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 라 하 투 어
(2박 3일 코스)
안녕하헤요..^^
프라하 아찌입니다.
중세의 아름다움이 넘치는 곳 체코 프라하
알고 떠난는 프라하 여행 나도 이제는 가이드다
아찌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담아 습니다.
프라하 밥퍼아점마네 가족분들
아름다움이 넘치는 프라하여행 즐겁게하세요.
*** 꼭~~~~~~댓글 부탁.....요 *** 추천 클릭..
PRAHA 소지구, 구시가지, 신시가지 투어
- 코스 -
1. 페트신 공원
2. 스트라호프 수도원 http://www.strahovskyklaster.cz
3. 로레타 성당 http://www.ioreta.cz
4. 프라하 성 및 성 주의 http://www.hrad.cz
5.소지구 성 니콜라스 성당 주의 http://www.psalterium.cz
6. 카렐교, 카렐교 주위
7. 국민극장 http://www.nd.cz
8. 구시가 광장, 광장 주위
9. 시민회관, 화약탑 http://www.obecnidum.cz
10. 바출라프 광장 http://www.nm.cz
11. 비셰흐라드 http://www.praha-vysehrad.cz
1. 페트신 공원
318m의 고도에 조성된 이 공원은 페트르진 언덕의 초목이 우거진 비탈에 자리하고 있다.
페트르진 이라는 이름은 두가지 유래를 갖고 잇다.
ㄱ) 슬라브의 신페룬에서 비롯되었다는 설.
ㄴ) 바위언덕 이라는 뜻의 라틴어 몬스 페트리누스에서 생겨났다는 설이다.
페크르진 언덕의 숲은 이 공원에서부터 백산까지 펼쳐져 있다.
12세기에 공원의 남쪽면이 포도밭으로 개간되기도 했지만, 13세기에는 정원이나 과수원으로 옮겨졌다.
이 일대의 구릉은 아직도 오래된 사과나무와 배나무로 뒤덮여 있다.
페트르진을 휘감듯이 이어진 길을 따라 오르면 프라하의 장엄한 광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이 공원은 과일 나무들이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 때에 특히 인기가 있다.
?은 연인들은 1836년에 26세의 나이로 요절한 체코의 낭만파 시인인 카렐히네크 마하의 기념비에 헌화하기도 한다.
페트르진 언덕에 성벽은 카렐4세 시절 심한 기근이 들자 배고픈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줄 목적으로 건설한 대서 유래되어 불리는 애칭(기아의 벽, 허기의 벽)은 수세기동안 알려졌다.
1360년 ~ 2년에 걸쳐 완공 성벽에 길이는 1200m
2. 스트라호프 수도원
페트르진 언덕의 전망좋은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이곳은 1140년에 프리몬스트라텐시안이라는 금욕주의 종교교단에서 건립했다.
하지만 그 때 스트라호프의 크기는 체코국 영통 필적할 만한 것이었다.
1258년에 일어난 화재로 파괴된 후 고딕양식으로 재건축되었으며, 나중에 바로크 양식이 첨가되었다.
수도원의 신한, 종교관, 800여년 된 유명한 도서관에는 수만여권의 고서가 보관되었다. 지금은 수도원이자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수도원으로 현재까지도 옛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고, 철학관과 신학관의 엄청난규모와 화려함 철학관 천장의<진실을 알기위한 인간의 투쟁>이라는 제목의 프레스코화도 빼놓을 수 없다.
3. 로레타 성당
1626년에 건설된 이후 지금까지 중요한 순례지로 남아 있다.
카데리나 로브코위츠의 위탁을 받아 지어졌는데, 그녀는 로레타의 산타 카사 전설에 관심이 많은 체크 귀족이었다.
건물 중심부는 성모 마리아가 살았던 집으로 전해지고 있는 건물을 본따서 지었다.
1661년에 산타 카사 주변을 회랑으로 둘러쌌으며, 그로부터 60년뒤에는 크리스토르와 킬리안 이그나즈 디엔첸호퍼에 의해 바로크 식 건물정면이 세워졌다.
웅장한 디자인과 로레타에 대한 기적적인 이야기를 내세워 페르디난트 2세는 체코를 다시 카톨릭 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 산타 카사의 전설
원래의 집은 로레타라는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 있다.
바로 이 집에서 천사장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앞으로 예수가 탄생할 것임을 아려주었다고 전해진다.
1278년에 이교도의 위헙 때문에 천사들이 이 집을 로레타에서 나자렛으로 옴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1620년에 프로테스탄트가 패배한 이루 카톨릭측이 이 전설을 크게 퍼트렸으며,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로레타를 모방한 집이 50여채나 지어졌다.
그 가운데 프라하에 이 산타 카사가 가장 웅장하다.
건물 2층에 전시되어 있는 6222개의 다이아몬드가 박혀있는 “프라하의 태양”이라는 별명을 가진 성체대등이 눈길을 끈다.
로레타 종탑에는 27개의 종이 걸려있다.
4. 프라하성 및 성 주위
- 프라하 성 의회회관
1965년 오래된 마사를 개조하여 만든 이 전시관은 루돌프 2세 치하 때부터 모은 미술품을 소장할 목적으로 지어져다.
1648년에 스웨덴의 침공으로 멋진 작품들을 대부분 약탈당했으나 흥미로운 그림들이 많이 남아 있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제작된 회화작품이 대부분이며 조각품도 약간 있다.
조각 중에는 아드리앤 드브리에스가 만든 루돌프 2세의 흉상 목작이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티티안의 “?은 부인의 몸단장” 루벤스의 “올림픽 신들의 회합” 귀도 레니의 “데이아네이라를 유괴하는 반인마 네수스”등이 있다.
이밖에 마스터 테오도록 파울로베로니스, 틴토레토 체크의 바로크 예술가인 얀 쿠페키이 대표적인 화가들이다.
국립 미술관에는 루돌프의 멋진 그림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프라하성에는 최초로 지어진 교회인 9세기 성모 마리아교회의 유적지도 볼 수 있다.
이 교회는 르레미술리드 가의 왕자로는 최초로 기독교 세례를 받은 보리보위왕자가 세운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 유적지는 마사 개축 중에 발견되었다.
- 화약답
1469년 블라디슬라브 2세의 건축가 베네딕트리에드에 의해 지어진 이 탑은 스태그 해자를 굽어보는 대포 요세였다. 본래의 건물은 1549년에 야로스는 프라하에서 가장 큰 종을 만들었다. 18톤짜리 이 종의 이름은 시기스모트이며, 성 비투스 성당의 종탑에 매달렸다.
루돌프 2세의 통치기간 (156년~1612년)중 이 탑은 연금술사의 연구실이 되었다.
에드바르트 캘리 같은 모험가가 납을 금으로 만들 수 있다고 왕에게 확신시킨 곳도 바로 이 곳이다.
1649년에 스웨덴 군이 프라하 성을 함락시켰을 때 이 탑에서 화약이 폭발하여 엄청난 손상을 끼쳤다.
이후에도 계속 화약창고로 쓰이다가 1754년에 성 비투스 성당 성몰 보관인의 거주지로 개조되었다.
1960년대에 와서야 이 건물은 야로스의 종 주소와 루돌프 2세 치하에 시행되었던 연금술 등과 관련된 물품을 전시하는 박물관이 되었다.
- 황금소로
17세기에 금세공인들이 이 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불었다.
짧고 좁은 이 길은 프라하에서 특히 아름다운 거리 중 하나다. 길 한편에다 성벽의 아치에 붙박이로 지어진 이 집들은 1500년대 후반에 24명의 성수비대원의 숙소로 쓰였다.
1세기 후에는 금세공인들이 이주해 와 건물을 개축했다.
그 후 프라하의 빈민들과 범죄자들이 모여 사는 빈민가로 전락했다.
1950년대 간 이후부터 본래의 상태를 어느 정도 회복해갔다.
지금은 대부분의 집들이 책이나 보헤미아의 기념품을 파는 상점으로 바뀌었다.
황금길은 노벨상 수상 시인인 야로 슬라브 세이페르트를 비롯한 몇몇 유명 작가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프란츠 카프카도 1916년~1917년 사이에 그의 누이와 함께 22번지에서 살았다.
“황금소로‘이라는 거리이름 때문에 루돌프 2세를 위해 금을 만들여는 연금술사들이 몰려들었다는 전설이 널리 퍼져있다. 실제로 연금술사들은 성 비투스 성당과 화약탑 사이의 작은 길은 비카르스카에 연구실을 가지고 있었다. 황금소로가 끝나는 23번지에는 성곽 수비길로 통하는 계단 이 있다. 계단에서는 예쁜 기념품, 옆서, 안내책자를 팔고있다.
이 계단을 내려가면 메트로 A선 말로스트란스까 역으로 이어지며, 구시가로 가는 트램을 탈 수 있다.
- 프라츠 카프카
유대인으로 체코에 살면서 독일어를 구사했던 카프카 1883년 부유한 상인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자수성가하여 정열적이고 실제적인 아버지의 성격은 예민하고 연약한 카프카에게 극복 될 수 없는 깊은 아픔과 소외감을 안겨주었다.
문학적 꿈을 뒤로 하고, 아버지의 권유로 근로자상해보험원으로 취직하여 발병하기 전까지(41살에 폐결핵으로 사망)근무했다. 당시 유럽은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카프카는 모순이 가득한 현실에서 자신의 정체성 및 실존의 문제에 부딧힌다.
어디에도 없는 자신과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 두 자아는 그에게(실종자, 변신, 심판)같은 작품을 남기게 한다. 한 여인과 세 번이난 약혼과 파혼을 반복하는 등 사람과 원할한 교류를 맺지 못했는데 어린 여동생 오트라와는 정신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졌으며 대학 친구인 막스 브로트는 평생의 친구가 된다.
카프카는 죽으며 자신의 유고를 모두 태워달라고 브로트에게 유서를 남겼으나 브로트는 차마 태우지 못하고 그의 유고를 모아 출판한다.
(성, 소송)과 같은 작품은 하마터면 영원히 사라질 뻔했다.
카프카는 프라하의 여기저기를 옮겨다니며 살았으나, 프라하를 떠난적이 거의없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산 사람들은 말한다. “카프카는 프라하이며 프라하는 카프카이다.
우리는 프라하의 구석구석에서 그의 모든 작품의 파편들을 만날 수 있다.
- 성비타 성당
성 비투스 성당은 프라하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지표다.
1344년에 카렐 4세의 명에 따라 지어지기 시작해대, 제일 처음 설계를 맡았던 건축가는 프랑스 인 매티유였다. 매티유가 죽은 뒤에는 슈바벤 사람인 페터 파를러가 인계받았다.
공사는 후스 전쟁때까지 계속되었다.
19세기와 20세기 건축가와 미술가들에 의해 마침내 완공된 이 성당에는 성왕 바출라프의 왕관 보석과 무덤이 보관되어 있다.
이 성당을 거닐면 천 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기분이 들 것이다.
서쪽 정문을 통해 들어가 현대 또는 신 고딕 양식의 최고 미술품들을 감상하고, 이어 부속예배당을 지나가면서 현대 조각에 이르는 다양한 미술품들을볼 수 있다. 14세기 황금 문을 통해 성당을 빠져나가기 전에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한 성 바출라프 예배당에 들러 충분히 감상해 보기 바란다.
- 알폰스 무하 창문
이 성당에는 20세기에 제작한 멋진 스테인드 글라스가 많다.
특히 성 치릴과 성 에소디우스를 묘사한 작품이 주목할 만하다.
- 성상 안치소
이 성단소는 1372년부터 페터 파를러에의해 지어졌다.
높이 치솟은 둥근 천장과 복잡하게 짜인 고딕식 격자창으로 유명하다.
- 성 존 네포무크의 무덤
1736년에 은으로 만들어진 이 정교한 무덤은 반개혁 종파의 핵심인물이었던 존 네포무크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 왕의 기도실
15세기 후기 고딕 양식으로 된 이 기도실의 천장은 나뭇가지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 지하 납골당
초기 로툰다와 비실리카뿐 아니라, 카렐 4세와 그의 네 부인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왕릉
내려가는 계단이다.
- 왕릉
페르디난트 1세는 154년에 죽었다.
그의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막시밀리안 2세가 이 왕릉에 함께 묻혀있다.
브
- 성 벤체슬라 예배당
성서의 여러 장면과 성인의 생애를 담은 고딕실 프리스코가 걸려있다.
벽은 빛나는 보석과 화려한 도금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장실물 하나한가 모두 미술 작품이다.
- 왕궁
11세기에 처음 요새화 될 때부터 프라하 성은 보헤미아 왕자들의 거처로 쓰였다.
검물은 3개층으로 되어있다.
1135년경 소베슬라프 1세에 의해 지어진 로마네스크 궁전은 현재 건물의 지하층을 이루고 있다. 그 위에 프레미슬 오카르 2세와 카렐4세가 자신들의 궁전을 증축했다.
블라디슬라프 야기엘로를 위해 지어진 꼭대기 층에는 장대한 블라디슬라프 홀이 있다.
합스부르크 통치 기간에는 이 궁전에 정부 청사와 법정, 구 보헤미아 의회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1924년에는 대대적인 개축이 이루어졌다.
- 창밖으로 사람들을 내던진 사건
1618년 5월 23일에 투른 백작이 이끄는 100여명의 신교도 귀족들이 황궁으로 시가 행진을 벌였다.
이는 그 들의 교설을 인정하지 않은 합스부르크 대공 페르디난트의 왕위 계승에 대한 항위 시위였다. 페르디난트가 임명한 2명의 카톨릭 지도자 야로슬라프 마르티닉과 빌렘 슬라바타가 신교도 시위대와 대치했다. 한바탕 싸움 끝에 신교도들은 상대편의 지도자와 그의 비서인 필립 파브리시우스를 동쪽 창문 밖으로 내던졌다. 내던져진 두 사람은 약 15m 아래로 떨어졌으나 용케 엉덩방아만 찧고는 살아났다. 카톨릭교 측에서는 천사들의 도움으로 이들이 목숨을 건졌다고 믿었다.
- 성 조지 수도원
973년 경에 보헤미아 최초의 수도원이 왕자 볼레슬라프 2세에 의해 황궁과 가까운 위치에 세워졌다.
볼레슬라브 2세의 누이 밀라다가 최초의 여자 대수녀원장이 되었다. 성 조지 수도원은 수세기를 거치면서 여러번 개축 되었고, 1782년에는 마침내 막사로 개조되었다. 그러다가 1962년에 이르러서는 국립 미술관의 고딕, 르레상스, 바로크 시대 미술품을 소장하는 전시관으로 재건축 되었다. 이 곳에는 보헤미아가 유럽 최고의 문명을 누렸던 14세기에 그려진 종교화들이 전시되어 있다.
보리보위 왕자의 미망인인(성 루드밀라가 묻혀있다.)
그녀는 기도 중 무릎을 꿇었다는 이유로 며느리인(드라호미라에게)교살됨으로써 보헤미아의 최초의 여성 순교자가 되었다.
- 댈리버 탑
지붕이 원추형으로 생긴 이 15세기 탑은 블라디슬라브 야기엘로왕이 지은 요새의 일부분이다.
탑의 외벽에 그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이 탑은 감옥으로도 쓰였는데 그 첫 수감자인 코조예디의 댈리버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댈리버라는 청년은 불법 노예를 피신시킨 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젊은 기사였다.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지하 토굴감옥에 갇혀 있었다.
절설에 따르면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바이올린 연주를 배웠다고 한다.
그의 곤경을 동정한 사람들이 바이올린 소리를 듣고 음식을 로프에 묶어서 창문을 통해 내려보내 주었다.
이 창문은 굶어 죽은 수감자를 던져 버리는데 쓰이곤 했다. 베드리히 스메타나는 이 이야기를 내용으로 오페라 “댈리버”를 작곡했다. 1781년 이후에는 감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오늘날에는 옛 감옥의 일부를 볼수 있을 뿐이다.
- 남 정원
이정원들은 소지구를 내려다보는 프라하 성 아래의 좁고 긴 땅에 자리잡고 있다.
몇 개의 작은 정원들이 연결되어 남 정원을 형성하고 있다.
가장 오래된 정원은 1562년에 마티아스 황제를 위해 지은 원형 정자가 있다.
조각으로 장식된 나무 천장에는 합스부르크의 39제국의 상징물들이 있다.
누벽 위의 정원은19세기에 지어졌다. 전에 채마밭이었던 이 터는 1618년에 창 밖으로 사람을 내던진 사건으로 유명하다.
당시 2명의 왕실 사무관이 1층 창밖으로 내던져졌다. 훗날 페르디난트 2세는 그들이 떨어진 지점을 표시하기 위해 2개의 방첨탑을 세웠다.
1920년대에는 요시프 플레츄니크에 의해 대대적인 개조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는 낙원정원과 전망대로 가는 황소의 계단을 만들었다.
전 하팅 전망대 아래에는 조반니 바티스타 알리프란디가 설계한 바로크 식 음악당이 있다.
- 벨베데레
페르디난트(1618년에 왕위 계승)1세가 사랑하는 아내 앤을 위해 지은 이 건물은 알프스 북부 지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물 중 하나다.
여름 궁전으로도 알려진 이 건물은 지붕이 달린 여름용 정자다.
가느다란 기둥 윗부분은 뒤집힌 배 모양의 청록색 구리 지붕으로 덮여 있다.
파올로 델라 스텔라라는 건축가 주도했으며, 아케이드 안쪽의 화려한 장식 부조를 만드는 일도 그가 담당했다.
1538년에 작업이 시작되었으나 1541년에 대화재로 일시 중단되었다가 1564년에야 완공되었다.
궁전 앞에 있는 기하하적은 작은 정원에는 노래하는 분수가 있다.
1568년에 만들어졌으면 청동 그릇에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음악적이라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들으려면 귀를 바짝 들이대야 한다.
이 연못은 화약탑에서 살며 일했던 유명한 종 제조공 토마스 야로스가 제작했다.
벨베데레에 있던 미술품들ㅇㄹ 1648년의 스웨덴 침공 당시 많은 양을 약탈당했다.
그 가운데에는 아드리앤 드 브리에스의 16세기 청동상 “머큐리와 프시케”가 있는데, 현재 이 작품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지금 벨베데레는 전시실로 쓰이고 있다.
- 왕실정원
이 정원은 페르디난트 1세를 위해 1535년에 지어졌다.
외형은 여러번 바뀌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16세기 정원 건축의 훌륭한 예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주목해 볼 만한 것으로는 1569년에 보니파즈 월무트가 지은 벨베데레와 구기장이 있다.
이 건물들도 여러차례에 걸쳐 손질이 가해졌지만, 아름다운 르네상스 식 즈그라피토는 지금도 변함없이 건물을 뒤덮고 있다.
즈그라피토란 밑바탕과 대조되는 색깔의 젖은 회반죽을 도안에 따라 도려 냄으로써 장식하는 기법이다.
구기장은 본래 테니스 형태의 경기를 위해 사용하다가 1723년에 는 마구간으로 개조되었다.
왕실 정원은 프라하에서 가장 잘 보존된 정원이며, 산책하기에도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특히 정갈한 꽃밭에 수천송이의 튤립이 피어어나는 봄철이 되면 더욱 그렇다.
페르디난트 1세의 대사가 터키에서 가져온 튤립이 네덜란드로 건너가기 전에 처음으로 유럽 풍토에 적응하게 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정원 입구에는 라이온 코트가 있다. 이곳은 루돌프 2세의 동물원이 있던 곳이다.
현재는 레스토랑이다. 루돌프는 사자 뿐 아니라 곰, 표범, 팬더를 비롯해 여러 야생 동물들을 키웠다.
- 스테르베른큰 궁전
프랑츠 요제프 스테른베르크는 1769년 보헤미아에서 “미술인 애국동지회”를 결성했다.
귀족 회원들은 자신들이 소장하고 있던 그림과 조각들을 이 회에 빌려 주었다.
애국동지호의 본부는 스테른베르크 궁전안에 있었다.
이 멋진 바로크식 건물은 1949년 이후 국립미술관의 일부로 유럽 미술품들을 소장, 전시하고있다.
- 스테르베르큰 공전의 소장품
1) 성화, 고전, 고대 미술 2층의 한 작은 방에는 나머지 소장품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그림들 중에 2세기 때 그림인 “젊은 여인의 초상” 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 성화들은 비잔틴이나 이탈리아, 그리스 등 동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가져온 것이다.
크레타에서 가져온 “그리스도의 비탄” 과 러시아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 이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2) 독일과 오스트리아 미술 (1350~1600)
스테른베르크 궁전에 있는 그림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알브레히트 뒤러의 로사리축제 이다.
황제 루돌프 2세가 가져온 이 그림은 프라하에 있어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 앞의 두 인물은 막시밀리안 1세(루돌프의 고조부)와 교환 율리우스 2세다. 한스 홀바인과 루카스 크라나흐 등 다른 중요한 독일 르네상스 화가들의 작품도 몇 점 있다. 크라나흐의 13개 대표작 중에는 “아담과 이브” 성 크리스틴, 성 바라와 성 캐서린 등을 묘사한 패널화가 있다.
3) 이탈리아 미술(1300~1500)
1층 방에 들어서면 근사한 옛 2부작 3부작 그림들과 화려하게 도금된 패널화를 볼 수 있다.
이 글림들은 토스나와 북 이탈리아의 교회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것들은 대부분 코노피슈데 성의 패널화와 로렌초 모나코의 감동적인 그림 “그리스도의 비탄”등이다.
4) 플랑드르와 네델란드 미술(1400~1700)
피에터 브뤼겔의 시골 풍경화에서 루벤스와 렘브란트의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브뤼겔의 거대한 유화 건초만들기 는 스테른베르크 궁전이 보유하고 있는 그림 중 최상품에 속한다. 이 작품은 원래 일년 열두달을 그린 연속화 가운데 하나였다. 나머지 네 폭은 빈과 뉴욕에 보관되어 있다.
이 밖에 흥미로운 작품으로는 얀 고쟈르작 성모를 그리는 성 루크 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분명한 영향을 주었던 네덜란드 그림 가운데 하나다.
17세기 소장품 중에도 걸작이 몇 점 있다.
그 중 루벤스의 작품이 가장 눈에 띈다. 루벤스는 1693년에 소지구 성 토마스 교회의 아우구스티누스 교단에 그림 2점을 보 냈다.
원작이 1896년 전시실에 임대최어 지금은 복사본으로 대처되어 있다.
성 토마스의 순교 라는 작품에 보이는 폭력적인 드라마는 성어거스틴 의 정신적 평온함과 완벽한 대조를 이룬다.
렘브란트의 1634년 작인 연구중인 학자 도 아준 훌륭하다.
5)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미술(1500~1820)
이 전시실은 다소 임의적으로 화가들을 분류해 놓았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매우 유쾌한 작품들이 몇 점 있이 전시실은 다소 임의적으로 화가들을 분류해 놓았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매우 유쾌한 작품들이 몇 점 있다.
이탈리아 그림으로는 틴토레토작 성 제롬 야코스 바사노 작 그리스도의 채찍질과 중년노인의 초상 등 을 미롯해 브론치노가 그린 인상적인 초상화 톨레도의 엘이노어가 있다.
엘리노어는 코지모 데 메디치의 아내였다.
프랑스 미술은 17세기 화가인 시몽 부에(르크레티아의 자살) 세바스티앙 부르동 샤를 르 브륑 같은 화각에 의해 대표된다. 스페인 그림 중에서는 다음 2점의 작품을 주목할 만하다.
엘 그레코의 작품 그리스도의 머리 와 반 폭짜리 고야 작품인 정치가 돈 미후엘 드 라르다자할 의 초상화가 그것이다. 174년경에 람베스 궁전과 웨스터민스터 다리를 그린 카날토의 작품 템즈 강의 전경도 보면 반가운 그림을 것이다.
- 체르닌 궁전
1668년에 베니스 주재 제국 대사인 쿠데니스의 체르닌 백작을 위해 지어진 체르닌 궁전은 길이가 150m나 된다.
30개의 거대한 코린트 식 반기둥이 위층에 열 지어 있는 이 궁전은 로레토와의 사이에 있는 작고 아름다운 잔디 광장위에 우뚝 서 있다. 프라하에서 제법 높은 축에 드는 언덕에 위치한 탓에 이 거대한 건물은 많은 시련을 겪었다. 1742년에는 프랑스에 의해 약탈당했으며, 1757년 프러시아의 프라하 폭파 당시에도 크게 손상을 입었다. 재력이 약해진 체르닌 가는 1851년에 이 궁전을 국가에 팔았고, 이후 이 곳은 병영으로 쓰였다.
그러다가 1918년에 체코슬로바키아 탄생 후 이 궁전은 본 모습을 되찾았으며, 그 때부터 외무부 청사로 사용되었다.
1948년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며칠 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초대 대통령 토마스 마사리크의 아들인 얀 마사리크가 이 궁전의 맨 위층 창문에서 추락사했다.
그는 당시 막 형성되었던 정부의 유일한 비 사회주의 자로서 국민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고 있었다. 정치적인 이유로 누가 떠민 것인지 그가 뛰어내린 것인지는 끝내 밝혀지짖 않았다.
하지만 오늘가지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애도하고있다.
- 슈바르젠베르크 궁전
멀리서 보면 이 르네상스 식 궁전의 표면은 돌출한 피라미드 모양의 석조물로 장식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평평한 벽면에 무늬를 새긴 즈그라피토임을 알게된다.
이 궁전은 로브코위츠 가를 위해 건축가 아고스티노 갈 리가 1576년에 지은 것이다.
박공벽으로 된 이 궁전은 보헤미아 양식이 라기 보다 피렌체 양식에 가깝다.
1719년에 합스부르크 제국의 대표적인 귀족가문인 슈바르젠베르크가의 소유가 되기까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왔지만 내부 장식은 상당 부분 잘 보존되어 있다.
그 가운데 1580년에 만들어진 3층의 채색 천장 4개도 포함되어 있다.
각종 전쟁에 사용되었던 무기, 갑옷, 군복등이 소장되어 있다. 특히 15세기에 후스파가 고안해서 사용하였던 독창적인 전시물이 관람객의 시선을 끈다.
5. 성 니콜랏 성당 주위
- 성 니콜라스 광장
이 교회는 소지구 광장을 양분하는 중심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1703년에 교회를 짓기 시작했으나, 본당 프레스코의 마지막 손질을 끝낸 1761년에야 완공되었다. 이 교회는 크리스토프와 킬리안 이그나즈 디엔첸호퍼 부자가 이루어낸 걸작이다.
그러나 이들은 교회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1646년에 카렐 슈크레타가 그린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상을 비롯해 교회 내부에 전시된 조각사으 프레스코, 그림들은 모두 당대의 뛰어난 예술가들의 작품이다.
1950년에 모차르트는 이 성당에서 바로크 오르간 연주를 하기도 했다.
또한 1791년 모차르트가 죽었을 이곳에 4천여 명의 프라하 ㅅ민이 모여 함께 추모미사를 올렸다고 한다.
- 네루도바 거리
프라하 성으로 통하는 그림같은 좁은 길인 네루도바는 이 길을 배경으로 많은 글을 썼던 시인이자 언론인 얀네루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1845년~1857년까지 47번지의 두태양 이라고 불리던 집에서 살앗다.
가옥에 숫자를 매기는 방식이 도입되기 전인 1770년까지, 프라하에 있는 집들은 표지들로 구별되었다.
따라서 네루도바의 가파른 경사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붉은 독수리(6번지), 세 개의 바이얼린(12번지), 금박말발굽(34번지), 녹색 가재(49번지)등의 특이한 문장들을 볼 수 있는데, 이런 곳들은 현재 대부분 카페나 와인바, 맥주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는 선 호헨스케인 궁전(20번지, 현 이탈리아 대사관)과 모르진 궁전(5번지, 현 로마 대사관)같은 웅장한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도 많다. 모르진 궁전의 정면은 구 개의 거대한 뇌조상(무언신의 이름을 흉내낸 익살)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이 동상들은 2층에 있는 반원형의 발코니??? 지탱하고 있다.
일명 “영원한 구원의 여신 교회”라 불리는 티틴스교회도 그 웅장한 외관 때문에 눈길을 끈다.
6. 카렐교, 카렐교 주위
- 소지구 방면
프라하에서 가장 유명한 기념물로, 지금은 각종 공예품과 장신구 상점들이 늘어선 이 다리는 구시가와 소지구를 연결한다.
지금은 보행자 전용도로지만 한때는 마차 네 대가 나란히 지나다닐 수 있던 길이었다.
현재 이 다리에 있는 동상들은 파손 위험 때문에 대부분 복제품으로 대체되었다.
진품 동상은 라피다리움 국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딕 양식의 구시가 교탑은 현존하는 탑들 가운데 가장 정교하다.
1) 성 요한, 성 팰리스 그리고 성 이반(1714)
페리디난트 브로코프가 만든 이 조각상에 보이는 성인들은 이교도들ㅇ게 속박되어 있는
기독교 신자들(조각상의 밑부분에 표현된)을 위해 삼위 일체회를 설립했다.
2) 성 비투스(1714)
3세기에 순교한 비툿와 그의ㅣ 발 밑을 핥고 있는 사자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성 비투스는 무희들의 수호성인이며, 때로는 격심한 소요 사태의 해결을 강구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3) 성 아달베르트(1709)
프라하의 주교였던 아달베르트는 991년에 페트르진 언덕을 세웠다.
4) 성 루이트가르트(1710)
카렐 교회 족각들 가운데 예술적으로 가장 뒤어난 작품으로 평가 받는 이 동상은 마티아스 브라운의 작품으로, 그의 나이 불과 26세에 오나성되었다.
이작품은 예수가 나타나 그의 상처을 만졌다는 시토 수도희 장님 수녀의 환영에 근거해서 만들어졌다.
5) 성 빈센트 페레르와 성 프로코피우스(1712)
이 조각상은 많은 유대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데 성공한 센트 때문에 비탄에 잠긴 한 랍비의 모습을 보여준다.
성 프로코피우스는 보헤미아의 네 명의 수호성인 중 한 사람이다.
6) 성 존 네포무크(1683)
다리 위에 있는 한 부조 작품에는 네포무크의 순교 장면이 담겨져있다.
이 부조는 행운을 기원하며 성인의 모습을 수세기 동안 만지고 간 사람들의 손길에 닿아 반질반질하게 윤이 난다.
- 구시가 방면
1741년까지 카렐 교는 블타바 강을 가로지르는 유일한 통로였다.
길이 520m의 이 다리는 사암으로 된 불록으로 세워졌으며, 소문에 의하면 다걀을 섞은 치장 벽토로 그 강도를 더 높였다고 한다.
이 다리는 1357년 카렐 4세의 명령에 따라 놓기 시작했으며, 페터 파를러가 공사를 주관했다.
이 다리의 우너래 장식은 단순한 십자가 하나 뿐이었다.
그러다가 1683년에 최초의 조각 “성 요한 네포무크의 상” 의로 장식되었는데, 이는 로마의 폰데 산탄젤로에 있는 베르니니의 조각들에서 영감을 얻었다.
1) 성 프란시스 자비에르(1711)
예수회 선교단은 세 명의 무어인과 두 명의 동양인 개종자들의 후원을 받았다. 조각가 브로코프는 성인의 왼편에 있다.
2) 17세기 예수 수난 십자가
나무로 민든 이 십자가는 카롤 교의 완공 이후 200여년 동안 이 다리의 유일한 장식물이었다.
히브리어로 된 거룩 거룩 거룩한 주여 라는 문구는 신성 모독죄를 범한 한 유대인을 처버하기 위해 쓰인 것이다.
3) 성모 마리아, 성도미니크, 성 토마스(1708)
도미니크와의 수도사들(라틴속어로 “도미니의 지팡이들”“신의 개들”로 알려짐)이 성모 마리아의 상징인 개 한 마리와 함께 조각되었있다.
4) 성모 마리아와 성 베르나르다(1709)
천사들과 주사위, 수탉, 백부장의 장갑 같읕 열정의 상징들이 이 동상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다.
7. 국민극장
- 국민극장
건물의 꼭대기에 금박을 입힌 국민극장은 체코 문화 부흥의 중요한 상징이 되어왔다.
여러 사람들의 자발적기부금으로 1868년에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체코의 건축가 요제프 지테그에 의해 신 르네상스식으로 축조되었다.
이 후 화재로 인해 건물이 파괴되자 요제프 슐츠는 극장의 재건에 착수했는데, 이 때 당대 최고의 예술 가들이 재건 작업에 동참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 사이에 다시 한번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다.
- 국립극장의 화재
1881년 8월 12일 개관 기념일 직전 국립 극장에 화재가 발생해 건물이 전소되었다. 화재는 지붕에서 세공을 하던 중에 발생했다고 추정되었다. 그러나 단 6주 뒤에는 재건할 만큼의 충분한 돈이 모였고, 2년 후 1883년에 완공되었다. 체코 작곡가 베드리히 스메카나의 오페라 리부셰가 재건된 국립극장에서 첫 공연을 했다.
아직도 유럽 최대 규며를 자랑하는 고성으로 프라하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이다.
9세기에 처음 짓기 시작했고, 14세기 카렐4세왕의 통치하에서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수백년동안 지어지면서 로마네스크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이 모두 모여있어 유럽 건축양식의 변화를 한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대통령궁으로도 쓰이고 있으며, 체코의 역사적 정치적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8. 구시가 광장 광장 주위
- 틴 앞의 성모마리아 교회
이 유서 깊은 교회의 장엄한 복식 창탑들이 구시가 광장을 압도하고 있다.
고딕 양식을 보여주는 이 교회는 1365년에 시공되었으며, 이후 보헤미아의 개혁운동과 연합했다.
15세기 초부터 1620년까지 틴은 프라하의 주요 후스파의 교회였다.
후스파 와인 포데브라디 가의 조지가 이 곳에서 우트라퀴스트 성찬식을 갖고 우트라퀴스트의 상징물인 황금성배를 교회정면에 부착하도록 하였다.
1621년에 성배가 있던 자리에 성모 마리아 상이들어섰는데 이 때 성배를 녹여 성모 마리아 상을 만드는 데에 썼다.
교회 북쪽에 있는 입구는 예수 수난장면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어두운 실내에는 주목할 만한 작품이 몇 개 있다.
고딕 양식으로 조각된 예수 십자가 상, 백랍세례반(1414) 15세기 고딕 식 설교단 등이 그것이다.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1546~1601)
가 이 교회의 대리석 무덤에 잠들어 있다.
- 골즈킨스키 궁전
킬리안 이그나자 디엔첸호퍼가 설계한 이 로코코 궁전의 정면은 예쁜 분홍색과 흰색
벽토로 장식되어 있으며, 위에는 이그나즈 프란츠 프라처의 조각작품인 “4요소‘가 있다.
이것은 왕실 외교관이던 스데판 킨스키가 1768년에 골즈가에서 가져온 것이다.
1948년 공산주의 지도자였던 클레멘트 고트발트가 이 궁전의 발코니에서 군집한 공산당원
들을 행해 연걸을 했는데, 이는 그를 쿠데타로 이끈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오늘날 국립 미술관은 이 궁전을 현대 미술 전시관으로 사용하고있다.
- 얀 후스 기념비
종교 개혁자이자 체코의 영웅인 얀 후스를 위한 거대한 기념비가 구시가 광장의 한모퉁이를
장식하고 있다.
1415년 이교도적인 발언을 한 후 그는 콘스탄스 위원회에 의해 화형에 처해졌다.
라드슬라프 샬로윤이 제작한 이 기념비는 1915년 후스 서거 500주년 일에 제막 되었다.
기념비는 두 그룹의 사람들(하나는 승리를 거둔 후스파 전사들이고, 다른 하나는 200년 후
추방당하는 프로테스탄트)과 체코의 재탄생을 상징하는 한 젊은 어머니의 모습을 담고
있다.
후스의 위풍당당한 모습은 신념을 위해 생명을 포기한 자의 도덕적 권위를 역설해 준다.
동상의 대좌에는 “진실을 사랑하고,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행하라”는 얀 후스의 유명한
말이 새겨져있다.
- 얀 후스
보헤미아 소읍의 가난한 가정에서 출생한 얀 후스는 당대 최고으ㅢ 종교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독일의 미틴 루터보다 100년 앞서 종교 개혁운동을 시작했다.
면죄부 판매나 카톨릭 교회의 부정한 관례나 사치스러운 형식, 그리고 부유함에 대한 그의
반발은 귀족이나 농민 할 것 없이 수많은 체코인의 공감을 얻었다.
프라하의 베들레헴 교회에서 행한 개혁주의적인 설교는 더욱많은 추종자들을 생겨나게
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로마 교황은 그를 파문했고, 1412년에 바출라프 4세는
그에게 프라하를 떠나도록 요청했다. 1414년 10월 후스는 콘스탄스 회의에서 자신의
주장을 변호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투옥되었고, 다음해 이단으로 판결을 받아 화형에 처해졌다.
현재까지 체코 전민적의 순교자로 존경받고 있으며 순교일인 7월 6일은 공휴일로 까지
지정하였다.
- 성 니콜라스 교회
12세기부터 이 자리에 교회가 있었다.
14세기에 틴 교회가 준공되기 전까지느 구시가 교구교회이자 회합장소였다.
백산전투 이후 이 교회는 베네딕트 수동원의 일부가 되었다. 지금 있는 교회는 킬리안
이그나즈 디엔첸호퍼의 작품으로 1735년에 완공되었다.
건물 정면은 흰색으로 매우 인상적이며, 안토닌 브라운의 조각작품이 곳곳에 장식되어
있다.
1781년에 황제 요제프 2세가 사회적으로 유용한 활동을 하지 않는 수도원을 모두 폐쇄시켜
버리는 일이 일어나자 교회는 황폐해졌다.
제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프라하 주둔군의 부대로 쓰였다.
당시 주둔군의 대령은 예술가들을 차출하여 이 교회를 복원했다.
이 복구 작업이 없었더라면 그 때 예술가들은 분명 전선에 투입되었을 것이다.
장엄한 돔 천장은 코스마스 다미안 아삼이 성 니콜라스와 성 베네딕트의 생애를 그린
프레스코로 장식되어 있다.
본당 회중석에는 거대한 왕관모양의 샹들리에가 있다.
전쟁이 끝난 생애를 그린 프레스코로 장식되어 있다.
전쟁이 끝난 후 성 니콜라스 교회는 체코슬로비키아 후스파 교회에 양도 되었다.
여름철이 되면 이 곳에서 종종 음악회가 열린다.
- 구시가 청사
구시가 청사는 프라하에서 특히 인상적인 건물중 하나다.
록셈부르크 가의 존 왕이 시의회 설립에 찬성한 후인 1338년에 지어졌다.
이후 수세기를 거치면서 구시가 청사 확장 공사에 따라 여러채의 건물이 함께 지어져
오늘날 화려한 고딕, 르네상스,양식의 건축술을 보여주는 구역이 되었다.
대부분의 건물들이 1945년 프라하봉기 다이시 나치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으나 이후
세심하게 복원되어 오고 있다.
69.5m 높이의 탑에 올라가면 프라하의 멋진 전경을 볼 수 있다.
- 시청시계
시청에 처음 기계가 부착된 것은 15세기 초엽의 일이다.
1490년이 시계는 하누슈라는 이름의 거장 시계공에의해 고안되었다.
당시 시의회 의원들은 그 시계공이 다른 곳에서도 그러한 걸작을 만들 것을 염려하여 그
가려한 노인의 눈을 멀게 했다고 한다.
이후로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되었으며, 오늘날 시계의 기본 장치는 1552년에서 1572년
사이에 얀 타보르스키가 만든 것이다.
1) 열두 제사상
이 시계가 시간을 알리는 조을 울릴 때마다 12사도의 재미난 움직임이 많은 구경꾼들을
끌어모은다.
우선 시계 오른쪽에 설치된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이 자기의 오른손에 감긴 줄을 잡아당긴
다음 왼손으로는 모래 시계를 들어올려 뒤집는다. 두 개의 창문이 열리고 시계 태엽에
해당하는 12사도(정확히 말하면 11명의 사도와 성바울)가 성 베드로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 행렬이 끝날 무렵에 수탉이 운다 이때 시계는 벨을울려 시간을 알리게 된다.
이 밖에도 움직이는 부속들이 또 있다.
거울을 부고 있는 “허영심”, “탑욕‘을 상징하는 투르크인등인 그 것이다.
2) 천문시계
이 시계가 만들어질 당시의 시계공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이 추구하는 시계의 목적은 정확한 시간을 아려주는 것이 아니라, 지구를
중심으로 도는 태양과 달의 궤도를 모방해 내는 데 있었다.
시를 가리키는 시계 바늘은 세가지 종류의 시각을 나타낸다.
중세 아라비아 숫자로 된 원이 나타낸는 시간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시간을
보여준다.
숫자판의 파란색 부분은 낮을 상징하는 하늘이다.
이것은 12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소위 바빌로니아식 시각에서 해가 비치는 시간은 12시간으로 나뉘며, 그 길이는 계절에
따라 달라진다.
이 천문시계는 16세기 프라하에서 매우 중시되었던 황도 12궁을 통해 해와 달의 움직임도
보여준다
9. 시민회관 화약탑
- 화약탑
구시가로 통하는 13개의 출입문 가운데 하나였던 이 문은 11세기에 세워져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1475년에는 블라티슬라브 2세가 초석을 놓았다. 시 의히가 대관식 선물로 바친 이 문은
1세기 먼저 세워진 페터 파를 러의 구시가 교탑위에 조성되었다.
이 문의 화려한 조각장식은 황정에 인접한 궁전에 권위를 더해주기 위한 것이며, 방어적
가치는 거의 없다.
폭동으로 왕이 시를 빠져나가 있던 8년 동안에는 공사가 중단되었다. 1485년에 재입성한
왕은 성의 안전 쪽을 선택했으며, 이후로 왕들은 왕정에 기거하지 않았다. 이 문의
이름은 17세기에 이곳에 화약을 저장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건물 외부의 조각장식은
1757년 프러시아 점령 당시 심하게 손상되었으며, 이후 대부분 철거되었다가 1876년에
와서 복구되었다.
- 시청
프라하에서 가장 눈에 뛰는 아르누보식 건축물인 시청이 1383년에서 1485년 사이에 왕이
거주했다.
지금은 건물은 수세기 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신학교로, 그후엔 군사학교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900년대초에 헐어내고 그 자리에 현자의 문화센타(1905~1911)를 지었다.
이 문화센터는 오스발드 폴리브카와 안토닌 발샤네크가 설계한 것으로 전시실과 큰 강당을
갖추고 있다. 시청은 1918년 10월 28일 체코슬로바키아가 새로이 독립을 선언한 중요한
장소이기도 하다.
건물의 외부는 치장벽토와 상징적인 조각상들로 꾸며져 있다. 정문 위에는 “프라하에
충성을 ” 이라는 제목이 붙은 거대한 반원형 모자이크가 있다.
이는 카렐 슈필라의 작품이다. 건물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스메타나 홀은 무도회장으로
쓰이기도 한다.
건물의 내부는 알폰스 무하를 비롯해 1910년대에 활동한 체코 미술가들의 작품으로
장식되어 있다.
회의실, 사무실 등으로 쓰이는 작은 홀은 수없이 많다. 방문객들은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쉬면서 화려한 아르누보 양식을 즐길 수 있다.
10. 바출라프 광장<벤체슬라브 광장>
이 광장이야 말로 체코 현대사의 장이라 할 만하다. 얀 팔라흐라는 학생이 1969년 이 곳에서 분신 자살을 했다.
1989년에는 경찰의 잔혹 행위에 항거하는 집회가 이루어졌으며, 이 집회는 벨벳혁명으로
이어져서 마침내 공산주의 체제의 전복이라는 결과를 얻었다.
바출라프 광장은 넓이가 750m x 60m 정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광장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좀 부적절한 것 같다. 원래는 말 시장이었던 자리인데 지금은 서구 문화의 영향으로 호텔과 레스토랑, 클럽, 상점들이 즐비한 거리로 변해Te. 국립 박물관의 정면에서 광장쪽으로 쭉 뻗은 대로에 위치한 바출라프의 거대한 기마상은 1912년에 세워졌다.
이 청동 조각사은 요재프 미슬베크의 작품이다.
동상의 받침대에는 체코의 수호성인상들이 있다.
성 바출라프는 10세기 경의 인물로 국난이 닥쳐왔을 때의 중부 보헤미아의 그라니크 동구에서 깊은 잠에 빠진 기사들을 깨워 그들을 이끌고 적군을 격퇴시켰다는 전설의 주인공이다.
체코 민족의 수호성인으로 신성시되고 있다.
동상 옆에 있는 기념비는 전 공산주의 정권의 희생자들을 애도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 국립 박물관
바출라프 광장의 한쪽 끝에 신 르네상스 식 건물이 한 채 있는데, 이 곳이 바로 국립박물관이다. 체코의 재건을 상징하는 이 박물관은 요제프 슐츠에 의해 디자인되고, 1890년에 완공되었다.
박물관 입구는 여러 가지 우화적인 상징들로 장식되어 있다.
입구 옆에는 역사관과 자연사관이 있다. 건물 내부로 들어가면 대리석 장식이 매우 인상적인데, 너무나 화려해서 오히려 오래되고 평범한 소장품들을 압도한다.
이 박물관에 있는 소장품들은 주로 광물학, 인류학, 고고학, 자연사에 관련된 것들이다.
또한 이곳에는 체코의 학자, 미술가, 작가들의 흉상이나 동상이 전시되어 있는 판테온이 있다. 판테온은 프란티쉑 줴니쉐, 바출라프 브로치크, 보이네흐 히나이스 등이 그린 역사적인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다.
- 주립 오페라 하우스
이 자리에 처음 세워졌던 극장인 신시가 극장은 오페라 하우스의 신축을 위해 1885년에 철거되었다. 이곳은 체크 국립극장에 견주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신 독일극장으로 알려졌다. 신 고전주의풍의 극장 정면은 원기둥이 줄지어서 있는 로지아와 박공으로 장식되어 있다. 문양에는 디오니소스와 희극의 여신인 탈리아 등이 보인다. 치장 벽토로 장식된 내부를 비롯해 관람석과 휘장에 걸려 있는 진귀한 그림들도 잘 보존되어 있다.
11. 비셰흐라드
비셰흐라드 이름은 고지대의 성 이라는 뚯의 비셰흐라는 체코 족의 먼 조상들이 가장 먼저 정착한 곳으로 알려져있다.
그 후 왕국으로 번성하면서 7세기에는 보헤미아 왕자들의 성이 세워졌고, 역대 왕들에게 흐라드차니 지구에 있는
프라하 성 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성이 자리한 넓은 언덕지대로 들어서면 불타바 강과 강변을 따라 형성된 언덕빼기의 아름다운 경관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비셰흐라드 한쪽에는 국립명예묘지가 자리하고 있으며,(드보르작, 스메타나, 알폰스 무하, 카프카)등
체코를 빛낸 음악가와 예술가, 문인들의 묘지가 있다.
묘지 앞쪽에는 1세기에 만들어져 1902년에 재건한 성페테르 파울루스 성당이 있다.
이 성당은 비셰흐라드의 상징으로 14세기 작품 (비의 마돈나)가 유명하다.
첫댓글 담아갈게요~~
정보고마워요 . 이번 가을에 가려고 계획중인데요... 가을의 프라하는 어떤지요??
담아갈께요^^
내년에 갈 예정이에요...알찬 정보 감사합니다...
프라하의 유명관장지... 넘 긴것 같지만 읽으보시면 좋을듯 해서요..
오늘 프라하도착했습니다. 내일 여기대로 한번 가보려구요. 이틀만에 보기에는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좋은 정보 덕분에 알찬여행 할께요. 감사합니다.
담아감다.. 이번에 프라하가는데..저도 이코스대로 함 도전을 ^^
저두 내년에 꼭 가보려고 하는데 정말 멋지네요..
넘이뻐여 ㅠ.ㅠ 꼭 가보고 싶네영 ㅠㅠㅠㅠ
다시 가고싶은곳 입니다
정보 감사합니다. 저도 담아갈게여..^^*
아~ 진짜 좋네요ㅠㅠ
올 8월경에 배낭여행을 준비하고 있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군요
대박!!! 여행책자같아요.. 여행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감사~~
좋은 정보 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