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대륙의 동쪽에서 태평양을 향해 남북으로 뻗은 한반도에는, 고생대 및 그 이전의 지질시대에 속한 지층이 많고 신생대의 지층은 아주 적다. 고생대 전반까지의 지층은 대체로 해성층(海成層)이며, 고생대 말기 및 중생대의 지층은 대부분 육성층(陸成層)이다.
한반도는 만주·화북·시베리아 등 동북아시아의 대륙부와 같이 육지의 형성 연대가 매우 오래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암석은 시생대(始生代)에 퇴적된 지층이 변성작용을 받은 경기변성암복합체의 암석들이다. 그 다음은 시생대 말에 이들 변성퇴적암을 관입한 화강암이 변성된 화강편마암이다.
이들 변성암과 더불어 널리 분포하는 것은 중생대에 관입한 화강암이다. 변성암과 화강암은 국토 면적의 70% 이상을 차지한다. 퇴적암은 국토 면적의 약 20%를 차지하며, 고생대 초에 쌓인 조선누층군(朝鮮累層群)과 고생대 말∼중생대 초에 걸쳐 쌓인 평안누층군(平安累層群)이 대표적이다.
조선누층군은 평안남도 동부와 강원도 남부에 비교적 널리 분포하며, 석회암층이 두껍게 발달되어 있다. 평안누층군은 평안남도 북부와 남부, 강원도 남부, 전라남도 등지에 분포하며, 우리 나라 무연탄의 대부분을 부존하고 있다.
중생대지층으로는 대동누층군(大同累層群)과 경상누층군(慶尙累層群)이 있다. 경상누층군은 경상도지방에 널리 분포한다. 신생대의 제3기층은 국지적으로 산재한다. 제3기말에서 제4기 전반에 걸친 화산활동으로 조면암·현무암 등이 분출해 백두산·칠보산 등의 화산과 제주도·울릉도 등의 화산도 및 개마고원·철원·신계 등지의 용암대지를 형성하였다.
[지형]
태백산맥과 함경산맥이 동쪽에 치우쳐 있고 우리 나라의 지붕이라 일컬어지는 개마고원이 함경산맥 북쪽에 위치해, 동쪽과 북쪽이 높고 서쪽과 남쪽이 낮은 형상이다. 우리 나라는 산지가 국토 면적의 약 80%를 차지하는 산악국이지만, 1,000m 이상의 높은 산지는 약 10%에 불과하고, 200∼500m의 낮은 산지가 40% 이상을 차지한다.
한반도와 만주를 통틀어 가장 높은 백두산(2,744m)을 비롯, 관모봉(2,541m)·북수백산(2,522m)·금강산(1,638m)·설악산(1,708m)·오대산(1,563m)·태백산(1,567m) 등의 높은 산들은 북쪽과 동쪽에 편재한다. 특히 해발 2,000m 이상의 높은 산들은 개마고원과 그 주변에 솟아 있고 남한에는 없다.
한반도는 오랜 침식으로 전반적인 지형이 저평화(低平化)되었다가 제3기중신세(中新世) 이후 지반이 융기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지반의 융기는 동쪽과 북쪽에 치우쳐서 일어났으며, 저평했을 때의 지형적 흔적이 산지의 곳곳에 남아 있다. 개마고원에는 저기복의 평탄한 지면이 광범위하게 분포하며, 대관령 일대에도 사면의 경사가 극히 완만한 구릉성지형이 해발 800m 내외의 고도에 넓게 나타난다. 이러한 고위평탄면(高位平坦面)은 서쪽으로 갈수록 낮아져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또한, 서부에는 고위평탄면이 해체되면서 이루어진 파랑상의 구릉지가 넓게 분포한다. 구릉지 위로 솟아 있는 구월산·북한산·관악산·계룡산·무등산 등은 해발고도는 높지 않으나 예로부터 명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에는 명승지 내지 관광지 구실을 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산맥 중에서 기본이 되는 것은 태백산맥·낭림산맥·함경산맥 등이다. 이들 산맥은 중신세 이후의 융기운동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고도가 높고 연속성이 뚜렷하다. 그러나 태백산맥과 낭림산맥에서 빗살처럼 뻗어나온 강남·적유령·묘향·언진·멸악·마식령·광주 등의 산맥들은, 지각이 약한 지질구조선을 따라 하곡(河谷)이 팸으로써 산지가 하곡들 사이에 남아 있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서쪽으로 갈수록 낮아지면서 연속적인 맥을 이루지 못한다. 다만, 소백산맥은 속리산·덕유산·지리산 등의 고산들로 이어져 예로부터 영남·호남·호서 지방 간에 교통상의 장벽이 되어 왔다.
압록강·대동강·한강·금강·낙동강 등의 주요 하천들은 황해와 남해로 흘러든다. 이들 하천은 20세기에 근대적인 육상교통이 발달하기 전까지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되었으며, 평양·한양·공주·부여 등의 역대 도읍들도 하안에 건설되었다. 또한, 대하천의 주변에는 강경·부강·영산포·낙동·안동 등의 하항이 발달하였다.
우리 나라의 하천들은 유역 면적이 좁고 여름철에 집중호우가 잦아 유량의 변동이 심하다. 하천을 통한 물자 수송은 유량이 많은 시기와 하류에서는 만조(滿潮)로 수위가 상승할 때 주로 이루어졌다. 한강의 경우에는 인도교 부근까지 조석(潮汐)의 영향이 미친다. 하천은 막대한 수해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하류에는 비옥한 충적평야를 이루어 놓았다. 김포·안성·논산·호남·나주·김해 등의 평야는 황해와 남해로 유입하는 주요 하천의 하류에 발달된 평야로서, 벼농사를 집중적으로 행하는 핵심 지대는 모두 충적지이다.
이들 평야의 충적지는 하천의 토사가 쌓여 형성된 지형으로, 해발 고도가 10m 내외이고 과거에는 홍수의 재해를 상습적으로 입었던 지역이다. 형산강·용흥강·성천강 등 동해로 유입하는 하천들의 하류에도 충적평야가 발달되어 있으나 그 규모가 작다. 또한, 황해와 남해로 유입하는 하천들의 중류·상류에는 춘천·원주·충주·제천·안동·김천·거창·남원 등의 침식분지가 형성되어 지방의 산업·행정의 중심지로 발전해왔다.
우리 나라는 반도국이어서 해안선이 매우 길다. 동해안은 비교적 단조로우나 황해안과 남해안은 해안선의 굴곡이 심하고 섬들이 많아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을 이룬다. 동해안은 지반이 융기하고 태백산맥이 해안을 따라 뻗어 있기 때문에 단조롭다. 이에 반해 황해안과 남해안은 태백산맥과 낭림산맥에서 갈라진 산맥들이 해안을 향해 뻗어 있기 때문에 복잡하다.
조차가 큰 황해안에는 간석지(干潟地)가 넓게 발달되어 있다. 간석지는 주로 하천을 통해 바다로 유출되는 토사가 만을 중심으로 쌓여 형성된 해안퇴적지형으로, 예로부터 간척사업에 의해 논이나 염전으로 개발되어 왔다. 해수욕장으로 이용되는 사빈(砂濱)은 동해안에 탁월하게 발달되어 있으며, 황해안과 남해안의 사빈은 일반적으로 규모가 작은 편이다.
2. 기후와 식생
[기후]
우리 나라는 북위 33°∼43°의 아시아대륙 동안(東岸)에 위치해 사계절의 구분이 뚜렷한 온대 내지 냉온대 기후지역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중위도의 대륙 동안은 서안에 비해 한서(寒暑)의 차가 심하며, 특히 겨울철의 기온이 매우 낮다. 거의 같은 위도상에 있는 서울과 아테네의 1월 평균기온은 각각 -4.6℃, 8.8℃로서 약 13℃ 정도 차이가 난다.
우리 나라의 기후는 한대성과 열대성의 2중적 성격을 띤다. 겨울에는 시베리아의 대륙성고기압으로부터 북서계절풍이 불어와서 일최저기온이 -10℃ 이하로 내려가는 날이 많으며, 한파(寒波)가 내습할 때는 -15°∼-20℃의 혹한도 나타난다. 이에 반해 북태평양의 해양성아열대고기압이 지배하는 한여름〔盛夏〕에는 일최고기온이 30℃를 넘어 열대습윤기후를 방불하게 하는 무더위가 계속된다.
최한월과 최난월의 평균기온차는 북부에서 약 40℃, 중부에서 약 30℃, 남부에서 약 23℃에 달해 북쪽으로 갈수록 대륙성기후의 성격이 짙어진다. 우리 나라의 한극(寒極)인 중강진에서 최저 -43.6℃, 서극(暑極)인 대구에서 최고 40℃의 기온이 기록된 바 있다.
한반도는 위도 10°에 걸쳐 있고, 북쪽은 고도가 높으며 대륙에 접해 있는 데 비해 남쪽은 낮으며 바다에 돌출해 있어 남북간의 기온차가 심하다. 연평균 기온의 분포는 서귀포(14.7℃)에서 가장 높고 중강진(3.8℃)에서 가장 낮아 10℃ 이상의 남북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계절상으로는 여름에는 그 차가 작고 겨울에는 매우 크다. 8월에는 서귀포(25.8℃)와 중강진(22.7℃)의 기온차가 3℃에 불과하지만, 1월에는 각각 5. 1℃와 -20. 8℃를 나타내어 그 차가 무려 26℃나 된다. 때문에 여름의 더위는 전국적이지만 겨울의 추위는 남쪽과 북쪽이 현저하게 다르다.
우리 나라의 기후는 전반적으로 겨울이 길고 여름이 비교적 짧으며, 봄과 가을은 몹시 짧다. 북부지방에서는 겨울기간이 4∼5개월, 중부지방은 3.5∼4개월, 남부지방은 2∼2.5개월이다. 또한, 여름기간도 개마고원에서는 몇 주일에 불과하고, 관북 해안지방은 약 1개월, 관서지방은 약 2.5개월, 중부지방은 약 3개월, 남부지방은 약 3.5개월이다. 같은 위도상일지라도 동서간에는 비교적 현저한 기온차가 나타난다. 즉, 동해안은 황해안에 비해 겨울에 3℃ 정도 높은 기온을 보여준다. 이는 태백산맥이 한랭한 북서계절풍을 막아주고, 북서풍이 영서지방에 눈을 내릴 때에는 따뜻한 바람으로 변해 동해사면을 불어 내리기 때문이다.
강수(降水)는 거의 전국적으로 여름에 집중되어 있다. 서울을 포함한 중부지방에서는 7월에, 중부 이북에서는 8월에 많은 비가 내린다. 냉량한 오호츠크해기단과 고온다습한 북태평양기단의 접촉부에 형성되는 장마전선이 한반도에 상륙한 다음 천천히 북상하기 때문이다. 서울의 경우 6∼8월의 우기에 연강수량의 약 60%, 장마철인 7월에 내리는 강우만도 연강수량의 약 30%를 차지한다.
장마철은 대개 6월 하순에 시작해 중부 이남에서는 7월 하순에 끝나며, 북부지방에서는 8월까지 계속된다. 장마가 끝난 뒤 무더위가 계속되는 한여름에는 때때로 태풍이 비를 몰고 온다. 연강수량은 지역에 따라 큰 차이가 있으나 남쪽에서 북쪽으로 갈수록 감소하는 경향이 있다.
강우량의 지역적 분포는 지형과도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여름에 양쯔강 유역에서 발생해 우리 나라로 이동해오는 이동성저기압이 산지에 부딪히는 큰 하천의 중·상류 지방은 다우지이다. 산지로 둘러싸인 섬진강의 하류지방은 장마전선의 영향으로 1,400∼1,500㎜의 최다우지를 이룬다. 한강과 임진강의 중류·상류 및 청천강의 중·상류 지방도 1,200∼1,300㎜의 다우지이다. 개마고원은 함경산맥이 여름계절풍을 차단하고 이동성저기압의 영향을 적게 받아 연강수량이 700㎜ 이하로서 가장 적다.
이 밖에 구릉성저지대인 대동강 하류지방과 태백산맥 및 소백산맥으로 둘러싸인 낙동강 중·상류 지방은 800∼900㎜ 이하의 과우지(寡雨地)이다. 우리 나라는 습윤기후지역에 속하나 연강수량의 변동이 심하다. 이는 주로 여름철의 강수량에 원인이 있다. 연강수량의 변동은 지역에 따라 다르나, 서울의 경우 1940년에는 2,135㎜, 1949년에는 633㎜를 기록해 그 차이가 약 1,500㎜에 달한다. 또한, 농업의 중심지인 중부와 남부지방에서는 연평균치가 20% 내외의 큰 폭을 보인다.
우리 나라는 중위도의 대륙 동안에 위치해 기후에 영향을 미치는 기단과 기압의 배치가 계절에 따라 매우 다르다. 겨울에는 한랭건조한 대륙성의 시베리아기단의 영향을 주로 받는다. 시베리아기단은 발달과 쇠퇴를 주기적으로 반복한다. 기단의 세력이 강해져 한파가 우리 나라로 내습할 때는 기온이 내려가며, 약화되어 이동성고기압이나 온대성저기압이 중국 쪽에서 우리 나라로 다가올 때에는 날씨가 온화해져서 이른바 삼한사온(三寒四溫)의 현상이 나타난다.
봄철이 되면 시베리아고기압은 약화되고 여기에서 분리된 이동성고기압과 온대성저기압이 2,3일 간격으로 통과하며, 날씨는 화창하나 변화가 심하다. 그리고 기온이 올라감에 따라 남부지방에서부터 여러 가지 꽃이 피기 시작해 점차 북쪽으로 옮아간다. 진달래가 피는 시기는 남부와 북부 사이에 1개월 이상의 차이가 있다.
봄에는 공기가 건조해 산불이 자주 발생하며 황사현상(黃砂現象)도 나타난다. 늦봄과 초여름에는 냉량다습한 오호츠크해고기압이 우리 나라로 세력을 확장해 날씨가 비교적 맑으며, 태백산맥 서쪽의 중부지방에는 푄현상이 자주 일어난다. 그리고 오호츠크해고기압이 약화되고 저위도에 머무르면 고온다습한 북태평양고기압이 북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한다. 이들 고기압 사이에 형성되는 장마전선이 우리 나라로 북상해 장마철이 시작된다.
장마전선이 만주지방으로 올라가면 북태평양고기압이 우리 나라를 지배해 삼복(三伏)더위가 계속되는 한여름으로 접어들며, 이 때는 남서풍·남풍·남동풍 등 남풍 계통의 바람이 불어온다. 가을이 되면 시베리아고기압이 발달하기 시작하는데, 여기에서 분리된 이동성고기압의 영향을 많이 받아 날씨가 맑다. 온대성저기압이 통과할 때는 날씨의 변화가 일어나지만 봄철보다는 약해 농작물의 결실에 유익하다.
[식생]
우리 나라는 남북간의 기후차가 크고 지표의 기복이 상당해 식물의 종류가 풍부한 편이다. 삼림대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면서 난대·온대·냉대가 분포한다. 난대림은 남해안에 분포한다. 잎이 넓은 상록활엽수가 많고 대표적인 수종은 동백나무와 북가시나무이다. 이러한 유형의 삼림을 조엽수림(照葉樹林)이라고 하며, 일본 남부와 중국의 화중·화남 지방으로 이어진다.
낙엽활엽수로 대표되는 온대림은 북한의 구릉지대와 남한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대표적인 수종은 신갈나무·떡갈나무·상수리나무 등이다. 대체로 남쪽으로 갈수록 수종이 점차 변해 느티나무·팽나무·서나무·흑송·참대 등 난대성의 수종이 섞인다. 북한의 동북부에는 상록침엽수림이 우세하게 나타난다. 냉대림의 상록침엽수는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은 기후에 알맞은 식물로 북반구의 북부에 널리 분포한다. 대표적인 수종은 분비나무·가문비나무·구상나무·눈잣나무 등이다.
산지가 많은 우리 나라에서는 고도에 따른 식생의 변화가 현저하다. 특히, 북한의 산악지대와 제주도의 한라산에서 잘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신갈나무·떡갈나무 등을 주로 하는 낙엽활엽수림대 위에는 가문비나무·분비나무·구상나무 등의 아고산대(亞高山帶) 침엽수림대가 나타난다.
아고산대가 시작되는 높이는 한라산 1,500m, 금강산 1,200m, 백두산 900m 등이다. 삼림의 한계 고도는 백두산 2,000m, 관모봉 2,200m이며, 지리산과 한라산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3. 자연 환경과 생활
[지형과 생활]
지표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농업·취락·교통 등 각종 인문현상은 지형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다. 우리 나라는 농업국으로 발전해 왔지만 산지가 많기 때문에 농토가 비교적 협소하다. 농업은 벼농사가 중심이지만 논과 밭의 분포는 대체로 지형과 일치한다. 하천 양안의 충적지와 계곡의 저지는 주로 논으로 이용되며, 경사가 완만한 구릉지와 산록은 밭으로 이용된다.
오늘날 쌀의 곡창을 이루고 있는 평야지대의 충적지는 원래 상습적인 침수지역으로서, 금세기 이전에는 대부분 황무지였다.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 擇里志≫에도 강(江)가는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으로 기술되어 있다. 당시 논농사에 유리했던 곳은 평야지대의 넓은 충적지보다는 비교적 작은 하천이 흐르는 계곡이었다. 이러한 곳은 보(洑)로 막아 하천을 관개용수원으로 이용할 수 있고 수해도 적은 이점이 있다. 그리하여 넓은 평야를 이용하지 않고 계곡에서 계단식 논을 만들어 농토를 확장하기도 하였다. 큰 강 하류의 평야지대에서도 사람들이 주로 살던 곳은 구릉지와 충적지가 만나는 부분이었다. 이러한 곳은 논과 밭이 고르게 분포해 다양한 농작물을 재배할 수 있고, 야산에서 연료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높은 산지는 예로부터 교통상의 큰 장애였다. 태백산맥·소백산맥·낭림산맥 등은 여러 고개〔嶺〕를 통해 산맥의 양쪽 지역이 연결되기는 했으나, 교통이 불편했던 과거에는 주민들을 갈라놓는 구실을 하였다. 태백산맥의 대관령·추가령, 소백산맥의 조령·추풍령·육십령 등은 넘기가 어려웠으며, 고개의 양쪽 기슭에는 통행인을 위한 영취락(嶺聚落)이 현저하게 발달하였다. 조선 8도의 행정경계는 산맥과 일치하는 경우가 많아 호남과 영남, 관서와 관북 등 각기 개성이 뚜렷한 지역들이 형성되었다. 높은 산맥의 양쪽 지방은 방언·가옥구조·농업·풍속 등서 차이가 크다.
산지는 농업에 불리하지만 생활의 근거를 마련하고 전란을 피하기 위해 찾아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주로 화전(火田)을 일구어 생계를 이어갔으며 화전민으로 정착하기도 하였다. 화전민들이 주로 이용하던 땅은 산지 중에서도 지면이 비교적 평탄한 고위평탄면이었다. 고위평탄면은 토양층이 비교적 두꺼워 영구적인 농토로 바뀌었다. 교통이 편리해진 오늘날 대관령 일대에는 채소를 중심으로 한 고랭지농업(高冷地農業)이 활발하다. 서부지방의 산정부에 고위평탄면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평정봉(平頂峰)은 산성을 쌓아 외적의 침입시에 방어거점으로 삼았다. 남한산·금오산·구월산 등의 산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황해안의 간석지는 중요한 토지자원의 하나로서 계속 농경지로 개발되어 왔다. 몽고의 침입으로 고려정부가 강화도로 천도했을 때 식량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간척사업을 추진하였다. 백제시대에 쌓았다고 하는 벽골제(碧骨堤)도 저수지의 제방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조수가 드나드는 갯골을 가로막은 것으로 보아 방조제(防潮堤)의 기능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말기까지의 간척사업은 규모가 작았고 민간에서 추진한 간척사업은 더욱 그러하였다. 근대적인 토목공사에 의한 대규모의 간척사업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간척지가 주로 논으로 이용되기 때문에 방조제와 더불어 수리시설도 축조되었다.
호남평야와 같은 해안평야는 간척사업을 통해 확장되어 왔다. 전라북도 옥구군의 미면(米面, 1920년대)과 김제군의 광활면(廣闊面, 1930년대) 및 부안군의 계화면(界火面, 1970년대) 등은 간척사업으로 생겨났다. 간석지는 퇴적물이 계속 쌓이면서 성장하기 때문에 구간척지 외부로 신간척지가 조성된다. 지면이 높아 조수의 침입이 적고 염분에 강한 식물들이 자라는 염생습지(鹽生濕地)는 황해안과 남해안에 광범위하게 분포했으나, 지금은 거의 논과 염전으로 바뀌어져 있다.
[기후와 생활]
기후는 의식주 생활과 취락의 입지, 산업 활동 등에 큰 영향을 미친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 나라에서는 소한(小寒)에서 동지(冬至)까지의 24절기(節氣)에 따라 세시풍속과 관련된 각종 행사가 있었다. 우리의 의식주 생활은 지역마다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겨울의 추위와 여름의 더위를 이겨내기에 알맞도록 고안되었다.
우리 나라 고유의 한복에서 겨울옷은 천 사이에 솜이 들어 있고 바지에는 대님을 매어 체온의 발산을 최소로 줄이고 있다. 여름옷은 통풍이 잘되는 삼베·모시 등의 마직물을 많이 사용하며, 풀먹이기에 주의를 기울여 체온의 발산을 최대로 늘리도록 하였다. 겨울이 긴 지방에서는 겨울 동안 신선한 채소를 구할 수 없는 것이 식생활에 있어서 큰 어려움의 하나이다. 김치는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우리 나라 특유의 채소저장법이다. 추운 북쪽에서 따뜻한 남쪽으로 갈수록 김치의 맛이 짠 것도 기온차와 관련이 있다. 또한, 계절에 따라 각종 음식물을 현저하게 달리해 생활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 넣는다.
전통적인 가옥에는 겨울철의 난방시설인 온돌이 설치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지붕이 낮고 방이 좁으며 벽이 두껍다. 창과 문의 수는 적고 규모도 매우 작으며, 2중구조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가옥구조는 춥고 긴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 방한(防寒)에 치우친 때문이다. 한편, 마루나 대청이 설치되어 있어 여름에는 이 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가옥구조는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북쪽으로 갈수록 폐쇄성을 띠는데, 추운 관북지방의 가옥은 부엌을 넓혀 작업장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부엌과 방 사이에 벽이 없는 온돌인 정주간(鼎廚間)을 설치하였으며, 가축의 축사도 온기가 있는 부엌에 붙어 있다.
전통적인 가옥의 건축재료로는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을 이용하였다. 임산자원이 풍부했기 때문에 목재를 가장 많이 사용하였고 흙과 돌도 중요시하였다. 우리 나라의 가옥은 지붕의 재료에서 외형적 특색이 뚜렷해 지붕의 재료에 따라 초가·기와집·너와집 등으로 구별하기도 한다. 초가지붕은 단열재 구실을 하여 기와집이나 양철집보다 여름에 서늘하고 겨울에 따뜻하다. 초가에서도 지역에 따라 지붕의 재료는 상이해 벼농사 지대에서는 볏짚, 밭농사지대에서는 조짚이나 밀짚, 제주도에서는 새〔茅〕, 김해평야에서는 갈대 등이 이용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남향산록이 제일 좋은 집터로 꼽힌다. 남향산록은 강한 북서계절풍을 직접 받지 않고 일사량을 최대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취락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하천의 이름에는 남대천(南大川)이 많다. 하천이 동서방향으로 흐를 때 하천 북쪽의 남향산록에 위치한 마을의 남쪽을 흐르므로 이러한 명칭이 붙여진 것이다.
택지풍수(宅地風水)·촌락풍수·묘지풍수 등 과거에 성행했던 각종 풍수사상에서 길지(吉地)의 으뜸으로 여겼던 배산임수(背山臨水)는 우리 나라의 기후 및 기타 자연환경과 부합된다. 가옥의 구조뿐만 아니라 취락의 입지에서도 여름철의 더위보다 겨울철의 추위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기후와 가장 관련이 밀접한 산업은 농업이다. 우리 나라의 농업은 벼농사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벼는 동남아시아가 원산지인 열대성농작물인데, 몬순아시아에 속하는 우리 나라는 여름이 고온다습해 벼농사에 알맞은 기후조건을 갖추고 있다. 남부지방의 평야지대에서는 만생종(晩生種)을, 북부와 산간지방에서는 조생종(早生種)을 재배하고 있다.
벼와 더불어 널리 재배되는 작물은 보리이다. 보리는 서남아시아가 원산지로서 생육기가 우리 나라의 일반 식물과는 달리 가을에서 봄까지이다. 그리하여 보리는 겨울이 비교적 온난해 논의 그루갈이가 가능한 중부 이남에서 주로 생산된다. 지금은 주식에서 쌀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높아졌으나, 과거 남부지방에서는 늦봄부터 가을까지의 식량은 거의 전적으로 보리에 의존했기 때문에 ‘꽁보리밥’이라는 말도 생겼다.
기온이 낮고 강수량이 적어 밭농사가 활발한 관서지방에서는 조와 기타 잡곡이 많이 생산된다. 또한, 여름이 짧고 냉량한 영서지방과 관북지방에서는 감자와 옥수수가 많이 생산되어 주식으로 이용된다. 근래에는 비닐하우스의 등장으로 기후의 제약을 극복하고 연중 채소와 화훼를 재배한다. 특히, 겨울이 온난한 남부지방에서는 원교농업의 형식으로 채소를 많이 재배한다. 제주도에서는 1970년대 이후 감귤재배가 활발해 지금은 생산에서 가장 중요한 과실이 되었다. 이러한 농업은 기후의 혜택을 충분히 활용하는 좋은 예이다.
3. 자연 재해와 그 극복
[자연 재해]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고 재산에 막대한 손해를 입히는 자연재해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우리 나라에서 자주 발생하는 것은 가뭄·홍수·냉해·산사태 등이다. 이러한 자연재해는 수시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계절에 집중적으로 발생한다.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농업에 해를 끼치는 가뭄은 초여름과 한여름에 자주 발생한다. 장마전선의 북상이 늦어져 6월에 가뭄이 심하면 모내기에 막대한 지장이 초래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7월까지 연장되는 해도 있다. 어떤 해에는 장마가 일찍 끝나고 북태평양고기압의 세력이 강력해 벼의 성숙기에 가뭄이 계속되기도 한다.
가뭄이 계속될 때 태백산맥 서쪽의 영서·경기 지방에 푄현상이 일어나면, 심한 경우에는 우물이 마르고 농작물은 물론 산과 들의 초목까지 마르게 된다. 1939년에는 보기 드문 가뭄이 들어 쌀생산량이 평년의 절반에 불과하였다. 가뭄은 넓은 범위에 걸쳐 발생하기 때문에 피해가 심각하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482년 동안에 극심한 가뭄이 89회에 달하였으며 2, 3년간 연속된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1919·1924·1928·1939·1966년에 가뭄이 전국적으로 극심했고 국지적인 가뭄은 이보다 잦았다.
수해를 일으키는 홍수는 6∼9월의 우기에 주로 발생하며 하천 양안의 저지대에 피해를 준다. 거의 매년 장마철이면 일강수량 100㎜를 넘는 집중호우가 내리며, 태풍이 통과할 때는 강수 집중도가 이보다 훨씬 커서 예외없이 심한 홍수가 발생한다. 태풍은 강한 바람까지 수반해 농작물에 풍해(風害)를 입히기도 한다. 태풍은 7∼9월 사이에 3,4년에 1회 정도로 남부지방을 내습하는데, 해안지방에서는 해일(海溢)의 피해를 입기도 한다.
중부지방의 경우 20세기에 들어와서 가장 심하였던 수해는 1925년 7월에 있었다. ‘을축년홍수(乙丑年洪水)’라고 불리는 이 때의 수해는 경기만 쪽으로 내습한 태풍에 의한 것이었는데, 며칠 사이에 400∼600㎜의 집중호우가 내려 한강 주변의 저지대가 전부 물로 덮였다. 1959년 김해지방을 강타한 사라호 태풍도 풍수해와 해일을 일으켜 인명과 재산에 막대한 피해를 초래하였다.
집중호우시에는 산사태가 발생해 가옥과 농경지를 순식간에 휩쓰는 경우도 있다. 우리 나라의 산사태는 사면의 토양층이 빗물을 흡수하고 수목이 바람에 흔들려 기반암 위의 토양층이 요동될 때 발생하는 것이 보통이므로 규모가 크지는 않다.
냉해는 농작물의 생육기에 궂은 날이 계속되어 일조량이 부족하거나 기온이 낮을 때 발생한다. 발생률은 가뭄과 수해에 비해 작지만, 냉해가 심한 경우에는 농작물의 결실이 부실해 흉년이 들기도 한다. 냉해는 저지대보다 산간 고지대에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관북 해안지방은 여름철에도 한류인 북한해류의 영향을 받아 냉해가 비교적 심하다.
한반도는 주로 고생대 이전의 안정된 지층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지진의 피해가 극히 적은 편이다.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가옥이 무너지는 등의 피해를 일으킨 지진도 다수 있었다. ≪삼국사기≫·≪고려사≫·조선왕조실록 등에 의하면, 삼국시대에 11회, 고려시대에 4회, 조선시대에 26회의 큰 지진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1727년(영조 3) 함경도의 함흥을 비롯한 7읍에 발생한 지진은 가옥과 성벽을 무너뜨린 대지진이었다. 근래에는 1978년 충청남도 홍성에 진도(震度) 4, 5도의 지진이 발생해 가옥·공공건물·성벽 등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발생하는 지진은 강도가 약하고 빈도도 적어, 일상 생활에서 의식하는 경우는 드물다.
[자연 재해의 극복]
농업국인 우리 나라에서는 가뭄과 홍수를 극복하기 위한 수리사업이 역대 왕조를 통해 기본정책의 하나로 이어져왔다. 가뭄은 농업 전반에 피해를 준다. 일찍부터 벼농사를 시작한 우리 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이후 저수지를 축조해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삼국시대의 저수지로는 상주의 공검지(恭儉池), 의성의 대제지(大堤池), 제천의 의림지(義林池), 밀양의 수산제(守山堤), 김제의 벽골제 등이 있었다.
그러나 작은 계류(溪流)를 배경으로 축조한 저수지들은 대부분 규모가 작아 관개면적이 넓지 못하였다. 평야지대에서는 구릉지를 배경으로 낮은 둑을 쌓아 빗물을 저장하는 작은 저수지, 즉 동(昑) 또는 방죽이 주요 관개시설로 이용되었다. 이 밖에 작은 골짜기의 하천에 보를 축조해 논의 관개에 이용하였다. 이러한 관개시설은 가뭄을 극복하기에 불충분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논은 천수답(天水畓)이거나 이와 다름없었다. 이 때문에 궁중·관청·민간에서는 연례행사로서 모내기철에 기우제를 올렸다.
조선 세종 때에는 측우기를 만들고 서운관(書雲觀)을 두어 우량을 관측했으며, 서울의 청계천에는 수표교(水標橋)를 만들어 수위를 관측하였다. 이러한 관측은 가뭄과 홍수에 대비하기 위한 노력으로 높이 평가된다. 그러나 수해에 대한 대비책은 가뭄보다 소홀한 편이었다. 심한 수해는 큰 강 양안의 충적지에서 주로 일어나는데, 조선 시대와 그 이전에는 홍수를 다스릴만한 높은 제방을 쌓을 수 없었다.
오늘날 벼농사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평야 지대의 충적지는 20세기에 들어와 근대적인 토목 공사에 의해 대규모의 제방을 쌓고, 농업 용수를 공급하는 양수장을 설치하는 한편, 저습했던 땅을 배수함으로써 가뭄과 수해를 극복할 수 있었다.
산지에서 평지로 흘러나오는 소규모 하천은 둑을 쌓아 유로를 고정시키고 홍수시의 범람을 막아 양안의 농토를 보호하였다. 이러한 경우에는 토사가 하상에 집중적으로 쌓여 하상이 주변의 농토보다 높은 천정천(天井川)이 발달한다. 이러한 천정천은 수백년에 걸쳐 둑을 계속 쌓아올려서 형성된 것이다.
평야 지대의 충적지에서는 지면의 주변보다 다소 높은 자연 제방이 농토로 이용되는 한편, 취락의 입지에도 이용되었다. 수해가 비교적 적은 자연제방에서도 집터를 돋우거나 돈대(墩臺)를 설치해 홍수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바람이 많은 제주도의 가옥에서는 초가지붕을 밧줄로 그물처럼 엮고 돌담을 높이 쌓아 바람의 피해를 줄이고 있다. 근래에는 감귤밭도 높은 방풍림을 조성해 보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