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사 입구 티베트 박물관 앞의 티베트 탑>
< 티베트 박물관 앞 뜰의 금강역사상. 일반적으로 금강역사상은 울뚝 불뚝한 근육에 험상굿은 얼굴 표정으로 절 입구를 지키고 있으나, 이 역사는 힘은 장사이나 어리숙하여 절을 수호하기는 커녕 절 입구에 어린 아이들이 몰려와서 술래잡기를 할라치면, 제 본분도 잊고 함께 어울려서 절을 난장판으로 만들듯 싶다. 누구의 솜씨인지는 모르나 만든 이의 순박한 심성이 절로 느껴진다. 꼴에 S자형 포즈를 취하고 있어서 더 재미있는 형상이 되었다. >
< 대원사 입구, 본래 입구는 옆쪽이나 티베트 박물관 앞에 주차장을 만들어 놓았기에 입구로 사용되는 듯 하다. >
<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으나 현판을 보니 세계일화문이다. 들고 나는 문으로써의 기능은 없는 듯 하고 상징적으로 세워 놓은 것 같다. 다음에 다시 방문하게 되면 주석하시는 스님께 여쭤봐야 겠다. >
< 세계 일화문을 두르고 있는 타원형의 담장 끝 부분의 위에 올려있는 석상. 동자(선재동자? 또는 문수보살?)가 연꽃 공양을 하는 모습인 듯 하다. 지나가는 나그네는 그저 장난삼아 머리와 어깨 위에 몇 개의돌맹이를 올려 놓았으나 동자에게는 천만근의 무게일 수 도 있다. 돌에도 불성은 있다. -장콩생각->
<대원사 극락전 오르는 길 옆에 놓여져 있는 보살상. 민둥머리에 지긋이 감은 눈, 가지런한 입술에 쥘 듯 말 듯 하면서도 힘들이지 않고 여유있게 쥐어진 지권인의 손모양이 인상적이다. 무슨 보살이려나? 뒷 배경을 간결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 옛 솜씨를 발휘하여 수동으로 찍어 보았다. >
< 대원사 자진국사 부도. 자진국사는 고려 원종때 승려로 조계종의 5대조이다. 원오국사로 많이 알려져 있다. 송광사에 살면서 이곳 대원사를 중창했다고 한다. 부도는 고려 후기 것으로 이전 것에 비하여 형식이 많이 간략화 되었으나 나름대로 운치를 느낄 수 있었다. 지방 유형문화재 35호로 지정되어 있다. >
< 한류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김교각 스님상. 교각 스님은 신라 성덕왕의 아들로 왕자였다. 24살에 출가하여 지장이라는 법명을 받은 뒤 삽살개 한마리, 소나무 종자, 볍씨, 금지차라는 신라차를 가지고 중국 구화산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초인적인 고행과 뛰어난 법력으로 대중들을 교화하다가 99세 되는 794년 앉은 채로 열반에 들었다. 그는 죽으면서 '내가 열반에 든 뒤 내 몸을 화장하지 말고 돌함에 넣어 두었다가 세 해가 지난 뒤 열어 보아라. 만일 그때까지 썩지 않으면 그대로 개금하여라'하였는데 대체나 3년이 지나 돌함을 열어보니 시신이 그대로였다. 그래서 시신에 금물을 입혀 등신불로 만들어 모셨다. 그 후중국사람들은 스님을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받들게 되었고 중구 구화산에 스님의 육신불을 모신 육신보전을 세웠다. 스님이 남긴 '산을 내려가는가'라는 차시는 우리나라 사람이 지은 최초의 차시라고 하는데, 당시집에 수록되어 있다. 대원사에 스님의 상과 전각이 있는 이유는 이곳이 예로부터 우리나라 전통차(녹차)가 생산되던 곳이기에 차와 관련하여 상을 세우고 김지장전이라는 전각을 세워놓은 듯 하다.
< 티베트 박물관 지하에 있는 티베트 신탁승 인형. 허리에 있는 구리 거울이 청동기 시대 청동 거울을 생각나게 해서 찍어 보았다. 쓰임새 또한 청동기 시대와 비슷한 것 같다. >
< 신탁승 인형의 설명서. 우리나라 무당을 연상시킴과 동시에 청동기 시대 제사장의 모습을 추론할 수 있어서 청동기 시대를 공부할 때 좋은 교육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