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토리노의 성의를 조작하는데 관여 했음.
그를 이끌었던 원동력은 이단 신앙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일반적으로 무신론자이자 합리주의자로 알려져.
자신(레오나르도)에게 일반적인 종교 작품을 의뢰한 고객에게 매우 이단적인 내용의 그림을 선사함으로써 즐거움을 느꼈던 사람이었다.
토리노의 성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얼굴사진이다.
동성애자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조르다노 부르노는 헤로메티시즘의 열광적인 전도자였는데, 자신의 신앙은 그리스도교보다 앞선 고대 이집트 종교로부터 왔으며, 그리스도교는 그 고대종교에서 중요한 내용이 빠진 것이라고 공언하였다.
피에르 플랑타르는 1920년에 태오났으묘 1942년 나치 점령하의 프랑스에게『참된 기사도를 위하여』라는 정기간행물의 편집장을 지내면서부터 처음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 잡지는 나치 압제자들에게 호의적이었음 실제로 나치의 승인을 받아 출판되었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알파갈라테 기사단Or
der Alpha-Galates의(파리에 기반을 둔 프리메이슨과 비슷한 기사도 단체인데 22살밖에 안 된 프랑타르가 그 단체의 그랜드 마스터였다.) 기관지였다. 그는 그 잡지의 편집인으로서...
1958년 샤를 드골 장군을 권력에 복귀시킨 <공공안전위원회>의 배후는 다름 아닌 '캡틴 웨이Captain Way'ㄹ는 가명을 사용한, 피에르 플랑타르 드 생클레르였다.
비밀문서의 첫 번째 목록은 1956년 작성된 것임에도 1964년에 보관되었고, 마지막 목록은 1967년에 보관 되었다. 『붉은뱀』이라는 소책자가 비밀문서에 추가되었는데 국립도서관의 예치 전표에는 2월 15일로 되어있으나 표지의 발행일은 1967년 1월 1일이다. 서류철에 첨부된 시기는-붉은뱀의 저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 죽은 뒤인(3울 6일과 7일)-3월 20일이다.
막달라 마리아의 두개골이라는 성유물이 프로방스의 소도시 생 막시맹 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이 성당은 성 루이 9세의 외투도 보관되어 있는 곳이다.
막달라 마리아 일행이 지금의 까마르크Camargue에 있는 생트마리드라메르에 상륙했다는 내용이 모든 전승에 나타난다.그리고 막달라 마리아는 나중에 생트봄 산 동굴에서 은둔생활을 했다고 한다. 헌데 이 동굴은 여신 다이내나 루시페라('빛을 가져오는 자' , 일루미나트릭스)에 대한 숭배의 중심지였다.
막달라가 상륙했다고 생각되는 곳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큰 도시 아를은 이시스 숭배의 중심지였다. 이 곳은 늪이 많이 있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그리스도교가 처음 1세기 내에 프로방스 지방에 자리 잡아다고 한다.
1279년 12월 9일에 프로방스의 백작 샤를 2세 당주(르네 당주의 선조)가 성 막시미노 성당의 지하묘실에 매장되어 있던 마링의 유골을 발견했다고 한다.
샤를은 그 지역 대주교와의 비밀 회동에서 그 계획을 세웠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성 막시미노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베네딕토회 대신 도미니크 스도회를 그 자리에 앉히고 싶어 했다. 도미니크회는 그 자리를 넘겨받지 않을고 했지만, 결국 교황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공식적인 엄무를 수행하기 위해 새로운 도미니크회의 단장 그리고 교황과 왕의 대표단들이 방묺자 지역주미들이 격력하게 저항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샤를은 이들을 돕기 위해 군대를 보내야만 했다. 이 사건에서 한 가지 이상한 결말은 도미니크회가 1279년에 막달라 마리아를 그들 수도회의 '딸, 자매 그리고 어머니'로 묘사하면서 자신들의 수호성인으로 채택했다는 사실이다.
르네 당주는 생트마리드라메르에서 (분명히 막달라의 유해를 찾기 위한) 발굴 작업을 하였다.
(웨일스인 아서왕은 전설적인 영웅이었으며 웨일즈인에게는 저항의 상징이었다.)
'내가 비록 검은 아름다우니'(아가 1장 5절) 와 검은 마돈나 , 막달라 마리아 의 관계는???
샤르트르 대성당과 다른 성당들에서도 나타나는 거미집/미로의 상징을 예로 들 수 있다. 이것은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짓고 지배하는 여주인임을 선언하고 있는 위대한 여신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상징이다.
단테는 직접적으로 프랑스 남부 음유시인들로부터 영감을 받았으며, 어떤 시인 단체의 일원이었는데 그들은 스스로를<사랑의 충실한 추종자들fidele d'amre(피델레 다모르>이라고 불렀다.
1179년 카타리파와 그 보호자들을 '파문'에 처한다고 발표.
1205년 처음으로 스페인 수도사 도미니크 구즈만을 (카티리파 지역에) 파견한다. 이 후에도 교황측과 이쪽이 마나 일련의 공개 토론을 벌였다.
1207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툴루즈 백작인 레이몽 6세를 파문했다.
1209년 세라자 요한 축일(6월 24일)에 십자군 병사들이 소집되었고, 7월 십자군 병사들이 베지에로 쳐들어가서 천오백 명에서 이천 명을 죽였다. 사실 이들 중 이단은 겨우 이백 명이 조금 넘을 뿐이었다.
좀더 자세히 말을 한다면 7월 22일, 즉 막달라 마리아의 축일에 베지에의 막달라 교회에서 그 지역 영주인 레이몽 트랑카발 1세Raymond Trencavel 1세가 살해당한다.
카티리파 척결 운동은 1244년 까지 지속되었다.
이때 프랑스 여왕 블랑슈(카스티야 오아국의 블랑슈)는 교황측 편이었다.
카타리파는 보고밀Bogomils에서 갈라져 나왔다.
카타리파는 셰례자 요한을 '악마'라고 할 정도로 싫어 했다. 이것은 보고밀파로부터 직접 넘어온 ㅅ애각인데, 그들 중 일부는 세례자 요한을 (약간은 당황스럽긴 하지만) '적그리스도의 선구자'라고 불럿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많은 카타리 분파들은 오힐 세례자 요한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을 받아들였다. 심지어 발칸반도의 보고밀파는 셰례자 요한의 축일인 6월 24일에 종교의식을 치룬 흔적도 있다.
위그 드 파앵은 1129년 잉글랜드를 방문해 최초의 템플 기사단 지부를 세웠다. 이곳은 지금의 런던 홀본Holborn 역 자리 이다.
템플 기사단에 여성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비록 세속의 평신도 회원으로 머물러 있기는 했으나 출범 첫해 동안 많은 여성들이 기사단의 선서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 규칙이 바뀌어서 템플 기사단은 여성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특별히 금지시켰다고 한다.
권위 있는 신약 성서학자 휴 숀필트Hugh Schonfield에 따르면 템플 깃단이 숭배했다고 하는 잘려진 ㅁ리를 한, 신비한 우상 -바포메- 의 이름에 아트배쉬 암호 코드를 적용하면 그리스어 소피아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단순히 '지혜'를 시사하는 말인 히브리어 흐흐마chokmah(구약에 나타나는 여성인물이며 특히『잠언』에 나온다.) 즉 소피아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주석자들을 아주 당혹스럽게 만드는 존재인데 그 이유는 근가 하느님의 짝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느님을 능가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 그에게 조언을 해주기도 한다.
나그함마디 문서인『피스티스 소피아』엣 그녀는(흐흐나)는 직접적으로 막달라 마리아와 괸련되어 있다.
상파뉴 백작은 자신이 수도원 '제국'을 세웠던 클레르보의 땅을 성 베르나르도에게 기부했다.
성 베르나르도가 진짜로 정신적으로 사모했던 대상은 성모 마리악 아니었다. 그는 검은 마돈나를 좋아했고, 또한『아가』를 주제로 거의 90편에 가까운 강론을 저술 했으며, 설교의 많은 부분에서 '신부'를 베다니아의 마리아와 분명하게 연결시켜었다. 그런데 당시에 베다니아의 마리아는 의심할 ㅂ 없이 ㅁㄱ달라 마리아로 생각되고 있었다.
10월 13일 금요일에 (템플) 기사단은 갑자기 잔혹한 진압을 당한다.
퓔크 드 트로아Fulk de Troyes의 고백에 따르면, 그에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상을 봉주며 '세트Set(
이집트의 신)는 이곳에서는 어림도 없어. 왜냐하면 너무 어리거든' 이라는 말을 들었닥 한다.
박식한 사제였던 랑베르 드 생 오메르Lambert de St Omer는 "...분명히 하늘의 예루살렘을 세우는 자는 세례자 요한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소위 말하는 그리스도교의 문서인데, 예수에 대해 전혀 언급을 하지 않는다"라고 하고 있다.
카탈로니아의 환상가이자 오컬티스트인 라몬 룰Ramon Lull(1232~1316)은 템플 기사단의 열렬한 지원자 였는데 템플 기사단을 습격하고 재판을 할때 그는 중대한 다른 비밀에 의해서도 교회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듯한 말을 하였다.
템플 기사단의 고소 항목에는 그 머리를 우상으로 숭배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여성 머리 모양의 은으로 된 성골함을 가지고 있었다는 내용도 있었다.
당시 종교 재판소는 템플 기사단과 카타리파와의 관계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루시용의 템플 기사단원들이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그들을 묶고 있던 사슬을-교황의 명ㄹㅇ에 따라-일부러 느슨하게 풀어준 적이 있었는데, 그날이 바로 성녀 막달라 마리아의 축일(7월 22일) 잉ㅆ다.
1330년대에『수녀 캐서린schwester katrei』이라는 소책자가 스트라스부르에서 출판되었는데 독일의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가 쓴 책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학자들은 그 책의 진짜 저자는 그의 여성 추종자들 중 한 명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13세기나 1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자유정신의 형제 자매들Brothers and Sisters of the Spirit>은 '성(性,sex)에 관한 비밀'을 실천했다고 하는데, 아담파Adamites로도 알려져 있었다. 아담파의 철학은 『수녀 캐서린』 에 영향을 주었다.
니콜라 플라멜은 그의 아내인 펠레넬르Perenelle와 함께 1382년 1월 17일에 장수(長壽)와 관련된 위대한 연구를 완성하였으며 그 이후로 상당히 오랫동안 살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다이애나 신전이 있던 곳에 세워졌으며, 파라의 생 쉴피스 성당은 폐허가 된 이시스 신전 위에 세워졌다.
트루아에서 가장 유명한 성당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봉헌되었다.
『파르지팔』에서 성배 이야기를 해줬다는 이는 기요 드 프로뱅Guiot de provins으로 밝혀 졌는데, 수도사였으며 템플 기사단원이었고 음유시인이었다.
성배가 있는 성의 영주를 페릴라Perilla라고 불렀는데, 당시 몽세귀르의 실제 영주의 이름은 레몽 드 페레유Ramon de Perella였다.
Malcolm Godw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