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초안은 수정을 거쳐 <물리학과 첨단기술> 최근호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수정할 사항이 있으면 댓글을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According to the orthodox interpretation in quantum mechanics, the spatio-temporal properties of a physical thing cannot be defined before measurement. Bohr said that “there is no quantum world; there is only an abstract quantum physical description”. However it is obvious that the physical thing exists out there even though nobody see it. Indeed, there would be no concept, whether physical or psychological, without external public object whose existence does not depend on the measurement process or observing consciousness. Fortunately Bohm had proved that the idea a particle has continuous trajectory in configuration space is compatible with the standard formalism of quantum mechanics. The virtue of Bohmian quantum theory of motion is that it saves our common sense ontology. myeongseok@gmail.com
1. 존재론 해석의 배경
나는 내가 해를 보고 있다고 믿고 있을 때, 해가 내 피부 바깥에 일정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고 믿는다. 비록 창문 안에 해가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해가 창문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으며, 해가 창문보다 더 크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이 믿음이 참이 아닐 수 있다는 논증이 회의주의 철학자들에 의해 줄곧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철학자의 말장난에 그치지 않는다. 심지어 나의 이 믿음을 위태롭게 하는 양자역학 해석까지 등장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플랑크와 아인슈타인 같은 구세대 물리학자들은 양자역학이 잘못된 인식론에 근거해 있다고 생각했다. 존재에 대한 건전한 상식 위에 물리학을 건설하려는 시도는 끝내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존재에 대한 건전한 상식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다음 주장 중에서 우리가 양자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이 있는가?
O1. 세계에 나 이외에 여러 인식 주체들이 존재한다.
O2. 여러 인식 주체들이 함께 지각할 수 있는 사물들이 존재한다.
O3. 여러 인식 주체들이 함께 지각할 수 있는 사물들은 각 인식 주체의 피부 바깥으로부터 일정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O4. 인식 주체들로부터 일정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으며 그들이 함께 지각할 수 있는 사물들은 여러 개이며, 이것들 사이의 관계는 변화한다.
일부 명상가를 제외하고 O1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리학자들 중에 O2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리학자들은 해가 여러 사람들이 함께 지각할 수 있는 외부 사물이라고 믿는다. 또한 그들은 그 해가 실제로 매우 크고 매우 뜨거워 그것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물리학자들은 O3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 물리학자는 지구도 여러 인식 주체로부터 일정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으며 여러 주체들이 함께 지각할 수 있는 사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지구와 해가 다른 사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며, 이 둘 사이의 관계가 변화 중에 있다고 믿는다. 이처럼 물리학자들은 O4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 O의 주장들을 “상식” 또는 “상식 존재론”이라고 부를 것이다.
O2에서 말한 “여러 주체들이 함께 지각할 수 있음”을 “common sense”라고 하는데 이를 “공통감각” 또는 “상식”이라고 번역한다. 원래 “공통감각”란 우리 오감의 내용을 주체 내부에서 다시 감각하는 능력을 뜻했다. 주체는 이 능력을 통해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지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따뜻함”, “빛남” 등은 시각을 통해 감각하지만 이것이 해로부터 왔다는 것을 아는 것은 공통감각 때문이다. 이 공통감각의 도움으로 우리는 해가 단순히 현상이 아니라 실제로 저기 바깥에 있는 사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며, “빛남이 빛난다”라고 하지 않고 “해가 빛난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능력이 거의 모든 동물들이 갖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인간만이 이 능력을 갖고 있을 것이라 추정한다. O3에서 말하는 사물을 “외부 사물”, “공통 원격 자극”(common distal stimuli)이라 부르는데, 공통감각을 통해 우리는 바로 이 공통 원격 자극을 감지하게 된다.
David Bohm 1917-1992. By David Michael Kennedy.
상식 존재론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과학이론을 해석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 상식 존재론을 유지하는 양자역학 해석을 “존재론 해석”(ontological interpretation)이라 부른다. 존재론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논제는 O3이다. O3에 숨어 있는 가정은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공간 표상이 단순히 주체의 구성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물들이 주체로부터 실제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으며, 주체로부터 다른 거리에 있는 만큼 사물들도 실제로 서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O4는 우리에게 시간 표상을 요구한다. 칸트는 시공간 표상에 놓이는 대상이 사물 자체가 아니라 현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상식 존재론은 시공간 표상의 대상이 사물 그 자체라고 주장한다. 양자역학의 존재론 해석은 양자역학에서도 시공간 표상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과연 우리는 O를 모두 받아들이면서 분자, 원자, 원자핵, 전자 등에 대해 계속 말할 수 있을까? 실제로 데이비드 봄은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우리 상식을 보존하는 이 해석을 소개함으로써 물리현상, 물리이론, 실제 세계, 경험과 인식 등의 주제를 성찰하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2. 궤적 없는 물리학
괴팅겐의 이론물리학자인 보른, 하이젠베르크, 요르단이 1925년 행렬역학을 내 놓았을 때 대선배격인 막스 플랑크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이듬해 슈뢰딩거가 파동역학을 발표하자 플랑크는 그에게 “오랫동안 풀지 못해 쩔쩔매던 수수께끼의 해답을 듣는 어린아이처럼” 흥분했다. 슈뢰딩거의 파동역학은 플랑크뿐만 아니라 고전물리학의 가치를 존중하는 로렌츠, 빈, 폰 라우에, 플랑크, 아인슈타인 등에게 ‘구원’처럼 다가왔다. 그는 슈뢰딩거가 물질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운동하는 익숙한 그림을 회복했다고 생각했다. 이후 양자역학 해석은 크게 두 진영으로 나누어졌다. 한 진영은 시공간에서 궤적을 그리며 연속적으로 운동하는 입자 개념을 고수한다. 이들에게 물리학의 대상은 연속적이고 확정적인 객관 세계이며 이 세계는 인과율의 지배를 받고 있다. 다른 진영은 원자에 대한 시각 이미지를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에게 물리학의 대상은 불연속적이고 불확정적인 그래서 다만 측정에 의해 구성된 현상계이며 이 현상계는 인과율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슈뢰딩거는 두 진영을 오락가락하면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는 한편 플랑크와 아인슈타인을 칭송하고 보어의 반달리즘을 우려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인과율에 대한 믿음이 서서히 흔들렸고 측정행위가 측정대상을 어느 정도 구성한다는 점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미시세계에서 시공간 표상을 거부하는 진영이 보어를 중심으로 ‘코펜하겐 해석’을 제안하자 이 해석은 점차 물리학계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막스 플랑크는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이 진지한 철학적 숙고 없이 코펜하겐 해석에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아인슈타인이 코펜하겐 해석 반대에 선봉을 섰지만 코펜하겐 해석이 양자역학의 해석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많은 코펜하겐 해석 지지자들은 자신의 해석이 현상주의의 색깔을 짙게 띠고 있음도 불구하고 자신의 해석은 “과학”이지만, 반대자들의 해석을 “철학” 또는 “형이상학”이라고 비난하거나 무시했다. 이런 무시는 오늘날까지 다수 교과서와 학회와 교실에서 계속 되고 있다.
시공간 표상에 관한 한, 코펜하겐 진영은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를 나누는 전략을 취했다. 그들은 태양과 지구 같은 거시 사물들에 대해 시공간 표상을 취하는 것을 굳지 반대하지 않는다. 그들이 반대하는 것은 원자 같은 미시 사물들을 시공간 속에 넣어 기술하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인간의 일상 자연언어는 우리가 거시세계 속에서 생활하면서 형성된 언어이며 시공간 표상도 이런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언어는 미시세계를 기술하는 데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정밀 과학자는 시공간 표상을 미시세계에 계속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O1에서 O4까지 중에서 미시세계에서 적용되지 않는 논제는 정확히 무엇인가? 원자가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지각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O2를 거부해야 할까? 먼저 거시세계에 관한 한, 특히 태양이나 지구에 관한 한, O를 모두 받아들이고, 다음과 같은 새로운 논제들을 추가해 보자.
A1. 아무도 해를 보지 않아도, 그 어떤 측정행위나 측정과정이 없어도, 해는 여러 인식 주체 바깥 저기 멀리 떨어져 존재하고 시간에 따라 위치가 바뀐다.
A2. 그 어떤 측정행위가 없어도, 해는 수소와 헬륨 등 다양한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A3. 그 어떤 측정행위가 없어도, 해의 내부를 이루는 있는 원자들의 위치는 해 표면 안쪽에 위치해 있다.
A4. 그 어떤 측정행위가 없어도, 해의 내부를 이루는 있는 원자들의 위치는 해의 운동에 따라 바뀐다.
A5. 그 어떤 측정행위가 없어도, 해를 이루고 있는 원자들은 여러 인식 주체 바깥 저기 멀리 떨어져 존재하고 시간에 따라 위치가 바뀐다.
여기서 A1과 A2를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단 A1과 A2를 인정한다면 A3과 A4도 인정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아가 일단 A3과 A4를 인정한다면 A5도 인정해야 한다.
분명 원자는 많은 과학자들이 함께 탐구할 수 있는 공통의 사물이다. 각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피부 바깥에 일정 거리를 두고 떨어진 사물로서 원자를 탐구한다. 물리학자들이 탐구하는 원자가 우리의 피부 바깥에 놓인 외부 사물이라는 것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물리학자들은 여러 가지 원자들이 존재하며 이것들이 서로 다른 사물이라는 데 동의한다. 나아가 이것들의 관계가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까지도 동의한다. 따라서 우리가 심지어 원자에 대해서도 O1에서 O4까지를 거부해야 할 이유가 없다. 만일 양자역학의 주류 해석이 미시세계의 경우 O3과 O4를 거부하고자 한다면, A들 중 일부를 거부해야 한다. 그들은 정확히 무엇을 거부해야 하는가? 우리가 원자나 전자의 궤적을 거부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없다면, 오히려 우리는 이것들이 궤적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 물론 우리가 원자의 궤적을 정확히 계산해낼 수 없고 교란 없이 측정할 수도 없을지 모른다. 우리가 원자의 궤적을 계산하거나 측정할 수 있느냐 하는 물음은 인식의 문제이다. 하지만 원자가 궤적을 가지느냐 하는 물음은 존재의 문제이다. 양자역학이 궤적 개념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하거나 실험을 통해 확증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일 누군가 입자의 궤적을 도입한 채, 거의 모든 양자현상들을 설명해낼 수 있다면, 우리는 그런 해석을 선호해도 된다. 우리의 이런 선호는 “철학”이나 “형이상학”에 빠져 “과학”을 무시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데이비드 봄의 존재론 해석은 입자의 궤적을 도입하면서 기존의 양자현상을 설명하고 여러 가지 양자역설들을 해소하고 있다.
3. 적혈구는 궤적을 가지지 않는가?
양자역학의 표준해석가들은 측정 전에 입자가 궤적을 가진다고 가정할 때 역설이 생긴다고 믿는다. 양자현상의 본질을 보여주는 두 실험은 간섭실험과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이다. 1922년의 슈테른과 게를라흐는 실험에서 은 원자들이 시공간 상에서 궤적을 가진다고 가정하고 있다. 슈테른은 은 원자들을 균일하지 않은 자기장 속으로 지나가게 하면, 은 원자들의 빔이 두 개로 갈라져 하나는 위쪽으로 굽고 다른 하나는 아래쪽으로 굽을 것이라고 사전에 예측했다. 슈테른과 게를라흐는 위아래로 연속하여 퍼지지 않고 두 줄로 쪼개진 원자들의 자국을 얻었다. 게를라흐는 자신들의 결과가 보어의 방향 양자화를 실험적으로 입증했다면서 곧장 보어에게 축하 엽서를 보냈다.
A plaque at the Frankfurt institute commemorating the Stern–Gerlach experiment. From http://en.wikipedia.org/wiki/Stern-Gerlach_experiment
우리가 알고 있는 슈테른-게를라흐 실험 설정은 매우 단순화되었다. 은 원자의 자기모멘트가 은 원자의 제일 바깥 전자의 자기모멘트와 같다고 가정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은 원자들의 빔 대신에 전자 빔으로 슈테른-게를라흐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곤 한다. 실제 실험에서 몇 가지 진보가 있었지만, 아직 전자의 슈테른-게를라흐 효과가 확연히 입증되지는 못한 것은 사실이다. 이미 보어는 전자의 스핀을 시공간 표상을 통해 이해할 수 없다고 보고, 전자의 슈테른-게를라흐 효과를 실험을 통해 보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원자의 슈테른-게를라흐 효과는 거의 명백하고, 이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원자가 궤적을 가져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왼쪽에서 총으로 원자를 쏘면 일정 시간이 흐른 뒤에 오른쪽 스크린에 도달하여 흔적을 남길 것이다. 다음 주장 중에서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 있는가?
M1. 자기장 발생 장치를 포함해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에 사용된 장치들은 인식 주체들의 피부 바깥으로부터 일정 거리를 두고 떨어져 실제로 존재한다.
M2. 인식 주체가 없어도, 그가 스크린을 확인하지 않아도, 스크린에 두 줄 흔적이 남겨져 있다.
M3. 원자가 총에서 발사되어 스크린에 흔적을 남길 때까지, 원자, 자기장, 스크린 등의 상호작용은 물리적 상호작용이며 이 모든 과정은 동역학적 과정이다.
M4. 지켜보는 인식 주체가 없다 하더라도, 원자 하나는 총에서 출발하여 자기장 발생 장치를 경유하여 스크린까지 이동한 후 스크린에 한 점 흔적을 남긴다.
Interference pattern of electrons obtained by Tonomura et al. Number of electrons: (a) 10, (b) 100, (c) 3000, (d) 20,000, (e) 70,000.
전자의 간섭실험은 때때로 전자가 궤적을 갖지 않는다는 실험적 증거로 간주되곤 한다. 1989년 토노무라는 전자를 하나씩 쏘는 방식으로 수만 개를 두 틈으로 쏘아 보내었더니 뚜렷한 간섭무늬를 얻을 수 있었다. 전자 하나는 이전에 발사된 전자와 간섭하지 않고 그 이후에 발사된 전자와도 간섭하지 않는다. 전자는 오직 자기 자신과 간섭한다. 이를 “자기 간섭”(self-interference)라 한다. 한 전자는, 틈을 통과했다면, 스크린에 오직 한 점의 흔적만 남길 뿐이다. 우리가 직접 스크린을 보지 않아도 스크린에는 한 점 흔적이 남겨져 있을 것이다. 7만 개 정도 전자를 발사한 후, 우리가 스크린 상태를 눈으로 직접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스크린에는 이미 오른쪽 그림의 (e)와 같은 간섭무늬가 남겨져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자의 자기 간섭을 설명하기 위해 반드시 전자의 궤적을 포기해야 하는가? 물론 이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1999년에 아른트는 차일링거 등과 함께 풀러렌(fullerene)의 간섭무늬를 얻었다. 풀러렌은 탄소 60 개가 모여 축구공 모양을 이룬 분자이다. 2003년에는 하커뮐러 등이 C44H30N4나 C60F48처럼 매우 큰 분자의 자기간섭 현상을 얻었다. 이보다 더 큰 인슐린이나 헤모글로빈, 나아가 백혈구도 자기간섭 현상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 언젠가 밝혀질 것이다. 우리 눈에 보일 정도의 총알을 사용해도 어쩌면 간섭무늬가 생길지 모른다. 이 경우 선명한 간섭무늬를 얻으려면 아마도 중간의 담과 벽면의 거리를 아주 멀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 중력효과를 줄이기 위해 넓은 우주 공간에 실험세트를 마련하면 될 것이다. 자기간섭 현상은 입자의 절대 크기와 무관하다. 단지 틈의 너비, 틈과 틈의 간격, 그리고 입자 크기와 속도 등의 상대 크기만 중요할 뿐이다. 만일 자기간섭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궤적 개념을 포기해야 한다면, 그리고 축구공이나 지구 같은 거시 사물도 자기간섭 현상을 일으킨다면, 우리는 거시 사물의 궤적도 포기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입자의 궤적을 도입하여 자기간섭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가 그런 설명을 수용하는 것은 건전한 상식에 속한다. 이런 설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지나친 형이상학이 결코 아니다.
4. 봄의 양자운동이론
데이비드 봄의 해석은 입자의 자기 간섭, 슈테른-게를라흐 효과, 터널 효과 등 여러 양자효과들을 입자 궤적을 통해 설명할 길을 열어 주었다. 그의 해석은 1952년 처음 제안되었지만, 물리학계에서 거의 무시되었다. 봄은 점차 자기 해석에 자신감을 잃어갔지만 젊은 물리학자들이 1970년대 말부터 봄 해석을 반영한 컴퓨터 시뮬레이션 연구 결과를 내놓기 시작했다. 아래 그림은 입자의 자기간섭을 궤적 관점에서 해명하는 그림이다. 입자의 양자궤적은 슈뢰딩거 파동방정식을 하밀톤-자코비 방정식으로 변환하여 풀면 얻을 수 있다. 왼쪽에 위치한 두 틈 중에서 위쪽 틈을 지난 입자는 나중에 스크린의 위쪽에 흔적을 남기게 된다. 이 입자는 오직 한 궤적을 따라서만 이동한다. 그런데 틈을 막 지난 입자는 그 초기 위치에 따라 이후 궤적이 민감하게 변화한다. 고전 퍼텐셜은 입자의 경로를 굽게 할 수 없다. 양자 하밀톤-자코비 방정식에는 고전 하밀톤-자코비 방정식에 없는 새로운 항목이 있는데 이 항목을 “양자 퍼텐셜”(quantum potential)이라 한다. 양자 퍼텐셜은 대안 해석을 위해 임시방편으로 도입한 가정이 아니다. 이것은 슈뢰딩거 방정식으로부터 수학적으로 유도되는 항목이다.
Quantum trajectories for two slits with a uniform distribution of initial positions at each slit.
봄의 양자운동이론은 양자역학의 존재론 해석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제공해주고 있다. 남은 지면은 그의 운동이론을 개관하는 데 쓰겠다. 하지만 여기서 양자 하밀턴-자코비 방정식과 양자 퍼텐셜을 수식을 써서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수식은 쓰지 않겠지만 잠시 어려운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해주기 바란다. 하밀턴 방정식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좌표변환을 “정준변환”(canonical transformation)이라 한다. 적절한 정준변환을 취하면 하밀토니언이 0이 되게 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좌표변환은 “생성함수”(generating function)라 불리는 모종의 매개 함수를 통해 수행되는데, 하밀토니언을 0으로 만드는 정준변환의 생성함수를 “하밀턴의 주함수”(Hamilton’s principal function)라 한다. 하밀턴-자코비 방정식이란 바로 하밀턴 주함수 S를 찾게 해주는 방정식이다. 일단 방정식을 풀어 S를 얻으면 이로부터 위치와 운동량을 계산해 낼 수 있으며, 마침내 입자의 궤적을 얻게 된다. 위치의 함수로서, 즉 일종의 마당으로서 S는 한 입자가 한 지점에 놓였을 경우 바로 그 때 그것의 운동량을 결정한다. 그런데 이 함수는 그 입자가 실제로 거치게 될 위치들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그 입자가 잠재적으로 놓일 수 있는 모든 영역에 대한 정보까지 수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 함수는 단순히 한 입자의 궤적이 아니라 동일한 입자들의 앙상블의 거동과 관련되어 있다. 나아가 S의 시간 변화는 이 가상적 집단 전체의 가능한 운동들 모두를 기술한다.
한편 동일한 상황에 놓인 물리계라 하더라도 하밀턴-자코비 방정식의 해는 다를 수 있다. 이 방정식의 해 S가 초기 위치만 고정되어 있는 함수일 수 있고, 초기 운동량만 고정되어 있는 함수일 수 있다. 한 하밀턴-자코비 방정식의 서로 다른 해들은 서로 다른 앙상블을 기술한다. 하지만 일단 초기 위치와 초기 운동량이 결정되면 그 입자가 어느 앙상블의 일원인지는 상관없이 그 궤적은 하나로 고정된다. 고전 하밀턴-자코비 방정식을 통해 본 고전동역학은 일단 입자의 초기 위치와 초기 운동량이 주어지면, 그 입자가 소속된 앙상블에 무관하게 동일한 궤적을 그리게 된다. 앙상블은 단지 입자들의 가상적 집단이고, 한 입자가 어느 앙상블의 일원인지는 실제적 문제가 아니다.
좀 다른 맥락에서 S를 이해하면, S는 입자에 대한 불완전한 지식으로부터 입자의 거동을 추정하는 장치로 볼 수 있다. 기술하고자 하는 입자가 앙상블의 일원들 중 정확히 어느 것인지 알 수 없을 경우 이 입자의 이후 거동은 앙상블의 거동을 통해 간접적으로 추정된다. 고전역학에서 입자의 이후 궤적은 앙상블의 초기 분포와 완전히 무관하다. 앙상블의 분포가 개별 입자들의 운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은 고전 하밀턴-자코비 방정식의 귀결이다. 하지만 양자 하밀턴-자코비 방정식은 고전 방정식의 이러한 특성을 파괴한다. 양자 하밀턴-자코비 방정식에서 S는 슈뢰딩거 파동함수의 허수부와 일치하는데, 잘 알다시피 양자역학에서 초기 위치의 확률 분포는 S의 변화에 영향을 끼친다. 이것은 초기 확률밀도가 입자의 궤적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림5에서 입자의 궤적은 입자가 틈을 막 나설 때의 위치에 의존하지만, 그 입자가 속한 앙상블의 초기 분포에도 의존한다. 이 분포를 결정하는 것은, 파동함수의 실수부인데, 이것은 입자가 놓여 있는 전체 환경에 의존한다. 양자 하밀턴-자코비 방정식의 귀결은, 입자의 궤적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입자의 궤적이 그와 멀리 떨어진 다른 입자들의 존재에도 의존한다는 것이다.
5. 결론
봄의 양자운동이론이 보여준 것은 입자가 시공간 상에서 연속 궤적을 가진다는 발상이 양자역학의 정식체계와 양립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그의 이론은 입자의 궤적을 실제로 슈뢰딩거 파동방정식으로부터 계산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와 관련된 논문과 교과서들이 1980년대 이후 점증하고 있다. 비평가들은 봄 이론이 기존 해석을 능가하는 실험적 차이를 산출하지 못했다고 논평한다. 이 논평은 현재 상태에서 거의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양자운동이론이 우리의 상식 존재론을 파괴하지 않는다는 점은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는 매력이자 장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