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니 디드로, <수녀>, 이봉지옮김, 장원, 1993년
드니 디드로를 알아가는 단계로 접한 이 <수녀>라는 작품은 읽고나서, 내게는 이 작품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더욱 더 흥미롭다. 그림(Melrchior Grimm)이 자신이 편집하던 [문예서한]에 게재한 소설 <수녀>의 기원에 관한 기사라며 작품 후반에 옮겨놓은 내용이다. 잠깐 말하면 이 소설에 나오게 되는 배경에는 그 당시 실제로 있었던 수녀서원 취소소송을 근거로 했는데, 원치 않는 수녀의 길을 간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쉬잔느 시모넹(마르그리뜨 드라마르라라는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함)의 서원 취소소송에 이름도 모르면서 관심을 가진 채, 발벗고 나섰던 크루아마르 후작이 있었다. 결국 이 사건은 패소하여 서원 유효판결이 난다. 깡에서 나오지 않는 후작을 친구들이
파리로 불러 들이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수녀원에 돌아간 이 수녀가 다시 탈출하여
후작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처럼 깡의 친구들은 장난을 친다. 이렇게 수녀로 분한 디드로의 거짓 편지와 후작의 실제 편지이 이 작품의 탄생배경이 또 있게되는 것이다.
나중 후작은 파리로 나와 이 얘기를 듣고 한바탕 웃고 넘어갔다고 하는데, 이 사건에서 드니 디드로의 <수녀>는 변형되어 태어나게 된다. 어느날 친구 달렝빌이 드니
디르로를 찾아갔는데 눈물을 철철 흘리며 슬픔에 잠겨 있는 드니 디드로를 보고서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내가 쓰고 있는 이야기가 너무 슬퍼서 그러는 걸세." 라고 디드로는 말한 작품이 바로 <수녀>다. 하지만 디드로 철철 울며 썼던 그 소설은 경솔한 사람들과 쓸데없는 일로 소일하는 대신 좀더 효과적으로 시간을 사용했다면 걸작이 되었을 거란 얘기를 하기도 하며 거기에서 완성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이렇게 한 사람의 슬픈 운명을 남의 일이기에 장난으로 즐기는 그 시대의 장난꾸러기들을 마주한다. 이처럼 나의 일이 아닌 경우, 이렇듯 시대와 종교와 상황에 희생된 한 여인의 삶은 하나의 그들안의 놀이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작품 <수녀>와 연관지어 세가지의 경우의 수가 등장하게 된다. 그 하나는 실질적으로 서원 취소소송과 소송에 져서 다시 수녀원으로 되돌려진 경우로 실제로 나중 1790년 법령에 의해 모든 종교시설이 폐지되었을 때, 일흔세살의 나이로 롱샹
수녀원에 그대로 거주하고 있는 것이 확인된 현실의 수녀 얘기이다. 두번째는 친구들의 장난으로 수녀원에 돌아간 수녀가 다시 탈출하여 후작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쓰고서, 도움을 기다리다 죽게되는 상황이 그 두번째이고, 이 작품에서 보여지듯
소송을 하고 패소하고 다시 탈출하여서 기다리고 있는 상황까지 세번째의 상황 중에서 디드로가 선택하는 것은 이러한 완전한 결말이 아닌 끝나지 않는 기다리는 상황으로 작품을 완성했다.
작품은 앞서도 잠깐 언급되었지만, 실제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한 수녀의 서원 취소소송으로부터, 수녀를 원치 않지만 외부의 힘에 의해 수녀가 되어야했던, 한 인간의
자유를 구현하는 과정이 보여진다. 작품의 의의를 한번 찾아본다면, <라모의 조카>에서도 역시 실제로 생존했던 라모의 조카에서 허구의 소설이 탄생했듯이, 이 작품도
역시 실존의 인물로부터 작품의 시작이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 시대상황을 알 수 있다는 것과 함께 운명으로 내몰고 매몰될 수도 있는 삶을 과감히 돌파하는 여인상을 만들었다는 것이 이 작품을 읽고 나서의 매력이다. 다만 그 여인은 너무도 나약하고 너무도 힘이 없어 힘 있는 다른 누군가(이 작품에서는 후작)에게 도움을 청해야할 상황이지만 말이다. 소설을 읽어가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드니 디드로의 어떤 상황에 처한 인간에 대한 관심은 지금 읽어도 쉽게 동화되게 만드는 창작의 재능을 지닌 작가라는 생각이다. 이미 지나간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강요된 수녀로의 선택이기에 지금의 나에게 전적인 공감은 어렵지만, 원치 않는 상황에서 모색하려는 인간의지를 보여주었다 데서 작품의 의의를 찾는다.
이 작품의 내용에 대해 잠깐 살펴보면, 이 작품은 서간체소설로 수녀가 되길 원치 않았으나 주변 여건에 의해 수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쉬잔느 시모넹이란 수녀가 크루아마르 후작에게 자신의 과거를 알기고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의 편지로 되어있다. 자신의 비망록이라며 자신의 이제까지의 전 삶을 편지로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수녀원에서의 생활과 함께 자신도 언니들처럼 이런 시절 수녀원 생활을 하다가 나이를 먹어
결혼을 하게될, 한 여자로서의 삶을 기대하였던 그녀에게 뜬끔없이 수녀로서의 생활을 강요당했고, 수녀가 되었으나, 결국 서원 취소소송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했었던 자신의 얘기를 차근차금 얘기하고 있다. 소송은 패소하게 되고 그녀가 머물렀던 그녀가
사랑했던 수녀원의 원장은 죽게 된다. 그 후 새로운 원장이 오면서 그녀는 따돌림을
당하고, 결국 다른 수녀원으로 옮겨가게 된다. 새로운 수녀원에서는 그곳 원장의 금지된 사랑의 관심이 있게 되는데, 수도원 원장은 스스로 욕망하는 주체인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감금당한 상태로 광기에 휩싸인 채 죽게 된다. 그후 쉬잔느 시모넹은 수녀원을 탈출하기에 이른다. 그녀가 후작에게 쓰는 편지 중 마지막 내용이다. 그녀가
죽음을 불사할 정도의 마음에서 수녀원을 탈출했다는 것과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비장함을 말하며 이렇게 쓰고 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자살이란 다른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서라는 말을 하며, 그녀가 자살할지 않은 이유는 누구도 그녀의 죽음을 방지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다음의 문장을 남기는 것은, 만약 후작이
그녀를 구원해주지 않는다면 그녀는 우물에 빠져 자살할 것이고, 그렇다면 그것은 바로 후작을 괴롭히는 복수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수녀원 정원 끝에 있던 그 우물에 얼마나 여러 번 갔었던지요! 제가 몸을 던지지 않은
것은 사람들이 저를 그렇게 하도록 은근히 방조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아직 앞으로 어떤 운명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언젠가 수녀원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날이 오면 저는 아무 것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우물은 어느 곳에나 있으니까요. 후작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후작님 가슴에 두고두고 후회가 남지 않도록
해주세요.(247쪽)'
이미 오래전에 지나왔던 과거사의 일들이지만, 이 작품 역시 그리 낯설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소설이 된다. 인간 본연의 아름다움을 지닌 한 소녀의 자아찾기는 결국 어떻게 될 것인가를 질문하면서 끝이 나는 이 작품을 통해 작가가 얘기하는 것을 크게 그당시 가장 큰 세력이었을 종교에 대한 도전이다. 신을 사랑하느냐의 질문이 아닌, 신만을 사랑할 것인가의 선택을 강요당했을 많은 그 시대의 여성을 통해 종교에 대한 비판의 시선을 던진다. 그리고 물론 실제적인 사실에서 출발하는 허구의 가능성을 역시
보여주고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드디 디드로라는 사람 자체가 균열이 그리 없어보이는 사람으로 생각되어지는, 갈등에 있어 조금 미약하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사건은
딸의 재산을 가로채려는 생모와 딸 사이의 갈등이었다는데, 이 소설 속에서 보여지는 내용은 어머니가 나은 사생아였기에 아버지의 강압에 의해 수녀가 됐다는 설정과
갈등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갈등이란 두가지의 길, 혹은 여러가지의
길에서 나타나는 상황인데 누가 보아도 무게중심을 실린 길이 존재함에 갈등이 될 수
없는그 당시 시대적인 상황에서 비롯되기도 했다. 그리고 수녀원의 원장들의 모습,
자신을 추종하지 않고 전 원장을 추종한다고 감금시키고 격리시키는 모습과 억압의
性임에도 자꾸 분출되는 본능의 性을 보여주는데 사실적이라기보다는 허구인 듯 보인다.
이런 내용이 있다. 이뤄진다와 이뤄지지 않을지라도(사실 소송사건의 그녀는 대혁명
후까지 그녀는 수녀원에 있지 않았는가?), 붙잡아지지 않아도 끊임없이 붙잡는 희망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란 생각을 하며 옮겨본다.
"수녀에게 무슨 희망이 있나요?"
"무슨 희망이냐고? 우선 수녀가 되기로 한 서원울 취소한다는 희망이 있지."
"그 희망이 없을 경우에는요?"
"언젠가 문이 열리리라는 희망이 있지..."(230쪽)
그리고 추신으로 끝맺는 문장을 한번 살펴보면, 드디 디드로에게 인식되는 인간의 본성, 아니 여성성에 대해서 잠시 살필 수 있다. 드디 디드로가 보기에 인간은 누군가에게 자신을 표현하고 이해받고 싶어하는 성질이 있는데, 그러한 이해를 위해서 인간이
기대는 것은 감동보다는 유혹으로, 그 유혹(누군가를 무엇을 끌어당기는 힘)이란 인간
본연의 저절로 생기는 본성이라는 것이다.
'저는 피로에 지쳐있고 공포에 떨고 있으며 잠시도 편안한 때가 없습니다. 급히 써내려 갔던 이 비망록을 머리를 식히고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저의 불행한 과거는 사실
그대로입니다. 그렇지만 저 자신의 인물과 품성에 대해서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실제보다 훨씬 좋게 쓴 것을 알았습니다. 그건 우리가 고통보다는 매력이
훨씬 더 쉽게 남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또 감동시키기보다는
유혹하는 것이 더 쉽다고 믿기 때문일까요? 저는 남자들을 잘 모르고 또 저 자신에 대해서도 별로 성찰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모두들
그 예리함을 찬양하는 후작님께서 제 글을 읽고 제가 후작님의 선량함보다는 악덕에
호소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저를 어떻게 보실까요? 이 생각을 하면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여자들에게 공통된 이 본능을 제 개인적인 것으로 생각하시면 안 될 것입니다. 저도 여자이고, 어쩌면 좀 교태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자연적인 것일 뿐 결코 일부러 꾸민 것은 아닙니다.(2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