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탄 게츠
(1927-1991)
음악적 색채의 파도가 세상을 덮치다
스탄 게츠에게서 비로소 꽃들은 향기뿐만 아니라 빛깔을 부여받았다. 모노크롬의 부드러움이 Lester Young의 것이었다면 Stan Getz는 아름다운 빛을 불어넣어 음이 지닌 생명력을 더해주었다. 레스터 영과 콜맨 호킨스에서부터 비롯된 부드러움과 강함의 대결은 그의 전성기 때만큼은 부드러움의 완승이었다. 스탄 게츠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신비로운 호흡으로 자연 그대로의 색채감을 모든 음에 불어넣었다. 다른 연주자가 색소폰을 불 때 그는 불지 않고 노래했다. 그의 색소폰은 사람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듯했으며 그 노래는 듣는 순간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
그의 음악적 코드는 그의 삶처럼 도취와 중독이었다. 13살 때 처음 구입한 색소폰을 하루 8시간씩 2년 동안 불었다. 몇 년 후 그는 적잖은 수입을 벌어들이는 색소폰 연주자가 되었으며 곧 마약과 술과 담배에 빠져들었다. 그는 천성이 소심하고 숫기 없는 소년이었으며 그것이 레스터 영의 부드러움의 미학에 천착하게 하였는지 모른다. 그는 그곳에서 우리가 그에게서 발견한 엘도라도를 찾았다.
콜트레인이 쏟아지는 용암이었다면 그는 부드러운 흙 속에서 분출되는 따뜻한 물줄기였다. 소니 롤린스가 바위를 부수는 거대한 파도라면 그는 파랗게 흩어지는 파도의 작은 입자 같은 것이었다. 그의 연주를 듣고 있노라면 내가 그의 연주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의 연주가 나를 듣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픔, 쓸쓸함과 슬픔을 들어주고 나눠준다. 그의 음악은 저 쪽 피안의 객체가 아니라 항상 내 안에 존재해왔던 자아를 마주 보게 한다.
그는 레스터 영에게서 발전시킨 부드러움과 자신의 색채감, 그리고 농밀한 견고성을 바탕으로 한 서정적 스타일로 단숨에 스타 연주자로 부상하였다. 단언하건대 그만큼 회화적 색채감이 풍부했던 연주자는 결단코 없었다.
그의 앨범은 다작이라고 할 정도로 많지만 Chet Baker와의 앨범들은 매우 뛰어나다. 스탄 게츠와 쳇 베이커. 이런 레시피라면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1953년의 Chet Baker and Stan Getz 라이브 앨범, Stan Meets Chet(1958), 또는 1983년의 Stan Getz/Chet Baker도 아주 좋다. 냄새만 맡아도 행복한 그런 음식을 먹을 때의 기분이랄까. 두 사람의 호흡이 세월이 지나면서 숙성되어가는 과정을 느껴보는 재미도 있다.
웨스트 코스트 재즈의 대가중 한 명인 Gerry Mulligan과 함께 한 앨범도 수작이다. Getz Meets Mulligan in Hi-Fi(1957), Stan Getz and Gerry Mulligan(1969)이 있다. 발라드의 달인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 Cool Velvet(1960), 그가 가장 애착을 보인 Focus(1961)도 훌륭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걸작들은 보사노바 4부작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Jazz Samba>, <Big Band Bossa Nova>, <Jazz Samba Encore!>, 그리고 <Getz/Gilberto>이다. 그의 감미롭고 부드러운 색소폰 사운드는 보사노바의 애잔하고 비극적인 물결을 타고 거대한 색채의 파도가 되어 전세계를 뒤덮었다. 그래미상을 휩쓸었고 재즈 뮤지션들은 유행처럼 저마다 보사노바 앨범을 내놓았고 전세계는 보사노바의 물결로 들썩였다. 흥겨우면서 슬프고 찬란하면서 눈물겨운 보사노바의 모순의 미학이 스탄 게츠의 서정적 부드러움과 만나 발화했다. 그러나 이 역사적이고 위대한 라틴 뮤지션들과의 의기투합은 스탄 게츠가 Gilberto의 아내와 일으킨 스캔들로 인해 물거품처럼 붕괴되고 만다. 마치 그들의 음악처럼 너무나 찬란하고 아름다워서 결코 지속될 수 없는 것이었나 보다. 이혼과 전쟁과 수없는 상처를 남기고 드림팀은 뿔뿔이 흩어졌다. 엘도라도는 그렇게 몰락했다.
디오니소스적인 그의 도취와 몰입은 술과 마약을 만나 광기와 우울의 비극을 초래했다. 때때로 자제력을 잃고 광포했고 비이성적인 행동을 저질렀다. 예술사는 언제나 드라마 없는 도덕보다 비극이 가로놓인 딜레마를 선택했다. 마약과 알콜 중독, 우울증과 광포함이 그의 인생에 상처와 수치를 가져다주었지만 그의 음악만은 훼손하거나 폄하하지 않았다.
60년대 이후 부와 명성을 누리고 그래미상의 영광에 존슨, 카터 대통령의 백악관 단골 초청 연주자였으며 태국의 국왕까지 열렬한 팬이었고 침실 23개짜리 대저택을 소유하기도한 스탄 게츠였지만 그의 음악 인생의 시계는 어쩌면 1964에서 멈춰버렸는지 모른다. 시간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1991년 병마와 싸우던 그는 끝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색소폰케이스에 담긴 유해는 말리부 해안에 뿌려졌다. 절대 소유할 수 없는 아름다움은 사라져가고 인생은 빛과 슬픔으로 가득차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음악적 색채의 파도는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이다. O Grande Amor나 Samba Triste를 들으면 내 인생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너무나 찬란하고 슬픈 어떤 한 순간에 소환되는 느낌이다. 여전히 생생하고 아프다.
(Stan Getz : 1927.2.2-1991.6.6)
미국 필라델피아 태생. 테너 색소폰 연주자. The Sound라고 불렸다. 부드럽고 감미로우며 영혼을 움직이는 시적감성으로 쿨재즈의 가장 큰 별이었다.
그의 부모는 키예프에서 이민 온 우크라이나계의 유태인이었다. 그의 가족은 뉴욕에 이주하여 정착했다. 스탄 게츠는 어려서 학업에도 뛰어났지만 악기 연주에 큰 관심을 보여 13살에 아버지로부터 색소폰을 선물 받고는 하루 8시간씩 연습에 몰두했다고 한다. 16살에 Jack Teagarden 밴드에 합류했으며 1947년에는 Woody Herman 밴드의 솔리스트가 되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Lester Young으로부터 음악적 영향을 깊이 받은 그는 특유의 부드럽고 시적 서정성이 풍부한 톤을 창조했다. 회화적 색채감과 리드의 질감이 짙게 살아있는 그의 테너 색소폰 음색의 부드러운 파괴력은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1950년초 그는 이미 스타로서 이름을 떨쳤다. 그의 음반으로는 <Getz Meets Mulligan in Hi-Fi>, <With Oscar Pettiford>, <Cool Velvet>, 그리고 그 자신이 최고로 꼽았던 <Focus>등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최고의 역작은 보사노바 4부작이다. <Jazz Samba>, <Big Band Bossa Nova>, <Jazz Samba Encore!>, 그리고 <Getz/Gilberto>는 재즈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 셀러 앨범인 동시에 재즈계에 보사노바 광풍을 몰고온 일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의 중동적 성격, 마약과 술로 인한 정신적 피폐함, 통제되지 않는 우울증, 광폭함이 그를 줄곧 괴롭혔으며 위대한 연주자의 이름에 상처를 남기고 그의 연주 인생을 위태롭게 했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연주활동을 쉬지 않던 그는 간암으로 64세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마크식스 테너 색소폰을 불었으며 반도렌 미디엄 하드를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