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국선도(國仙道)의 역사와 정신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옛 기록들에서 밝달임금(檀君王儉)을 한얼사람(天神人, 王人, 神人)이요 신선사람(神仙人, 神人, 仙人)이라 하였다. 이 한얼사람과 신선사람을 한자로 天人, 神人, 仙人이라 하였다. 여기서 仙은 선( 天)이라고도 쓰는데, 우주를 한나라(國)로 보고 人과 天이 妙合(仙)하니 이러한 大自然의 길을 모아 이름하여 국선도라는 것이다. 국선도의 수련방법은 단전[丹田(下腹部)]를 중심으로 깊은 숨쉬기(深呼吸)를 통하여 정(精)을 충일시키는 축기방법(畜氣方法)과 함께 굴신(屈身) 동작(체조동작)을 천천히 하는 것이다. 이것을 행공(行功)이라 하는데, 행공을 하루 한두 시간씩 수도함으로써 도심(道心)과 도력(道力)을 체득하여 전인적(全人的)인 참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 선도법이요 국선도이다. 국선도의 정신으로 충효사상과 건강장수사상을 들 수 있겠다. 첫째, 忠孝思想: 국선(국선), 선랑(선랑), 선인(선인) 등이 모두 같은 말로 배달임금 한배검으로부터 유래하였다. 단군왕검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자기의 얼로 삼았는데, 이것은 배달민족의 얼이요 국선도(화랑도)의 얼이 되기도 한다. 국조 단군왕검은 자기의 얼인 홍익인간의 발전적 전개로 하늘, 땅 숭배와 조상공경 그리고 애인(愛人), 즉 사람 사랑을 자기의 근본사상(根本思想)으로 삼는 동시에 우리 배달겨레에 가르쳐 주었고, 이러한 충효사상은 고구려의 조의선인( 衣仙人)을 통해서 일찍이 전수 발전되었고, 신라 화랑들의 기백과 기풍의 바탕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健康長壽思想: 우리 조상들은 심신의 모순이나 분리를 생각지 않았다. 한국인들에 있어 몸은 마음에 관한 일체의 표현이었으며, 마음은 몸의 생명인 실체란 고유 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현대의 일반적인 신체관(身體觀)과 별 다름이 없다. 국선도의 건강장수사상은 단학(丹學)과 연관이 되는데 본성(本性)에 연결시킨 단학의 기본이념은 제하(臍下)의 1촌(寸) 3분(分)의 단전(丹田)을 기준으로 몸을 안정시키고 일호 일흡(一呼 一吸)을 잘해서 전신(全身)에 분산된 원기(元氣)를 단전(丹田)에 응집시킨 상태에서 유지, 보존하여 심신(心神)의 명징(明澄)함과 건강함을 지니면서 장생불로(長生不老)에 이르려는 것이다. 이것이 국선도의 건강 장생술의 근간이라 하겠다.
제2장 국선도 체조의 제 특징(諸 特徵) 국선도는 양생비법(養生秘法)인 동시에 道이다. 국선도의 성격은 제일의적으로 종교(宗敎)가 아니며, 신(神)이나 영(靈)을 직접 위하지도 않는다. 다만 사람의 실존을 그대로 대상으로 삼는 실존생명(實存生命)의 자연과학(自然科學)일 뿐이다. 국선도 정신과 수련방법에 근거해 볼 때 국선도 체조는 조신과 호흡에서 중요성을 찾을 수 있다. 조신(調身)이란 몸을 균형있게 고르게 움직여 주는 동작을 말한다. 그런데 국선도에서는 운동의 정도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즉 부분적인 운동은 전체적 운동만 못하고, 전체적 운동은 내공을 갖춘 전체적 운동만 못하며, 한편에 치우친 운동은 몸의 균형에 조신(調身)의 조화가 되지 못하여 신체적 장애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사람은 숨을 쉬지 않고는 한 시간도 살 수 없으며, 한 사람의 건강을 진찰하는데 있어서도 그 사람의 숨쉬기는 대단히 중요한 단서를 준다. 그런데 국선도 체조에서는 단리를 응용한 돌단자리(下丹田)로 숨쉬고 몸을 고르는 동작을 하여 우리 몸안의 정력의 원천을 만든다고 한다. 그리고 돌단자리 숨쉬기와 고요한 몸놀림을 하는 가운데 정(精)이 충일(充溢)하면 기(氣)가 장(壯)하여 진다고 하여 이 원리를 정수기 기수신(精隨氣 氣隨神)의 단학원리(丹學原理)라 한다. 국선도 체조를 실시하기 위해서는 그 효과를 높이고 또 성과를 정확하게 하기 위하여 신체 수련의 규범이 있고 현대 체조에서는 찾기 힘든 정신적 수련 규범을 강조하고 있다. 현대 체조가 대부분 서서 동작을 하는 데 비해 국선도 체조는 앉거나 누워서 하는 부분이 상당히 포함돼 있다.
제3장 서양 닐스북 체조의 특성 서양 도수체조(徒手體操)의 대표적인 닐스북 체조를 체조형(體操形), 체조구성(體操構成), 운동방법(運動方法), 신체효과(身體效果), 체조의 성격 등으로 분석해 볼 때 신체효과 측면에서 닐스북 체조는 리듬을 존중하고 탄력성(彈力性)을 이용한 동적인 체조이며 힘찬 운동이다. 율동(律動)이 끊어짐이 없이 연속적으로 흘러가며 하지(下肢)와 전신운동(全身運動; 跳躍, 走)이 많이 채택되어 있지만 각부(各部)는 균형이 잡혀져 있다. 닐스북 체조는 청년의 근육을 유연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으며 기술이 고도의 것이었고 복합기술 및 연속기술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는 너무 수준의 차가 심하여 그 수준에 도달하기 위한 목표로 많은 노력을 해왔다. 서양 도수체조인 닐스북 체조는 정지된 자세에 의한 것보다도 잘 구성된 활발한 율동적 동작을 구사하고 있다. 닐스북은 체조의 중요성을 유연성(柔軟性), 근력(筋力), 조정력(調整力), 혹은 민첩성(敏捷性) 발달의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제4장 국선도 체조와 서양 도수체조의 비교 검토 국선도 체조와 닐스북 체조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유사한 면을 찾을 수 있다. 즉 아무런 기구를 쓰지 않고 맨손으로 하며 공간 외의 다른 시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모든 스프츠나 그 외의 모든 본운동전에 준비운동으로서 할 수 있으며, 남녀 노소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체조동작, 신체구성 면, 운동방법적인 면, 체조성격적인 면 등에서 거의 같다. 그러나 서양 도수체조인 닐스북 체조는 정지된 자세에 의한 것보다도 잘 구성된 활발한 율동적 동작을 구사하는 반면, 국선도 체조는 모든 관절과 근육을 여러 각도에서 무리함이 없이 조화있게 움직여 신체의 말단에서 기 중심부로, 다시 온몸으로 기혈을 순환시켜 몸과 마음을 튼튼히 한다는 체조로서 발생지가 동양인 점에서 서양의 그것과 다르다. 국선도 체조와 서양 도수체조인 닐스북 체조의 비교를 통해 그 우수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① 근대의 닐스북 체조는 그 체조의 운동이 모두 일상 생활에서 많이 사용하는 근육과 관절을 운동시켜서 스포츠 기능을 향상하고자 함에 반해서, 국선도 체조는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흔히 쓰지 않는 근육과 관절도 고루 운동시키는 점이 그 차이라 하겠다. ② 닐스북 체조는 부분적 개별적 복합적 연속 운동이 많이 포함되어 일반적으로 단련적이고 동작이 경쾌하여 안정적이지 못하나 국선도 체조는 동작이 정적이고 복합적이고 무리하지 않아서 중심과 평형 유지가 용이하며 또한 운동 상해도 방지될 수 있다. ③ 닐스북 체조는 힘을 발산시켜서 근육의 힘을 강화시키나 국선도 체조는 호흡을 통해서 조식, 조신, 조심(調息, 調身, 調心)의 효과로 안정되고 힘이 축적되어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④ 닐스북 체조는 진동(振動), 굴신(屈身) 및 도약동작(跳躍動作)이 많으나, 국선도 체조는 굴신(屈身), 염전(捻轉) 및 전향동작(轉向動作)이 많아 장기(臟器)의 강화와 치료 효과가 크다. ⑤ 닐스북 체조는 단련적 연속적인 동작인 데 반해 국선도 체조는 충분한 정적인 운동으로서 정신통일의 효과가 크다. ⑥ 닐스북 체조는 서양의 선가주의적(仙家主義的) 애국심의 발로로 탄생되었으나 국선도 체조는 우리 고유의 토속신앙인 경천사상과 충효사상에 뿌리를 둔다. 이상과 같은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즈음 극소수에 의해서만 비전되고 있거나 이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전통문화의 발굴 계승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매우 인간적이면서 과학적 이론이 뒷받침되어 있는 국선도 체조의 범국민 실용화 단계가 보다 앞당겨질 수 있도록 하는 후속 연구와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 |
단침과 열기
단전호흡을 통해 나타나는 단침과 열기는 하늘이 준 보약이다. 몸 안에서 스스로 정화하는 자정 능력, 치유력, 면역력과 복원력의 가장 핵심적인 원리는 "단침과 열기"이다.
♣단침이란 무엇인가?
잡념이 없어지고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을 때 생기는 것이 단침이다.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3∼4개월 정도 수련하면 단침을 느끼게 되는데 이 정도 수준이면 불면증이나 극도의 불안감, 편두통과 마음 속의 가슴앓이는 없어지게 된다.
♣열기란 무엇인가?
호흡과 마음이 하나가 되었을 때 열기가난다. 그것은 정신 통일이 되어 간다는 증거이다. 이때 나오는 열은 기력의 원천이고 모든 염증을 없애는 원리를 가지고 있다.
단전(丹田)이란 말 자체가 '열이 나는 밭' '열기가 나는 곳'이라는 말이다.
▣ 본 글은 임경택 교수(1998)의 저서 '숨쉬는 이야기'에서 발췌되었습니다.
김시습
15세기 한국사상사를 대표하는 김시습(金時習)은 문학사의 전개에 있어서 <금오신화>란 한문소설을 창작한 인물인 동시에, 유교의 이기철학(理氣哲學)과 불교의 화엄사상(華嚴思想), 그리고 선도의 내단사상(內丹思想)을 한몸에 지닌 사상가이면서, 세조의 찬탈로 인한 왕권교체의 충격을 감당해야 했던 불우한 선비의 전형이기도 하다. 김시습의 모순된 행적과 그의 사상을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논의를 전개하지 않고, 행적과 사상을 각기 개별적 현상으로 따로 다룬 관계로 그를 나쁘게 잘못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겠다.
김시습은 고려말 길재 등으로부터 전승된 도학정신을 계승하여 생육신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가에 의탁한 행적이 문제되어 유학사에서 이단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김안로가 일으킨 여러 차례의 옥사 이후에 사림의 정신적 지주가되어 매월당(梅月堂)으로 지칭될 정도로 사후에 그의 청절(淸節)이 인정되었다.
김시습은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고 사육신이 죽음을 당하자, 세상에 뜻을 잃고 스님이 되었다. 스님이 된 뒤로는 방방곡곡을 바람처럼 떠돌아다녔다. 그는 한때 오세암에 은거했었다. 선가(仙家)에서는 그가 오세암에 머무는 동안 선도(仙道)를 닦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선 선가서(仙家書)인 <해동이적(海東異跡)>과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 자세히 쓰여 있다.
<해동전도록>에 따르면, 김시습에게 선도를 가르친 사람은 김고운(金孤雲)이다. 김고운은 원래 중국 사람으로 본명히 설현( 賢)이었다. 설현은 고려 때 우리 나라에 유람차 왔었다. 그는 지리산에 들렀다가 권청(權淸) 진인(眞人)을 만났다. 권진인은 영생불사(永生不死)하는 선인(仙人)이 되어 최치원 선생과 함께 지리산에 머문다는 분이다.
이 권진인이 설현을 선도에 입문시켰다. 훗날, 설현은 명오(明悟)라는 스님을 서대산에서 만났는데, 명오스님한테서도 가르침을 받았다. 설현은 명오스님의 지도에 따라 8년 동안 수행하여 득도(得道)했다.
설현은 득도하자 곧 선계로 들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도(道)를 전수해줄 제자를 만나지 못해 인연이 닿는 사람을 기다렸다. 이 때 이름을 김고운으로 고쳤다. 이름을 바꾼 뒤에는 경상도와 강원도를 오가며 백여 년 동안 어린이들에게 <통감>을 가르쳤다. 그사이 많은 사람들이 그와 교분을 맺었으나 누구도 그의 참모습을 몰랐다.
김고운은 조선 세종 18년(1436)에 드디어 선도와 인연이 깊은 사람을 만났다. 바로 매월당 김시습이었다. 두 사람은 춘천에서 만났다. 당시 매월당은 팔팔한 청년이었다. 또 자기를 극진히 아꼈던 세종이 아직 왕위에 있던 때였으니, 세상에서 큰일을 하고 싶었다. 김고운이 매월당에게 수도(修道)하라 권했지만, 매월당은 관심이 없었다.
그후, 매월당이 오세암에 머물 때 김고운이 그를 찾아왔다. 매월당은 이번에는 서슴지 않고 김고운을 스승으로 모셨다. 그리고 열심히 선도를 닦았다. 김고운은 매월당에게 도를 전한 뒤에 수해선(水解仙)이 되었다. 수해선이란 몸이 물로 화(化)했다가 선계(仙界)로 올라가는 선인(仙人)을 일컫는 말이다.
<해동이적>은 매월당이 오세암에 머물 때에 있었던 일화를 이렇게 전한다.
김시습이 일찍이 설악산에서 은거하는데, 강릉 사람 최연이 친구 대여섯 명과 함께 제자가 되겠다며 찾아왔다. 김시습이 그들의 인물됨을 살펴보니, 최연이 제일 쓸 만했다.
이에 다른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최연만을 제자로 삼았다. 최연은 오세암에서 매월당과 함께 지냈다. 두 사람이 사제지간이 된 지 어느덧 반 년이 지났다. 최연은 자나깨나 스승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밤중에 어쩌다 잠이 깨어 눈을 떠 보면 스승이 온데간데없었다. 이런 일이 자주 있었다.
최연은 김시습이 한밤중에 도대체 어딜 가서 뭘 하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루는 자는 체하고 있다가, 김시습이 방을 나간 다음 곧바로 뒤쫓았다. 그런데 순식간에 사라져서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몇 번 실패한 끝에 드디어 하루는 스승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었다. 김시습은 골짜기 하나와 능선 하나를 넘어 넓은 바위가 있는 데로 갔다. 그곳에서는 누군가가 먼저 와서 김시습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바위에 앉아 한참 동안 얘길 나눴다. 최연은 그들이 하는 얘기를 너무 멀어서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데 김시습은 최연이 몰래 숨어서 엿본 것을 알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김시습이 정색을 하고 최연을 꾸짖었다. "나는 너를 제자로 삼을 만하다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 네가 너무 번거롭고 조잡하여 더 이상 가르칠 수가 없다. 물러가라." 최연이 백배사죄했으나, 김시습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의 사제관계는 반 년 만에 깨지고 말았다.
<해동전도록>에 의하면, 김시습은 도(道)를 홍유손, 정희량, 윤군평 등에게 전했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유명한 이인(異人)들이다. 정희량은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학사까지 지냈는데, 연산군이 갑자사화를 일으키게 될 줄 알고 종적을 감췄다.
김시습이 열반에 든 곳은 충남 부여에 있는 무량사다. 김시습은 열반에 들 때 스님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거든 화장하지 말고 땅 속에다 3년 동안 묻어둬라. 그후에 정식으로 화장해 다오"라고 했다.
스님들은 그가 원한 대로 시신을 땅에 묻었다. 그리고 3년 후에 다시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려고 무덤을 열었다. 관을 뜯고 보니, 김시습의 시신은 살아 있는 사람과 똑같았다. 얼굴에는 불그레하게 핏기가 감돌았다. 누가 봐도 산 사람이지 시신이 아니었다. 스님들은 모두들 그가 성불(成佛)했다고 확신했다.
김시습이 열반에 든 지 7년 후의 일이다. 놀랍게도 제자 윤군평이 스승 김시습을 개성에서 만났다. "아니 스승님,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선화(仙化)하신 지 벌써 7년이 넘지 않았습니까?" 윤군평은 눈을 휘둥그래 뜨고서 스승에게 여쭸다. "나는 오고 감이 자유자재다. 요새는 서경덕에게 도(道)를 가르치고 있다. 이곳에 왕래한 지 벌써 2년째가 된다." 윤군평의 물음에 김시습이 이렇게 대답했다.
김시습이 죽어서 3년이 지난 뒤에도 시신은 산 사람과 똑같았는데 얘기는, 이율곡이 왕명을 받들어 지은 <김시습전>에도 나온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오세암은 선계(仙界)의 기운이 왕성한 곳이다. 매월당 김시습이 선인(仙人)이 되었다는 얘기가 허무맹랑하게 들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