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을 하고 2-3년후의 여행이었고, 그 당시 사진을 컴퓨터에 담아 놓았으나 몇 번의 바이러스
치료관계로 귀중한 사진들이 몽땅 날라가 여행과 관련된 사진을 싣지 못해 아쉬움이 큽니다.
저의 공예미술작업실 동산방과 관련된 사진 몇 장을 대신 올려봅니다.
<남도기행-1: 완도> 2003. 8. 3
나의 산촌 목공예작업실이 있는 홍천 어느 산자락을 출발하여 내리는 서울에 도착하니 9시가 좀 못된 시간이었습니다.
공릉동에 살고 있는 낚시친구의 아파트 입구에서 낚시도구와 간단한 여행장구를 싣고 일단은 남도의 섬을 향해서 가기위해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기로 했습니다. 북부간선도로를 들어서서 성산대교쪽으로 향해 가는데, 월요일이어서 그런가 어찌나 차가 밀리는지........
그때까지는 그래도 참을만 했습니다. 성산대교로 들어서야 하는데, 그만 잠깐사이 그쪽으로 진입을 못해 다시 서해안 고속도로를 가기위한 길로 진입을 하고자 영등포, 김포, 목동 근처를 헤맨 그때까지의 시간이 무려 3시간 이상이 걸렸었습니다.
진입로도 없었고, 서울 사람조차 이정표를 보고 찾으려 해도 이렇게 어려우니, 초행길의 운전자는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방송이나 매스컴에서 도로표지판이 잘못되었다, 도로체제가 잘못되었다 해도 牛耳讀經이니.......
어쨌던 천신만고 끝에 고속도로에 들어섰으나, 이제 좀 휴우~ 하고 마음을 놓으니, 아침을 먹지않고 와서 벼란간 커다란 시장끼를 느꼈습니다.
서해대교 휴게소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었습니다. 아마 2시가 다 된 시간이었던것 같습니다. 피서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더군요.
이쪽 길은 서해안 고속도로가 뚤리기 전엔 낚시길로 무척이나 많이 왔던 곳이기도 하지요.
아산만, 삽교호, 예산, 당진, 대호, 서산, 홍성, 태안, 안면도, 대천, 만리포 등....
고속도로가 개통이 되기 전까지는 아주 많은 시간이 걸렸었지요.
여행삼아 가는 길에 고속도로는 전혀 그 감흥과 재미가 없어서, 저는 주로 국도와 지방도로를 이용하는 편인데, 아침에 서울에서 워낙 시간을 많이 빼앗겨 고속도로를 가다가 적당한 곳에서 국도로 빠지기로 하였습니다.
대천에서 일단 국도로 빠져나와 시속 60키로 정도로 주변 풍광을 즐기며 남으로 가다가 군장 하구뚝, 부안을 거쳐 다시 고속도로로 들어서서 목포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즐거운 나들이가 되어야 하는 길이, 맞은 편 도로에 카니발인가 하는 차에 불이 붙어 거의 전소가 되다시피 뼈대만 남아 타고 있었고, 혹 폭발이라도 할까봐 경찰차가 뒤에 밀려있는 차들을 가지 못하게 막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아랫 쪽이라서 그런지 밀려있는 차의 행렬은 100미터도 되지 않았던것 같더군요.
왜 저지경이 되도록 운전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졸음 운전을 하지 않았나? 아니면 들뜬 휴가기분에 차의 정비를 소홀히 해서 과열이 되어 그런게 아니었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고없이 안전운행을 해야겠다는 경각심을 일깨워준 것이 되었지요.
거기서 다시 4차선국도로 잘 포장된 길을 따라 해남으로 향했습니다.
실은 옛부터 해남의 화원저수지, 개포지, 진도와 완도의 섬 안에 있는 저수지에서 민물낚시를 하고 싶었지만 시간과 거리가 여의치 않아 지금까지도 못하고 있기에 이번 기회에 단 몇 시간이라도 낚싯대를 담그고 싶었는데, 이번 낚시여행은 낚시친구를 위한 여행이기에 그 친구의 눈치를 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는 완도에서 배를 타고 보길도로 갈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낚시를 할 기회가 되면 해 보기로 하고, 일단 완도에서 일박하기로 여장을 풀고, 내일 아침 보길도로 들어가는 배편을 알아보기로 하였습니다.
하루 종일 내려오는 길이 비가 오락가락 하였는데, 저녁8시가 된 시간에도 비는 내리고 있었습니다.
완도의 시내 끝까지 들어갔다가, 바닷가 부두 같은 곳에 부두노조 건물에서 유턴하여 다시 숙소를 찾기로 하고 시내에서 숙소를 정하고 저녁을 먹으러 나갔습니다.
생각보다 완도에는 관광객이 별로 없었습니다.
완도로 들어오는 길에, 육지로 나오는 외지의 차량들이 많았었는데, 아마 완도 보다는 땅끝마을을 보고자 들어왔던 차들 같았고, 아마 숙소라든지 먹을 곳이 변변치 않아서 그런지 다시 목포나 광주로 나가는 차량들이 아닌가? 하고 친구와 추측을 해 보았습니다.
어쨌던, 무얼 먹을까? 이리 저리 기웃거렸는데, 음식점마다 별로 손님도 없고, 마땅히 완도의 맛있는 음식이 무언지 몰라 일단은 횟집으로 들어 갔습니다.
자연산 쥐치회가 맛있고 좋다는 주인의 말에 회와 세꼬시를 섞어 시켜 술을 한 잔 걸치니, 그제서야 여행의 여정이 시작되는 듯한 마음이 들더군요.
여행의 별미란 물론 각 지방의 특별한 음식의 맛을 보는 것도 즐거움이지만, 현지 주민들과 그 지방의 여러가지 얘기를 들어보는 것도 많은 각 지방의 풍습과 풍물을 아는데 도움이 되는 일이지요.
마침 손님도 없기에 주인장을 불러 합석을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왜 이 곳은 이렇게 한산하고, 땅끝마을로 들어가는 도로는 차들이 많으냐?" 했더니, "땅끝마을의 해남군수는 수완도 좋고 가지고 있는 관광자원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적극 홍보하여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는데, 이곳 완도군수는 그렇지가 못하다. 바로 옆의 땅끝마을과 보길도로 들어가는 그 많은 차량들을 보면 열불이 난다. 물론 요즈음 경기가 안좋아 장사가 안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땅끝마을에 관광객을 빼앗겨 더욱 장사가 안된다"며 울분을 토하고 있었습니다.
"완도에서는 개가 1원짜리 동전을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완도를 아예 "돈섬"이라 부르기도 했던 화려한 시절이 바로 엊그제 같았는데....
이런 말 들은 완도 사람들이 김농사를 지어 떼돈을 벌었음을 빗대어 하는 말들이었지요. 물론 지금도 완도는 김과 미역으로 명성을 유지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문헌에서 보면 완도군은 조선시대 말기 갑신정변 때에 이조판서 이도재가 이곳 고금도에 귀양왔다가 여덟 해 만인 1894년에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뒷날에 학부대신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 1896년 4월 1일에 군으로 승격시킨 곳이라 합니다.
완도 사람들은 그 때에 이도재의 은혜를 기려 완도읍 죽청리에 그의 송덕비를 세웠고, 이처럼 하나의 지역으로 묶인 지가 기껏해야 백년이 갓 넘는 형편이고 보면 이 군에 역사 유물이나 민속자료가 두드러지게 있지않은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 아닌가도 싶습니다.
그러나 완도의 아름다운 자연과 풍광은 제주도로 가는 길의 윤선도를 보길도에 묶어 놓을 만큼 천혜의 섬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잠깐, 완도와 장보고의 관계를 떼어놓을 수 없기에 그의 이야기를 좀 옮겨와야 하겠습니다.
<완도군의 역사가 보잘것 없게 된 것은 이 나라의 해상을 주름잡았던 통일신라시대의 장보고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졌다. 이 나라의 역사자료에는 그가 언제 태어났으며 또 어린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았다, 다만 완도읍 장좌리에서 태어나 일찌기 당나라에 건너가 그곳에서 무령군 소장 자리에 올랐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그가 무술에 뛰어났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는 어느 날 그곳 당나라에서 이 나라 서해 연안을 침범하여 납치하여 간 신라 사람을 노예로 내다파는 것을 보고 크게 분개하여 곧 벼슬자리를 내놓고 신라에 되돌아 왔다. 그리고 임금의 허락을 얻어 해적들이 이 나라 사람을 잡아가는 것을 막기위해 군사 만명을 이끌고 청해 곧, 지금의 완도읍 장좌리에 진을 쳤으니 이것이 곧 청해진이었다. 그리고 수병을 훈련시켜 해적을 완전히 무찔렀다.
그런데, 통일신라의 왕위 계승 다툼에서 패배한 우징이 제 목숨을 건지려고 837년에 청해진에 들어온 것이 계기가 되어 바다의 왕인 장보고는 정치 바람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장보고는 우징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통일신라 44대 임금인 민애왕을 죽였다. 그 사건으로 우징은 통일신라 45대 왕인 신무왕이 되었으나 왕위에 오른지 석달 만에 병으로 죽고 그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이 문선왕이 되었다.
반란을 성공시켰던 공으로 감의 군사라는 벼슬자리에 오른 장보고는 그 무렵에 청해진이 중국과 일본의 중간지점에 자리잡은 점을 이용하여 일본에 무역사절을 파견하는가 하면 당나라에도 무역사절인 견당 매물사를 보내어 이른바 삼각무역을 일으켰다. 이처럼 큰 힘을 가지게 되자 그는 그의 딸을 문성왕의 아내로 삼게 하려 하였으나 군신들의 반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이듬해에 조정에서 보낸 자객 염장의 칼에 맞아 죽었다.
워낙 세력을 떨치던 사람을 죽인 터라 신라 조정에서는 그 부하가 난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 하여 완도에 사람이 드는 것을 막았다. 또 851년에는 이곳에 살던 사람에게 모두 전라북도 벽골군, 곧 지금의 김제군 땅에 옮겨갈 것을 명령하였다. 그때부터 한 오백년 동안에 걸쳐 완도에는 사람의 발갈이 뚝 끊어졌다. 그 대신에 동백나무, 황철나무, 비자나무, 후박나무 같은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났고 그 사이로는 사슴, 노루, 고라니, 멧돼지 같은 야생동물이 마음껏 뛰어다녔다.
그 땅에 다시 사람이 들어와 살았던 것은 고려시대 공민왕 때인 1351년의 일이다. 그러나 그때는 지금의 완도군에 드는 완도와 그 밖의 여러 섬은 갈래갈래 나뉘어 강진군이나 장흥군, 게다가 남쪽바다에 자리잡고 있어 조정의 손길로부터 내팽개쳐지다시피 하여 이 섬 사람들은 당연히 이웃 뭍 지방 사람의 간섭과 구속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서 여기서 완도에 대한 역사적인 얘기는 즐이겠습니다.
지금의 장보고의 청해진 유적지는 너무나 초라하더군요.
지방자치 이후 전국의 각 지방에서는 보잘것도 없는 것들을 침소봉대하여 겉만 요란하게 떠벌이며 과대포장하는 짓거리들에 실소를 금치 못하지만, 단체장의 자질과 능력에 따라 이렇게 관광자원을 자기지방의 수익을 위하여 활용하느냐 못하느냐에 많은 차이가 있음을 느꼈습니다.
밤늦게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다시금 시원한 맥주를 한 잔하고 잠자리에 들려 하니까, 너무 오랜만에 장시간의 운전을 해서 그런지 몸전체가 진동에 의해 부르르 떨리는 듯한 느낌으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비오는 밤이었지만, 남도의 한 섬에서 처음 맞는 무더운 여름밤이었습니다.
<무더운 여름밤>
무더운 여름밤
밤에 익은 애인들이 물가에 모여서
갈수록 외로워지는
긴 이야길 하다간, 밤이 깊어서
장미들이 잠들어버린 비탈진 길을
돌아들 간다
마침내 먼 하늘에 눈부신 작은 별들은
잊어버린 사람들의 눈
무수한 눈알들처럼 마음에 쏟아지고
나의 애인들은 사랑보다 눈물을 준다
내일이 오면 그 날이 오면
우리 서로 이야기 못한 그 많은 말들을
남긴 채
영 돌아들 갈 고운 밤
나의 사랑들이여
이별이 자주 오는 곳에 나는 살고
외로움과 슬픔을 받아주는 곳에 내가 산다
무더운 여름
밤이 줄줄 쏟아지는 물가에서
이별이 서러운 애인들이 밤을 샌다
별이 지고
별이 뜨고
- 조병화님의 시집 "사랑이 가기 전에" 중에서 -
낚시친구와 시샘하듯 코를 많이 골아, 그 소리에 서로의 잠을 깨다 말다 하면서 아침을 맞아, 부랴부랴 세수를 하고 선착장으로 향했습니다.
보길도의 윤선도, 미역을 사는 이야기로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