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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열풍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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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ㆍ자주국방/군사/무기 스크랩 베트남전의 실체(퍼온글)
평화0 추천 6 조회 1,861 12.11.28 08:57 댓글 11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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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2.11.28 08:57

    첫댓글 논란을 일으키고자 한건 아니구요 그냥 다른 여러 의견 궁금해서 퍼왔습니다. 고견 부탁드립니다.

  • 12.11.28 09:27

    부정부패하면 종북들한테
    점령당함

  • 12.11.28 13:24

    배슬기 하고 친한갑죠 .ㅋㅋㅋㅋ

  • 12.11.28 10:08

    1. 응오 딘 지엠은 프랑스의 앞잡이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프랑스에 반대하다 1949년 미국으로 망명했을 정도였고 1954년에 다시 베트남국으로 돌아와 국무총리가 되고 1955년에는 국민투표를 통해 베트남 공화국수립과 동시에 '진짜'프랑스의 앞잡이였던 바오다이를 쫓아내지요

    2. 그리고 통킹만 사건 자체는 날조가 아닙니다. 1964년 8월 2일 해안을 순시중이던 매독스가 북베트남해군의 어뢰정의 공격을 받아 교전을 벌인건 사실이었습니다. 3일의 벌어진 터너조이의 경우 전날있던 매독스가 겪은 일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져 과민반응을 보인것이라 추정되지요 그리고 존슨행정부는 이걸 잘 이용해 미 의회로부터 전권위임을 받지요

  • 12.11.28 09:52

    3. 통킹만 사건이후 미군이 바로 남베트남에 지상군을 투입한건 아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군은 항공전력을 동원한 북베트남 시설을 공습하는데 주력했고 지상전은 남베트남군이 맡았고 미 군사 고문단이 이를 지원하는 형식으로 진행됐지요 그러는 한편 북베트남 역시 베트콩을 이용해 미군기지(당시 미군 군사 고문단은 1만여명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를 공격하거나 미국 공관을 공격합니다. 그러다 통킹만 사건이 있던 이듬해인 1965년 미 대사관이 베트콩의 공격을 받고 200여명의 사상자를 내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미 지상군 투입이 결정되지요

  • 12.11.28 10:34

    그리고 미국도 본격적인 전투병을 파병할 무렵 미 해군장관 폴 헨리 니츠제독과 미 국방부 장관 로버트 맥나마라의 대화를 본다면 미국이 베트남전쟁을 단순 '침략'이라 보기에는 어폐가 있지요

    맥나마라(이하 '맥') : 폴 만약 우리가 (베트남에) 병력증강을 하지 않는 다면 무엇을 할 수 있지? 철수라도 해야한단 말인가?
    폴 :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맥 : 우리가 베트남에서 철수 한다면 공산주의자들이 다른곳 어딘가에서 또다시 도발하지는 않을까?
    폴 : 그럴 것 같습니다.
    맥 : 그렇다면 우리가 공산주의 확장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 베트남보다 정치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나 더 나은곳에 자리잡을 수 있을까?

  • 12.11.28 10:34

    폴 : 보장할수 없을겁니다.
    맥 : 좋아 당신은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군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중에서>

  • 12.11.28 14:17

    프랑스 → 미국, 제국주의 국가간 이심전심.
    특히,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둔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힘의 우열에 따라 식민 주도권이 뒤바뀌는 경우가 많았죠.
    베트남과 우리나라는 같은 반도국가이고 과거에 피식민 경험 등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비슷한 점이 참 많은데
    차이점이 있다면, 베트남은 이미 자력으로 통일을 이루었고 우리는 아직도 외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겠죠.

  • 12.11.28 23:12

    1945년 시작된 중국 모택동과 장개석의 내전(이 당시 미국은 11만명의 미 해병대를 중국에 파견하여 장개석의 국민당을 도왔음)으로부터 1975년 베트남전이 끝날때까지 30년을 아시아를 장악하려던 미국 제국주의와 동아시아의 30년 전쟁이라고 하지요.
    한반도의 6/25도 이 동아시아 30년 전쟁의 일부입니다.

  • 12.11.29 20:44

    칭다오 상하이 톈진에 미해병대가 주둔한건 사실이지만 그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존재한거 아니었나요? 실제로 일본군 무장해제라는 목적을 달성하자 3000명정도의 해병대와 2000명의 군사고문단을 제외하고는 철수했던걸로 압니다. (뱀발이지만 비슷한시기 소련역시 군대를 파견했는데 걔들은 다련에 50년대까지 주둔하지요) 또한 공산군도 이를 알고있었기 때문에 미군과의 충돌은 벌어지지 않았구요 또한 미 정부는 모택동의 공산정권을 나쁘게 보지 않았고 오히려 우호적으로 생각해 장개석에게 공산정권 인정과 공산정권에 무기를 제공하라고 압력을 넣었거니와 국공내전때도 일방적으로 국민당의 편을들었던

  • 12.11.29 09:52

    것이 아니라 국공양자간의 중재를 원했고 실제로 중재를 하려했던걸로 압니다. 다만 이러한 행동이 어설프게 진행되버리는 바람에 국공양자가 미국에대해 불신을 낳아버렸던걸로 알고있습니다. 또한 1949년 8월에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발표한 '중국백서'에서 애치슨은 '장개석의 국민당 정권은 무능하고 썩어빠진 쓰레기 정권이며 우리가 지원한 지원금을 엉뚱한 곳에다 낭비했다.'라고 하며 국민당 정권을 맹비난한데 반해 모택동 정권은'유능하고 활기차며 민중의 지지를 받고있다'라고 칭찬했다는 이야기도 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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