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성(安乃成)은 호는 경만(敬萬)이다. 1867년(고종4) 10월 25일
경남 함안군 가야면 도음실에서 안성유安成有(부父)와 선녕宣寧 남씨南氏(모母)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1949년 10월 25일 김제 청도리 백운동 자택(83세)에서 별세 하시다.
경만(敬萬) 안내성의 방황, 입문 |
1 안내성(安乃成)은 본래 이름이 내선(乃善)으로 경남 함안(咸安) 사람이라. 2 내성이 대여섯 살이 되어 부친이 글을 가르치려 하는데 공부는 아니하고 밖으로 다니며 씨름이나 주먹질만 일삼거늘 3 내성의 조부가 이르기를 “저 아이는 글을 가르칠 아이가 아니니 내버려 두라.” 하니 4 내성의 부친이 감히 거역하지는 못하나 심중이 심히 편치 못하여 어느 날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 된지라 5 내성이 여덟 살 되던 해에 조부가 돌아가시매 아홉 살에 부친을 찾아 집을 떠나 황해도(黃海道), 평안도(平安道) 할 것 없이 전국 방방곡곡을 걸어서 돌아다니니라. 천하를 건질 분은 조선에서 나오니 6 그러다가 금강산(金剛山) 어느 절에 들어가 3년 동안 불목하니 노릇을 하며 중들에게 불경을 얻어듣고 하던 차에 7 하루는 ‘미륵존불이 출세해야 세상이 밝아진다.’는 말을 듣고 귀가 번쩍 뜨여 아버지도 찾고 스승도 찾을 겸 다시 길을 떠나 8 미륵존불을 간절히 염원하며 마음으로 불경을 외우면서 이 소문 저 풍문을 좇아 장돌뱅이로 전국을 안 가본 데 없이 돌아다니더니 9 나중에는 멀리 청국(淸國) 산천까지 밟으며 십팔기(十八技)를 익히기도 하니라. 10 이렇게 미륵님을 찾아 천지를 헤매 다니는 중에 한번은 북경(北京)에 이진사(李進士)라는 도통군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천리를 멀다 않고 찾아갔거늘 11 그 사람이 북경에 있지 않고 남경(南京)에 갔다 하므로 남경까지 찾아가니 12 이번에는 그곳에서 도로 북경으로 돌아갔다 하매 내성이 다시 북경으로 가서 마침내 그 사람을 만나니라. 13 이에 이진사가 말하기를 “천하를 건질 천 선생(天先生)은 조선에서 나오니 공연히 여기서 헤매지 말고 당신 나라로 돌아가라.” 하거늘 14 내성이 순간 ‘천하를 건질 천 선생님이라면 출세하신 미륵님이 틀림없다.’ 확신하고 뜻밖의 반가운 소식에 기뻐하며 서둘러 조선으로 돌아오니라. (道典 3:189) 진주 촉석루에서 임천가를 들으니 1 이후로 내성이 불경을 염송(念誦)하며 반드시 ‘천 선생님’을 찾고야 말겠노라는 일념으로 전국을 떠돌며 지내더니 2 하루는 진주(晉州) 촉석루(矗石樓)에 이르러 설핏 낮잠이 드니라. 3 이 때 홀연 정신이 황홀한 가운데 하늘에서 한 선관의 음성이 들리며 4 “내선(乃善)아, 네가 이곳에 있을 줄 알았노라. 노래를 받아라.” 하고 낭랑하고 유려한 음률로 임천가(林泉歌)를 들려주는데 일찍이 들어 보지 못한 아름다운 선율이더라. 5 이윽고 노래가 그치매 다시 선관이 “석가모니는 지나간 부처니 염불은 그만하고 이제부터 너는 천 선생을 찾아 모시도록 하라.” 하는 말을 남기고 아득히 하늘로 사라지니라. 6 내성이 문득 깨어 보니 꿈인지라 크게 용기를 얻어 ‘지성이면 감천이다. 내가 틀림없이 천 선생님을 만나겠다.’ 생각하고 내처 길을 떠나 오매불망 아버지와 천 선생님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7 정미년 여름에 이르러 미륵신앙의 본원지인 금산사 미륵전(彌勒殿)에 들어가 며칠 동안 머물면서 8 꿈에도 그리운 아버지와 현신출세 미륵불이신 천 선생님을 만나게 해 주시기를 미륵불께 지성으로 발원하니라.(道典 3:190) |
1907년 증산(甑山)을 만나 그의 종도(宗徒)가 되었다.
1909년 증산은 안내성에게 『현무경(玄武經)』과 흰 병을 주면서,
“이 자리를 3년간을 떠나지 말고 앉아서 『태을경(太乙經)』을 읽으라.”고 하였으므로 그 뒤 증산이 사망한 줄도 모르고 가난한 속에서도 3년간 수련을 계속하였다.1911년 수련을 마치고 고부인(高夫人)이 선도교(仙道敎)를 설립할 때 참여하였으나,
차경석(車京石)과 뜻이 맞지 않아 1913년 여수 가국리에서 교당을 창설하였다.
1927년에는 전주군 우림면 청도리(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백운동으로 본부를 옮겨
전국에 있는 신도들 수백 명을 이주시켜 교인촌을 형성하였다.
그는 자기가 증산의 수제자이므로 증산으로부터 새 시대의 운수를 조종하는 능력을 받았다고 하고,
일심으로 수도하면 멀지 않아 증산이 환생하여 큰 복을 주리라고 하면서
신자들에게 주문 한 가지씩을 주고 기한을 정하여 읽게 하되,
그 기한이 끝나면 다른 주문을 주면서 수련을 시켰다.
1929년 보천교를 탈퇴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교세가 크게 확장되자,
한때 교명을 증산대도교(甑山大道敎)로 바꾸기도 했는데,
이 무렵 신도수가 3천 명을 넘었다고 한다.
그 뒤 교당이 점차 위축되다가, 1949년 사망했다.
안내성이 창립한 선도의 신앙대상은 천선생 즉 천황·지황·인황으로서의 증산이다.(한민족 백과사전)
정미년(丁未年/1907년)초가을에 모든 종도들이 모여서 술을 대접할세 가라사대 "앉은 순서대로 시조를 부르라"하시니 차례대로 부르더라 이때에 시조를 못하는 사람은 막노래도 부르며 순서가 돌아가던바 안내성은 태인 대각교(大覺橋)에서 뵈옵고 시봉을 시작한 후로 지금까지 방에 들라는 명이 계시지 않으므로 공사에 참여치 못하고 밖에만 있더니 그날은 안내성을 처음으로 방에 들어 앉히시므로 내성은 황공히 앉았더라 급기야 안내성의 차례가 되어 전에 듣고 배워둔 임천가(林泉歌)를 하였더니 들으시고 가라사대 "내성은 촉석루를 언제 다녀왔느뇨"하시니 내성은 깜짝놀라 속으로 생각하기를 '진실로 선생께서는 신인이시로다. 내가 왕년에 촉석루에서 이 노래를 배운줄 어찌 알 수 있으리요'하고 탄식 했다하더라. 이때에 박공우는 종도들의 시조 솜씨를 들어보니 모두가 시조 한가락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고 경석 형렬 광찬등이 평시조를 흉내낼 따름이요, 그외는 막노래도 제대로 못 부르니, 속으로 생각하기를 옳지 참으로 좋은 기회로다. 내가 본래에 문자를 배우지 못한고로 무식하여 중인(衆人)의 이목을 끌지 못하므로 항상 열등을 면할 바 없더니 오늘은 내 시조로써 방중(房中)의 이목을 집중하여 앞으로 동료들간에 월등함을 인증받고 또한 상제께서도 내 시조 솜씨를 들어보시면 앞으로는 대우가 다르리라 하며 고대(苦待)하여 차례를 기다리더라. 순서대로 시조를 불러 급기야 공우의 옆 사람의 시조가 끝나고 공우가 시조를 부르려할때 상제께서 "고만"하고 어수(御手/손)를 드시어 공우의 시조를 막으시며 가라사대 "공우의 시조야 들어 보나마나 잘 하니까"하시고 시조 부르던 일을 그치게 하시었다하니라 그후 종도들이 말하기를 시조를 부르게 하신 깊은 뜻을 모르겠으나 다만 알수 있는 바는 시조를 못하는 사람은 부르게 하시고 잘하는 사람은 못 부르게 하시니, 이는 우열을 고루시는(均調)법인 듯 하다고 이르더라.(정영규천지개벽경 3:27)) |
임천가(林泉歌) | |
임천(林泉)은 초당(草堂)삼고 만고일월(萬古日月) 곁에 두고 때가되매 금주(金主)가 세상 문 열려 하니...!! 거문고 비파(琵琶) 양금에 새 줄을 골라서 천신만고 신고 끝에 남풍가(南風歌)로 화답(和答) 하매 드디어 만고강산(萬古江山) 허물을 벗어내고 마침내 모두가 지상선(地上仙)이 되는구나.(이로구나.) 임 잃고 임 생각 하니 밤마다 꿈 몽(夢) 자요 생각 념(念)자, 탄식 탄(嘆)자 하니 모두가 어깨 너머 눈물 루(㴃) 자요 언제나 우리도<정든 님> 만나서 웃움 소(笑) 자, 줄거울 락(樂)자로 세월을 보낼까 하더니...!!(보낼거나.) <바람> 불고 <비> 오실 줄 알며는 어찌 <학창의(鶴氅衣)> 지어다 뒤고방에 걸꺼며 정녕 임이 오실 줄 알며는 어찌 문을 걸고 깊은 잠을 잘까...!! 차후로 임 오신다는 소식이 풍월에 일러 들리거든 유문장등(留門長燈), 자리 보존하고 저 달이 떳다 지도록 기다렸으련만...!!(기다리소.) 바람타고 세월 따라 올곳에 왔으나 텅 빈 네거리에 기다리는 사람하나 만날 수 없으니 슬프고 외로운마음 말할수 없으나 묵고묵은 선천의 하늘을 걷어내고 밝아온 새천지의 새벽을 깨우리라 |
<참고> : 1) 임천(林泉): 숲과 샘. 은사(隱士:벼슬을 하지 않고 숨어사는 학덕이 높은 선비)가 사는 곳. 2) 氅(창-새의 깃털), 학창의鶴氅衣는 학의 털로 꾸민 옷이며, 은자隱者가 입는 학창의를 선창仙氅이라고도 함. 3) 남훈금(南薰琴): 순(舜) 임금이 오현금(五絃琴)을 타면서 지었던 <남풍가(南風歌)>를 가리킨다. |
<南風歌(남풍가)> 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兮 남풍부니 훈훈한 향기여. 가이 우리 백성의 애간장을 풀겠구나. 南風之時兮 可以阜吾民之財兮 남풍이 때맞춰 불어옴이여. 가이 우리 백성의 재물이 언덕을 이루리로다.<孔子家語 辯樂解> |
禮記의 樂記에도 그 사실을 기록하고 있으나, 歌詞는 없고 鄭玄의 注에 「그 辭아직 알지 못한다.」라고 적혀있다. 《史記·樂書》에는 《南風》은 天下治, 生長之音으로 舜이 樂을 좋아했는데, 이를 통해 백성의 歡心 (환심)을 알 수 있으니 "天下治也"라했다. 《南風歌》相傳爲舜帝所作。 《禮記·樂記》 曰:“昔者舜作五絃之琴以歌《南風》。 《古今樂錄》 曰:“舜彈五絃之琴,歌《南風》之詩。 《史記·樂書》曰:“舜歌《南風》而天下治,《南風》者,生長之音也。舜樂好之,樂與天地同,意得萬國之歡心,故天下治也。”明初,晉王朱(木岡)展擴太原城,新增修大南門,取《南風歌》之意,原南門命名爲承恩門,即辛亥革命後的首義門,新南門命名爲迎澤門。 此詩前兩句始見戰國屍佼的《屍子·綽子篇》,全詩始出三國魏王肅收集編撰的《孔子家語·辯樂解》。 《孔子家語》是王肅僞託之作,今人因而懷疑《南風歌》也是後人僞作。舜爲傳說人物,其“作五絃之琴以歌南風”,很可能是小說家筆法。不過據考證,《南風歌》自戰國後已廣爲人知。今人逯欽立指出:“《史記》已言歌《南風》之詩。馮衍《顯志賦》又云詠《南風》之高聲。步騭《上疏》亦言彈五絃之琴,詠《南風》之詩。俱證《屍子》以後,此詩傳行已久。謂爲王肅僞作,非是。”(《先秦漢魏晉南北朝詩》)王力則從音韻學的角度指出:此詩“以‘時’‘財’爲韻,這種古韻也決不是漢以後的人所能僞造的”(《漢語詩律學》)。當然,這首句式整齊、詩語明朗、抒情優美的《南風歌》,也不可能是舜帝時代的原作,而是在口耳相傳的過程中,經過了後人的加工和潤色的。 薰(향초 훈): 원래는 향초의 이름. 기분 좋게 부는 산들바람. 慍(성낼 온): 마음속의 불만, 불평 阜(언덕 부): 언덕을 쌓을 정도로 풍요로움 |
학창의(鶴氅衣) |
조선시대 남성용 포로, 트임이 있는 창의의 일종이다. 깃과 소매부리, 옷의 가장자리에 검은색 선이 둘려있 는 것이 특징이다. 학창의는 예로부터 신선이나 도사 또는 학자가 입는 옷으로 전해졌다. 심의와 같이 검은 선이 둘러 있어 심의 대신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공복의 속옷, 사대부의 평상복, 사신복, 습의(襲衣) 등으로 사용되었다. 학창의를 입을 때는 심의와 마찬가지로 복건이나 와룡관, 정자관, 동파관, 방건 등을 썼다. |
정읍 새재에서 상제님을 처음 뵌 날 |
1 6월 22일에 내성이 금산사에서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드디어 꿈에 그리던 ‘천 선생님’이신 상제님을 만나니라. 2 내성이 정해(井海)를 지나 정읍 새재를 넘으려는데 그 날 따라 유난히도 날이 푹푹 쪄서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거늘 3 ‘새재 입구 주막에 들어 목이나 좀 축이고 갈까.’ 하다가 ‘기왕이면 올라가서 쉬자.’ 하고 4 옷소매로 땀을 닦고 칡잎을 훨훨 부쳐 가며 허위허위 고갯마루에 올라 나무 그늘을 찾으니 서늘한 돌 위에 패랭이를 쓰신 상제님께서 앉아 계시더라. 5 내성이 그 곁에 앉아 땀을 들이고 있는데 문득 지난 시절이 떠올라 회한이 밀려오거늘 6 ‘내가 아버지와 천 선생님을 찾아 천지 사방을 헤매 다녔건만 여태 소식 한 장 못 듣고, 그리자니 꿈속의 임이로구나. 이번 길에도 못 찾으면 다시 청국에나 가야겠다.’ 하는 생각을 품으니 7 문득 옆에 계신 상제님께서 담배를 재어 한 모금 빠시고 먼 데를 바라보시며 뜬금없이 “참, 별 미친놈을 다 보겠네.” 하시니라. 8 내성이 본래 진주, 사천(泗川) 바닥에서 ‘안바람’으로 통하는 이름난 장치기꾼인 데다 일찍이 어디 가서도 싸움에 져 본 적이 없거늘 9 듣자 하니 손아래인 듯한 젊은이가 시비를 거는 투라 슬슬 심사가 나는데 방금 미륵전에 다녀오는 길인지라 마음을 다스려 점잖게 말하기를 “누구보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게요?” 하니 10 상제님께서 대뜸 고개를 돌리시며 “야, 이놈아! 여기에 너밖에 더 있냐! 너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이 미친놈아!” 하고 불벼락을 치시매 11 눈이 마주치는 순간 뭐라 형언할 수 없이 목이 메고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과 뻗치는 서기에 그만 기가 꺾여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으니라. 12 이어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나도 미친놈이다만 네놈도 단단히 미친놈이로구나. 네 이놈! 너 아버지 찾으러 다니지? 네 아버지 삼월 초열흘날 ○○에서 죽었어. 그 날 제사나 잘 지내라, 이놈아! 13 그래, 청나라로 가면 네가 큰일을 한번 하겠다. 아주 청나라로 가거라, 이 미친놈아!” 하고 불같이 호통을 치시니 혼이 쑥 빠질 지경이더라.(道典 3:191) 저놈, 미친놈! 강도놈! 도둑놈! 1 이 느닷없는 호통에 내성이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속이 뻥 뚫리는 듯하고,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의 속내를 마치 손금보듯 속속들이 꿰고 있음에 놀랍기도 하여 2 ‘혹시 이분이 천 선생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한 줄기 섬광처럼 스치는지라 다짜고짜 “선생님! 뵙겠습니다.” 하고 머리를 조아리니 3 상제님께서 “저놈, 저 미친놈! 내가 어째서 네 선생이냐, 이 강도놈아!” 하시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시거늘 4 내성이 지금 당장 붙잡지 않으면 다시는 못 뵐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정읍 쪽으로 내려가시는 상제님을 쫓아가매 5 상제님께서 “이 도둑놈, 청국에나 가라!” 하고 버럭 화를 내시며 길가의 호박돌을 집어 던지시니라. 내성을 혹독하고 박절하게 대하심 6 내성이 이미 미륵전에서 서원을 세운 바가 있어 ‘죽어도 따르리라.’ 마음먹고 그 큰 돌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머리에 맞으니 7 순간 눈에서 번쩍 하고 번개가 튀는가 싶은데 상처는커녕 오히려 머리가 맑아지고 몸이 가뿐해지므로 더욱 상제님께 매달리니라. 8 이에 상제님께서 “이놈의 자식, 따라오지 말라는데 뭣 하러 자꾸 성가시게 따라오는지 모르겠다.” 하시며 내처 더 큰 돌을 던지시거늘 9 내성이 피하지 않고 머리, 어깨, 가슴, 팔다리 할 것 없이 무수히 맞으며 대흥리까지 따라가니 10 경석의 집에 이르시어 손에 잡히는 대로 다 집어 던지시고 심지어 베시던 목침까지 던지며 문전박대를 하시니라. 11 이리하여 내성은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매던 상제님을 만나니 이 때 내성의 나이 41세라. 12 이로부터 내성이 상제님을 추종하거늘 상제님께서는 항상 매정하고 박절하게 대하시니라.(道典 3:192) 아침도 주지 말고 당장 내쫓아라 1 내성이 상제님을 만난 첫날 밤을 경석의 집 헛간에서 자고 이른 아침에 인사를 여쭈러 찾아뵈니 2 보시기가 무섭게 역정을 내시며 “저런 못된 놈은 아침도 주지 말고 당장에 내쫓아라.” 하고 구박하시거늘 모두들 보기에 딱하긴 하나 어찌하지 못하니라. 3 이에 경석의 아내가 상제님의 눈을 피해 몰래 먹을 것을 갖다주다가 그만 들켜 버린지라 4 상제님께서 당장에 밥그릇이고 국그릇이고 다 내던지시며 “너는 여기서 한 밥 먹지 말고 네 어미가 빌어다 준 밥만 먹고 살아라.” 하시니 이후로는 무엇을 갖다 줄 엄두조차 내지 못하더라. 5 밥을 두세 끼 굶어도 밥 먹으란 말씀도 안 하시니 굶기가 다반사요, 바깥날이 아무리 추워도 방에 들어오라는 말씀 한 번 없으시매 헛간이나 부엌에서 새우잠을 자는데 6 상제님의 눈에 띄기만 하면 “저놈 미친놈이라.” 하며 미워하시고 매몰차게 대하시며 따라다니지도 못하게 하시거늘 7 다른 성도들도 상제님께서 그리 대하시는 것을 예사로 여겨 날이 갈수록 내성을 천덕스럽게 여기니라.(道典 3:193) 내 방에 와서 자라 1 그러던 어느 날 공사를 행하실 때 상제님께서 내성에게 명하시기를 “너 오늘 어디 가서 돼지 한 마리 구해 오너라.” 하시거늘 2 내성이 돈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으나 상제님께서 처음으로 내리시는 명인 데다가 비로소 자신을 불러 써 주심에 황감하여 3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씀을 받들리라.’ 마음먹고 여러 집을 다니며 사정해 보았으나 아무도 내성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지라 4 ‘명을 받들지 못할 바엔 차라리 죽겠다.’는 각오로 어느 집에 가서 이 백 근이 넘는 큰 돼지를 둘러메고 와 상제님께 올리니라. 5 상제님께서 그 돼지를 삶아 공사를 보신 후에 성도들로 하여금 고기를 나누어 먹게 하시는데 정작 내성은 맛도 못 보게 하시거늘 6 내성이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밤중에 가만히 부엌에 들어가 돼지 삶은 국물을 솥바닥이 훤하도록 마구 퍼먹으매 배탈이 나서 밤새 뒷간을 들락날락하니라. 7 이튿날 상제님께서 솥을 열어 보시고는 “아따, 그놈 국량 하나 크다!” 하시고 이어 “저놈 배 터져 죽는다. 돼지고기 삶은 물 먹고 저놈 뒈진다.” 하고 소리를 지르시니 8 내성이 뱃속에 든 것을 남김없이 쏟아 버리거늘 몸이 축나기는커녕 오히려 거뜬하더라. 9 이 공사를 행하신 뒤에 하루는 상제님께서 “저놈 불쌍하니까 내 방에 와서 자라고 해라.” 하시더니 이후로는 내성을 부드럽게 대하시니라. 너 알아서 하거라 10 하루는 내성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내성아! 네가 하늘을 섬기면 하느님이 있는 것이고, 하늘을 배신하고 믿지 않으면 하느님도 없는 것이니 너 알아서 하거라.” 하시니라.(道典 3:194) 네가 촉석루는 어이 갔던고 1 상제님께서 좌석에 앉으시면 성도들의 자리가 정해지는데 내성은 항상 구석을 차지하더니 2 하루는 음식을 많이 장만한 자리에 내성도 들어오게 하시고 성도들에게 이르시기를 “앉은 순서대로 시조(時調)를 부르라.” 하시니라. 3 상제님께서 “시조 한 장씩은 부를 줄 알아야 하느니라.” 하시고 “시조를 못 하면 아무 소리라도 하라.” 하시거늘 4 김형렬과 차경석 두 사람이 각기 평조(平調) 한 장씩 하고 내성이 자기 차례가 되어 시조를 읊으니 이러하니라. 5 만학천봉(萬壑千峰) 운심처(雲深處)에두어 두둑 밭을 갈아삼신산(三神山) 불사약(不死藥)을여기저기 심었더니문전(門前)에 학(鶴) 타신선관(仙官)이 오락가락 6 이에 상제님께서 “그와 같은 자진가락으로 한 장 더하라.” 하시매 내성이 촉석루에서 들은 임천가를 하거늘 7 상제님께서 임천가를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네가 진주 촉석루는 어이 갔던고?” 하시니 8 깜짝 놀란 내성이 비로소 상제님이 바로 한평생 찾아 온 천 선생님이요 하느님이심을 깨달으니라. 화기(和氣)를 사랑하시는 상제님 9 이 때 공우가 여러 성도들이 시조를 잘 못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웃으며 차례를 기다리더니 10 자기 차례가 돌아왔는데 상제님께서 곧 중단시키시거늘 허탄해하며 그 연유를 여쭈니 11 말씀하시기를 “모든 것이 평등한 것이 좋으니 만일 음조에 능한 사람으로 끝을 마치면 좌중에 화기(和氣)가 식을까 하여 그리 한 것이로다.” 하시니라.(道典 3:195) 모두 내성을 경만장이라 부르라 1 하루는 상제님께서 성도들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들 각자 호가 있느냐?” 하시매 모두 자기의 호를 아뢰니 “그러하냐?” 하시고 2 종이에 글자 두 자를 쓰시어 손으로 가리시고 내성에게 이르시기를 “눈을 감고 보라. 이 글자가 무슨 자냐?” 하시니라. 3 내성이 본시 글을 모르는 데다 눈까지 감으라 명하시니 알 길이 없어 주저하는데 상제님께서 “얼른 말하라!” 하고 호통을 치시거늘 4 순간 내성이 자신도 모르게 “공경 경(敬), 일만 만(萬) 두 글자가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는지라 5 상제님께서 “그러면 그렇지. 아따 저놈 ‘무식영웅’이라!” 하시고 손을 떼시니 과연 ‘경만(敬萬)’이란 글자가 쓰여 있더라. 6 이어 상제님께서 이르시기를 “운암강수(雲岩江水)가 만경래(萬頃來)라. 김만경(金萬頃) 뜰을 가지고 천하사 세 번 못하겠느냐.” 하시고 7 “너희들 내성이한테 ‘경만장, 경만장’ 하면서 세 번씩 외우라.” 하시니 성도들이 모두 명하신 대로 하니라. 8 상제님께서 다시 내성에게 말씀하시기를 “앞으로 세상 사람들이 너를 우러러 존경할 것이다.” 하시니라.(道典 3:196) |
남강에 접한 벼랑 위에 자리잡은 단층 팔작집의 웅장한 건물로, 진주성의 주장대(主將臺)이다.
1241년 고려 고종 28년 축성 당시에 부사(府使) 김충광(金忠光) 등의 손으로 창건하여, 장원루(壯元樓)라고 불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촉석루(矗石樓)로 명명되었으며, 용두사(龍頭寺)의 남쪽 돌벼랑에 위치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1593년 7월 29일 왜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진주성 동문이 무너지자,
김천일, 최경회, 이종인 등은 이곳에 모여서 결사항전 하였으나, 모두 전사하거나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18년 조선 광해군 10년에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이 재건했다.
1948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한국전쟁 때에 불탄 것을 1959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새로 건축하였다.
1593년 7월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한 왜군이 촉석루에서 승전연을 벌일 때
논개(論介)가 촉석루 앞의 의암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강으로 뛰어들었다고 해서 유명하다.
1747년 영조 23년 1월 26일 경상우병영에서 조정으로
진주 사람이 남강 가에서 주웠다고 하는 도장 한 개가 진상되었다.
이것은 당시로부터 154년 전인 1593년 최경회가 소지하고 있다가 남강에 몸을 던질 때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영조는 이것을 창렬사에 두고 제를 올리라고 명하고, 도장갑을 만들고
그 위에 글을 지어 촉석루의 의열을 찬송하였다.
追憶往事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百有餘年 1년여 년이 지났네.
幸得南江 다행히 남강에서 주웠던 도장에
印篆宛然 새겨진 전자가 완연하니,
矗石閫義烈 촉석루에서의 뛰어난 의열
想像愴先 상상하니 먼저 서글퍼지네.
命留嶺閫 영남의 병영애 보관토록 하여
以竪忠焉 충절을 기리게 하노라”
석루 앞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왼쪽으로 논개의 의기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의기사가 있다.
1780년 정조 5년 다산 정약용은
19세의 나이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인 장인 홍화보가 임지로 있는 진주에 부인과 함께 들렀다.
장인은 촉석루에서 악공과 가인을 불러 사위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다산 정약용은 팔검무(진주검무)를 추는 가인에게 〈무검편증미인(舞劒篇贈美人)〉이라는 시를 지어 헌사하였고,
〈진주의기사기(晋州義妓祠記)〉를 지어 의기사(義妓祠)에 걸게 하였다.
그후 10년 후인 1791년에 정조 15년에 30살의 나이로 진주목사로 있는 아버지에게 다시 들러서
〈재유촉석루기(再游矗石樓記)〉를 적었다.
촉석루 아래 계단을 통해 의암으로 내려갈 수 있게 작은 통로를 마련해 두었는데 중간 부분에 의암사적비가 있고,
그 아래로 남강이 흐르는 곳에 툭 튀어나온 의암(義巖)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舞劍篇贈美人 무검편증미인 | 칼춤 시를 지어 미인에게 주다. |
鷄婁一聲絲管起 계루일성사관기 四筵空闊如秋水 사연공활여추수 矗城女兒顔如花 촉성여아안여화 裝束戎裝作男子 장속융장작남자 紫紗褂子靑氈帽 자사괘자청전모 當筵納拜旋擧趾 당연납배선거지 纖纖細步應疏節 섬섬세보응소절 去如怊悵來如喜 거여초창래여희 翩然下坐若飛仙 편연하좌약비선 脚底閃閃生秋蓮 각저섬섬생추연 側身倒揷蹲蹲久 측신도삽준준구 十指翻轉如浮雲 십지번전여부운 一龍在地一龍躍 일용재지일용약 繞胸百回靑蛇纏 요흉백회청사전 焂忽雙提人不見 홀연쌍제인불견 立時雲霧迷中天 입시운무미중천 左鋌右鋌無相觸 좌정우정무상촉 擊刺跳躍紛駭矚 격자도약분해촉 颷風驟雨滿寒山 표풍취우만한산 紫電靑霜鬪空谷 자뢰청상투공곡 驚鴻遠飛疑不反 경홍원비의불반 怒鶻回搏愁莫逐 노골회박수막축 鏗然擲地颯然歸 갱연척지삽연귀 依舊腰支纖似束 의구요지섬사속 斯羅女樂冠東土 사라여악관동토 黃昌舞譜傳自古 황창무보전자고 百人學劍僅一成 백인학검근일성 豐肌厚頰多鈍魯 풍기후엽다둔로 汝今靑年技絶妙 여금청년기절묘 古稱女俠今乃覩 고칭여협금내도 幾人由汝枉斷腸 기인유여왕단장 已道狂風吹幕府 이도광풍취막부 | 계루고 한 소리에 풍악이 시작되니 넓디넓은 좌중이 가을물처럼 고요한데 진주성 성안 여인 꽃 같은 그 얼굴에 군복으로 단장하니 영락없는 남자 모습 보라빛 괘자에다 청전모 눌러쓰고 좌중 향해 절한 뒤에 발꿈치를 들고서 박자 소리 맞추어 사뿐사뿐 종종걸음 쓸쓸히 물러가다 반가운 듯 돌아오네 나는 선녀처럼 살짝 내려 앉으니 발밑에 번쩍번쩍 가을 연꽃 피어난다 몸 굽혀 거꾸로 서서 한참 동안 춤추는데 열 손가락 번득이니 뜬구름과 흡사하네 한 칼은 땅에 두고 한 칼로 휘두르니 푸른 뱀이 백 번이나 가슴을 휘감는 듯 홀연히 쌍칼 잡자 사람 모습 사라지니 삽시간에 구름 안개 허공에 피어났네 전후 좌우 휘둘러도 칼끝 서로 닿지 않고 치고 찌르고 뛰고 굴러 소름이 쫙 끼치누나 회오리바람 소나기가 차가운 산에 몰아치듯 붉은 번개 푸른 서리 빈 골짝서 다투는 듯 놀란 기럭 높이 날아 안 돌아올 듯하다가 성난 새매 내리덮쳐 쫓아가지 못할레라 쟁그렁 칼 던지고 사뿐히 돌아서니 호리호리한 허리는 처음 모습 그대롤레 서라벌의 여악은 우리나라 으뜸인데 황창무라 옛 곡조 예로부터 전해오네 백 사람이 칼춤 배워 겨우 하나 성공할 뿐 살찐 몸매 가진 자는 흔히 둔해 못한다네 너 이제 젊은 나이 그 기예 절묘하니 옛날 소위 여중 호걸 오늘날에 보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 너로 인해 애태웠나 거센 바람 장막 안에 몰아친 걸 알 만하네 |
<논개(論介)의 애인이 되어서 그의 묘(廟)에>
한용운
날과 밤으로 흐르고 흐르는 남강(南江)은 가지 않습니다
바람과 비에 우두커니 섰는 촉석루(矗石樓)는 살 같은 광음(光陰)을 따라서 달음질칩니다
논개(論介)여 나에게 울음과 웃음을 동시(同時)에 주는 사랑하는 논개여
그대는 조선의 무덤 가운데 피었던 좋은 꽃의 하나이다. 그래서 그 향기는 썩지 않는다.
나는 시인으로 그대의 애인이 되었노라
그대는 어디 있느뇨 죽지 않은 그대가 이 세상에는 없고나
나는 황금의 칼에 베어진 꽃과 같이 향기롭고 애처로운 그대의 당년(當年)을 회상(回想)한다
술 향기에 목맺힌 고요한 노래는 옥(獄)에 묻힌 썩은 칼을 울렸다
춤추는 소매를 안고 도는 무서운 찬바람은 귀신 나라의 꽃수풀을 거쳐서 떨어지는 해를 얼렸다
가냘핀 그대의 마음은 비록 침착하였지만 떨리는 것보다도 더욱 무서웠다
아름답고 무독(無毒)한 그대의 눈은 비록 웃었지만 우는 것보다도 더욱 슬펐다
붉은 듯하다가 푸르고 푸른 듯하다가 희어지며 가늘게 떨리는 그대의 입술은
웃음의 조운(朝雲)이냐 울음의 모우(暮雨)이냐 새벽달의 비밀이냐 이슬꽃의 상징(象徵)이냐
빠비 같은 그대의 손에 꺾이우지 못한 낙화대(落花臺)의 남은 꽃은 부끄럼에 취(醉)하여 얼굴이 붉었다
옥같은 그대의 발꿈치에 밟히운 강 언덕의 묵은 이끼는
교긍(驕矜)에 넘쳐서 푸른 사롱(紗籠)으로 자기의 제명(題名)을 가리었다
아아 나는 그대도 없는 빈 무덤 같은 집을 그대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만일 이름뿐이나마 그대의 집도 없으면 그대의 이름을 불러 볼 기회가 없는 까닭입니다
나는 꽃을 사랑합니다마는 그대의 집에 피어 있는 꽃을 꺾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집에 피어 있는 꽃을 꺾으려면 나의 창자가 먼저 꺾어지는 까닭입니다
나는 꽃을 사랑합니다마는 그대의 집에 꽃을 심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집에 꽃을 심으려면 나의 가슴에 가시가 먼저 심어지는 까닭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금석(金石)같은 굳은 언약을 저버린 것은 그대가 아니요 나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쓸쓸하고 호젓한 잠자리에 외로이 누워서 끼친 한(恨)에 울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요 그대입니다
나의 가슴에 '사랑'의 글자를 황금으로 새겨서 그대의 사당에 기념비를 세운들 그대에게 무슨 위로가 되오리까
나의 노래에 '눈물'의 곡조를 낙인(烙印)으로 찍어서 그대의 사당에 제종(祭鍾)을 울린대도 나에게 무슨 속죄가 되오리까
나는 다만 그대의 유언대로 그대에게 다하지 못한 사랑을 영원히 다른 여자에게 주지 아니할 뿐입니다
그것은 그대의 얼굴과 같이 잊을 수가 없는 맹세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그대가 용서하면 나의 죄는 신에게 참회를 아니한대도 사라지겠습니다
천추(千秋)에 죽지 않는 논개여
하루도 살 수 없는 논개여
그대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이 얼마나 즐거우며 얼마나 슬프겠는가
나는 웃음이 겨워서 눈물이 되고 눈물이 겨워서 웃음이 됩니다
용서하여요 사랑하는 오오 논개여
* 논개는 관비(官婢)가 아니었으며
의병장 최경회의 부인이었다. <참고 자료> - (사람과 사회 링크), (논개 선양회: 링크)
논개 관련 기록은 기존에는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譚)』에 따라 논개를 진주 관기(官妓)라는 기록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최경회 장군의 후손인 해주최씨전남화순군종회(海州崔氏全南和順郡宗會)는
민순지(閔順之)의 『임진록(壬辰錄)』 등의 기록을 들어, 논개가 1574년 전북 장수에서 태어나
어릴 때의 인연으로 나중에 최경회(崔慶會)의 부실이 된 주논개 부인이라고 확인했다.
<소설>
論介(논개)의 還生(환생)
金東仁 - 동광 제33호 (1932년 05월 01일)
晉州矗石樓……矗石樓에 오르는 사람 그 누구가 義妓 論介를 追憶치 않으리오.
論介는 죽엇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다면……
小說家 金東仁씨의 筆鋒은 論介의 義魂과 같이 動躍할것입니다.
投身篇
진주성(晋州城)은 함락되엇다.
임진란 때에 판관 김시민(判官 金時敏)이 겨우 수 천의 적은 군사로 십만 왜병을 물리친 만치 튼튼하든 이 진주성도 함락이 되엇다.
이번에는 지키는 군사가 6만이 넘엇다. 목사 서원례(牧使 徐元禮)와 창의사 김천일(倡義使 金千鎰)이 6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왜병이 오기를 기다리고 잇엇다. 그러고 그들은 마음 놓고 잇엇다. 이전에 수천의 약졸로도 능히 10만의 적병을 물리쳣거늘 하믈며 이번에는 그때보다 수십 곱이 되는 군사가 아니냐, 이 군사로 적병을 못 물리칠 까닭이 없다. 넉넉한 군사 넉넉한 량식 어디로 보던지 진주성 뿐은 함락될 듯 싶지 않앗다.
진주목 서원례의 애첩 논개(論介)가 대담히도 군정(軍政)에 주둥이를 디밀 때에 모든 장사들은 요망한 게집의 참람된 말이라고 당장에 베려 하엿다.
-전에는 군사가 적엇으므로 군사는 장수를 알고 장수는 군사를 사랑해서 능히 수천의 군사로도 십만 대군을 물리쳣거니와 지금은 그 때와는 다르옵니다. 장수의 한 마디의 호령이 전군에 퍼질 그 때와 지금과를 같이 생각해서는 안되옵니다. 6만의 군사는 지금 누가 자기네의 장인지를 모르고 장수는 또한 어느 것이 자기의 부하인지 모르는 통일 없는 이 군사로서 정예한<16> 왜병을 막으려는 것은 당치 않은 말슴이외다. 화류게에 자라난 무식한 게집애 - 무엇을 알으리까만 통일 안 된 군심 뿐은 넉넉히 볼 수가 잇습니다.
명낭한 눈을 저픔없이 치 뜨고 모여 앉은 장성(將星)들을 둘러보며 이러케 말하는 논개의 어조에는 능히 꺽기 어려운 열성이 잇엇다.
그러나 마음이 교하게 된 장성들의 귀에 이러한 소소한 게집의 말이 들어갈 리가 만무하엿다.
창의사 김천일이 논개의 당돌한 반대를 제일 괘씸하게 보앗다. 그러고 당장에 군사를 시키어서 논개를 내어다가 베이려 하엿다. 진주목 서원례의 애첩이라는 명색만 없엇든들 논개는 거기서 원통한 죽음을 할 뻔하엿다. 서원례의 애첩이라는 명색이 잇엇기에 다른 장수들이 새에 나서서 김천일의 노염을 말려서 겨우 죽음을 면하게 하엿다. 그러고 그 대신 논개를 진주성 밖으로 내어 쫓기로 하엿다.
논개는 진주성에서 쫓기어 낫다. 쫓기어 날 때에 논개는 마주막으로 한 번 다시 자기의 남편 - 자기를 극진히 사랑해주든 서원례에게 눈을 던졋다.
-마주막 작별이외다. 다시 살길이 없는 이 성안에 상공을 그냥 두고 떠나는 소첩의 마음은 오즉하리이까. 다만 용감히 싸우소서. 싸우고 또 싸워서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소서. 소첩도 또한 나라를 위해서는 결코 목숨을 애끼지 않으리다. 나라를 위해서 바친 두 개의 혼이 가까운 장내에 저승에서 다시 맞날 기약을 즐기면서 소첩은 떠납니다. -
눈물 어리운 눈으로서 서원례를 바라보면서 논개는 자기가 나고 자라고 나기의 부모, 조상이 나고 자란 진주성을 뒤로 성문 밖으로 나섯다.
왜병은 이르럿다.
싸움은 시작되엇다.
그러나 그 결과는 논개가 예단한 바와 마찬가지엇다. 통일 없는 군사는 제 각기 제 멋대로 놀앗다. 어느 것이 자기의 군사인지 모르는 장수들은 제 각기 함부로 호령을 하엿다. 그 틈으로 왜병은 성을 넘고 성문을 열고 마치 해일과 같이 진주성 안으로 몰려 들어 왓다.
서원례, 김천일, 그 밖 모든 장수들은 모도 한 번 시원히 싸워 보지도 못하고 이름 없는 왜졸에게 도살을 당하엿다.
-이리하여 진주성은 마침내 함락을 한 것이엇섯다.
그것은 국외자의 눈으로 보자면 장관일는지 모르지만 당사자의 눈으로 보자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일이엇섯다.
진주성은 염염히 불탓다. 일즉이 진주성을 쫓겨나서 성밖 어떤 친척 (농사 짓는) 의 집에 숨어 잇든 논개는 새빩앟게 물들은 하늘 아래서 불붙는 진주성을 바라 보앗다. 궁시(弓矢)의 소리도 얼마 나지 않고 싸움도 그다지 게속 되지 않고 함락되어 버린 듯한 진주성-몇일 전까지도 번화함을 자랑하든 진주성-그 진주성은 지금 불타고 잇다. 겨우 목숨만 피하여 도망하여 온 사람의 말을 듣건대 성안의 문무관은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모도 적병에게 도살을 당하엿다 한다. 그러면 논개 자기의 남편 되는 서원례도 당연히 전사를 하엿을 것이다. 저 타오르는 불낄 아래서 걷우지 못한 시신은 지금 한 줌의 재로 변하엿겟지. 자기를 낳고 기르고 닥달시켜준 부모, 사랑하든 동생 모도 지금은 한 줌의 재로 변하엿겟지. 이러한 일을 생각할 때에 논개는 그 때에 자기의 충간(忠諫)을 듣지 않아서 지금 이 지경을 만들은 장성들을 원망하기보다도 나라의 파산이라는 커다란 비극에 마음을 떨기보다도 단지 당면의 원수인 왜장과 왜병이 미웟다. 간을 끄내어 씹어도 시원하지 않으리만치 미웟다.
망연히 뜰에 서서 멀리 불타는 진주성을 바라 보는 논개의 눈에는 비분의 눈물이 한없이 한없이 흘럿다. 호담하달 수는 없지만 말이 없고 점잖든 제 남편 서원례며 자기의 늙은 부모며<17> 동생들이 잔악한 적병에게 밟히어 죽을 때의 광경을 눈에 그려 볼 때는 논개는 치가 떨려서 견딜 수가 없엇다.
이리하여 논개의 마음에는 그들에게 대한 적개심이 맹렬히 불타 올랏다.
이튼날 논개의 모양은 적진 근처에 나타낫다. 기름 머리에 입설은 연지로 장식하고 가장 화려한 옷으로 몸을 꾸민 논개의 자태는 비록 여자라도 반할 만 하엿다.
불탄 성안의 어지러운 널려 잇는 시신들-혹은 목이 잘리고 혹은 팔이며 다리가 잘린-을 일일히 검분하여 사랑하는 남편이나 부모형제를 찾아 보려다가 일우지 못하고 쓰라린 마음을 깊이 감초고 논개는 적진 근처에 배회하고 잇엇다.
가등청정의 부장 모곡촌육조(毛谷村六助)가 무슨 볼 일이 잇어서 나왓다가 논개와 딱 맞오쳣다.
논개는 육조를 보앗다. 순간 노염과 원한의 날카로운 표정이 논개의 눈에 흐르려 하엿다. 그러나 논개는 꾹 참앗다. 육조와 딱 맞오쳐서 눈을 크게 떳든 논개가 그 눈은 고요히 감앗다가 다시 뜰 때는 논개의 눈에는 쇠라도 능히 녹일만한 애교가 잇엇다.
논개와 맞낫지만 그냥 발을 옴기려든 육조는 이 미혹하는 괴상한 눈에 그만 옴기려든 발을 멈추엇다. 그러고 뚫어질 듯이 논개를 보앗다.
쏘는 듯한 육조의 눈을 맞나서도 논개는 움즉이지 않앗다. 그러고 한참을 맞오 육조를 바라보앗다. 마주막 일별을 그의 가슴으로 발까지 천천히 옴긴 뒤에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며 그곳서 발을 떼려 하엿다. 그러나 논개가 몸을 돌이키기 전에 육조가 논개를 불럿다. 일본말이라 무슨 뜻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으되 부르는 소리는 분명하엿다. 논개는 돌이키려든 몸을 돌오 육조에게 향하엿다.
『XXXXXX』
논개의 알아 듣지 못할 말이 다시 육조의 입에서 나아왓다. 논개는 미소하엿다. 그러고 모르겟다는 뜻으로 머리를 가로 저엇다.
육조는 허리를 만졋다. 허리에서 「ヤダテ」를 꺼내엇다. 가슴에서 조히를 꺼내엇다. 그러고 논개에게 가까히 왓다.
『네 이름은?』
육조는 한문글자로 조히에 이러케 썻다. 논개는 조히와 붓을 받앗다.
『진주관긔 논개』
이리하여 필담(筆談)은 시작되엇다.
『나이는?』
『열 다섯 이상 스믈 다섯 이하. 장군의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누구신지는 모르지만 왜국 명장으로 생각하오』
『어째서?』
『명장의 긔품이 나타나 보이오』
『내 진으로 잠시 들어가 쉬일까』
『진중은 여자의 들어 갈 곳이 아닌 줄 아오』
『너의 집으로 갈까?』
『우리 집에는 왜군을 원수로 아는 량친이 게시오』
『그럼 어디서 좀 이아기 할 기회가 없을까?』
『...』
『내일 (7월 22일) 촉석루(矗石樓)에서 연회가 잇는데 그날 와서 연회의 흥이라도 도아 주겟느냐?』
논개는 육조의 얼굴을 쳐다 보앗다. 나아오려 나아오려 하는 독한 눈찌를 억지로 감초고 흐르는 애교로서 육조의 얼굴을 바라보는 논개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하엿다.
한참을 육조의 얼굴을 바라보든 논개는 가겟다는 뜻으로 머리를 가볍게 숙이엇다. 그런 뒤에 육조와 작별을 하엿다.
육조와 작별하고 돌아오는 길에 논개는 여러 번을 마음이 남은 듯이 육조를 돌아 보고 돌아 보고 하엿다. 육조는 그 자리에 못박힌 듯이 뻣뻣이 서서 가는 논개를 바래 주고 잇엇다.<18>
이리하여 논개와 육조는 초대면을 하엿다.
『신슈』
이것은 진주(晋州)라는 뜻이 분명하엿다.
촉석루의 전승축하연-술은 어지간히 돌앗다. 일본 장수의 입에서는 연하여 『신슈』라는 말이 나왓다. 그러고는 지금도 타오르노라고 검은 연기를 하눌로 뿜는 진주성을 가르키고는 유쾌한 듯이 웃고 하엿다.
『농게!』
『네?』
『고뭉고』
논개야 거몬고를 뜯어라 하는 말이엇다. 무(武)를 자랑하는 장수들의 몸에서는 땀내가 낫다. 기생들의 몸에서 나는 향내는 그 땀내를 더욱 역하게 하엿다. 술내도 꽤 낫다.
여름날 낮이엇다. 아래로 흐르는 장강의 물ㅅ소리가 찰락찰락 들리엇다. 반사광은 촉석루 우에까지 반짝이엇다. 그 가운데서 두주(斗酒)를 자랑하는 장수들이 덤비어 대엇다. 한풀 죽은 관기들은 몸과 마음을 떨면서 술 붓기 노래하기에 여념이 없엇다.
다만 논개 뿐은 흐르는 애교로서 장수들을 대접하고 잇엇다.
『농게. 수리 모고라』
논개는 사양하지 않고 받아 멋엇다.
『농게. 노레 헤라!』
논개는 서슴지 않고 노래를 불럿다.
『농개. 추미 쳐라』
논개는 주저하지 않고 춤을 추엇다.
그 가운데서도 어제 잠시 진 밖에서 본 때문에 논개에게 잔뜩 반한 육조는 잠시를 논개의 곁을 떠나지를 않앗다.
『우리 농게. 우리 농게』
진중에서 한 번 마음껏 몸도 못 씿은 때문에 덜미고 또 덜민 구레나릇의 얼굴을 논개의 가까히 갖다가 대고는 무엇이라 알지 못할 소리로 얼리고 하엿다.
확! 확! 땀내와 구린내가 코로 몰리어 들어오는 것을 미소로서 받아 넘기기는 과연 힘들엇다. 그러나 논개는 그것을 모도 참앗다. 그러고 기회만 엿보고 잇엇다. 가슴에는 비수가 잇엇다. 독약도 준비하엿다. 어느 것 한 가지를 쓸 기회가 이르기만 기다리며 모든 자기의 감정과 표정을 죽이고 잇엇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무(武)로서 아직껏 닥달한 일본 장수의 몸에는 틈이 없엇다. 조그만 행동이라도 할 기회가 없엇다.
어떤 때 어떤 무장이 논개의 앞에 와 앉앗다. 등은 논개에게 향하여 졋다. 논개는 사면을 살피어 보앗다. 모도 술에 정신이 빼앗기어서 이 편은 주의하는 사람도 없엇다. 논개의 눈은 날카로워졋다. 논개는 가슴을 두드렷다. 그러고 저구리 자락 안에 잇는 칼의 자루를 잡으려 하엿다. 그러나 논개의 이상한 숨ㅅ소리에 일본장수는 휙 돌아 앉앗다. 뚫어져라 하고 논개의 얼굴을 보는 그 장수의 눈을 웃음으로 속이기는 논개도 힘들엇다. 억지의 웃음을 좀 흘려 보고는 그래도 제 얼굴에서 떠나지 안는 그 장수에게 향하여 애교의 손ㅅ짓을 한 번 한 뒤에
『웨 이리 보세요? 그럼 난 저리로 갈테야』하고는 그 자리를 피하엿다.
그 자리를 떠난 논개는 층게를 나려서 촉석루 아래로 나려 왓다. 그러고 루각을 한 번 휘 돌아서 강 언덕으로 돌아 왓다.
물에서 루각까지 그 새에는 약 두 발 가량 거리의 바위가 잇엇다. 논개는 그 바위에 가 섯다. 그러고 물을 나려다 보앗다. 물은 역시 찰싹찰싹 소리를 내며 아래로 흐른다. 진주성을 돌아 보앗다. 진주성은 역시 검은 연긔를 내며 타고 잇엇다. 루각을 쳐다 보앗다. 루각 우에서는 역시 가무와 술에 정신이 없엇다. 이 모양을 이리저리 살필 동안 논개의 눈에서는 다시 피가<19> 솟는 듯 하엿다.
『논개야. 너는 지금-』
그것은 돌아가신 서목사의 음성이엇다. 논개는 펄떡 놀랏다. 어찌 할까 어찌 하여야 할까, 강물은 역시 찰싹찰싹 소리를 내며 흐른다. 진주성은 역시 지금도 타고 잇다.
논개는 천천히 루각을 향하여 돌아 섯다.
『농게』
쳐다 보니 육조가 난간에 나와 섯다. 나아오려는 눈물을 다시 걷고 논개는 빙긋이 웃엇다.
육조는 루각에서 나려다 보앗다. 논개는 루각 우의 육조를 쳐다 보앗다. 흐르는 애교는 다시 논개의 얼굴을 장식하엿다. 루각의 우와 루각의 아래-두 사람의 눈은 한참을 서로 맞오 보고 잇엇다.
육조가 손을 들엇다. 그러고 논개를 올라 오라고 손찟을 하엿다. 그러나 논개는 머리를 가로 저엇다. 그런 뒤에 육조를 나려 오라고 눈짓을 하엿다. 육조는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르쳣다. 논개는 머리를 끄덕이엇다.
『여기가 조용하외다』
논개의 눈은 이러케 말하엿다.
육조의 모양이 난간에서 살아졋다. 비틀거리는 발 소리가 저 편에서 낫다. 발소리는 가까히 왓다. 그러나 논개는 모르는 듯이 가만 서 잇엇다. 지금 그의 마음은 극도로 흥분되엇다...어떤 재간으로던지 지금 이 흥분된 감정을 안면에 아니나타내기는 힘들엇다. 머리를 푹 숙으린 채 논개는 마치 꽂아 세운 듯이 그 곳에 서 잇엇다.
『농게』
육조의 목소리가 논개의 곳 뒤에서 낫다. 커다란 손이 논개의 두 눈을 덮엇다. 구레나릇의 더러운 얼굴이 차차 접근되는 것도 짐작되엇다.
논개는 홱 돌아섯다. 양 손을 들어서 육조의 목에 감앗다. 그러고 두어 걸음 물러 섯다. 육조는 이 논개의 정열(?)에 아모 의심도 품지 않고 덜레덜레 논개에게 끌려 갓다. 그들이 선 곳은 바위의 끝 한 발만 그릇하면 물에 떨어질 곳이엇다.
논개는 육조의 목에 감은 팔을 차차 당기엇다. 육조의 머리가 차차 논개의 얼굴을 향하여 가까히 왓다. 논개는 눈을 힘잇게 감앗다. 그러고 육조의 머리를 더욱 가까히 끄을어 당겻다.
육조의 입에서 나는 술내음새를 논개는 맡앗다. 씩씩이는 숨ㅅ소리를 들엇다. 육조의 구레나릇이 보드러운 자기의 얼굴을 스치는 것도 알앗다. 이리하여 육조의 마음이 철을 잃게 되는 것을 안 뒤에 논개는 와락 육조의 목을 낚우어 채엇다. 동시에 눈개의 발은 힘잇게 육조의 다리를 찻다.
다음 순간 두 몸뚱이는 (지금 의암(義岩)이라 닐컷는) 그 바위 우에서 살아졋다.
바위 아래서 흐르든 강물에는 커다란 파문이 하나 생겨서 차차 차차 넓어 갓다.
이리하여 아까운 나이에 논개는 이 세상을 떠낫다.
이 세상을 떠난 논개의 혼은 곳 천상(天上)으로 올라 갓다.
그러나 논개의 재세 중의 행록(行錄)을 뒤적이어 본 문직이는 논개를 위하여 문을 열어 주지 않앗다.
「너는 사람을 죽인 게집이다. 지부로 가거라」 이리하여 논개는 거기서 쫓겨 낫다.
거기서 쫓겨난 논개는 이번은 지부로 갓다. 그러나 지부에서도 또한 논개를 받지를 않앗다.
「낭낭은 의를 위해서 목숨을 받히신 이 - 웨 천상으로 가시지 않고 이곳으로 오섯습니까?
이 곳은 고약하고 낮본 인종만 벌하는 곳 - 낭낭 같은 존귀한 분은 도저히 들일 수가 없소이다.」
지부의 문직이의 말은 이것이엇다.
-이리하여 천당과 지부에 그 갈 곳을 잃어버린 논개의 혼은 유명게에서 정처 없이 흐늘흐늘 헤매고 잇엇다.(게속)
(출처: 한국사 DB)
隱遁 - 古今歌曲 | |
자다가 ᄭᆡᄃᆞᄅᆞ니 窓 밧긔 아ᄒᆡ 왓다 不老草 왓ᄉᆞ오니 혜실가 마ᄅᆞ실가 그 아ᄒᆡ 蓬萊山 아ᄒᆡ로다 슈고로이 왓도다 淸凉山 六六峯은 아ᄂᆞ니 나와 白軀 白鷗야 헌ᄉᆞᄒᆞ랴 뭇 밋을손 桃花로다 桃花야 흐르지 마라 舟子 알가 ᄒᆞ노라 白鷗야 나지 마라 녯 번인 줄 모로ᄂᆞᆫ다 聖上이 ᄇᆞ리시ᄆᆡ 믈너 오니 江湖로다 이후의 ᄎᆞᄌᆞ리 업스면 너와 조ᄎᆞ 다니리라 山中의 ᄉᆞ쟈ᄒᆞ니 杜鵑이도 붓그럽다 내 집을 구버 보며 솟젹다 ᄒᆞᄂᆞᆫ고야 君子ᄂᆞᆫ 安貧樂道니 긔 分인가 ᄒᆞ노라 내 집이 길ᄎᆞ거니 杜鵑이 나즤운다 萬壑 千峯의 외門을 닷아시^니 저 개ᄂᆞᆫ 즈즐 것 업셔 지ᄂᆞᆫ 곳츨 즛ᄂᆞᆫ고나 烟霞로 집을 삼고 風月노 벗을 삼아 太平聖代에 病으로 늙어셰라 이 中의 ᄇᆞ라ᄂᆞᆫ 바ᄂᆞᆫ 허믈이나 뎍과져 구버ᄂᆞᆫ 千尋綠水 도라보니 萬疊靑山 十丈 紅塵이 엇마나 ᄀᆞ렷ᄂᆞ니 江湖의 月白ᄒᆞ거든 더욱 無心하여라 ᄃᆡ 심거 울을 삼고 솔 갓고니 亭子로다 白雲 깁흔 골의 날 잇ᄂᆞᆫ 줄 제 뉘 알리 庭畔의 鶴 徘徊ᄒᆞ니 그 벗인가 ᄒᆞ노라 벼슬을 사ᄅᆞᆷ마다 ᄒᆞ면 農夫되리 뉘 이시며 醫員이 病을 고치면 北邙이 져리 ᄒᆞ랴 아ᄒᆡ야 盞 가득 부어라 내 ᄯᅳᆺ대로 ᄒᆞ리라 자나믄 보라매를 구름 밧긔 ᄯᅴ워 두고 ᄃᆞᆺᄂᆞᆫ 말 채 쳐셔 큰 길의 노하가니 아마도 丈夫의 快事ᄂᆞᆫ 이ᄲᅮᆫ인가 ᄒᆞ노라 山 됴코 물 죠흔 곳의 바회 지허 ᄯᅱ집 짓고 ᄃᆞᆯ 아래 고기 낙고 구름 속의 밧츨 가니 生理야 足ᄒᆞᆯ가마ᄂᆞᆫ 블을 일은 업셰라 十年을 經營ᄒᆞ여 草堂 한 간 디어내니 半間은 淸風이요 ᄯᅩ 半間은 明月이라 靑山은 드릴 ᄃᆡ 업스니 한ᄃᆡ 두고 보리라 林泉을 草堂 삼고 石床의 누어시니 松風은 검은고요 杜鵑聲은 노래로다 乾坤이 날더러 니로ᄃᆡ ᄒᆞᆷ게 늙쟈 ᄒᆞ더라 늙고 病든 몸이 草堂의 누어시니 淸風은 門을 열고 明月이 房의 든다 두어라 淸風明月이 내 벗인가 ᄒᆞ노라 淸風과 明月을 갑 주고 살쟉시면 一門 茅屋의 내 힘으로 들여오랴 世上의 公道의 거슨 이 두 가지ᄲᅮᆫ인가 ᄒᆞ노라 草堂의 벗이 업셔 혼ᄌᆞ 누어 ᄌᆞᆷ을 드니 淸風明月이 님ᄌᆞ 업시 들어온다 ᄌᆞᆷ ᄭᆡ여 이 됴흔 景을 눌다려 무ᄅᆞ랴 져 소ᄅᆡ 반겨 듯고 竹窓을 밧비 여니 細雨 長堤에 쇠등의 아ᄒᆡ로다 뎌 아ᄒᆡ ᄎᆞᄌᆞ리 업거든 날과 놀면 엇더ᄒᆞ리 靑山도 졀로졀로 綠水도 졀로졀로, 山絶路 水 졀로 山水間의 나도 졀로 아마도 졀로 난 人生이니 졀로졀로 늙으리라 田園의 봄이 오니 이 몸이 일도 만타 곳 남근 뉘 시므며 藥밧츤 언제 ᄆᆡ리 ᄋᆞᄒᆡ야 ᄃᆡ 뷔여 오ᄂᆞ라 삿갓 몬져 결을이라. (→) | 압 밧희 새 ᄂᆞ물 ᄏᆡ고 뒤 밧희 고ᄉᆞ리 것고 ᄋᆞᄎᆞᆷ밥 ᄇᆡ블니 먹고 草堂의 누어시니 어미妾 블너 니ᄅᆞᄃᆡ 술맛 보라 ᄒᆞ더라 柴門을 여지 마라 石逕의 오리 업다 듯ᄂᆞ니 믈소ᄅᆡ요 보ᄂᆞᆫ니 靑山이라 아ᄒᆡ야 人間이 몃 ᄒᆡ나 되거뇨 나ᄃᆞᆯ 계워 하노라 아ᄒᆡᄂᆞᆫ 藥 ᄏᆡ러 가고 竹亭은 뷔엿ᄂᆞᆫᄃᆡ 흐터진 바둑을 뉘 주어 담을소니 醉ᄒᆞ여 落花의 누어시니 봄 가는 줄 몰나라 山이 하 놉흐니 杜鵑이 나즤 울고 물이 하 ᄆᆞᆰ그니 고기를 혜니로다 白雲이 내 벗이라 오락가락 ᄒᆞᄂᆞᆫ고나 船頭의 술을 싯고 고기 낙ᄂᆞᆫ 져 漁翁아 生涯란 어ᄃᆡ 두고 낙ᄃᆡ만 잡앗ᄂᆞᆫ다 平生의 블을 일 업더니 너를 블워 ᄒᆞ노라 간밤의 부든 바람 滿庭 桃花 다 지거다 혬 업ᄉᆞᆫ 아ᄒᆡ들은 다 쓰러버리거다 落花들 곳이 아니랴 쓰러 무ᄉᆞᆷᄒᆞ리오 밤의 곳치 픠고 비즌 술 다 닛거다 거믄고 가진 벗이 ᄃᆞᆯ ᄒᆞᆷ긔 오마터니 아ᄒᆡ야 茅屋의 ᄃᆞᆯ 도다온다 벗 오ᄂᆞᆫ가 보아라 집 方席 ᄂᆡ지 마라 落葉엔들 못 안ᄌᆞ랴 솔불 혜지 마라 어졔 진 달 도다온다 안ᄒᆡ야 薄酒 山菜만졍 업다 말고 ᄂᆡ여라 簑笠의 되롱이 입고 한 손의 호뫼 들고 山田을 ᄆᆡ다가 夕陽의 누어시니 牧童이 牛羊을 모라 ᄌᆞᆷ든 날을 ᄭᆡ온다 世上이 ᄇᆞ리시ᄆᆡ ᄇᆞ린 ᄃᆡ로 ᄃᆞᆫ니노라 綠陰 芳草의 전 나귀 빗기ᄐᆞ고 夕陽의 醉興을 겨워 채를 닛고 오도라 夕陽의 醉興을 계워 채를 닛고 오도괴야 갓득이 저근 나귀 뎐혀 아니 가ᄂᆞᆫ고야 아ᄒᆡ 낙대로 거워라 갈 길 머러 ᄒᆞ노라 갈 길이 머다 ᄒᆞ나 져 재 너머 내 집이라 細路 松林의 ᄃᆞᆯ이 조차 도다온다 ᄀᆞᆺ득이 굴먹는 나귀를 모라 무슴ᄒᆞ리 ᄃᆞᆯ이 하 ᄇᆞᆯ그니 三更이 낫이로다 ᄇᆞ람 서ᄂᆞᆯᄒᆞ니 六月이 ᄀᆞ을이라 이 淸風明月을 두고 아니 놀고 어이ᄒᆞ리 東窓이 ᄇᆞᆯ가ᄂᆞ냐 노고질이 우지진다 소 칠 아ᄒᆡ는 ᄉᆞᆷ긔 아니 니러ᄂᆞ냐 재 너머 ᄉᆞ래 긴 밧츨 언제 갈녀 ᄒᆞᄂᆞ니 대죠 불근 ᄯᅢ에 밤은 어이 듯돗던고 올벼 뷘 곳희 게도 ᄯᅢ로 나리거냐 술 괴ᄌᆞ 쳬쟝ᄉᆞ 가니 아니 사고 어이리 窓 밧긔 픠온 菊花 어졔 픤다 그졔 픤다 니 보고 반겨 픤다 九月이라 미쳐 픤다 아ᄒᆡ야 盞 가득 부어라 ᄯᅴ워 두고 보리라 秋江의 밤이 드니 믈결이 ᄎᆞ노매라 낙시 드리오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無心한 달빗만 싯고 뷘 ᄇᆡ 저어 오노ᄆᆡ라 還上도 타와 잇고 小川魚도 낙가 왓ᄂᆡ 비즌 술 새로 닉고 뫼희 ᄃᆞᆯ 도다온다 ᄭᅩᆺ 픠고 검은고 잇으니 벗님 모와 노ᄋᆞᆸ셰 오날은 川獵ᄒᆞ고 來日은 山行ᄒᆞ새 곳달임 모ᄅᆡ ᄒᆞ고 講信으란 글픠 ᄒᆞ리 그글픠편 射會ᄒᆞᆯ 제 各持酒果 ᄒᆞ시소. (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