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통일신라시대부터 傳來됐다” - 정수일(무함마드 깐수) 前 단국대 교수 종래 舊韓末보다 1,200년 앞서 “동서교류사 大家 깐수 박사의 충격 考證“ 종교의 교류란 인간과 초인간적 실재의 신앙적 관계인 종교와 그에 수반된 종교문화의 상호 전파 및 수용을 말하는데, 이러한 교류는 정신문명 교류의 중요한 분야다. 종교는 우선 인간의 주관적인 심적 현상으로 나타나지만 초인간적 실재에 대한 믿음이나 기원(祈願)을 표백(表白)하기 위한 객관적인 사회공동체 형태와 표현 수단으로도 나타나는 바, 이러한 형태와 수단을 종교문화라고 한다. 따라서 종교의 교류에는 이러한 주관적인 심적 현상과 객관적인 사회공동체 형태 및 표현 수단의 교류가 포함된다. 종교의 교류가 당위적인 것은 원초적으로 갖고 있는 종교간의 상차성(相差性) 때문이다. 여러 종교가 학문이나 예술, 도덕과 달리 삶의 근본 교훈을 초인간적인 실재로부터 얻고자 한다는 것에서는 큰 차이가 없지만, 그렇다고 동일한 형태와 내용으로 이루어지거나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신앙의 대상이 되는 초인간적 실재의 본질에 따라 또는 그것을 신봉하는 인간의 심성이나 태도 여하에 따라 각이한 종교들이 형성되고, 신관(神觀)을 비롯해 그 내용과 의식도 고유의 특성을 지니게 된다. 일반적으로 상이한 여러 종교들을 대별하여 원시종교와 이상종교, 유일신교와 다신교로 분류한다. 전자는 신앙의 내용과 형태가 문화적인가 현대적인가에 따른 구별이고, 후자는 신앙의 대상이 유일한 절대자인가, 여러 신을 섬기는가에서 차이점을 찾는다. 종교 간의 이러한 상차로 인해 종교의 교류가 필연적이며 또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상차가 없다면 동수위(同水位)에서의 물의 고임과 같이 종교는 자생지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뿐, 타지로 유입되는 교류 현상을 결과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당위적으로 발생한 종교의 교류는 신앙적 관계의 심리적 활동으로서의 종교와 그에 수반한 신앙적 관계의 사회공동체 형태와 표현 수단으로서의 종교문화라는 두가지 내용의 교류를 포함한다. 종교에는 교리와 교법, 계율, 의식 등이 속한다. 이에 비해 종교문화는 종교철학, 종교윤리, 종교예술, 종교건축, 교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교류의 측면에서 보면 종교와 종교문화는 상호 의존적 관계에 놓여 있다. 교리를 비롯한 종교의 내용은 종교문화의 내용과 형태를 규제하고, 종교문화는 종교의 내용을 구현한다. 따라서 종교 없는 종교문화의 교류란 있을 수 없고, 종교문화가 결여된 종교의 교류는 명실상부한 종교의 교류라고 말할 수 없다. “종교 전파에서의 초전과 공전의 혼란“ 이러한 종교의 교류는 그 내용이 다방면적이며, 정신문명뿐만 아니라 물질문명에 대해서도 강력한 문화접변(acculturation)을 초래한다. 그리고 그 교류는 초지역적, 초국가적, 초민족적, 초계급적인 활동무대에서 그야말로 무소불위(無所不爲)로 시·공간을 초월해 간단없이 진행된다. 그리하여 종교는 문화현상 가운데 전파성이 가장 강한 분야다. 특히 기독교·불교·이슬람교 같은 보편종교에서는 자연이나 혈연구조에 입지(立地)한 자연종교와 달리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종교적 이상까지 추구하려는 노력, 즉 포교와 전도를 통한 전파가 활발하게 진행된다. 이와 같은 종교의 전파는 자연적으로 전달(傳達·trans-mission)과 변용(變容·metamorphosis)의 과정을 거치는 바, 타지로의 종교 전파 시원은 의당 초전(初傳)단계인 전달에서 찾아야 하며, 초단계적인 변용을 그 시원으로 간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요컨대 종교의 전파는 전달에서 비롯되는 초전과 변용을 수반한 공전(公傳)의 두 단계를 거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왕왕 종교의 전파에서 이 사전(私傳)과 공전 문제가 상당한 혼란을 일으킨다. 특히 종교 전파의 시원 문제를 따질 때는 초전이 아닌 공전을 시원으로 보는 경향이 상당히 많다. 예컨대 ‘순도조려’(順道肇麗) ‘난타벽제’(難陀闢濟) ‘아도기라’(阿道基羅), 즉 순도가 고구려 불교를 창시하고 마라(滅)난타가 백제 불교를 개척하였으며 아도가 신라 불교의 기반을 닦았다는 3국시대 불교 전래의 시원에 관한 통설은 사전을 무시한 채 공전에서 그 시원을 찾은 일례다. 종교의 전파 과정에서 공전을 결과하는 변용은 주로 종교의 전달과 확산으로 초래되는 문화(또는 생활양식)의 재조정, 즉 문화접변(文化接變·acculturation)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대체로 종교의 전파에 의한 문화접변은 국가나 사회가 공식적으로 새 종교를 받아들임으로써 성사 가능한 것이다. 국가나 사회에 의한 이러한 공식적인 수용을 공허(公許, 혹은 公認)라고 하는데, 공허는 공전의 기점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공허와 공전에 앞서 주로 민간에 잠행적(潛行的)으로 전파되는 것을 초전, 혹은 사전이라고 한다. 불교의 전파사에서와 같이 종교 전파 시원을 무엇으로 잡는가 하는 것은 시종 문제시된다. 중국이나 한국의 실례에서 보다시피 지금까지는 대체로 공전의 시초, 즉 공허를 불교 전래의 시초로 삼는다. 실제적으로 왕명이나 공권력에 의한 국가적 수용이나 사회적 공인은 이미 초전 단계의 전달이 아니라 변용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일로써 초전이라고 볼 수 없으며, 따라서 그것을 전래의 시원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의 기독교 전래 시원 문제도 이와 유사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외래종교는 이질감에서 오는 냉대와 거부 때문에 쉽사리 수용되지 않고 그 전파 과정은 순조롭지 못하고 우여곡절을 겪게 마련이며 오랜 기간을 요한다. 모든 종교의 전파사가 실증하다시피 한 종교가 이역에 정착됐음을 알리는 공허나 공인에 이르기까지에는 초전자들의 헌신적인 포교 활동이 필수다. 엄밀히 말하면 이 전달 단계에서 이들 초전자들의 전도 활동 개시가 바로 해당 종교의 전래 시원이며, 그들이 다름아닌 전래의 시조들인 것이다. 그런데 왕왕 초전자들은 사회적 비난과 저항 속에서 비밀리에 포교 활동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공개성이 적고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에 의한 전래의 시원이나 과정을 구체적으로 명백하게 추적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우며, 때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 결과 흔히 초전(전달) 활동은 무시된 채 기록, 그것도 공전을 기준으로 한 기록에만 의존해 전래의 시원을 판단하는 편향을 범하게 된다. 이와 같이 외래종교는 일반적으로 전달(초전, 사전)과정을 거친 후 확산과 진흥에 의한 변용 단계에 이르러 정착되면서 복합문화체로서의 면모를 갖춘다. 물론 모든 외래종교가 꼭같이 일률적으로 이러한 과정(단계)을 거치는 것은 아니다. 전달에만 그치고 생명력을 잃어버린 나머지 변용을 초래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통상 변용까지 가져온 전파는 그 전제인 전달 과정을 필히 거치는 법이다. 그리하여 종교 전파사를 통관하면 모든 종교는 대체로 전달(초전, 사전) → 변용(공허, 공전)이라는 종교 전파의 보편원리나 과정을 따라 순리대로 전파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종교는 일종의 문화현상이기 때문에 그 전파 과정이나 결과에 관해서는 문명교류사적 시각에서 접근하되 반드시 하나의 종교적 복합문화체로 인식하여야 한다. 보편종교일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문명사적 의미에서의 종교란 경전과 숭배물, 승려와 승원, 또는 그 속에서 거행되는 각종 종교의례와 연찬하는 학문, 그리고 승원과 의례도구·승려 등을 건조, 장식하는 각양각색의 회화나 조각·복식·음악·무용 등 건축 및 공예술을 망라하는 종교적 복합문화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의 전파나 홍통(弘通)을 거론할 때는 이 종교적인 복합문화체의 여러 구성 요소들을 두루 다루어야 한다. 수많은 교류 종교 가운데 가장 광범위한 세계성을 띤 종교는 보편종교라고 하는 불교·기독교·이슬람교 등 3대 종교다. 대략 600년을 사이에 두고 출현한 이 세계 3대 종교는 전파 지역이 광대함은 물론이거니와 신도 수에서도 단연 기타 종교들을 능가한다. 그리하여 한반도를 포함한 세계 각지를 향한 이들 3대 종교의 전파와 교류가 가장 활발히 전개되었으며, 그 영향도 가장 심원하다. “고대 기독교는 서방종교 아닌 동방종교“ 기독교의 유라시아 전파는 시·공간적으로 다양한 양상을 띠면서 때로는 지속적으로, 때로는 간헐적으로 그러나 면면이 이어져 왔다. 기독교 전파사를 살펴보면 서방에로의 전파는 초기의 형극을 극복한 후에는 비교적 일로순풍이어서 짧은 기간에 서구문명의 바탕으로 착근했지만 동방에로의 전파는 서방과 달리 문명 간의 이질성과 이교(異敎)의 ‘색로’(塞路)로 인해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기독교는 출현 초기부터 마냥 서구의 종교처럼 인식되고 기독교문명은 곧 서구문명이라는 등식 개념으로 비쳐졌다. 그러나 근원을 소급해 보면 고대 기독교는 동방종교이지 결코 서방종교가 아니다. 그 이유는 교조 예수의 탄생지와 활동지 및 그에 의한 기독교의 발상지가 다름아닌 동방, 즉 오리엔트의 중간 요지인 팔레스타인이다. 신약성서에도 명시되어 있다시피 그리스도인들의 최초 종교단체(교단)가 조직된 곳이 바로 소아시아 지방(현 아시아 서단 터키 지방)의 안디옥이며, 기독교가 국가종교로 첫 공인을 얻은 곳도 서구의 어느 곳이 아니라 동방의 나라 메소포타미아의 에데사라는 사실 등이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에데사교회의 초기 기독교학자인 타티안(A.D.2)도 기독교는 서양인의 종교라기보다 오히려 동방인의 종교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동방의 일우(一隅)에서 출범한 기독교는 출현 당초부터 다양한 문화전통을 배경으로 포교에 의한 입지를 점차 확대해 나갔다. 초기에는 주로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희랍어권과 에데사를 중심으로 한 시리아어권이라는 동방의 문화적 배경 속에서 걸음마를 떼었다. 일단 출발한 기독교는 이러한 동방의 문화적 배경을 자양분으로 자라다 4세기초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정치적 질서와 타협하면서부터는 라틴 서방을 중심으로 하여 일약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고대기독교는 상이한 역사·지리·문화적 배경을 갖는 동방기독교와 서방기독교라는 두개의 큰 흐름으로 갈라지게 되었으며, 교리 논쟁을 비롯해 동·서방 기독교 간의 갈등은 쉼없이 거듭되다 드디어 1054년에 발생한 성 소피아 성당에서의 상호 파문 조치를 계기로 끝내 결별하게 되었다. 결별후 서방기독교는 크게 로마가톨릭과 프로테스탄티즘으로 양분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방기독교권을 이루고 있다. 한편 동방기독교는 크게 동방정교회(東方正敎會)·동방독립교회(東方獨立敎會)·동방귀일교회(東方歸一敎會)로 3분되어 오늘날까지 동방기독교권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러한 기독교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만이 기독교의 동방 전파(東傳)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기독교의 동전은 주로 전도의 주역과 대상지에 따라 크게 11세기 기독교의 동·서 분리 이전과 이후의 두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를 고대 기독교의 동전 단계(혹은 전단계)로, 후자를 근대 기독교의 동전 단계(혹은 후단계)로 각각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전단계의 전도 주역은 초기 서아시아 일원에서 흥기한 여러 교파나 교단들로서 후일 동방기독교권의 구성원이 된 동방독립교회(예:네스토리우스파)와 동방귀일교회(예:동방가톨릭)의 전신들이다. 그들이 전도한 기독교는 중국 당(唐)대의 동방기독교인 이른바 경교(景敎)에서 보다시피 초기(원시) 기독교의 성격을 띠고 있다. 전도 대상지는 고대 기독교의 발상지와 인접한 지역(페르시아 등)으로부터 점진적으로 인도나 중국과 같은 동방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여기서 한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동방기독교권의 주요 구성원인 동방정교회(핵심은 그리스정교회와 러시아정교회)가 전단계에서는 기독교의 동전에 별로 기여한 바가 없다는 사실이다. 동방정교회의 ‘동방’은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그리스어권에서 발원되었다는 뜻에서의 동방이지 고유한 의미의 동방은 아닐 뿐만 아니라 전도 대상지도 동방이 아닌 유럽의 그리스나 러시아 등지었기 때문이다. 전단계에 비해 후단계의 전도 주역은 주로 로마가톨릭을 비롯한 서방기독교 단체들이며, 전도 내용도 초기 기독교와 달리 7∼8세기의 교리 정립과 중세의 종교개혁 과정을 걸친 근대화한 교리 및 기독교문화를 보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도 대상지도 제한 없이 동·서방 곳곳을 택하고 있다. 고대 동방기독교의 동전은 전단계, 즉 기독교가 동·서로 공식 결렬되기 이전 시기(1∼10세기)의 초기 기독교가 서아시아로부터 선택적으로 페르시아와 인도·중앙아시아·중국 등 동방아시아 지역으로 전파한 것을 의미한다. 이 시기는 기독론 논쟁을 비롯한 교리 논쟁이나 교세 확장, 그리고 교권 확립을 위한 배타적 경쟁이 면면부절(綿綿不絶)하여 정통과 이단 시비가 엎치락뒤치락하는 시기로써 의도적인 동방 전도가 없지 않았지만 많은 경우 이러한 경쟁과 갈등의 소산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이 단계의 기독교 동전상을 제대로 구명하는 데는 여러 가지 제한과 어려움이 따른다. “9세기경 중국으로 전파된 고대 동방기독교“ 전술한 바와 같이 기독교의 발원지는 동방 땅 팔레스타인이며 출현후 1,000여년이 지나서야 동·서 기독교로 양립되었으므로 분열 전(전단계)의 기독교를 근원적으로 고대 동방기독교라고 인지함은 당연할 것이다. 따라서 고대 기독교란 곧 고대 동방기독교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시기에 페르시아와 인도·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 혹은 한반도까지 동방으로 전파된 종교, 즉 동전 기독교도 역시 고대 동방기독교의 범주 내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개념상 구분을 짓기 위하여 넓은 의미에서의 고대 동방기독교는 서아시아에서 탄생한 초기의 기독교와 동전된 기독교를 통틀어 말하며, 좁은 의미에서의 고대 동방기독교는 동전된 기독교만 가리킨다. 고대 동방기독교는 일찍이 종교의 본능적 전파성과 역사적 환경의 요청에 부응하여 동방으로 파급의 물결을 타기 시작하였다. 이 물결은 인근의 페르시아로부터 인도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까지 그 여파를 몰고 왔다. 사산조 페르시아(226∼651)는 지정학적으로 고대 동방기독교 동전의 필수 경유지로서 기독교의 동전에 기여한 바가 크다. 그러나 기독교에 대한 국가적 대응은 로마와의 대결구도와 국내 사정에 따라 수용과 박해, 관용과 제한의 순환을 거듭하는 양상을 보였다. 기독교의 페르시아 진출은 아르벨라교회의 활동기(1세기말∼5세기 중엽)와 네스토리우스파의 활동기(5세기 중엽∼7세기 중엽)의 두 단계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이 두 단계에서 각각 주역을 담당한 아르벨라교회와 네스토리우스파는 모두 고대 동방기독교의 한 뿌리에서 자라난 형제 교파이지만 구체적인 성장배경은 다르다. 전자는 에데사와 더불어 시리아어권문화의 배경 속에서, 후자는 안디옥의 그리스어권문화의 배경 속에서 각각 성장하였다. 그러나 후일 안디옥의 네스토리우스파 추종자들이 박해를 피해 페르시아로 피신하여 정착하면서부터는 그들의 우세로 두 파는 서로 융합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파 교회에 대한 페르시아 당국의 기복무상(起伏無常)한 태도와 이슬람의 페르시아 점령(651)은 교회로 하여금 새로운 활로를 찾아 인도·중앙아시아·중국 등 동방 여러 지역으로 얼굴을 돌리게 하였다. 인도에의 기독교 전파는 초대 교회의 전도기와 네스토리우스파의 전도기 등 두 단계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첫 단계에서 진행된 초대 교회의 전도에는 1세기 사도 도마의 전설 같은 전도와 2∼3세기 알렉산드리아교회의 전도, 그리고 3∼4세기 페르시아의 박해를 피하려는 교인들에 의한 ‘이민선교’(移民宣敎) 등 세가지 전도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4세기부터 교세는 급상승하여 전국에 36개소의 승정관구(僧正管區)가 설치되었다. 그러다 6세기 이후 거듭되는 박해와 이슬람 치하에서 벗어나 집단적으로 이주한 네스토리우스파 교인들의 생사를 건 열정적 전도로 인해 교세는 일시 상승일로로 치달았다. 그러나 그들은 당국의 혜택 속에서 세속에 젖고 축재욕에 불탄 나머지 점차 전도열은 식어가고 정신은 ‘동면상태’에 빠져 버렸다. 그리하여 인도에서의 기독교는 그 활력을 잃고 말았다. 기독교의 중앙아시아 전파 역시 초기 동방교회의 전도와 네스토리우스파에 의한 전도의 두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에데사를 비롯한 초기 동방교회에 속한 서아시아인들, 특히 시리아교회 교인들은 오아시스 육로를 통해 중앙아시아와 활발한 교역을 하면서 유목민들 속에 기독교를 널리 전파하였다. 이러한 초기 전도 단계를 거친 기독교는 중앙아시아 각지에 어지간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이즈음 서방에서 이단으로 정죄(定罪)되어 추방된 후 페르시아에서 독립교단으로 출범(498)한 네스토리우스파에는 중앙아시아가 인도·중국과 더불어 활로의 대상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역대 기독교의 여러 종파들 중에서 전도열이 가장 강한’ 네스토리우스파는 메르브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도처에 전도교회 기지를 꾸리고 포교에 진력하였다. 그리하여 9세기 말에 이르러 중앙아시아 전역에 10여곳의 대사교(大司敎)교구가 설치되어 전반적인 포교망이 정비되었다. 지금까지 출토된 유물로 미루어 고대 동방기독교는 중앙아시아의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를 거쳐 톈산(天山)산맥의 북록과 타림분지로 확산되었고, 그곳으로부터 중국으로 전파된 것으로 판단된다. 기독교가 언제 중국에 처음으로 들어왔는가 하는 시원문제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이설이 있어 아직 정설은 없다. 이른바 경교(景敎)의 초전(635)에 관해서는 비문을 비롯해 몇가지 문헌사료와 유물이 남아 있어 고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전 시기에 중국과 기독교가 퍼져 있던 서역 간의 빈번한 교류상황을 감안할 때 분명히 일찍부터 기독교가 중국에 파급되었으리라고 보인다. 그러나 몇가지 모호한 전설이나 단편적인 기록 외에는 신빙성 있는 사료가 별로 없기 때문에 아직 실상을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전설이나 기록만으로도 중국에 대한 고대 동방기독교의 유입상을 대충 가늠할 수 있다. 종교 전파사의 원리나 도정에 비추어 보면 이러한 유입은 기독교의 초전(사전)단계에 해당한다. 초전단계이니만큼 전입 경로나 내용 및 방법 등에 불확실한 점이 많다. 그러나 635년 당 태종(太宗)에 의한 기독교(경교)의 공허(공인)는 고대 동방기독교의 대중국 공전의 길을 트이게 함으로써 기독교의 중국 전파는 일대 전기, 즉 공전기(公傳期)를 맞게 되었다. 경교는 공허후 약 250년간 몇만명의 신도를 포섭할 정도로 흥성하다 ‘회창법란’(會昌法亂, 845)과 ‘황소(黃巢)의 난’(878) 등 일련의 소요에 휘말려 중원에서 거의 멸적되고 잔존세력이 몽골과 한반도의 인접지인 만주 등 변방지역으로 흩어졌다. 바다든 강이든 물결은 어느 지점에서 수직적으로 딱 멈춰서지 않고 잔잔한 여파를 남기면서 서서히 가라앉는다. 종교의 전파도 마찬가지다. 고대 동방기독교의 동전 물결은 중국에서 중단되지 않고 멀리 한반도에까지 그 여파를 몰고 온 듯싶다. 그간 고대 동방기독교의 한반도 전파 문제에 관하여 주로 기독교계의 몇몇 학자들이 거론한 바 있다. 그들은 영성적(零星的) 사료를 가지고 여러 가지로 추론하고 있지만 이렇다할 결론은 얻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리하여 작금 그 연구는 답보상태에 있다. 물론 그 원인은 신빙성 있는 사료가 미흡하다는 데도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종교 전파에 관한 보편이론에 어둡고 고대 동방기독교의 동전에 관한 역사적 이해가 부족하며 접근방법도 미숙한 데 있다. 아직은 사료와 연구의 부족으로 전파 시기와 내용, 성격, 영향 등 실상을 십분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 개연성을 넘어 초전단계의 유입으로는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근거에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가 있다. 첫째로 그 근거는 관련 유물이다. 가장 유력한 증거 유물로 제시되는 것이 1965년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출토된 석십자가(石十字架·Stone Cross, 24.5×24×9cm)와 역시 경주에서 발굴된 2점의 철제 십자문장식(十字文裝飾·Cross-baseds Design, 5.8×5.6×cm;2.4×3.2cm)과 성모 마리아 소상(塑像·Statue of Virgin Mary, 7.2×3.8×2.8cm)이다. 현재 숭실대 부설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4점의 유물은 모두 7∼8세기 통일신라 시대의 유물로 추정된다. 석제 십자가는 좌우상하의 길이가 거의 대칭적이어서 십자가의 5형 중 초기 십자가형인 그리스형에 속한다. 2점의 철제 십자문 장식은 용도가 불명하나 부착용 장식품으로 짐작된다. 성모 소상은 양각으로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구도로 보아 마리아상으로 추정된다. 이 유물들에 대한 고고미술학적 분석이 진일보 요망됨은 물론, 아직 미상인 출토 경위와 제작 연대 및 용도 등이 학문적으로 밝혀져야 할 것이다. 그밖에 일부 연구가들은 주로 불교 관련 유물에 나타난 기독교적 요소들을 들어 기독교의 전입을 설명하고 있다. 예컨대 고대 동방기독교 연구가인 골든(E.A.Goldon)은 경주 석굴암 전실 내부에 부각된 십이면관음상(十二面觀音像)과 십나한상(十羅漢像), 그리고 범천(梵天)과 제석천상(帝釋天像) 등의 옷 무늬나 신발은 고대 동방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파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 말한다. 기독교사가이며 고고학자인 김양선(金良善)은 통일신라 시대 능묘의 호석에 부조된 십이지상이나 능묘의 수호적 기능을 수행하는 무인석상(武人石像·예컨대 경주 괘능의 무인석상 한쌍)의 의장은 거의 경교적 모습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열거한 유물 중 일부는 물론 기독교적 요소로 가늠되지만, 비기독교적인 순수 서역적 요소도 혼재한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설혹 불교문화유물에서 기독교적 요소가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이 땅에 기독교가 직접 들어온 증거라거나 그 반영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점에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오기 이전에 불상의 제작을 비롯해 간다라미술 등 불교문화가 그리스문화에 바탕한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향관계는 서역이나 중국·한국·일본의 불교문화에 그대로 그 흔적을 남겨놓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물에는 이미 사회적으로 유행되던 기용유물(旣用遺物)이 다수를 점하나, 간혹 비유행적인 증여품이나 소장품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한두점의 유물을 특정 시대의 어떤 사회상의 상징물이나 증거물인양 단정하는 데는 무리가 따를 수 있다. 이럴 경우에는 다른 방증적인 유물이나 기록을 첨가하여 증거를 보완해야 한다. 경주 일원에서 7∼8세기의 유물로 출토된 위의 기독교 상징물들은 다음에 기술되는 몇가지 방증적인 기록 사료를 원용(援用)할 때 보다 유력하게 고대 동방기독교의 한반도 초전상을 실증할 수 있는 유물로 인정될 것이다. 두번째 근거는 몇건의 관련 기록이다. “삼국유사”에 보면, 신라 신문왕(神文王·재위 681∼691) 때의 고승 혜통(慧通)에 대한 찬문(讚文)에 ‘마귀와 외도(外道)를 모두 서울에서 멀리했다’라는 기사가 있다. 여기에서의 ‘외도’란 불교 이외의 다른 종교를 뜻하는 것으로, 당시 새롭게 접한 이교(異敎)인 기독교일 가능성이 있다. 혜통은 일찍이 중국 당나라에 들어가 밀교(密敎)의 선무외삼장(善無畏三藏)에게 사사한 후 그의 천거로 당 고종(高宗·재위 650∼683) 딸의 병을 주술로 치유해 준 바 있다고 전한다. 그런데 고종은 고대 동방기독교(즉 경교)를 공식으로 받아들인 태종을 이어 당에서 기독교를 부흥시킨 주인공의 한 사람이다. 그는 모든 주에 경교사(景敎寺)를 건립하도록 하여 ‘수많은 성읍에 경교사원이 충만되게 하였다.’ 이러한 고종과 친분을 맺은 혜통으로서는 당에 공전(公傳)된 기독교와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던 그가 기독교를 ‘외도’로 인지하고 멀리했던 점으로 보아 당시 기독교가 가까이에, 즉 신라 땅에 들어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삼국유사” 중에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전설이나 신화와 비슷한 내용들이 발견된다. 예컨대 사량리(沙梁里)에 있는 알영정(閼英井)가에 계룡(鷄龍)이 나타나 왼쪽 갈비에서 어린 계집애를 낳았다는 전설은 창세기(2:21∼24)와 비슷한 내용이다. 다른 한가지 예로는 29대 태종대왕(太宗大王·즉 무열왕 김춘추) 5년(660) 4월 청개구리 수만마리가 나무 위에 나타나 서울 시민들이 놀라 달아나다 100여명이 죽고 많은 재물을 잃었다는 기사는 구약성서의 출애급기에 나오는 개구리소동(7:25∼29)과 흡사하다. 문화현상에서 상사성이 곧 상관성은 아니지만, 다른 사실들과 연관시켜 그 상호관계를 추론하는 것은 유효한 연구방법이다. 문명간의 상사성은 수용에 의한 모방으로 이루어질 수 있지만 보편성이란 문명의 속 성에 기인하기도 한다. 같?환경이나 여건 하에서는 물론, 때로는 다른 환경이나 여건 속에서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내용과 형태에서 유사한 문명이 창조된다는 것이 문명의 한 속성으로서의 보편성이다. 이 점에 유의하면서 문명간에 나타난 비슷한 현상을 비교 고찰해 분간해야 한다. 그밖에 “삼국유사”의 기사 중에 나오는 성모나 성자, 점찰(占察·죄에 대한 참회) 등 용어들이 기독교의 표현임을 들어 기독교의 전래를 주장하는 논자도 있다. 지금은 물론 기독교에서 ‘성모’가 마리아를, ‘성자’가 예수를 지칭하지만 신라 때에는 꼭 그러한 전문적인 함의만 아니고 일반적인 ‘성스러운 어머니’ ‘성스러운 아들’이라는 뜻으로 씌었을 수 있으며, ‘점찰’은 불교적 표현임이 틀림없는 점으로 보아 꼭 기독교와 관련된 용어라고 속단할 수 없다. 현존 한국측 문헌 중에서 ‘경교’ 일어가 처음 나타나는 것은 조선조 헌종(憲宗·재위 1835∼1849)때 소운거사(嘯雲居士) 이규경(李圭景)이 찬술한 “오주연문”(五州衍文)에서다. 저자는 땅 속에서 ‘경교유행중국비’(景敎流行中國碑)라는 액제(額題)가 있는 한 비가 발견되었다고 이 책에서 경교에 관해 전하고 있다. 이 비는 다름아닌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781년 건립)를 말한다. 셋째로 한반도 주변에서 발견된 방증적인 유물과 기사들이다. 1928년 6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인접한 중국 만주지방의 안산(鞍山) 부근에서 요대(遼代) 성종(聖宗·983∼1031)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로 만든 7점의 십자가가 출토되고 동방박사의 아기 예수 경배도(敬拜圖)를 방불케 하는 암각화도 발견되었다. 문헌기록에 의해 이곳에는 상당수의 경교 신자들도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이때는 고려 초기에 해당하는 시기로, 이 지역에는 그 이전에 이미 경교가 유행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후에도 안산 일원에서 여러 점의 기독교 관련 유물(십자가, 장식품 등)이 발굴되었다. 발해를 이은 거란(契丹)과 요대에도 이 지역에는 경교가 유행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입증하는 유물도 다수 발견되었다. 이웃인 일본의 경우 8세기 초엽에 기독교인이 일본에 온 기록이 남아 있다. “속일본서기”(續日本書紀)에 의하면 천평(天平) 8년(738)에 일본 고승 홍법(弘法) 대사가 파사(波斯·페르시아)인 이밀의(李密醫·의사 이밀·Millis)를 데리고 귀국하였는데, 그는 일본 천황으로부터 작위까지 받았다고 한다. 홍법 대사는 중국 당나라에 가서 장안 서명사(西明寺)에서 경교승 아람과 친분이 두터웠고 불경을 공역한 불승 반야(般若)로부터 산스크리트어를 수학한 고승으로, 당에 체류할 때 한창 흥성하던 기독교(경교)에 관한 지식을 얻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귀국할 때 당시로서는 선진 의술을 소유한 이밀이라는 페르시아 출신 경교 의사를 대동하였다고 보인다. 중국 당대에 경교가 성행하던 시기(태종∼덕종, 약 150년간)에 많은 신라승들이 입당구법하면서 앞의 일본승처럼 자연스럽게 경교와 접촉하였을 것이다. 기록이 없어 확언할 수 없지만, 이들에 의해 신라에 기독교가 알려지거나 초전됐을 가능성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중국뿐만 아니라 멀리 동로마제국(비잔틴)을 비롯한 서역 제국의 문물을 받아들임으로써 서역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고 자체의 물질문명과 정신문명도 가일층 함양될 수 있었다. 그러한 문물 가운데는 불교를 비롯한 종교문화도 한몫 하였을 것이다. 요컨대 기독교가 침투하던 시대상황이나 주위환경, 그리고 기독교를 선호하는 당조(唐朝)나 서역과 여러 가지 교류를 진행했던 사실을 감안할 때 기독교가 신라인들에게 알려지고 초전되었을 개연성은 십분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 근거는 전래된 불교의 기독교적 요소다. 주지하다시피 불상의 제작이나 대표적 불교미술인 간다라미술은 고대 그리스문화에 바탕한 헬레니즘의 영향을 직접 받은 데서 비롯된 것이며, 극락정토사상이나 미래(내세)와의 관계에서 현재를 파악하는 미륵불사상 같은 것은 원시불교에 기독교적 요소가 가미된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이름으로 들어온 이러한 사상과 문화를 기독교적 사상과 문화의 간접적 유입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불교와 기독교가 어우러진 불국사?“ 불교, 특히 대승불교는 중국 당대에 이르러 동전한 기독교(경교)와 때로는 융화관계에, 때로는 경쟁관계에 있으면서 기독교의 전파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었다. 한편 경교는 유입과 전도 및 정착 과정에서 불교를 비롯한 타종교와 융화 타협하면서 활동기반을 다져나갔다. 많은 사실(史實)이 입증하다시피 불교와 경교는 애당초 ‘앙숙관계’가 아니라 어울리는 이웃이었다.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기독교의 상징물인 석십자가가 발견된 사실, ?불교와 기독교가 한곳에서 어우러진 사실을 과연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불상과 예수상이 한곳에 모셔졌다면 청천벽력이 일어날 오늘의 현실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선이 악으로 변한 세상에서 다시 선으로 돌아가기에는 아직 지혜가 너무 부족한 현실이고 보면, 그저 그 선을 염불처럼 되뇔 수밖에 없다. 불교와 기독교의 어울림이라는 ‘선’ 앞에서 말이다. 경교는 그 명명부터 이러한 융화와 타협을 보여 왔다. 처음에는 페르시아로부터 들어왔다고 하여 ‘파사교’(波斯敎·페르시아 사교)라고 부르다 현종때 칙령으로 발상지 로마를 살려 ‘대진교’(大秦敎·로마교)라고 하였고, 나중에는 ‘커다란 광명’이라는 기독교의 본지(本旨)를 좇아 ‘경교’라고 이름하였다. 이러한 융화와 타협은 용어의 혼용이나 차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경교의 적지 않은 교리적 개념이 불교를 비롯해 유교나 도교의 대응어로 표현되고 있다. 예컨대 삼위일체는 삼위묘신(三位妙身)으로, 동정녀는 실녀(室女)로, 부활승천은 정오승진(亭午昇眞)으로, 구원은 제도(濟度)로, 주교는 법주(法主)로, 하느님은 건(乾)으로 표현하였다. 바로 이러한 용어의 혼용이나 차용으로 인해 경교가 ‘사경사불’(似景似佛·기독교 같기도 하고 불교 같기도 하다)이라는 지적과 함께 불교의 ‘겉옷’을 쓴 기독교라는 평판까지 받게 되었다. 타종교와의 융화나 타협의 흔적은 유물에서 더욱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경교의 실체를 입증하는 대표적 유물인 ‘대진경교유행중국비’의 의장(意匠)은 그야말로 다종교의 합성품이다. 거북좌대 위에 세워진 비의 상부에는 반룡(蟠龍)이 큰 여의주를 받쳐들고 있고, 그 밑에 바로 십자가가 연꽃과 부운(浮雲) 속에 명각되어 있다. 주지하다시피 거북좌대·연꽃·여의주는 불교, 부운은 도교,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물이다. 현존하는 대진사들의 유물들도 거개가 이러한 혼합 의장으로 꾸며져 있다. 경교의 타협성은 몇가지 이교적 의례행사에서도 나타난다. 예배때 목탁을 친다든가, 사원 내에 초상화를 걸어놓고 효양주의적(孝養主義的)으로 조상을 숭배하는 일 같은 것은 정통 기독교에서는 삼가는 일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러한 일들을 행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일종의 면종복배(面從腹背)의 영합일 수 있다. 그러나 설혹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융화나 타협의 발현으로 봐야 할 것이다. 중국에 전파된 고대 동방기독교의 일파인 경교의 이러한 융화와 타협의 일면을 밝히는 것은 인접한 한반도에 유입된 기독교의 실체를 알아내는 데 귀감이 될 수 있다. 더욱이 유입된 기독교가 경교라고 가정할 때 불국사 경내에 십자가가 묻혀 있을 수 있으며, 불교 속에 기독교적 요소가, 기독교 속에 불교적 요소가 섞여 있을 법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위에서 지적한 불교 속의 기독교적 요소는 어디까지나 불교 유입의 수반품(隨伴品)에 불과한 것이지, 결코 종교로서의 기독교 자체의 직접적인 유입이나 전파라고는 볼 수 없다. 이것은 일종의 초전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차제에 한반도에서의 기독교 유물과 관련하여 특별히 한 가지 부언할 것은 한때 기독교계를 크게 흥분시켰던 이른바 ‘도마의 분처상’(分處像) 이야기다. 1987년 8월 경북 영풍군 평은면 강동2리 왕유동(속칭 왕머리분처바위에 두부(頭部)가 떨어져나간 암각상이 발견되었는데, 기독교 관련 상으로 거론되어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분처상이라고 가칭(假稱)된 이 상의 높이는 약 5m, 가슴 너비는 약 3.3m이며 상면과 암면(岩面)에 음각한 3점의 명문이 있다. 즉 상의 좌측 암면의 ‘도마’(thomas)란 히브리어 문자와 상면 하단의 ‘야소화왕인도자’(耶蘇花王引導者) 및 ‘명전행’(名全行)이란 한자 명문이다. 그밖에 특이한 조형 기법과 문양이 확연해 아무런 명문도 없는 불국사 출토 석십자가나 경주 발굴 마리아상에 비하면 여러 모로 고증 가능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아직까지 이 낯선 상에 관한 종합적 연구, 특히 학제간의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아 무어라고 단정적인 결론은 내릴 수는 없다. 이 시점에서 논급할 수 있는 것은 불상과는 상이하여 기독교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론과 몇 가지 문제점이다. “우선 분처상을 기독교와 관련지을 수 있는 근거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1)조형기법(造型技法):일견하여 눈에 띄는 것은 수세(手勢)인데, 왼손가락 끝은 빗장뼈에 댄 채 손등을 보이고 있으며, 오른손은 손바닥을 외반(外反)해 불상의 수인(手印, mundea)에서는 그 유형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이 수세는 1908년 중국 둔황(敦煌)에서 발견된 경교화상(景敎畵像, 당 말에 제작, 일부 학자는 그리스도상이라 주장)의 수세와 매우 흡사하다. 수세뿐만 아니라 상의 구도나 복장의 화려함도 두 상이 서로 유사하여 불상과는 확실히 구별된다. 발가락의 노출도 불상에서는 볼 수 없는 기독교(예수)상 특유의 것이다. 2)문양(文樣):상의의 옆구리와 하부에 음각된 문양은 목단이나 장미 같은 꽃무늬로 보이며 불화(佛花)인 연꽃무늬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분처상의 고리형 목걸이문양과 상의의 가로줄 문양은 둔황 경교화상의 목걸이 문양이나 상의 문양과 각각 동형임이 분명하다. 3)명문(銘文):상면에 음각된 히브리어의 ‘도마’와 한자의 ‘야소화왕인도자’, 그리고 ‘명전행’이란 명문은 비록 암각된 시기와 원상(原像)의 명문인가 아닌가에 관해서는 의문점이 제기되나, 이 상이 불상이나 기타 임의의 암각상은 아니고 기독교와 관련된 상임을 실증해 주는 데는 별 무리가 없다고 본다. 4)민간전언(民間傳言):이 상을 지켜봐 온 부근 주민들은 종래 이 상 앞에서는 물우숭배(物偶崇拜) 같은 행위는 하지 않았다고 일치하게 전언한다. 기실 현장에서 그러한 흔적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불상이나 기타 상서롭지 않은 대상물(조형물 포함)만 있으면 예외 없이 불공을 드리거나 기복(祈福)하는 한국인들의 전래 관행에 비춰 보면 의외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물우숭배를 불허하는 기독교 같은 유일신교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사료된다. 이상의 네 가지 점으로 미루어 분처상을 기독교관련 상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 상을 고대 동방기독교의 한반도 전래를 실증하는 증거 유물로 일단 간주해도 크게 하자는 되지 않을 성싶다. 그러나 논자들의 추론이나 단정, 그리고 상 자체에 관한 연구에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제와 과제가 제기된다. 1)명문의 고증 문제:상면에 음각된 ‘도마’와 ‘야소화왕인도자’ ‘명전행’이란 명문은 이 상의 실체를 밝히는 데 결정적 열쇠다. ‘도마’란 글자는 현대 히브리어문자로 씌어졌는데, 그 실상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의 ‘도마’는 예루살렘의 초기교회 시대에 예수의 12사도 중 한 사람으로, 기원 1세기 중엽 인도 서남부와 중국에까지(중국까지 왔다는 설은 부정됨) 와서 전도 활동을 하였다는 사도다. 이 상을 도마상으로 본다면 히브리어, 그것도 현대 히브리어로 명문을 기입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례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발견된 도마 관련 유물 중에는 히브리어로 명기된 유물이 별로 없다. 1547년 남인도 서해안의 성 도마산에서 발굴된 석비에는 십자가와 함께 현지어인 펠레비(Pehlevi)어로만 된 비문이 적혀 있다. 도마 시대는 물론, 11세기에 이르러 동서 교회가 결별될 때까지만 해도 고대 히브리어가 사용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도마의 현대 히브리어 명문은 그 이후에 씌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부처상의 미스터리“ 도마의 명문보다 더 문제시되는 것은 이른바 ‘야소화왕인도자’라는 명문이다. ‘야소화왕’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존칭이며 ‘인도자’는 사도나 전도자로 풀이된다. 그런데 예수에 대한 ‘야소’란 한역(漢譯) 지칭의 출현시기가 문제다. 781년에 건립된 ‘대진경교유행중국비’에는 예수를 ‘미시가’(彌施訶), 즉 메시아(Messiah, 구세주)로 칭하고 있다. ‘야소’라는 말은 중국 명대 중기 서방 가톨릭이 중국에 유입되면서부터 처음 발견된다. 한국측 경우에는 원효문집(元曉文集)에서 예수를 불교식으로 ‘법왕자’(法王子)라고 칭한 실례는 있으나 ‘야소’로 역칭(譯稱)하거나 음사한 적은 없으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전무하다. 이상 두 가지 명문에 대한 검토를 통해 보다시피 명문만으로는 기독교가 신라시대(혹자는 초기 신라시대)에 전입되었다거나, 심지어 도마가 이 시대에 직접 신라에 내도하여 전도하다 인도로 돌아갔다든가 하는 가정은 설정하기 어렵다. 설혹 분처상이 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하더라도 명문은 후에 첨가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끝으로, ‘명전행’이란 명문에 관해서는 순흥면 읍내리고분 서벽에 고구려인 ‘전행’(全行)이란 동명의 석장(石匠)이 등장하는 점을 들어 당대의 명장(明匠)인 이 전행이 분처상도 제작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서기 400년경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이 영주·순흥·안동 등 소백산 내부 지역을 일시 통치하였던 사실을 감안할 때, 이는 십분 가능하다는 설이다. 일종의 탁견 같기는 하나 전행의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점이 있어 단정은 이르고 숙고가 요망된다. 그밖에 전행을 ‘전차’(筌次, 향기나는 풀에 버금가다라는 뜻)란 석장 전행의 호로 판독하는 이도 있는데, 이것은 너무나 비약적인 해석으로 보인다. 2)기독교의 전래 시기 문제: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분처상은 고대 동방기독교와 유관한 작품임에는 거의 틀림이 없다. 그러나 명문을 비롯한 상의 구조 자체는 아직 제작 연대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한반도 전래 시기나 전래 루트 등 전래상을 구체적으로 밝혀 주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1세기에 사도 도마가 신라에 와서 전도하다 인도로 돌아갔다느니, 고구려인 석장 전행과의 동명을 전거로 4~5세기 경에 고대 동방기독교가 이미 한반도에 전입되었다느니 하는 견해는 신빙성이 희박하다. 3)상의 실체 문제:불상과는 다른 이 상의 제작 연대와 제작자, 그 구도와 조형기법 등 상의 전반적 실체를 보다 과학적으로 구명하여야 할 것이다. 인물상 해명에서 가장 중요한 대상인 두부가 떨어져나감으로써 실체를 밝혀내는 데 큰 하자가 있으므로 두부의 수습이나 복원에 우선 관심을 돌려야 할 것이다. 상의 입지조건을 헤아리는 일도 실?해명에서 중요하다. 종교의 전도와 수행의 상징물인 이러한 암각상이 내왕이 잦은 도시나 해안을 멀리 떠나 이곳 한적한 소백산 오지에 자리하게 된 동인을 주변의 지역환경이나 역사적 배경과 결부하여 고찰하는 일도 시도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아직은 한반도 내에서 유사품이 발견된 예가 없는 상황에서 성서고고학이나 미술고고학의 도움으로 국외의 유사품과 비교 연구하는 것도 실체 해명의 한 연구 방법이다. 한반도의 불교가 북로(北路, 육로)를 통한 유입에 앞서 남해로(南海路)를 거쳐 기원 1세기 초반에 들어왔을 개연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필자로서는 남해로를 통한 고대 동방기독교의 한반도 초전에도 유념하고 있다. 분처상과 이 초전기의 상관성 여부는 금후의 연구 과제다. 이와 같이 비록 증빙사료는 아직 불충분하지만 고대 동방기독교의 신라 초전만큼은 그 흔적이 역력하다. 그렇다면 언제 초전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것은 기독교의 한반도 전파 시원 문제이기도 하다. 비교적 명확한 증빙 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불국사(751년 건립) 출토 석십자가를 기준으로 한다면 초전 시기를 8세기 전반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경교가 중국에 초전(635)된 지 100여년 후의 일이다. “1,200년 역사의 한반도 기독교“ 이상에서 고찰한 제반 증거는 고대 동방기독교의 한반도 초전(사전)을 직·간접적으로 입증해 주는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아직은 고증에서 불확실성이 적지 않고, 개연성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면도 없지 않지만, 그나마 초전의 증빙으로는 가하다고 본다. 앞으로 더 많은 사료와 유물을 발굴하여 초전의 확실도를 더욱 높여야 하겠지만 이만큼의 논증으로도 이제 한국과 기독교문명 간의 만남의 역사는 200년이 아니라 그 6배인 1,200여년으로 잡아봄직하다. 그러면 한반도(신라)에 초전된 기독교는 과연 어떤 모습의 기독교였을까? 이상에서 제시한 몇점의 증빙물로는 도대체 그 실상을 알아낼 수 없다. 다만 인접관계나 밀접한 교류관계, 그리고 중국 당대에서의 성황과 변방으로의 파급 등 여러 요인들을 복합적으로 고려할 때 한반도에 전입된 기독교는 당대 중국에서 약 250년간이나 유행하던 경교일 가능성이 높다. 고대 동방기독교의 일파인 경교에 관해서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를 비롯한 관련 유물뿐만 아니라 관련 경전과 문헌기록도 남아 있어서 그 실체를 비교적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시기 경교를 고대 기독교의 이단(異端)으로 정죄(定罪)된 네스토리우스(Nestorius)파로 간주함으로써 종교계나 학계에서 경교에 관한 연구를 회피하거나 연구에서의 편견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대진경교유행중국비’의 비문 내용을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면 경교는 결코 이단시됐던 네스토리우스파가 아니라 정통적인 고대 동방기독교의 일파임을 알 수 있다. 비문에 의하면 경교의 신관(神觀, 하느님의 유일성과 창조성, 영원성)과 성관(聖觀·예수관, 마리아관), 구원관(救援觀) 등 기본 교리가 기독교의 정통 교리와 기본상 일치하며 위배되거나 모순되는 점은 별로 찾아볼 수 없다. 문제시되어온 그리스도의 신인양성론(神人兩性論)이나 마리아의 신성론(神聖論)도 비문의 내용에서는 그 맹점을 발견할 수 없다. 혹자는 비문에 예수의 기적이나 십자가의 죽음·승천·부활·원죄 같은 술어나 그에 관한 기술이 없다는 이유로 비의 진실성을 부인하거나 경교 본연의 실체를 의심하는데, 이것은 성급한 견강부회적(牽强附會的) 편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불과 수백자 밖에 안되는 비문에 삼라만상 모든 교리를 다 담을 수 없음은 자명하거니와 앞의 기본교리를 논한 것만으로도 족하며 게다가 내용을 세심히 관조하면 결락되었다는 내용들마저 이곳저곳에 투영되어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당조에서는 경교를 로마에서 들어온 종교, 즉 ‘대진교’라고 불렀으며 외래종교로 수용하고 대우하였다. 경교는 불교를 비롯한 타종교와 여러 면에서 융화하고 타협함으로써 ‘비경비불’(非景非佛·경교도 아니고 불교도 아니다)이라는 혹평까지 감수하고 당 조정의 공허를 얻어 전래한 이래 시종일관 조정을 위시한 관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세를 확대해 약 250년 동안이나 존재하였다. 그러나 종시 착근하지는 못하고 떠 있다가 ‘회창법란’(845)이라는 회오리가 불어오자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급기야 중원에서 쫓겨나 멀리 몽골을 비롯한 변방지대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일부 경교도들이 한반도와 인접한 만주 동남부 일대에 정착하게 되었다. 안산 일대에서 출토된 기독교 유물은 바로 이들이 남긴 유물일 것이다. 한편, 그들은 내왕이 빈번하던 인접국 신라에 그들의 종교(경교)를 전해 줄 수 있었으며 신라인들은 그들을 통해 처음으?기독교와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흔적이 바로 앞에서 열거한 기독교 관련 유물과 기록이다. 이와 같이 경교는 비문에 나타난 신관이나 성관, 구원관 등 기본 교리에 준해 판단하면 정통 기독교에 바탕한 고대 동방기독교이며, 굳이 지칭한다면 한역명(漢譯名)에 불과한 당식(唐式) 고대 동방기독교라고 할 수 있다. 당대 경교는 비록 페르시아 기독교라는 징검다리를 통해 네스토리우스파와 간접적으로 어떤 상관성을 갖고 있기는 하였으나 이단으로 모함된 네스토리우스파 그 자체이거나 그 동전 동문(同門)은 결코 아니다. 표면상 흥행했던 경교는 시종 외래적 이방 요소를 탈피하지 못한 채 지나치게 타종교와 타협하고 왕치위본주의적(王治爲本主義的)인 전도를 표방함으로써 250년간이란 짧지 않은 생존기간을 갖고도 토착하지 못하고 종당에는 중원에서 멸적하고 말았다. 이상과 같이 오늘날 동방에 전래된 초기 기독교인 경교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게 한 것은 ‘대진경교유행중국비’ 덕분이다. 781년 장안에서 서남쪽으로 150리쯤 떨어진 현 저우(周至)현 우췬(五群)성 대진사(大秦寺) 경내(일설은 장안 의녕방 대진사)에서 건조되었다가 1633년에 집을 짓기 위해 땅을 파던 한 인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이 비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 된 기독교비로서 경교를 포함한 고대 동방기독교를 연구하는 데 극히 귀중한 전거유물로 평가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일찍이 비의 진위 문제가 논의되고, 비의 밀반출 시도 같은 괴사(怪事)도 발생하였으며, 외지에서 모조비 건립 현상까지도 나타났다. 레거(J. Legge)는 비문에 예수의 기적이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기술이 없다는 것을, 셀스부리(E. Sailsbury)는 비문의 한자가 현대어라는 것을 이유로 비의 위조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 주장의 비합리성이 입증되면서 후크(L.Huc)나 골든(E.A. Goldon)·사이키 요시오(佐伯好郞) 등 많은 학자들은 위조설을 일축하고 비의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진실성이 정설로 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 덴마크 기자 홈(F.Holm)은 1907년 이 비를 3,000냥에 매입해 밀반출하려다 발각돼 실패했다. 그러자 그는 동질의 석재로 모조품을 만들어 뉴욕박물관으로 보냈다. 한편 기독교 동전사 연구의 권위자인 골든 여사는 일찍이 한국에 4년간 머무르면서 전국의 사찰을 역방한 후 마지막 1년은 금강산 장안사(長安寺)에 체류했는데 이때(1917) 그는 사내에 이 비의 모조비를 건립하였다. 그는 후일 일본 고우야(高野)산에도 똑같은 모조비를 세웠다. 고대 동방기독교의 동전을 기념하는 뜻에서였을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경교의 한국이나 일본 전파를 상징하는 의미에서였을 것이다. 정수일 1934년 중국 延吉 출생 중국 베이징대학 동방학부 졸업 이집트 카이로대학 석사(아랍사) 단국대 문학박사(동서교류사) 1995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2000년 8·15 대사면으로 가석방 저서 “신라 서역 교류사” “세계 속의 東과 西”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