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딜리아니의 작품 세계 / [여인과 아이들] Amedeo Modigliani(伊, 1884~1920)
에콜 드 파리의 전설과 모딜리아니
1884년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피렌체 남쪽의 작은 항구 도시 리보르노에서 아버지 플라미니오 모딜리아니, 어머니 에우제니아 가르신의 네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부유한 유태인이었고, 모딜리아니는 자신이 유태인이란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후일 잔느 에뷔테른느와의 결혼에는 이 문제가 극심한 반대의 사유가 되었지만), 초등학교 시절의 모딜리아니는 그림에 뛰어난 소질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천재성을 질투라도 하듯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해 폐결핵을 앓을 만큼 잔병치레를 많이 했다. 10살에 늑막염을 앓고, 14살 때에는 장티푸스와 폐렴 때문에 중학교 과정을 중퇴하기까지 했던 모딜리아니는 그 후 미켈리 밑에서 미술을 공부하던 중, 17살 되던 해에 다시 폐결핵이 생겨 요양한 후 어머니와 함께 로마와 카프리, 나폴리, 피렌체 등지의 미술관을 여행하며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에 대한 교양을 쌓았다.
그는 문학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단테(Dante), 페트라르카(Petrarch), 레오파르디(Leopardi), 카르두치(Carduchi), 다눈치오(Dannunzio) 등 이탈리아 위대한 고전 시인과 니체, 쉘리, 보들레르, 말라르메, 랭보, 로트레아몽 등의 시를 줄줄 암송하곤 했다고 한다. 그에게 이탈리아는 자신의 작품의 원천이자 영감이었던 셈이다.
1906년 22세의 나이로 처음 파리에 도착한 모딜리아니에게 프랑스 파리는 전혀 새로운 곳이었다. 그만큼 당대의 파리는 세계 예술계의 1번지로서 모든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1907년 세잔느의 회고전을 보고 커다란 감동을 받는다.
일찌기 화가 세잔이 세상의 모든 것 “자연은 구형·원통형·원추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라는 견해로 자연을 단순화된 기본적인 형체로 집약하여 화면에 새로 구축해 나가는 자세를 주장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모딜리아니의 모든 회화에 나타나는 단순하고 우아한 선의 아름다움은 사실상 이때 결정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08년 처음으로 <유태 여인> 등 유화 여섯 점과 데생 한 점을 앙데팡당 전(展)에 출품하였다. 다음해에는 조각가 브랑쿠시와 조각 제작을 시도하여 원시 흑인 조각과 브랑쿠시 풍의 간결한 조형 양식을 흡수 발전시킨 독자적 조각 작품을 만들었지만 그의 허약한 체력과 병약한 폐는 조각에 전념할 수 없도록 했다.
그는 1913년 몽파르나스로 옮겨 에콜 드 파리의 화가들과 키슬링, 수틴 등과 사귀었다. 그 자신이 '에콜 드 파리(파리파)'의 뛰어난 작가로서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많은 걸작을 남겨 대표적인 화가로 손꼽히게 된다.
그러나 그에게 프랑스는 다른 화가들에게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낙원만은 아니었다. 파리에는 그처럼 그곳만의 예술적 숨결을 느끼기 위해 몰려든 각국의 예술가들이 있었다. 이들을 일컫는 말이 '에콜 드 파리'다. 그곳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모딜리아니는 이방인이었고, 보헤미안이었다.
예술적 성취에 대한 초조함, 경제적 불안정, 그리고 선천적으로 허약했던 몸은 그를 술집에서 술집으로 전전하며 자신의 삶과 건강을 소진하게 했다. 그는 항상 가난했지만 자신의 자존심만은 팔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모딜리아니의 초상화-고독으로 꽃 피운 사람들
모딜리아니의 작품은 주로 인물화 그것도 초상화에 집중되어 있다. 그림의 소재로 인간이 등장한 것은 회화의 역사와 같다고 해도 좋을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화가가 대상인 사람을 특별히 신격화하거나 신성으로 치장하지 않아도 된 시점은 그리 오래지 않다.(그것은 서양에서는 근대 자본주의의 성장과 궤를 같이 한다.) 물론 모딜리아니는 많은 누드화를 남기고 있지만 그에게 있어선 누드화 역시 초상화의 범주에 넣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작품 속에 그려진 인물들은 한 눈에 봐도 특이한 형태로 그려져 있다. 많은 평자들이 그의 초상화에 대한 양식을 논하고 있으므로 이 자리에 긴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앞서 말한 대로 그의 회화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우하고 부드러운 선과 아프리카 원시 미술의 때묻지 않은 단순한 형태와 색채, 세잔의 영향, 자신이 직접 겪으며 마주 대해 온 모델과의 관계 속에 꽃 피운 작품 양식이다.
말로는 이렇게 단순화시켜 그의 그림이 무슨 영향을 받아 어떻게 형성되어 왔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의 화풍을 이렇게 단순화하는 것은 치명적인 위험이 따른다. 왜냐하면 모딜리아니의 초상화는 모딜리아니 이외의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보적인 것이자 모델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내면 세계를 화폭 위로 옮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만의 양식이 담긴 인물 속에 모델들의 심리적인 상태를 표현함으로써 오늘날 위대한 화가로 평가받는 것이다.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보면 문득 그의 그림이 식물성이란 생각이 든다
어쩐지 그의 초상화들은(누드화를 포함해서) 한결같이 난초 혹은 베고니아 화분을 닮은 걸까?(이건 순전히 저의 생각입니다만)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의 초상화에는 눈동자가 빠져 있거나 아니면 한쪽 만 그려져 있거나, 그도 아니면 무언가를 꿈꾸는 듯한 표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을 느끼게 된다.(누구는 이걸 술병이라고 표현하지만)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한결같이 생활이 거세된 채 표현된다.(아니 생활이 거세되었다기 보다 모딜리아니 자신이 생활이란 걸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거나 아니면 일부러 누락시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생의 무게까지 제거된 것은 아니라는데 그 통증의 원인이 있지 않을 성 싶은데…. 그의 그림 속에 생의 공허와 외로움이 묻어나는 까닭 같은 것 말이다.
그의 초상화에 등장하는 모델들은 대부분 화가와 친분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모딜리아니 자신이 모델을 살만큼 돈이 없었던 탓도 있겠지만 그만큼 그는 모델과의 심리적인 교감을 중시했다. 예전에 장선우 감독의 영화 중에 <나쁜 영화>란 영화가 있었는데 이 글을 읽는 분 중에서도 말많았던 그 영화를 기억하는 분들이 계시리라. 이 영화를 보고나서 한참이나 욕지기가 나서 애먹은 적이 있다.
나는 그 영화를 보고 나서 장선우 감독을 떠받드는 이라면 평론가들까지 싸잡아 믿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논란의 여지는 있겠으나 미학적인 완성도 자체가 형편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판단을 내리게 된 나름의 원인을 찾자면 다음과 같다. 사진과 영화의 공통점은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도구로서의 렌즈는 물리적이고, 광학적인 특성을 갖는다. 하지만 그 도구를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는 것도 사람이요, 그 대상도 역시 사람이다. 따라서 렌즈를 통해 본 세상 역시 한 인간의 모습을 닮고 담아내게 된다.
그런데 장선우 감독의 영화를 보고난 뒤의 내 느낌은 그의 영화(실제 다큐멘터리와 유사한 제작 과정을 거쳐 제작되었다는) 어디에도 렌즈를 통해 바라본 대상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가 그의 영화를 보면서 욕지기를 느낀 것은 어떤 개구장이 악동의 탐욕스럽고 호기심어린 시선이 배우들과 길가의 행려, 노숙자들을 줄곧 몰아세우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딜리아니는 대상이 비록 가난하고, 보잘 것 없더라도 모델의 삶과 인생을 가까이 지켜봐 온 사람으로서 자신의 작품을 통해 모델과 대화를 나눈다. 차가운 시선이 아니라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한 마음으로…. 천국에서도 당신의 사랑이 되어 드릴께요.
모딜리아니는 선천적으로 병약했으나 예술적 성공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불태웠다. 그럼에도 생전에는 폴 기욤, 즈보로브스키 등 일부 화상(畵商)이 원조했을 뿐, 세상의 인정을 받지는 못했다. 그는 가난 속에 과음과 방랑을 일삼다가 1920년 초 불과 36세의 나이로 파리의 자선병원에서 짧은 일생을 마쳤다.
그런 그의 인생에 빼 놓을 수 없는 두 명의 인물이 있었으니 그 중 한 명은 폴란드 출신의 시인이자 화가였던 레오폴드 즈보로프스키와 모딜리아니의 영원한 사랑 잔느 에뷔테른느였다. (잔느 에뷔테른느는 엄격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태인인 모딜리아니와 결혼한다. 3년간의 결혼 생활을 통해 한 명의 딸을 두었다. 둘째 아이를 가진지 9개월만에 남편 모딜리아니가 죽자 그와 함께 영원히 함께 하는 반려자가 된다.)
즈보로프스키와 모딜리아니의 관계는 마치 빈센트 반 고흐와 동생 테오와 같았으며 그 관계는 친구 이상으로 진한 것이었다. 즈보로프스키는 모딜리아니를 자신의 아파트에서 작업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그의 예술에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 주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모딜리아니의 영원한 사랑 잔느 에뷔테른느이다. 19세의 미술학도였던 잔느는 33세의 모딜리아니를 만나 그의 반려자가 되었다. 잔느는 생활의 반려자일 뿐만 아니라 그의 예술의 숨결 같은 존재였다. 이듬 해 잔느는 딸을 낳는다. 모디는 딸의 이름을 사랑하는 아내의 이름을 따서 잔느라고 지었다.(이 딸 잔느가 후일 성장하여 미술사가가 되어 모딜리아니 연구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자료들을 모아 만든 평전 <모딜리아니: 인간과 신화>의 저자이다.) 이 시기가 모딜리아니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때였다.
1919년 무렵 모딜리아니는 파리에서 화가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잔느는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좋아진 상황과 한 아이의 아버지라는 처지에도 불구하고, 모디는 작품에 대한 열정과 끝없는 음주벽을 놓지 못했다.
모딜리아니의 그림 <잔느 에뷔테른느>(1919년작)는 이때에 그려진 것이다. 임신한 잔느의 모습은 왠지 처연하다. 그 눈동자 없는 눈은 그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담아 슬프게 바라보고 있는 듯 하다.
"천국에서도 당신의 아내가 되어 줄 께요…"(이때 이 두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말하는 많은 전설같은 이야기들이 남아 있는데 일설에는 모딜리아니가 자신의 아내인 잔느에게 "천국에서도 나의 모델이 되어달라."고 했다는 말도 있고, 잔느가 "천국에서도 당신의 아내가 되어 주겠다."고 말했다는 설도 있지만 확인되지 않은 것들이다. 다만 가톨릭 교육을 받고 자란 임신 9개월의 여자가 남편을 따라 투신자살한 사건은 인간도 동물인 이상 뱃속의 아기를 지켜야 한다는 모성 본능을 초월한 일대 사건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들 부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전설이 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다음은 그의 죽음의 과정을 소설투로 옮겨 본 것이다.)
1920년 1월 겨울 어느날, 모디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으로 추정되는 자화상을 완성시켰다.(20세기 최고의 초상화가로 꼽히는 그이지만 특이하게도 자신의 자화상은 거의 남기지 않았다.) 그는 얼음장 같이 찬방에서 피를 토한 채 쓰러져 있었다. 그 옆에는 만삭의 잔느가 웅크리고 앉아 죽어가는 모딜리아니를 조용히 바라본다. 하지만 그녀 자신이 모딜리아니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잔느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침대 주변에는 몇 개의 빈 포도주 병과 반쯤 얼어버린 정어리 통조림이 뒹굴고 있었다.
친구들이 달려와 이 모습을 발견하고는 곧 병원으로 옮겼으나 모딜리아니는 세상을 떠나 버린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천국에서도 당신의 아내가 되어 줄께요." 라고 전설처럼 말했다는 잔느 에뷔테른느 역시 임신 9개월의 몸으로 자신의 양친의 집 6층 창에서 투신 자살한다. 그의 아기는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울음소리를 토해내지 못한 채 부모의 뒤를 따랐다.
모딜리아니의 형 임마누엘은 그를 "왕자처럼 묻어달라."고 전보를 보내왔다.
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 에콜 드 파리는 '파리파'라는 뜻으로 제1차 세계 대전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 파리의 몽파르나스를 중심으로 활약한 주로 외국인 화가들의 총칭이다. 제1차 대전 전후, 파리에는 많은 외국인 화가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중 이탈리아의 모딜리아니, 러시아의 샤갈, 네덜란드의 반 동겐, 독일의 에른스트, 스페인의 피카소, 미로 등이 대표적인 작가이다. 파리파는 특별히 공통되는 주의나 양식이 없이 제각기 독자적인 양식을 추구하며 활동했기 때문에 20세기의 어떤 이즘이나 유파와는 성격이 다르다.
모딜리아니, 샤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
모딜리아니, 샤갈, 수틴, 파스킨, 키슬링, 등이 모두 유태계 화가였기 때문에 애수를 띤 우울한 정서를 보여주었으며, 그 중 샤갈은 러시아의 민담이라든가, 유태인의 속담과 신비적인 전설 등을 주로 그렸다. 감상적이며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이 그들의 공통점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파리파는 해체되었다.
잔느 에퓨테른느(Jeanne Hebuterne)
Jeanne Hebuterne in a Large Hat, 1918
여기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져있는 모딜리아니의 작품인 ‘큰 모자를 쓴 잔느 에퓨테른느(1917)'의 주인공인 잔느 에퓨테른느(Jeanne Hebuterne; 1898~1920)는 모딜리아니와 사랑에 빠졌던 여인이다. 그림을 배우려고 몽파르나스로 온 그녀는 모딜리아니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칸느에서 열리는 축제에서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리고는 조그만 셋방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두 사람의 결합은 잔느 가족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동거는 계속되었고 예쁜 아기도 탄생했다. 그들은 정식적으로 결혼 신고를 하지 않은 상태였으며 모딜리아니는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모딜리아니는 다른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1918년 폴 기욤이 모딜리아니를 비롯하여 피카소, 마티스 등의 작품을 모아서 전시회를 열었고 호평을 받게 되었지만 이들의 어려운 생활은 계속되었고, 둘째를 임신한 잔느는 결국 생활이 너무 어려워 친정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항상 신경이 날카로와져있는 모딜리아니의 힘겨운 생활이 계속되었으며 런던에서 열린 모딜리아니의 전시회로 그의 초상화가 좋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지만 이미 건강은 극도로 좋지 않은 상태였다. 결국 모딜리아니는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결핵성 뇌막염으로 요절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잔느는 친정집 5층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하였는데 당시 그녀는 임신 9개월째였다.
임종 당시 모딜리아니는 친구에서 ‘죽어서 다시 만나 행복하게 영원히 살자.’는 말을 잔느에게 전해주기를 부탁했다는 말이 있다. 그의 장례식에는 파리 시민들이 긴 행렬을 이루었지만 잔느의 집에서는 잔느를 파리의 변두리에 그냥 묻어버렸고, 나중에야 모딜리아니의 어머니 부탁으로 두 사람은 함께 묻힐 수 있었다.
이 그림에서 길게 늘어뜨려져 있는 여인의 얼굴과 목, 그리고 약간 비뚤어져 있는 여인의 눈은 작품을 보는 사람들에게 금방 잊혀지지 않는 끈끈한 그 무언가를 전해준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작품 주인공들의 표정은 그의 섬세함을 그대로 표현해준다. 타원형의 몸과 타원형의 얼굴, 그리고 긴 목... 슬퍼 보이면서도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과 표정에서 우아한 고전미란 이런 것이라는 그런 생각도 들게 한다. 현재 모딜리아니의 작품들은 뉴욕의 구겐하임 뮤지엄,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등에 전시되어 있다.
Alice, 1918
Boy in Short Pants, 1918
Dark Young Woman Seated by a Bed, 1918
Germaine Survage with Earrings, 1918
Girl in a Sailor's Blouse, 1918
Girl on a Chair, 1918
Girl with Braids, 1918
Gypsy Woman with Baby, 1918
Jeanne Hebuterne, 1918
Jeanne Hebuterne in a Large Hat, 1918
Little Girl in Black Apron, 1918
Little Girl in Blue, 1918
이 작품은 모딜리아니와 잔느 사이에 여자 아이가 생기기 얼마 전에 그려진 것이라고 한다. 웨르나의 해석에 의하면 모딜리아니는 몽파르나스의 이웃에 살고 있는 하층 계급의 어린이들을 좋아했다고 한다. 이 꼬마아이는 고운 옷을 입고 있는데 아마 단벌 옷일 것이다. 소녀의 얼굴은 밝지도 쾌활하지도 않다.
그녀의 표정은 훨씬 연상의 다른 모델들의 경우처럼 쓸쓸하고 체념마저 느껴진다. 이 소녀는 천진 무구하지만 애처로움이 소리 없이 흐르고 있는 화면을 통해 우리는 모딜리아니의 진심을 엿볼 수 있으며, 서민에 대한 깊은 애정을 함께 느낄 수 있다. [평론가 웨르나의 해석]
Lunia Czechowska, Left Hand on Her Cheek, 1918
Marie Daughter of the People, 1918
Portrait of Anna, 1918
Portrait of Jeanne Hebutern, 1918
Portrait of Jeanne Hebuterne, 1918
Portrait of Jeanne Hebuterne Seated in an Armchair, 1918
Portrait of Jeanne Hebuterne Seated in Profile, 1918
Portrait of Madame Survage, 1918
Readhead Wearing a Pendant, 1918
Red Haired Girl, 1918
Seated Young Woman, 1918
Seated Young Woman, 1918
The Beautiful Grocer, 1918
The Black Dress, 1918
The Boy, 1918
The Son of the Concierge, 1918
Woman in a Red Necklace, 1918 Woman with a Green Necklace, 1918 Young Girl in a Black Apron, 1918
Young Girl in Beret, 1918 Young Girl Seated, 1918 Young Peasant, 1918 Young Redhead in an Evening Dress, 1918
The Servant Girl(La jeune bonne), 1918 농촌에서 도회지로 온 처녀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녀라는 직업이다. 하루 종일 허름한 옷차림으로 근면하게 일 해야만 되는게 이들의 인생이었다. 특히 유럽 인들의 사람 씀씀이는 고약할 정도로 가차 없고 지독하다. 그러나 그녀들은 이러한 일들, 어린애를 돌보고 주부의 잔심부름을 도맡고 하는 것을 묵묵히 감당해 낸다. 이들을 프랑스 말로 본느라고 부른다.
인생의 뒤안길에서 살고 있는 애환의 표정들, 모딜리아니는 이러한 이웃을 사랑했고 그가 즐겨 그린 서민의 한 표정을 그녀는 대표하고 있다. 이 모델은 카뉴슐멜 출신이며, 마리훼레라는 이름의 처녀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농부였으며, 이 젊은 처녀의 삶을 모딜리아니는 공감했고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 [평론가 웨르나의 해석] Young Woman in a Yellow Dress, 1918
Portrait of a Young Woman, 1918~19
Portrait of a Young Woman, 1918~19
The Singer from Nice, 1918~19
Annie Bjarne, 1919
Girl with a Polka-Dot Blouse, 1919
Hanka Zborowska, 1919
Portrait of Jeanne Hebuterne, 1919
이 그림은 2004년 소더비 경매에서 3,130만달러(347억 6,000만원)가 넘는 가격에 익명의 입찰자에게 팔렸다. 너의 영혼을 알게될 때 눈동자를 그릴 수 있어... 1919년 무렵 모딜리아니는 파리에서 화가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잔느는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좋아진 상황과 한 아이의 아버지라는 처지에도 불구하고, 모딜리아니는 작품에 대한 열정과 끝없는 음주벽을 놓지 못했다.
Jeanne Hebuterne, 1919
Jeanne Hebuterne in a Hat, 1919
Jeanne Hebuterne in a Scarf, 1919
Jeanne Hebuterne in a Yellow Jumper, 1919
Jeanne Hebuterne with White Collar, 1919
Little Serving Woman, 1919 Lunia Czechowska, 1919 Madame Lunia Czechowska with a Fan, 1919 Pink Blouse, 1919 Portrait of Anna Zborowska, 1919 Portrait of a Woman, 1919 Portrait of a Woman with a White Collar, 1919 Portrait of a Young Woman, 1919 Portrait of Jeanne Hebuterne, 1919 Portrait of Jeanne Hebuterne, 1919 Portrait of Jeane Hebuterne, Left Arm behind Head, 1919
20세기 초엽 인상주의 물결이 휩쓸던 유럽에는 많은 화가들이 파리에 모여들었다. 새로운 시각이 고정된 형태나 관념을 탈피해 다양한 형태(양식)로 시도되는 시기였다. 고전적인 초상화의 틀에서 벗어나 왜곡된 얼굴의 형태(유달리 길다란 목과 얼굴)속에서도 우수에 찬 표정에 담겨져 있는 인물의 심성을 그대로 보여 준다.
The Servant Girl(La jeune bonne, 1918 농촌에서 도회지로 온 처녀들...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녀라는 직업이다. 하루 종일 허름한 옷차림으로 근면하게 일 해야만 되는게 이들의 인생이었다. 특히 유럽 인들의 사람 씀씀이는 고약할 정도로 가차 없고 지독하다. 그러나, 그녀들은 이러한 일들, 어린애를 돌보고 주부의 잔심부름을 도맡고 하는 것을 묵묵히 감당해 낸다. 이들을 프랑스 말로 본느라고 부른다.
인생의 뒤안길에서 살고 있는 애환의 표정들, 모딜리아니는 이러한 이웃을 사랑했고 그가 즐겨 그린 서민의 한 표정을 그녀는 대표하고 있다. 이 모델은 카뉴슐멜 출신이며, 마리훼레라는 이름의 처녀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농부였으며, 이 젊은 처녀의 삶을 모딜리아니는 공감했고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 -[평론가 웨르나의 해석]
Little Girl in Blue, 1918
이 작품은 모딜리아니와 잔느 사이에 여자 아이가 생기기 얼마 전에 그려진 것이라고 한다. 웨르나의 해석에 의하면 모딜리아니는 몽파르나스의 이웃에 살고 있는 하층 계급의 어린이들을 좋아했다고 한다. 이 꼬마아이는 고운 옷을 입고 있는데 아마 단벌 옷일 것이다. 소녀의 얼굴은 밝지도 쾌활하지도 않다.
그녀의 표정은 훨씬 연상의 다른 모델들의 경우처럼 쓸쓸하고 체념마저 느껴진다. 이 소녀는 천진 무구하지만 애처로움이 소리 없이 흐르고 있는 화면을 통해 우리는 모딜리아니의 진심을 엿볼 수 있으며, 서민에 대한 깊은 애정을 함께 느낄 수 있다. [평론가 웨르나의 해석]
Seated Girl, Untied Hair, 1919
Seated Woman, 1919
Seated Woman with Child, 1919
Self Portrait, 1919
다른 화가들의 관례와는 달리 모딜리아니는 자화상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나는 나를 향해 마주보고 있는 살아 있는 인간을 봐야만 일을 할 수 있다.'던 이른바 '만남의 화가'여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그가 이 작품처럼 매우 조심스러운 붓 놀림으로 자화상을 그렸다는 건 후대의 사람들을 위해 다행한 일이었다. 이것이 유일한 그의 자화상이며, 1919년 작이다. 화가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모델의 인상으로 보아 1920년 1월 24일(그가 죽은 날)은 멀지 않은 것 같다. '카라 이탈리아(그리운 이태리)'를 남기고 보잘 것 없는 자선 병원의 침대 위에서 한 많은 이승을 등진다.
Thora Klinckowstrom, 1919
Woman with Blue Eyes, 1919
Yellow Sweater,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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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모딜리아니의 특징을 고스란히 감상할 수가 있어서 좋긴 한데 간간히 사진이 나오지 않네요.
이상하네. 제 컴퓨터에서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모딜리아니의 정형인 긴 목이 그의 화풍이죠.
모딜리아니의 작품은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정도로 자신만의 색깔이 너무나 뚜렷하죠.
그의 사랑도 멋져서 영화로도 만들어져 있죠.
독특한 멋을 풍기는 매력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