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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제 2권 ‘기이(紀異)’에 이르기를, ‘사자(사비수, 부여 백마강을 말함) 절벽에 바위가 있어 10여명이 앉을 만하니, 백제왕이 왕흥사에 행차하여 예불하려면 먼저 이 바위에서 망배 하였는데, 그 바위가 스스로 따뜻해졌으므로 이름을 돌석[(火+突)石]이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스스로 따뜻해졌다 하여 ‘자온대(自溫臺)’라고 부르는 이 돌석은 구운 돌, 곧 온돌(溫突)을 가리킨다. 아마도 왕이 도착하기 전에 궁인(宮人)들이 미리 돌을 데워 놓았던 데서 비롯된 전설일 것이다. ‘구운 돌’이 음운변화를 일으켜 ‘구들’이 되었다나.
▲ 부소산 관광 안내도. 왼쪽 상단 백마강변의 '선착장'이 구드래나루다.
부여 부소산성 서쪽 백마강변에 구드래 나루가 있고, 강 건너에 백제왕실의 원찰이었던 왕흥사 옛 터가 있다. 짐작하다시피 ‘구드래’라는 지명은 자온대 전설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현재 ‘자온대’라고 부르는 바위는 구드래 나루가 아니라 백제대교 서쪽 끝에 있다.
‘구드래’라는 지명이 갖는 보다 특별한 의미는 백제불교의 일본 전파에 있을 것이다.
▲ 호류지 유메도노(夢殿)의 구세관음
출처; 『일본 속의 백제 구다라』, 홍윤기, 한누리미디어, 2008년, P.175
일본 나라현(奈良縣) 호류지(법륭사, 法隆寺)엔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국보 불상 2기가 있다. 일본인들이 ‘구다라간논(百濟觀音)’이라 부르는 2m28cm 키의 허공장보살상(虛空藏菩薩像)이 그 하나이고, 유메도노(夢殿) 팔각지붕 전당 안의 구세관음상(救世觀音像)이 다른 하나다. 두 불상 모두 각기 한 둥치의 녹나무로 만들어 백제왕실이 나라 땅의 왜왕실로 보낸 것이다. 2기의 목조보살입상을 왜왕실로 보낸 이는 27대 위덕왕(威德王, 재위 557년~598년)이다. 구다라관음은 7세기 초에, 아버지 성왕(聖王)을 그리워하여 그 존상을 본따 만들었다는 구세관음은 6세기 말에 보냈다.
구세관음이 안치된 호류지의 유메도노는 건축된 이후 줄곧 백제 성왕(聖王)의 환생이라 일컬어진 야마토정권의 실력자 쇼토쿠태자(聖德太子 574∼622)가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백제 26대 성왕(聖王, 재위 523년~554년)은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를 단행하고(성왕 16년, 538년), 불교를 크게 일으켰으며,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왕이다. 그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성왕은 매우 이상적인 군주의 면모를 갖추었던 것으로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천도를 단행하고 국호를 ‘남부여’라 하였으며, 중앙 관제와 지방의 통치 조직을 정비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지혜와 식견이 뛰어나 살아있을 때 이미 나라사람들로부터 ‘성왕(聖王)’이라 불리었다. 비록 2년 만에 신라의 기습공격을 받고 고토(古土)에서 쫓겨나기는 했지만 한 때 한강유역을 회복 하는 등 다방면에 걸쳐 빼어난 업적을 남긴 임금으로 역사는 전한다.
구드래 나루 유람선 선착장
성왕의 전법의지로 인해 백제로부터 승려와 사원기술자들이 끊임없이 왜로 파견되었다. 구드래 나루 일대는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떠나는 첫 출발지이자 금강을 거슬러 온 일본인들이 첫 발을 딛는 소부리(부여) 땅이었다.
‘구다라’라는 말에는 ‘큰 나라’, ‘본국(本國)’이란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한다. 일본인들에게 구다라는 그대로 백제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천 년도 훨씬 더 지난 오랜 역사가 땅이름 속에 깃들어 있다.
▲ 늦가을 단풍에 잠긴 고란사
고란사는 부소산의 북쪽 가파른 절벽단애 아래 백마강을 마주보며 들어앉아 있다. 좌향이 북향이어서 날씨가 맑은 날에도 일조량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늘이 많이지고 강을 끼고 있는 곳이라 습하기까지 해서 고란초가 자라기에는 더없이 좋은 조건이나 사람이 살면서 생활하기엔 적당한 조건이 아니다. 조망성이 뛰어나고 주변 경치가 아름다워 정자를 들이기에 알맞다. 사찰이 들어서기 전에 이곳은 백제왕의 정자터였다는 이야기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고란사의 창건연대는 확실하지가 않다. 백제 아신왕(?~405) 때 혜인대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고, 백제의 사비성이 함락당할 때 낙화암에서 떨어져 내린 궁녀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고려 현종임금 때 지었다는 설도 있다. 백제시대 창건설을 따를 경우, 사찰의 입지환경으로 보건대 아신왕 시절의 한성백제이기보다는 부여를 도읍으로 했던 사비시대(538~660년) 백제일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그러고 보면 혹, 언급되는 '혜인대사'라는 분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아신왕 때의 스님이 아니라, 고문헌에 나오는 성왕 때의 율사 '혜인법사'가 아닐까.
▲ 고란사 극락보전
법당으로 쓰이고 있는 건물 중앙에 극락보전 현판이 걸려있다. 현재의 고란사 건물은 강 건너 은산면의 숭각사(崇角寺)를 옮겨와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극락보전의 공포구조나 단청이 조선 후기의 장식적 특징을 보여준다. 1984년도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극락보전 모퉁이를 돌아 뒤꼍으로 가면 지금은 사라진, 고란초가 자랐다는 절벽 아래 고란약수가 있고, 뒤돌아서면 법당 뒷벽에 그려진 아래 그림을 만나게 된다.
▲ 고란사 극락보전 벽화
때는 서기 五百拾八年
시마메 도요메 이시이 라는
일본 소녀 셋이서
불교를 알고
비구니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현해탄을 건너
유학의 길을
이곳 고란사로
택했다 한다.
벽화 상단에 쓰인 글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호! 출처가 어디지?" 처음 보는, 우리 고전이나 사서에서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다. 그럴 수밖에. 이 이야기는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온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백제의 사신 은솔 수신(恩率 首信)을 통해 본국(本國) 백제왕(위덕왕)의 윤허를 받고, 588년 선신니(善信尼)와 선장니(禪藏尼), 혜선니(惠善尼)라는 세 여승이 백제에 유학하여 불교공부를 하고 3년 후인 590년 3월에 귀국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 참고) 부여군 백제신서01 『扶蘇山城을 다시 본다』, 주류성출판사, 2006년, P.85
깜짝 놀랄만한 것은 이 세 여승이 그저 평범한 유학승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일본 역사상 최초의 여승으로 셋 가운데 선신니(善信尼)는 백제에서 율학을 배워 귀국한 후에 일본불교 율학의 비조가 되었다. - 참고) 부여군 백제신서02 『불교의 나라 백제, 사비성』, 주류성출판사, 2006년, P.68
일본의 사서 『부상약기(扶桑略記)』에는 이들의 신분과 관련하여 더욱 놀라운 사실이 적혀 있다. 세 명의 수행자는 587년, 백제로 유학을 떠나기 한 해 전에 일본왕실의 최고 대신인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의 개인 사찰 이시카와정사(石川精舍)에 초대된다. 세 사람 중에는 아스카의 왕실에서 불상을 만들던 백제계 고위직 기술책임자 시바노다치토(司馬達等)의 딸 시마(嶋)가 있었다. 시마는 젠신노아마(善信尼, 선신니)라고 불렸으며, 나머지 두 소녀는 젠조노아마(禪藏尼, 선장니)와 에젠노아마(惠善尼, 혜선니)로 불렸다. - 참고) 『일본 속의 백제 구다라』, 홍윤기, 한누리미디어, 2008년, P.329~330
백제 유학을 마치고 학문승(學文僧)이 되어 돌아온 세 사람은 훗날 ‘스이코여왕’으로 등극하는 가시키야히메 공주의 특별한 환대를 받았다. 그녀는 자신의 사저로 사용하는 사쿠라이노데라(櫻井寺)를 세 수행자의 처소로 내어주기도 했다.
스이코여왕(추고여제, 재위 592∼628)은 등극하자마자 죽은 친오빠의 제2왕자를 태자로 책봉했는데, 그가 바로 여왕을 보필하며 아스카문화(飛鳥文化)의 황금시대를 열어간 쇼토쿠태자다.
선신니, 곧 젠신노아마가 고란사 벽화에 등장하는 이름 ‘시마메’다.
이들에 관해 오늘의 일본 고대사학의 태두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박사(교토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시바노다치토의 전승에는 조선과의 관계가 농후하다. 시바노다치토의 딸인 시마(嶋)가 고대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여승인 젠신노아마이며, 그녀의 이름은 ‘시마메’(斯末賣)라고도 써 있고(‘元興寺伽藍緣起’) 백제의 석불(石佛)을 모셨다. 젠신노아마의 제자가 된 젠조니와 에젠니도 본디 백제계 사람이며, 젠신노아마는 588년 백제로 건너갔다”(‘古代日本の輝き’ 2003)고 설명했다. - 2008년 1월 2일자 <세계일보>의 기사,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
자, 그렇다면 이제 세 사람이 유학을 왔다는 곳이 정말 고란사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실망스럽게도 일본인 니승(尼僧)의 최초 유학지가 고란사였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고란사라고 추정할 수 있는, 무시하기 어려운 정황근거도 불분명하다. - 물론 고란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만한 증좌도 없다. - 현재 고란사 법당 뒷벽에 그려진 그림은 1970년대 작으로 추정된다. 분명, 전승되고 있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 넣었을 것인데, 어찌된 일일까.
고란사 벽화의 수수께끼는 식민지 역사에 그 뿌리가 있다.
1910년대를 전후로 하여 조선사회엔 일본과 조선(강점 이전의 대한제국)의 친연성을 밝히는 이른바 동화(同化) 담론이 생산되고 유포되기 시작한다. 두 나라 사이의 친연성을 강조하며 타율적인 역사로서 조선사를 새롭게 구성함으로써 식민지 모국인들이 식민지 상황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권력과 통치방식에 대해 순종심을 내면화 할 수 있도록 ‘과거’가 유용한 도구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식민지의 역사는 단순히 재해석 되는 것을 넘어 조작되기도 하고 증거가 불충분하거나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실재하였던 ‘사실(史實)’로 회자된다. 동화 담론은 1930년대에 이르러 ‘내선일체(內鮮一體)’로 수렴되고 표상되었다. 다각도로 추진된 정책과 전략들의 최종 목적이 식민통치를 정당화 하고 합리화 하는 데 있었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 고란사에서 바라본 황포돛배와 유람선 선착장 풍경
식민지 지배자들에게 있어 부여는 단순한 백제의 고도(古都)가 아니었다. 그들 문화의 본향이자, 내선일체의 상징이었고, ‘영지(霙地)’였다. 이러한 배경 하에 1920년대 후반을 넘어서며 부여는 전국의 관광명소로 부상된다. 여기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 관변단체인 ‘재단법인 부여고적보존회’다. 사족을 달자면, 낙화암에 백화정이란 정자가 세워지고 백마강에 유람선이 뜨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다.
192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일본인 니승(尼僧)의 최초 유학지 고란사설’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가 항간에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한 중요한 인물이 부여에 나타나면서다.
1932년 12월, 오늘날 국립부여박물관의 시초가 되는 ‘백제관(百濟館)’ 관장으로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라는 사람이 부임해 온다. 식민지 지배 권력의 관점에서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새롭게 규명하고 조선의 역사에 일본이 어떤 기여를 했는지를 밝히는데 이 인물이 어떤 노력을 경주했는지를 알게 된다면 아마 누구라도 감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 참고) 「일제 식민지 상황에서의 부여(扶餘) 고적에 대한 재해석과 ‘관광명소’화」, 최석영, 서울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2003년
오사카 긴타로는 세 유학승이 백제에 와서 기거한 곳이 고란사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구체적인 추정의 근거는 알 수 없다. 고란사가 이전에는 여승들이 거주하는 사찰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뿐. 그러나 고란사에 대한 긴타로의 새로운 해석은 이 무렵부터 일본인 지식인층 사이에 폭넓게 ‘사실(史實)’로 수용된다. 그러다가 변절한 친일 소설가 김동인이 1941년 <매일신보>에 「백마강」이란 장편 역사소설을 연재하면서 고란사를 일본인 여성들이 유학 와서 수학한 곳으로 묘사함으로써, 급기야 고란사에 얽힌 이 가상의 역사는 대중 사이에 기정사실로 굳어지게 된다.
▲ 1915년에 촬영된 고란사
이러한 상황을 관변단체에서 놓칠 리 없었다. 재단법인 부여고적보존회는 고란사를 양국의 선린관계를 상징하는, 당시의 상황을 정당화시켜줄 수 있는 호재로 보고 건축물이 협소하고 훼손이 심하다는 이유로 개수(改修)하여 관광명소의 하나로 만들었다. - 참고) 「일제 식민지 상황에서의 부여(扶餘) 고적에 대한 재해석과 ‘관광명소’화」, 최석영, 서울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선신니가 백제의 율학을 배우고 돌아가서 일본 율학의 비조가 되었다면, 그들이 수학한 곳은 성왕의 명에 의해 인도로 파견되어 율부(律部)를 연구하고 돌아와 백제 율종(律宗)의 비조가 되었다는 겸익(謙益)이나, 성왕에게 율소(律疏) 36권을 저술하여 바쳤다는 담욱 . 혜인 법사와 관련된 사찰일 가능성이 높다.
만약 고란사 창건설에 나오는 아신왕 때의 혜인대사가 사실은 성왕 때의 혜인법사를 말하는 거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선신니 일행이 머물러 공부한 곳이 고란사였다라는 추정에 힘이 실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가정일뿐 믿을 만한 근거 자료가 있는 것은 아니다.
권력의 중심에 있거나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문화가 여러 가지 상황을 설명하거나 대변해 주고 정당화시켜주는 유용한 수단이 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문화는 어떤 시대에, 누가, 어떤 관점에서 설명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학생들이나 관광객을 인솔하고 나타난 안내자들이 고란사 법당 뒤에서 벽화에 대해 무어라고 설명하는지 나는 궁금하다. 이 그림을 어찌해야 하는가는 논외로 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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