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68년 6월 당시 김계원(桂元) 육참총장이 내게 한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김 총장은 울산경비사령관 보직을 주기 전 나에게 “앞으로 1년간만 울산에 가서 경비사령부를 창설하고 기초를 닦아 주면 월남으로 보내 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그 해 7월 26일 사령관에 부임, 부대 창설 및 작전임무 수행의 기초를 확립해 북한의 124군부대의 침투기도를 분쇄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건설 방침에 따른 울산공업단지의 안전을 위해 무려 3년을 근무하게 됐다. 당시 육군의 인사에서 지휘관은 통상 1년에서 길어야 2년을 근무토록 방침이 서 있었다. 그런데 한 자리에서 3년이라면 파격적인 경우였다. 박 대통령의 경제건설 의지가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내 경우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그런 대통령의 명(命)을 받들어 울산공업단지를 북한의 기습으로부터 지켜낸 나도 역시 조국 근대화에 일조(一助)했노라고 감히 자부하고 싶다
3년이 넘어선 어느 날 내 문제가 다시 제기됐다. 수도권, 특히 경인(京仁)지구의 대간첩작전의 중요성이 대두된 것이었다. 그러면서 국방장관, 육군참모총장, 제2군사령관 등이 합의해 나를 경인지구 방어임무를 수행하는 제33사단장에 임명했다. 인천 북구에 자리 잡은 33사단은 현재 17사단(번개부대)의 전신이다. 내가 희망한 것은 월남의 전투사단이나 산악사단인 보병 제2사단이었는데 2군지역인 후방사단이라 별로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군인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다는 대명제 앞에서 나는 아무 소리 못하고 부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과는 상황이 많이 다르지만 당시 보병 제33사단에는 김포 이남에서부터 시작해 아산만까지 약 60㎞의 긴 해안선 경계와 한강이남 수도권, 경기도 일원에 대한 대간첩작전을 전담해야 하는 벅찬 임무가 주어져 있었다. 그 무렵 경인지구에는 무장공비의 출몰이 잦았다. 따라서 수도권의 안전에 절대 필요한 수도권 해안선 경계는 새로운 난제로 대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복잡한 임무를 수행할 지휘관을 물색하던 중 울산에서의 업적이 인정돼 내가 지명된 것이었다.
나는 1971년 6월 11일 33사단장에 부임하자마자 대간첩작전에 대비한 부대의 재배치, 근무제도 개선 등에 착수했다. 이와 함께 경기도가 향토사단인 만큼 경기도 방위협의회 의장인 김태경 도지사와 인천에 있는 해군사령관, 공군작전사령관 주영복 소장(공참총장·국방장관 역임), 손달용 경기도 경찰국장 등과도 밀접한 협조체제를 유지해 나갔다. 이들 가운데 특히 김태경 도지사는 나와 국방대학원 동기생이었던 관계로 내게 각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경계 강화책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송도 유원지가 큰 취약점으로 대두됐다. 그곳은 민간인 출입이 잦은 곳이므로 경찰이 담당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보고 경계를 요청해 봤다. 그러나 예상했던 대로 경찰은 경계임무 인수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 전까지는 야간 경계만 했지만 주간이라고 적이 침투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곳 유원지 일대는 피서철에 젊은 여자들이 벌거벗다시피 몸을 노출해 그곳 경계병들에 대한 군기문제가 크게 신경이 쓰이기도 했었다.
마침내 해안선 경계조치가 거의 완결될 무렵인 8월 23일 오전 6시 30분, 관할 구역 내 실미도에서 문제의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인천 중구 실미도에 있는 684부대원들이 공군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무기고를 부순 다음 집단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그 부대는 당시 중앙정보부가 북한 지역에 특수공작원으로 침투시킬 목적으로 공군에 관리책임을 맡겨 운영하던 부대였다. 또 군의 관할 구역으로 보면 해군지역, 즉 인천지역 함대사령부 관할 해역(海域)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