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암 잡을 수 있다
이제 나는 삶에 연연하지 않는다. 암과 함께 살다가 언제든 오라면 갈 것이다. 살아 숨 쉬는 이 시간이 그저 소중하고 감사할 뿐이다.
2004년 8월,
거울 앞에서 기지개를 켜다가 왼쪽 겨드랑이에 망울이 생긴 것을 발견했다. 육안으로 보기엔 작은 뾰루지 같기도 한 망울은 새끼손톱 반 정도였는데, 손으로 만져 보니 제법 딱딱했다. 그 무렵 골프 실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아 퇴근 후 2시간씩 연습장에 드나든 것이 무리였나 싶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며칠 뒤 유학 중인 막내아들이 귀국해 건강검진을 받았다. 아들의 검진결과가 나오는 날 함께 결과를 보러 홍내과병원의 홍기석 박사님께 들린 김에 왼쪽 겨드랑이의 망울을 보여드렸다. 홍 박사님께서 찬찬히 살펴보시더니, 정밀검사를 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시면서 S병원에 소개장을 써주셨다. 찜찜한 기분을 날려버려야겠다 싶어 정밀검사를 받았는데, 검사결과 청천벽력처럼 위암 4기라는 판정을 받았다.
검사결과를 듣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며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건강만큼은 누구보다도 자신하던 나였다. 그 흔한 감기도 잘 걸리지 않고, 양주 한 병을 마셔도 다음 날 거뜬히 일어날 정도의 체력이었는데. 내 나이 쉰아홉, 주주총회에서 사장으로 선임된 지 9일 만의 일이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의사선생님께 내게 남은 시간을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선생님께선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통계학적으로는 10개월 정도라 대답하셨다. 마치 사형선고를 들은 사람마냥 서 있을 힘조차 없이 다리가 풀렸다. 그저 긴 한숨을 내쉬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이 고통을 가족과 함께 나누는 시련만은 주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집으로 돌아와 욕실에서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 후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차피 한 번은 떠나야만 할 길이 아니던가. 남보다 조금 일찍 떠날 뿐이라고 생각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가족들에게 암 선고를 받은 사실을 이야기했다. 억장이 무너질 것 같았지만, 애써 태연한 척 담담히 말을 꺼냈다. 그나마 아내와 아이들한텐 얘기할 수 있었지만, 장손으로서 추석을 앞두고 어머님과 여동생, 친척들에겐 도저히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무 내색도 않은 채 추석 성묘를 다녀온 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재검사를 위해 아산병원을 찾았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한치의 오차도 없는 현대의학이 야속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나에게 남은 시간이 10개월도 채 안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집과 가까운 성남에 납골당을 마련하고 나니 불현듯 영정사진이 떠올랐다. 가끔 장례식장에서 영정사진이 준비돼 있지 않은 경우를 봐온 터라 가족들을 생각해 미리 준비해두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홀로 사진 찍을 준비를 하고 길을 나섰다. 처음 들른 곳은 영정사진 한 장 가격이 무려 30만 원.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어 동네 사진관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영정사진 찍으러 왔습니다’라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나왔고, 담담히 사진을 찍고 나왔다. 일주일 후, 사진을 찾아가라는 연락을 받았지만 집 앞에 있는 곳인데도 사진 찾기가 어찌 그리 싫던지…. 결국 한 달이나 지나고서야 사진을 찾았다.
그 후 본격적으로 주변 정리를 시작했다. 사람은 죽는 것보다 죽음을 준비하는 순간이 아마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고통을 받아들일 테니 시간을 더 달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퇴직 후 아내에게 용돈 얻어 쓰며 잔소리 듣는 게 싫어 남몰래 준비했던 비상금도 큰딸에게 인계했다. 적지 않은 부동산을 어떻게 상속할 것인가도 큰딸에게 부탁했다. 몸이 흔들릴 정도로 눈물을 쏟으면서도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은 듯 이를 악물고 내 이야기를 듣는 큰딸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당시 아내는 눈만 마주치면 눈물을 쏟던 터라 거의 대화가 되지 않아 큰딸에게 짐을 지워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나서 곧 항암 치료가 시작되었다. 한번 시작하면 최소한 4개월 이상 소요되는 치료는 인간다운 삶을 포기하게 했다.
몸의 털이란 털은 거의 다 빠지고 먹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차라리 빨리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5시간씩 주사를 맞고, 2주간 약을 먹다보면 입 안이 죄다 헐어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다. 처음 3, 4일은 꾸역꾸역 넘길 수 있어도 4, 5일이 지나면 아예 밥을 넘기지 못하게 된다.
그래도 난 포기하지 않았다. 체력 보충을 위해 장어 엑기스를 마시고 버텼더니 체중도 많이 빠지지 않았다. 치료에 전념하기 위해 사표를 내려 했지만, 회장님은 집에서 쉬다 보면 암에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으니 하루 한 시간만이라도 회사에 다니면서 치료할 것을 권하셨다. 회장님의 배려가 마음으로 전해져 이를 악물고 치료와 출근을 병행했다. 하루도 결근하지 않고 하루 평균 4시간은 일을 하며 자리를 지켰다.
어느새 2008년. 4년여 동안 다섯 차례나 약을 바꾸어가며 치료를 계속하고 있다.
여 수명 10개월을 지나 4년 5개월째 살고 있으며,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질 수 없기에 고군분투 중이다. 한 번도 힘들어 중도포기한다는 항암요법을 다섯 차례나 한번의 연기도 없이 견뎠다.
백혈구와 적혈구 수치가 떨어지면 치료를 쉬어야 하지만 아직까진 체력이 버텨주고 있다. ‘그래 하는 데까지 하자.’ 라는 생각뿐이다.
이제 치료와 치료 사이의 기간이 오직 삶의 보람이다.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며 숨 쉬는 한 순간조차도 소중하다.
앞만 바라보며 달려온 내게는 자연을 감상할 마음의 여유조차도 없었다. 어느 날인가 한강변을 바라보니 그 아름다움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정말 좀 더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강남에서 분당 옆 시골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시골생활은 아침 일찍 눈을 뜨면 밭에 나가 채소를 가꾸고, 퇴근하면 나무를 자르고 옮기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지금도 나의 몸 어딘가에는 암이 자라고 있지만, 나는 ‘내가 이기냐? 암이 이기냐?’의 지루하고 치열한 싸움을 지속하고 있다.
투병생활 중 처음부터 용기를 북돋워 주시고 치료를 전담해주신 강윤구 교수님. “항암치료 중 체력이 이렇게 잘 따라주는 환자는 본 적 없다”며 자상한 설명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김정혜 간호사님. 깊은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를 회장님. 그리고 가족들과 주위의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요즘은 장작으로 불을 피우고 가마솥에 밥을 해 먹으며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다. 내가 행복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이젠 내가 언제 어떻게 되더라도 괜찮을 만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삶에 연연하지 않는다.
구질구질하게 오래살기 보단 암이랑 같이 재미있게 살다가 언제든 오라면 갈 생각이다. 남은 시간이 어느 정도이건 보너스처럼 받은 4년 5개월의 시간도 축복이자 기적이었으니.
암아! 제발 난동부리지 말고 얌전히 사이좋게 동행하자꾸나.
정 싫으면 어머님 임종하시는
그날까지 만이라도!
※이 수기는 서울 아산병원 체험수기 공모전에 입선한 작품으로, 신간 ‘희망나무’(리더스북)에도 소개되었다. 지은이는 지금도 치열하게 투병 중이다.
/ 여성조선
이정희(서울 강남)
첫댓글 와우!!! 글을 읽는동안 뭔지모를 불끈 거림을 느껴 봅니다. 그래~~~ 우린 할수 있음을 다시한번 느껴보고 다짐하게 됩니다.
우리 이 공간의 가족 여러분들, 힘내서 더 한번 최선을 다해서 암과 싸워 보자구요. 아자아자 화이팅!!! 반드시 이길 겁니다.^^
어차피 한 번은 떠나야만 할 길이 아니던가~ 마음을 비우고 하루 하루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다보면 좋은일도 있을것이고
행복도 기쁨도 누릴것~~ 암 하고 같이 살 생각은 없지만 암 도 내세포... 잘 어루 만져주면서 살아봅시다.
음지가 있으면 양지가 있고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습니다
이렇게 아픈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건강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좌절이나 비관같은것 하는시간에 나를 위해서 치료에 최선을 다하면
우리같은 사람도 건강해 질수 있습니다
항상 웃으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내일을 열어가는 사람들이 됩시다
두드리면 문은 열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