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書의 주인공은 慶南 居昌에 世居하고 있는 草樓鄭氏 桐溪 鄭(1569~1641)의 先代 및 直系 後孫들이다. 이들이 현재의 居昌 薑川里 일대에 복거(卜居)하게 된 것은 지금부터 500여년 전인 一五세기 중엽이었다. 그 이전에는 本貫地인 草溪와 咸陽둥지에 거주하였다. 이들 가문의 문서들이 麗末鮮初이래로 朝鮮末期까지 걸쳐 있으므로 安義縣(현재의 거창지역) 그리고 本貫地인 草溪 등을 두루 살펴볼 필요가 있다.
安義縣은 신라의 馬里縣에서 그 유래가 시작되어 경덕왕 때 利安, 高麗 顯宗 九年(一〇一八)에 陜州에 소속되었다가 恭愍王 때에는 感陰으로 移屬되었다. 朝鮮 太宗 一七年(一四一七)에 이름을 安陰이라 고치고 監務를 설치, 조선후기까지 줄곧 縣으로 명맥을 이어왔다. 英祖 四년(一七二八)에는 戊申亂으로 인해 縣 자체가 혁파되어 咸陽, 居昌 양 군에 分屬되었다. 一七六七年 현재의 이름인 安義로 改名되었다. 현재는 咸陽君 渭川面에 소속되어 었다.
本貫地인 草溪는 현재의 慶南 陜川郡 草溪面 일대였고, 八兮·八溪·靑溪라고 불리웠다. 草溪지역에서 鄭氏는 卞氏와 더불어 이 지방의 대표적 土姓이었다. 高麗 〈至正十五年 乙未及第榜目〉및 〈宣光丁巳進士牓〉의 주인공 鄭習仁, 鄭悛(一三五六~一四三五)도 바로 이곳 출신이다.
草溪鄭氏가 安義에 처음으로 터전을 삼은 시기는 고려말이었다. 稼亭 李穀(一二九八~一三五一)과 교류하였던 公衍(아래 世系圖 참조)의 墓가 安義 西面에 있고, 鄭悛이 居昌 龍山, 咸陽 介坪 등지에 거주한 것을 보면 發源地인 陜川과 가까운 居昌 咸陽 등지를 전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현재의 渭川面 薑川里 일대에 정착하게 된 것은 鄭蘊(一五六九~一六四一)의 五代祖인 齊安(一三九O~一四五七)代였다. 齊安이 처음 터전을 삼은 곳은 童子井里였고, 玉堅(一四五O~一五二六)代에 鶴潭 주위에 거주하다가 鄭蘊의 祖父代인 淑(一五O一~一五六三) 당시에 비로소 嶧洞에 卜居하였다. 鄭蘊의 父 鄭惟明(一五三九~一五九六)이 嶧陽이라 號를 삼은 것도, 鄭蘊 자신이 「嶧陽孤桐」의 뜻에서 「桐溪」라 自號한 것도 그들이 출생하고 성장한 지역과 무관하지 않다.
嶧洞과 薑川은 安義縣 古縣面에 속하였고, 邑治에서 북쪽으로 四O리 가량 떨어져 있다. 이들이 정착하기 전 이곳에는 오래전부터 潘氏들이 先住, 潘腆이 효행으로 旌閭되는 등 사회적 활동을 하였으나 조선후기에는 그들의 족적은 찾을 수 없다.
嶧洞、薑川과 이웃해 있는 마을이 北上의 葛川(葛溪)이다. 이 마을은 恩津林氏가 世居해온 마을로서 嶧洞, 薑川 마을과는 불과 一O리 안밖에 위치한다. 葛川의 林氏들은 石泉 林德蕃, 葛川 林薰(一五〇〇~一五八四), 瞻慕堂 林芸 등을 배출한 名門이었다. 이러한 지역적 배경으로 인해 鄭氏와 林氏들은 師友關係 혹은 婚姻關係를 맺는가 하면 지역내에서는 상호 경쟁적 관계로서 갈등을 겪기도 하였다. 뒤에 설명되지만 某里齋 및 龍泉精舍의 享祀는 임씨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葛川書堂 및 嶧川書院은 이들 두 가문의 선조들의 배향처이자 후학들을 위한 강학처였다. 薑川里와 葛溪里의 중간 지점에 居昌愼氏들의 세거지 黃山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이들은 邑愼과 구분해 黃山愼氏라 別稱하였다. 某里齋 및 嶧川書院의 운영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였다. 이들 또한 초계정씨를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가문이다.
鄭氏·愼氏·林氏들의 世居地인 薑川·黃山·葛溪는 金猿山·德裕山 자락의 빼어난 경치를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마을 주위로 수량이 풍부한 薑川과 渭川이 관통한다. 川邊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田畓은 이들 사족들의 경제적 터전이 되었다.
安義에 인물이 모이고 유교적 질서로 사회변화를 일으키게 된 것은 一五세기 후반 金宗裕·金宗直(一四三一~一四九一) 등 善山金氏家門 인물들의 영향이 매우 컸다. 金宗直이 撰한 〈安義鄕校新創記〉에 의하면 縣에는 옛부터 學校가 없었으나 成宗 四年(一四七三)에 縣監 崔榮이 聖廟를 짓고 그 다음 해인 甲午年에 縣監 申允完이 聖賢의 位板을 만들어 奉安하였으며, 訓導 金宗裕가 유생들을 이끌고 낙성하였다 한다. 최영과 신윤완 등 이곳에 부임해온 守令에 의해 향교가 세워졌으나 이 일을 사실상 주도한 것은 訓導 金宗裕였다. 이같은 사정은 앞서의 新創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記文에 의하면 당시 安義는 戶籍에 등록된 人口가 一,OOO戶가 될 정도로 번성하였으나 學舍가 없어 生徒들이 僧舍 등을 전전하기도 했으며, 나중에 낡은 관아에 자리를 마련해 生徒와 先生들이 공부하였다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金宗裕 등이 守令과 힘을 합해 鄕里의 村夫, 儒吏之戶, 陶士之工 등을 모집해 향교건물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향교의 건립은 안의의 사회면모를 일신시키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으며, 유교적 사회로 변모하게 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던 것이다.
安義地域 최초의 書院은 宣祖 一六年(一五八三)에 세워진 龍門書院(鄭汝昌 祭享)이었다. 創建動機는 鄭汝昌이 安義縣監 재임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창건 이후 선조 一九年(一五八六)에는 葛川 林薰, 瞻慕堂 林芸이 배향되고, 또 인조 二O年(一六四二)에 鄭蘊이 追享되었으며, 현종 三年(一六六二)에 賜額되었다.
이밖에 , , , 등의 祠宇와 草溪鄭氏의 齋舍인 某里齋가 있다. 거창에 있지만 이 가문과 관계가 있는 사우로는 과 龍泉精舍 등이 있다.
이 가문의 고문서를 이해하는데는 鄭蘊(一五六九~一六四一)의 행적과 사상, 그리고 교류 인물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帖冊文書 및 個別文書는 직, 간접으로 鄭蘊의 履歷과 관련되는 것이 많다.
먼저 를 통해 그의 주요 행적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1583(계미,15세) 처음으로 葛川 林薰을 찾아 보다.
1587(정해,19세) 坡平尹氏과 婚姻하다. 鄕試에 高等으로 합격하다.
1589(기축,21세) 禮安 陶山書院 尙德祠를 배알하고 月川 趙穆(1524~1605)을 찾아 보다. 濯淸亭 金綬(光山人)와 交友하다.
1596(병신,28세) 父 鄭惟明이 죽다.
1598(무술,30세) ① 心經, 近思錄, 性理大全 등을 공부하다.
② 가야산에 가서 鄭仁弘에게 배우다. 정인홍은 그를 敬重히 여기다.
1600(경자,32세) 入京하여 梧里 李元翼을 찾아가 執贄하다.
1604(갑진,36세) ① 도내 유림과 오현을 종사할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다.
② 從事官 崔睍(1563~140)과 壬辰亂後 사적을 모아 기록할 것을 의논하다.
1606(병오,38세) 진사시 2등에 합격하다.
1607(정미,39세) 鄕人들이 學行으로 천거하다.
1603(무신,40세) ①鄭仁弘(1535~1623\에 편지를 보내 臨海君일을 논하다.
②鄕人들이 學行으로 再薦하다.
1610(경술,42세) ①奉慈殿參奉에 제수되다.
②서울에서 郭再祐(1552~1617)를 찾아보다.
③別試 乙科에 급제하여 成均館學諭에 補任되다.
1611(신해,43세) ①侍講院兼說書에 제수되다.
②山陰의 西溪에 가서 吳長을 만나보고 교우하다.
③寒江 鄭逑(1543~1620)를 만나보다.
④司諫院正言에 제수되다.
1613(계축,45세) ①永昌大君의 獄이 일어나다. 정인홍과 영창대군사건에 대하여 의논하다.
②侍講院弼善兼春秋館編修官에 제수되다.
1614(갑인,46세) ①甲寅封事 - 鄭沆을 斬首하고 永昌大君 位號을 追復할 것 주장하다. 이에 대해 兩司 合啓로 罪를 요청하는 등 큰 물의가 일어나다.
② 광해군 특명으로 濟州道 大靜에 圍籬安置되다.
1623(계해,55세) ① 인조반정으로 유배에서 풀려나다.
②敎書로서 이조참의에 제수되다.
1625(을축,57세) 대사간에 제수되다.
1626(병인,58세) 경상도관찰사에 特除되다.
1628(무진,60세) 사헌부대사헌에 제수되다.
1630(경오,62세) ①모부인이 죽자 거창 가조 용산에 장사지내다.
②재실을 짓고 이름을 龍泉精舍라 하다.
1633(계유,65세) ①대사헌에 제수되다.
②역천서당에 있으면서 先考의 묘지를 찬하다.
③龍巖書院에 가자 근방 선비 100여인이 모여들다.
1636(병자,68세) 丙子胡亂時 南韓山城까지 왕을 扈從하다.
1637(정축,69세) ①崔鳴吉(1586~1647)의 稱臣 賣國의 죄를 논하다.
②왕이 淸에 항복하자 자결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향리로 돌아오다.
1638(무인,70세) 某里로 들어가다.
1639(기묘,71세) 모리에서 일두 정여창의 신도비 등의 글을 지어면서 지내다.
1640(경진,72세) 某里에 있으면서 ‘續近思錄’을 지으려 했으나 완성하지 못하다. ‘程·朱 이후에 著書가 필요없다’는 南冥 曺植의 말을 되새기다.
1641(신사,73세) 6월 季氏家에서 세상을 떠나다.
1642(임오) 龍門書院(鄭汝昌, 林薰, 林芸 배향)에 추향되었고, 濫溪書院 別祠에 배향되다.
1651(신묘,孝宗2) 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事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禮文館大提學世子左賓客에 贈職되다.
1657(정유) 文簡의 諡號를 내리다.
1700(경진) 南漢顯節祠에 배향되다.
1704(갑신) 某里齋 齋舍에 火災가 나다. 僧侶의 失火로 崇禎曆 등 鄭蘊이 쓰던 서적 등이 불타다.
1707(정해) 모리재를 중건하고 酌獻禮를 행하다.
1806(병인,순조6) 모리재 화엽루를 건립하다.
1810(경오) 龍泉精舍를 重建하고 菊薦禮를 행하다.
(一) 敎旨類
낱장 古文書類는 文書種類, 作成時期, 文書規格, 面數 등을 해제 뒤에 〈附錄〉으로 整理해 두었다. 여기서는 이 가문의 특징과 정치적·사회적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나고 있는 〈敎旨類〉와 〈所志類〉만을 중점적으로 기술한다.
교지류는 鄭蘊(一五六九~一六四一)의 교지를 제외하면 一四〇〇年代 초·중반에 해당하는 조선초기에 작성된 것이다. 해당인물은 悛(一三五六~一四三五)-齊安(一三九O~一四五七)-從雅(一四二五~一四八〇)-玉堅(一四五〇)(一五二六)으로 이어지는 四代에 해당한다. 물론 이들은 모두 文武의 과거를 통해 入仕한 인물들이었다. 고려 禑王代의 鄭悛의 〈宣光丁巳進士牓〉이 現傳하는 것도 여말선초를 전후한 이 가문 인물들의 과거-관직생활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므로 선세 인물들의 당시 활동을 살펴보는 것이 교지류·방목 자료를 이해하는 첩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가문 선세 인물에 대한 기록은 高麗史·東國輿地勝覧을 비롯한 官記錄, 그리고 文集·桐溪年譜 등 개인 연대기류 등 비교적 다양한 자료가 남아있다. 그리고 이 가분 과거합격 인물들이 망라된 고려말~조선중기에 걸치는 방목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한편 鄭蘊의 직계 선조 외에 고려중·후기 인물들은 주로 〈草溪郡邑誌〉科擧條·人物條 등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邑誌에 실린
鄭氏 가운데 여말선초에 과거를 통해 입사한 인물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高麗朝〉
〇鄭倍傑: 顯宗 丁巳(一〇一七) 展試 第一人
〇鄭允宜: 始祖 鄭倍傑 七代孫, 忠肅王 戊辰(一三二八) 登第
〇鄭僐: 鄭倍傑 七代孫 魁科, 僉議評理
〇鄭允耆: 高麗朝 登第
〇鄭珚: 鄭僐의 孫子, 開城判官, 八川君
〇鄭習常: 恭愍王朝 文科, 大司憲
〇鄭習仁: 恭愍王朝 登第
〇鄭悌: 洪武 辛亥(一三七一, 恭愍王 二O) 文科
〇鄭愼: 閤門祗侯銀靑光錄大夫尙書
〇鄭悛: 丁巳(一三七七, 福王 三) 司馬入格, 登第
〈朝鮮初期〉
〇鄭光繼: 太祖朝 人物, 官職은 光靖大夫評理上護君
〇鄭乙生: 兵曹判書
〇鄭英: 太宗朝 登第, 官은 府使
〇鄭居悟: 世宗朝 直長
이상과 같이 鄭蘊 直系 先祖를 제외하더라도 초계정씨는 과거를 통해 입사했으며, 鄭習仁(?~?), 鄭悛(一三五六~一四三五)의 고려말기 방목이 전해지는 것도 바로 이러한 가문의 榮華와 繁榮의 일면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이 가문의 인물들, 특히 고려시대에 활동하였던 인물들을 살펴보면 일관되는 하나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이들이 擧皆가 「科擧」를 통해 入仕했다는 사실이다. 즉 「科擧家門」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과거를 통한 入仕에 대해 남다른 정열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이다.
고려말에서 조선중기에 이르는 방목과 교지류의 이해를 돕기 위해 鄭蘊의 『年譜』및 에 실린 鄭蘊의 직계 선조의 이력을 약술한다.
①鄭倍傑(一O一七~一O五一): 草溪鄭氏의 始祖. 爵位는 光儒候, 顯宗 八年(一〇一七) 展試 第一等으로 합격하였고, 定宗 元年(一O三五)에 左拾遺, 文宗 三年(一O四九)에는 秘書監知中樞院事, 四年에는 中樞院翰林學士承旨, 五年에는 中樞使禮部尙書를 지냈다. 墓는 草溪 玉田에 있다.
②鄭文(?~一二O六): 字는 懿德, 나이 겨우 一五, 六세에 의연히 老成한 것 같았으며, 과거에 응시하여 〈君爲民天賦〉를 지으니 文宗이 이를 듣고는 칭탄해 마지 않았으며, 동제시켜 直翰林에 발탁하였다. 轉職하여 右拾遺內給事를 지냈다. 肅宗 七年(一一O二)에 禮部尙書가 되어 箕子始廟의 祀典을 정비하고 立祠祭之할 것 등 국가의 敎化와 禮義에 대해 주청하였다. 肅宗九年(一一O四)에 謝恩使로서 중국에 들어갔다가 宋 徽宗이 내린 金帛을 從者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나머지는 書籍을 구입하여 왔다. 여러 관직을 거쳐 官이 檢校司空禮部尙書政堂文學太子賓客에 이르렀다. 左僕射參知政事에 증직되고 시호를 貞簡이라 하였다. 관직에 있으면서도 청렴, 신중하여 형조를 맡은 지 一〇여 년이 되었지만 남을 함부로 벌주지 않았다. 부인 金氏는 允義의 딸로 세 아들을 낳았다.
③鄭丞: 鄭文의 三子의 後孫. 譜帖이 이어지지 않아 第一子 邦柱만 알 수 있다.
④鄭邦柱: 高麗朝 인물이며, 追封嘉靖大夫同中樞事를 지냈다.
⑤鄭公衍: 待聘齋生. 고려조에 과거에 응시한 諸生들이 모두 九齋待聘을 隷名하였으니 公衍이 그 중 한사람이다. 進士에 뽑혔으나 隱德(逸)으로 不仕하였다. ⟪牧隱集⟫에 「숨은 君子로서 稼亭과 同年進土」로 묘사되어 있다. 墓는 安義 防築洞 坎坐原이다.
⑥鄭習仁: 字는 顯叔, 恭愍王 四年(乙未, 一三五五)對策으로 등제하여 成均學官을 지냈고, 外方으로 나가 榮州吏를 지낼 때는 古事를 들어 消災圖를 불태워 迷信을 제거하는데 노력하였고, 州에 있는 佛家의 塔도 孔子의 말을 빌어 철거하기도 하였다. 知梁州, 知密城이 되어서는 豪强한 사람들을 제압, 淫祀를 금하였다. 內官으로 들어와 都官郞이 되어서는 土地神에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부모 喪을 당해서는 蘆墓 三年을 행했으며, 治喪節次를 일체 朱子家禮에 따랐다. 禑王初에는 典校令을 지냈다. 일본에 報聘되어 가게되자 佛者인 日本使臣이 斥佛論者인 그를 두려워 해 그 교체를 청하기도 했다. 공양왕 초에는 右散騎常侍에 제수되었다.
⑦鄭悛(一三五六~一四三五): 禑王 三年(一三七七, 洪武 丁巳)에 進士 壯元에 합격하였고 八年(壬戌, 一三八二)에 文科에 登第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公州通判. 西海 楊廣 江原經歷, 原州敎授를 지냈다. 태조 三年(一四〇三, 永樂 癸未)에는 聖節使 書狀官으로 배를 타고 南京에 갔다. 松都로 돌아와서는 左獻納知製敎, 外職으로 慶尙道經歷을 지냈다. 또 內職으로 돌아와 直禮文官兼直講, 平壤敎授를 지냈다. 太宗 七年(一四O七, 丁亥)에는 다시 謝恩使 書狀官으로서 중국을 다녀왔으며, 돌아와서는 內職으로 判承文院直集賢殿 直禮文館 典農正 知製敎 令知文書應奉司事를, 外職으로는 知金山郡兼勸農兵馬鍛鍊使를 지냈다. 太宗 一三年(一四一三, 癸巳)에 左司諫大夫를 거쳐 成均館大司成, 集賢殿直提學, 太宗 一四年(一四一四, 甲午)에는 禮曹左參議 寶文閣直提學, 世宗 元年(一四一九, 己亥)에는 讀卷官試士, 世宗 五年(一四二三, 癸卯)에 嘉善大夫檢校漢城府尹寶文閣提學을 지냈다. 세종 당시인 六八세 때에 함양에 돌아와서는 文章行誼로서 「八溪先生」이라고 칭해졌다. 世宗一七年(一四三五, 乙卯)에 나이 八O歲로 죽었다. 遺稿 一권이 전하는데 宗宅에는 전하지 않고 앞에서 언급한 『八溪世芳集』에 그의 글이 전한다. 처음에는 居昌 龍山 晚築, 咸陽 介坪에 살았다. 墓는 咸陽 德谷 辛坐原에 있다. 부인은 高靈朴氏로 軍器少尹 邦龍의 딸이며 宜寧 芝山에 別葬했다. 둘째부인은 河東鄭氏로 판전농사사(判典農寺事) 竹堂 鄭復周의 딸이다. 함양에 오랫동안 寓居했음은 邑誌 寓居條에 전한다.
⑧鄭齊安(一三九O~一四五七): 공양왕 三二年(一三九O)에 태어났다. 一六살 때인 太宗 三年(一四O五, 永樂 乙酉) 生員試에 합격하였고, 太宗 七年(一四O七, 丁亥)에 司憲府監察 劉懽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처음에는 安陰의 古縣 減陰(현재의 거창 강동)에 살았으며, 세조 三年(一四五七, 丁丑) 六八歲로 죽었다. 墓는 安陰 북쪽 黃山 艮坐에 있다.
⑨鄭從雅(一四二五~一四八O): 字는 正叔이다. 世宗 七年(一四二五, 洪熙 乙巳)生이다. 端宗 元年(一四五三, 景泰 四年 癸酉) 武科에 登第했다. 世祖, 成宗代에 벼슬해 通政大夫忠州收使에 이르렀다. 兪好仁이 이르기를, 「忠州牧使를 지낸 후 金猿山 아래에 살면서 즐겨 책을 보아 늙어서도 말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墓는 古縣 嶧洞 子坐原에 있다. 부인은 安東權氏로서 署令 懷의 딸이다. 〈景泰四年 武科榜目〉에 進武副尉로서 三等 二O人에 합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⑩ 鄭玉堅(一四五O~一五二六): 字는 不磷, 世宗 三二年(一四五O, 景泰 庚午)生이다. 成宗朝에 道臣(觀察使)이 추천하여 司圃署別提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權官들의 혐의를 받아 물러나 隱遁하였다. 鶴潭위에 凌虛亭을 세워 늙도록 휴식의 장소로 삼았다. 스스로 蠖溪居士로 부르면서 鄭汝昌 姜漢(一四五四~?, 琴齋)과 더불어 道義로써 交遊했다. 순조 三年(一八O三)에 金溪鄕祠에 配享되었다. 墓는 居昌 黃山에 있다. 부인은 慶州金氏로서 司憲府執議 梶의 딸이다. 둘째 부인은 密陽朴氏로 禦侮將軍 思榮의 딸이다. 咸陽郡守를 지낸 朴仁老의 孫이다.
⑪鄭淑(一五O一~一五六三): 字는 燈夫, 進勇校尉를 지냈다. 부인은 晋州鄭氏로 府使 勇純의 딸이다. 版圖判書 仁得의 六世孫이다.
⑫鄭惟明(一五三九~一五九六): 字는 克允이다. 선조 六年(一五七三, 萬曆 元年)에 進士에 入格했다. 일찍이 葛川 林薰을 從遊하였다. 학문이 깊었으며 隱居하면서 호를 嶧陽先生이라 하였다. 孝誠과 治喪이 지극하여 鄕人들의 薦擧로 仁祖 一一年(一六三三) 旌閭되었고, 仁祖 一二年(一六三四)에 嶧川鄕祠에 配享되었다. 文集 二권을 남겼다. 本書에 文集 草稿本(乾) 一책이 揭載되어 있다. 부인은 晋州姜氏로 將仕郞 謹友의 딸이다. 濫溪書院을 세운 姜翼(一五二三~?, 介庵)과는 妻男妹夫 사이였다.
(二)所志類
鄭蘊의 宗宅所藏 所志類는 山訟 所志가 주종을 이루는 여느 가문과는 다른 특징이 있다. 英祖 戊申亂(一七二八) 즉 嶺南에서는 鄭希亮亂이라고 불리워지는 대사건에 관계된 소지가 그 대종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鄭希亮(?~一七二八)은 바로 이 草溪鄭氏 桐溪派(文簡公派)의 直系 後孫이었다. 鄭希亮은 鄭蘊의 孫子인 鄭重元
(一六五九~一七二六)의 둘째 아들이었다. 鄭希亮이 逆賊으로 몰려 처형된 후 이 가문은 滅門이 될 정도로 사회적·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鄭蘊은 生前 死後를 막론하고 영남일원 뿐만 아니라 조정에서도 대단한 인망을 지닌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鄭希亮이 대역죄인이긴 했으나 鄭蘊의 嗣孫만은 士林들의 후원과 보호하에 사회적으로는 난 후 오래지 않아 婚姻 등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鄭蘊 嗣孫들은 鄭希亮을 族譜에서 삭제하고 그에 관한 모든 연고를 끊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러한 노력 끝에 鄭蘊의 直系 자손들은 대 사회적 관계는 개선되었지만 난의 과정에서 적몰된 재산은 원상회복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所志類는 적몰된 재산을 되돌려 받는 과정에서 작성된 각종 請願書였다. 逆賊의 경우 법에 따라 그 재산을 몰수하였지만 어디까지나 죄인 당사자에 국한되었다. 連坐律에 따라 사회적 신분적으로 제한을 당하는 것과는 달랐던 것이다.
그러면 왜 鄭希亮亂에 종손집의 재산이 몰입된 것일까. 이 의문을 푸는 것이 소지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關鍵이 된다. 이를 위해서는 당시의 종가사정을 면밀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정희량의 아버지 鄭重元(一六五九~一七二六)은 아들 纘儒(一六八一~一七一二), 遵儒(鄭希亮)와 딸 셋을 두었다. 그런데 鄭重元은 무신란이 일어나기 二年 전인 一七二六年에 죽었고, 長子는 그보다 앞서 一七一二年에 三二歲의 나이로 죽었다. 또 纘儒의 獨子 宜瑚(一六九八~一七一六)는 이보다 빠른 一七一六年에 一九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一七二八年 정희량난 당시에는 宗家의 冑孫三代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던 것이다. 그리고 三代를 거치는 동안 남자 형제들은 오직 정희량 뿐이었다. 이 까닭에 정중원이 죽고부터는 정희량이 종가의 大小事를 관장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종가재산이 정희량의 적몰재산에 混入되어 함께 몰수 당한 것은 이러한 가정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한편 田畓의 적몰 근거가 된 것은 一七二O年의 庚子量案이었다. 당시까지는 정중원이 살아있었기 때문에 모든 재산이 그 이름 앞으로 등재되어 있었다. 따라서 一七二八年 무신란 후 공포분위기 하에서 鄭蘊의 賜牌地를 비롯한 位土畓 상당부분이 정희량의 재산인 것으로 오인, 몰수되었던 것이다.
토지를 억울하게 적몰되었다해서 당시로는 이를 바르게 고칠 분위기도 아니었고 그런 일을 할 인물들도 없었다. 본격적인 반환운동이 펼쳐진 것은 一〇〇여년 정도 지난 一九세기 초였다. 이 때의 종손으로는 鄭宗弼(一七九七~一八二一), 鄭璣相(一八二五~一八八六)代에 해당하였다. 재산 반환은 다분히 鄭蘊의 명예를 회복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초계정씨문중 뿐만 아니라 영남유림들이 단결해 추진되고 있었다.
위토복급에 관한 청원은 一七九O年 安義儒生들에 의해 맨 처음 제기되었다. 所志 NO.一 문서가 이에 관련된 것이다. 이하 수십장의 所志·上書 등도 그 청원내용은 대동소이 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鄭宜瑚(一六九八~一七一六) 死後 一三年만에 무신란이 발생했고, 의호와 정희량은 숙질지간에 불과하며 소유노비도 서로 달랐다. 무신년보다 一O年앞서 정희량은 順興에 移居하여 그의 몫으로 받은(衿得) 田土도 남김없이 순흥으로 移置하였다. 安義, 居昌地域에 남아있는 것은 모두 嫡傳之物인데도 이를 분간해 주지 않는 것은 억울한 일이다. 庚子(一七二O)量案 당시에 纘儒·宜瑚가 모두 죽고 당시 살아있던 原財主 重元의 이름으로 載錄했기 때문에, 적몰할 때 희량의 父 중원의 이름으로 된 전토를 회량의 재산으로 착각하여, 안의 ·거창 두 읍에 있는 선생의 祭田과 순흥에 있는 희량이 衿得한 것을 함께 몰수했다. 희량은 선생의 直孫이 아니니, 香火가 끊이지 않게 하여 주실 일」
이와 같은 요지의 청원이 받아 들여져 결국 一八二五년(순조二五)에 토지가 復給되었다. 이 후의 소지들은 반환판결을 받은 후 토지의 반환이 용이치 않은 데 대한 청원이었다. 一〇〇년 이상된 토지였기 때문에 매매 상속 등으로 인해 토지의 소유주가 바뀌어 있는 등 문제가 간단치 않았기 때문이다.
수십년간에 걸친 위토반환운동을 벌이는 동안 이 가문은 八結餘에 달하는 방대한 토지를 되찾는 등 경제적으로 가문의 위상을 되찾았지만 무엇보다도 중대한 변화는 이들의 정치적 입장 변화라 할 수 있다. 이들이 전토반환운동을 벌이던 一八세기말~一九세기초는 이른 바 老論 중심의 세도정치시대였고, 아무리 당위성이 있는 청원이라 할지라도 당시 당국자들의 입장이 반영될 수 밖에 없었다. 즉 전토반환과 정치노선의 변화는 일종의 타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鄭蘊 후손을 비롯한 安義 居昌의 士林들은 여느 영남사림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는 南人이었다. 집권 老論들은 이들 남인 본거지에 이들의 세력을 부식시키기에 전력을 다하였고 정희량난 이후 정치적 위기에 몰린 이들에게 그 손을 뻐쳤던 것이다. 鄭蘊가문의 경우 노론과의 연결고리는 鄭蘊계 노론계의 핵심세력인 김두순·김병기의 이른바 장동김씨들이었다.
일찍이 鄭蘊은 병자호란 당시 척화신으로서 같은 척화파인 金尙憲(一五七〇~一六五二)과 정치적 공감대를 가진 바 있다. 후대에 만들어진 문집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金尙憲과 주고 받은 文字도 다수 있었다. 그 이후 이들은 교류를 거의 하지 않았다가 무신란 후 접촉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位土復給 문제 말고도 鄭蘊가문의 숙원 사업인 某里齋·龍泉精舍의 重建이 모두 居昌 혹은 안의지역에 守令으로 와 있던 老論系 인물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특히 김상헌의 후손 金麟淳(거창부사 역임)은 龍泉精舍 중건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등 이 가문과 돈독한 사이를 유지 하였다.
여기서 김인순이란 인물을 좀더 부연 설명할 필요가 있다. 김인순은 청음 김상헌의 직계후손으로서 金昌恊의 四대손이었다. 철종·고종대의 권력의 핵심이었던 金洙根(一七九八~一八五四), 金汶根(一八〇一~一八六三), 金炳學(一八二一~一八七九), 金炳國(一八二五~一九〇五), 金炳弼(一八三九~一八七O) 등은 바로 그의 아들 손자들이었다. 요컨대 김인순은 노론 집권층 가운데서도 핵심 인물이었고 그의 영향력은 지대했음은 불문가지이다. 초계정씨 입장에서는 金麟淳과의 인연은 단순한 지방수령과의 만남이 아니었던 것이다. 一八세기말~一九세기초 鄭璣相(一八二五~一八八六) 이래 鄭泰均(一八八四~一九六四)에 이르는 鄭蘊의 直·傍系人物 一〇여 인이 문과를 거쳐 관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因果關係가 절대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여진다. 중앙노론세력과 골수남인세력간의 일종의 제휴가 이루어진 셈이다.
무신란이 진압된 뒤, 거창지역에는 지역의 사림세력간에도 변동이 나타났다. 초계정씨와 같이 노론세력과 손을 잡은 기존의 사족들이 있는가하면 居昌愼氏 邑派 등 난의 진압에 가담한 세력이 급부상하였다. 이 지역에 무신란 진압에 앞장섰던 인물을 배향한 祠宇가 유난히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특히 향리세력의 적극적인 가담은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안동의 權喜學(一六七二~一七四二)이 난을 토벌한 공으로 공신에 책봉되어 立祠된 것과 흡사한 양상을 보여준다.
成冊古文書는 所藏處, 資料性格 등을 고려하여 宗家所藏 文書와 某里齋·龍泉精舍·嶧川書院 關聯文書·其他文書로 分類하였다. 某里齋·龍泉精舍 ·嶧川書院의 건립과 운영에 대해서는 간략히 서술하며, 각 문서의 作成年代, 作成者 등은 해당 문기에 밝혀두기로 한다. 아울러 유의해야 할 사항은 成冊本 가운데는 앞의 개별문서와 연관성 있는 자료가 많기 때문에 반드시 상호 연관시켜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다.
(一) 宗家所藏文書
가. 帖冊類
鄭氏家門所藏 古文書 가운데는 이들의 先祖 또는 外祖 등 유관인물들의 榜目·詩·書·遺稿 등을 편집해 놓은 帖冊類가 있다. 帖冊類중 대표적인 것이 鄭惟明(一五三九~一五九六)·鄭蘊(一五六九~一六四一)·鄭昌詩(一五九O~一六五O) 三代에 걸치는 手筆本이다. 당사자의 親筆 原本을 後孫 鄭岐壽(一六二二~一七〇一)와 鄭重元(一六五九~一七二六)父子가 六冊으로 帖하였다. 그 帖하게된 來歷은 鄭岐壽·不鄭重元의 跋文에 자세히 전한다. 帖을 만들고 발문을 붙인 시기는 一六八四年(甲子, 肅宗一〇)이다.
帖冊本은 언제인지는 알 수없으나 화재로 인해 문서가 일부 파손되어 있다. 鄭悛의 〈宣光七年丁巳進士牓〉도 이들 첩책류와 함께 화재로 인해 일부가 마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첩책이 불에 탄 형태가 모두 「八」字로 비슷한 데서 알 수 있다.
鄭重元이 첩책본은 원래 六冊이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五冊이며, 「內子遺事」一冊이 빠져 있다. 그 내용은 인조대 병자호란 당시 척화론자 鄭蘊의 저술을 묶은 것으로 疏剳(四件)·書(三件)·詩(三件) 등이다.
①榜目類
榜目에는 一三七七年 〈宣光七年丁巳進士牓〉의 原本 一件과 一四세기 중엽 -一七세기 초반에 걸치는 六件의 榜目이 하나의 문건으로 筆寫되어 있다. 총 七件의 방목에는 초계정씨가문의 인물들이 합격자로 등재되어 있다.科擧名과 해당인물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맨 마지막 萬曆三十四年困午「司馬榜目」은 鄭蘊이 一六〇六年 (선조 三九) 丙午年 進士試에 二等 二人으로 합격한 방목이다. 뒷 부분이 亡失되어 당사자인 鄭蘊은 나타나 있지 않다.
〇宣光七年丁巳三月日進士牓(一三七七, 禑王三)
鄭悛(一三五六~一四三五)
〇大明洪武十五年壬戌五月日 及第同年榜目(一三八二, 禑王八)
鄭悛(一三五六~一四三五)
〇大元至正十五年乙未及第榜(一三五五, 恭愍王 四)
鄭習仁(?~?)
〇景泰四年癸酉十一月初一日武科榜目(一四五三, 端宗 一)
鄭從雅(一四二五~一四八O)
〇萬曆三十八年庚戌文科榜目(一六一O, 光海君二)
鄭蘊(一五六九~一六四一)
〇萬曆元年癸酉二月二十四日司馬榜目(一五七三, 宣祖六)
鄭惟明(一五三九~一五九六)
〇萬曆三十四年丙午「司馬榜目」(一六O六, 宣祖三九)
鄭蘊(一五六九~一六四一)
②三世家中簡牘
〇著者 : 鄭惟明(一五三九~一五九六), 鄭蘊(一五六九~一六四一), 鄭昌詩(一五九〇~一六五O)
〇編者: 鄭岐壽(一六二二~一七O一)-각 문서마다 執筆場所, 時期 등을 附記
〇內容: 鄭惟明의 親筆 書簡 총 一三件
鄭惟明(高祖考): 鄭蘊(一五六九~一六四一) 簡札-임진란 중의 전황 등에 관한 내용
鄭蘊(曾祖考): 鄭昌詩(아들)-老母, 祖母 등에 대한 問安과 家內 事에 관한 내용
鄭蘊(曾祖考): 鄭緯(兄), 鄭鮊(同生, 奉事公)
鄭昌詩(正郞公): 伯父 鄭緯(一通), 先祖(一通), (昌謨·昌謹-同生, 二通)
③三世家中舊事
〇著者: 鄭惟明(一五三九~一五九六), 鄭蘊(一五九O~一六四一), 鄭昌詩(一五三九~一六五〇)
〇內容: 위 三인의 親筆 총 一四件
鄭惟明(高祖考): 書簡草 一
曾祖考(鄭蘊): 散錄 三·祭文 二·書一·墓誌 一·墓表 一
祖考(鄭昌詩): 詩三·書二
④先代遺墨
〇附題: 祖考文簡公府君筆蹟
〇著者: 鄭蘊(一五六九~一六四一)
〇內容: 鄭蘊의 觀筆 총 一八件
鄭蘊(曾祖考): 啓辭 二·疏剳 二·記一·詩一O·書二·祭文一. 위 저작 중 上疏 ·啓 등은 『桐溪先生文集』에 실려있다.
⑤甲寅遺事
〇著者: 鄭蘊(一五六九~一六四一)
〇內容: 鄭蘊의 친필 총 九件
書一·封事 一·詩二·謫中所 草記 一·詩·書 一·說 一·箴 一·封事 圍籬記 別第詩 與吳正言書 求中說 元朝自警箴 家中書 籬中詠竹詩
〇甲寅封事의 要旨: 光海君 六年(一六一四)에 鄭蘊(四六歲)이 鄭沆을 斬首하고 永昌大君 位號를 追復할 것을 주장한 상소. 이에 대해 兩司 合啓로 鄭蘊의 청죄를 요청하는 등 큰 物議가 일어났다. 이 상소로 말미암아 鄭蘊은 濟州道 大靜에 圍籬安置되었다.
⑥先代遺墨
〇附題: 先考正郞府君手筆
〇著者: 鄭昌詩(一五九O~一六五O)
〇內容: 鄭昌詩의 親筆 총 一二件
鄭二詩(祖考): 詩七·祭文 一·書 四(仲從祖-鄭昌訓 書一, 季從祖-鄭昌謨 書 一, 庶從祖-鄭昌 謹書 一)
⑦八溪先祖朝天-行詩
〇被傳者: 八溪 鄭悛(一三四六~一四三五)
〇著作年代: 癸未(一四O三, 太宗三), 丁亥(一四O七, 太宗七)
〇筆寫年代: 崇禎後 五八, 乙丑(一六八五, 숙종一一)
〇筆寫者: 鄭岐壽(一六二二~一七〇一)
〇內容: 八溪 鄭悛이 太宗 三年(一四O三, 永樂 癸未)에 聖節使書狀官으로 배를 타고 南京을 다녀왔고, 四年후인 一四O七년에 謝恩使 書狀官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이 詩는 그 때 중국을 여행하면서 적은 詩를 모은 것이다. 八代孫 鄭岐壽의 발문에 의하면 鄭悛의 遺稿 一책이 전한다고 하나 그 원본은 찾을 수 없고 영조대에 엮은 『八溪世芳集』이 전한다. 이 世芳集에 그의 시와 행적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편 東文選에도 그의 시가 전한다.
⑧ 嶧陽先生文集(乾)
〇著者: 鄭惟明(一五三九~一五九六)
〇編者: 筆體로 보아 鄭岐壽 혹은 鄭重元인 것으로 추정된다.
〇內容: 鄭惟明 文集 草稿本. 卷 一, 詩~祭文까지만 실린 乾篇만 남아있고 墓碣 이하 卷二부분 一책은 전하지 않는다 활자화된 판본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宗家에는 이 草本의 坤篇 및 활자본이 전하지 않는다. 정유명의 생애와 그 사상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 특히 그의 스승이었던 林薰, 鄭逑 등 南冥門徒들과의 관계, 그리고 임란 때 의병장 郭䞭의 활약상 등이 잘 나타나 있다
⑨吳長筆帖
〇年代: 癸丑(一六一三, 光海君五)
〇著者: 吳長(?~一六一六)
〇後誌(鄭蘊 撰)作成年代: 萬曆 戊午(一六一八, 光海君 一O)
〇內容:「公平正大」라고 쓴 吳長의 筆帖. 鄭蘊과 吳長과는 친구사이이다. 오장의 字는 翼承 호는 思湖, 德溪 吳健(一五二一~一五七四)의 아들이다. 正言을 지냈다.
〇所藏來歷: 사이가 돈독했던 吳長과 鄭蘊은 계축년(一六一三, 광해군 五) 겨울에 서울로 올라가던 정온과 내려오던 오장이 慶尙道 金陵의 客舍에서 만났다. 그 때 술이 취한 오장이 一筆揮之해서 준 글씨가 바로 이 「公平正大」였다. 鄭岐壽(一六二二~一七〇一)가 그의 아들 鄭重元(一六五九~一七二六)에게 새로 첩을 만들도록 지시해, 鄭重元이 갑자년(一六八四, 숙종 一O)에 六六年前 무오년(一六一八)년에 쓴 글씨를 다시 첩해 두었다. 鄭蘊의 序文은 그의 文集에 전한다.
⑩絲川先祖墓誌
〇被傳者: 鄭昌詩(號: 絲川, 一五九O~一六五O)
〇著者: 鄭岐壽(一六二二~一七O一), 鄭重元(一六五九~一七二六)-鄭昌詩의 아들과 孫子
〇內容: 鄭昌詩의 墓誌 草本. 정창시는 현재 문집이 전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에 관한 사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이묘지명은 여러 면에서 참고가 된다. 정창시는 雲峯縣監을 지냈다. 本書의 其他文書「涵虛亭契帖」에 정창시 및 그와 교유했던 인물들의 명단이 있다.
⑪外家追慕帖
〇年代: 帖한 時期-甲子(一六八四, 肅宗一O)
〇原著者: 羅緯素-鄭岐壽(一六二二~一七〇一) 妻父
〇編者: 鄭重元(一六五九~一七二六)
〇內容: 鄭岐壽의 妻 羅州羅氏는 나주지방에서 명망이 높았던 가문 출신이다. 그의 父는 緯素(一五八三~一六六七, 左參贊), 祖와 曾祖는 羅德峻(參判), 羅士沈(左贊成)이었다. 내용 중에는 羅緯素 등 나씨문중 인물들과 주고 받은 詩, 書와 羅緯素의 致祭文이 附記되어 있다. 甲子年(一六八四)에 쓴 鄭重元의 後記와 權基洛의 跋文이 있다. 羅德峻 家門은 영조 때 그의 직계후손인 羅晚致 羅崇大 羅崇坤 등이 戊申亂에 주동적으로 참여, 一家가 被禍되었다. 이들이 英祖 戊甲亂에 참여하게 된 것은 영남의 鄭希亮 가문 즉 本書의 주인공 초계정씨가문과 혼인관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신란의 원인규명에 중요한 단서가 된다.
⑫小宗契案
〇年代: 庚申(一九二O)
〇人物: 鄭泰均(一八八三~一九六三)
〇內容: 鄭泰均이 지은 小宗v案序가 있다. 서문에 의하면 소종계는 鄭璣相(鶴菴王考) 등이 계금을 모아 創契하였다 한다.
나. 文簡公(鄭蘊)位土還給 關聯文書
鄭蘊의 位土는 鄭希亮亂으로 인해 官에 籍沒되었는데, 一〇〇년 가까이 지난 후 지방 士林 및 鄭氏門中의 적극적 노력에 의해 다시 還給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앞의 개별문서 〈所志類〉 해제를 참조하기 바란다.
①忠勳府混籍文簡公位土還給記
〇年代: 庚辰(一八二O, 純祖二O)-鄭蘊嗣孫 鄭宗弼
〇內容: 鄭希亮亂으로 인해 몰수된 鄭蘊의 位土畓을 忠勳府로부터 되돌려 받은 문서. 田畓의 所在地, 地番 등이 기록되어 있다.
앞 부분에는 還給된 토지의 地番, 地目, 結負 등이 기록되어 있고, 뒷부분에 충훈부의 完文이 첨부되어 있다. 위토 가운데 충훈부에서 돌려받은 전답은 모두 四結 二九負 八束이었다. 정온의 직계 종손 鄭宗弼(一七九七~一八二一)에게 내린 完文을 國譯하면 다음과 같다.
「庚辰(一八二O, 純祖二O) 一O月 日 桐溪嗣孫 鄭宗弼(手決) 忠勳府 田畓 가운데 先祖父 文簡公(鄭蘊)位土로서 잘못 섞여 들어간(混入) 結負 合 四結 二九負 八束을 出給成冊數에 따라 일일히 推尋하였으되, 此後에 만약 침탈하는 弊가 있거든 이 文書로서 憑考할 일이다. 官(手決)」
②文簡公位土推給決案
〇年代: 庚辰(一八二〇, 순조 二〇)
〇人物: 鄭宗弼
〇內容: 一八二〇년 一一월 七일 충훈부에서 내린 推給決案과 忠勳府推給條(田畓內譯)가 실려 있으며, 같은 달에 올린 鄭宗弼의 所志가 맨 뒤에 첨부되어 있다.
③花原君 忠原郡 賜牌田畓本孫納田案謄出冊
〇年代: 乙酉(一八二五, 순조 二五) 三月日
〇內容: 鄭希亮亂의 결과, 난을 토벌한데 공을 세운 權喜學(一六七二~一七四二), 朴東亨에게 지급된 위토답의 字號·卜數를 謄出한 문서. 花原君(權喜學)賜牌秩-本孫 權喆鎭(安東 幼學) 忠原君(朴東亨)賜牌秩-本孫 朴思仁(尙州 幼學)
④安義縣所在文簡公位土復給時關文謄出成冊 乙酉 四月 日 査實冊 營報草件)
〇內表紙: 道光五年 四月 日 事實冊 營報草件 安義縣所在 文簡公位土復給時 關文謄書成冊
〇年代: 道光五年(乙酉, 一八二五, 純祖二五)
〇內容: 慶尙道觀察使兼巡察使가 내린 己卯年(一八一九) 七월, 九월, 一二월의 關文을 謄出한 문서. 鄭希亮亂으로 인해 鄭蘊의 位土가 籍沒된 과정과 그 토지 內譯(結負)이 기록되어 있다.
⑤安義縣所在 鄭文簡公位土己卯復給條字號結數(都合)成冊(乙酉四月 日 營報草件)
〇年代: 乙酉(一八二五, 純祖二五)
〇內容: 己卯年(一八一九)에 돌려 준 鄭蘊 位土의 내역. 復給된 전체 土地結數는 八結 六六負 九束이다.
●忠勳府屯土中 出給分: 四結 二束
●忠原君(朴東亨) 賜牌地 推尋分: 二結 八O負 九束
●花原君(權喜學) 賜牌地 推尋分: 四九負 二束
●放賣畓 還推分: 一結 三六負 六束
⑥文簡公位土査實營草件
〇年代: 乙酉(一八二五, 순조 二五)
〇人物: 鄭夔弼(一八OO~一八五九)
〇內容: 官에서 鄭蘊 後孫 鄭夔弼(一八OO~一八五九)에게 내린 위토 복급을 확인해 주는 문서. 뒷부분에 乙酉(一八二五) 四월 安義縣監이 監營에 올린 書目이 있다.
⑦鄭奴哲發新舊量案
〇內表紙: 古縣(東里 南里) 文簡公位土承恩還推冊 鄭哲奴發新舊量案體出
〇謄出年代: 未詳
〇內容: 「鄭奴哲發」에서 「鄭奴」란 이 가문 즉 草溪鄭氏家門의 노비란 뜻이며, 哲發은 노비 이름이다. 토지가 哲發의 이름으로 양안에 등재되었으며, 이것을 등출했다는 뜻이다. 「新舊」란 己酉(一六六九)·庚子(一七二O)量案인 것으로 보여진다. 謄出시기는 鄭蘊의 位土復給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어 官에서 이를 허락절차가 이루어지는 一八一九년~一八二五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된다.
(二)某里齋 關聯文書
某里는 鄭蘊(一五六九~一六四一)이 南漢山城 함락 후 낙향하여 자신을 백이 숙제와 비유, 은거한 곳이다. 邑誌와 文集 現地踏査 등을 통해 그 某里 및 某里齋의 내력을 略述한다.
某里齋는 德裕山 자락의 金猿山 北麓에 자리잡고 있으며, 薑川里 鄭蘊 宗宅뒤를 돌아 도보로 一시간 거리이다. 仁祖 一五년(一六三七, 崇禎 丁丑) 鄭蘊이 이곳에 隱居한 후 산에 밭을 갈고 나무를 심어 자급자족하며 지냈다. 그 때 지은 움막을 「鳩巢」라 했으며, 지금은 重修하여 某里齋의 왼쪽 방이 「鳩巢」, 오른쪽이 「採藢軒」이다. 건물은 여느 곳의 書院 이상으로 웅대하며, 주위의 경관이 빼어났다. 모리재의 주위 山水 등은 一六三七년(정축년)봄 그가 모리재에 은거하며 지은 〈某里鳩巢記〉가 있다. 某里齋의 門樓의 명칭이 花葉樓이다.
鄭蘊 死後 그의 及門 生徒들이 齋舍를 건립, 春秋로 配獻禮를 행하였다. 某里契는 그를 추모하기 위해 鄕儒 및 道儒들이 조직한 조직이었다. 契의 草創時期, 參與人物 등은 정확하지 않다. 그 결성 취지는 〈某里齋契案〉 (壬辰, 一八九二) 서문에 구체적으로 전한다.
「이 마을은 모리이다. 지금 사람들이 이미 이 마을이 모리가 된것을 안다면 마땅히 (선생이) 남긴 뜻을 깊이 구해 그 影響을 想像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홀로 상상을 깊이 하는 데에만 그칠 수 있겠는가. 그 道를 講하고 그 행한 바를 실천해서 그 尊賢하는 實質을 다해야 할 것이다. 契員들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무릇 우리들 契를 같이 하는 사람들은 의당 각자 그 이유를 생각해 선생의 道와 行을 밝혀야 할 것이다. 선생의 道는 부모를 모섬에 그 孝를 다하고 임금을 섬김에는 忠을 다했으며, 스승을 섬김에는 그 義를 다했으니 이렇게 하는 것이 선생을 존경하는 것이며 이것이 곧 契의 근본(취지)인 것이다.」
①某里契案-鄕儒
〇作成年代: 壬辰(一八九二)
〇收錄年代: 己丑(一八八九) 庚子(一九OO) 壬寅(一九O 二) 癸卯(一九O三) 甲辰(一九O四) 乙巳(一九O五) 甲子(一九二四) 丁卯(一九二七)
〇人物: 鄭泰均(一八八三~一九六三) 鄭然奭(一八五O~)
〇內容: 〈節目〉-①某里契를 창설한 이유 ②講長·講學·講學日·赴講 등 강학에 관계된 규정 ③直月·色掌 등의 임무 ④契金의 관리와 운영 ⑤契員의 追入과 그 節次 ⑥過失에 대한 처벌
〈坐目〉-葛溪의 葛川林氏, 薑洞·安心의 草溪鄭氏, 馬洞(馬項)의 咸陽朴氏 등 현재의 거창군 위천면과 북상면 지역에 거주했던 鄕儒들의 명단이다.
②某里契案-道儒
〇作成年代: 壬辰(一八九二)
〇收錄年代: 己丑(一八八九) 戊戌(一八九八) 庚子(一九OO) 辛丑(一九〇一) 壬寅(一九O二) 乙巳(一九〇五) 丙辰(一九-六) 丁巳(一九-七) 戊午(一九一八) 甲子(一九二四) 丁卯(一九二七) 戊辰(一九二七) 辛巳(一九四一)
〇內容: 俛宇 郭鍾錫(一八四六~一九一九)을 비롯한 某里契에 입록된 道儒들의 명단이다. 여기서 道란 慶南·慶北地方의 儒林을 뜻한다. 情川·北上을 제외한 거창지역 인물들도 道儒에 포함되었다.
③道鄕儒抄按
〇年代: 乙巳(一九O五)
〇表題: 乙巳四月十五日講會時 道鄕儒抄按
〇人物: 鄭圭弼(一八五八~一九三O)
〇內容: 某里契 鄕儒·道儒의 契案을 작성하기 전의 草本이다.
姓名, 字, 本貫, 居住地를 기재하였다.
④(花葉樓成造時)通文 書簡
〇年代: 丙寅(一八O六, 純祖六), 丁卯(一八O七, 純祖七)
〇內容: 某里齋의 門樓인 花葉樓를 重修할 때 그 중수사실을 알리는 통문에 대하여 답하여 온 「答通文」, 그리고 重修를 축하하면서 보내온 書簡을 모아 필사해 만든 轉寫本이다. 門樓를 花葉樓라 한 것은 鄭蘊이 落鄕하여 戊寅年(一六三八)에 某里에 들어간 후 山中賦와 花葉詩를 좋아해 즐겨 지은 데서 유래하였다.
〇關聯文書: 〈花葉樓扶成錄〉
⑤花葉樓扶成錄
〇年代: 丁卯(一八O七, 純祖七)
〇人物: 尹光顔(一七五七~一八一五, 慶尙監司) 金義淳(監司) 李宜錄(漆谷 廣州李氏) 등
〇內容: 某里齋 花棄樓를 중수할 때 각지의 개인 및 단체에서 보내온 扶助의 내역을 적은 문서. 부조한 곳은 안의지역에서는 鄕校, 龍門書院, 司馬齋, 嶧川書院 및 인근지역의 院宇, 葛川林氏 등 각 門中, 安義이외 지역에서는 거창 함양 의령 칠곡 금산 지례 인동 함창 문경 상주 초계 삼가 산청 진주 곤양 고성 등지의 서원 ·향교, 문중이다.
⑥某里齋都錄
〇作成年代: 庚午(一八七O, 高宗七)
〇收錄年代: 一八六九~一九七七(己巳 庚午 辛未 壬申癸酉 甲戌 乙亥 丙子 丁丑
〇人物: 有司-鄭基信 鄭然洙 鄭琮相, 林陽熙, 愼圭晟 愼周晟
〇內容: 佛齋畓 등 一〇여 곳에 있는 전답의 規模, 賭地·小作 관계를 기록한 문서.
⑦(某里契)掌物錄
〇年代: 壬辰(一八九二)
〇內容: 거창 함양 등에 거주한 某里契員의 契金을 징수한 치부책. 인명이 대부분 字나 號로 기재되어 있다. 금액과 이들의 거주지가 차례로 기재되어 있다. 작성연대는 셋째 장 「鄭殷老宅」에서 확인된다. 「殷老」는 鄭蘊의 宗孫 鄭珪相(一八三二~一八九三)의 字이다.
⑧某里齋重修贊助記
〇年代: 丁酉(一八九七)
〇人物: 鄭然祚(一八四五~一九O三)
〇內容: 某里齋를 重修할 때 개인 및 단체에서 본내온 찬조금내역을 적 은 문서.
⑨某里本所秋收記
〇作成年代: 乙卯(一九一五)
〇收錄年代: 一九一五~一九二七, 丙辰 丁巳 戊午 己未 庚申 辛酉 壬戌 癸亥 甲子 乙丑 丙寅 丁卯 戊辰 己巳 丁卯
〇人物: 鄭泰均(一八八三~一九六四)
〇內容: 某里齋 齋畓 秋收記. 전답의 위치, 크기, 賭租額, 小作人, 실제 납부한 賭租額數 등을 기록하였다.
⑩某里儒稧秋收記
〇作成年代; 乙卯(一九一五)
〇收錄年代: 一九一五~一九二九. 丙辰 丁巳 戊午 己未 庚申 辛酉 壬戌 癸亥 甲子 乙丑 丙寅 丁卯 戊辰 己巳
〇人物: 鄭泰均(一八八三~一九六四)
〇內容: 某里齋 소유 전답의 秋收한 내역을 적은 都錄과 某里齋藢享時의 用下記가 실려있다. 문서 맨 뒤에 〈小作約定書〉 (丁亥, 一九四七)가 실려있다.
⑪(某里齋重建所)扶助錄
〇年代: 辛酉(一九二一)
〇人物: 鄭然奭(一八五O~一九二四)
〇內容: 개인 및 각 문중에서 모리재를 중건할 때 부조한 내역을 적은 문서.
⑫某里齋下記
〇作成年代: 壬戌(一九二二)
〇收錄年代: 癸亥(一九二三) 甲子(一九二四) 丙寅(一九二六) 丁卯(一九二七) 戊辰(一九二八) 己巳(一九二九) 辛未(一九三一) 壬申(一九三二) 癸酉(一九三三) 甲戌(一九三四) 乙亥(一九三五) 丁丑(一九三六) 戊寅(一九三八)
〇內容: 주로 某里齋의 藢享祭 등 享祀時에 쓰인 물품의 금액 내역을 적은 문서. 모리재에는 우측 방을 「菜藢軒」이라 하고 祭享을 「藢享」이라 한것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鄭蘊 자신의 은거생활을 백이 숙제에 비유한데서 비롯되었다. 유림 및 본손들이 그의 遺志를 받들어 현재까지 명칭을 고수하고 있다. 葛川林氏 등 주위 사족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미향은 지금은 본손들이 주관하고 있다.
⑬某田齋藢享祭官爬任記
〇年代: 壬戌(一九二O)
〇人物: 鄭東周 鄭圭文(安義 林內) 鄭鍾壽 鄭炳烈(北上葛項)
〇內容: 초헌, 아헌, 종헌관을 비롯한 祭官, 題牌, 執禮를 비롯한 제사 준비 ·진행요원들의 명단과 거주지를 기록하였다. 「爬任」이란 우리 고유의 漢字로서 「執事」즉 일(업무)을 맡는다는 의미이다. 執事分定記라 하기도 한다.
(三)龍泉精舍 關聯文書
龍泉精舍는 居昌郡 加祚面 龍山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은 鄭蘊의 六대조 鄭悛이 卜居한 적이 있는 곳으로 이 가문의 누대 墓所가 자리잡고 있다. 精舍가 창건된 것은 一六三三年(仁祖一一)이며, 그 명칭은 朱子의 寒泉精舍에서 따온 것이다. 龍泉精舍의 享祀를 菊薦禮라 하였는데, 이렇게 명명한 것은 治隱 吉再가 黃花로서 白夷를 祭祀했다는 고사에서 따온 것이다. 여러번 천거된 鄭蘊을 비유하여, 「거듭된 九번의 천거는 菊酒로 한다」는 뜻에서 菊薦禮라 하였다 한다. 용천정사는 鄭蘊이 안의 거창 함양 동 인근 지역의 사림들과 학문을 講論하고 契를 모으는 등 鄭蘊의 주요한 활동무대였다. 즉 鄭蘊의 병자호란 후 활동 무대가 모리재였다면, 그 이전의 활동무대가 된 곳이 용천정사였다.
①龍泉精舍事蹟隨統錄
〇內表紙: 墓位量案 禮曹節目幷附
〇年代: 己卯(一八一九, 純祖一九)
〇著者: 鄭宗弼(一七九七~一八二一)
〇內容: 鄭蘊이 용천정사를 지은 과정, 남한산성 함락 후의 行蹟, 그리고 鄭希亮亂 후안의 소재 위토답이 충훈부 등에 몰입되게 된 과정, 그리고 그 복구과정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기록자는 鄭蘊의 冑孫 鄭宗弼(一七九七~一八二一)이다. 〈龍泉精舍墓位決給案節目〉에는 위토답 복구와 관련하여 己酉(一六六九)·庚子(一七二O)量案이 수록되어 있다. 사적록의 주요부분을 번역해 옮기면 다음과 같다.
「龍泉精舍는 居昌府 북쪽 加祚縣 龍山에 있다. 府에서 三O里 떨어져 있다. 지난 崇禎 庚午年(一六三〇, 仁祖八)에 문간공 桐溪 정선생이 대부인을 여기에다 장사지내고 蘆墓 三年 후에 넓은 집을 짓고는 그 篇名을 용천정사라 했으니 대개 朱子의 寒泉精舍를 본 뜬 것이다. (중략) 丁丑年(一六三七)에 수레로 남쪽으로 내려와 戊寅年(一六三八)에 某里에 들어갔다. 山中賦와 花葉詩로 지냈고 드디어 이미 죽은 사람으로 자처했으며 다시는 세상에 족적을 남기지 않았다. 辛巳年(一六四一)에 죽으니 거창 主谷에 장사지내고 辛卯年(一六五一)에 용산 대부인 묘아래에 遷葬하니, 衣帶에 쓴 遺命을 따른 것이다.(하략)」
②完文總錄
〇年代: 辛未(一八一一추정)
〇內容: 龍泉精舍의 齋舍(本齋)의 관리와 운영에 관계된 完文을 모은 것이다. 「本齋」가 齋舍인 것은 앞의 「龍泉精舍史蹟統錄」에서 알 수 있다. 작성연대를 추정하면 다음과 같다. 맨 뒷장의 〈本齋文件總錄〉(庚寅)의 本齋願納畓完文(辛未)에 언급된 徐學運이 전답 납부자(기부자)로 등장하기 때문에 신미년은 경인년보다 이른 간지임을 알 수 있으며, 이 경인년은 〈本齋文件總錄〉에 位土復給에 관계된 문서들이 모두 언급되기 때문에 경인년은 위토문제가 마무리 된 시기인 一八三O年(경인)이다. 따라서 신미년은 이보다 앞선 시기인 一八一一年(신미)인 것으로 추정된다. 보다 정확한 것은 人名 등의 확인을 통해 보다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완문 가운데 용천정사의 경제적 기반 그리고 그 운영과 관련하여 주요한 부분을 요약,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保奴完文〉:「이 완문을 작성하는 일은, 校院에는 보통 保奴가 있어 대개 續錢을을 거두어 비용에 보탠다. 지금 이에 따라 너희들이 아직 身役이 없는 자 一O인으로 本齋의 保奴로 삼으니, 모름지기 매년 九월 九일(重九) 前한달 사이에 각각 例에 따라 비용을 납부해 그것으로 하여금 菊薦日에 쓰이는 비용을 삼게하니 뒤에 혹 他邑으로 移居하거나 당사자가 죽으면 다른사람을 뽑아 代補케 한다(하략)」
〈屬寺完文〉:「(전략) 本齋의 窓戶를 바르거나 日用 文書로 쓰이는 紙物을 구해 조달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에 道山書院의 吾道菴의 例대로 達田 啓明의 두 書堂을 本齋의 屬寺로 삼아 매년 白紙 二O束을 납부케 하니, 경내 사찰에서는 이 뜻을 알고 다른 役으로 침탈지 말라는 뜻으로 이와 같이 완문을 만들어 주니 뒷날 참고하라」
③龍山泛菊稧復案
〇年代: 崇禎三百十四年 辛巳(一九四一)
〇內容: 鄭泰均(一八八三~一九六四) 등 龍山泛菊稧 草創 一九人의 후손들이 泛菊契를 復舊해 명단을 적은 문서이다. 「復案」이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문서 서두에 〈先案〉에 초창一九人의 명단과 曺挺立의 序文이 있다.
〇泛菊稧 草創 名單-鄭蘊(桐溪), 曺挺立(梧溪), 林眞(林谷), 鄭絔(奉事) 申順蒙(妙亭) 李應白(梅溪) 文誠後(石峯) 卞昌後(月潭) 金尙堅({氵+頴}溪) 曺時亮(雪洲) 李灝(進士) 金益堅(梅䲧) 李蘭美(陽村) 崔後遠(柱巖) 李奉一(愚溪) 郭弘圭(進士) 申汝亮(處士) 李壽樟(處士) 鄭必達(八松)
(四)嶧川書院 關聯文書
嶧川書院은 鄭蘊의 父 鄭惟明(一五三九~一五九六)을 祭享한 祠宇이다. 仁祖 一二年(一六三四, 崇禎 甲戌) 嶧溪上에 건립하였고, 肅宗一七년(一六九一, 肅宗 辛未)에는 石泉 林得蕃을 追享하였다. 英祖 元年(一七二四, 갑진)에 嶧洞으로 移建하였고, 正祖 二三年(一七九九, 기미)에 다시 移建하였다. 서원의 운영은 정씨와 갈천임씨가 주도하였다. 현재 역천서원 문서가 양 가문에서 나뉘어 보관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엄씨문중 가운데는 林基福氏 소장 문건에 서원 관련문서가 많이 남아 있으며, 특히 〈嶧川書院前後事實錄〉은 역천서원과 두 가문의 관계, 안의의 지역유림들의 동향 등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문서이다.
①嶧川書院院規
〇內表紙: 院規, 附重修扶助記 龍門書院所送 庚寅二月十七日 享祠時 院規
〇年代: 庚寅(一八三O, 純祖 三O 추정)
〇內容: 〈院規〉-享祀時의 執事者의 임무, 廟宇의 수리, 院奴·保奴 등의 관리 등에 대한 규정. 〈重修扶助記〉의 작성이 一八二九年(기축)인 것으로 보아 원규의 작성은 一八三O年인 것으로 추정된다.
②石泉先生奉安時 笏記
〇奉安笏記
〇石泉 林得蕃 奉安時期: 辛未(一六九一, 肅宗一七)
〇筆寫年代: 未詳
〇內容: 石泉 林得蕃을 追享할 때의 의례절차에 대한 笏記.
奉安文 撰者-金千鎰(善山金氏)
享祀文 撰者-前社稷令 鄭岐壽(一六二二~一七O一)
兩先生位告文 撰者-進士 鄭重元(一六五九~一七二六)
③嶧川書院笏記
〇年代: 未詳
〇內容; 春秋享祀 등 서원에서 행하는 각종 의례절차에 대한 笏記
④尋院錄
〇內表紙: 崇禎八年乙亥二月二十六日 嶧川奉安 尋院錄
〇收錄年代: 崇禎八年乙亥(一六三五, 仁祖一三) 丙子(一六三六) 丁丑(一六三七) 戊寅(一六三八) 己卯(一六三九) 辛巳(一六四一) 壬午(一六四二) 辛卯(一六五一) 乙未(一六五五) 丁丑(一六五七) 己酉(一六六九) 壬子(一六七二) 乙卯(一六七五) 丁巳(一六七七)
〇筆寫年代: 丁卯(一九二七)
〇人物: 韓文斗(居昌縣監) 鄭弘緒(學正) 鄭緯(鄭蘊의 兄) 鄭昌詩(鄭蘊의 子, 縣監)
⑤扶成錄
〇年代: 辛未(一六九一, 肅宗一七)
〇內容: 石泉 林得蕃을 嶧川書院에 奉安할 때 각처에서 보낸 扶助내역을 적은 문서. 부조를 보낸 곳-安義鄕校龍門書院 司馬所 鄕中 鄕廳 葛溪書堂, 居昌·咸陽·三嘉·咸安幼生 등
(五)其他文書
①涵虛亭契軸
〇年代: 崇禎 己巳(一六二九, 仁祖七)-朴弘美 序文
〇人物: 趙濈(金海府使) 朴弘美(昌原府使) 柳汝恪(東萊府使) 房斗元(僉知) 李{汸+番}(前 縣監) 鄭昌詩(自如察訪) 全子潤(幼學)
〇內容: 涵虛亨-慶南 成陽郡 柳林面 손곡리 臨川江邊에 있는 정자. 조선초에 함양군수였던 崔漢候의 업적을 기려 군민들이 이 정자를 세웠다. 放燔磅O
②榮門錄
〇年代: 乙丑(一八六五, 高宗二)
〇人物: 金興根(奉詔賀) 趙斗淳(領議政) 金炳學(左議政) 등
〇內容: 과거시험 후 그 合格者를 各所 試官 및 一品官 등 高官들과 함께 적어 놓은 名單.
③元子誕生增廣文科榮門錄
〇年代: 甲戌(一八七四, 高宗一一)
〇人物: 金鶴鎭(一八三八~?, 翰林)
〇內容: 元子誕生을 기념해 과거를 실시한 후 試官 및 그 합격자를 적은 기록.
④白月栖雲塔碑
〇書者: 金生(七一一~七九一)
〇拓本狀態와 價値: 金生의 글씨 가운데 가장 字數가 가장 많고 완전하게 남아있는 碑銘이다. 현재 實物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하고 있으며, 碑面의 마멸이 심해 글씨체를 파악하기는 용이치 않다고 한다. 본서에 실린 자료는 조선시대 탁본이기 때문에 그 상태가 매우 좋은 것이다. 원본내용은 『朝鮮金屬總覧』에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