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이야기
주정연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했던가, 요즘엔 겨울이 와도 옛겨울 같지않으니 동래불사동(冬來不似冬)이라 하겠다. 사흘 춥다가 나흘 풀리던 삼한사온은 언젯적 이야기던가. 십년이면 변한다던 강산이 한 해 한 날 한 시가 바쁘게 시변하는 오늘이니, 설이 돌아와도 옛설이 아님에 설래불사설(설來不似설)이라 할만도 하다. 설은 새날의 낯이 설어 설이요 새날이 선다 하여 설이라는데, 한 마디 덧붙이자면 예나 이제나 남녀노소 누구라없이 싫건 좋건 나이 한 살 더 먹어 싱숭생숭 마음 설레니 설이라 하겠다.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구요.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드리고 새로 사 온 구두도 내가 신어요.....소싯적 입에 익은 노래에 나오는 이 까치설날의 설화는 신라 소지왕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왕후가 한 스님과 내통하여 왕을 해하려 하자 까치와 쥐, 돼지와 용이 나서서 모면케 했는데, 쥐와 돼지 용은 모두 12지에 드는 동물이나 까치를 기념할 날이 없어 설 전날을 일컬어 까치설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어언 50년전 완도에서 이주해온 우리 집안은 허우허우 딸각다리를 올라야하는 노적봉밑 낡은 함석집에 둥지를 틀었다. 지금은 널따란 주차장이 들어선 자리에 교실이래야 한 칸 뿐이던 호국공업고등학교가 있었다.마당엔 사철 맑은 물이 솟는 금강원샘이 있어 도르레가 삐걱거렸고, 천기산 벼랑 아래로는 피난민들이 북적대던 판자촌이 있었다. 열살 안팎이던 그 시절 나는 보름전 부터 달력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설을 손꼽아 기다리곤했었다.
입에 풀칠하기가 어렵던 때 평소에는 못 먹어보던 차례음식을 장만하느라 어머니는 사나흘 전 부터 부산하였고, 부지런한 할머니가 돼지밥통을 머리로 이어날라 토실하게 기른 돼지를 잡는 일은 동네 장정들의 몫이었다. 살코기를 나누다가 던져준 오줌보에 물을 담아 피난민 아이들과 공차기를 하고..... 기름진 먹거리가 풍성하여 즐겁고 새뱃돈 받으니 기뻤던 데다 나이 한 살 더 먹는 뿌듯함조차 덤이었으니 어찌 설레지 않았으랴.
뿡빠 뿡빠 대롱에 닭털 달린 풍선을 부는 소리, 따악 따악 곰보자국 난 화약을 튀기는 딱총소리가 골목마다 울려퍼지고 햇살 아래 울긋불긋 꼬까옷을 꺼내 입은 새뱃길 나들이, 천기산과 마인게터 잔등에서 오른 참연은 귀시린 바람속에서 연싸움을 하고, 설날 저녁이면 새뱃돈을 떼어 목포역 공터로 동춘서커스 구경들을 갔다. 서커스는 물론이려니와 제2막으로 펼쳐지던 단막극은 또 얼마나 손에 땀을 쥐게했던가. 가거라 삼팔선아, 울고넘는 박달재, 이수일과 심순애, 번지없는 주막이며.....파하고나면 예비통금사이렌이 울리고 하루 걸러 전기가 들어오던 때라 호얏불빛 호젓한 오두막집을 향해 뛰닫던 발걸음이 새삼 그립다.
이 무렵이면 집안에 내려오는 구전설화 하나가 귓가에 맴도는데 100년전 목포 개항초기쯤의 이야기, 완도에 본가를 두고 머나먼 내륙땅 객지에서 서당 훈장을 하던 주성언(朱聖彦)증조부가 남긴 일화가 있다. 훈장에게 돌아오는 사례래야 명절에 몇됫박 곡식이 고작이던 시절, 어느 해 설을 앞두고 이 집 저 집서 모아들인 곡식을 돈으로 바꾼 전대를 허리에 둘러차고 처자식 얼굴을 그리며 산구비 돌고돌아 납시던 귀향길에 날이 저물었다. 외딴 산골 주막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글쎄, 이런저런 주모의 얘기를 듣자하니 홀엄씨 슬픈 처지가 기막하게 딱했던지라 밤을 꼬박 지새며 주모가 울면 따라울고 한숨을 내쉬면 함께 내쉬다가 밤을 꼬박 새웠더란다.
새벽녘에 이르러 행장을 추스르자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자, 그 소중한 전대를 풀어주고서야 휘적휘적 먼동이 트는 길을 나서서 완도엔 빈 손 뿐으로 당도하였다 하니, 쌀독에 거미줄치게 생긴 가솔들의 학수고대는 어떠했으며 동네방네 입방아는 어련했을꼬. 시골 훈장 갓 쓰고 고개 숙인 사진 한 장만이 큰집 젯상머리에 전해져오니, 이런 장면이 요즘세상에 다시 있겠는가. 설래불사설이라 설이 돌아와도 옛설이 아니로고!
2007. 2 목포 항도신문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