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화산 여행 - 동애선사를 보고 산을 내려와 구화가 큰 절인 지원사를 구경하다!
구화산 높은 산속에 자리한 불교 마을 九华街(구화가) 에서 모노레일을 타고 뒷산에 올라
무하선사를 기리는 바이쑤이궁 百岁宫 (백세궁)을 보고 능선을 걸어 구화가와 천대를
구경하며 김교각 스님이 수도했다는 바위 위에 지은 东崖禅寺 (동애선사) 를 찾아 갑니다.
바위 위에 위태롭게 서있는 절 东崖禅寺 (동애선사) 를 보노라니 문득 1,961년이던가?
해안 스님 이 부안 내소사에서 자신의 장례식 을 스스로 치르며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生死於是 是無生死 생사어시 시무생사 ”불교의 반야심경에 나오는 말로....
“생사가 여기서 나왔으나 여기에는 생사가 없다”
의역하면“ 죽고 사는 것은 마음 에서 나왔으나 이것에는 생사가 없다” 정도가 될까요?
色卽是空 (색즉시공) 은 물질적 존재는 인연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서 불변하는건 없음을
이르는 말이며 空卽是色 (공즉시색) 은 본성인 공(空)이 바로 색(色), 만물이라는 말로
만물의 본성인 공 이 연속적인 인연에 의하여 임시로 다양한 만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라!
飛弘橋(비홍교) 계단을 올라 동애선사에 서니 문득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가 떠오릅니다.
“만리장성을 보지않고는 중국이 크다는 것을 모르고 山海關(산해관) 을 보지 못하고는
중국의 제도를 알지못하며 관 밖의 장대를 보지않고는 장수의 위엄을 알기 어려울 것이다”
“ 성첩에 기대서서 눈을 사방으로 달려보니 장성은 북쪽으로 뻗고 푸른 바다는
남쪽에 가득하며 동쪽으로는 큰 벌판이 이어져 있고 서쪽으로는
關(관) 안이 내려다보이니 이 臺(대) 만큼 조망 이 좋은 곳은 다시 없을 것이다”
조선 사신단 일행은 臺(대) 위에 올라가기는 했는데 층계가 높고 험해서 내려다 보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지라 감히 내려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데...
연암이 간신히 층계로 내려와 보니 그때까지 아무도 내려오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네?
조선시대는 높은 산 에도 하인이 고삐를 잡는 말 을 타고 가다가 경사가 심해지면 노비들이
메는 가마 를 타고 오르니 험하고 미끄러운 산에 하인들은 자빠지고 엎어져도
편안히 가마에 앉아오르다 도저히 더 갈수없는 꼭대기에서 몇발자국 걷는게 조선 사대부 라!
조선 사대부 하면 떠오르는게 백두산 정계비 니 여진족들이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을 정복하여
청나라가 서고 여진족은 중국으로 들어가니 빈땅이라 조선인들이 도강 하는 사례가
생기자 청나라는 숙종대인 1,712년에 오라 총관 목극등 을 보내 조선과 국경선을 획정합니다.
백두산 부근의 국경지역을 조사 하고 국경선을 획정해 백두산 정계비 를 세우는데
조선은 참판 박권과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를 대표로 파견하였지만 두사람 모두 문관이라...
말을 탈줄 모르니 그 험한 산길을 갈 수가 없어 도중에 포기하고 주저앉아 버립니다?
대구 망우공원 에 "백두산정계비" 를 세웠는데 거기 보면 청나라 대표는 오라총관 목극등
이고 조선측은 군관 이의복과 감사 군관 조태상 이 대표로 새겨집니다!
국경선을 정하려고 산을 오르던 대표들이 고되다고 퍼지고는 군관을 파견 했으니 한심하네요?
해서 백두산 정계비 는 천지 동남방인 백두산 남쪽 4km
( 해발 2,150미터, 백두산은 2,750미터 ) 에 세워지고 목책은 그보다 4km 더 아래
남쪽 에 둘러쳤으니 이대로라면.... 백두산과 천지는 중국령 이지요?
비에는 "大淸...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대청 서위압록 동위토문 고어분수령상"
이라고 적혀있으니 서로는 압록강과 동으로는 토문강 을 국경선으로 삼는다.
고종 대에 토문강이 송화강에 흘러드니 이의를 제기해 북간도 를 우리땅으로 주장합니다.
하지만 숙종 당시에는 국경선을 정하면서 통관 김지남 이 천지 이남을 우리땅 으로
주장하자 오라총관 목극등이 이의를 제기 하지 않으니.... 이를
보고 받은 참판 박권이 장계를 올리자 조정은 대성공이라며 매우 기뻐했던 것입니다!
숙종대에 이조참의 이광좌 에 따르면 "황지의 이른바 토문강이란 화어(華音, 중국말) 로
두만강 을 말합니다." 라고 하였으니, 백두산 남쪽 압록강과 두만강이 국경선 이라!
목극등을 접대하기 위해 조선에서 정한 “差官接待事宜別單(차관접대사의별단)”에 보면...
토문(土門)과 두만(豆滿) 은 같은 단어 이므로 주의해야 할 것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이익의 성호사설 이나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과 같은 저술서를 보아도
백두산 정계비 설치 당시 조선에서는“토문강은 곧 두만강” 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이 압록강~두만강 으로 국경선이 정해진걸 기뻐한 이유는 통일신라 국경선이
황해도~ 원산 이고, 고려 건국때 국경선이 평양~ 영흥 선이며....
조선 건국시기 국경선은 좀더 올라가서는 평안북도 서부와 함경남도 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종때에 최윤덕과 김종서 가 대군을 이끌고 북진해 고구려 이전부터 천수백년간
터를 잡고 살아온 여진족 을 몰아내고는 4군 6진 을 세웠는데.....
그 여진족의 후예 들이 세운 청나라 가 압록강~ 두만강 선 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압록강과 두만강은 천지에서 발원하는게 아니라 서로 떨어져 백두산 서남쪽과
동남쪽에서 시작되므로 압록강 ~ 정계비 ~ 토문강 까지
목책 을 세워 이어야 하는데 목책이 백두산 정계비에서 또 4km 남쪽으로 물러선 이유는...
그후 조선에서 목책을 치다가 정계비를 세운 하천 이 두만강 이 아니라 토문강 으로
흘러들어가는 사실이 발견되자 대경 실색해서는 문책 이 두려운지라...
정계비 남쪽 4km 에서 두만강으로 흐르는 지류 인 석을수 를 발견해 목책을 세운 것입니다.
좀전에 천대와 고배경대에서 내려와 봉황송 정류소에서 버스를 타는 대신 걸어서 영객송과
회향각을 거쳐 여기 동애선사 로 오를 생각을 했었으니 미련이 남아 회향각 으로
걸어내려 갈수있나 싶어 고개를 빼고 두루 살피건만 멀어서 그런지 확신이 서지를 않네요?
또 여행 가이드북에 만불탑 과 그 옆 화엄보전 에서는 구화산 정상 천대사 및
고배경대가 잘 바라다 보인다고 했는데.... 어디쯤인지 보이지가 않습니다?
찾아볼까 하다가 아직 구화가의 지원사 를 보지 못한지라 포기하고는 하산하는
모노레일 을 타려고 좀전에 왔던 길보다 조금 아래쪽 길을 택해 걷습니다.
걸은지 채 10분이 안되어 상부역 에 도착해서는 다시 모노레일 을 타고는
순식간에 구화가로 내려오는지라 내려서 건물 밖으로 나갑니다.
그때 좀 특이하게 생긴 차가 도착하더니...... 자동 소총을 든 군인 같은
사람들이 내려서는 여기 모노레일 매표소 건물로 올라 오네요?
보자니 현금 수송 차량 이라.... 1년 365일 여기 케이블카 정거장과 모노레일 정거장에는
시도때도 없이 늘 엄청난 괸광객이 몰리다 보니 저런 현금 수송차량 이 필요한가 보네요?
그런데 모노레일을 타러 관광객들이 대거 올라오는데 보자니 붉은티 등 같은 유니폼을
입었는데 단순한 여행사 패키지는 아니고 어디 회사나 학교에서 온 것일러나?
그러고는 200미터를 걸어 여기 구화가에서는 가장 크다는 절인 즈위엔쓰 祗园寺 (지원사)
를 찾아 들어가는데 이 절은 여기 구화산에서는 최대의 사찰로 명나라 시대인
1,566년에 준공되었으며 산문과 천왕전, 대웅보전에 불상 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답니다.
사천왕상 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여기도 향을 사르며 지극정성으로 참배하는.....
신앙심 돈독한 불자 들이 많은데 중국에서는 젊은 여성들도 불자 가 많은데 놀랍니다?
1,000명이 식사할 수 있는 구화산에서 가장큰 사찰인 여기 지원사 에도 구화산 방장
인덕 스님께서 입적하여 항아리에 모셔져 등신불 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지원사 불교 의식은 라마교식 으로 매일 저녘 7시부터 경을 읽는데 스님 다섯분이 앞 법단에
앉아서 돌아가면서 수인을 행하면서 경을 읽는데 수계받는 신도가 동참하기도 합니다.
지장보살 김교각 스님이 24세의 나이로 당나라에 건너갈 때(서기 653년) 가지고 간 것이
오차송이라는 소나무 종자, 황립도라는 볍씨, 금지차 라는 신라차 종자에.....
선청(善聽) 이라는 흰 삽살개 한 마리였다는데, 이 개는 지장보살과 함께
득도하여 지청수 라는 독각(獨角, 외뿔) 영물 이 되었다고 전합니다?
지청수(地聽獸) 는 한쪽 귀로는 시방의 여러 불보살의 법음(法音) 을 듣고,
다른 한쪽 귀로는 중생들의 부름 소리 를 듣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웅보전에서는 오후 4시 40분이니 마침 저녁 예불 이 열리는 모양이라 스님이
70여명은 되고 신자들도 스무명 남짓 되는데 서로 마주보고 맞절 을 하기도 하네요?
그러고는 예불이 끝나고 스님들이 한줄로 서서 나오는데 마지막에는
불자 들도 대열의 말미에서 함께 따라 나오는 모습을 구경합니다.
여기 구화산(九华山) 은 화강암으로 조성된 70여 개의 산봉우리 위주로 되어 있으며 1,000m
이상의 봉우리가 30여 개로 남조(南朝) 시대에는 주쯔산(九子山, 구자산)으로 불립니다.
당나라 천보(天宝) 연간 이백(李白) 이 수차에 걸쳐 이곳을 유람하며
"妙有二分氣, 靈山開九華 아름다운 봉우리를 가진 산이 연꽃과 같다" 는 시구를 읊으니
이후 주화산 (九华山 구화산) 으로 불리게 되었다고도 합니다.
이후 구화산 은 당(唐), 송(宋), 원(元) 시기에 번영과 쇠퇴를 거듭하다가 명초에 이르러
장족의 발전을 이루게 되니 구화산 지장보살 은 산시성 오대산의 문수보살, 사천성
아미산의 보현보살, 저장성 보타산 관음보살과 중국 불교 사대명산 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청대(清代)에 주화산(九华山) 은 300여 개의 사찰과 승려 4,000여명 이 있었으나 현재는
9개 전국중점사원(全国重点寺院)을 포함하여 90개 사찰에 600여 명의 승려 가 있습니다.
또한 등신불 5존, 불상 6,300여 존과 역대 경전, 법기 등 문물 2,000여 개가 보존되어
있으니 2007년 5월 국가 66개 5A급 여유경구 (旅游景区)의 하나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즈위엔쓰 祗园寺 (지원사) 절을 나와서는 5분쯤 걸어내려 가서는 대문을
나서 汽車站 (기차참) 에서 구화산 경내를 독점 운행 하는 노랑색 버스 를 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