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것은 가짜다' 라는 정민 선생이 쓴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번역한 책입니다.
최고의 문장가로 불리우는 연암이 보는 사물에 대한 독특한 시각과 원문 밑에 있는 정민 선생의 정리된
생각이 같이 있어 논술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정민 선생은 '연암의 글은 한 군데 못질한 흔적이
없는데도 꽉 짜여져 빈틈이 없다. 그의 글은 난공불락의 성채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어려운 한자는 음도 붙여놓고 해서 읽는데 무리는 없을겁니다,
첨부화일에는 주석도 같이 나오니, 다운 받아서 볼 것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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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는 살아 있다. 코끼리의 기호학
象記
≪장차 괴상하고 진기하고 대단하고 어마어마한 것을 보려거든 먼저 선무문(宣武門) 안으로 가서 코끼리 우리를 살피면 될 것이다. 내가 황성(皇城)에서 코끼리 16마리를 보았으나, 모두 쇠로 만든 족쇄로 발이 묶여 있어 그 움직이는 것을 보지 못하였었다. 이제 열하(熱河) 행궁(行宮)의 서편에서 코끼리 두 마리를 보매, 온몸을 꿈틀대며 움직이는데 마치 비바람이 지나가는 듯하였다.
내가 일찍이 새벽에 동해 가를 가다가 파도 위에 말 같은 것이 수도 업이 많이 서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모두 봉긋하니 집과 같아 물고기인지 짐승인지 알지 못하겠길래 해 뜨기를 기다려 자세히 보려 했더니, 막상 해가 바다 위로 떠오르려 하자 파도 위에 말처럼 섰던 것들은 하마 벌서 바다 속으로 숨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제 열 걸음 밖에서 코끼리를 보고 있는데도 오히려 동해에서의 생각이 떠올랐다.
그 생김새가 몸뚱이는 소인데 꼬리는 나귀 같고, 낙타 무릎에다 범의 발굽을 하고 있다. 털은 짧고 회색으로 모습은 어질게 생겼고 소리는 구슬프다. 귀는 마치 구름을 드리운 듯하고, 눈은 초승달처럼 생겼다. 양쪽의 어금니는 크기가 두 아름이나 되고 길이는 한 자 남짓이다. 코가 어금니보다 더 길어서 구부리고 펴는 것은 자벌레 같고, 두르르 말고 굽히는 것은 굼벵이 같다. 그 끝은 누에 꽁무니처럼 생겼는데, 마치 족집게처럼 물건을 끼워가지고는 말아서 입에다 넣는다.
혹 코를 주둥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어, 다시금 코끼리의 코가 있는 곳을 찾기도 하니, 대게 그 코가 이렇게 길 줄은 생각지도 못하는 것이다. 간혹 코끼리는 다리가 다섯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다. 혹은 코끼리는 눈이 쥐 눈과 같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대게 온 마음이 코와 어금니 사이로만 쏠려서 그 온 몸뚱이 가운데서 가장 작은 것을 좇다 보니 이렇듯 앞뒤가 안 맞는 비유가 있게 된 것이다. 대게 코끼리의 눈은 몹시 가늘어 마치 간사한 사람이 아양을 떨 때 그 눈이 웃음을 먼저 치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그 어진 성품이 바로 이 눈에 담겨 있다.
강희(康熙) 때에 남해자(南海子)에 사나운 범 두 마리가 있었다. 오래되어도 능히 길들이지 못하자, 황제가 노하여 범을 몰아다가 코끼리 우리로 들여보낼 것을 명하였다. 코끼리가 크게 놀라 한 번 그 코를 휘두르매 범 두 마리는 그 자리에서 죽어 버렸다. 코끼리가 범을 죽일 마음은 없었는데, 냄새나는 것을 싫어하여 코를 휘두른다는 것이 잘못 맞았던 것이었다.
아아! 세간의 사물 가운데 겨우 털끝같이 미세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늘을 일컫지 않음이 없으나, 하늘이 어찌 일찍이 일일이 이름을 지었겠는가? 형체를 가지고 ‘천(天)’이라 하고 성정을 가지고는 ‘건(乾)’이라 하며, 주재함을 가지고는 ‘제(帝)’라 하고, 묘용(妙用)을 가지고서는 ‘신(神)’이라 하여, 그 부르는 이름이 여러 가지이고 일컬어 말하는 것도 몹시 제멋대로이다. 이에 이기(理氣)로써 화로와 풀무로 삼고, 펼쳐 베풂을 가지고 조물주라 여기니, 이것은 하늘 보기를 교묘한 장인(匠人)으로 보아 망치질하고 끌질하며, 도끼질과 자귀질하기를 잠시도 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주역>에서 “하늘이 초매(草昧), 즉 혼돈을 만들었다.(天造草昧)”고 하였는데, 초매라는 것은 그 빛이 검고 그 모습은 흙비가 쏟아지는 듯하여, 비유하자면 장차 새벽이 오려고는 하나 아직 새벽은 되지 않은 때에 사람과 사물을 분간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캄캄하여 흙비 내리는 듯한 가운데에서 하늘이 만들었다는 것이 과연 어떤 물건인지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하겠다. 비유컨대 국수집에서 밀을 갈면 가늘고 굵고 곱고 거친 것이 뒤섞여 땅으로 흩어진다. 대저 멧돌의 공능은 도는 데 있을 뿐이니 애초부터 어찌 일찍이 곱고 거친 것에 뜻이 있었겠는가?
그런데도 말하는 자들은 “뿔이 있는 놈에게는 윗니를 주지 않는다”고 하여 마치 사물을 만듦에 모자란 것이라도 있는 듯이 여기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감히 묻는다.
“이빨을 준 것은 누구인가?”
사람들은 장차 말하리라.
“하늘이 주었다”
다시 묻는다.
“하늘이 이빨을 준 것은 장차 이것으로 무엇을 하게 하려 한 것인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리라.
“하늘로 하여금 물건을 씹게 하려는 것이다.”
다시 묻는다.
“이로 하여금 왜 물건을 씹게 하는가?”
그들은 또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것은 대저 이치이다. 새나 짐승은 손이 없으므로, 반드시 부리나 주둥이로 숙여서 땅에 닿게 하여 먹을 것을 구한다. 때문에 학의 다리가 높고 보니 목이 길지 않을 수 없는데, 그래도 혹 땅에 닿지 않을까 염려하여 또 그 부리를 길게 만든 것이다. 진실로 닭의 다리를 학처럼 만들었더라면 반드시 뜰 가운데서 굶어 죽었을 것이다.”
나는 크게 웃으며 말하리라.
“그대가 말하는 이치란 것은 소나 말, 닭이나 개에게나 해당할 뿐이다. 하늘이 이빨을 준 것이 반드시 고개를 숙여 물건을 씹게 하려는 것이라고 치자. 이제 대저 코끼리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어금니를 심어주어 장차 땅으로 숙이려고 하면 어금니가 먼저 걸리게 되니, 이른바 물건을 씹는 것이 절로 방해되지 않겠는가?”
어떤 이는 말하리라
“코를 의지하게 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나는 말한다.
“그 어금니를 길게 해 놓고 코를 의지하느니, 차라리 어금니를 뽑아 버리고서 코를 짧게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제서야 말하던 자는 처음의 주장을 능히 굳게 지키지 못하고 배운 바를 조금 굽히게 되리라.
이것은 마음으로 헤아려 미치는 바가 오직 소나 말, 닭이나 개에만 있지 용이나 봉황, 거북이나 기린에게까지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코끼리가 범을 만나면 코로 쳐서 이를 죽이고 마니 그 코는 천하에 무적이다. 그러나 쥐를 만나면 코를 둘 곳이 없어 하늘을 우러르며 서 있는다. 그렇다고 해서 장차 쥐가 범보다 무섭다고 말한다면 앞서 말한 바의 이치는 아닐 것이다.
대저 코끼리는 직접 눈으로 보는데도 그 이치를 알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은데 또 하물며 천하 사물은 코끼리보다 만 배나 됨에랴! 그런 까닭에 성인께서 <주역>을 지으실 적에 ‘상(象)’을 취하여 이를 드러내었던 것은 만물의 변화를 다하게 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몇 해 전 일이다. 강의 시간에 연암의 글을 강독하고서 평설을 써오는 과제를 내준 적이 있다. 한 학생이 과제 끝에 쓴 “장미는 예로부터 그 이름으로 존재해 왔으나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영락한 이름뿐”이라는 구절이 내 시선을 끌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인용한 대목이었다. 에코의 이 책에는 연암의 코끼리 이야기와 아주 비슷한 내용의 글이 실려 있다.
듣거라, 아드소. 수수께끼 풀이는, 만물의 근본되는 제1원인으로부터 추론해낸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특수한 자료를 꾸역꾸역 모아 들이고 여기에서 일반 법칙을 도출하면 저절로 풀리는 것도 아니다.………뿔이 있는 짐승의 예를 들어 보자. 왜 짐승에게 뿔이 있겠느냐? 뿔이 있는 짐승에게는 윗니가 없다. 아직 모르고 있었다면 유념해 두어라. 그런데 윗니도 없고 뿔도 없는 짐승이 있으니 낙타가 바로 이런 짐승이다. 윗니가 없는 짐승에게는 위가 네 개라는 것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너는 이빨이 없어서 제대로 씹을 수 없으니까 이런 짐승에게는 위가 네 개나 있어서 소화를 도모하는구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여기까지는 너도 상상할 수 있고 추론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뿔은 어떨까? 너도, 짐승의 머리에 뿔이 자라는 이유를 상상할 수 있을 게다. 머리에 골질조직(骨質組織)을 솟아나게 함으로써, 부족한 이빨의 수를 보충하는 모양이구나 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충분한 설명이 못된다. 낙타에게는 윗니가 없다. 윗니가 없으면 위가 네 개 있고 뿔이 있어야 마땅한데, 위가 네 개인 것은 분명하지만 뿔은 없다. 따라서 이것은 다른 방법으로 설명해야 한다. 방어 수단이 없는 짐승의 머리에만 몸속의 골질이 뿔로 자라난다. 그러나 낙타의 가죽은 몹시 두껍다. 따라서 낙타에게는 뿔이라고 하는 방어 수단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면 여기에는 어떤 원칙이 있을 수 있다고 해야겠느냐.………자연 현상에서 하나의 법칙을 이끌어 내자면 우선 설명되지 않는 형상에 주의하면서,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갖가지 일반적인 법칙을 서로 연계시켜 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뜻밖의 결과들이 특수한 상황에서 서로 관련되는 데서 혹은 여러 법칙을 두루 싸잡는 하나의 실마리가 잡혀 나온다. 이 실마리를 유사한 경우에 두루 적용시켜 보거나, 다음 발전 단계를 미루어 헤아려 보면, 마침내 자기 직관이 옳은지 그른지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이윤기 옮김, <장미의 이름> 하권 , 열린책들 1992.483면)
연암이 우리에게 던지는 첫 번째 화두는 코끼리이다. 흥미롭게도 에코는 낙타라는 기호를 가지고 연암과 비슷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코끼리나 낙타라는 기호가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소나 말, 개나 돼지에만 익숙해진 눈에 코끼리나 낙타는 언뜻 이해할 수 없는 의미들로 가득 차 있다. 위 에코의 인용은 혼란스런 기호들 속에서 ‘하나의 법칙’에 접근해 가는 인식의 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앞선 연암의 문답과는 주객의 자리가 바뀌어 있다. 앞서 연암의 글에서 ‘하늘의 이치’를 들먹이며 예외적 존재를 인정치 않으려다 연암에게 공박당하는 ‘설자(說者)’의 태도는 윌리엄 수도사에게서 더욱 세련된 논리를 갖추고서 마침내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기에 이른다. 나는 여기서 동서양 사고의 한 차이를 읽는다.
이제 연암의 글을 따라가면 읽어 보기로 한다. 소나 말, 닭이나 개만 보며 평생을 살아온 시골 사람이 코끼리를 난생 처음 보았다면 그 느낌은 어떠했을까? 사진으로도 보지 못했고, 그림으로도 보지 못하다가 어느 날 문득 만리타국의 동물원 우리 속을 어슬렁거리며 왔다갔다 하는 코끼리의 모습과 처음 마주 했을 때, 그 느낌은 어떠했을까? 연암은 그 느낌을 괴상하고 진기하고 거대하고 한마디로 어마어마한 그 무엇이라고 했다. 그저 걸어가는데도 마치 비바람이 지나가는 듯하다고 했다.
이어서 그는 엉뚱하게도 젊은 시절 금강산을 유람하러 갔다가 동해에서 일출을 맞이하던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일출 직전 먼 바다 위로 둥글둥글 집채인 양 수도 없이 서 있던, 물고기인지 짐승인지도 분간이 안 되던 신기루, 연암은 바로 열 걸음 앞에서 육중한 걸음을 옮기고 있는 코끼리가 마치 일출과 함께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던 허깨비는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더라고 했다. 코끼리를 처음 상면한 충격은 이렇게 해서 일단 진정의 국면으로 들어선다.
그 다음 단락은 코끼리의 외모에 대한 묘사이다. 코끼리를 한 번도 보지 못한 독자를 위해 누구나 알고 있는 사물에 견주어 코끼리의 각 부분을 친절하게 그려 보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관심은 쓸데없이 긴 어금니, 자벌레 같고 굼벵이 같고 누에의 꽁무니 같고 족집게 같은 코로만 집중되어 있다.
코로 물건을 집으니 그것이 주둥이인가 싶어 코는 어디 있는가고 묻는 이도 있다. 아예 그 긴 코를 다리 쯤으로 여기기도 한다. 덩치는 집채만 한 게 눈은 쥐눈처럼 조그맣다. 그럴 리가, 워낙에 덩치가 크고 코와 어금니가 희한하다 보니, 그 위에 붙은 눈이 적게 보인 것일 뿐이다.
그 살살 웃는 듯한 작은 눈에서 어진 성품을 읽어내던 연암은 대뜸 사나운 범 두 마리를 일격에 쓰러뜨리는 코끼리의 완력으로 화제를 돌린다. 사나워 길들이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것도 한 마리도 아닌 두 마리의 난폭한 범이 코끼리가 휘두른 코 한방에 즉사해 버렸다고 하니, 다시금 독자들은 코끼리의 어마어마한 크기와 긴 코의 위력을 상상으로 그려볼밖에 도리가 없다. 더욱이 애초에 죽이려던 것도 아니고 냄새가 싫어 그저 허공에 대고 휘두른다는 것이 빗맞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천하의 그 많은 사물들은 누가 만들었을까? 하늘이 만들었는가? 연암은 사뭇 그럴 리가 없다는 투다. 천하 만물을 만들었다는 하늘도 이름이 여러 가지다. 생긴 모양을 본떠서는 ‘천(天)’이라 하고, 하늘은 굳건하기에 성정으로 말할 때는 ‘건(乾)’이라 한다. 하늘의 주재자는 누구인가? 그를 일러 사람들은 ‘제(帝)’라고 한다. 그 오묘한 섭리와 작용을 이를테면 ‘신(神)’으로 일컫는다. 한 가지 하늘을 두고도 이같이 많은 이름으로 부른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조물주가 이기(理氣)로 결합하고 형상을 품부(稟賦)하였다 하여, 마치 하늘이 교묘한 공장(工匠)이 되어 일일이 망치질하고 끌질하고 도끼질하고 자귀질하여 온갖 만물을 직접 만들기라도 한 듯이 여긴다.
그러나 그런가? <주역>에서는 분명히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늘이 만든 것은 ‘초매(草昧)’ 즉, 혼돈일 뿐이라고. 정작 하늘이 만들었다는 것은 하늘과 땅이 아직 갈려지지 않은 천지미판(天地未判)의 상태, 보다 생생하게 말하며 새벽이 오기 직전 아무것도 구별할 수 없는 태초의 적막한 어둠 뿐이라고 <주역>은 적고 있다. 그렇다면 하늘이 만들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개인가? 돼지인가? 아니면 코끼리인가? 하늘이 만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하늘은 멧돌이 통밀을 갈아 때로 가늘게, 이따금 굵게, 곱고도 거칠게 땅으로 흩뿌려 놓듯, 그 날리는 가루 이상으로 헤아릴 길 없는 사물들을 이 세상 위로 제각금 흩어 놓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온갖 사물들 속에서 저 푸른 하늘을 주재하는 존재가 섭리하는 모종의 이치를 찾아내고자 한다. 거기서 그들이 찾아내는 진리란 대체로, ‘뿔이 있는 짐승은 윗니가 없다’ 거나, ‘날개가 있는 것은 다리가 두 개 뿐이다.’ 와 같은 것들이다.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거나, ‘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늘이지 마라’는 식이다. 그들은 또 닭의 다리가 학의 다리처럼 길지 않은 데서 조물주의 오묘한 섭리를 발견하곤 쉽게 감동해 마지 않는다.
그런데 코끼리는 이러한 일반적 규칙 어느 것으로 보더라도 맞지가 않으니 어찌할까? 코끼리의 어금니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코끼리는 왜 코가 저다지도 긴가? 어금니가 길기 때문에 걸리지 말라고 코가 긴 것일까? 그렇다면 차라리 어금니를 없애고 코를 짧게 해 주는 것이 코끼리를 위하는 길이 아닐까? 조물주는 왜 코끼리에게 저런 장난을 쳤을까? 거기에 무슨 이유라도 있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내 눈으로 보아 아는 세계의 하찮은 지식을 가지고 세상의 온갖 진리를 꿰뚫으려 하는 노력은 코끼리 앞에 서면 무력해지고 만다. 코끼리만 예외로 해 놓고 그냥 넘어 갔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고민스럽다. 그 사나운 범 두 마리를 일격에 쓰러뜨린 코끼리의 그 코도 조막만한 새앙쥐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코끼리의 코 속으로 쥐가 들어가면 코끼리는 그만 미쳐 날뛰다 죽는다. 자! 사나운 범은 코끼리 앞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 그렇다면 생앙쥐는 범보다 위대한가? 이것을 수긍할 수 없다면, 대저 저 하늘의 일정한 섭리란 것은 과연 있기는 한 것인가?
하늘의 섭리는 없다. 고정불변의 이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물은 제각금 살아 숨쉰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가 있고,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있다. 내가 알지 못한다 해서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들지 말아라. 지금 내 눈앞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저 코끼리야말로 그 살아 있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우리가 천지만물의 주재자라고 믿는 하늘을 두고도 우리는 필요에 따라 천(天) , 건(乾) , 제(帝) , 신(神) 등의 다른 이름을 붙이지 않았던가?
같은 하늘이로되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워지듯, 한 가지 사물 안에도 온갖 이치가 깃들어 있다. 나는 코끼리를 통해 세계와 만난다. <주역>의 괘(卦)는 각각의 ‘상(象)’으로 형상화된다. 그런데 그 괘상의 결합은 미묘하고도 복잡하여 일괄하여 말하기 어려운 무수한 ‘변상(變象)’들을 만들어낸다. 이미지를 나타내는 ‘상(象)’이란 글자가 코끼리 ‘상(象)’자이기도 한 것은 무슨 심오한 관련이 있는가? 그것은 성인의 뜻이라 가늠할 수가 없다.
연암은 예외를 인정치 않으려는 태도를 수긍하려 들지 않는다. 사실 ‘하늘의 이치’란 것도 ‘하나의 법칙’이란 것도 인간이 지어 낸 허상에 불과하다. 사물들은 살아 있다. 그것은 하나의 법칙으로 가둘 수가 없다. 하늘의 이름이 부르는 이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달라지듯이, 사물의 질서는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하나의 기호는 하나의 진실만을 담고 있지 않다. 나는 그 기호를 통해 세상과 만난다. 기호와 기호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는 없다. 기호는 살아 있다. 코끼리는 살아 있다.
나는 이 글을 쓰는 내낸 연암의 <상기(象記)>를 에코가 읽었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언제나 세상은 실체는 간데없고 기호만이 괴력을 발휘해 왔다. 기호가 말씀이 되고 권력이 되어 살아 숨쉬는 사물의 생취(生趣)를 억압해 왔다. 기호와 세계 사이의 불균형과 간극은 영원히 메워질 수 없는 것인가?
살펴본 대로 연암의 <상기(象記)>는 획일화된 가치 척도로 세계를 규정코자 하는 결정론적 세계관에 대한 거부의 뜻을 담아내고 있다. 우연히 열하 행궁에서 만난 코끼리를 앞에 두고, 인간의 사변적 지식이란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만고불변의 진리란 것이 어째서 이토록 허망한가를 그는 생각하고 있다.
物像의 세계는 햇볕에 비친 까마귀의 날갯빛과도 같아 잡아 가두려고 하면 금세 달아나버린다. 이미지는 살아 있다. 내 손끝이나 눈길이 닿을 때마다 그것들은 경련한다. 살아있는 이미지들 속에서만이 삶의 정신은 빛을 발한다. 화석화된 이미지는 더 이상 이미지일수가 없다. 이것이 코끼리를 앞에 세워 놓고 연암이 21세기의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