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남성이라면 누구나 한 벌쯤은 갖고 있는 양복, 즉 남성용 정장은 언제 등장했을까? 흥미롭게도 양복의 탄생은 혁명과 관계가 있다. 1688년 영국의 명예혁명, 그리고 1789년 프랑스혁명 말이다. 영국의 명예혁명보다 100여 년 뒤에 일어났지만, 훨씬 파급력이 컸던 프랑스혁명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기로 하자.
1789년 프랑스혁명 전 프랑스에서는 귀족, 부르주아, 도시 사람들, 시골 사람들이 각각 구별되는 옷차림을 했다. 명확하게 성문화된 규정은 없었지만 수백 년 동안 계층을 구별하는 규범적 코드가 존재해온 탓이다. 계층의 맨 꼭대기에 위치했던 왕족과 귀족 남성의 복장은 여성의 의복만큼이나, 심지어 때로는 그보다 훨씬 더 화려했다.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의 동생 오를레앙 공작(Philippe I, Duke of Orléans, 1640~1701)은 전쟁터에 나갈 때도 분칠을 하고 연지를 바르고, 커다란 가발을 쓰고, 리본과 다이아몬드로 치장을 했다. 일부 멋쟁이 귀족 남성은 높이가 6인치나 되는 뾰족한 하이힐을 신었으며, 양산을 들고, 겨울에는 화려한 모피로 만든 토시를 손에 감고 다녔다.
시골 사람들에게는 유행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었다. 리넨이나 투박한 모직물로 된 초라하고 낡은 옷을 대충 입었으며, 속옷은 거의 입지도 않았다. 대신 머리에는 항상 무언가 쓰고 있었다. 도시의 하층민은 헌 옷 가게에서 옷을 장만했는데, 그 옷들은 대부분 유복한 부르주아 계급의 가정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에 겉모습으로는 부르주아 계급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부르주아 계급 가운데 검소한 사람들은 나사(羅紗, 무명, 명주, 인조 견사 따위를 섞어서 짠 두꺼운 모직물), 서지(serge, 짜임이 튼튼한 모직물의 일종) 또는 짙은 단색의 거친 모직물로 만든 옷을 입었다. 1789년 삼부회가 소집되었을 때, 사람들은 옷차림만으로 그들이 어떤 신분을 대표하는지 단번에 구별할 수 있었다. 레이스와 보석으로 장식한 형형색색의 옷에 깃털을 꽂은 모자를 쓴 귀족들과 검은색의 수수한 옷을 입은 제3신분들은 마치 다른 종류의 생명체처럼 보였을 수도 있었으리라.
프랑스혁명이 파란만장하게 진행되는 동안 수많은 집단들이 제각각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상퀼로트(Sans-Culotte, 귀족들이 입던 반바지 스타일의 ‘퀼로트Culotte’를 입지 않은 사람, 곧 긴바지를 입은 노동자라는 뜻으로 프랑스 혁명기의 의식적인 민중세력을 지칭하는 말) 등 그들이 입은 복장에도 강한 정치적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했다. 제3신분의 주도하에 혁명파가 승리를 거두자 제3신분의 초라한 복장이야말로 애국심의 발로라는 인식이 퍼지기도 했다. 1790년대 패션 잡지들은 심지어 ‘헌법식 복장’이라는 새로운 패션을 소개할 정도였다.
이렇게 의복에 지나칠 만큼 정치적 의미가 크게 부여되자, 1793년 국민공회는 복장의 자유를 천명하는 칙령을 선포했다.
어느 누구도 남녀 시민 누구에게 특정한 방식으로 옷을 입으라고 강요할 수 없으며, 이를 위반할 시에는 혐의자로 간주해 다룰 것이며, 또한 공공의 안녕을 방해한 자로 기소할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성에 적절한 의복을 착용하거나 몸단장을 하는 데 자유롭다.
칙령이 선포된 후 프랑스 남성의 복식에는 크게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첫째, 귀족들이 귀족임을 표시해온 과시적인 복식, 즉 각양각색의 화려한 빛깔의 값비싼 천에 자수와 레이스, 보석을 장식한 의복이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사회 전반에 반(反)귀족적 정서가 팽배하자 귀족들은 적대감을 일으킬 호화로운 복식을 자제하려 했다. 둘째, 칙령 자체는 복장의 자유를 천명했지만, 현실적으로는 결국 자유롭고 다양한 옷차림이 아니라 부르주아의 복장을 기본으로 한 획일적인 남성복의 유행을 낳게 되었다. 이를 두고 문화사가인 필리프 페로(Philippe Perrot)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진 단순하고 통일된 형태의 허식 없는 옷이 등장하는 것이 바로 프랑스 대혁명 덕분”이라고 단언했다.
사실 프랑스혁명 후 유행하게 된 단순한 양복은 그보다 100여 년 전에 영국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영국의 부르주아들은 17세기 중반부터 어두운 색깔의 옷감을 사용해 단순하게 디자인한 옷을 입기 시작했다.
이것은 원래 카를 5세(Charles V, 1500~1558)와 펠리페 2세(Felipe II, 1527~1598) 시기의 에스파냐 궁정에서 출현한 것으로, 16세기 말부터 플랑드르 지방에 널리 보급되었다.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흰 칼라를 단 검은색 의복이 바로 그런 류인데, 아주 폐쇄적이면서도 엄격한 느낌을 준다.
이런 옷은 영국에서도 내란기에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과 그 동료들, 그리고 아주 엄격한 청교도(Puritan)들과 퀘이커(Quaker) 교도들이 착용하기 시작했다. 내란이 종결되고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이미 영국 사회는 중간계급의 힘이 압도적인 사회가 되었다. 1688년의 명예혁명은 과거와 같은 전제 왕정이 결코 다시 들어설 수 없음을 확인시켜준 마침표에 해당하는 사건이나 다름없었다.
혁명을 달성한 후 영국 사회는 정치 엘리트들에게 공공의 덕(public virtue)을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요구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사치와 방탕은 도덕적 타락일 뿐 아니라 정치적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제 계급을 초월해서 상업의 확대와 산업의 발달이 국가의 부를 이끌어가는 시대가 되었다. 정치 개혁가들은 귀족이 독점해온 문화적 헤게모니를 중간계급의 문화로 대체해나갔다.
이 사회에서 진정한 지배집단은 이성적이고 경제관념이 있는 겸손한 남성이었다. 그러한 이미지는 사치스럽고, 나태하며 외모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던 귀족의 상을 타자화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대륙에 비해 신분제가 훨씬 느슨했던 영국이었기에 점차로 귀족들까지도 산업주의와 상업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동조하게 되었다. 심지어 귀족들은 바다 건너 프랑스의 ‘여성적인’ 귀족적 사치가 영국을 침범할까 봐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그런 화려한 패션의 추종자가 되지 않겠다는 일종의 독립선언을 하게 되었다. 이제 상업이나 산업과 관련된 옷들, 즉 노동을 암시하는 단순하고 통일적인 옷이 과거 귀족의 사치스런 옷을 누르고 도덕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얻기에 이른다.
이미 17세기 말부터 영국의 상류사회, 심지어 궁정에서조차 ‘패션이 수수해지는 분위기’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1691년 영국의 연대기 작가 가이 미에지(Guy Miege, 1644~1718)가 “얼마 전까지도 외국의 패션을 따라 하지 못해 안달이더니 이제 영국 남자들의 옷만큼 수수하고 장식이 없는 칙칙한 옷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점차로 과거에 남성복을 꾸몄던 화려한 면면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자수며 보석 장식을 비롯해 앞가슴을 장식했던 레이스와 프릴로 이루어진 자보(jabot)며, 장식용 검과 보석 박힌 신발의 버클, 스타킹 대님이 복식의 구성에서 빠지거나 아주 단순한 형태로 축소되었다. 대신 오늘날 양복의 기본이 되는 재킷, 바지, 조끼로 이루어진 스리피스 슈트가 등장했다.
남성 슈트는 과거처럼 몸에 착 달라붙지 않고 낙낙한 형태의 수수하고 단순한 디자인인데, 무엇보다 조금 뻣뻣하고 어두운 단색 옷감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여기에 셔츠, 그리고 나중에 넥타이가 곁들여진다. 17세기 말부터 유행했던 크라바트(Cravat)가 풍성하고 화려했다면 넥타이는 아주 가볍고도 심플한 모양이었다. 이제 남성들에게 남은 액세서리는 형태가 단순해진 모자와 지팡이, 장갑 정도였다.
18세기 초가 되면 영국 젠틀맨의 패션은 더 수수하고 검소해졌으며, 내내 그 기조를 유지했다. 19세기에는 색채가 더 어두워졌고, 이제 그런 점잖은 옷차림 자체가 엘리트가 갖춰야 할 필수적인 요건이 되기도 했다. 1829년 영국의 급진주의 정치가 윌리엄 코빗(William Cobbett, 1763~1835)은 중간계급 이상의 영국 남성들을 대상으로 쓴 처세서에서 “추레하지 않은 선에서 가장 저렴하게 입어라”고 말했다. 그는 “대가리에 정신이 제대로 박힌 자라면 비싸거나 좋은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는 당신을 좋아하거나 존경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프랑스혁명 훨씬 전부터 영국식의 수수한 남성복은 스멀스멀 유럽 곳곳으로 퍼져가던 참이었다. 18세기 영국의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하자 영국 문화에 대한 선망이 확산되면서 이러한 유행을 부추겼던 탓도 있다. 예를 들자면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The Sorrows of Young Werther)>에서 주인공 베르테르는 1774년 당시에 이미 영국식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혁명 후 프랑스에서 영국에서 건너온 수수한 스타일의 남성복이 크게 유행하게 되자, 그동안 화려하고 세련된 남성복을 만들어왔던 콧대 높은 재단사들은 아주 당황했다. 정교하고 화려했던 보석 박힌 버클마저 단순한 신발 끈으로 대체될 정도로 소박해진 의상은 그들이 보기에 남성복의 격조를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스타일의 출처가 라이벌 국가인 영국이라는 사실에 분개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엄숙한 남성복은 19세기 전반부에 더욱 널리 유통되어 유럽 전역에서 “부르주아 스타일의 일반화”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움직임을 확산시킨 데는 기성복의 등장이 한몫했다.
1824년 포목상인 피에르 파리소(Pierre Parissot, 1790~1860)가 파리 시테 섬의 꽃시장 근처에 ‘라 벨 자르디니에르(À la Belle Jardinière)’라는 상점을 열고 기성복을 팔기 시작했다. 폭넓은 고객을 대상으로 하여 한곳에서 옷을 만들고 판매까지 하는 혁신적인 시스템이었다. 이전의 맞춤복처럼 고객 개개인의 체형에 꼭 맞춘 정확한 재단은 아닐지라도 사이즈를 다양하게 제작하여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게다가 부르주아의 일상복에 더해 노동복, 덧입는 작업복, 심지어 두꺼운 옷감의 바지며 작업용 앞치마까지 만들어 저렴한 가격에 판매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리소의 가게는 대단히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하지만 의복 제조 공정이 아직 기계화되지 않은 터라 여전히 대부분의 공정은 숙련된 인력의 수작업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파리소 가게의 재단사들은 한때 주인을 배척하며 불안해했는데, 그 이유는 주인인 파리소가 밀려드는 주문량을 맞추기 위해 교도소 작업장에서 인력을 끌어올 것이라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죄수들을 작업 인력으로 동원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실제로 파리의 기성복 산업은 고한제도(苦汗制度, sweating system)에 기대어 발전하게 된다.
고한제도는 글자 그대로 땀을 쏟을 정도로 심하게 노동을 착취하는 제도로, 근대적 생산시스템에 아직 진입하지 못했거나 근대적 공장 주변에서 보조적으로 이루어지는 매뉴팩처 시스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기성복 제조는 열악한 환경의 작업장에서 재단사들, 여성 재봉사들, 부속품을 완성하는 재단사들, 천을 자르는 사람들의 장시간 노동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노동력 착취 덕에 기성복 가격은 맞춤복보다 저렴한 수준에서 유지될 수 있었다.
파리소가 창업한 기성복 가게는 곧 프랑스 곳곳에 분점을 내는 동시에 르 봉 마르셰(Le Bon Marché) 등의 백화점에 입점하게 된다. 이런 남성용 기성복은 아주 최고급은 아닐지라도 그 이전까지 양복을 맞춰 입었던 계층과 중고의류에 만족해야 했던 계층 모두를 고객으로 확보했다. 특히 기성복을 사 입음으로써 평생 처음으로 새 옷을 구매하게 된 사람들은 ‘소비의 진정한 행복감’을 맛보았다.
사실 이런 기성복은 상류사회 사람들의 복장을 저렴한 버전으로 모방한 것이었다. 이제 하급공무원들, 다소 독립적인 소상인들, 자유업의 보조원들, 산업이나 상업 분야의 고용인들, 유복한 수공업자나 노동자들, 즉 중간계급에 속한 집단들이 ‘대량으로 복제된 명품’의 세계에 발을 딛게 된 것이다.
부르주아 스타일 남성복의 유행은 비단 사람들이 무엇을 걸치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부르주아가 미덕으로 내세운 노동, 근면, 검약, 겸손과 같은 이데올로기를 사회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고, 그것을 보편화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런데 1800년대 초, 이런 움직임에 대항하는 의식적인 거부 반응이 일어났다.
보 브럼멜(Beau Brummell, 멋쟁이 브럼멜)로 불린 조지 브라이언 브럼멜(Geroge Bryan Brummell, 1778~1840),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1788~1824),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Charles-Pierre Baudelaire, 1821~1867) 등이 앞장서서 댄디즘(dandysme)을 선보인 것이다. 우파적이면서 반평등주의적인 댄디(dandy, 멋쟁이)들은 귀족주의가 천박한 부르주아 문화에 의해 폄훼되어가는 것에 반발하며 귀족 문화를 재창조하고자 했다. 독신주의, 결혼에 대한 혐오, 여성 경멸과 방랑은 그들이 내세우는 윤리 체계이자 라이프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그들을 특징짓는 것은 세련되고 우아한 멋, 특히 옷차림이었다.
영국 댄디즘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브럼멜은 ‘단순한 것이 더 아름답다(less is more)’로 표상되는 ‘점잖은 멋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옷을 잘 입는다는 사실만으로 이름을 얻었던 그였기에 매일 오후가 되면 왕세자를 비롯해 저명인사들이 방문해 그가 옷을 차려입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브럼멜은 하루 종일 옷을 입고 또 입었다. 그는 하루에 최소 셔츠 3벌, 바지 2벌, 넥타이 4개 이상, 조끼 2벌, 양말 몇 켤레와 여러 장의 손수건을 바꿔가면서 차려입었다. 브럼멜은 맵시 있는 옷차림을 위해 몇 시간이나 공을 들였다. 세련되고 단순한 멋을 추구한 그는 옷 색깔도 흰색, 담황색, 남색 이렇게 세 가지로 한정했다.
동시대 인물인 철학자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은 댄디즘이 시간과 정력을 바보스럽게 낭비하는 귀족 계급의 유희일 뿐이라고 공격했다. 하지만 보들레르는 댄디즘이 천박한 부르주아 물질주의에 대한 정당한 저항이라며 옹호했다. “댄디즘은 아직 민주주의가 강력하지 않고, 귀족 정치의 동요와 실추가 미미한 과도기에 나타난다. 댄디즘은 쇠퇴해가는 헤로이즘(heroism, 영웅주의) 최후의 꽃이다”라고 정의하면서 말이다.
댄디즘은 부르주아 남성복이라는 거대한 조류를 거스르기에는 너무 미미한 저항이자, 화려한 짧은 일탈이었다. 하지만 댄디즘이 아무런 유산을 남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댄디들이 정성 들여 받쳐 입었던 밝은 색깔의 조끼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매었던 넥타이는 남성복의 필수품이 되었다. 이 두 가지는 어두운 단색 옷감으로 만들어진 수수한 남성복에 유일하게 화려한 색깔이 허용되는 아이템으로 오늘날까지 살아남게 되었다.
저자 설혜심 |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16-17세기 영국 온천의 상업화>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수많은 사료 속에 숨겨진 역사를 찾아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익숙하지만 역사책으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주제를 통해 대중과의 역사대화를 시도하며 서양사를 알려왔다. 지은 책으로 《그랜드 투어》, 《지도 만드는 사람》, 《역사, 어떻게 볼 것인가》, 《온천의 문화사》, 《서양의 관상학, 그 긴 그림자》, 《제국주의와 남성성》(공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