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가 귀양왔던 ‘옥터’ 마을
의신면 옥대리
동백정 산다화향 다시 피어나고
진도는 일반인들에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고인돌의 고장이라 불러도 무방한 곳이다. 특히 의신면 옥대리는 고인돌군이 형성된 곳으로 유명하다. 그만큼 마을의 역사와 유래가 깊다는 반증이 된다. 근세에 와서는 1779년대 발간된 호구총수에는 중리와 구룡리마 기재되어 있어 기록상 현재의 마을형성은 늦은 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농경지 개간 등으로 많은 유적들이 유실되었지만 고군면 오산리, 임회면 용호리, 의신면 중굴리, 지산면 관마리 등은 아직도 고인돌유적이 남아있다. 옥대리는 의신면 소재지인 돈지리와 중리 사이에 자리한다. 중리 또한 옛 의신면 소재지(조현호씨 집터)로 바로 위 성죽골 가는 곳에 상리가 있었고 현재의 옥대는 하리라고 불렀다고 촌로들은 증언한다.
옥대리는 의신향의 옥터가 되므로 옥대라고 하였다는 설과 왕자가 귀양을 와서 왕대(王垈)라 하다가 왕자가 돌아간 뒤에 옥대로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전한다.
또 다른 설은 남해 왜구들을 가두어놓은 옥사장 터로 보아진다는 주장도 있다. 진도의 3대 한시(20세기) 시인으로 한시집을 남긴 의신출신 소산 이남원씨의 주량팔경 중 죄인들을 가두어놓은 옥사장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허옥인씨 증언) 또 삼별초가 진도에 머문 기간은 그 해 11월이 윤달이어 총 10개월이며 여기급창은 예기(藝妓) 둠벙이라고 했다. 삼별초의 퇴로도 의신포로도 갔다는 것이다.
옥대리는 밀양박씨와 김해김씨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북쪽 덕신산(德神山)에서 이어진 산릉 완경사면에 입지하고 있으며, 마을의 주산이라 할 옥봉산의 강선봉(降仙峰)을 뒤로 하고 해좌(亥坐) 사향(巳向)으로 들어서 있다. 옥대천(玉垈川)이 동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고 있다. 옥대리 남쪽으로는 도목방조제 축조로 조성된 넓은 농경지가 펼쳐져 있다. 그래서 주소득원도 벼농사이다. 남동쪽은 청룡리·정지리, 북동쪽은 중리, 남서쪽은 돈지리와 각각 접하고 있다. 18번 국도에서 갈라진 2차선 도로가 옥대리까지 연결되어 있다. 2006년 총 71세대에 149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현재 주요 성씨는 김해김씨이며 마을 공동 재산으로 마을회관, 창고가 있다.
현재 마을이장은 이완진씨며 노인회장에 김진연, 부녀회장은 문순단씨가 맡고 있다. 마을에는 담배가게 점방 등이 있어 생필품 구입에 유용한 편이며 회관 옆 정자가 주민들의 쉼터 역할을 한다.
유물·유적으로는 지석묘군, 옥대마을 유물산포지, 의신면 옥대리 야철지 등이 있다. 현재 동백정의 위치 추정에 대한 논란이 있으나 덕신산에서 발원한 옥대천이 흐르는 중리와 옥대리 사이를 유력하게 보는 이들도 있다. 첨찰산 쌍계사를 찾던 주민들은 성죽골 위 골짜기 사구지재를 주로 이용했다고 한다.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돈지리에서 옥대리로 가다 보면 옥대리 마을 좌측 구릉상에 21기의 지석묘가 타원형을 이루며 모여 있다. 주변에 많은 석재가 널려 있어 지석묘의 아래쪽이 파괴된 것으로 추측된다. 1987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이해준 교수)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했을 때 조사되었다. 형태를 보면 지석묘의 아래쪽이 매몰되고 파괴되어 확실한 형식을 알 수 없다. 규모는 일정치 않으며 중·소형 지석묘들이 뒤섞여 있다. 가장 규모가 큰 것은 길이 330㎝, 폭 220㎝, 두께 70㎝이며, 전체적으로는 길이 110~330㎝, 폭 70~280㎝, 두께 30~140㎝의 크기이다. 지석묘 주변에서 마제석촉 1점이 수습되었다. 주변에 많은 석재가 널려 있으며, 주변에서 수습된 마제석검은 진도군 역사유물전시관에 소장되어 있다. 향토유형유산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국에서 제일 싼 땅은?
의신면 옥대리 826번지가 ㎡당 2,170원으로 나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반대로 주거지역에서 서울 이촌동 208-7이 무려 1천2백만원이 넘어 비교가 되었다. 국토해양부가 발표한 전국 2009년 개별공시지가 현황에 따르면, 명동 파스쿠찌 부지의 ㎡당 가격은 6230만원에 달했다. 반면 전국에서 가장 싼 주거지역으로는 진도군 의신면 옥대리 826번지가 ㎡당 2170원을 기록하며 최저지가를 나타냈다. 옥대와 중리 위쪽으로 임도개설이 전혀 안되어 개발가치가 떨어지는 이유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예전 이쪽 주민들은 삼밭 비끼내 쌍계사 운림각 첨찰산 물맞이를 갈 때 자주 사용하던 길들이 수풀에 가려진 탓도 있을 것이다. 중리 저수지(성죽골) 위쪽으로 골짜기를 따라 오르면 쌍계사가는 지름길이 된다고 한다.
의신면 옥대리 중리마을에 있는 야철지
옥대리 야철지 유적은 중리마을 동남쪽에 위치한 해발 42m의 나지막한 산에 위치한다. 유적 주변으로는 들이 형성되어 있다. 허옥인씨의 말에 따르면 이곳에 대형의 거푸집이 있었으나, 토지 소유주가 개간하면서 매몰시켰다고 한다. 현재는 야철과 관련된 시설이나 유물은 확인할 수 없다. 지명유래에 의하면 왕자가 귀양을 왔다고 하여 왕대라 하다가 왕자가 간 뒤로 옥대로 부르게 되었다는 말이 전한다. 현재의 주요성씨는 김씨이며 주민들의 주요소득원은 벼농사이다. 마을공동재산으로는 마을회관이 있으며 유물유적으로 옥대고인돌, 옥대유물산포지, 보호수로 지정된 팽나무(200년 수령)가 있다. 옥대는 한 겨울에도 따뜻한 곳으로 마을 앞에는 중리동편 왕봉산 자락이 앞증뫼 용초리 끝에 이르러 태풍과 셋바람을 막아주는 천연적으로 지세가 잘 짜여진 곳이라고 주민들은 자랑한다. 그러나 1789년경 발간된 호구총수에는 옥대리의 지명이 보이지 않는다.
주인을 지킨 충견의 비화
2002년 8월 옥대리에서 혼자 살던 박완수(당시 42)씨가 지병인 간경화로 숨지자 평소에 친자식처럼 키웠던 진돗개(수컷. 2년)가 주인 곁을 지키며 시신을 운구하려던 사람들에게 사납게 짖고 달려드는 바람에 운구작업이 한참 지연되었다. 이 개는 주인을 실은 병원차를 4㎞ 가량 뒤쫓다가 지쳐 집으로 돌아온 후 이웃사람이 주는 음식과 물에는 입도 대지 않은 채 1주일 이상 방문 앞을 지켜, 보는 이의 눈시울을 적셨다고 한다. 이혼 후 혼자 외롭게 살던 박씨는 백구를 자식처럼 때로는 방안에서 함께 자기도 하며 주인이 던져주는 초코파이 과자를 먹고 살았다. 박씨는 지병인 간경화로 전남대 입원치료중 완치가 어렵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죽음을 맞이했다. 백구는 박씨가 기거했던 침대위에서 3일이 넘도록 식음을 끊고 꼼짝하지 않아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백구는 주인박씨가 사망후 10일이 넘도록 곡기를 끊어 영양제를 주사하기도 했는데 마을 주민들이 박씨의 옷가지를 관습에
따라 불에 태우려하자 이를 저지하게도 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주량재와 이천선생학행비
옥대와 향교마을 사이에 주량재(做樣齋)가 있어 후학들을 가르쳤다. 지난 2005년에 철거되었다. 김창대씨의 모친 이사심씨가 90세로 장수하고 있다.
대동두레놀이가 옥대리에서 유래되었으며 의신에서 처음으로 교회가 들어선 곳도 이 마을이라고 한다. 옥대교회의 자취는 밭으로 변했고 일명 "예배당 샘은" 지금도 남아있다. 샘은 옥봉산 자락에 있으며 많은 물은 없으나 년중 마르지 않아 몇집은 식수원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전대인물을 살펴보면 임진왜란 당시 김희남 홍남형제가 진도향교에 모셔진 위패들을 철마산(진도읍 소재)으로 옮겨 병화를 피한 일화는 유명하다. 김충행(覺園)과 김우배(利川)씨의 학행비가 세워져 있다. 또 어란만호를 역임한 김경량, 일제 때 사회활동을 한 김정업(진도민청. 남양군도 전사), 천도교인들이 많이 따랐던 이교정, 의신면 노인회장을 했던 김일순, 국전 특선작가 박은용(石峴), 전 의신면장 박맹수, 면의원을 역임한 김기봉, 박종팔씨, 김복진(서기관 역임), 김도환(초등교장), 김성자(지산중학교 설립 이사장) 씨도 이곳 출신이다. 특히 김일순씨는 뒷산에서 아주 오래된 약초를 캐 들고나서 무려 사흘 동안 취해 잠들었는데 고군면에서 한약방을 하는 허 모씨가 찾아와 남은 찌꺼기를 물으니 이미 닭이 먹었다고 해 그 닭을 사갔다고 한다. 김옹은 그 이후 훨씬 기력이 좋아져 94세를 넘게 장수 했다고 한다.
교육자로 김학기(진도서중 교감) 김명윤(소치약전 저술), 박정식(목포초등교장) 김하자(현 지산중교장) 등이 있다. 농협중앙회 교육원장(이사관)을 역임한 옥농 박종수도 옥대출신이다. 의신중대장 김원태씨도 옥대사람이다. 전 재경진도군향우회장을 역임한 김재권씨는 이 마을의 유일한 제각인 성은사(김해김씨)의 제사장을 매년 맡아하고 있다.
마을 지명 유래와 관련해 박병훈(전 진도문화원장)씨는 중리에 면치소가 있어 ‘옥사장터’가 충분히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이와 더불어 일제시기 신문기사자료에 따르면 마을의 허모씨가 소작인 강영운을 구타해, 아들이 이유를 묻자 그까지도 폭행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지석묘군 바로 아래 신작로를 낼 때 박동칠씨의 조상묘를 이전하는 과정에서 400년이 넘은 두터운 목곽에 옷과 신이 그대로 남아 있어 놀라게 했다. 현재 목포대박물관에 보존되어 조선시대 복식사의 귀중한 자료가치가 있다고 한다.
[참고문헌] • 『진도군지』(진도군·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 2007)
• 『문화유적분포지도』진도군(국립목포대학교박물관, 2006)
마을유래 고증: 김애신(풍수지리 향토연구자). 김영식(전 공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