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은 다음 달에 이미 안북도호부(안주)를 공격했다. 다행히 안북도호부는 반격에 나서 반군 박소朴蘇 등 18명의 수급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이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지나친 수탈과 학정 때문이었다. 최충헌의 뒤를 이은 최이(최우)는 탐관오리들을 유배 보내는 등 신속한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반란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최이는 토벌군에 김취려金就礪를 임명한다. 김취려는 고려에 침입했던 거란병을 무찌른 명장이다. 몽골군에게 쫓기던 거란군이 고려로 쳐들어와(1216년) 고려 전역에서 분탕질을 놓았는데, 충주까지 내려오던 거란병을 박달재에서 무찌른 이가 김취려였다. 거란군은 더 이상 남진하지 못하고 퇴각하기 시작했고, 토끼몰이하듯 이들을 몰아간 결과 평북 강동에 이들을 몰아넣게 되었다. 그런데 11월, 최후의 공세를 준비하던 고려군 앞에 낯선 군대가 나타났다.
몽골과 동진東眞(여진족 국가)의 군사 3만이었다(몽골군 1만, 동진군 2만. 금이 몰락하면서 세워진 동진은 이미 몽골에 굴복한 상태였다). 몽골원수 합진哈眞은 합동 공격을 제안했고 그 결과 1219년 정월 삼 연합군은 거란군을 공격하여 항복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사건으로 몽골은 고려를 형제의 나라(물론 몽골이 형)라고 부르게 되었다. 여기에는 김취려의 용맹과 뛰어난 풍채도 한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사로잡힌 거란인은 황무지 개척 등에 동원되었다.
이런 김취려가 등장하자 앗, 뜨거라 해버린 한순과 다지는 금나라 원수元帥를 자처하고 있는 우가하에게 항복해버렸다. 자신들이 점령한 땅을 우가하亏哥下에게 바친 것이다.
우가하는 1217년(고종4)에 동진을 세운 포선만노蒲鮮萬奴를 공격하다가 패배해서 살려달라고 압록강을 건너온 적도 있었다. 이후 고려는 우가하의 편의를 보아주며 동진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다. 그러니만큼 한순과 다지가 우가하를 꼬시려한 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우가하는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척 불러들여서는 그들의 목을 베어버렸다. 고려는 그 보답으로 은존銀尊·은반銀盤·은우銀盂 각 한 개, 은잔銀盞 두 개, 세저細紵·세주포細紬布 각 50필匹, 광평포廣平布 5백 필匹, 쌀 1천 석을 보내주었다.
이 일이 우가하의 기를 살려준 것일까? 그 후 우가하는 고려에 대해서 뻣뻣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종종 고려의 변경을 침입해서 약탈을 해갔다. 1224년(고종11)에는 우가하가 잡아간 고려인 200여 명이 고려로 돌아오기도 했다. 아마도 속량전을 바치고 풀려난 것이리라.
물론 고려도 가만 있지 않았다. 1225년(고종12)에는 우가하의 막관幕官 초주마焦周馬 등 여럿을 잡아 섬으로 유배 보내기도 했을 정도다.
1223년(고종10) 정월, 금나라 장수 우가하가 압록강을 넘어와 의주와 정주 지방을 노략질했다. 이때 우가하는 자기 군사들에게 몽골군 복장을 입혔다. 이때 의주분도장군義州分道將軍으로 있던 김희제金希磾가 우가하를 치고자 했는데, 위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노략질하는 도적 떼란 단지 그것만 충족되면 물러가기 때문에 전면전이 될 일을 벌이지 않으려는 무사안일의 소치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김희제는 그 꼴을 두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그는 갑사甲士(갑옷 입은 병사) 100명을 보내 우가하의 진영을 급습하게 했다. 아마도 야간 기습이었을 것이다.
허를 찔린 우가하는 놀라서 패주하고 말았다. 이들은 급히 압록강을 건너다 상당수가 빠져 죽고 배도 채 챙겨가지 못해서 김희제는 치중輜重을 실은 배 22척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공으로 김희제는 서북면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가 되었다.
김희제는 본래 문관이었던 모양이다. 무신정권 때는 무신이 진급이 빠르고 고위직을 지냈기 때문에 김희제는 뒷날 장군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문장력도 뛰어났으며 과단성도 있는 문무겸전의 인재였다. 몽골 사신 저고여著古與와 저가這可 등이 와서 분탕질을 놓고 있을 때 이들을 얼르고 뺨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김희제였다. 김희제의 으름장에 저가는 무릎을 꿇고 빌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이다.
1226년(고종13) 우가하는 또 변경을 넘어왔다. 이번에는 몽골군으로 변장을 하고 넘어왔다. 몽골군의 위력을 빌려 호가호위하려는 속셈이었다. 가만 보고 있을 고려군이 아니었다. 고려군은 빈집털이에 나섰다. 압록강을 넘어가 우가하의 본진인 석성石城을 공격한 것이다.
지병마사知兵馬事 이윤함李允諴은 별장 김이생金利生과 대관승大官丞 백원봉白元鳳에게 군사 200여 명을 주어 도강하게 했다. 김이생 등은 석성을 공파하고 선무부통宣撫副統 등 5명을 베고 우마와 병장을 노획했다. 이들은 우가하와는 싸우지 않고 돌아왔다. 우가하 역시 이 마당에 약탈을 할 수 없었을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이 승전에 고려군은 크게 고무 되었다. 김희제는 즉각 최이에게 우가하 공격의 명을 내려달라 주청했다. 그러나 최이는 가타부타 답을 내려주지 않았다. 이것은 중앙정부가 관여하지 않을 테니 알아서 하라는 신호였다. 김희제는 판관예부원외랑判官禮部員外郞 손습경孫襲卿과 감찰어사監察御史 송국첨宋國瞻과 더불어 우가하 공략군을 편성했다.
김희제는 우가하를 평소 못마땅하게 생각했는데,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동진군에 패해서 빌빌 대고 있을 때, 그를 살려준 것이 고려였는데 이제는 세력을 만회했다고 걸핏하면 변경의 군현을 침범하는 배은망덕한 인물이었으니까.
김희제는 스스로 중군을 맡고 손습경에게 좌군을, 송국첨에게 우군을 맡겨 보기 1만의 군사로 출정했다. 목표는 석성. 군량은 20여일 치를 준비했다. 때는 겨울이라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석성을 공격했다. 이 석성이 어딘지는 잘 모르겠다. 요나라와 석성을 경계로 국경을 나누었다는 말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변경의 요지임에는 틀림없겠다. 파속로婆速路라 불린 지역의 마지막 성이었던 모양이다. (이 대목에서 금사 전공이신 모님의 도움이 있으려나 쳐다본다)
석성이 공격 당하자 놀란 우가하가 구원군을 보내왔으나 김희제는 구원군도 무찌르고 70여 급의 수급을 얻었다. 그러자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여긴 석성의 성주가 항복을 청했다.
성주는 군사를 이끌고 나와 흙덩이를 입에 물고 다시는 침략을 하지 않겠다고 하늘에 맹세하며 울부짖었다. 이에 김희제는 우가하의 배은망덕함을 다시 말해줌으로써 석성과 우가하 사이의 관계를 끊고 귀국했다. 돌아올 때 압록강이 녹아서 일시 멈추었으나, 다음날 다시 날이 추워지면서 강이 얼어붙어서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
이후 우가하의 침입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작전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할 수 있겠다. (우가하는 저고여 피살 사건에 다시 등장한다. 고려는 저고여 피살의 범인으로 우가하를 지목하는데, 몽골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 역시 우가하가 범인일 것 같지는 않다.)
김희제는 후일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는데, 그 전말을 간단히 언급해놓자.
1227년의 일이다. 최이는 미신에 푹 빠져서 살았는데, 주연지周演之(본명은 최산보崔山甫. 본래 중이었다가 남의 소를 잡아먹은 일로 쫓기게 되어 성명을 바꾸고 점술로 먹고 살다가 최이와 만났다)가 그에게 왕이 될 관상이라고 말해주자 그 사실을 김희제에게 털어놓았다. 김희제는 주연지를 만나 그 말이 사실이냐고 따져물었다. 주연지는 최이에게 가서 천기가 누설되어서 화가 있을까 두렵다고 말했는데, 이 말이 최이의 심기를 거슬렸다. 절대권력자 앞에서 감히 화를 논하다니...
최이의 마음이 주연지에게서 떠난 것을 알자 삽시간에 모함이 쇄도했다. 상장군 노지정盧之正, 대장군大將軍 금휘琴輝와 김희제가 주연지와 더불어 희종을 복위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었다. 최이가 이런 일을 묵과할 리가 없었다. 이때 김희제는 나주에 있었는데 붙잡아 바다에 던져 버렸다. 김희제는,
"청하淸河의 백번 닿는 은혜를 갚고자 하여 동서남북으로 온통 몸을 잊었더니 어찌하여 하루 아침에 하늘의 싫어함을 만나 자맥인(紫陌人=서울 사람)이 벽해인(碧海人)이 되는가."라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다.
최이는 김희제의 세 아들도 모두 죽였고 그 아들 김홍기金弘己의 아내도 강제로 랑장 윤주보尹周輔에게 시집을 보냈다. 남편이 죽자마자 개가를 시켜버리니 그 아내가 울고불고 난리를 쳤으나 억지로 혼인을 강행했다. 그러나 그날 밤 윤주보의 꿈에 김홍기가 나타나 그의 고환을 세게 걷어찼다. 윤주보는 다음날 급사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실상은 그 아내가 윤주보를 죽인 것이 아닐까 싶다.
김희제가 석성을 정벌하고 지은 시가 있다.
장군이 부월을 짚고 치욕을 갚지 못하면
將軍杖鉞未雪恥,
장차 무슨 면목으로 천궐에 조현하리오.
將何面目朝天闕.
청사검을 휘둘러 마산(우가하가 있는 곳)을 가리키니
一奮靑蛇指馬山,
오랑캐의 군세가 모두 거꾸러지는구나.
胡軍勢欲皆顚蹶.
용맹히 뛰어올라 다섯 강을 건너니
虎賁騰拏涉五江,
성곽은 타올라 잿더미가 되었도다.
城郭爛爲煨燼末.
술잔을 들어 장부의 마음을 펴매
臨柸已暢丈夫心,
돌아가 뵈온들 무슨 부끄러움 있으리.
反面無由愧汗發.
[추가]
최이가 김희제를 이렇게 심하게 다룬 것은 그가 전공을 세운 유능한 장군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신정권 하에서는 너무 유능하면 자신의 위치를 넘볼까 싶어 죽여버렸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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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유라시아고려사를 밝힌 단서 - 동문선의 글
주2) 동문선 제 6권 칠언고시에서
과 청로진(過淸虜鎭)
김희제(金希磾)
장군은 도끼를 짚고도 부끄러움을 씻지 못했거니 / 將軍杖鉞未雪恥
장차 무슨 면목으로 천궐에 조회하랴 / 將何面目朝天闕
한 번 푸른 뱀(칼)을 휘둘러 마산을 가리키매 / 一奮靑蛇指馬山
오랑캐의 군사 세력은 모두 거꾸러지려 하였다 / 胡軍勢欲皆顚蹶
호분(용사(勇士))이 날고 뛰어 다섯 강을 건너매 / 虎賁騰拏涉五江
성곽은 모두 타서 잿가루가 되었다 / 城郭爛爲煨燼末
잔을 들어 대장부의 마음은 이미 풀었지만 / 臨杯已暢丈夫心
돌아갈 면목 없으매 부끄러워 땀흐르네 / 反面無由愧汗發
화(和)
송국첨(宋國瞻)
인으로 칼등 삼고 의리로 칼날 삼으니 / 以仁爲脊義爲鋒
이것이 장군의 새로운 거궐(보검(寶劍))이었다 / 此是將軍新巨闕
한 번 휘둘러 바다로 향하면 고래가 내닫는 듯 / 一揮向海鯨鯢奔
두 번 들어 육지로 향하면 물소와 코끼리가 엎어지네 / 再擧向陸犀象蹶
하물며 저 마산의 궁한 미치광이들 쯤이야 / 況彼馬山窮猘兒
없애려 하였으면 채찍 끝의 가루가 되었을 것이다 / 制之可以隨鞭末
아침에 다섯 강을 건너 저녁에 승리를 알려 / 朝涉五江暮獻捷
기쁜 기색은 가득한 봄 빛 발하리 / 喜氣萬斛春光發
화(和)
손습경(孫襲卿)
변방에는 정도 없고 종도 또한 없으니 / 塞垣無鼎又無鍾
그 공을 적으려 하나 진실로 빠뜨리기 쉽도다 / 欲記元功詩可闕
현판에 써서 뒤에 오는 이에게 알리니 / 書之板上告後來
보는 이 앞을 다투다 쓰러지고 밟고 할 것이다 / 觀者爭前僵復蹶
맹명이 강을 건너 진나라 원한을 씻었다 하지만 / 孟明濟河雪秦恥
그것도 공에 견주면 끝 자리에 앉으리라 / 若比於公當處末
이듬해에 또 천산을 평정할 때에는 / 明年又可定天山
세 화살에서 한 화살도 쏘지 않았으리라 / 三箭元無一虛發
[주D-001]정(鼎)도 …… 없으니 : 국가에 큰 공훈(功勳)이 있으면 종(鍾)과 정(鼎)에 새겨서
영원히 전한다.
[주D-002]맹명(孟明)이 …… 씻었다 : 춘추(春秋) 시대에 진(秦)나라 장수 백리 맹명(孟明)이
처음에는 효함(殽函)에서 진(晋)나라의 습격을 당하여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되어 본국에 돌아
가서 3년 만에 하수(河水)를 건너 진나라를 쳐서 보복하였다.
[주D-003]천산(天山)을 평정할 때 : 당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가 화살 세 개로 적장 세 사람
을 쏘아 죽이니, 적군이 패하여 천산(天山)을 평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