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항 보경사
보경사(寶鏡寺)는 경상북도 포항시의 내연산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다. 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포항에서 가장 큰 사찰이라 오어사와 함께 포항을 대표하는 절이다. 내연산은 계곡이 아름다운 산으로 등산객들이 많이 찾고 있으며, 이에 따라 보경사 입구 쪽에는 음식점이 줄지어 들어서 있다.
신라 진평왕 25년인 603년에 승려 지명(智明)이 세웠다고 전한다. 지명이 중국에서 유학할 때 동해안 명당에 묻으면 왜구를 막고 삼국을 통일하리라는 예언과 함께 팔면보경(八面寶鏡)을 전수받아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보경을 묻은 곳이라 하여 절 이름은 보경사로 붙여졌다. 고려 고종 대에 원진국사 신승형이 보경사 주지를 맡아 크게 중창하는 등 여러 차례 중건하고 주변 암자도 중수하여 조선 시대에는 대규모 사찰이 되었다.
‘포항 보경사를 가보셨나요’라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은 사찰에 대한 이야기보다 보경사 계곡과 소나무숲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합니다. 보경사를 이야기를 해보라고 하면 ‘글쎄’하는 것으로 말을 마칩니다. 보경사가 우리들에게 준 기억보다는 계곡이 주는 아름다운과 소나무 숲이 자아내는 멋과 맛이 강력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1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보경사를 잘 살펴보면 평생 잊어지지 않는 신앙의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보경사에는 신앙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전각이 있으니, 잘 찾아보시기 바랍니다.보경사는 불자들의 주 신행공간이 특이하게도 하나가 아니라 둘입니다. 즉 본존불을 모신 전각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 참배객들을 당황하게 합니다. 일반적으로 석가모니부처님을 봉안한 대웅전이 있으면,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신 대적광전(적광전이라고도 부름)은 없습니다. 해인사에는 대적광전이 있으나, 대웅전이 없고, 쌍계사에는 대웅전이 있으니까 대적광전이 없는 것처럼 두 전각이 한 사찰에 없는 것이 사찰건축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보경사에는 둘이 다 있습니다. 왜 두 전각이 같이 있을까요.보경사의 적광전과 대웅전은 건축에서도 다릅니다. 적광전은 창건시 본존각으로 건립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지은 대웅전이 더 위엄 있어 보입니다. 적광전은 지붕이 맞배지붕이지만, 대웅전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적광전은 평지에 세워져 있는 반면 대웅전은 기단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중생들도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현실에서 나타나 증명해준 분이기 때문에 불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신앙의 대상입니다. 비로자나부처님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다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가르침을 설하신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을 모신 전각은 시대마다 신앙의 대상마다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사찰들은 전각을 지어 불보살님을 봉안하여, 미타전 지장전 관음전 등 다양한 전각이 늘어나게 된 것입니다. 사찰을 참배할 때마다 전각에 모신 부처님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공부가 될 것입니다.
보경사에는 보물 석 점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보물 제11-1호인 동종은 조선 숙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통도사 동종보다 시기적으로 앞선다. 보물 제252호인 원진국사비는 대웅전 맞은 편에 있는 신승형의 탑비이다. 승형이 사망한 뒤 고려 고종이 원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보물 제430호인 부도는 원진국사의 사리를 봉안한 탑이다.
대웅전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31호로 지정되어 있고, 적광전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4호이다. 적광전 기둥 옆에는 목조 사자상이 조각되어 있다. 천왕문 입구 양 옆에 역시 목조 사자를 새겨두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3호인 오층석탑은 고려 현종 때 세운 것이다. 천왕문 우측으로는 오래된 탱자나무 두 그루가 마주보고 있다. 이 탱자나무는 경상북도 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주문(一柱門)
절(寺)에는 많은 문(門)들이 있는데 우리가 가장 먼저 대하는 문이 바로 일주문(一柱門)입니다. 일주문이란 사찰에 들어가는 산문(山門) 중 첫 번째 문이며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일직선으로 세운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은 독특한 형식의 건축물이 일주문입니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사실상 사찰 경내에 들어서는 것이고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온 것입니다.
기둥을 일렬로 세운 일주문이 상징하는 뜻은 모든 진리는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며, 모든 존재는 일심(一心)의 작용에 따라 나타난다는 불교의 근본 진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깊은 뜻을 『법화경』에서는 회삼귀일(會三歸一)이라고 표현하고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이 각기 제일이라고 주장하는 당시의 수행자들에게 “아니다, 모든 법은 일불승(一佛乘)의 길로 가기 위한 방편이고 필경 일불승(一佛乘)밖에 없다”고 설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산과 바다, 세계와 인생, 정신과 물질, 부처와 중생, 너와 나, 사랑과 미움 등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일심동체이며, 그 근본은 오직 하나이지 둘이 아니라는 뜻이 일주문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을 들어설 때 미워할 사람도, 집착할 물건도, 갚아야 할 원수도 모두 놓아 버리고 누구와도 하나가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일주문에서 반배하고 일주문을 넘어서야 합니다. 모든 것의 근원은 오직 하나이며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착하고 너그러운 본연의 마음으로 부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이 일주문이 주는 교훈입니다.
일주문 밖은 사바세계이고 일주문 안은 부처님의 신성한 전당인 이상(理想) 세계, 즉 극락 세계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일주문은 사바세계로부터 수미산(須彌山)이 시작되는 첫 관문(關門)이기도 합니다. 사찰 안에는 많은 부처님과 보살님, 그리고 아라한들과 스님들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일주문 앞에 이르면 멀리 큰 법당을 향해서 합장하고 반배를 올린 다음 일주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법당 안에 계시는 부처님에게 왔다는 인사를 먼저 하고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찰 참배를 마치고 돌아올 때도 일주문에 이르면 멀리 본당(本堂) 쪽을 보고 “너와 내가 하나되는 법” 잘 받아 지니겠습니다라고 하는 마음으로 반배를 올리고 절을 떠나오는 것이 올바른 예절입니다.
♧일주문에서
①일주문 앞에 서서 법당을 향해 반배를 올리고 경내로 들어간다
②참배를 마치고 돌아갈 때도 일주문에서 반배를 올리고 집으로 돌아간다.
해탈문
금강문과 천왕문을 지나면 불이의 경지를 상징하는 해탈문(解脫門)이 나타나는데 이를 불이문(不二門)이라고도 하며, 이 문을 통과하면 완전한 부처님의 세계에 이르게 되고 부처님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불이(不二)란 너와 나, 생사와 열반, 번뇌와 보리,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 선(善)과 악(惡), 색(色)과 공(空)의 모든 상대적인 것들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불이(不二)란 절대적인 하나의 세계를 상징하는 것이며, 차별이 아닌 평등을 나타내는 말로서 불교적 우주관에 의하면 수미산 정상에는 제석천왕(帝釋天王)이 다스리는 도리천( 利天)이 있고 그곳에 불이문(不二門)이 있어서 해탈의 경지를 상징하고 있다. 도리천은 불교에서 말하는 28개의 하늘세계 중에서 욕계(欲界) 6천의 제2천에 해당하는 아래에서 두 번째 하늘세계로 사천왕천과 함께 지상에 속해 있는 지거천(地居天)이다.
보경사 설산 장욱스님 비각
스님께서(1916~1921년) 금당의 계단과 탑을 중수, 홍수로 무너진 사찰 오른쪽 일대에 제방을 쌓다.
천왕문
천왕문은 보경사 경내를 수호하는 사천왕을 봉안한 곳이다. 보경사 천왕문은 조선 숙종 34년(1708)에 중건한 것으로 모셔진 사천왕상은 불기 2524년(1980년)에 새로 봉안한 것이다. 사천왕은 사왕천의 동서남북을 지키는 선신으로 불법을 수호하고 정도를 행하는 사람들을 보호한다. 사찰에 들어갈 때 일주문, 금강문 다음에 거쳐야 하는 문(門)으로 천왕문이라고도 한다. 사천왕상을 안치한 천왕문은 사찰을 지키고 악귀를 내쫓아 불도를 닦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찰이 신성한 곳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해 세워졌다. 사천왕문에는 인간의 선악을 관찰하고 수행자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며 불법을 수호하는 지국천왕, 광목천왕, 증장천왕, 다문천왕 등의 사천왕상이 있는데 각각 불국정토의 동ㆍ서ㆍ남ㆍ북을 지키는 신들이사천왕은 고대 인도(印度) 종교에서 숭상했던 신들의 왕이었으나, 석가모니 부처님께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사천왕은 수미산의 정상에 있는 제석천의 권속으로, 33천 중 욕계 6천의 첫 번째인 사천왕천(四天王天)의 지배자로서 수미의 4주를 수호하는 신이다.
지국천왕(持國天王)은 동쪽을 수호하는데 온 몸에 동방을 표방하는 오행색(五行色)인 청색을 띠고 있다. 비파를 손에 가지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거나 왼손에는 칼을 쥐고 오른손은 주먹을 쥐어 허리에 대고 있거나 보석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형상을 취하고, 선한 이에게는 복을 악한 자에게는 벌을 준다.
서쪽을 수호하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온 몸이 백색이며, 입을 벌리고 눈을 부릅뜬 채 오른손에는 용을 꽉 움켜쥐고 있으며, 왼손은 위로 들어 엄지와 중지로 여의주를 살짝 쥐고 있다. 위엄으로써 나쁜 것들을 물리친다.
남쪽을 수호하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몸이 붉은 색깔이며 손에는 삼지창 또는 칼(검)을 들고 있다. 자신이나 남에게 착한 마음(善心)을 일으키게 하며, 중생들에게 복과 덕을 베푼다고 한다.
그리고 비파를 잡고 비파 줄을 튕기는 모습의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북쪽을 수호하며 얼굴색은 북쪽을 상징하는 검은색이다. 어둠 속을 방황하는 중생을 구제해 준다.
이 사천왕은 보통은 조각 형태로 되어 있지만, 벽화(그림)로 되어 있는 곳도 있으며, 사천왕이 지니고 있는 물건과 역할은 경전에 따라 다소 다르게 기술되어 있기도 하다.
참고로 다섯 방위를 상징하는 색을 五方色(오방색) 또는 오행색(五行色)이라고 하며 동쪽은 청색, 서쪽은 흰 색, 남쪽은 적색, 북쪽은 흑색, 중앙(가운데)은 황색이다.
사천왕문은 수미산의 중간지점으로 불국토를 지키는 동서남북의 사천왕을 모시는 문으로 봉황문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불법을 수호하고 사악한 마군(魔軍)을 방어한다는 뜻에서 세워졌다. 천왕문은 보통 정면3칸, 측면1칸의 맞배집 형태를 지니고 있는데 좌우 각 1칸에는 천왕을 두 분씩 봉안하고 중앙에는 출입통로가 있다.
포항보경사서운암동종(浦項寶鏡寺瑞雲庵銅鍾)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사인비구가 만든 종 중에서 가장 앞선 것으로, 꼭대기에는 종을 매달기 위한 둥근 고리가 있다. 어깨 부분에는 인물상이 새겨진 40개의 연꽃잎을 세워 두어 넓은 띠를 형성하였다. 이 띠 아래로는 일반적으로 9개의 돌기가 있는 것에 반해 5개의 돌기를 가지고 있는 사각형 모양의 유곽이 4곳에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부처의 말씀인 진언을 새겨 이 종의 특징이 되고 있다.
비록 크기는 작지만 사인비구의 초기 제작기법을 볼 수 있으며, 아울러 조선 종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적광전(寂光殿)
화엄경에 등장하는 주존 부처님인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신 법당입니다. 비로자나부처님이란 태양의 빛이 만물을 비추듯이 우주의 일체를 비추며 일체를 포괄하는 부처님입니다. 진리의 본체라 하여 법신불(法身佛)이라 일컫기도 하지요. 이 법신부처님은 형상도 없고 소리도 없습니다. 그래서 전혀 설법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법신불의 미간 백호에서 광명이 비춰 나와 시방 세계의 모든 나라를 드러냅니다. 이렇게 침묵 속에서 찬란한 진리의 빛을 발한다 하여 이 법신불을 모신 큰법당을 대적광전, 적광전, 대광명전(大光明殿), 보광전(普光殿)이라고도 부릅니다. 비로전(毘盧殿)이라는 명칭도 있습니다.
적광전(寂光殿)은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로 조선시대 후기의 전각이다. 보경사 금당탑비에 보면 1677년에 금당과 법당을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 근거해 이 건물을 1677년에 지은 것으로 보고 있다. 곧 금당은 적광전, 법당은 대웅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적광전은 1990년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54호로 지정되었다.
건축 양식을 보면, 기둥 위에서 지붕을 받치는 공포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의 건물이며 천장은 뼈대가 훤히 보이는 연꽃천장으로 꾸몄다. 다포 양식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연꽃천장으로 만든 점 등은 옛 건축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기단은 외벌대로 아주 낮게 조성하였는데 기단 위에 전돌을 깔고 원좌(圓座)가 있는 사각형 주초(柱礎)를 놓았다. 주초 위에는 원주(圓柱)를 세웠는데 우주(隅柱)의 안쏠림과 귀솟음이 뚜렷하다. 앞면 중앙 칸의 하방(下枋) 양쪽에는 동물 형상을 한 둔테목을 설치하였다. 공포는 내외 2출목이며, 주두(柱頭) 위쪽을 봉두(鳳頭)로 장식하였다. 그런데 이 적광전에서 특이한 점은 기단부 석재가 모두 옥석(玉石)이라는 점인데, 다른 전각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재질이다. 연두색을 띤 이 옥석은 지금도 내연산 일대에 분포되어 있다.
안에는 비로자나 삼존불좌상과 후불탱이 불단에 봉안되었고, 그 밖에 조선 후기에 만든 원패 2점과 1981년에 조성한 신중탱이 있다. 비로자나불좌상은 이 전각의 창건시 함께 조성한 듯하고, 후불탱은 1742년(영조 18)에 조성하였다.
적광전 기초.
신라시대 양식이 뚜렸한 주춧돌과 고막이돌이 여전히 집을 떠받치고 있으니 보경사의 역사가 신라시대까지 오름을 보여주는 물증이다. 주춧돌이나 고막이돌 유심히 살피면 사람의 발길이 많이 닿은곳은 모두 비취빛으로반짝이는 것을 볼수있는데 모두 옥돌로 다듬어진 것이다.비취빛으로 사방을 떠받친금당- 신라 가람에 어울리는 멋진 모습이 아닐까?
신방목 (둔테목)
문짝을 고정하기 위해 문짝 양옆으로 세로로 대는 기둥목이 있는데 이를 문설주라 한다. 문 위의 가로대는 문상방.문아래 가로대는 문하방 (문지방 - 봉정사 만세루 밑에 처럼 달처럼 오목하면 월방) 이들을 통틀어 문얼굴이라 한다지요. 문설주 밑에는 기둥 밑에 초석을 받치듯이 앞뒤로 짧은 각목을 받치는데 이것을 신방목이라 하고 그 끝을 동그랗게 하여 삼태극을 새기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는 태극무늬가 많은데, 이곳 보경사 천왕문의 경우에는 좌우에 사자를 한마리씩 조각해 놓았다. 앞발은 잔뜩 힘을주고, 뒷다리는 포개 앉아 있다. 근엄함을 대변하는 듯 풍성한 꼬리가 무척 인상적이다. 사자라고는 하지만 오랜 세월을 버텨온 터라 조각도 옅어지고, 힘이 없어보인다. 여름날 더위에 지친 강아지 모습이거나 잔뜩 웅크린 개구리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도 그래서였나보다.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는 적광전에도 사자를 새긴 신방목이 있다.
신방목의 사자.
좌우로 나누어 둿다리를 쭈그린채 앞다리로 버티어 앉은 두마리사자는 마모는 심하지만 표정과 자태가 또렷하다. 왼쪽사자는 다섯개의 굵은 방울이 달린 목걸이,불거진눈,처진귀,길게 다문입,볼륨감있는 몸체와 다리가 선명한데, 사자본연의 근엄함이나 사나움은 세월에씻기어 찾아 볼수없고 쓰다듬고 싶을만큼 순진하고 귀여운 강아지상이다.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이 언제 창건되었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1677년에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근세에 와서는 1932년에 중수되었다. 원진국사 이래로 계속하여 퇴락과 중창·중수를 거듭해오다 최근의 보경사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77년 벽암화상에 의해서였다. 대웅전은 조선후기 목조 불전(佛殿)으로 정면3칸,측면2칸인 다포계(多包系)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으며,기단위에 자연방형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운다음 기둥 윗몸에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둘렀다. 평방 위에는 가운데 칸에 2구,협간(夾間)에 1구씩의 공간포(空間包)를 배열 하였다.공포는 안팎이 모두 3출목(三出目)의포작으로 되어 있으며,건물 외부로 튀어나온 제공(諸工)의 살미점차끝은 앙서 모양으로 만들고 그 위에 연꽃 봉오리를 조각하였다. 처마는 겹처마로서 서까래와 부연을 달아 지붕 틀을 구성하였고,네 귀의 추녀밑에는 활주(活柱)를 세워 처마의 처짐을 방지하였다.건물 안쪽 바닥은 마루를 깔았으며,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꾸며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형태이다. 가운데칸 뒷부분에는 불단을 마련하여 삼존불상을 모셔 놓았다.안에는 불단 위에 금동 삼불좌상과 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는데, 삼존상은 대웅전 창건시 조성하였고 후불탱은 1778년(정조 2)에 조성하였다. 불단에는 또한 근대에 만든 원패(願牌) 두 점이 놓여 있다. 내부에는 그 밖에 최근에 조성한 삼장탱·신중탱·독성탱이 있고, 근대에 조성한 동종 1구가 있다.보경사 금당탑비를 보면 1677년(숙종 3)에 법당을 중창하였다고 되어 있으므로 1677년을 이 전각의 건축년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932년에 중수한 기록이 있다. 1990년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31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보경사의 가람구성은 대웅전을 비롯하여 적광전·영산전·팔상전·명부전·산령각·원진각·천왕문·범종각·비각 등의 전각과 수월당(水月堂) 등의 요사로 이루어져 있다. 그 밖에 보물 제430호로 지정된 원진국사 부도와 보물 제252호 원진국사비, 오층석탑, 부도 등의 유물이 경내에 있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부처님과 보현,문수보살을 협시로 하거나,가섭과 아난.혹은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을 협시로 모시는데. 여기는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을 모셨는데 대웅전이라니 삼세불도 아니고 조금 이상한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져보고....
비사리구시
보경사에는 큼직막한 비사리 구시가 대웅전 뒤쪽에 있다. 비사리 구시는 부처님의 공양을 마련하는 구유를 말하는데, 비사리는 '벗겨놓은 싸리의 껍질'을, 구시는 '구유'를 말한다. 대체로 거찰에는 그 옛날 영화로웠던 시절을 대변하는 듯 하나씩 있게 마련이다. 보경사의 비사리 구시는 조선시대때 만들어진 것으로 나라의 제사때 절을 찾는 사람들이 밥을 퍼먹을 수 있도록 쓰인 도구이고, 약 4000명 분의 밥을 담았다고 한다.
비사리 구시는 대체로 전각 뒤에 초라하게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세가 컸던 시대의 산물인데, 지금 쓰이지 않는다하여 건물 뒷편에 옹색하게 놓여진 모습이 무척 안스럽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사람들의 눈길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는 소나 말이 쓰는 구유로 전락하고 만다. 아쉬울 뿐 이다.
오층석탑(五層石塔)
보경사 경내에 있는 석탑으로, 1층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의 네 면과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는 약간 들려있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 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높고 날렵한 느낌을 준다.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지붕돌받침이 3단으로 줄어드는 등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일명 ‘금당탑(金堂塔)’이라고도 부르는데,『보경사금당탑기(寶鏡寺金堂塔記)』에는, 도인(道人), 각인(覺人), 문원(文遠)이 고려 현종 14년(1023) 3월에 이 탑을 세웠다고 적고 있다.
이 탑(塔)은 금당탑(金堂塔)이라고도 하는데 『보경사금당탑기(寶鏡寺金堂塔記)』에 의하면 도인(道人), 각인(覺人), 문원(文遠)이 고려(高麗) 현종(顯宗) 14년(1023) 3월에 건립(建立)하였다고하는 기록이 있어 조성년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중요한 고려 초의 오층석탑이다. 1985년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03호로 지정되었다. 단층기단(單層基壇) 위에 세워진 오층석탑(五層石塔)으로 기단(基壇)과 옥신(屋身)에는 목조건축(木造建築)의 기둥을 모방한 우주(隅柱)가 있다. 옥개석(屋蓋石)과 옥신(屋身)은 각1매석(枚石)으로 옥개석의 층급(層級)받침은 모두 3단이다. 처마끝은 수평을 이루고 처마선(線)은 끝에서 약간 들려 경쾌한 곡선(曲線)을 나타내고, 옥개석의 상부에는 2단의 탑신받침이 있다.
초층 옥신은 남북양면에 문비와 문고리를 새겼다. 두 짝의 문을 바탕으로 그 한 가운데 연봉자물쇠 하나와 동그란 문고리 두 개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여기의 자물쇠와 문고리, 특히 뒷면의 그것은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유일한 통일신라시대의 자물쇠와 문고리와 놀랍도록 닮았다. 처마 끝은 수평을 이루고 처마선(線)은 끝에서 약간 들려 경쾌한 곡선(曲線)을 나타내고, 옥개석의 상부에는 2단의 탑신받침이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과 복발(覆鉢)만이 남아 있다. 탑신의 체감률(體感率)이 낮아 전체적으로 고준(高峻)한 느낌을 준다.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과 복발(覆鉢)만이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고준(高峻)한 느낌을 주며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양식(樣式)을 계승한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석탑(石塔)이다.
문비
천왕문과 오층석탑,적광전의 공간은 간격이 그리 넓지 않다. 오밀조밀한 여느 가정집의 마당같은 느낌이다. 서 있는 오층석탑은 금당탑이라고도 불리는데, 보수하면서 석재를 갈아끼워 한복 저고리에 양복 바지를 입혀놓은 느낌이 든다. 여느 석탑처럼 몸돌에 자물쇠가 천왕문과 적광전을 바라는 쪽으로 새겨져 있는데, 특히 적광전 쪽에 새겨진 자물쇠는 매우 현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마치 진짜 자물쇠를 채워 놓은 듯 그 오랜 시간동안에도 또렷하다.
원진각(圓眞閣)
원진각(圓眞閣)은 원진 국사의 상과 영정을 중심으로 고승 16명의 영정을 봉안한 전각으로,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1칸의 규모를 하고 있는 조선시대 후기의 전물이다.
봉안된 영정은 전부 1980년과 1981년 사이에 조성하였는데 주인공은 원진국사를 비롯하여, 지명법사(智明法師, 6∼7세기)·청허선사(淸虛禪師, 1520∼1604)·송계선사(松溪禪師, 1630∼1694)·사명대사(四溟大師, 1544∼1610)·환허선사(喚虛禪師)·오암선사(鰲巖禪師, 1710∼1792)·마점조사(摩岾祖師)·연파선사(淵坡禪師)·신파선사(神坡禪師)·설산선사(雪山禪師)·영월선사(影月禪師)·은처선사(隱處禪師)·동봉화상(東峰和尙)·설월선사(雪月禪師)·영호선사(暎湖禪師) 등이다.
원진국사 부도 (보물 제430호)
보경사 뒷산의 중턱에 서 있는 묘탑으로, 원진국사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원진국사 신승형은 고려 중기의 승려로, 51세에 입적하자 고종이 그를 국사로 추증하고 ‘원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 부도는 고려< 高麗 > 고종< 高宗 > 때 조성< 造成 >된 것으로 당시의 일반형 부도 형식과는 다른 형태를 지니고 있는 부도이다. 부도의 구조는 8각원당형< 八角圓堂型 >으로 장대석< 長臺石 >을 이용하여 방형< 方形 >의 탑구< 塔區 >를 마련하고 그 중앙에 지대석< 地臺石 >을 놓아 탑기< 塔基 >를 마련하였다. 하대석< 下臺石 >은 8각의 석재< 石材 >를 3단으로 쌓았는데, 밑의 2단은 표면에 조각장식< 彫刻裝飾 >이 없고 상단의 1석에만 복련석< 復蓮石 >으로 상면에 단판연화< 單瓣蓮華 > 32엽< 葉 >이 조각되어 있다. 중대석< 中臺石 > 또한 8각으로 각 모서리< 隅 >마다 기둥< 柱 >을 나타냈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상대석< 上臺石 > 역시 8각이며 중앙에 있는 1단의 받침을 중심으로 32엽의 단판연화를 돌려서 앙련< 仰蓮 >을 삼았는데 특이한 예이다. 상대석 위에는 높직한 괴임을 갖추고 8각의 탑신< 塔身 >을 받고 있는데 탑신은 매우 높아져서 8각형의 돌기둥과 같이 보인다. 탑신의 각 모서리에도 기둥을 조각하고 있으나, 1면에만 문짝형을 조각하여 나타냈다. 옥개석< 屋蓋石 >도 8각인데 밑면에는 모서리를 향해 중심부에서 뻗은 융기선< 隆起線 >이 있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또한 상면의 경사는 완만하여 전각< 轉角 >에는 귀꽃을 장식하였으며, 추녀는 두터운 편으로 전각부에 이르러서는 현저한 반곡< 反曲 >을 보인다. 상륜부< 相輪部 >는 8엽연화< 八葉蓮華 >의 앙화< 仰花 > 위에 구형< 球形 >의 복발< 覆鉢 >이 놓이고, 다시 앙화형의 한돌을 놓은 다음 보주< 寶珠 >를 얹고 있는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특히 이 부도는 탑신이 지나치게 길고 큰 탓으로 기본적인 고려부도 형태에서 벗어나 안정감이 결여되어 있으며, 간략하고 섬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같은 경내< 境內 >의 원진국시비가 고려 고종 11년(1224)에 건립되었다는 것을 보면, 부도 역시 이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겠으나 양식과 형식 그리고 수법상으로 보아 좀 더 시대가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원진국사비(圓眞國師碑) 보물 제252호
보경사에 있는 고려 중기의 승려 원진국사의 탑비이다.
원진국사(1171∼1221)는 13세에 승려가 되어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도를 하기도 하였고, 왕의 부름으로 보경사의 주지가 되었다. 51세로 입적하자 고종은 그를 국사로 예우하고, 시호를 ‘원진’이라 내리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모습으로, 비몸 윗부분의 양 끝을 접듯이 잘라 놓았는데, 이러한 모습은 당시에 유행하던 양식이다.
넓다란 바닥돌과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거북받침돌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를 하고 있다. 등에는 6각형의 무늬마다 ‘왕’자를 질서정연하게 새겨놓았으며, 등 중앙에는 연꽃을 둘러 새긴 네모난 받침대를 조각하여 비몸을 끼워두게 하였다. 비몸의 둘레에는 덩굴무늬가 장식되어 있는데 이 역시 고려 중기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비문에는 원진국사의 생애와 행적이 기록되어 있으며, 글은 당시의 문신이었던 이공로가 지었고, 김효인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 의하면, 비가 완성된 것은 고종 11년(1224)으로 원진이 입적한 지 3년 후의 일이다.
원진국사비 귀부
비석은 귀부(龜趺)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栗首)가 없는 간결한 모습을 하고 있다. 비신 윗부분의 양 끝을 접듯이 잘라 놓았는데, 규수형(圭首形)이라 부르는 이러한 모습은 당시에 유행하던 양식이다. 비신의 상단에는 ‘원진국사비명(圓眞國師碑銘)’을 전자체(篆字體)로 횡서(橫書)하였으며 비문(碑文)은 ‘고려국보경사주지대선사증시(高麗國寶鏡寺住持大禪師贈諡) 원진국사비명병서(圓眞國師碑銘疊序)’로 시작되고 있다.
널찍한 바닥돌과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귀부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 머리를 하고 있다. 등에는 육각형 무늬마다 ‘왕(王)’자를 질서정연하게 새겨놓았으며, 등 중앙에는 연꽃을 둘러 새긴 네모난 받침대를 조각하여 비신을 끼워두게 하였다. 비신의 둘레에는 덩굴 무늬가 장식되어 있는데 이 역시 고려 중기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비문의 글은 당시의 문신이었던 이공로가 지었고, 김효인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 의하면, 비가 완성된 것은 고종 11년(1224)으로 원진 국사가 입적한 지 3년 후의 일이다.
보경사 탱자나무
탱자나무는 주로 영, 호남지방에 분포하며 일본, 중국에서도 자란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나무는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열매와 껍질은 약재로 사용되며 줄기에 가시가 나 있어 과수원 울타리용으로 적합하다. 보경사의 탱자나무는 보경사 경내 천왕문 오른쪽 동편 종무소를 사이에 두고 두 그루가 마주보고 있다. 대웅전 쪽의 나무는 지상 160㎝ 위치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원형으로 왕성하게 자라고 있으며, 맞은편의 나무는 지상 40㎝ 위치에서 두 갈래로 나뉘어 자라고 있다. 이 나무는 탱자나무로는 보기 드물게 오래된 것으로 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다. 전체 높이는 6m 정도이다. 탱자나무는 수령이 오래된 것이 희귀하므로 1972년 경상북도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되었다. 탱자나무는 이번 답사(1월17일) 때 보니 한그루는 고사하고 없었음.
팔상전(八相殿)
'팔상전(八相殿)'이란 석가모니부처님의 생애를 여덟 단계로 구분하여 묘사한 팔상도(八相圖)를 봉안한 전각을 말한다. 후불탱화로 '영산회상도'가 걸려 있어 '영산전'이라고도 한다. 천태종에서는 본존으로 삼고 있다. 주불은 석가모니불이며,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이 좌우에 있다. 불상은 있으나 불단이 크지 않으며, 벽에 붙은 팔상도와 불상 뒷면의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가 주된 경배 대상이다.
이곳에 걸려 있는 그림을 '팔상도'라 하는데, 8가지 그림 중에서도 성도(成道)가 중심이 되므로 '팔상성도'라고도 한다.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가지로 간추리는 데는 여러 의견이 있으나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녹야전법상(鹿野轉法相),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의 여덟가지이다.
팔상도(八相圖)란,
1)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장면,
2)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룸비니 동산에서 마야부인에게 태어나는 장면,
3)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궁궐의 네 문밖으로 나가 세상을 관찰하는 장면,
4)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성을 넘어 출가하는 장면,
5)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설산에서 고행하는 장면,
6)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보리수 아래에서 마귀를 항복 시키는 장면,
7) 녹원전법상(鹿院轉法相): 성불 후 녹야원에서 초전설법하는 장면,
8)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하는 장면 등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표현한 그림이다.
팔상도는 화폭에 문자로 그림의 내용을 써서 쉽게 이해할 수 있게 그린다. 현재 법주사.통도사.쌍계사.운흥사.개심사.선암사.송광사.해인사 등의 팔상도가 전해진다. 우리나라의 팔상전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속리산 법주사의 팔상전이다.법주사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으로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후 수리한 것이다. 벽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으며, 법주사의 현판은 우리들 마음의 '상(相)을 깨뜨리자'는 의미에서 '깨뜰릴 팔'을 써 '팔상전(捌相殿)'이라 이름하였다.
보경사 팔상전(八相殿)은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전각으로 조선 후기에 지었다.안에는 근대에 조성한 석가여래좌상과 문수·보현 보살상, 그리고 후불탱과 팔상도가 봉안되어 있다
산령각(山靈閣)
불교사찰 내에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2가지 경우가 있다. 불교의 사찰과 관계없이 지어진 산신각은 산악숭배(山岳崇拜)나 마을신앙과 관련되어 있다. 이때 산신각은 대체로 1평 정도의 집으로 산신당이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산신은 보통 호랑이와 함께 있는 백발에 수염이 있는 신선의 모습으로 그려지며, 위패는 '○○산신위(山神位)' 또는 '○○산령위(山靈位)'라 해서 산의 이름을 적어놓는 경우와 산의 이름은 없이 그냥 산신위 또는 산령위라 적어두는 경우가 있다. 건물 정면에 현판이 걸려 있는데, 산신각이라는 명칭 외에 산신당·산명당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도 한다. 산신은 지역수호신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 보통으로 산뿐만 아니라 산 주변의 지역을 관장하는 신으로 여겨졌다. 산은 한 지역공간의 중심이며, 산신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살펴주고 지켜주는 존재로 믿어졌던 것이다. 한편 산신각에 모셔지는 산신의 모습이 일반적으로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노인으로 그려지는 것을 생각해볼 때, 산신신앙이 신선사상(神仙思想)과도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의 불교사찰에 있는 산신각은 고유신앙의 수용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민간의 신앙이 두터운 칠성(七星)도 같이 모셔졌다. 그 명칭은 산신각·칠성각(七星閣)·삼성각(三聖閣) 등 일정하지 않다. 현재 불교에서는 산신을 가람수호신과 산 속 생활의 평온을 지켜주는 외호신(外護神)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 대부분의 사찰에는 산신각이 갖추어져 있으며, 자식과 재물을 기원하는 신신기도가 많이 행해지고 있다. 산신각은 불교 밖에서 유입된 신을 모시는 건물이기 때문에 전(殿)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각(閣)이라 하는데, 이는 한국 불교 특유의 전각 가운데 하나로 한국 불교의 토착화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보경사 산령각(山靈閣)은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로 20세기 초의 건물이다. 안에는 근대에 조성한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영산전(靈山殿)
영산전은 석가세존이 생존해 계실때 인도 영취산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많이 하셨는데 약하여 영산이라고도 합니다.이 영산전에는 가운데 석가세존 좌우에 사자를 탄 문수보살과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을 모시고 그 좌우로 16아라한을 배열하였습니다. 일명 십육나한전이라고도 합니다. 아라한이란 소승의 교법을 수행하여 도를 깨달은 성자를 말합니다. 영산전은 영산회상을 재현해 놓은 곳으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인도의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시던 광경을 묘사한다. 석가모니부처님과 10대제자, 16나한 또는 5백나한을 모시기도 하고,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나 석가모니부처님의 생애를 여덟 단계로 구분하여 묘사한 팔상도를 봉안하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팔상전'이라 부르는데 팔상탱화를 봉안하고 존상을 모실 경우에는 석가모니부처님과 함께 왼쪽에 미륵보살, 오른쪽에 제화갈라보살을 모신다.
미륵보살은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아 미래에 사바세계에 출현하여 부처님이 되실 분이고 제화갈라보살은 아득한 과거 석가모니부처님이 수행자이던 시절 장래에 부처님이 될 것이라고 수기를 주신 분이다. 따라서 석가모니부처님과 더불어 이 두 협시보살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를 상징하고 있다. 법주사, 쌍계사, 운흥사, 선암사, 범어사, 보경사 등의 팔상전이 알려져 있다.
보경사 영산전(靈山殿)은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의 전각으로 조선 후기에 지었다. 안에는 조선 후기에 봉안한 금동 석가여래좌상과 최근에 봉안한 문수·보현 보살, 그리고 16나한상과 사자상(使者像) 등이 있다
명부전(冥府殿)
온갖 죄악으로 죽어서 육도 윤회를 거듭하는 중생, 특히 처참한 살풍경이 벌어지는 지옥 중생에게 구원의 손길을 보내 그곳에서 그들을 구원해 내는 분이 지장보살님입니다. 이 지장보살님을 모신 법당을 지장전이라 합니다.
한편 지장보살은 지옥중생을 구제하기 때문에 지옥의 세계인 명부세계 주존으로 모셔져 있습니다. 그래서 지장전은 명부전(冥府殿)이라 일컫기도 합니다. 그리고 명부전에는 망자를 심판하는 열명의 심판관이 들어서 있으므로 시왕전(十王殿)이라 지칭하기도 합니다.
보경사 명부전(冥府殿)은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의 전각으로 1887년에 짓고 1917년에 중수하였다. 안에는 지장보살상과 후불탱, 그리고 도명존자·무독귀왕상이 협시하고 있으며, 시왕상·판관상이 불단 좌우로 둘러서 배치되어 있다
사인비구
뛰어난 승려의 손길로 제작된 사인비구 동종
사인비구. 우리는 단순히 사인비구라는 명칭만 갖고 생각할 때 단순히 한 시대를 살아가던 스님이었을 것으로만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조선조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의 절에서 활동한 사인스님은 우리나라 주종의 대가요. 한 시대를 풍미한 불교미술의 거장이었다. 그러한 사인스님에 대해 우리는 한 번도 조명을 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참으로 애석할 뿐이다.
사인스님은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이다.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사인스님의 작품으로 만들어진 주종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들은 각기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멋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8점의 모든 종을 다 보았다면 사인스님의 예술세계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새삼 깨달을 수가 있다.
크기는 작지만 사인스님의 초기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는 <포항 보경사의 서운암 동종>은 종 몸통에 보살상이나 명문이 아닌 부처님 말씀을 새겨 둔 것이 특징이다. <양산 통도사 동종>은 8괘를 문양으로 새기고, 유곽 안에 보통 9개씩의 유두를 새기는 것이 통례이나 단 한 개만을 중앙에 새겨 넣었다. 또한 가장 전통적인 신라 범종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안성 청룡사 동종>과 조선의 전혖걱인 종 모습을 보여주는 <강화 동종>이 있다. 종을 매다는 용뉴 부분에 두 마리용을 조각해 둔 <서울 화계사 동종>과 <의왕 청계사 동종>이 있다.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그만의 독특한 모습으로 선보이고 있는 <문경 김룡사 동종>과 <홍천 수타사 동종>이 있다.
사인스님의 작품들은 모두가 그 나름대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8구 모두가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각기 독창성이 엿보이는 작품들로 종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사인비구가 만든 종 가운데 문경 김룡사 동종(보물 제11 - 2호)과 함께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독특하게 표현하여 완숙미와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가장 뛰어난 것은 바로 홍천 수타사의 동종(보물 제11 - 3호) 이다.
홍천 수타사의 동종은 종 밑 부분에 1670년(현종 11년)에 제작되었다는 문구가 있어 그 주조 년대를 정확하게 알 수가 있다. 종의 몸통 위 부분에는 인도의 옛 글자인 범자를 새겼으며, 그 아래에는 구름 위에서서 양손으로 기다란 연꽃가지를 쥐고 있는 4구의 보살상을 새겨 넣었다. 보살입상 아래에는 종과 관련된 각종 기록들을 새겨 넣었다. 종을 만든 시가와 종을 만드는데 도움을 준 사람들의 이름들이 네모난 틀 안에 새겨져 있다.
일반적으로 몸통과 종을 거는 고리부분인 용뉴를 함께 만들지만 이 사인스님의 수타사 동종은 용뉴와 몸통이 따로 제작되었다. 종의 몸통부분과 걸이부분이 따로 조각되어 붙여졌음에도 그 단단함이 뛰어나 사인스님의 작품세계의 뛰어남을 단적으로 알 수가 있다. 정확한 제작연대와 제작자, 그리고 작가의 독특한 독창성과 예술성을 함께 알 수 있는 수타사 동종은 조선시대 점종 연구에 소중한 자료로 평가를 받고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사인스님. 그 아름다운 예술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반드시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