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릉 답사기Ⅱ 원릉, 휘릉, 건원릉, 목릉, 현릉, 수릉 |
능침 3개가 나란히 놓여있는 경릉을 뒤로 하고 다시 우리는 제21대 영조와 그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능인 원릉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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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지아비 옆에 묻히다 원릉은 무려 52년동안 왕위를 지킨 영조와 당시 15세의 나이로 궁에 들어와 당시 51살이나 많은 영조를 지아비로 모셨던 정순왕후 김씨의 능입니다. 저는 원릉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이 경기도 고양시에 소재한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의 홍릉의 모습입니다. 능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은 잘 아시겠습니다만 현재 홍릉은 정성왕후 만이 홀로 묻혀있습니다. 아직 직접 답사를 하지 못해서 사진 상으로만 보았습니다만, 원래는 영조의 자리까지 마련하여 왼쪽 능역(정면에서 볼 때)을 비워두었으나 결국 영조는 동구릉에 묻힘으로써 현재 그 능역은 쓸쓸히 빈 공간으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영조는 홍릉에 묻히고 싶어했고 더욱이 현재의 원릉 자리보다는 홍릉 자리가 명당으로 꼽힙니다. 하지만 결국 영조의 그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해 지금의 자리에서 잠들어있습니다. 강이형이 여러 가지 설을 말해주었는데 하나는 정순왕후 김씨의 투기라는 설과 또 다른 하나는 손자인 정조의 복수라는 설입니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뒤주에 굶겨죽인 할아버지 영조를 복수하기 위해서 흉당으로 꼽히는 자리에 묻히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저는 성군으로 꼽히는 정조의 외면 속에 시퍼런 복수의 칼날이 서려있는 듯하여 섬뜩해졌습니다. 어쨌든 영조는 결국 이 곳에 묻혀 51살 연하의 어린 부인과 나란히 잠들어있습니다. 원릉은 쌍릉 형식의 능으로 난간석만 둘렀으며 능침 앞에 각각 하나의 혼유석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화문으로 장식하고 처마가 날카롭게 치켜 올라가 예리한 이미지의 장명등과 어딘가 영조의 얼굴과 닮은 듯도 한 무인석과 문인석의 모습도 인상 깊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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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송 논쟁의 주인공, 자의대비의 휘릉 원릉을 지나 위로 올라가면 휘릉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자의대비로 잘 알려진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입니다. 자의대비는 효종이 즉위하자 대비가 되었으며, 효종이 승하하자 대왕대비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효종의 죽음은 예송 논쟁이라는 조정에 바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논쟁의 요점은 자의대비의 효종에 대한 복상 문제였습니다. 원래 적장자인 경우에는 3년상, 그 이하부터는 1년상이 기본적인 관례인데, 자의대비가 소현세자를 적장자의 예로 3년상의 상복을 이미 입은 적이 있기 때문에 인조의 차남인 효종에 대한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가 어떻게 될 것인가가 바로 제1차 예송 논쟁의 배경이었습니다. 그 후, 효종의 정비인 인선왕후 장씨가 승하하자 제2차 예송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역시나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였으며, 이렇게 계속된 예송 논쟁은 붕당 정치의 끝을 보여주는 일이었으며, 그야말로 왕실의 권위가 갈수록 땅에 떨어지는 사태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렇듯 자신의 복상 문제를 둘러싼 계속 되는 붕당간의 싸움을 지켜본 자의대비는 인조를 거쳐 효종, 현종, 숙종대까지 4대를 걸쳐 왕실의 어른으로 지냈습니다. 슬하에 자녀가 없었으므로 더욱 쓸쓸히 살아야 했을 자의대비의 생애가 그녀의 마지막 안식처인 휘릉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습니다. 휘릉은 그렇게 높지 않은 능상에 넓지 않은 능역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처럼 휘릉의 혼유석의 고석이 다시 5개로 나타나는 것은 주목할 만 했습니다. 휘릉을 지키고 있는 문인석과 무인석의 눈은 믿음직스럽기 보다는 어딘가 우스꽝스러웠습니다. 특히 혼유석 앞의 장명등의 처마 밑의 공포까지 새겨 넣은 섬세함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
▲ 휘릉의 능침 ⓒ 문화사랑 ▲ 휘릉의 고석이 5개인 혼유석 ⓒ 문화사랑 |
조선 500년 역사의 시작, 건원릉 동구릉에 가장 먼저 자리잡은 건원릉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잠들어 있는 곳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건원릉을 가장 먼저 보고 싶었습니다. 이유인 즉, '한 나라를 건국한 임금의 능은 어떻게 생겼을까.'하는 단순한 이유입니다만, 건원릉은 능의 이름부터가 그 모습을 잘 대변해주고 있듯이 군더더기없이 가장 잘 만들어진 능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건원릉을 보기 위해 금천을 건너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으로 향했습니다. 다른 능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신도비각이 있었습니다. 거대한 비석은 한 나라를 건국한 자의 발자취를 느끼기에 충분했습니다. 능상 또한 오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가파른 능상을 오르고 나니 거대한 능침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석물들이 한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능침은 12지신상이 새겨진 병풍석을 둘러져있고, 난간석을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휘릉에서 볼 수 있었던 고석이 5개인 혼유석을 볼 수 있었고, 거기다 능을 지키고 있는 문인석과 무인석, 석호의 형태은 견고하여 600여년의 세월을 뛰어 넘은 늠름함을 지금까지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건원릉 하면 바로 능침의 갈대를 생각하게 되는데, 답사 며칠 전에 한식을 맞아서 벌초를 했다고 하셨습니다. 하여 그 유명한 갈대가 무성한 건원릉의 모습은 볼 수 없었습니다. 건원릉의 갈대를 보고 싶어서라도 동구릉에 다시 꼭 오리라는 다짐을 하면서 능상을 내려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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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상오르기도 어려워! 목릉은 제14대 선조와 그의 정비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입니다. 목릉도 약간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능이었습니다. 세 개의 언덕 위에 각각 능이 자리잡고 있는 능으로 흔히 볼 수 있는 동원이강릉 형식과는 달랐습니다. 강이형의 말에 따르면 정자각이 모두 선조와 의인왕후의 능을 바라보고 있으며 인목왕후의 능을 바라 보고 있는 건물들이 없는 것으로 보아 원래 따로 능을 조성하려고 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인목왕후 능도 목릉으로 함께 포함시킨 것이 아닌가라고 추측하고 있다고 합니다. 목릉에 앞서 여러 능의 능상을 오르내렸던 저는 목릉의 능상이 3개인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어느새 장벽으로 작용하고 말았습니다. 답사 전에 첫 답사지로써 동구릉은 많이 힘들꺼라는 강이형의 말이 새삼스레 스쳐지나갔습니다만 조금만 더 힘을 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목릉의 세 능상을 한 컷에 모두 잡아 내기라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진 기술이 부족한 저로써는 선조와 의인왕후의 능침만을 한 컷에 담아내는 것에 만족해야했습니다. 목릉의 석물은 다른 능과 비교했을 때 그 크기는 자랑할 만했으나 그 솜씨는 크게 감동할 만한 것은 못되었습니다. 아마도 임진왜란이라는 나라의 큰 전란이 있었던 후라서 그런지 솜씨있는 장인을 구하기가 어려웠다고 생각됩니다. 반대로 같은 목릉이지만 조성시기가 가장 나중인 인목왕후의 능의 석물은 좀 더 숙련된 솜씨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답사를 했을 때, 의인왕후의 능과 인목왕후의 능의 우측 곡장이 약간 무너져 내려있었습니다. 더욱이 의인왕후의 능역은 넓은 편이 아니라서 여름에 많은 비가 내리면 석물들이 쓸려져 내려갈 것 같은 불안정한 모습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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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고한 느낌의 현릉 현릉은 동구릉에서 두 번째로 자리잡은 능역으로 제5대 문종과 그의 비인 현덕왕후 권씨의 능입니다. <국조오례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가장 오래된 능으로 알려져있습니다. 문종은 흔히 단종의 아버지, 병약했던 왕으로 많이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세종의 장자였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다지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도 다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문종의 허약한 이미지와는 달리 그의 능만큼은 갖출 만큼 다 갖추고 있어 실제 이미지를 생각하기 어려웠습니다. 능침은 병풍석을 두르고 그 주변에는 난간석을 설치하였으며, 굳건히 입을 다물고 있는 문인석과 칼을 찬 늠름한 무인석이 현릉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현릉은 동원이강릉 형태의 능으로 그 옆 능상에는 현덕왕후가 누워있는 능침이 있습니다. 현덕왕후는 세자빈으로 궁에 들어와 어린 아들(단종)을 낳고 얼마있지 않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자빈 신분으로 죽어서 그런지 능의 상설은 비교적 단순했습니다. 아마도 처음 조성될 때는 원의 형식이었으나 문종이 즉위한 후에 왕후로 추봉되어 나중에 능의 형식으로 바뀌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현덕왕후의 아들인 단종을 죽음으로까지 몰고갔던 세조(수양대군)는 현덕왕후가 나오는 악몽에 자주 시달렸다고 하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합니다. 결국 자신의 어린 아들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던 세조에 대한 원한이 사무쳤을 것을 생각하니 그녀의 짧지만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다시금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답사를 갔을 때 현릉 권역의 잔디를 다시 심기 위해 기존의 잔디를 모두 뽑아둔 상태였습니다. 다음에 다시 찾았을 때는 깔끔한 모습의 현릉의 모습을 기대하면서 답사 초에 제향 때문에 능상에는 올라갈 수 없었던 수릉으로 다시 발길을 옮겼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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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릉의 완성, 수릉 처음 동구릉에서 만난 능이 수릉이었습니다. 같은 능이지만 처음보았던 모습과는 달리 보고 들은 것이 많아져서 그런지 수릉을 보는 눈이 달라지게 된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나름대로 어려운 한자말도 써보면서 형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습니다. (^^) 수릉은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조씨의 능입니다. 신정왕후의 능이 동구릉으로 결정되어 자리잡게 되면서 지금의 동구릉의 모습이 비로소 완성되었습니다. 동구릉 답사기Ⅰ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정왕후는 왕실의 어른으로써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던 여장부였습니다. 고종을 왕위에 세운 것도 바로 그녀였으며 83세까지 천수를 누리면서 조선 후기위 정국을 좌지우지한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녀의 생전의 모습이 죽어서 수릉에까지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왕과 왕비가 같은 능에 묻힐 경우에 정면에서 볼 때 왼쪽에 왕이 묻히게 되며 왕비는 오른쪽에 묻힙니다. 하지만 수릉은 왼쪽에 신정왕후가 묻혀있으며 오른쪽에 문조가 묻혀있습니다. '여성상위릉'인 셈입니다. 이와 같은 경우는 추존왕 덕종과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의 경릉에서도 나타나는 형태입니다. 남편이 세자의 신분으로 죽었으나 부인은 대왕대비까지 올라갔으니 신분 상으로 보았을 때는 당연한 일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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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움을 뒤로 하고 처음 왕릉을 향한 셀레었던 마음은 답사를 하면 할수록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바뀌었습니다. 아직은 남아있는 왕릉의 수가 더 많지만 다 보고 나니 왠지 스스로가 뿌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 하지만 제대로 답사를 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듯이 처음왔을 때, 두 번째왔을 때의 느낌, 보는 눈이 아마 많이 다를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토록 보고싶었던 능을 9기나 봤으니깐요! |
감사의 말 같이 동행했던 강이형에게 정말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몇 번이고 왔던 동구릉이었을 텐데 힘든 기색없이 자상하게 설명까지 해주어서 너무 고마웠습니다. (^^) 그리고 현릉 답사 도중에 창경궁 지킴이를 하고 계시는 뭉치님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처음보는 저에게 답사가 마치고 나서 저녁도 사주시고 지하철 역까지 데려다 주셨습니다. 여러모로 여러 사람에게 신세를 지게되었지만 그만큼 뜻깊었던 답사였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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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 일자 : 2007.04.15 |
첫댓글 최강이가 밥을 사줬다는 줄 알고 ㅋㅋㅋ 뭉칫샘도 동행하셨나보군요... 자..알 읽었습니다. 언제 얼굴 한번봅시다.. 최강이말이 확실한지 비교 해보게 ㅋㅋ
보현당님! 거기에 너무 초점을 맞추시면 안되요! ㅜㅜ
-_-;;; 저 돈 없어요 ㅋㅋㅋ
수고많았습니다~ㅋ 글 잘쓰네~~ㅎㅎ (근데 나 그날 어떤 얘기 했는지 하나도 기억 안나는데 -_-;;ㅋ)
자기가 한 말도 모르고! 늙은거야,,,,,,, 어쩔꺼야! ㅜㅜ
-_-;;; 너보다 얼굴은 젊어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