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예비평 1998 겨울. 통권 31호
환경주의 이데올로기와 에코아나키즘
구 승 회 (서양철학, 동국대 교수)
1 세 가지 문제제기
서론을 대신해서 나는 오늘날 호경기를 누리고 있는 환경, 생태라는 반환경적이고 반생태적인 이념상품의 판매전략 에 대해 몇 가지 푸념을 늘어놓는 것으로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첫째: 한국의 많은 이론의 도매상 들은 외국의 이런 저런 사상가들을 도식화하고, 마치 명백한 합의라도 있는 것처럼 임의로 주의(isms) 라는 상표를 붙인다. 외국의 환경 논의를 일반화해서 보여 준다는 점에서 장점도 있지만, 자칫하면 기왕의 틀에 억지로 꿰 맞추게 되는 위험도 있다. 루돌프 바로(Rudolf Bahro)의 경우가 그런데, 바로 역시 생태 문제에 관한 한, 북친과 동일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만, 아나키즘적인 시각은 아니다. 그런데도 생태사회주의 라는 이념적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양 광고되고 팔려 나간다.
둘째: 외국의 한 저자가 불확실한 기대지평 위에서 어렴풋하게 제시한 생태계 위기, 환경 위기 에 대해 내놓은 처방을 도식화, 체계화, 경전화를 일삼는 한국에서의 학문적 전통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녹색사상이 우리 사회의 이념의 중심에 서기 전에 한국에서는 스탈린이 서유럽의 맑스주의를 소비에트 맑스주의화 했던 방식을 답습했으며, 이제 생태․환경 문제와 관련해서는 부유한 미국 중산층 아주머니의 환경적 자각을 표준으로 하는 미국 환경이데올로기 를 답습하고 있다. 우리는 이를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셋째: 오늘날 한국에서는 환경 문제에 대한 논의는 두 방향에서 주로 논의된다. 하나는 정치학이나 사회학, 혹은 사회운동의 차원인데, 주로 시스템(정치적 지배구조, 권력)이나 전략, 혹은 물질적 생산의 사회적 재구성 등이 논의된다. 다른 하나는 기술과학적인 처방으로 환경공학, 생명공학, 의학에서 현실적이고 가시적인 처방이 주로 논의된다. 환경기술공학이 아무리 발전하여도 지구적, 우주적 차원에서 보면 그것은 마치 자기 집안만 깨끗하면 골목길이나 동네 그리고 자기가 거주하는 도시의 생활환경은 아무리 더러워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키우는 기술에 불과하다.
이런 두 방향에서의 이념 생산자들은 생태계 위기에 대한 철학적, 윤리학적 반성에 대해 "지금 팔당호가 썩어가고 있는데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말한다. 실로 생태철학적 반성은 짐짓 강력해 보이는 행위지침 앞에 무력하기만 하다. 물론 환경사회학, 환경정치학에 기초한 환경운동은 현실적 처방이며, 그런 의미에서 철학적 반성에 앞서는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환경 문제, 생태 문제의 원인은 인간 행위의 자기모순에 기인하는 것이므로 도덕적 반성이 중요하며, 환경 문제는 처방의 기술 이 아니라, 개인과 집단의 도덕적 반성의 기술 이어야 한다.
2 환경주의 이데올로기
근대성의 기획(Projekt Moderne)이 수난을 겪고 있다. 데카르트가 문제를 제기하고 칸트와 헤겔이 완성한 근대(성), 혹은 그냥 영어로 '모더니티'라 부르는 철학적 세계구상은 칼 맑스, 막스 베버, 게오르그 루카치,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회이론을 거치면서 문명비판 의 형식으로 정형화되었다. 이 비판은 두 가지 서로 대립되는 경향으로 나타났는데, 하나는 {계몽의 변증법} 같은 근대성의 양면성(문명과 야만)에 대한 비판이고, 다른 하나는 근대성의 핵심적인 규준들을 거부하는 포스트모던적 경향이다. 환경 위기 와 생태계 위기 라는 테마가 호경기를 누리게 되면서 모더니티는 다시 한 번 비판의 표적이 되고 있다. 이들은 근세 철학의 주체중심, 이성중심적 세계관, 결정론적이고 환원주의적인 과학, 그런 과학이 낳은 기술 문명의 불가역성, 자본주의 경제의 초월적 힘 등을 비판의 논거로 삼는다. 그러면 모더니티의 세계 기획이 오늘날의 위기 의 원인이라는 철학적․사상사적 반성이 도무지 정당한가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2-1. 위기에 대한 철학적 반성 환경오염은 현대 문명의 독특함이 아니다. 기록에 의하면 고대나 중세 시대에도 환경오염은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인(Sumerer)의 문명, 로마․잉카문명이나 마야문명을 꽃피웠던 아메리카 인디언의 생활 양식이 자연스럽 기는 했겠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환경적 낙원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철학자, 환경운동가, 문명비판가들은 19세기 산업혁명 이후에 나타난 환경오염은 과거의 환경오염과 비교해서 근본적으로 다른 독특함 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과거의 오염은 생태계의 자기 정화 능력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오염, 혹은 자연 파괴였던 데 반해, 오늘날의 환경 위기, 생태계 위기는 회복 불가능한 최종적인 위기 라고 진단하기를 좋아한다. 아마도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살던 시대를 최악의 위기 시대, 환난(患難)의 시대로 인식하고 싶어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환경론자들은 부존 자원의 고갈, 인구 증가와 식량 고갈, 환경오염이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급격히 확산되어 미래에도 똑같은 추세로 계속되리라는 예측에 근거하여 생태계 전반의 위기를 진단한다. 선진국,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이런 비관적인 목소리가 커지면서 지구가 인간을 감당할 만큼 무한한 태양에너지와 중력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런 에너지는 기술을 통해서 핵에너지, 화석에너지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든가, 인구 증가의 한계, 식량생산 방법의 혁신, 낭비 없는 자원 이용 등 근대 이후의 인간의 대(對)자연 활동과 기술의 합리적인 활용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은 감히 목소리를 내기 어렵게 되어 버렸다.
인간이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하고, 예측 기술(Technik des Voraussagens)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지구의 미래 가 어떠할까에 대한 정확한 과학적 예견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의 기술발전 추세와 미래에의 영향을 전망을 함에 있어서 우리는 가능한 한 많은, 그리고 자세한 변수들을 면밀히 고찰함으로써 생태계 위기가 불가피한 것인지, 돌이킬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보다 근접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생태계 위기 가 가짜라거나, 잘못된 공포분위기 조성 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은 아니다. 우리가 낙관적인 목소리에 주목함으로써 위기 의 본질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고, 위기의 본질과 미래의 인류에게 닥칠 재앙의 규모를 정확히 아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오늘날 환경운동가들이나, 생태론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위기 는 지구환경, 산업화, 기술 수준, 인구, 식량생산 등 현재의 조건을 변화될 미래의 상황과는 무관하게 단순 투사 함으로써 위기 를 자명한 것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위기를 확대재생산 한 면이 없지 않다. 즉 '만약 인구가 지금처럼 증가한다면…', 혹은 '산업화가 지금처럼 지속된다면…'이라는 가정에 근거해 있기 때문에, 오직 이 가정에 충실하기만 하면 되지, 현재의 위기 추세가 미래에도 똑같은 세력을 가지고 계속될 것인지, 아닐지에 대해서는 대답할 의무도 없고, 알 수도 없다는 주장이다.
한 마디로 생태계 위기에 대한 대부분의 예측은 과학적 토대가 부족한 추측이거나 투사(projection)일 뿐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환경론자, 생태론자들의 미래에 대한 예측이 정당하지 않고,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며, 환원주의적인 예측이라는 비판이 "진정한 위기가 아니므로 걱정할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재앙의 규모라는 문제는 특히 중요한데, 어떤 환경적 재앙이 언제 어느 정도의 위험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것인지를 정확히 계측하는 일은 사실 불가능하다. 현재의 경제적, 기술적 어려움으로 인해 겪는 환경 재앙은 어느 시기에 한꺼번에 해결될 수 있으며, 또 지금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요인들이 갑자기 심각한 재앙으로 닥쳐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가 위기를 의심하는 이유는 현재의 과학적, 기술적, 경제적 수준에서 재앙으로 분류하는 모든 환경 문제는 사실 우리가 거기에 맞춰서 삶의 패턴을 바꾸어야할 만큼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 나아가서 새로운 윤리적 패러다임, 말하자면 신윤리학(Neue Ethik)의 요청은 현재의 위기를 수정하는 일보다 훨씬 어려우며, 새로운 윤리학이 정착되기 훨씬 전에 이 지구생태계는 그 평형을 상실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어떤 경우에도―내일 당장 환경적 재앙으로 인하여 지구 생태계의 종말이 온다 하더라도― 인간이 도덕의 주체임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자연은 인간 상호간의 의무설정 및 책임관계를 다루는 윤리학의 토대 내에서 논의될 것이기 때문이다.
2-2. 환경운동의 허구
인간은 분명 자신의 거주지인 지구 생태계 를 파괴할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 환경운동은 지구 생태계를 지금보다 낳은 상태로 환원하거나, 최소한 현상태로 유지하자는 계몽운동이다. 그래서 모든 환경운동은 보수적이다. 왜냐하면 환경운동은 한 쪽 발은 현재의 문명적 토대 위에 두고 다른 쪽 발은 미래의 반문명적(자연주의적) 토대 위에 두기 때문이다.
생태학적 위기와 관련하여 인류가 풀어야 할 과제 중 가장 어려운 문제는 현재 생존해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도덕적 주체로서의 권리를 보장해 주면서, 동시에 그것을 제한하는 강력한 국제적인 협력기구 혹은 국제적인 환경통제기구를 만드는 일이다. 오늘날 많은 환경론자들은 앞의 목표보다는 뒤의 목표에 강조점을 두고, 현재의 정치, 경제, 사회적 행동규범은 생태, 환경과 양립할 수 없으며, 파괴가 필연적이기 때문에 개인의 자율적인 행동과, 모든 인간중심적인 가치체계를 허물어뜨려야만 환경적으로 바람직한 세상이 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두 가지 잘못된 전제를 감추고 있다. 하나는 생태계의 위기는 극단적인 처방이 아니고는 회복될 수 없다는 검증되지 않은 전제를 가지고 있다. 이런 가정은 위기의 심각성을 광신하여 아무 근거도 없이 인간의 자존심, 긍지(인간의 본래적인 권리와 존엄, 미적․과학적 취향) 등을 포기하라고 요구한다. 분명히 말하건대 어떤 에코토피아, 환경 천국이 온다하더라도,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고는 무의미한 일이다. 또 하나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오로지 국가나 관료제도 등 기존의 사회구조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강력한 통제력을 갖춘 국가만이 환경, 생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실제로 많은 나라에서 환경보전이라는 이름 하에 그런 강제와 통제, 억압이 이미 시작되고 있다. 예를 들면 프레온가스 사용금지, 디젤 승용차의 정화장치 의무화, 중국의 산아제한 등등.
현실적인 모든 사회운동은 일정한 목표와 지향점, 구체적인 대항이데올로기(Kontra-ideologie)를 가지고, 둘 혹은 여럿으로 나누어진 계급, 계층의 이해관계를 표현하는 경우라야 사회적 실천의 힘을 얻는다. 이는 어떤 경우에도 사실이다. 환경운동이 하나의 사회운동인 한, 실제로 있건 없건 간에 불가피하게 적을 만들고, 계급을 만들고, 타도해야 할 적대적인 문화양식을 설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이제 환경친화적인 계급과 반환경적인 계급간의 싸움으로 될 것이고, 소비주의, 생산지상주의, 계량화, 효율성에 익숙한 모든 자본주의적 미덕을 악덕으로 규정해야만 한다.
환경운동은 여타의 시민사회운동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성질의 운동이다. 환경 문제는 인간사회 내부적인 문제가 아니며, 계급간의 문제도 아니며, 선택 가능한 여러 방편들 중 어떤 잘못된 방법을 선택했기 때문에 생기는 재앙도 아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집단적, 관료적 이해관계에 의한 사회적 통제로부터 파생한다. 통제를 즐기는 관료 세계와 돈벌이를 즐기는 자본 세계간의 이해관계가 빚어낸 필연적인 산물이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의 환경, 생태 위기는 바로 이들 환경론자가 신뢰하는 국가에 의해 제도적으로 추진되어 온 자연에 대한 폭력의 결과가 아닌가?
급진 생태론자의 이런 주장을 계속 추적하다 보면 결국에는 생태론적, 환경론적 전체주의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결국 자유민주주의든 공산주의적 전체주의, 사회주의적 전체주의든 이런 국가에 대한 지나친 신뢰와 기대는 "생태독재( kodiktatur)"를 낳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근대 과학정신을 비판하고, 계몽의 바다를 건너 실증주의의 찬란한 이성의 태양 아래 서 있는 "창백한 모더니스트"를 비판해 온 문명화된 야만 과 다를 바 없다. 근대적 합리주의, 이성중심주의, 주체철학은 유럽중심, 백인중심, 남자중심 이데올로기의 철학적 표현이며, 그것의 물질적 표현인 문명 이 우리의 삶 전체를 제어하고 있다.
2-3. 미국 환경 이데올로기
만약 레스터 브라운(Lester Brown)의 {월드워치 보고서 World Watch Report}를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우리는 환경독재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30개 언어로 수 백만 부씩 발행하는 이 보고서 는 온갖 통계자료로 우리를 협박, 위협하고 있다. 예를 들면 '곡물 생산이 지난 30년간 줄어들었으며, 곡물 생산은 제3세계 인구증가를 결코 따라가지 못할 것이므로 우리의 선택은 두 가지 밖에 없다. 에티오피아처럼 전염병과 내란을 막지 말고 내버려둠으로써 인구 증가를 억제하거나, 중국처럼 적극적으로 산아제한 정책을 펴는 것이다' 등등.
모든 이데올로기는 강력한 유토피아와 현실 분석에 근거한 지식의 절묘한 결합이다. 환경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를 대적할 가장 강력한 양식으로 등장하고 있다. 거기서는 잘 먹고, 건강하고, 금연운동, 자전거 타기 운동, 채식주의 운동, 황무지와 손상되지 않은 자연을 찬양하고(할리우드 서부영화에 나오는 총잡이의 황무지에 대한 존경심을 보라!), 엄숙하고 금욕적인 섹스를 하는……, 이른바 르네상스와 근세 고전주의 시대에 마녀를 사냥했던 청교도, 예수 재림교회, 여호와의 증인, 모르몬교도들의 정신의 산물이다. 한마디로 환경보호주의는 양심의 가책을 느낄 만큼 풍요를 누리는 나라, 미국이 아니고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현대 환경운동의 뿌리는 미국 전통 종교라는 이데올로기의 다른 표현이다.
이것을 우리가 비판 없이 수용하여 그대로 따르다간 우리 모두 에코파시스트( kofaschisten) 가 될 것이다. 이 미국 이데올로기는 미국 전통종교의 엄숙주의적 율법에 따라 흡연가를 처벌하고, 육류를 많이 섭취하는 사람을 감옥에 보내고, 우리 모두는 신맬더스주의자가 되어 아이를 둘 이상 낳은 여자를 화형에 처하게 될 것이다. 파시즘이 가난한 반항아들이 모인 유럽의 카페에서 태어났다면, 현대 환경주의는 환경적으로 쾌적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뉴저어지(New Jersey)의 아주 고상한 한 단체에서 시작된 전형적인 미국 이데올로기이다.
그러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환경이라는 이름 하에 저질러지는 협박과 공갈 이 어떻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공민권이 가장 발달한 나라 미국에서 어떻게 환경 독재와 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있는가? 적어도 미국식 환경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과격한 환경론자는 지금까지의 인간 도덕의 중요한 척도였던 정의, 인간의 존엄, 인격적 가치, 인간의 고유한 권리에 대한 우리의 관심사를 완전히 포기함으로써만 에코토피아는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는 자유주의든 사회주의든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순전히 "정치적 상상력을 동원한 프리미티비즘(primitivism)"이다.
3 머레이 북친과 에코아나키즘
3-1. 에코아나키즘이란 무엇인가?
에코아나키즘( koanarchismus) 은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려고 한다. 하나는 생태, 환경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지배와 권력관계의 문제이다. 즉 생태 문제는 과학과 기술문명이 만들어 낸 산업사회의 권력관계는 그냥 놔 둔 채, 인간의 자연에 대한 물질적, 도덕적, 영적인 태도의 변화만을 의도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다.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은 외연적, 개념적으로는 자연생태론(심층생태론이 자연생태론의 한 예이다) 에 대립해서, 그리고 내포적으로는 환경주의에 대립해서 자신의 에코아나키즘 을 제시한다. 북친의 에코아나키즘은 19세기 러시아의 지리학자요, 유명한 아나키스트였던 페터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에게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고전적 아나키즘과는 달리, 에코아나키즘은 페미니즘적 이상과 공동체주의적 비전을 포함한다.
심층생태학이 말 그대로 순수하게 학문분과를 지칭하기보다는 심층생태운동 으로 출발했듯이, 에코아나키즘 역시 사회생태학 운동(Social Ecological Movement) 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북친은 자신의 생태사상을 사회생태론(학) 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사회생태학이라 하면 엄밀하게 학적(wissenschaftlich) 토대가 마련된 생태학의 하부분과 쯤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더욱이 북친은 환경, 혹은 생태 문제를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을 반대했던 점을 상기한다면― 나로서는 좀 중립적인 의미의 에코아나키즘 이라 부르고자 한다.
3-2. 에코아나키즘의 세계구상
북친이 심층생태주의와 자신의 입장을 구분하기 시작한 것은 1985년 무렵부터이다. 근대 기계적 세계관의 부정, 생태중심주의적 접근, 사회적 위계와 지배 관계의 철폐 등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에코아나키즘은 심층생태론과 여러모로 유사점이 있다. 그러나 에코아나키즘은 자연과 사회의 일원성과 연속성을 주장한다. 인간과 자연이 평등한 수평적 연대를 유지했던 원시 자연사회의 다원성과 다양성을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의 평등을 생각한다.
에코아나키즘은 생태계 위기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사회적 이라는 형용사를 생태학에 첨가함으로써 사회가 자연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에코아나키즘은 "비인간에서 인간을, 자연에서 사회를 도출하는 작업에서 불변의 법칙성을 찾고자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은 사회에 생태윤리, 즉 자기선택과 진화를 통한 자유와 개체성의 보장에 근거한 상이성과 참여의 원리를 제공해주며, 지배와 위계질서를 비교, 변경하는 패턴을 제공하고, 기존의 위계질서와 지배를 부정하도록 해준다. 따라서 에코아나키즘은 과정의 철학이며, 참여의 철학이라고 주장된다(M. Bookchin, The Modern Crisis, Montral: Black Rose Books Ltd., 1987, p.16.)."
북친의 에코아나키즘적 유토피아는 얼핏보면 로데릭 내쉬(Roderick Nash)가 그려낸 '아름다운 정원 풍경'과 유사한 점이 많다. 하지만 북친은 1974년의 책에서 미생물학자 르네 두보(Rne Dubos)를 최초의 에코아나키스트로 기술하고 있다(M. Bookchin, Our Synthetic Environment, NewYork: Colophon 1974, p. xiv.). 두보와 북친의 견해는 결코 같지 않지만, 인간에 대한 견해는 놀랍도록 일치한다. 북친은 생태학을 보다 근본적인 사회학적인 개념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북친은 크로포트킨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현재의 억압적인 산업 자본주의의 세계를 반위계적 사회관계에 근거한, 탈중심적-민주적 공동체로 변형시켜야"하며, 여기서는 "태양에너지와 같은 생태기술, 유기 농업, 인간적인 규모의 산업이 지배적이 될 것(M. Bookchin, Remaking Society: Pathways to a Green Future, Boston: South End Press 1990, p. 155)"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북친만이 이 과격한 에코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에 의지해 있는 것은 아니다. 심층생태론자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급진생태론자들 역시 크로포트킨의 공동체주의, 탈도시화, 산업의 탈중심화, 대안적 기술, 유기 농업, 성장의 억제, 새로운 자연주의적 감수성이라는 이념을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북친의 에코아나키즘은 아주 의식적으로 사회생태론적 토대 위에서 "생태사회"를 위한 청사진을 제시한다. 환경윤리학적으로도 그는 클락(John Clark)과 더불어 비인간중심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환경윤리의 차원에서 보면 북친은 두보와 다른 입장이다. 토마스 베리(Thomas Berry)의 말을 빌리자면 "두보의 입장을 인간생태학으로 부른다면, 북친의 그것은 사회생태학(에코아나키즘)이다(Thomas Berry, The World of Rne Dubos, in: Amicus Journal, (Winter 1991), p. 52)."
북친은 인간의 거주 환경이나, 지구의 자연생태계에 대한 관리, 보호, 보존의 이념은 나쁜 것은 아닐지라도 여전히 보수적이며, 인간중심적이라는 발상이라는 것이다. 사회관계에 대한 생태학적 혁명이 선행되지 않으면 어떤 환경운동도 환경관리주의, 환경관리윤리(Ethics of Environmental Management)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장기간의 지배와 억압적인 인간 정신과 체제인데, 그것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그리고 인간의 자연에 대한 억압과 지배를 포함한다. 인간과 자연의 갈등은 인간과 인간 간의 갈등이 확대되어 인간과 자연의 갈등이 발생한다. 생태운동(ecological movement)이 모든 측면에서의 지배의 문제를 포괄하지 않는다면 우리 시대의 생태운동의 근원적인 원인을 제거하는 데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생태운동이 단순히 오염 통제나 환경 보존을 위한 통제라는 개혁적 수준에 머문다면, 한마디로 보다 광범위한 혁명의 개념으로 다루지 않고, 환경주의(environmentalism) 에 머문다면 자연적, 인간적 착취라는 기왕의 체제에 봉사하는 운동이 되고 말 것(M. Bookchin, Toward an Ecological Society, p. 43)"이라고 갈파한다.
4 휴머니즘의 옹호를 위하여
4-1. 반인간주의 히스테리
오늘날 인류 문명은 치유 불가능한 위기상황 에 처해 있다. 그것은 생태, 환경의 위기로 인해 파멸할지도 모르는 문화적, 문명적 불구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의 창조적인 능력에 대한 창백한 불신 때문이다. 사실 현대성 비판 이라는 이름 하에 많은 위대한 철학자들의 이성에 대한 히스테리적인 불신은 인간의 자존심을 퇴보시켰고, 인간성과 인간 이외의 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도덕적으로 의미 있는 삶을 창조하는 인간의 능력을 퇴화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환경문제는 인간의 자존심이라 할 이런 도덕적 능력을 빼앗아 버린 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인간정신은 역사를 통하여 단 한번도 인간의 이념 에 대한 희망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이 희망은 도덕적, 사회적 인간성 회복이 가능하리라는 믿음이다. 종으로서의 인간이 보다 나은 도덕적, 사회적 이법(logos)을 성취할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급속한 탈도덕의 시대인 오늘의 인간 조건이야말로 참담한 현실적인 위기 가 아닐 수 없다.
새로운 천년의 시간을 맞이하게 되는 우리 시대는 역사적인 인간성의 진보와는 전혀 다른 정신적인 메시지를 선포한다. 과학, 기술, 자본의 진보를 믿지 말 것이며, 어떤 고상한 도덕도 인류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라고 가르친다. 인간이 인간 이외의 생명계를 지배하는 특별한 종으로 생각하는 타고난 오만 때문에 도덕은 인간을 자연과 결합시켜 주기보다는 스스로를 파괴하는 악마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오늘날 철학자, 예언가들은 '모든 도덕을 타도하라!', '스스로의 능력을 불신하라!', '인간은 자연의 티눈이거나 암세포이기 때문에, 인간중심의 충동을 버리고 벌레처럼 사소해지라!'고 가르친다.
이 모든 퇴폐적인 비관주의의 구호들은 무생물의 자연에 대하여, 인간 이외의 생명체에 대하여, 그리고 동종인 인간에 대하여 공격적인 심성을 자극해 왔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인류의 위대한 성취가 좋은 것인지 , 나쁜 것인지 알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한마디로 휴머니즘의 포기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인간의 힘이 악마적인 이유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명을 통제 불가능한 파국으로 이끌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를 암세포 로 규정할 수 있는 능력 때문이다.
핵무기와 핵물질의 증가, 제3세계의 기근, 문화 유산의 파괴, 생물-생태계의 회복 불가능한 오염, 이 냉혹한 현실에 직면하여 대중은 이성주의를 버리고, 쉽게 염세적인 감각주의로 침잠하였으며, 자연-물리적 힘에 의거한 대중의 삶은 신비적, 유사-신비적인 신념의 배후로 숨어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개인은 점점 더 사소한 한 마리 풀벌레인양 취급된다.
19세기 유럽을 "광적인 확신의 시대"로 냉소했던 하이데거의 현대비판은 반세기가 채 지나기도 전에 거꾸로 "상식적인 이성의 자기확신"을 호소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생태계, 환경의 위기는 인간의 자존심의 위기를 극복할 때 비로소 해결 가능한 문제가 될 것이다.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이 인간을 마법에서 풀려나게 했지만, 계몽된 이성의 활용은 인간을 다시 야만적인 신화에로 되돌려 놓았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이성의 재마법화가 필요한 시대이다.
그러나 휴머니즘의 힘은 명백히 자유의 확대로서 공적인 도덕성을 진보시켜 왔다. 사적인 도덕이 증진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미니마 모랄리아(minima moralia)로서의 정직과 신뢰에 기초해서 이웃, 마을, 공동체 내의 친밀한 삶의 방식을 강화해 왔다. 하버마스(J. Habermas)가 지적하듯이 근대의 합리적 세계관은 여러 부정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그 긍정적인 부분은 결코 포기될 수 없다.
이성을 건방지다고 혹평하고, 인간성의 이념에 대한 신뢰는 역사적으로 볼 때,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를 부추겼을 뿐이며, 오만하게 자연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겸손해지기만 하면 아무 것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일련의 신념체계를 비판하는 일이야말로 생태-환경문제 해결의 첫 출발일 것이다. 이런 신념체계가 어디서부터 오는가? 미국적인 보수주의, 낭만주의적인 사회주의, 신맬더스주의, 퇴폐적인 포스트모던 등이 그 배후이다. 생태.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휴머니즘은 복원되어야 한다. 그러나 휴머니즘을 고양하되, 칸트가 그랬듯이 휴머니즘의 본질인 이성 을 너무 높이 매달지는 말자! 그렇게 되면 너무 높이 있어서 휴머니즘은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대지는 여전히 반인간주의라는 암흑 속에 머물 것이기 때문이다.
4-2. 사회비판적 세계관으로서의 에코아나키즘
휴머니즘의 옹호!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나는 세속적 자연주의자로서 이성적 이라는 개념을 세련되고 추상화된 철학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협동과 감정 이입, 생명권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공동체와 연대라는 새로운 개념을 포괄하는 살아 있는 합리성을 지칭하는 의미로 쓴다. 인간과 인간 외 생명 대부분의 생존을 위협하는 오늘날의 약탈적 사회는 이러한 실존적 형태의 이성이 인도하는 사회로 대체되어야만 한다. 내가 제시하고자 하는 비전은 바로 이러한 사회비판적 세계관으로서의 에코아나키즘 이다.
나는 현상유지와 타협하지 않고, 모든 것을 포함하는 초자연적 우주 를 향한 인간의 자기 말살을 바탕으로 구성된 반인간주의에 반대하는 것만큼이나 자기 확장과 약탈에 근거하여 구성된 휴머니즘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인간은 세계에 의미와 이유를 부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생명체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또 한편으로 인간은 바로 이 비범한 능력 때문에 인간 외 존재와 지구 전체에 대해 확고한 책임감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나는 지나치게 낙천적인 박애주의나 혐오스러운 염세주의에 근거하지 않고 이 두 가지 편향된 견해를 모두 초월하는 새로운 견해를 개진하고자 한다. 천사 같은 인간과 악마 같은 인간이라는 이원론을 지양하고, 한편으로는 인간과 인간 외 생명과의 유사성을, 또 한편으로는 인간 자신의 특수한 요구를 정당하게 강조하는 세계관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인간을 폄하하고, 문명을 추구(趨狗-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표현. 짚으로 만든 개)로 규정하는 많은 담론들은 사회적․생태적 책임감을 허용하는 다양한 견해를 제시하기보다는 생명중심주의나 인간중심주의 중에서 어느 한 극단을 선택하게끔 강요한다. 이 양극단이 만들어낸 공백은 상보성의 윤리학 에 기초한 새로운 휴머니즘에 의해 채워져야 한다. 인간 조건에 대해 좌절하고 분노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을 테지만, 그렇다고 휴머니티를 격하하거나, 하물며 인간의 고유한 이성 능력을 악마적인 것 으로 치부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인류가 엄청난 역경을 딛고 이룩한 업적을 생각할 때, 세계 속에서―특히 사회적․생태적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이성이 최대한으로 발휘되어 인간이 반드시 거두어들인, 또 거두게 될 성과를 생각할 때, 인류를 소중히 여길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오늘의 문예비평. 1998겨울. 통권3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