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왕릉 비문의 지명과
4세기말-5세기초 고구려의 영토변화
소벌 가리소모로
1. 머 리 말
지명은 영토의 변화과정을 추적하는데 중요한 요소이며 지명 比定의 정확성은 영토 연구의 정확성을 좌우한다. 역사학적인 또는 정치적인 속성으로서의 영토가 아닌 언어학적인, 지리학적인 관점에서의 지명 (특히 고대시대의 지명)에 대한 연구가 아직 미비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철저한 접근이 요구되고 있다. 이 논문에서는 광개토왕릉 비문에 나타난 지명의 위치를 비정하여 광개토왕의 원정로 등을 복원하고 고구려의 영토 변화에 대한 몇 가지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廣開土王은 2․9 (18 세)에 임금자리 (永樂太王)에 올라 39세에 돌아갔으며 (413 년 癸丑 10월 겨울, 21년간 재위), 일년후 (414년 9월 29일) 능침에 안장되었다. 廣開土王陵 碑文은 고구려 초기의 역사와 광개토왕 생존시 업적을 勳蹟碑의 형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후대의 역사가들에 의해 덧붙이거나 줄이거나 하는 여과과정 없이 그 당시 시대의 사실을 그대로 제공하고 있다는 면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三國史記 高句麗 本紀의 광개토왕대 기사가 비교적 慕容씨의 後燕과의 관계를 중요시하여 다루고있는 반면에, 비문에는 백제와의 관계에 치중하여 적고있다. 三國史記 高句麗 本紀에서 廣開土王 5년과 8년 사이의 역사기록이 비어있는데 비문은 이 시기의 역사를 밝혀주는 자료로서의 가치 또한 크다.
永樂太王은 서기 396년, 百殘 (百濟)을 응징하기 위해 백제를 공략한다 (丙申 大遠征). 비문에는 이 과정을 밝혀주는 58개의 攻取城을 기술하고 있으며 아울러 광개토왕릉의 묘지기 (煙戶, 守墓人)로 國煙과 看煙을 뽑았다. 이 두 그룹의 지명자료가 이 논문의 연구대상이다. 攻取城의 지명은 전적으로 고구려어라고 볼 수는 없다. 지명의 보수성을 고려한다면 이전의 토착민의 언어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 논문에서 高句麗語라고 지칭하는 경우는 고구려어의 요소가 인정되는 때에만 한정하며 그 밖의 경우에는 古代語라고 부르기로 한다.
攻取城과 煙戶를 선발한 성들의 기술 순서는 지리적인 원근관계에 대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고 가정된다. 이러한 지리정보를 활용하여 지명들을 그룹으로 묶으며 각각의 그룹에서 확인 가능한 지명들을 바탕으로 그에 속한 다른 지명들의 위치를 비정하기로 하겠다. 이 논문은 언어학적인 연구를 기초로 하고 있으나, 碑文의 서체에 따른 글자 해독이나 언어학적인 부분에 대한 언급은 될 수 있는 대로 줄이고 역사학적인, 지리학적인 논의를 보다 깊이 있게 하여 광개토왕의 남정과정과 영토변화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기로 하겠다.
2. 攻取城의 위치 비정
광개토왕릉 비문의 攻取城 기술순서에 있어서 先驗的으로 ‘이웃하여 기술된 지명들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것’으로 가정된다. 묘지기 (煙戶) 선발지역 순서 또한 이러한 지리적인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고 가정된다. 두 그룹의 지명자료가 갖는 지리적 위치 정보는 보다 신뢰도가 높은 정보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지명들을 기술된 순서대로 번호를 매겨 攻取城 기술순서와 煙戶城 기술순서를 비교하면 <표 1>에서 보는 바와 같다 (<표 3>도 볼 것).
<표 1> 攻取城 기술순서와 煙戶城의 기술순서 비교.
攻取城순서 | 攻取城 | 煙戶순서 | 비 고 | 攻取城순서 | 攻取城 | 煙戶순서 | 비 고 |
1 | 壹八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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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 敦拔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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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臼模盧城 | 27 |
| 31 | □□ | (42) | 味城? |
3 | 若模盧城 | 28 | 各模盧城 | 32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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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幹氐利城 | 30 |
| 33 | 婁賣城 | 38 | 農賣城* |
5 | □□城 | (29) | 牟水城? | 34 | 散那城 | 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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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閣彌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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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 那婁城 | 46 | 那旦城 |
7 | 牟盧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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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 細城 | 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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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彌沙城 | 15 | 沙水城 | 37 | 牟婁城 |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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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古舍蔦城 | 20 | 舍蔦城 | 38 | 于婁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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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阿旦城 | 24 |
| 39 | 蘇赤城 |
| 蘇炭城 |
11 | 古利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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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 燕婁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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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利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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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 析支利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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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雜珍城 | 25 |
| 42 | 巖門嵓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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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奧利城 | 34 |
| 43 | 林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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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勾牟城 | 47 |
| 44 | 瀉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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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古模耶羅城 | 21 |
| 45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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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須鄒城 | 35 |
| 46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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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城 | (26) | 巴奴城? | 47 | □利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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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而耶羅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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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 | 就鄒城 | 43 | 就咨城 |
20 | 椽城 | 41 | 瑑城 | 49 | □拔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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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於利城 | 48 | [於利城] | 50 | 古牟婁城 | 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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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 | (22) | 炅古城? | 51 | 閏奴城 | 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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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豆奴城 | 33 | [豆奴城] | 52 | 貫奴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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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沸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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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 | 彡穰城 | 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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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比利城 | 49 |
| 54 | 曾拔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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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彌鄒城 | 31 |
| 55 | 宗古盧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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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也利城 | 32 |
| 56 | 仇天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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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大山韓城 | 37 |
| 5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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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 掃加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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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 | (百濟都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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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健群은 農賣城이 22번째 攻取城인 것으로 기술하였으나 婁賣城의 婁는 農의 誤字인 듯하다.
**周雲台의 拓本에서 ‘瀉城’이 있음이 확인되는데 王健群의 해독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煙戶城으로 언급되어 있으나 攻取城에 나타나지 않는 煙戶城은 牟水城, 炅古城, 巴奴城, 味城 등이며, 이들은 <표 1>에 나타낸 바와 같이 마멸된 자리의 성 이름일 것으로 보인다. 攻取城과 연호를 뽑은 성의 순서를 비교하여 구한 주요 군집은 다음과 같다 (숫자는 攻取城順/煙戶順이며 괄호 안은 해당군집에 속할 것으로 보이는 攻取城임).
(1) 2/27 臼模盧城 3/28 若模盧城 4/30 幹氐利城 5/29 牟水城 (1 壹八城 6 閣彌城 7 牟盧城).
(2) 8/15 彌沙城/沙水城 9/20 古舍蔦城 10/24 阿旦城 13/25 雜珍城 16/21 古模耶羅城 18/26 巴奴城 (11 古利城 12 □利城 14/34 奧利城 15/47 勾牟城 17/35 須鄒城).
(3) 20/41 椽城/瑑城 21/48 於利城 23/33 豆奴城 26/31 彌鄒城 27/32 也利城 28/37 大山韓城 31/42 味城 (18 □□城 19 □而耶羅城 22/22 炅古城 24 沸城 25/49 比利城 29 掃加城 30 敦拔城 32 □城).
(4) 33/38 婁賣城/農賣城 34/45 散那城 35/56 那婁城/那旦城 36/50 細城 (37/16 牟婁城 38 于婁城 39 蘇赤城 40 燕婁城 41 析支利城).
(5) 48/43 就鄒城/就咨城 50/40 古牟婁城 51/39 閏奴城 53/44 彡穰城 (49 □拔城 42 巖門嵓城 43 林城 44 瀉城 52 貫奴城).
광개토왕릉 비문의 지명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그간의 백제 영역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광개토왕의 ‘丙申大遠征’ 당시 百濟는 水谷城 (新溪), 關彌城 (喬桐島)을 고구려에 이미 빼앗겼다 (392-394년). 浿水에서 저항전을 벌였으나 대패하여 百濟 땅은 馬息嶺 산맥 남동쪽, 禮成江남쪽에 한정된다. 아울러 奈己 (榮州)와 小白山脈 서쪽이 百濟에 속했다 (<그림 1> 참조). 백제의 동북부에는 오랫동안 靺鞨이 있었으며 辰斯王때에도 이들과 몇 차례의 접촉이 있었음이 기록되고 있다. ‘攻取城’의 대부분은 이 범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역사서에 기술된 표기와 같아 확인 가능한 지명은 沙水城 (沙川), 阿旦城 (阿且城), 彌鄒城, 大山(韓城) 정도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타난 지명과 음성이 유사한 예로 비정하면 다음과 같다 (이하의 예문에서 밑줄 없는 한글은 고대국어, 밑줄 있는 한글은 後期中世國語, 밑줄 없는 영문은 中世몽고어, 밑줄 있는 영문은 滿洲․女眞語임).
(1)’ 가. 若模盧城 = 소모로 : 소모로 非勿 = 僧梁.
나. 牟盧城 = 모로골 : mori-골 馬忽 = mürü-골 臂城 = 골 堅城 = 抱川.
다. 閣彌城 = 고미골 : 長湍郡 고미성리.
(2)’ 가. 彌沙城/沙水城 : 沙川 = 놀모로 內乙買 = 노리모로 內爾買 = 連川.
나. 古舍*薦(蔦)城 = 여샤고치 : 야고치 古斯也忽次 = 獐項/臨江/臨津城.
나‘. 古舍*薦(蔦)城 = 여샤고치 : 야고치 古斯也忽次 = 獐項口 = 安山.
다. 阿旦城 : 阿且城 = 峨嵯山城 (서울동쪽).
라. 雜珍城 = 잡-돌-골 : 주부토 主夫吐 = 長堤 = 富川.
마. 古模耶羅城 = 고모야라 또는 고모 : 곰나 冬音奈 = 곰 休陰 = 河陰.
바. 巴奴城 = 보노 : 보노 平壤 = 北漢山郡 (楊州).
사. 古利城 = 고-리-골 : 골의노 骨衣內 = 荒壤.
아. 奧利城 = 오-리-골 : 얼모로고치 於乙買串= 泉井口 = 交河.
자. 勾牟城 = 구-모-골 : 검개 黔浦 = 金浦.
차. 須鄒城 = 수-추-골 : 수치소 首次若 = 새-치-사 鳥根乃 = 春川.
(3)’ 가. 椽城/瑑城 = 열기 : 열기 悅己 = 두렁열기 豆陵尹城 = 定山.
나. 於利城 = 리기 : 노--기 黃等也山 = 連山 : 누르기재 (連山).
다. 豆奴城 = 두노기 : 두나기 또는 두잉기 豆仍只 = 燕岐.
라. 彌鄒城 = 미추골 : 미추골 彌鄒忽 = 仁州 또는 仁川.
마. 也利城 = 야리기 : 얼기 構(槥)郡 = 唐津郡 沔川面.
바. 大山韓城 : 西山市 大山面 또는 鴻山.
사. 味城 = 미골 : 미골 未谷 = 昧谷 = 懷仁.
아. 炅古城 = 경-고 : 결기 結己 = 結城.
(4)’ 가. 那旦城/那婁城= 나-돌 : 노리돌 波旦 = 돌 斤乙於 = 平海.
나. 牟婁城 = 모루골 : 므르-벌 退火 = 義昌 = 興海.
다. 于婁城 = 우루 : 울 于尸 = 寧海.
라. 燕婁城 = 야루골 : 얄골 也尸忽 = 盈德.
마. 析支利城 = 서/석-지-리 : 사지리 沙熱伊 = 淸風.
(5)’ 가. 就鄒城/就咨城 = 얻-추/치-골 : 야치골 也次忽 = 母城/益城 = 金城.
나. 古牟婁城 = 여-모-루 : 얄모로 也尸買 = 狼川/狌川 = 華川.
나’. 古牟婁城 = 고-모-루 : 골 屈旨 = 牙山郡 新昌.
다. 閏奴城 = 윤-노-골 : 욘고치 要隱忽次 = 楊口.
라. 彡穰城 = 심노 : 시모로 悉直 = 三陟.
일차 비정 결과 1군은 강원도와 경기도 인접지역으로 보이며 2군은 서울부근의 경기도 지역, 3군은 충청남도와 일부의 경기도, 충청북도 지역, 4군은 경상북도 동해안 일대와 일부의 충북지역. 5군은 강원도 지역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2’ 차)의 須鄒城 (春川)은 같은 그룹의 지명들과 지리적으로 거리가 있다. (4’ 마)의 예에서도 이와 같은 양상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군마다의 개략적인 지역 비정을 바탕으로 각 군의 지리적인 위치를 고려하여 유사지명들로부터 나머지 지명들의 위치를 추정해보기로 하겠다.
(1)’’ 가. 臼模盧城 = (이돌?)모로 : 이돌모로 伊珍買 = 伊川.
나. 幹氐利城 = esi-뎌-리 : 오소비달 烏斯含達 = 兎山.
다. 壹八城 = 八坤城/八押城 = 여듧-압 : 아돌압 阿珍押 = 窮嶽 = 安峽.
(3)’’ 가. 沸城 = 비셩 : 비술 雨述 = 懷德.
나. 比利城 = 비리골 : 불골 朱乙城 (國原城) = 忠州.
(4)’’ 가. 農賣城/婁賣城 = usi-모로 : 엇모로 於斯買 = 橫川 = 橫城.
가’. 農賣城/婁賣城 = 노모로 : 나미 餘美.
(5)’’ 가. 瀉城 = 사(골) : 사라 沙尸良 = 黎陽.
나. 宗古盧城 = 고로 : 멸걸 滅烏/巨杰 = 龍仁 (= 미르-고로).
일본 역사서에서 ‘고마’ (熊津; > 곰나루)는 kumanari 久麻那利 또는 kumanori 久麻弩利로 표기되었다. 고대시대에도 ‘’ (= [ɒ])가 음운체계에 자리잡고 있었음을 추정케 한다. (3다)의 「두노기 : 두나기」, (4나)의 「나돌 : 노리돌: 돌」의 대응은 ‘’가 존재했음이 간접적이나마 상정케 하며 ‘두기’, ‘리돌 (돌)’ 등이 遠征 당시의 실제음에 가까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3. ‘丙申 大遠征’ 과정의 복원
攻取城 나열 순서가 갖는 정보는 점령된 지역에 대해 전쟁 지휘부에 보고된 순서일 개연성이 크다. 이러한 가정하에서 위의 비정 결과를 기초로 광개토왕의 남정 과정을 엿보기로 하겠다. 전제가 맞다면 첫째로 점령을 시도한 곳은 아돌압 壹八城 (安峽, 1)이다. 이는 광개토왕의 백제침략전쟁에 있어 浿水 국경선을 뚫지 않고 동으로 우회하는 전술을 폈음을 일러주는 것으로 생각케 한다. 고구려군은 처음 平山 (달골 多知忽) 부근에 보병과 기병이 집결하여 백제 정벌전쟁을 벌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 2>.
安峽을 발판으로 북쪽의 이돌모로 臼模盧城 (伊川, 2), 남으로 소모로 若模盧城 (僧梁, 3), 오소비달 幹氐利城 (兎山, 4)을 공략하며 그 뒤 두 갈래로 나뉘어 西道로 남으로 長湍路로 진격하여 牟水城 (5), 고미골 閣彌城 (長湍郡 고미성리, 6), 야고치 古舍薦城 (9)를 공격한다. 행군로로 보아 牟水城은 長湍郡내의 渭川里에, 야고치 古舍薦城는 安山이 아닌 임진나루 동쪽 臨江 (坡平郡 栗谷里 臨津城)임이 확실하다. 그 뒤 얼모로고치 奧利城 (交河, 14) → 고모개 句牟城 (金浦, 15) → 강화도의 고모/곰나 古模耶羅 (河陰, 16)에 이른다. 이때 浿水 전선이 무너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림 2. 광개토왕의 남정과정.
1. 아돌압 阿珍押. 2. 이돌모로 伊珍買. 3. 소모로 非勿. 4. 오소비달 烏斯含達. 6. 고미골 閣彌城. 7. 모로골 馬忽. 8. 노리모로 內尒買. 9. 야고치 古斯也忽次. 10. 아돌골 阿旦城. 11. 골의노 骨衣內. 12. 수리골 述尒忽/首泥忽. 13. 주부토 主夫吐. 14. 얼모로고치 於乙買串. 15. 고모개 黔浦. 16. 고모 冬音奈. 17. 수치소 首次若. 18. 보노 平壤. 19. □(寺浦/藍浦). 20. 열기 悅己. 21. 리기 (連山). 22. 결기 結己. 23 두기 豆仍只. 24. 비술 雨述. 25. 불골 朱乙城. 26. 미추골 彌鄒忽. 27. 야리골 烏山. 30. 고라부리 古良夫里. 31. 미골 未谷. 33. 엇모로 於斯買. 34. 사리벌 昔理火. 35. 리돌 波旦. 37. 모루벌 退火. 38. 울 于尸. 39. 골벌 屈火. 40. 얄골 也尸忽. 41. 사지리 沙熱伊. 44. 사라 沙尸良. 49. 고다라 (古省津). 50. 얄모루 也尸買. 51. 욘고치 要隱忽次. 52. 고시라 河瑟羅. 53. 시모로 悉直. 55. 멸고로 滅烏.
이후의 진로는 춘천 방향과 충청방향으로 나뉘는데, 金浦-江華 지역을 공략했던 부대는 항로인 강화도 지역에 교두보를 만든 뒤 황해도 延安 부근에서 출발했을 水軍과 합류하여 다음에서 언급할 충청지역으로 항해한 것으로 추정된다.
소모로 若模盧城 (僧梁, 3)에서 나뉜 ‘東軍’은 모로골 牟盧城 (抱川, 7) → 노리모로 沙水城 (沙川, 8) → 골의노 (荒壤, 11) → 아돌골 阿旦城 (10) → □利城 (12) → 주부토 雜珍城 (富川, 13)를 공략하고 그 뒤 보노 巴奴城 (楊州, 18)를 점령한다. 행군로로 보아 □利城은 수리골 述尒忽 (守安)로 추정된다. 阿利水 북쪽 아돌골 부근에서 이동방향이 바뀌는데 百濟都城을 공략하기 위한 지휘부가 이 부근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楊州는 北漢山郡 또는 平壤, 下平壤 (南平壤)으로도 불렸다. 百濟王城을 함락키 위한 指揮部 (또는 行在所/行宮)가 이곳에 있었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廣開土王이 몸소 이끈 水軍은 □ □而耶羅城 (19)로 상륙하였던 것 같다. 상륙한 부대가 열기 椽城/瑑城 (定山, 20) 방향으로 진출한 것으로 보아 □而耶羅城은 藍浦 (寺浦) 정도로 추측된다. 이를 바탕으로 본다면 상륙부대 일부는 북쪽의 결기 炅古城 (結城, 22)로, 주력부대는 동으로 열기 椽城/瑑城 (定山, 20) → 리기 於利城 (連山, 21) → 비술 沸城 (懷德, 24) → 두기 豆奴城 (燕岐, 23)를 공략한 뒤, 미추골 彌鄒忽 (26) → 야리기 也利城 (唐津郡 沔川, 27) → 大山 (28) → 掃加城 (29) → 敦拔城 (30)으로, 일부는 불골 比利城 (忠州, 25), 미골 味城 (懷仁, 31) 등을 공략한 듯하다. 行軍路로 보아 미추골 彌鄒忽은 牙山市 仁州面 지역이었던 것이 확실하며, 掃加城은 禮山市 五加面, 敦拔城은 고라부리 古良夫里 (靑陽)일 것으로 추정된다. 행군로가 중첩되는 懷德, 定山은 주요 지휘부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東軍’은 수치소 須鄒城 (春川, 17) 방향으로 진출하여 南道와 北道로 나뉘어 南道 (‘南東軍’)는 엇모로 農賣城 (橫城, 33)를 지나, 대재 (竹嶺) 쯤을 넘어, 사나골 散那城 (靑己, 34) → 노리돌 那旦城/那婁城 (平海, 35) → 細城 (36) → 모루벌 牟婁城 (興海, 37) → 얄골 燕婁城 (盈德, 40) → 울 于婁城 (寧海, 38) → 蘇赤城/蘇炭城 (39) 등의 순으로 점령한다. 행군로로 보아 蘇赤城/蘇炭城은 골벌 屈火 (臨河), 細城은 아기 阿兮 (淸河) 정도인 듯하다.
이후 攻取城으로 사지리 析支利城 (淸風, 41)가 나타나는데, 충청지역의 작전에 참가한 부대와 忠州 정도에서 합류한 것으로 추정된다. 비문에는 永樂 9년, 百濟가 倭와 和通하여 新羅를 괴롭히자 永樂 10년, 5만의 보병과 기병을 파견하여 男居城 (= 고시고골 : 곳갈이 高思葛伊 = 冠文 = 聞慶)에서 新羅城 (慶州)까지 들끓는 倭兵을 물리쳤다고 한다. 이러한 사정은 충주 지역에 주둔 부대가 있었음을 전제해야 한다 (<그림 2> 참조). 충청지역에 배로 상륙한 부대는 사라 瀉城 (洪城郡 黎陽, 44), 멸고로 宗古盧城 (龍仁, 55) 등과 해독되지 않는 성들을 공략한다. □拔城 (49)는 居拔城으로 비정되곤 했다. 이를 받아드리면 居拔城은 扶餘이다.
수치소 須鄒城 (春川)에 진주한 ‘東軍’의 일부 (‘北東軍’)는 야치골 就鄒城 (金城, 48) → 얄모루 古牟婁城 (華川, 50) → 욘고치 閏奴城 (楊口, 51) → 貫奴城 (52) → 시모로 彡穰城 (三陟, 53)로 진격하였다. 貫奴城은 행군로 위에 놓이는 고시라 河瑟羅 (江陵) 정도로 추정된다. 攻取城에 束草 주변이 들지 않는 것으로 보아 楊口를 지난 부대는 寒溪嶺을 넘어 남하한 듯하다. 행군로의 특성상 이 지역은 소모로 若模盧城 (僧梁, 3)에 인접해 있으며 僧梁에서 주력부대가 나뉘어 동해안 지역의 공격을 맡았을 가능성도 있다.
표 2. 광개토왕 비문 攻取城의 위치 비정.
| 攻取城 | 대비지명 | 당시지명 | 비 고 |
| 攻取城 | 대비지명 | 당시지명 | 비 고 |
1 | 壹八城 | 安峽 | 아돌압 | 阿珍押 | 30 | 敦拔城 | (靑陽) | (고라부리) | (古良夫里) |
2 | 臼模盧城 | 伊川 | 이돌모로 | 伊珍買 | 31 | 味城 | 懷仁(懷北) | 미골 | 未谷 |
3 | 若模盧城 | 僧梁 | 소모로 | 非勿 | 32 | □城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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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幹氐利城 | 兎山 | 오소비달 | 烏斯含達 | 33 | 農賣/婁賣城 | 橫城 | 엇모로 | 於斯買 |
5 | 牟水城 | (長湍 渭川) | (모모로) |
| 34 | 散那城 | 靑己 | 사리벌 | 昔理火 |
6 | 閣彌城 | 長湍 고미성 | 고미골 | (長湍郡내) | 35 | 那婁/那旦城 | 平海 | 리돌 | 波旦/斤乙於 |
7 | 牟盧城 | 抱川 | 모로골 | 馬忽 | 36 | 細城 | (淸河) | (아기) | (阿兮) |
8 | 彌沙/沙水城 | 沙川/連川 | 노리모로 | 內尒買 | 37 | 牟婁城 | 興海 | 모루벌 | 退火 |
9 | 古舍蔦城 | 臨江/臨津城 | 야고치 | 古斯也忽次 | 38 | 于婁城 | 寧海 | 울 | 于尸 |
10 | 阿旦城 | 峨嵯山 | 아돌골 | 阿旦城 | 39 | 蘇赤城 | (臨河) | (골벌) | (屈火) |
11 | 古利城 | 荒壤 | 골의노 | 骨衣奴 | 40 | 燕婁城 | 盈德 | 얄골 | 也尸忽 |
12 | □利城 | (守安) | (수리골) | (述尒忽) | 41 | 析支利城 | 淸風 | 사지리 | 沙熱伊 |
13 | 雜珍城 | 富川 | 주부토 | 主夫吐 | 42 | 巖門嵓城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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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奧利城 | 交河 | 얼모로고치 | 於乙買串 | 43 | 林城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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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勾牟城 | 金浦 | 고모개 | 黔浦 | 44 | 瀉城 | 黎陽 | 사라 | 沙尸良 |
16 | 古模耶羅城 | 河陰 | 고모/곰나 | 冬音奈/休陰 | 45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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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須鄒城 | 春川 | 수치소 | 首次若 | 46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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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巴奴城 | 楊州 | 보노 | 平壤 | 47 | □利城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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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而耶羅城 | (藍浦) | - | (寺浦) | 48 | 就鄒/就咨城 | 金城 | 야치골 | 也次忽 |
20 | 椽城/瑑城 | 定山 | 열기 | 悅己 | 49 | [居]拔城 | (扶餘) | (고다라) | (古省津) |
21 | 於利城 | 連山 | 리기 | 黃等也山 | 50 | 古牟婁城 | 華川 | 얄모루 | 也尸買 |
22 | 炅古城 | 結城 | 결기/결고 | 結己 | 51 | 閏奴城 | 楊口 | 욘고치 | 要隱忽次 |
23 | 豆奴城 | 燕岐 | 두기 | 豆仍只 | 52 | 貫奴城 | (江陵) | (고시라) | (河瑟羅) |
24 | 沸城 | 懷德 | 비술 | 雨述 | 53 | 彡穰城 | 三陟 | 시모로 | 悉直 |
25 | 比利城 | 忠州 | 불골 | 朱乙城 | 54 | 曾拔城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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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彌鄒城 | 仁州 | 미추골 | 彌鄒忽 | 55 | 宗古盧城 | 龍仁 | 멸고로 | 滅烏/巨杰 |
27 | 也利城 | 唐津郡 沔川 | 야리기/얼기 | 構城/槥城 | 56 | 仇天城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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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大山韓城 | 大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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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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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 掃加城 | 禮山市 五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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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 | (百濟都城) | 河南慰禮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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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호안의 지명은 비정에 있어 충분한 근거를 갖지 못한 경우임)
앞서 말한 대대적인 공세를 통해 廣開土王은 百濟王城 (河南慰禮城)과 그 주변을 제외한 백제 동부지역, 신라 동부지역, 百濟王城 남부 충청 지역 등을 점령하여 百濟王城을 거의 포위한 상태로 사태를 진전시켰다 (<그림 2> 참조). 그럼에도 百濟가 무릎을 꿇지 않고 맞서 싸우려 하자 (殘不伏義 敢出迎戰) 매우 화가 난 (赫怒) 광개토왕은 阿利水를 건너 특공대를 보내 百濟의 都城을 에워싼다 (遣刺迫城). 위급해진 백제 왕이 남녀 천명, 細布 천 필을 바치며 길이 奴客이 되겠다고 무릎꿇고 맹세하였다. 攻取城으로 기술된 성의 수는 쉰 일곱이다. 최후에 접수한 百濟都城이 攻取城에 포함되는 듯하다. 이로써 58 개성, 700여개 마을을 함락시켰다.
광개토왕의 남정 과정을 복원함으로써 우리는 행군로상에 놓이는 비정되지 못하였던 몇몇 攻取城의 위치를 비정할 수 있었다. <표 2>는 이들 지명과 앞서 비정된 지명들을 종합․정리한 것이며, 三國史記 地理誌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음가와 비교하여 당시 지명의 음가를 재구성하였다.
4. 烟戶의 분포 및 의미
광개토왕이 돌아간 뒤 광개토왕릉의 守墓人으로 國烟과 看烟이 선발된다. 묘지기중 1/3은 기존의 영토지역에서 뽑았다. 賣勾余, 東海賈, 敦城, 于城, 碑利城, 平穰城, 此連, 俳婁人, 梁谷, 梁城, 安夫連, 改谷, 新城, 南蘇城 (14 개 성)이 그것이다 <표 3>. 煙戶를 뽑은 주요 지역의 위치는 다음과 같이 비정된다.
(1) 賣勾余 = 모로고여 : 모로구루 買溝婁 = 文川.
(2) 于城 = 우골 : 오골 烏骨城 = 丹東市 鳳城縣.
(3) 碑利城 = 비리골 : 비라골 比烈忽 = 安邊 (또는 비리 碑麗 = 霜巖 = 險瀆).
(4) 梁谷 = 돈 : 모로돈골 水谷城 = 新溪.
(5) 梁城 = 골 : 모로골 抱州 = 義州.
(6) 改谷 = 가이돈 : 갈달 加尸達 = 犁山城 (鴨淥 以北 逃城).
(7) 新城 = 구치골 仇次忽 = 요하 서쪽 廣寧 (北鎭). 新城은 三國史記 地理誌에서 敦城으로도 불린 점으로 보아 둘은 이웃하여 있던 성인 듯함.
(8) 南蘇城 = 鴨綠江 以北.
아울러 비문의 客賢은 客(各)連 (가기야 加兮牙)임이 확실하며 淮陽이다. 광개토왕 대에 고구려의 영토는 북서로 거란 지역과 인접하고 중국과는 오라 烏剌 (遼河) 서쪽 (新城)에서 만난다. 아울러 만주지역 南蘇城, 단동 봉황성 (烏骨城), 犁山城 등이 보인다. 한반도 지역에서 東海 商人 (집단), 平壤, 新溪, 義州 등이 포함되나 淮陽은 기존의 영토에 포함되고 있지 않고 百濟, 新羅 지역처럼 ‘新來 韓穢’로 분류하고 있다.
<표 3> 각 지역에서 뽑은 묘지기.
| 이 름 | 國烟數 | 看烟數 | 非攻取城 | 비 고 |
| 이 름 | 國烟數 | 看烟數 | 非攻取城 | 비 고 |
1 | 賣勾余 | 2 | 3 | ○ | 文川 | 26 | 巴奴城 |
| 9 |
| 楊州 |
2 | 東海賈 | 3 | 5 | ○ | (집단) | 27 | 臼模盧城 |
| 4 |
| 伊川 |
3 | 敦城 |
| 4 | ○ |
| 28 | 若模盧城 |
| 3 |
| 僧梁 |
4 | 于城 |
| 1 | ○ | 丹東 | 29 | 牟水城 |
| 3 |
| (위천) |
5 | 碑利城 | 2 |
| ○ | 霜巖 | 30 | 幹氐利城 | 2 | 3 |
| 兎山 |
6 | 平穰城民 | 1 | 10 | ○ | 平壤 | 31 | 彌鄒城 | 1 | 7 |
| 仁州 |
7 | 此連 |
| 2 | ○ |
| 32 | 也利城 |
| 3 |
| 沔川 |
8 | 俳婁人 | 1 | 43 | ○ | (집단) | 33 | 豆奴城 | 1 | 2 |
| 燕岐 |
9 | 梁谷 |
| 2 | ○ | 新溪 | 34 | 奧利城 | 2 | 8 |
| 交河 |
10 | 梁城 |
| 2 | ○ | 義州 | 35 | 須鄒城 | 2 | 5 |
| 春川 |
11 | 安夫連 |
| 22 | ○ |
| 36 | 百殘南居韓 | 1 | 5 | △ | (집단) |
12 | 改谷 |
| 3 | ○ | 犂山城 | 37 | 大山韓城 |
| 6 |
| 大山 |
13 | 新城 |
| 3 | ○ | 廣寧 | 38 | 農賣城 | 1 | 7 |
| 橫城 |
14 | 南蘇城 | 1 |
| ○ | 鴨淥以北 | 39 | 閏奴城 | 1 | 22 |
| 楊口 |
15 | 沙水城 | 1 | 1 |
| 連川 | 40 | 古牟婁城 | 2 | 8 |
| 華川 |
16 | 牟婁城 |
| 2 |
| 抱川 | 41 | 瑑城 | 1 | 8 |
| 定山 |
17 | 豆比鴨岑 |
| 5 | △ | 두비압솔 | 42 | 味城 |
| 6 |
| 懷仁 |
18 | 勾牟客頭 |
| 2 | △ | 고모가두 | 43 | 就咨城 |
| 5 |
| 金城 |
19 | 求底韓 |
| 1 | △ | 全義 | 44 | 彡穰城 |
| 24 |
| 三陟 |
20 | 舍薦城韓穢 | 3 | 21 |
| 臨江 | 45 | 散那城 | 1 |
|
| 靑松 |
21 | 古模耶羅城 |
| 1 |
| 河陰 | 46 | 那旦城 |
| 1 |
| 平海 |
22 | 炅古城 | 1 | 3 |
| 結城 | 47 | 勾牟城 |
| 1 |
| 金浦 |
23 | 客賢韓 |
| 1 | △ | 淮陽 | 48 | 於利城 |
| 8 |
| 連山 |
24 | 阿旦城 |
| 10 |
| 峨嵯山 | 49 | 比利城 |
| 3 |
| 忠州 |
25 | 雜珍城 |
|
| 富川 | 50 | 細城 |
| 3 |
| (淸河) |
(△: 남정 이전 백제의 영역에 있던 지명이나 공취성의 범위에 들지 않는 성임)
煙戶에 있어 주목되는 것은 看烟의 수이다. 舊民중 平穰城, 俳婁人, 安夫連에 대해서는 각각 10, 43, 22 등으로 매우 많다. 새로 편입된 지역에 있어서도 야고치 古舍薦城, 욘고치 閏奴城, 시모로 彡穰城에서 월등히 많으며 각각 21, 22, 24 호를 뽑는다. 이의 해석은 현재로써는 바르게 이르지는 못한다. 다만 ‘北東軍’이 점령한 지역 (金城, 華川, 楊口, 江陵, 三陟)은 지리적인 위치에 비해 매우 뒤에 기술되어 있다는 것이 주목된다. 앞에서 전제했듯이 攻取城 기술 순서가 점령 순서라고 한다면 이러한 사정은 이 지역이 매우 공략하기 어려운 대상이었음을 전제해야 한다. 楊口 및 三陟에서 징발된 연호수가 월등히 많은 것도 이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 듯하다.
煙戶의 수로 보아 야고치 古舍薦城 (臨津城)은 공략키 어려운 대상이었음을 내비치는데 국경을 지키던 일단의 백제군 밀집지역인 지휘통제소 (사령부)가 있었을 가능성을 상정케 한다. 平穰城, 俳婁人, 安夫連 또한 이 시대에 통치키 어려운 지역이었지 않았겠는가 하는 추정만이 남는다.
5. 토의 및 결론
이 연구는 攻取城과 연호를 뽑은 성들의 기술 순서가 지리적인 정보를 포함할 것이라는 가정하에서 지명을 비정하여, 이를 바탕으로 廣開土王 남정 과정의 재구성을 시도하였다. 연구결과 廣開土王의 비문에 나타난 攻取城의 기술순서는 지리적인 관계로 보아 남정과정에서 공략하여 지휘부에 보고된 순서였던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광개토왕은 원정의 돌파구를 백제와 접경하던 浿水 지역이 아닌, 동쪽에 있는 安峽-伊川-兎山 지역에서 찾았으며 우회전술로 浿水 국경선의 후방을 공격하여 국경수비대를 와해시켰다.
소모로 若模盧城 (僧梁)에서 나뉜 ‘西軍’은 강화도 지역으로 진출하여 수군의 항로를 열어주고 ‘東軍’은 남으로 진출하여 하남위례성과 맞설 방어선을 구축한다. 이 ‘東軍’은 春川 방면으로 진출하여 일부는 남동쪽으로 橫城 - 靑己 - 平海 - 盈德 - 興海 지역을 공략한다.
浿水 지역과 臨津城 지역 (長湍郡 일대)의 백제의 국경수비대를 격파한 廣開土王은 황해도 延安 또는 喬桐島 (達乙斬 = 關彌城)에서 출발했을 水軍과 합류하여 몸소 이들을 이끌고 백제의 후방인 충청 지역을 공략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藍浦 정도에서 상륙한 부대는 북으로 結城, 동으로 定山 - 連山 (論山) - 懷德 - 燕岐 - 牙山市 仁州面 - 唐津郡 沔川 - 西山市 大山面 - 禮山市 五加面- 靑陽 등을 공략한 뒤 懷德 내지 定山 정도에 주둔하여 淸州 - 忠州 방면을 공략한 듯하다. 行軍路로 보아 彌鄒忽은 仁川이 아니고 牙山市 仁州面임이 분명하며 고구려 때 仁川은 또다른 표기인 모로조골 買召忽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남정이전 원래 영토에서 연호를 뽑은 성 중에 한반도 지역에서 東海 商人, 平壤 등이 포함된다. 淮陽은 기존의 영토에 포함되고 있지 않다. 강원도 지역은 비교적 공략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 뒤에 고구려의 영토로 분류된 지역으로 鐵原 (털도비 毛乙冬非), 金化 (夫如), 平康 (= 어시노 於斯內 = 廣平/斧壤), 通川 (소노 休壤), 高城 (달골 達忽), 杆城 (가라골 加阿忽/加羅忽)은 攻取城의 범위에 들지 않으며 이 지역에 상주했던 것으로 보이는 靺鞨과의 충돌이 기록되고 있지 않음도 주목된다.
‘北東軍’은 金城 - 華川 - 楊口 - 江陵 - 三陟 지방의 공격을 맡았으나 비교적 뒤에 서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공격에 매우 난항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金城이 僧梁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점을 고려할 때 초기부터 이 지역을 공격하기 위해 전담했으나 어려움을 겪었을 가능성을 반영한 것으로도 풀이된다. 靺鞨은 고구려와 우호관계였던 것 같으나 북동군의 활약 이후 자연히 靺鞨은 고구려에 흡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長壽王은 廣開土王陵의 묘지기를 百濟의 영토인 충청지역 (全義, 結城, 仁州, 沔川, 燕岐, 大山, 定山, 懷仁, 連山)에서도 뽑았다. 서기 475 년, 長壽王이 百濟王都 漢城을 함락하여 蓋鹵王을 弑殺하자 文周王이 등극하여 百濟의 수도를 하남위례성에서 熊川(公州)로의 옮기기까지 고구려군은 충청 지역에 주둔했던 것으로 보인다. 永樂太王 10년, 신라를 구하러 新羅 都城으로 원정을 가는 과정에서 접수된 성은 신라인을 戌兵으로 두어 지키게 했음을 명시하고 있다 (安羅人戌兵). 반면 ‘丙申 大遠征’ 때의 攻取城에는 이러한 명시가 없는 것으로 고구려군으로 戌兵을 두었음을 내비친다. 永樂太王 8년, 莫斯羅城 (모시라 = 馬西良 = 沃溝), 加太羅谷 (가타이라실) 등의 공략은 충청 지역 (懷德 지휘부 ?)에 주둔한 군대가 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百濟의 南遷後 조정되어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국경이 얼마간 고착된 것으로 상정된다.
三國史記 地理誌 권37에는 蔚珍 (于珍也), 平海 (波旦 = 那旦城), 盈德 (也尸忽 = 燕婁城), 助攬 (眞寶 부근), 靑己 (昔里火 = 散那城), 臨河 (屈火 = 蘇赤城), 安德 (伊火兮), 寧海 (于尸 = 于婁城), 淸河 (阿兮 = 細城?), 三陟 (悉直 = 彡穰城) 등은 고구려 영토로, 권 34에서 興海 (退火 = 牟婁城), 安東 (古陁耶), 眞寶 (柒巴火)는 신라 영토로 분류되어 있다. 고구려의 영토가 이 지역에까지 이른 것은 광개토왕의 丙申大遠征때 이루어졌을 것으로 확인된다. 新羅 영토였던 이들 지역을 점령했다는 사실은 廣開土王의 丙申大遠征이 ‘新羅를 괴롭히는 百濟를 응징한다’는 명분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 있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