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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서를 불러들여 보고 말하기를, “내가 풍질(風疾)을 얻은 까닭을 경은 반드시 알지 못할 것이다. 저번에 경복궁에 있을 적에
그때가 바로 한창 더운 여름철이었는데, 한낮이 되어 잠시 2층에 올라가서 창문 앞에 누워 잠깐 잠이 들었더니..."
-조선왕조실록 세종 13년(1431년)-
임진왜란 이전의 경복궁에 관해서 근정전이 단층이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는데 임진왜란 이전의 근정전을 그린
그림입니다. 2층이었음을 알 수 있죠.근정전 앞에 좌우 협문도 2층이며...사정전, 강녕전, 교태전도 모두 2층입니다.
(5월 3일) 술시(戌時) 조선의 도읍 동대문으로 진입, 거기서 황성(皇城)의 모습을 바라보니 옥루금전(玉樓■x殿) 늘어선 기와집, 널따란 성벽들의 조형미는 극치에 달하고 수천만 헌(軒)과 늘어선 대문들, 보귀로운 모습은 이루 말로 다할 길이 없다. 그런데도 막아 싸우려는 병사들은 보이지 않고 대문은 굳게 닫혀 있어 온통 적막하였다. (중략) 내리(內裏) 안으로 들어가 보니 궁전은 텅 비었고 사대문은 제멋대로 열려있었다. 그제야 전각을 자세히 살펴보니 궁궐은 구름위에 솟아있고 누대는 찬란한 빛을 발하여 그 아름다운 모습은 진궁(秦宮)의 장려함을 방불케 하더라. (중략) 후궁(後宮)에는 화장품 향기가 감돌고 산호의 대상(臺上)에는 화려한 거울이 덧없이 남아있다. 난 향기는 전각 밖까지 풍기고 사람 살던 자취도 그렇거니와 하염없는 구슬로 장식한 침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건물마다 문이 열려 있고 궁문을 지키는 자 없으니 어디를 보아도 처량하기 짝이 없다. 그토록 용맹한 고니시도 천자(天子)의 옥좌(玉座)에 절을 하고 신성하고 고아한 분위기에 휩싸여 두 눈에 눈물이 괴니 소오스시마, 아리마, 오무라도 따라 눈물을 흘리었다. -에도시대의 문헌 "조선정벌기 (朝鮮征伐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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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한양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고려 4대 대도시중 하나인 남경으로
그 규모가 대봉(東), 기봉(西), 면악(北), 사리(南)를 경계로 했는데그 면적
이 조선시대 한양도성보다 훨씬 큰 규모를 보유하며 발달한 곳이었습니
다.남경이라는 도시는 고려의 다른 대도시들처럼 불교가 번성한 곳이었
고,개경과 서경처럼 궁궐을 둔 곳이었습니다.
풍수지리로 인해서 중요하게 취급되었고,고려시대에 이미 여러 차례 천도
를 계획한 곳으로 이미 고려의 상당한 인프라가 구축된 상황에서 이후 조
선시대와서 정부차원의 더욱 계획화되고 정책적으로 규모면에서 확장적
시각보다는 효율적 관리로 일부 축소되어 더욱 발전한 도시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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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제이후 보수 친일 세력에 의해 열등한 조선마냥 묘사를 하지만 조선 시대는 도시의 규모나 사회 전반적 상공업과 교육 그리고 서민의 수준이 전근대시기에서 세계사적으로 상당한 규모와 인구를 가진 발달한 선진 나라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조선 말기의 약화된 사회가 조선의 근대화 역량이 없다는 식의 섬나라 극우들의 일방적 묘사는 상당히 왜곡된 정치적 발언일 뿐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