를 의미하는 희랍어 단어인 τρόπος(트로포스)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 토로피키(Tropici)들의 글을 반박하도록 자극받았다. 이 사람들은 그 당시 흔한 예를 따라서 성경을 비유적으로 해석하였다. 그들은 성령이 무로부터 존재하게 된 피조물이라고 주장하였다. 특히 그들은 성령을 천사들의 등급에서 가장 높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 1:14절에서 언급된 “부리는 영들” 중의 하나인 천사로서 간주하였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과는 “본질에 있어서 다른”(헤테로우시오스, ἑτεροούσιος) 존재로 생각되어졌다. 대부분의 이단들처럼, 이 트로피끼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증거 본문을 인용하였다(암 4:13-“보라. 우뢰를 수립하고 영을 창조하는 내가”, 슥 1:9-“내 안에서 말하는 천사가 이것들을 말하였다”, 딤전 5:21-“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아타나시우스는 트로피끼들의 견해에 대하여 즉각 맹렬하게 반응하였다. 그는 성령이 완전히 신적이며,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동질을 갖고 계신다고 주장하였다. 첫째는 트로피끼들의 부정확한 주석에 대한 반박이었다. 둘째로 그는 성령이 “삼위일체에 속하여 있고, 그 안에 있는 신성과 하나”라고 성경대로 주장하였다. 그는 삼위일체가 영원하고 동질적이며, 분할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의 일원인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과 동질적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성령과 아들 사이의 밀접한 관계로 인하여, 성령은 정확히 아들이 아버지께 속하는 것과 같이, 본질에 있어서 아들에게 속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를 “하나님께 참여한 자들”로 만드시는 분이 바로 그 분이기 때문에, 성령은 신적인 존재임에 틀림없다(고전 3:16-17--성령의 우리 안에 내주하심이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든다). 따라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본성을 갖고 계시며, 그들과 같은 명예와 예배를 받으시는 분으로서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380년에,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는 성령에 대한 여러가지 신앙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한 설교에서 보고하였다. 그에 의하면 어떤 사람들은 성령을 하나의 능력으로 간주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피조물로 인식하였으며, 또다른 사람들은 그를 하나님으로서 생각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의 모호성으로 인하여, 여기에 관여하기를 거절하였다. 또다른 사람들은 삼위일체의 세 위격이 상이한 등급의 신성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였지만, 성령을 하나님으로 간주하는 사람들 중에도,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사적인 견해로서 주장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공적으로 선언하였다.
좀 더 과격한 기독교 집단들 가운데에는 마케도니우스파(Macedonians)나 혹은 신령파(Pneumatomachians, 성령의 전사들)가 있었다. 이들은 성령의 완전한 신성의 교리를 반대하며 성령이 피조물이라고 주장하였던 반(半)아리우스주의자들이었다. 이들에 대해서 Athanasius, Basil, Gregory of Nazianzus, Gregory of Nyssa가 강력하게 대응하였다. 이들은 전지성과 전능성, 편재성, 신적 영광 등이 성부와 성자와 동일하게 성령에 대해서도 적용되며, 세례 형식에 있어서도 성부, 성자, 성령의 동등성이 오류없이 입증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성령의 신성을 증명하였다. 바질(Bazil)은 375년에 “성령에 대하여”(De Spiritu Sancto)라는 글에서 아버지와 아들에게 드려지는 것과 같은 영광과 명예와 예배가 성령에 대해서도 역시 드려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바질은 그가 그들 “아래에서” 고려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성령을 자주 하나님으로 부르지는 않았으나, “우리는 그가 신적인 본성에 있어서 다르지 않다고 믿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성령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바질의 견해에 의하면, 성령의 활동의 위대성과 그의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관계성과 일하심의 밀접성이 그의 지위를 이해할 수 있는 주요한 열쇠들이다.
381년의 콘스탄티노플회의에서 결정된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경은 성령에 대해서 이렇게 진술하였다. “성부로부터 나오신 주님이요 생명의 수여자이신 그 분은 선지자들의 증언대로 성부, 성자와 함께 예배되고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이 신경은 마케도니우스파를 정죄하였고, 성령의 신성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천명하였다.
또한 주목되어야 하는 것은 교회사의 초기 기간 동안에 있었던 카리스마적인 집단들의 존재이다. 이 집단들 가운데 가장 현저한 것은 2세기 후반에 번성하였던 몬타누스주의자들이었다. 그의 세례식에서 몬타누스(Montanus: 151-171)는 방언으로 말하고 예언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보혜사, 즉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그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있다고 선언하였다. 몬타누스와 그의 여제자들 중 두 사람(Priscilla와 Maximila)도 역시 성령의 대변인들로서 믿어졌다. 그들의 수많은 예언들 가운데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하였다는 경고들도 있었다. 몬타누스주의자들은 그들의 예언들이 성경을 명백하게 설명해주며 또한 성령의 영감을 받은 선지자들이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라고 믿고 가르쳤다. 보혜사의 명령을 전달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은 재혼하는 것은 죄라고 선언하였다. 교회의 실천들이 느슨하게 되기 시작하고 있을 때와 동시에, 몬타누스주의 운동 안에서는 기독교적인 삶의 높은 표준에 대한 강조가 있었다. 그들은 터툴리안이 몬타누스주의자가 되었을 때에 그들의 가장 유명한 개종자를 확보하게 되었다.
얼마간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그 이후의 운동은 노바티안주의(Novatianism)였다. 이 운동은 249-250년의 데시우스 황제 박해 기간(Desian persecution)에 나타났으며, 그 지도자는 노바티안(Novatian)이었다. 이 운동은 박해 기간 동안에 이교도와 협력하고 배교하였던 코르넬리우스(Cornelius)를 교황으로 임명하는데 반대하여 일어난 엄격주의자들의 운동이었다. 이것은 3세기 중반과 그 이후에 번성하였다. 이 집단은 몬타누스주의와 도덕적인 삶에 대한 깊은 관심을 공유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예언에 대해서는 동일하게 강조하지 않았으며,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치지도 않았다.
381년의 콘스탄티노플회의 이후 451년의 칼케톤 회의 때까지는 성령의 신성에 대한 교리가 강화되고 확대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성령의 신성이 이미 전제되고 이제는 성령의 발출(procession)에 관심이 모아졌다. 431년의 에베소 회의 이전에 교부들은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에 대해서 견해가 일치하였다(Athanasius, Didymus, Epiphanius, Gregory of Nyssa, Basil, Augustine 등등). 이 시기에는 희랍 교회도 이 견해에 입장을 같이 하였다. 그러다가 테오도렛(Theodoret, 393-466)이 나와서 431년부터 성령이 성부로부터만 나오시고 성자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부인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해서 성령의 발출 문제를 다루는 중요한 회의가 589년 지금의 스페인인 톨레도에서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테오도렛은 안디옥 학파에 속한 주교로서 네스토리우스와 함께 안디옥 기독론을 옹호하여 씨릴(Cyril)에 반대하다가 씨릴의 후계자였던 디오스코러스(Dioscorus)에 의해 그리스도를 ‘두 아들’로 나누는 것으로 비판받아 유배 생활을 하다가 칼케톤 회의에서 마지 못해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게 되었으나, 다시 씨릴을 비판하다가 553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정죄되었다.
서방 교회는 어거스틴(354-430)에 의해 제시된 성령으로 말미암은 효과적인 은총의 교리를 강조하였다. 이것은 어거스틴이 인간론과 죄론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동방 교회는 죄를 크게 강조하지 않고 구원을 낙관적으로 이해하였다. 동방교회의 대표자들은 예루살렘의 Cyril, Gregory of Nazianzus, Basil, Chrysostom 등이 있었다.
400년경에 영국에서 온 로마의 수도사인 펠라기우스(Pelagius)로 말미암아 411년부터 원죄를 부인하고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며 은혜의 중요성을 경시하고 낙관적인 구원론을 펼쳤던 펠라기우스와 그의 제자인 코엘레스티우스(Coelestius)를 추종하였던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529년 오렌지 회의에서 정죄됨으로 인하여, 구원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에 대한 강조가 다시 회복되었다. 오렌지 회의는 어거스틴의 편에 서서 성령의 구원 사역을 강조하였다.
2. 중세 교회의 성령론
중세 시대에 일어났던 중요한 문제는 신조들 속에 filioque(필리오케)라는 단어를 삽입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었다. 589년의 톨레도 회의는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에서 결정된 신경에 “그리고 아들로부터도”라는 의미의 라틴어 단어인 filioque를 첨가하였다. 이것의 추가는 처음부터 아리우스주의를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는 한가지 방법으로서 간주되었다--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신다. 점차로 이것이 공식적으로 되었으며, 이 과정은 9세기경에 서방 교회에서 사실상 완성되었다. 그러나, 동방 교회는 이 단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그들은 요한복음 15:26절이 성령을 아들로부터가 아니라, 오직 아버지께로부터만 나오시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고 해석하였다. 원래 니케아 신경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동방 교회는 아버지의 μοναρχία(모나르키아, “단일한 통치”)의 개념에 입각하여 filioque라는 단어를 거절하였다--그는 신성의 유일한 토대이자 근원이며 원인이시다. 그들은 성령이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로부터” 나오신다는 진술에는 동의할 수 있었으나, 그가 “아들로부터” 나오신다는 진술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이 문제로 두 교회는 분리의 길을 걸었고, 867년에 희랍정교회 대주교였던 포티우스(Photius)가 희랍교회의 입장을 지지하고 서방교회를 반대하다가 교황의 정죄를 받고 파문되었으며, 여기에 반발하여 결국은 1054년에 서방 교회로부터 분리되었다. 물론 동․서방 교회의 분리에는 다른 주요한 요인들이 많이 있었다.
중세 후기에 와서 로마 교회는 어거스틴의 예정은총 교리와 성령의 역사에 대한 강조를 약화시키고 교회의 권위와 성례전을 강조하게 되었다. 의식주의와 교권이 강화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Bernard of Clairvaux, 1091-1153)는 『은혜와 자유의지』에서 은헤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피오레의 요아힘(Joachim of Fiore)은 인류 역사를 삼위일체의 위격에 따라 세 시대로 구분하였다. 제 1시대는 성부의 시대로 율법 시대이며, 제 2시대는 성자의 시대로 복음 시대이며, 제 3세대는 성령의 시대로 영적 충만의 시대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삼위간의 차이점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여, 삼신론 혹은 사위일체론에 떨어지게 되었고, 1215년에 이노센트 III세 교황이 소집하였던 제 4차 라테란 회의 때 이단으로 처형되었다. 안셀름(Anselmus)과 피터 롬바르트(Peter Lombard)는 서방 교회의 전통을 따라 성령이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하여 나왔다고 주장하였다.
12세기의 피에르 아벨라르(1079-1142.4.21)는 『하나님의 일체성과 위격에 관하여』에서 성령의 전능성을 부인하고, 성령이 성부와 같은 본질임을 부인하였으며, 성령이 성부와 성자와 동등하시다는 것을 부인하였고, 성부의 지혜가 성자 및 성령의 지혜와 동일하다는 것을 부인하여 1121년 스와송 공의회에서 정죄되고, 1140년 상스 회의(Council of Sense)에서 이단으로 정죄되고 2년 후에 사망하였는데, 같은 성직자였던 엘로이즈와의 사랑의 일화는 유명한 것이었다. 그녀는 22년 동안 그의 무덤을 지키고 63세에 세상을 떠났다.
1274년에는 그레고리 10세 교황이 필리오케 논쟁을 재해결하기 위하여 리용에서 제 2차 회의를 열어 제 4차 라테란 회의의 내용을 재확인하면서, 나아가서 이렇게 정리하였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하였으나, 두 원천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원천으로, 두 발생이 아니라, 하나의 발생에 의해서 발출하였다.” 그러나 동방교회는 냉담하였다. 그러자 서방교회는 1431년에 즉위하였던 유게니우스 4세(Eugenius IV세) 교황(1383-1447)에 의해서 filioque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플로렌스에서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 이후에 “희랍 교회에 대한 칙령”을 발표하였는데, “성령의 본질과 실재적 존재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동시에 나온다고 한 교부들의 가르침은 성부는 성자와 함께 성령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동방 교회는 다시 이 주장을 반대하였다. 그러다가 1453년 동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고 오늘까지 서로 갈라진 채로 내려오고 있다.
이 논쟁 이후로 교회와 신학자들은 성령의 인격보다 이제 성령의 사역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중세 후기에는 교회가 영적으로 침체하고 부패하게 되었으며, 수도원중심의 신비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아울러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인문주의와 스콜라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십자가 운동의 실패는 영적인 소망을 침체하게 하였고, 철학이 발달하여 성령론이 약화되었다. 이 중세 후기에는 사제들이 실제적으로 성령을 대신하였으며, 성례전에 대한 강조, 말씀에 대한 무지(無知), 미신, 인본주의, 스콜라주의의 와중에서 성령론에 대한 논의는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3. 종교개혁 시대의 성령론
종교 개혁은 성령론에 대하여 어거스틴의 예정과 은총론, 인간의 전적인 부패, 효과적인 은혜의 교리를 다시 부각시키고 확대하고 발전시켰다. 그리고 구원을 가져오기 위한 믿음에 성령의 사역의 필요성이 부각되었고, 성령에 의한 중생의 교리도 관심을 얻게 되었다. 아울러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계시하는 성령의 조명 교리가 강조되었다. 성령에 의해서 모든 신자가 성경을 읽고 배울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만인제사장설).
루터(Luther, 1483-1546)는 주로 칭의와의 관련하에서 성령을 생각하였다. 성령은 신앙을 창조하고 신자를 그리스도와 결합하게 하고 의롭게 한다. 루터는 성령을 삶의 절대적인 주님으로 불렀으며, 성령의 사역이 두가지 외적인 표징, 즉 말씀 설교와, 예전에서 사용되는 떡과 포도즙을 통해서 온다고 하였다. 루터는 성령이 그리스도가 이룩하신 칭의와 성화를 우리에게 연결시켜주신다고 하였다. 또한 루터의 사상 속에서, 우리는 신자의 마음 속에 성령께서 “사랑을 불어 넣으신다”는 관념을 발견한다. 초기의 공식에서, 루터의 관념은 어거스틴의 관념과 매우 유사하였는데, 이것은 루터가 어거스틴파 수도사였기 때문이다. 성령의 사랑의 주입은 한편으로는 개인의 삶 속에서의 하나님의 임재를 지시하였으며, 그 결과는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의 일치였다. 루터의 개념은 또한 개인 속에 여전히 존재하는 옛 죄성에 대한 성령의 싸움을 지시하였다.
성령론의 논의에 끼친 장 깔뱅(John Calvin, 1509-1564. 5.27.)의 공헌은 성경의 권위와 관련된 영역에 대한 것이다. 카톨릭 교회는 교회가 성경의 신언성을 보증한다고 하였지만, 깔뱅은 성령의 내적인 증언이 성경의 신적인 영감설과 신언성을 확실케 한다고 주장하였다. 기독교 강요 제 1권에서 칼뱅은 교회의 증언이나 다른 외적인 증거들의 설득력이 아니라, 성령의 내적인 증언이 성경의 신적인 성격에 대한 우리의 확신의 궁극적 토대라고 하였다.
깔뱅은 성령의 증언이 이성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성경을 듣거나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들이 다루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신념이나 확신을 일으키시는 내적인 활동이다. 이것은 성경에 관한 성령의 두번째 사역이다. 처음에는 성경을 기록하도록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으셨던 성령께서 이제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이 성경이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따라서 진리라는 확신을 갖게 하신다. 그는 확신을 일으키시며,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어떠한 의혹도 제거하신다.
깔뱅은 말씀과 성령의 연합을 매우 조심성있게 강조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이 성경과 관계없이 작용하실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들은 성령으로부터의 새로운 계시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깔뱅은 독자들에게 요한복음 14:26절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을 상기시켜 주었다--성령은 어떤 새로운 진리를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을 그들에게 조명하고 각인하신다.
깔뱅은 또한 기독교 강요 제 3권에서 성령의 믿음 및 구원과 관련된 사역을 강조하였다. 성령의 신비한 능력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가 성부로부터 받은 것과 자기의 것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려고 하는 것을 믿음 안에서 받게 된다. 그는 성경에 근거하여 성령이 성부와 성자와 함께 사역하시기 때문에 그를 성부의 영이라고 하며 성자의 영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칼빈은 성령을 양자의 영(롬 8:15), 보증의 영(고후 1:22), 약속의 영(엡 1:13), 의의 영(롬 8:10), 물(사 55:1), 불(눅 3:16) 등으로 부른다고 하였다. 성령의 이런 사역 외에 칼빈은 신앙과 회개가 성령의 사역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또한 고린도전서 12-14장에 대한 주석에서 그의 시대에 고린도교회의 신자들이 받아 가지고 있었던 은사의 결여와 전적인 결핍성을 슬퍼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은사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암시하였다. 칼뱅은 유일한 문제점은 하나님의 보화 창고가 비어있거나 하나님의 자비가 적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은사를 받기에 합당치 않은 믿음과 하나님의 자비를 받지 않으려는 태도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기독교 강요』 제 4권 14-18장에서 예전론을 언급하면서도 세례와 성만찬과 같은 예전 역시 성령의 사역 없이는 인간적인 행사에 그치고 만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처럼 그는 성령의 사역을 성경과 신자들의 삶과 성례전의 세 영역에서 나타난다고 보았다.
1648년에 영국의 의회에서 최종적으로 확정된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은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심을 긍정하였을 뿐 아니라, 성경을 깨닫고 믿음과 순종을 촉구하고 격려하며, 중생을 실현함에 있어서 성령이 구속의 은혜를 적용하며, 성화를 성취하고 신앙의 확신을 주며, 견인을 보장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강조하였다. 개혁교회의 대부분의 신앙고백과 교리서들은 구원을 위한 효과적인 은혜에서의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였다.
루터파의 멜랑히톤(Melanchton, 1497-1560)은 인간의 의지와 성령이 협력한다는 입장을 옹호하였으며, 정통 루터파보다는 성화와 율법의 세 번째 용법을 강조하였다. 1530년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에는 멜랑히톤의 이런 입장이 많이 나타나며, 후대에 그는 일치신조의 입장으로 돌아갔다. 이 일로 해서 루터파의 성령론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일치신조(Formula of Concord, 1577)는 멜랑히톤파와 깔뱅파와 로마 카톨릭의 입장을 배제하고 회심에서와, 중생 이후의 인간의 의지에 대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고 성령이 신자와 협력하신다고 하였다.
4. 17,18세기의 성령론
17,18세기의 성령론은 슬프게도 개혁자들의 가르침으로부터 후퇴하고 말았다. 이것은 성령과 그의 사역을 불필요하거나 믿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였던 여러 가지 운동들에 기인하고 있었다. 그런 운동들 가운데 하나가 개신교 스콜라주의였다. 이것은 루터교에서, 특별히 필립 멜랑히톤(Philipp Melanchthon)의 저작들에서 그것의 영감을 이끌어내었던 분파 속에서 발견되었다. 일련의 교리적인 논쟁들이 발생하게 되었을 때, 신념들을 좀 더 명확하게 정의하고 다듬는 일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서 믿음은 점차로 바른 교리(recht Lehre)로서 생각되게 되었다. 성경의 역할에 대한 좀 더 기계적인 견해가 개발되었고, 그 결과로서 성령의 증언이 무시되는 경향이 있게 되었다. 권위의 토대로서 간주되었던 것은 이제 성령이 없는, 말씀 뿐이었다. 체험보다는 믿음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서 간주되게 되었기 때문에, 성령은 점차로 무시되었다. 성령론은 별개의 주제로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의 사역은 종종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논의들 속에 덧붙여진 몇 마디의 짧은 논평 속에서 다루어졌다.
더욱이 문제가 된 것은 성령의 역사보다는 인간의 자유 의지가 구원문제를 결정한다고 주장하였던 화란의 알미니우스(Arminius, 1560-1609)에 의해서 제기된 알미니안주의 신학이었다. 알미니우스는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은총이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1618-1619년에 도르트(Dortrecht)에서 열린 개혁교회 총회는 개혁자들의 입장을 재확인하였으나, 알미니안주의는 화란과 프랑스에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또한 이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없이 성령의 직접적인 계시에 의존하려는 왜곡된 신비주의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태리에서 시작된 인본주의에 근거를 두고 나타난 합리주의(영국의 이신론, 독일의 자유주의신학, 프랑스의 개신교, 루터파 합리주의 등)에서는 인간의 이성이 최고의 표준으로서 설정되었다. 처음에는 이성이 기독교의 모든 신념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점차로, 그러한 관념은 만약 믿음이 받아들여져야 한다면, 그것은 이성에 의하여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원리로 변경되었다. 합리적인 증거에 의하여 확립될 수 있는 것들만이 신뢰를 받을 수 있었다. 하나님이 삼위일체라는 사실, 즉 신적인 성령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은 자연에 대한 고찰로부터는 증명될 수가 없다. 여기에서 더 중요한 국면은 하나님이 인간의 삶에서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간주되게 되었던 이신론의 등장이었다. 이신론(理神論)이 증가함에 따라, 이것은 인간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묘사를 직접적으로 부인하거나 혹은 적어도 그것의 중요성을 약화시켰다. 이신론자들은 성경을 부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과 맺고 계시는 성령의 역사를 아울러 부인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성령에 대한 교리도 크게 무시되었다.
그러나 16-17세기에 일어난 영국의 청교도 운동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과 중생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였다. John Owen(1616-1691)의 『성령론』에서는 개혁주의적인 성령론이 잘 나타나 있다(참고: 개혁주의 성령론, 이 근수 역, 여수룬 간). 독일에서는 슈페너(Philip Spener, 1635-1707)의 주도하에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 성령론과 영적 생활에 대한 관심을 크게 고조시켰다. 이 운동의 여파는 스칸디나비아의 나라들과 미국으로 퍼져나갔으며, 영국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John Wesley, 1703-1792)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웨슬레가 주로 교회를 중심으로 복음전도 운동에 힘썼다면, 죠지 휫필드의 부흥운동은 대중적인 집회를 통한 전도운동에 힘썼다. 그 역시 성령에 대한 관심을 부흥시켰으며, 그의 부흥 운동은 미국으로 전파되어 미국의 영적 각성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웨슬레는 중생에 있어서의 성령의 사역과 신자 안에서의 성령의 증거의 사역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성화의 문제에 대하여 대단히 크게 강조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초에 일어나는 일차적인 회심과 중생의 사건(제 2의 은총)과 별개로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나는 성화의 특별한 사역(제 2의 은총)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웨슬리는 “성령의 세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 사건을 오순절주의자들이 나중에 “성령세례”라고 불렀던 것과 매우 유사한 성령의 특별한 활동으로서 생각하였다. 루터와 깔뱅과는 달리, 웨슬리는 신자들 스스로가 성령의 활동을 야기시키는 일을 도울 수 있다고 말하였다. 또한 그는 크리소스톰의 신학을 애호하여 구원에 있어서의 인간의 능력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 생에서 그리스도인이 즉각적인 완전 성화를 이룰 수 있다고 하여, 성령론에 대하여 오늘까지 계속되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5. 19, 20세기의 성령론
19세기 초반과 중반에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영향으로 성령론이 약화되어 있었다. 독일의 낭만주의는 성경적인 성령론을 약화시키고 인간의 감정에 집중하였다. 특별히 프리드리히 쉴라이에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에게서와 같이, 종교적 낭만주의는 종교가 신념들(교리들)이나 행동(윤리)의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외적인 권위에 의하여 전달된 교리들을 받아서 검토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감정, 특별히 ‘절대 의존의 감정’이 종교의 본질을 구성한다. 믿음에서 감정으로 종교의 중심이 옮겨지면서, 교리들은 버려지거나 재정의되어졌다. 쉴라이에르마허는 성령을 “도덕적인 인격으로서의 기독교적인 교제의 매우 중요한 일치”로서 정의하였다. 그는 성령을 모든 신자들이 갖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종교적인 의존의 감정이라고 주장하여, 성령의 인격성을 약화시키고 부정하였다.
알브레히트 리츨(1822-1889)은 기독교의 윤리적인 측면과 도덕적인 가치 판단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성령론이나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전반적으로 성령론이 약화되었다. 대학 강단에서는 여전히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을 중심으로 해서 성령론이 무시되거나 약화되는 경향이 20세기에도 계속되었다. 오늘날의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령의 인격성에 대한 성경의 입장을 떠나 하나님의 초월성과 인격성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내재성만을 강조하였다. 그들의 신학에서 성령은 단순히 이 세상에서의 신적인 영향의 나타남이며, 하나님을 자연과 동일시하는 범신론적 개념과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의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과 더불어 성령론에 대한 관심이 개혁주의 진영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나, 이 때의 관심은 성령론 보다는 자유주의가 약화시켰던 ‘하나님의 말씀’과 ‘기독론’에 대한 관심을 다시 일깨운 것이었다. 바르트는 자유주의 토양에서 배운 결과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을 받아들였으며, 계시관도 정통주의와는 달랐으나,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였고 나름대로 성령론을 다시 부흥시켰다.
그는 필리오케(filioque)에 대해서는 서구전통을 충실히 따랐으며, 성령을 창조주로서 보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성령에 의해서 실현되는 삶이라고 하였다. 바르트의 성령론은 기독론적인 성령론이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 사건은 계시의 객관적 현실이고, 성령의 역사는 계시의 주관적 현실이다. 그는 성령의 사역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한정시킴으로써, 성령을 세속적인 영과 구분하는데 공헌하였으며, 성령의 역사를 신비주의와 구분하였다. 바르트는 성령을 하나님과 적대 관계에 있는 인간을 그리스도안에서 화해시키시는 은혜의 영으로 이해하였다. 즉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사역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말씀 안에서 성화의 사역을 통하여 인간과 하나님을 화해하게 하시는 기능을 행하시는 분으로서 성령을 이해하였다. 성령을 그리스도의 구속을 인간에게 적용하시는 구속주로서 보았고, 성령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자들의 새로운 삶의 신적인 행위자로서 믿었다.
그러나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영을 교회의 선포 속에서만 역사하는 영으로 제한하였고, 우주적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보편적인 사역을 간과하였다. 그는 성령의 절대적인 신성을 믿었으나, 성령을 신의 자아관계적 존재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를 연결하시는 분’(‘그는 아버지와 아들의 함께 하심이 성령이다’라고 주장하였다--KD I/1, p. 492)으로 이해하면서 성령의 고유한 실체를 약화시키는 것처럼 보였고, 또한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존재 양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양태론이라는 의혹을 불러키기도 하였다. 그에 의하면 성령은 세 번째 위격되심을 인정하지 않고 성령을 한 신적 주체의 세 번째 존재양식이었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성경의 위격성을 약화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 바르트의 영향을 받은 헨드리쿠스 베르코프 역시 성령의 위격성을 약화시키고 있다. 그는 1964년 펴낸 『성령의 신학』에서 바르트의 초기 양태론적인 성령론을 받아들였다. 성령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주체에 대한 술어이다. 성령은 활동하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는 성령을 활동하는 성부 하나님과 활동하는 그리스도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그는 바르트가 말한 신적 주체의 세 번째 존재양식이라는 개념을 포기하고 아버지와 아들의 이위일체를 주장하면서 성령을 이 이위의 활동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1975년에 펴낸 『기독교 신앙론』에서는 단일론적인 성령론으로 넘어가서 성령을 한 분 하나님의 활동 양식으로 이해하였다. 이렇게 해서 삼위일체론을 해체하며 성령의 인격성을 부인하고 있다. 20세기 초반의 화란의 개혁신학자인 아브라함 카이퍼와 구 프린스턴 신학교의 벤자민 워필드는 오순절 이후에는 성령의 은사와 기적 활동이 그쳤다고 주장하여 개혁교회 전통에서 성령의 역동적이고 활동적인 이해가 약화되고 논의되지 못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부정적인 이해는 오늘날의 개혁신학자인 칼빈신학교의 교수였던 Anthony Hoekema와 웨스트민스터의 신약교수인 Richard Gaffin, Jr.에게도 이어지고 있다. 영국의 존 스토트와 제임스 패커 역시 이러한 이해를 이어받고 있다. 이들의 신학사상을 이어받았던 박형룡이나 이종성 같은 이들도 오순절적인 성령은사운동과 기적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하였다. 박윤선 목사는 시종일관 이런 견해를 견지하다가 1980년 이후에는 성령의 계속적인 사역을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에는 오늘날에도 지속되는 성령의 계속적인 활동에 대한 바른 인식을 제공해준 차영배 교수의 성령론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유럽 대륙에서 전개되던 성령의 역사와 성령론에 대한 관심의 약화와 무시에도 불구하고 영국, 아일랜드, 미국에서는 1856-1859년과 그 이후로 영적인 부흥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미국의 서부 개척지대의 부흥운동은 기독교의 특이한 형태를 유지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체험의 직접성과 회심이 크게 강조되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한 명확한 결단을 내려야 할 필요성이 부흥운동의 영적 지도자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간직되었다. 회개와 회심은 기독교 신앙에 이르는 이러한 접근 방법에 있어서 으뜸가는 단어들이었으며, 성령은 회개와 신생을 야기하시는 유일한 분으로 이해되었다. 이들 부흥 집회에서는 사도행전에서 보도되는 것과 같은 성령의 특별한 활동들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강력한 감정적인 특성들이 이 복음 전도 집회들을 특징지었다. 영국의 케직(Keswick)운동과 미국과 유럽에서의 무디(D.L.Moody)의 사역은 성령에 대한 큰 관심을 고조시켰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스미턴(Smeaton)과 커밍스(J.E.Commings), 모올(H.C.G.Moule), 심슨(A.B.Simpson), 보간(Vaughan)의 성령론이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해서 19세기 말에, 성령에 대하여 실제로 신학에서 현저한 역할을 부여할 수 있을 만한 큰 발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는 오순절 성령운동의 탄생이다. 일찌기 1896년에 노쓰 캐롤라이나(North Carolina)에서 외국어나 방언을 말하는 어떤 움직임들이 있었다. 미국 캔사스(Kansas)주, 토페카(Topeka)에서, 조그만 성경 학교의 교장이었던 챨스 파햄(Charles Parham)은 학생들이 성령의 세례에 관한 주제에 집중하는 일정한 기간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파햄이 돌아왔을 때, 그들이 한가지로 내린 결론은 회심과 신생에 이어서 성령의 세례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과,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사람이 이 은사를 받았다는 사실의 표시임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1901년 1월 1일에 아그네스 오즈만(Agnes Ozman)이라는 학생은 파햄이 성경의 방식대로 그녀에게 안수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녀가 기도하고, 파햄이 안수하였을 때, 성령이 내려왔고 그녀는 자신이 알지 못했던 몇가지 방언으로 계속해서 기도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역시 은사를 받았다. 이것이 바로 현대 오순절 운동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오순절운동의 실제적인 발현은 흑인 성결운동 설교자인 윌리암 세이무어(William J.Seymour)에 의해서 조직된 집회들에서 일어났다. 이 집회들은 로스엔젤레스의 아주사街(Azusa Street) 312에 있던 이전(以前)의 감리교회에서 개최되었으며, 그 결과로서 아주사가(街) 집회들로서 언급되게 되었다. 이러한 시작에서부터, 오순절 현상은 미국 전역과 다른 나라들로, 가장 현저하게는 스칸디나비아로 퍼져 나갔다. 최근에, 이러한 유형의 오순절 운동은 라틴 아메리카와 다른 제 3 세계 국가들에서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여러 해 동안 오순절 운동은 기독교 내에서 상대적으로 분리된 요소였으며, 대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보다 낮은 계층에 속해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교파들에서 발견되었다. 그들의 예배는 매우 극적인 것이었으며, 일정한 집단들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할 뿐 아니라, 치유와 축사(逐邪)를 포함하였다. 그들의 예배는 주요한 교파들의 예배와는 상당한 대조를 이루었다.
오순절 성령운동의 두 번째 단계는 1950년대에 시작된다. 1950년대 초에 이르게 되자 감독교회와 루터교회, 그리고 심지어는 카톨릭 교회에서도, 성령의 활동의 특별한 조짐들과 방언이 강조되는 신오순절 성령운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오순절운동이나 성령운동으로 불리어질 수 있는 이러한 운동과 20세기 초에 나타나서 지금까지 계속되는 옛 오순절운동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들이 존재한다. 후자의 구성원들이 주로 보다 낮은 사회경제적 계층들에 속해 있는 일정한 교파적인 단체들을 형성하였다면, 신오순절운동은 중간 계층과 중상류 계층들로부터 많은 참여자들을 이끌어내는 좀더 초교파적인 운동이었다. 리차드 니버(H.Richard Niebuhr)의 분류에 의하면, 오순절운동은 “종파”(sect)로서, 신오순절운동은 “교회”로서 불리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집단들은 또한 그들의 카리스마적인 은사들을 실천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다르다. 옛 오순절 집단들에서는, 다수의 회원들이 동시에 큰 소리로 말하거나 기도한다. 이것은 소수의 사람이 자신들의 개인적인 기도시간에만 은사를 사용하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사실이 아니었다. 은사의 공적인 표명은 회중의 전체 예배에서 보다는 대개 특별한 집회나 모임에서 이루어졌다.
1980년에 들어오면서 새로운 성령운동의 흐름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제 3의 물결’로 불리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제 3의 물결은 전통적인 성령세례라는 표현보다는 성령충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신학에 기초하여 능력 전도를 강조하며 교회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제 3의 물결’은 성령의 세례를 교회에 입교하는 1회적 사건으로 본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개혁신학의 입장을 따르고 있으며, 중생후에도 지속적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오순절 성령운동은 첫 번째나 두 번째에서는 방언이나 치유의 은사와 기적을 강조하였던 반면에, 세 번째 물결은 능력전도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성령충만을 강조하였다. 세 가지 단계가 다 구원의 서정에서의 성화와 관련된 성령의 사역을 무시하거나 약화시키고 있다. 이런 점은 전통적인 개혁교회가 갖고 있던 성령에 대한 이해와는 다르다. 개혁교회 성령이해가 오순절 성령운동에서 발견된 새로운 성경적 요소들을 통합해야 한다면, 오순절 성령운동 역시 전통적으로 개혁교회가 견지하고 있던 교회와 신자의 구원의 서정 및 성경의 영감과 기록과 관련된 성령의 역사를 통합하여야 할 것이다. 개혁교회 신학자들 중에서 G.C.Berkouwer는 그의 교의학 시리즈의 하나인 “하나님의 섭리”론에서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성령의 은사 및 기적과 관련된 지속적인 역사를 강조하였다. 총신대의 차영배는 개혁교회 신학자로서 오순절 성령 은사 운동과 관련된 성령의 지속적인 역사를 성경에 근거하여 창조적으로 수용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초대 한국교회의 평양신학교의 교수였던 Reynold와 Robb의 성령에 대한 이해와 연속된다. 1907년의 한국교회의 대부흥운동 역시 이러한 성령의 역동적인 활동에 대한 이해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칼뱅에게서 보여졌던 것처럼 은사와 기적 등과 관련된 인격적인 성령의 부으심과 충만케 하시는 지속적인 활동을 성경에 근거하여 바르게 수용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