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전의 밤,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
塚本 哲也(쓰카모토 테쓰야)
(전 여자대학 학장, 作家)
黃 晋 燮 (수필가, 번역가)옮김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것은 초등학교 6학년의 12월로, 4개월 후에는 군마(群馬) 현립 타테바야시중학(館林中學)에 들어갔다. 이미 근로동원이 시작되었고, 전투모에 게트르(guetre 脚絆)를 감고 뛰는 걸음으로 통학했다.
여름과 가을에는 제법 장기간 농촌 일손 돕기가 있었다. 감자 캐기, 보리 베기, 고구마 캐기, 벼 배기를 위해 부근 농촌에 자전거로 대열을 지워 반별로 다녔다. 농촌도 일할 사람이 전쟁터에 나가, 할머니 이외에는 아무도 없는 집이 많았다.
보리배기를 할 무렵, 가까운 숲에서 “뻐꾹 뻐꾹” 한가롭게 두견새 우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번화한 거리에서는 들을 수 없는 자연의 숨결이었다. 밭에는 종달새 둥지도 있고 야생의 꿩도 있다. 족제비가 뛰어 다니고 커다란 구렁이도 볼 수 있었으며, 귀뚜라미야 방울벌레의 울음소리도 앙증맞게 들려왔다. 북쪽나라로 돌아가는 기러기 떼도 보았다. 멀리 赤城(아카기), 筑波(쓰쿠바), 男体(난타이)같은 산들이 보이고 드넓은 관동평야를 실감하였다.
上州(죠오슈/현재의 群馬)의 명물인 겨울 북풍이 거칠게 불어올 때쯤이면, 윙윙 거리는 바람 소리가 대지를 뒤흔든다. 농촌 근로봉사는 나에게 고향의 자연과 접하는 첫 번째 체험과 향토애, 교실에서는 얻을 수 없는 교훈을 깊이 새기게 해 주었다. 나가츠카 후시(長塚 節)의 소설 ⌜土⌟는 변해버린 고향의 옛 모습을 회상하게 한다.
하지만, 삽시간에 전쟁은 격렬해졌고 3학년부터는 비행기 공장에 동원되었다. ゼロ戰(쓸모없는 전쟁) 의 꼬리날개를 만들기 위해 이번에는 선반(旋盤)을 쓰기도 하고 대갈못 박기(鋲打ち)도 하는 거친 일에 종사하였다.
그때 미국의 B29폭격기 편대가 그 모습을 나타냈다. 높푸른 하늘을 날아오르는 학(鶴)과도 같이 하얀 미국 비행기는 참으로 아름답게 보였다. 방공호에 들어가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넋을 잃고 쳐다봤다. 학교 수업은 전혀 없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하늘에서 폭격이 있은 다음 이윽고 구라만 전투기의 총격으로 이어져 기총소사를 경험하였으며 전쟁이 신변에 닥아 왔음을 느꼈다. 어느 날 화재라고 하여 둑으로 올라가 보니, 저 멀리 하늘이 붉게 물들었고 환하게 밝아 있었다. 어디일까 하고 서로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으나 어림이 되지 않았다.
그게 바로 3월 10일 도쿄(東京) 시가지 대공습으로 1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群馬(군마)에서도 보인 것이다.
그런 중에, 동사무소에서 역전(驛前) 10여 호에 대하여, 격심해 지는 공습으로 불길이 번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8월 15일까지 집을 허물도록 강제소개(强制疏開)명령이 내려졌다. 상이군인인 아버지는 동사무소에 실려 들어가, 아랫도리만을 가린 차림으로 동장 실 책상위에 올라가 “나의 이 상처에다, 이번에는 집을 부수라는 것이냐?” 하면서 항의하였으나 명령은 철회되지 않고 울면서 모두 힘들여 집을 어물었다. 집을 다 부순 昭和 20(1945)년 8월 15일 정오, 천황의 육성 항복방송을 들었다.
전쟁에 진 충격, 집을 잃은 슬픔, 내일부터 당장 어떻게 살아 나갈까 하는 불안이 갑자기 한꺼번에 다가왔다.
밤이 되었다. 허물어진 집터에 온 가족이 모였을 때, 어머니가 “하늘을 보렴” 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셨다. 쳐다보니 맑은 하늘 가득히 별들이 무서우리만치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패전 후 연일 신문이나 라디오 보도를 보고 전쟁의 참화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차츰 차츰 알게 되었다. 격심한 분노가 무책임한 동사무소, 전쟁을 일으킨 국가, 그 지도자들에 대하여 솟구쳐 올라왔다. 중학교 4학년생(지금의 고1)이 었지만, 이제는 어린 아이는 아니다.
아버지는 중국전선에서 중상을 입어, 우리 집은 전쟁이 끝났어도 앞길이 태산이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누가 이런 전쟁을 시작한 것일까. 지금까지 일본이 걸어온 발자취와 앞길에 대하여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날마다 눈이 돌 정도로 어지러운 가치전환의 날들로 어수선 했다.
이 무렵, 중학교에 가는 길에, 매일 아침 소학교(초등학교)에 다니는 예쁜 피난민 소녀와 길을 스쳤다. 의연하고 기품이 있어 보였다. 지금까지 이런 아름다운 소녀를 본적이 없었다.
소학교 교정에서 자주 줄넘기를 하거나 모닥불을 둘러싸고 놀고 있기도 하였다.
그 소녀는 正田美智子(마사다 미치코)양이라고 하였고, 후일 황태자와의 결혼으로 비전하(妃殿下))가 된 것을 TV로 보고 깜짝 놀랐으며, 그렇지 하고 탄복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쇼와(昭和29/1954)년 신문사에 들어갔으며 곧 동서 베를린, 프라하, 부다페스트 등 동서냉전의 최전선을 누볐고, 미국과 소련의 격렬하고 냉혹한 대결의 현장을 체험했다. 말 할 것도 없이 서풍이 동풍을 제압하고 있었다. 모택동의 예언은 어긋났다.
쇼와 48(1974)년, 귀국할 때에는 田中(다나카)내각 때였다. 고도성장으로 한창 약진하고 있다고, 모두들 우쭐 하였으나, 검소하고 착실한 통합유럽의 전진을 보고 온 나에게는 금전만능, 물질주의의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나라,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지 않고 벚꽃놀이 술에 취해 있는 나라로 비췄다. 나라는 거칠어져 있었다. 전쟁 중에도, 전후 한동안까지도 일본은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는 정신이 남아 있는 나라였으나 그것이 없어져 나사가 풀린 것 같았다.
“자 이제는 돌아가자 전원의 순무가 될지라도...”(⌜歸りなん, いざ. 田園まさに蕪れんとす⌟(陶淵明)/역자 주:고향으로 돌아가고픈 간곡한 마음). 이때부터 나는 昭和(쇼와)라는 연호를 쓰지 않고 서력만을 썼다. 사요나라(안녕) 昭和. 쇼와51(1977)년 田中수상이 체포된 해였다. ('10.11.24.번역)
첫댓글 좋은글에 마음담아 봅니다. 행복한 날되세요^^
고맙습니다. 가을날의 좋은 주말이 되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