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의 폭우는 박찬욱의 발을 꽁꽁 묶어버렸다. 어쩌면 산성비에 공들여 조립한 '싸이보그'가 녹슬어 버릴 뻔했다. 하지만 그 장대 '비'속에서 만들어낸 로봇은 다행히 '수정'으로 결합된 것이었다. <무비위크>는 8월 11일 무사히 제조 공정을 마친 박찬욱을, 그의 생일인 23일에 만났다. 그리고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란 꽁꽁 싸인 비밀 보따리를 풀어냈다. 이건 지금쯤 베니스 리도 섬에서 경쟁작 심사에 여념 었을 박찬욱과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 대한 이야기다.
주체(들)의 정신분열, 정신분열(들)의 로맨스
아무도 안 보여주길래, 시나리오를 살짝 훔쳤다.그럼 난 극중 일순처럼 '안티소셜' 진단을 받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훔쳐본 ‘싸이보그’의 세상 속엔 굳이 논리를 찾아도 되지 않을 만큼 포스트 모던한 대사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여기에 박찬욱이 만든 이미지를 접합하면 근사해 보일 것 같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뭔가 좀 달라 보이지만, 확실히 박찬욱의 영화다.
:: 인터넷에 돌던 몇 장의 사진을 봤다. 이 영화 색감이 굉장히 독특하더라.
명도가 높다. 채도도 그렇게 낮지 않다. 너무 팬시한 느낌으로 주진 않으려고 노력은 했다. 그래도 상당히 밝고 가벼운 톤으로 맞춰졌다. 이 영화는 세트 촬영분이 대부분이었다. 로케이션이라고 해도 숲이라든가 그런 곳이어서 색채를 통제하기 쉬웠다. 아마도 지금까지 영화들 중 가장 일관성 있는 비주얼 컨셉트가 관철된 영화가 아닐까 한다. 이 작품은 내 전작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품이면서, 소품인 만큼, 소품이기 때문에 그런 통제가 잘 됐다. 동화적이고 명랑한 분위기, 잘 살아난다. (굳이 그걸 색깔로 따진다면?) 하늘색, 연두색, 분홍색 등의 파스텔 톤이다.
:: 박찬욱 최초의 '로맨틱 코미디’ 라고들 한다. 그런데 존재론에 대한 당신의 철학적 사유가 내포되어 있을 것 같다.
사실 장르영화와는 좀 거리가 있다. 사람은 굳이 철학자가 아니어도 살면서 '나는 어떤 쓸모가 있는 존재일까?' '내가 세상에 어떤 공헌을 할 수 있을까?' 식의, 과연 내가 쓸모 있는 인간인가 아닌가에 대한 걱정을 자주 한다. 이번 영화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다. 주인공 '영군’ 이 꼭 그런 캐릭터다. 이런 면에선 철학적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건 너무 거창하다. 누구나 다 하는 생각이니까.
:: 정신병원에서 주고받는 대사들, 때론 해체적이라고 느껴지더라. 산울림의 노래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 노래 가사처럼 말이다.
뭐 별로 그렇진 않을 것 같다. 언뜻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할 테다. 그래서 각본을 읽었던 스태프들이 꽤나 당황했었나 보다. 하지만 이젠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스토리에 익숙해지면 그런 생각 절대 안 든다.
:: 억압 기제로서의 정신병원을 다루진 않을 것이라 했었다. 그래도 아주 없진 않을 것 같다.
탈출 등에서 그런 장면들이 있긴하다. 그렇다고 그게 서스펜스를 자아내는 건 아니다. 이번 영화속에서 병원은 무슨 기숙사처럼 보인다. 물론 전혀 억압적이지 않은 건 아니다. 약도 먹이고, 밥도 먹여야 하니 약간의 억압은 있다. 전기충격 치료 같은 장면도 아주 보기 편하진 않고, 무서워 보일 때도 있다.
:: 제목의 '싸이보그'는 문득 SF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영군의 망상 속 장면에서 판타지 장면이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많은 종류의 망상 사례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환자들의 머릿속 세계를 다 보여준다. 영군의 판타지도 그런 것 중 하나다. 그 환상 속에선 전투용 사이보그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 지금까지 판타지 성향을 내비치긴 했지만 이렇게 완연한 판타지 영화는 처음이다.
점점 그렇다.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문제가 점점 더 따분해진다. 상업영화 틀 속에서 이런 판타지를 표출해도 되나라며 겁먹은 부분이 예전엔 있었다. 하지만 그런 표현 영역을 넓혀가면 더 좋지 않을까? 환상의 세계를 묘사하는 일은 제도권 내에선 언제나 조심스럽다.
:: 극 중 캐릭터들과 실제 정신분열증 환자들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완전히 다르다. 모두 다 새롭게 만들어냈다. 증세라 봐야 다 정신분열증이고, 안티소셜 이런 정도지 특별한 건 없다. 미국 스릴러영화 보면 이상한 이름 붙은 병명들 많이 나오잖나. 그런 용어는 이번 영화에 없다.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이게 말이 되는건지 정도를 의사들에게 확인받은 정도다.
:: 당신의 영화 속 인물들에게 구원은 있었으나 희망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 영화속에선 그게 언뜻 보인다.
밥을 안 먹던 아이가 밥을 먹고, 약을 먹지 않던 사람이 약을 먹는다. 의사 입장에서 다루는 이야기라면 완치를 목표로 갈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환자들끼리 교류하는 이야기다. 정신분열증이란 것이 얼마나 치유되기 힘든것인지, 그것을 그냥 인정하면서 어떻게든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 그 정도에서 만족하는 정도의 밝은 면이랄까?
:: 이런 변화, 꽤나 의미 심장해 보인다.
그럴 거 없다. 다음 영화에서 또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 영화 만드는 사람이 변했다기보다는 이런저런 영화를 하는 과정에서, 이전과는 다른 영화가 한 편 나오는 정도다.
'비'를 맞고, '수정'을 캐다
이 영화, 몹시도 궁금한 영화다. 멀쑥한 키에 섹시한 몸매, 그것이 만들어내는 정열적인 율동의 주인공 비, 아니 정지훈이란 녀석이 박찬욱 감독과 손을 잡았다. 게다가 임수정이 가세했으니, 이건 마치 순정만화의 캐릭터들이 공포의 제왕을 만난 느낌이다. 하지만 그 조합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란 로맨틱 코미디에서 더할 나위 없는 빛을 발할 것이다.
:: 사실 지금까지 꽤나 묵직한 영화만 만들어 왔다. 젊은 배우들과 한 이번 작업이 좀 신선했나?
젊은 배우들하고 하려고 한 이유, 나도 기분전환이 될까 해서였다. 그래서 이런 아역배우(?)들을 골랐는데도 불구하고, 이게 애들이 나이만 어리지 완전히 애늙은이더라. 그런 보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한숨 쉬며 웃음) 무슨 애들이 나보다 더 일에 열심이고, 실수도 별로 없고, 침착하기까지 하더라. 동심으로 돌아가는 효과는 없었다. (웃음)
:: 이쯤에서 배우이야기 좀 하자. 정지훈(비)의 기존 캐릭터를 바꾸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나?
지훈이가 그전에 한 걸 내가 잘 몰라서 바꾼다는건 없었다. 내가 잘 모르는 신인 배우와 한 편하는 셈 쳤다. 물론 지훈이의 굉장히 에너제틱한 안무와 섹시한 몸매를 가지고 인물을 창조하는 것, 물론 그럴수 있다. 그렇게 한다고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영화는 그런 인물이 나오는 게 아니라서. 가수, TV배우는 다 없다고 생각했다. 오디션을 통해 신인을 하나 기용하고, 그와 어떻게 일을 해나갈 것인가와 유사한 고민을 했다.
:: 임수정 캐스팅에 대해서도 말해달라.
지훈이가 처음에 영화를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저 혼자 나와서 영화를 끌고 나가려는 욕심이 있을 줄 알았다. 이 부분에서 그가 확실히 애늙은이란걸 느꼈는데, 사실 어린 나이에 그런 욕심을 가질 만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질 않더라. 좀 능란한 프로 연기자와 함께 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그게 젊은 여성이 된다면 임수정 누님과 하고 싶다고, 임수정은 나도 좋아했으니까. <장화,홍련>때도 내가 김지운한테 강력 추천하기도 했었고.
:: 임수정 좋아했는데 왜 이제서야 함께 작업했나.
사실 (김)지운이보다 내가 더 좋아했다고 할 수 있다. 난 임수정과는 운명적인 만남이라니까. (웃음) 난 티비 전혀 안보는데, <학교>인가? 그 드라마를 지나가다 우연치 않게 봤다. 그냥 쓱 지나가다 "어? 누구지?"라며 다시 봤던 기억이 있다. 한 십분은 봤을거다. 어린 친구가 연기를 굉장히 잘하는구나 싶어 이름은 몰랐어도 학교 어디에 나오는 누구, 특징 정도는 기억해 뒀다. 그 정도로 어린 배우를 내가 기용할 일이 지금까진 없었다. 그러다 <장화, 홍련> 오디션장에서 처음 만났던 거다. 반갑더라.
:: <올드보이> 강혜정과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임수정의 매력을 비교한다면?
혜정이가 훨씬 더 강하다. 수정이는 좀더 백지 같다고 할까? 아마도 맡을 수 있는 배역의 폭은 수정이가 더 넓을 것 같다.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나 말이다. 그런데 혜정은, 예를 든다면 그녀는 신사임당 역할은 못할것같다. 하지만 어떤 적역을 맡았을 때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에너지를 표출할 수 있는 배우가 아닐까 싶다.
:: 임수정, 사실은 조금 어린 소녀 캐릭터를 많이 해왔다. 어떤 타입의 배우인가?
자기 스스로는 감독 의존형의 배우라 잘못 알고 있는것같다. 그건 착각이다. 평소에 성격이 내성적이라 그런건지, 그런 면 때문에 연기도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다. 싸이보그 현장에 와서는 별로 그러질 않았다. 말로만 "사실 저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어요"라 하고, 슛 들어가면 자기가 알아서 잘 한다. 그래서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ㄷ.
'강호'의 의리로 '박쥐'를 날리다.
박찬욱의 차기작은 널리 알려져 있듯, 송강호 주연의 뱀파이어 영화 <박쥐>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괜찮다고, 손 흔들며 껴들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박쥐>를 먼저 만났을지도 모른다. 2007년 가을, 박찬욱의 검은 ‘박쥐’는 검은 그림자의 힘찬 날갯짓을 시작한다. 물론 그 전에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그 동력을 마련할 것이다.
:: 사실 지금까지 많은 관객들이 박찬욱의 영화를 잔혹하다는 이유로 잘 보지 못했다.
이번 영화는 그 사람들을 위한 영화다. 그동안 내 영화를 좋아했던 사람들은 아마 실망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보다는 이런 사람들이 더 많으니까. (웃음)
:: 박찬욱의 팬들은 어쩌면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그럴 것 같다. 직접적인 '룩'에서부터 인물과 폭력 묘사 등 모든 면에서, 복수 3부작을 좋아하는 취향의 관객들에겐 상당히 닭살 돋는 영화일 것이다. 나두 겨우 찍었다. 두 '어린이’들이 "이 정도는 해야 돼요" 라고 해서 할 수 없이 찍었지. 얘들이 그러니까, 이 정도는 괜찮은가 하면서 따라간 거다.
:: 개봉이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정확히 언제쯤인가?
내가 납품할 수 있는 날짜와 cj엔터테인먼트 배급 스케줄을 조정하다 보니 12월 7일 혹은 그 한 주 전 정도가 될 것 같다.
:: 정지훈의 팬들을 위해 의도적으로 방학 개봉을 잡은 건 아닌가?
물론 지훈이가 있으니까. 그리고 15세, 아니 12세 관람가를 목표로 하는 영화니까 방학 개봉이 더 좋긴 하다.
:: 꽤나 오래전부터 준비하던 뱀파이어 영화 <박쥐>는 언제쯤 촬영에 들어가나.
아마도 가을, 9~10월쯤? 시나리오라도 나왔으면 쉴텐데, 지금 없으니. 말도 마라. 그것 때문에 화난거 생각하면.(웃음)
첫댓글 영화토론방에 올릴까 하다가 성격상 여기가 어울릴거 같아서 여기다 올려요 ㅎㅎ;;
일랑~? 혹시 더파이팅보세요? ㅋㅋ
더파이팅 열심히 봤었다만 ㅎㅎ 막둥님은 클갤러 신가욤 ㅇㅅㅇ? 클갤에두 그닉 쓰시는분 있어서욤
방학때 마다 개봉하는 센스~ 우와 길다ㅇ_ㅇ;; 행복이나 사이보그는 책 같은거 안 나왓죠ㅎㅎ
오~~ 지훈님이 수정님을 사~알짝 추천?.. 오오오!~~ 기사 읽으니 진짜 수정님은 명품배우같음!.
흠.. 박찬욱감독 역시 수정님을 찜? 해두고 계셨군요
음 12월달에 개봉하는 센스 쵝오1!!
'12월7일 혹은 그 한주' < 잊지 않겠다..ㄱ-
학교때부터 수정언니를 좋아하셨구나~~그때부터 알아보셨다니 진짜 대단^^
역시역시 -_-乃
비때문에 방학을 겨냥해서 개봉-?? 인정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