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톺아보기'는 한중일을 중심으로 아시아와 관련된 크고 작은 이슈를 살펴보는 연재코너입니다.
구마모토 TSMC 시스템 반도체 공장은 이미지 센서에 들어가는 칩을 만들어 소니에 납품하고 차량용 반도체도 생산할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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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4일 일본 정부가 간절히 원하던 대로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 대만 TSMC 공장의 일본 유치 확정 발표가 있었습니다. 내년 착공에 들어가 2024년 본격 생산을 목표로 한다고 합니다.
소니그룹도 협력해 해당 반도체 공장에 투자할 계획으로 알려졌습니다. 일본 내에서는 꽤나 고무된 분위기가 감지됩니다. 이를 계기로 한 과거 반도체 강국 명성 회복에 대한 전망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상당히 부정적 견해와 우려를 표명하는 일본인 전문가가 있어 눈길을 끕니다. 바로 2000년대 이후 일본 반도체 산업 쇠락의 원인을 심도 있게 분석해 이름을 알린 전 히타치 반도체 기술자 유노가미 다카시(湯之上隆) 미세가공연구소 소장입니다. 그는 2년 전 일본 정부의 대(對)한국 반도체 수출규제 때 아베 신조 내각의 결정을 강하게 비판해 국내에서도 주목을 받은 바 있습니다. 지난달 21일 그는 일본 경제 주간지 '다이아몬드'에 올린 기고문을 통해 TSMC의 일본 진출이 안고 있는 잠재적 이슈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TSMC 신공장, 첫째 문제는 일본인 기술자 부족
일본 르네사스 테크놀로지는 현재 세계 반도체 매출 기업 순위에서 19위를 기록중이다.[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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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노가미 소장은 우선 반도체 기술자 확보 문제를 걸림돌로 꼽습니다. 아사히신문 등에 따르면 구마모토 공장에 투입되는 총비용 규모는 약 1조엔(약 10조원)으로 이 중 절반가량인 5000억엔을 일본 정부가 지원할 예정입니다.
이 같은 투입 비용이 들어가는 대규모 공장에는 숙련된 기술자만 수백 명이 필요하게 됩니다. 문제는 현재 일본에 그런 기술자들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데 있습니다. 유노가미 소장에 따르면 TSMC 구마모토 공장은 선폭 20㎚대 제품 생산을 목표로 할 텐데 현재 일본의 선폭 미세화 기술은 아직 40㎚도 생산하지 못하는 수준입니다.
일본 반도체 산업이 쇠퇴하면서 2010년 전후 일본 반도체 회사들은 관련 기술자들을 서서히 구조조정해왔습니다. 예를 들어 르네사스일렉트로닉스는 2010년까지만 해도 직원이 4만9200명이나 됐지만 지금은 1만8700명으로 급감한 상태입니다. 유노가미 소장은 현재 일본에 반도체 공정 개발 엔지니어는 사실상 전무하다고 주장합니다.
반도체 미세화 공정은 1세대를 진척시키는 데도 상당한 시간과 투자가 필요하고 보통 예상치 못한 문제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이 때문에 공장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TSMC가 자체적으로 구마모토 공장에 필요한 공정 개발 엔지니어 수백 명을 보내야 합니다. 간단히 TSMC가 엔지니어들을 파견하면 되겠지만, 유노가미 소장은 쉽지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올해 초 기준 TSMC의 엔지니어 수는 약 5만6000명인데 5㎚ 제품 증산과 내년 이후 3㎚ 제품 양산 개시를 위해 연내 9000명가량을 늘려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에 타이난 과학단지에만 구마모토에 들어설 공장과 맞먹는 규모의 공장을 5곳이나 건설할 예정입니다. 물론 이 9000명은 첨단 반도체 생산 업무에 종사할 수 있는 경험과 소양이 있는 인력을 말합니다. 이렇다 보니 TSMC에서 일손이 부족해 죽겠다는 소리가 들리는데, 과연 일본에 기술자들을 파견할 여유가 있을지 의문이라는 게 유노가미 소장의 분석입니다.
기술자 이외에 필요한 인프라는?
반도체 관련 활발한 저술활동 중인 유노가미 다카시 미세가공연구소 소장. [사진=유노가미 다카시 페이스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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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다시피 반도체 제조를 위해선 공장과 인력만 확보되면 되는 게 아닙니다. 용수, 전기, 재료나 약액의 중계기지 등도 필요합니다. 유노가미 소장은 현재로선 이 같은 인프라스트럭처 전체를 조망하는 일본 정부의 전략이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이는 일본에 앞서 TSMC 공장을 유치하며 인프라 전체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려한 미국의 경우와 비교됩니다. 미국은 현재 반도체 산업에 총 520억달러(61조원)를 지원할 방침인데, 이 돈은 TSMC에 지급할 보조금뿐 아니라 물과 전기, 제조 장치나 재료 중계기지 등 인프라 구축에도 사용될 예정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구마모토 공장 신설에 소요되는 비용은 절반가량을 일본 정부, 즉 경제산업성이 출자할 겁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유노가미 소장은 용수와 전기, 장치와 재료 중계기지에 대한 것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묻습니다.
물론 TSMC가 단순히 경제적 타산성 때문에 일본에 공장을 지으려는 건 아닙니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세계 반도체 패권 다툼이라는 지정학적 리스크 관리 요소가 반영된 결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반대로 경제적 합리성 측면에서만 따졌을 때 TSMC가 일본에 공장을 짓는 건 메리트를 찾기 어렵다는 말도 됩니다. 현재 TSMC 매출에서 일본 시장이 차지하는 비율은 4~5%에 불과합니다.
유노가미 소장은 일본의 대(對)한 반도체 소부장 수출규제도 하나의 유인이 됐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는 일본의 결정 이후 대만을 비롯한 해외 반도체 업계 관계자들이 "일본 정부는 화가 나면 이런 짓을 하는가"라며 놀란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즉, 일본이 상황에 따라 한국에 했듯이 대만에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 건 아니어서 TSMC 입장에서는 일본 내 공장이 일종의 보험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도요타 자동차는 일본내 시총·매출·이익·고용 모두에서 1위다. 세계 자동차 판매대수와 영업익 1위일 뿐 아니라 전후 부흥을 이끈 기업으로 일본인들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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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일본 입장에서 TSMC 유치에 사활을 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앞서 언급한 것 이외에 유노가미 소장은 그 배경에 도요타자동차가 존재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정사원 37만여 명을 고용하고 있는 도요타는 일본 최대 제조업체이자 일본 시가총액 부동의 1위 기업입니다. 전후 일본 경제의 성장을 이끌었으며 일본 제조업 경쟁력을 상징한다고도 일컬어집니다.
하지만 올해 들어 전 세계 차량용 반도체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도요타 역시 감산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기에 앞으로 펼쳐질 CASE(커넥티드·자율주행·차량공유·전기차) 시대에는 TSMC가 만드는 최첨단 반도체가 도요타에 결코 없어서는 안될 부품입니다. 이 때문인지 도요타는 이미 수차례 TSMC에 러브콜을 보낸 바 있습니다. 지난 6월 열린 TSMC 심포지엄에 도요타의 조달본부장과 부본부장이 스페셜 게스트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죠. 도요타가 세계에서 처음으로 도입해 효과를 봤던 'JIT(저스트 인 타임·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만 생산)' 방식 대신, 반도체에 있어서는 조달에 소요되는 기간을 수년 단위로 고려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자동차는 일본의 기간산업입니다. 일본 근로자 10명 중 1명은 자동차 산업과 관련된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소니 정도 되는 회사가 일본 정부에 호소해도 먹히지 않을지언정 도요타의 경우는 다르다는 분석입니다.
반도체 장기 비전 없는 日…"국가 정책 한국 참고를"
[그래픽=조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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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TSMC로부터의 제조라인 유치만으론 효과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유노가미 소장은 일본이 국가 정책으로 참고할 만한 사례로 한국을 꼽습니다. 한국은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중심이 돼 향후 10년간 510조원(50조엔) 규모의 메가톤급 투자를 추진 중입니다. 소위 'K 반도체 벨트 구상'으로 정부가 나서 세제나 금융부터 용수 등 인프라 확보까지 지원할 방침입니다. 제조 라인은 물론 장비, 재료, 부품 거점 등도 모두 국내에 두고 생산할 태세입니다.
그는 무엇보다 인재 육성과 관련해 한국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인재 전략에 있어서 한국은 대학 반도체 관련 학과 정원 확대 등으로 10년간 기술자 3만6000명 육성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세계 최대 첨단 인프라 구축과 인재 육성을 지원하게 됩니다. 그는 일본이 정말 '반도체 입국'을 지향한다면, 적어도 이 정도 계획은 마련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계획대로 성공이 보장되는 건 아니지만, 구상과 방향 자체는 옳다는 겁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전자와 전기계통, 특히 반도체 쪽 인기가 없어서 전공하려는 학생이 많지 않습니다. 2000년대 이후 관련 회사들이 대규모 구조조정을 실시하면서 대학 반도체 연구실도 그 수가 급감했습니다. 한국과 일본 모두 오래전부터 이공계 인재의 의대 쏠림 현상이 있었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한국에 비해 반도체를 전공하는 우수한 학생들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상황이 이럴진데 일본 정치권에서 올 들어 급작스레 반도체 산업 재건을 외쳐댄다고 해서 오랜 공백 기간이 메꿔질 리 없습니다. 유노가미 소장은 "지금처럼 땜질식 처방이 아닌 대학 이전 의무 교육 시점에서부터 방법을 바꿔야 한다"며 "삼성전자 입사가 하나의 엘리트 코스로 인식되는 한국조차 반도체 강국을 외치며 10년 이상 장기 계획을 세우는 마당에 일본은 20, 30년 이상의 계획이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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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기술 패권 경쟁의 여파에도 2050년 세계 반도체 시장은 지금보다 2배 넘게 커진 8000억~1조달러 규모가 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초미세화 공정이 회로폭 1㎚에 근접하면서 물리적 한계에 다다랐다는 지적도 있지만,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돌아보면 반도체 기술의 한계는 계속 극복돼왔기 때문입니다.
'산업의 쌀'이라고 불리는 반도체는 한 국가의 경쟁력과 명운을 결정 지을 수 있는 부품입니다. 하지만 더 넓게 보면 인류 전체의 복리를 증진시켜주는 산업재이기도 합니다. 비메모리 분야를 아우르는 진정한 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하려는 한국, 그리고 과거의 명성을 되찾으려는 일본. 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양국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귀추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