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의 평민교육기관 - 고구려의 경당
세계 최초의 평민교육기관 - 고구려의 경당대개
고구려의
강성함을
군사력(무기, 전술)에서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고구려가
진정으로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평민교육기관을 국가에서 운영했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문무를 갖춘 훌륭한 인재들을 신분에 관계없이 양성했던 경당이야 말로 주변 민족들보다 고구려가 강한 국가를 건설하는 기초가 되었을
것입니다.[방주인] 그림 : 광개토호태왕 정복지(월간 WIN '96.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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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세계 최초의 대학은 AD12세기에 설립된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이라고 한다.
10여명의 학생들이 신학과 철학을 가르쳐줄 교수를 초빙하여 볼로냐에서 강좌를 연 것을 대학의 시초로 친다. 13세기까지 유럽에는 신학,
철학, 법학, 의학을 가르치는 대학이 5 ~ 6개가 창설되었는데 프리드리히 1세는 대학에 면책특권을 주기도 하였다.
유럽인들이 주로 신학자를 양성하는 종교적인 목적으로 대학을 세운
반면 고구려는 국난극복을 위한 인재양성기관으로 대학을 창설하였다. 기록에 남아있는 우리 나라 최초의 대학은 고구려의 태학(太學)이다. 소수림왕 2년인 AD 372년에 설립했다.
소수림왕의 아버지는 고국원왕이다. 고국원왕 때 고구려는 백제와 선비족의 침입으로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존재였다. 선비족인 전연(前燕)은 수도인 환도성을 점령했다.
고국원왕이 항복하지 않자 그들은 고국원왕의 아버지인 미천왕의 릉을 파내 그 시신을 인질 삼아 가져갔고, 어머니인 태후와 왕비, 그리고
수많은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약탈을 자행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백제는 태자인 근구수를
앞세워 고구려를 공격했고 고국원왕은 남평양성(지금의 평양?)에서
백제군과 접전을 벌이던 중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다. 다행히 백제가 더 이상 공격을 하지 않아 고구려가 망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재기불능상태에 빠져 버렸다.
소수림왕은 이런 위기 상황에서 고구려 17대왕으로 등극하였다. 등극하자마자 전연을 멸망시킨 전진(前秦)으로부터 군사적 협력을 목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서쪽 국경을 안정시키고 수도를 재건하고 백제를 치는 한편 안으로 국력강화에 힘썼다.
그가 즉위 이듬해에 실시한 제도가 바로 세계최초의 왕립대학(태학)설립과 세계최초의 평민교육기관인 경당 창설이다.
군주제로 점철된 수 천년 세계사에서 평민에게도 교육을 실시토록 한
나라는 고구려가 거의 유일한 사례이다. 서양에서 평민에게 교육을
실시한 사람은 19세기초 나폴레옹이 처음이다. 이 당시 프랑스는 군주제가 아니라 공화제인 통령체제였다
태학과 경당의 교육정책은 송경습사(誦經習射)라는 네 글자로 요약된다. 경서를 읽는 학문연구는 물론 활쏘기와 말타기도 배우는 문무에
능한 균형 잡힌 인재양성이 교육목표였다.
소수림왕의 뒤를 이어 동생인 고국양왕이 고구려의 왕으로 등극했으나 7년만에 병사하고 아들인 담덕이 18살에 즉위하여 그 뒤를 이으니
이 분이 바로 19대 임금 광개토태왕이다. 이 때가 태학을 설립한지 19년째 되는 해였다.
비록 18살 어린 나이였으나 큰아버지인 소수림왕 대부터 착실히 성장해온 태학과 경당졸업생들이 고구려의 새로운 동량으로 성장하여 그를 보좌했다.
즉위하자마자 그는 축적된 힘을 바탕으로 사방을 정복하여 순식간에
고구려를 동아시아의 패권국가로 올려놓았다. 그는 동몽골, 오오츠크해 연안, 지금의 북경지역 등을 정복하고 漢族, 예맥, 거란, 읍루, 말갈, 선비 등 새외 민족을 고구려 속으로 통합했다.
단순히 정복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광개토대왕은 정복지와 정복민들을 무력으로 정복했지만 이들을 동등한 백성으로 대우하는 정책을
폈고 태왕릉비에 유언으로 남겨 몽골인들이 솔롱고스(무지개나라)라고 칭송하는 '고구려의 평화시대(Pax Koreana)'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