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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 발라 났드나?
나운택
“꿀 발라 났드나?” 어떤 사람이 같이 있다가 무슨 이유에선지 자꾸 집에 가고 싶어하는 눈치를 보일 때 못 마땅해 하며 핀잔처럼 내뱉는 경상도사람들의 흔한 말버릇이다. 누가 어느 특정 장소를 뻔질나게 드나들 때도 이렇게 비꼬듯이 쏘아 붙이곤 한다. 인기 남성그룹 ‘장미여관’의 세태 풍자적이고 코믹한 노래 ‘봉숙이’에도 이런 구절이 나온다. “…집에는 말라 드갈라고? 꿀 발라 났드나? 나도 함 묵어보자…” (집에는 뭐 하러 들어 갈려고. 꿀 발라 놨어? 나도 한 번 먹어보자.) 약간 능글맞은 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여자친구를 더 붙잡아 두려고 꼬드기는 장면을 보사노바풍의 이국적인 선율에 실어 노래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납득할 만한 뚜렷한 이유없이 마약중독자가 마약에 탐닉하듯이 어떤 것에 미련을 떨치지 못 하고 자꾸 빨려드는 사람에게 하는 말로 이보다 더 재미있고 적절한 비유도 드물듯 싶다. 왜 그렇게 미련을 못 버리는 거야… “꿀 발라 났드나?”
최근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른바 탄핵정국과 관련하여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위군중속에는 온갖 구호를 적은 푯말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유독 내 눈길을 사로 잡은 구호가 하나 있었다.
“사회주의가 답이다.”
“문제는 자본주의다.”라는 구호와 나란히 흔들어대는 이 구호가 내 눈길을 끈 것은 흔히들 얘기하듯이 이런 구호가 버젓이 거리를 활보하는 게 놀랍다거나 또는 걱정이라는 차원에서가 아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마르크스사상이 온 지구를 휩쓸고 지나간 뒤 지구촌의 절반을 차지했던 공산주의국가들이 거의 모두 그 체제의 모순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붕괴된 지도 수십년이 지났다. 그런데, 유독 한국에서는 지금까지도 자본주의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 하고 사회주의 (옛 공산권 국가들에서도 이상하게 ‘공산주의’란 말 대신 ‘사회주의’를 선호했다.)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 하고 점점 더 그 지지층이 두터워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오래전부터 이 질문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답을 생각해 왔었는데, 저 구호가 적힌 푯말을 본 순간 그 답이 점점 더 명확하게 사실로 입증되는 듯한 불길한 느낌이 들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막스 베버는 그의 책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정신>에서 서구국가들중 영국, 네덜란드, 미국등에서 근대 자본주의가 다른 나라보다 먼저 꽃 피기 시작한 바탕에는 칼뱅주의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도들의 직업 소명의식과 금욕주의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사치와 향락을 죄악으로 여기며 열심히 일해서 부를 축적하는 것은 도덕적일 뿐 아니라 신이 내린 소명이라고 여기는 청교도정신이 근대자본주의의 촉매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한국은 일제식민지에서 벗어나 근대적 국가를 형성한 이 후 세계역사상 유래가 없이 빠른 속도로 산업화를 이루면서 자본주의를 꽃 피웠다. 다른 나라들이 이런 경이로운 발전을 부러워 하고 그 방법을 배우고 싶어 하지만, 정작 한국인 자신들은 이런 성취가 영 마뜩찮고 껄끄러워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친 듯이 불편해 하고 있다. 그래서, ‘헬조선’을 외치며 그 지옥에서 벗어나는 해결책으로 ‘시회주의가 답이다.’라는 처방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왜 그럴까? 정말 누가 사회주의에 꿀이라도 발라 놓은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우리 민족의 기질이 자본주의보다는 사회주의에 휠씬 더 잘 어울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타고난 기질이 그렇다 보니 독재정권의 강압에 이끌려 얼떨결에 초단시일내에 자본주의의 꽃을 피워 냈으면서도 늘 자본주의라는 옷이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거의 모든 공산국가들이 붕괴되었음에도 북한이 아직도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것도 같은 기질을 타고난 우리 민족성과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싶다.
자본주의는 한 마디로 ‘돈벌이’를 숭상하는 체제다. 그런데, 우리는 어릴 때부터 돈을 경멸하라고 가르친다.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르신 어버이 뜻을 받들어…” 어릴 때 불렀던 ‘최영장군의 노래’는 이렇게 시작된다. 자본주의의 근간이 되는 공업과 상업은 우리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사농공상’의 순위에 따라 최하위 계급으로 멸시하고 천대한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무의식중에 부자는 나쁜 사람이고 가난한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는 의식을 끊임없이 심어준다. 흥부전이 그렇고, 심청전에서도 그 옛날에 벌써 국제무역을 했던 돈 많은 상인들은 생사람을 수장시키는 나쁜 사람들이다. 어릴 때부터 무수한 선비들의 얘기를 들었지만 좋은 사람은 으레 ‘가난한 선비’였다. 벼슬하는 사람도 좋은 사람은 반드시 청빈, 즉 가난하다. 비록 그 사람이 임금 다음으로 높은 지위까지 올라 갔어도 훌륭한 재상은 늘 가난해야 한다. 옛날 선비들의 글에서도 언제나 ‘나물 먹고 물 마시며’ 쫄 쫄 굶더라도 팔 걷어 붙이고 열심히 일해서 악착같이 돈을 버는 건 천한 일로 되어 있다.
할리우드영화를 보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장면중에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고 거의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장면이 있다. 어떤 사람이 누구를 막 뒤쫓아 가다가 놓쳐 버린다. 어디로 갔는지 가늠하느라 두리번거리다가 근처에 빈둥거리다가 자기를 멀뚱히 쳐다보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다가가서 물어본다. 시치미를 뚝 따고 고개를 가로 젓는다. 아무 말 없이 주머니에서 지폐를 하나 꺼내서 건낸다. 말을 할 듯 말 듯 묘한 표정을 짓는다. 지폐를 한 장 더 꺼내서 건낸다. 환하게 웃으며 저 쪽이라고 가르쳐 준다. 영화에서 수없이 봐온 이런 장면에서 그 당사자들은 전혀 거리낌이 없어 보였고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런 거래처럼 보였다. 그런데, 나는 이런 장면을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깟 것에 돈을 요구하는 행위가 왠지 떳떳하지 못 하고 치사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은연중에 이윤추구는 나쁜 것이란 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상업을 천시했던 것이다. 자기가 치른 값에 높은 이윤을 붙여서 물건을 팔면 은연중에 누구를 속이는 것처럼 떳떳하지 못 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이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돈을 빌려줄 때도 당연히 받아야 할 이자를 받는 걸 굉장히 어색해 한다. 속으로는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지라도 겉으로는 “우리사이에 이자는 무슨… 괜찮아. 그냥 써.”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서로 옥신각신하는 가벼운 입씨름이 있은 후 마지 못 한 척 이자를 받을 때도 뭔가 떳떳치 못한 일을 하는 듯이 어색해 한다. 체질적으로 이런 기질을 타고난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본주의의 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금융업은 애초에 어울리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한국인들은 예로부터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 단일민족공동체로 오랜 기간 살아오다 보니 기본적으로 ‘너나 나나 다를 게 없다’는 평등의식이 유난히 강해서 남들이 나보다 잘 사는 걸 받아들이지 못 한다. 그래서, 배 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참을 수가 없는 심사를 잘 나타낸 말이다. 서로 별로 다를 게 없는 단일 민족인데다 공동체의식이 강하다 보니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너와 내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철저한 개인주의의식이 자리 잡지 못 한다. 학습능력과 상관없이 모두가 대학을 가야 하고, 유행이 삽시간에 퍼지고, 성형천국이 된 것도 한국인들의 유별난 평등의식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생각은 그렇지 않은데 ‘남들과 다른 현실’을 억지로 참고 속으로 삭이자니 ‘한(恨)’이 맺히고, 도저히 참지 못 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많이 하니 자살율이 높다.
자본주의는 그 속성상 사유재산을 바탕으로 한 철저한 개인주의를 기초로 한다. 그런데, 개인의 독립적 책임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서구의 개인주의가 한국에서는 종종 이기주의로 치부된다. 한국인들은 ‘나’보다는 ‘우리’를 우선시하는 집단주의적인 기질이 강하다. 엄청난 인파가 몰리는 집단응원이나 시위도 외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물지만 한국에서는 쉽게 이뤄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情)’을 유달리 강조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끼리’의식과 통한다. 집도 “내 집”이 아니라 “우리 집”이고, 심지어 남편도 “내 남편”이 아니라 “우리 남편”이다. “우리가 남이가?”는 사회전반에 걸쳐 통용되는 의식이다. 그래서, 유달리 동창회, 향우회같은 조직이 엄청난 결속력을 가진다. 공동체를 우선시하고, 다 같이 골고루 잘 살아보자는 평등사상은 바로 사회주의사상의 핵심이다.
위에서 얘기한
한국인들의 두드러진
기질을 보면,
자본주의보다는 사회주의에
휠씬 더
잘 어울리는
민족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깨닫게
된다. 애초에
이런 기질을
타고 났으니
어쩌다 걸쳐
입은 자본주의라는
옷은 늘
껄끄럽고 불편하게
느껴지는 게
아닐까? 한국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자본주의체제를 유지하면서
발전하기를 원한다면
스스로 이런
의식구조부터 바꿔나가는
작업을 차근차근
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런 의식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한국인들의
머릿속에서 늘
사회주의라는 ‘꿀
발라 놓은
곳’를
동경하는 마음을
지우기 어려울
것이고, 그로
인한 갈등은
지속될 것이다 <나운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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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국인이 개인주의보단 전체주의, 집단 문화에 가까운 것은 수긍이 가는 면이 있지요.
나와 남이 평등하고 같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집단이긴 해요.
그러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대별한다면 글쎄요. 그건 별개의 이론이나 반박이 있을 수도 있겠네요.
유교사상, 양반 문화 때문에 자본이나 실학을 경시하는 경향은 있지만, 그건 한국인의 겉모습이 아닐까, 싶어요.
세계 어느 민족보다 실리에 강하고 이해타산을 따지는 민족이기도 하지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른 의견이 있겠지만 특히나 가족 이기주의, 지역 이기주의 등의 행태를 보자면 어느 민족보다 이해관계에 밝은 민족이란 생각도 듭니다.
그러기에 기부문화나 공동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사람들을 보기 힘든 것 아닌가요?
일예로 죽을 때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죽는 이곳 서구 문화와 죽을 때 한 푼이라도 더 자식에게 남겨주겠다고 기를 쓰는 한국의 가족이기주의 문화를 들 수 있겠네요.
한국 사람처럼 남은 죽든 말든 자기 식구만 감싸고 내 자식만 챙기는 이기적인 민족도 드물지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보기 어려운 교육열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차라리 사회 약자를 위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는 면이 한국인들에게 있다면 전 그런 분들을 존경하겠습니다. 제가 평소에 생각하는 한국인과는 좀 거리가 있는 주장을 펴시기에 딴지 걸고 갑니다.
관심있게 읽어 주시고 의견을 달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실리에 강하고 이해타산 따지는"데 민족간에 정도의 차이가 있을까 싶은데요. 인간은, 아니 모든 동물은 본능적으로 이해타산과 실리에 따라 행동하는 게 아닐까요? 다만 한국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열심이고 악착스러운 기질이 있다 보니 당연히 금전과 관련된 경제적인 면에서도 그런 거지 타 민족보다 이해타산을 따지는데 유별나다고 생각지는 않는데요. 아뭏든 좀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문제라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늘 그렇듯이 제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다른 분들도 의견이 있으시면 거리낌없이 누눴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