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윤경작가와의 대화중에 위 두 스님 이야기를 내가 꺼냈었는데,
더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어서 교실로 들어왔습니다.
언젠가 내가 이 두 스님 이야기를 써 볼 생각으로 모아 놓은 자료들입니다.
"서라벌 사람들"에 추가되어도 충분할만큼
스케일이 큰 사람들의 다른 사례로 소개합니다.
ㆍ김교각 스님(697-796) :
신라 33대 성덕왕의 큰아들, 속명이 김중경(重慶)으로
신라 제32대 효소왕 4년인 서기 697년 서라벌의 왕궁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문왕의 둘째아들 흥광대군 효명으로
후에 제33대 성덕왕이 되었고
그의 이복동생 김승경과 김현영은 제34대 효성왕과 경덕왕이 되었다.
김중경의 아버지인 효명은
어머니 신문왕비가 반역에 연루되어 퇴출되자
오대산에 들어가 북대에 암자를 지어 수행정진하였다.
32대 효소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고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왕족인 효명에게서 아들 김교각이 태어나자
암살의 위험을 피해 어미인 엄정과 김중경은 궁에서 나와 은신하였고,
효명은 서라벌 북악(지금의 경주 금강산) 백률사를 찾아
효암스님을 만나 득남의 소식을 전하였다.
효암스님은 김중경이란 이름을 지어 주며
이 아이가 3개의 이름을 가질 것이며
큰 인물이 될 것임을 암시해 주었다.
김중경의 나이 4세 때
32대 효소왕의 섭정 심목태후가 암살당하고
몇 년 후 효소왕이 후사없이 세상을 떠나자
화백회의를 열어 오대산 중대에서 수행중인
보천세자(효명의 형)를 찾아 왕위를 권하였으나
세속을 떠나 있기를 고집하여
북대의 흥광대군 효명이 왕위에 오르니 33대 성덕왕이다.
김중경이 성장하여 화랑이 되었을 때
성정왕후(김중경의 어머니 엄정)와 성덕왕 사이에
후궁문제로 불거진 갈등이 증폭되어 성덕왕의 퇴진 문제가 거론되고,
배후에 성정왕후가 왕세자 김중경을
왕으로 올리려는 복잡한 문제에 연루되게 되었다.
김중경의 중재로 왕과 왕비 왕세자가 얽힌 갈등을 풀었으나,
중경은 궁중의 암투와 남녀간의 질투 등에 큰 실망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중경은 24세에 삭발,
출가하여 신라를 떠나 당나라로 건너가게 되었다.
당 고종 영휘4년(唐高宗永徽四年, 서기 653년)
지청(地聽)이라는 하얀 독각(獨角, 외뿔)의 개를 타고
바다를 건너 불도를 구하기 시작했다.
김교각 스님은 그때 삽살개를 한 마리 한 마리 데리고 갔다.
이 외뿔 개 이름이 선청이었다고 하는데 죽을 때까지 스님을 모셔
이 삽살개도 나중에 구화산 수호신으로 동상이 세워졌다.
중국에는 보살을 각각 하나씩 모시는 불교명산이 4개 있는데
오대산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
저장성 보타산에는 대자대비한 관음보살,
스촨성 아미산은 덕행을 주관하는 보현보살
그리고 안휘성 구화산에 모셔진 이는 김교각 지장보살이다.
원래 지장보살은 석가의 위촉을 받아
그가 죽은 후 미래불인 미륵불이 출현하기까지의 무불(無佛)시대에
6도의 중생을 교화, 구제한다는 보살인데,
중생이 모두 제도한 후에 깨달음을 이룰 것이며,
지옥이 빌 때까지는 결코 성불하지 않으리라는
지장보살의 서원(誓願)을
김교각이 육신으로 실현한 셈이 되었기 때문에
그를 또한 지장보살이라고 부른다.
김교각 스님을 지장보살이라고 확신한
당시 사람들이 그의 육신에 금을 입히고 3층 석탑을 세웠는데
후인들이 그 위에 세운 사찰이 바로 육신보전(肉身寶殿)이다.
김교각의 진신(眞身)을 모신 이 고찰은 797년 지었으며,
청나라 때 중건되었는데,
중국 민중불교의 절대적인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다.
현재 구화산에는 김동리의 유명한 단편소설
[등신불]의 소재가 되었다는
명나라 만력 연간의 무하(無瑕)스님의 등신불 등
9존이나 되는 등신불이 모셔져 있고
1998년 8월에도 92년 8월에 입적한
비구니 명정(明淨)법사의 등신불이 발견되어 세상이 깜짝 놀랐다.
처음 김교각은 북방의 오대산을 찾았다.
그러나 김교각이 오대산에 오르자 오대산이 한 자나 꺼져 들어갔다.
이에 이곳이 자기가 머무를 곳이 아님을 알고
다시 사방을 운유하던 중 755년 안사(安史)가 일으킨
내란의 와중에서 나라전체가 피폐하여 날로 참혹해져 가는
민중의 삶을 지켜보면서 지장보살에 귀의하여
양자강 남쪽 구화산에 이르러
그 수려(秀麗)한 산수(山水)를 보고 매료되어
산에 초당을 짓고 도를 닦기 시작했다.
목마르면 산간 벽계수를 마시고 배가 고프면
산나물과 백토(白土, 속칭 觀音土)로 굶주림을 달래면서
제자들과 함께 정진했다.
그러다 그곳에 부임한 태수 장암이
불경과 불력과 덕행이 높은 김교각에게 감명받아 스승으로 모셨고
이들 왕에게 아뢰니 왕은 절을 확장하게 해주고
이름을 화성사라고 지어서 내려 보냈다.
이태백의 시 [地藏菩薩贊]은
김교각의 높은 덕행을 찬양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 시에서 김교각을 지장보살에 비유하면서
“보살의 자비로운 힘 무변고해 구하나니,
하해같은 그 공덕 세세손손 빛내가리로다”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두 사람은 자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국 안휘성 구화산과 화성사
김교각 스님의 덕행이 원근에 전해짐에 따라
구화산의 주인인 민공(閔公)이 구화산을 스님에게 시주하여
치성을 드리고 향을 올리는 선남선녀들이 하루에 천명을 넘었다.
스님은 중생의 삶과 밀착하여 생활 속에서 지장신앙을 실천해 나갔다.
겨울에도 삼베옷을 입었고
직접 농사를 지어 생계를 어려운 민중에게 의지하지 않았다.
그는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했다.
그리하여 그 당시 중국 사람들에게 낯설었던 지장신앙을 전파해
구화산을 중국 4대 불교성지의 하나로 자리 잡게 했다.
스님은 생전에 “중생을 제도한 뒤에야 보살과를 이루고,
지옥이 비지 않는 한 성불하지 않으리
(度盡衆生, 方證普提; 地獄未空, 誓不成佛)”라는
“지장보살님의 거룩한 맹세(地藏大愿)”를 실천했다.
지옥이 비기까지 성불치 않으리라는 그의 염원은
실천적 메시지와 함께 당시 흉흉했던 민심을 보듬어 안았고,
이는 민중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내었다.
김교각 스님은 구화산에서 75년을 수련하여 99세에 열반했다.
스님이 열반에 드실 때 제자들을 모아놓고
고별인사를 한 뒤 입적을 하였는데,
자신의 시신을 석함에 넣고 3년 후에도 썩지 않으면
등신불로 만들라는 유언을 남겼다.
산이 울면서 허물어졌고 하늘에서는 천둥소리가 났다.
시신을 함(函)에 넣어 모셨는데 3년 후에 열고 보니
얼굴색이 변하지 않았고 모습이 불경에 있는 지장보살의 모습과 같았으며
뼈마디마다에서는 범패(梵唄, 불교음악)와 같은 아름다운 소리가 울려나왔다.
생전의 예언대로 육신불로 다시 세상에 화현함으로써
지장보살의 화신이 되었으니 그때에야 제자들은
지장보살이 전세한 것으로 생각하고
지장왕보살의 화신으로 받들어 육신에 온몸에 금물을 입히고
육신탑을 세워 모셨다.
구화산의 스님들은 김교각이
바로 지장보살의 화신임을 알게 되어 높이 모시기 시작했으며
구화산은 급기야는 지장보살 도장으로 되었는데
명나라와 청나라시대 전성기에는
사찰이 360여 곳, 승니가 5천여명에 달했다.
김교각 스님은 오늘날 중국인들에게 절대적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중국이 달마대사나 육조대사에게도 붙이지 않은
보살의 칭호를 당시로서는 조그만 나라였던 신라의 스님에게 붙인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심지어 김교각 스님이 수행하던 절에
당황제가 직접 절 이름을 지어 편액을 내렸으며
서기 757년 김교각 스님의 신앙세계를 높이 받들어 금인을 하사하였다.
이것은 김교각의 수도가 당나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김교각 스님의 모습을 그대로 본떠서
지장보살을 입증하는 ‘금인’(金印)과 김
교각 스님이 당황제로부터 하사 받았다는 금인
그의 행적은 <구화산 화성사기>를 비롯한 대부분의 중국 문헌에
‘지장왕보살 김교각 스님은 713년 24세의 나이로 홀연히 당나라로 건너가니
이때가 성덕왕 12년이다. 99세(794년, 정원 10)로 열반하자
제자들이 남대 지장암에 ‘육신보전’을 세우고 육신불을 안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813년(입적 19년 뒤) 중
국 당나라 비경관(費冠卿)이 쓴
구화산 화성기(九化山化城記),
이용(李庸)이 편찬한 구화산지(九化山志) 등에 기록되어 있으며
스님과 동시대를 살았기에 그의 저서가 가장 정확한 것으로 파악된다.
비경관은 구화산이 있는 지주 청양현 사람으로 학문이 뛰어났으며,
구화산 소미봉에 은거한 것으로 나타나
가장 객관적으로 구화산과 김교각을 관찰한 사료로 평가된다.
현존하는 구화산 역사 문헌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되는
당나라 원화(元和) 8년(813)에 저술된 <구화산 화성사기>(九化山化城寺記)에
지장스님이 입적한 때는 794년(貞元 10), 99세라고 기록,
이를 기준으로 출생 년대를 산출해 보면,
김교각 스님의 출생 년대는 696년(신라 효소왕 5년)이다.
김교각 스님 연구에 있어 중국 최고의 전문가이며
‘김수충(金守忠)’이라는 이름을 최초로 발표한
중국 안경사범학원 중문과 사주전(謝澍田) 교수는
스님의 생몰연대를 서기 696-794년으로
최근 발간된 <구화산 지장성지와 동아시아의 지장신앙>
(2001ㆍ영명사)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성덕왕의 장자라고만 밝히고
‘김수충’이란 이름은 사용하지 않았다.
또 <구화산화성사지장전>(九化山化城寺地藏傳)을 비롯,
988년에 저술된 <송고승전>과 동국역경원에서 편찬(1961)한 <불교사전>에는
입적 년도를 706-803년으로 기록,
앞 책의 기록보다 9년 늦게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를 기준으로 출생년대를 산출해 보면
김교각 스님의 세속 수명은 서기 704년(聖德王 3년) 출생하여
99세인 803년(哀莊王 2년)에 열반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419년에 저술된 <신승전>(神僧傳)에는
‘개원(開元) 16년(75세) 7월 30일 밤에 성도(成道)하였다’고 기록되었는데
개원 16년은 728년으로 입적연대를 산출한 결과
752년이 되어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서로 꼽히고 있는 <삼국사기>를 비롯,
<삼국유사> 등 우리 문헌에는 김교각 스님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삼국사기」 성덕왕 13년(714)조에
“왕자 김수충을 당에 보내 숙위케 하자
당현종이 그에게 제택(第宅)과 비단옷을 내렸다”고 쓰였다.
또 성덕왕 16년조에는
“견당대감(遣唐大監) 김수충이 돌아와
문선왕(공자) 10철 72제자의 그림을 바치자
이를 대학(大學)에 안치했다”고 썼다.
그러므로 김교각 스님과 김수충이 동일인이라는 증거는 없는 셈이다.
지덕(至德, 756-757) 연간에 김교각 스님이
오용지(吳用之)에게 써 주었다는
‘수혜미’(酬惠米-쌀 보내준 은혜에 보답함-)라는 시에서
‘그가 왕자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단옷 포의로 갈아입고(弁劫金鑾納布依)/
바다건너 도를 구하려/ 구화산을 찾아왔다네.(浮海修身到華西)
나는 본디 왕자였다오(原身乍是尊王子)/ 수행의 길에서/
사모하는 오용지를 만났네.(慕道相逢吳用之)
가르침을 주는 것만도 고맙거늘(來散敂門求他語)/
이제는 이렇게 쌀까지 보내왔다네.(昨叮送米續農炊)
반찬을 준비하고/ 좋은 쌀로 밥을 지어/ 배부르게 먹고 나니(而今餐食黃精飯)
지난날의 배고픔/ 모두 잊어 버렸네.(腹飽忘思前日饑)
항주(抗州)의 영은사(靈隱寺) 대웅전에는
황금칠을 한 19.6m 높이의 석가모니 좌상이 있다.
부처님의 앞부분이 아니라
뒷부분에서도 참배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부처님 뒤 나한들 중에 김교각 스님도 있다.
그리고 청(淸)나라 성조(聖祖)의 어정(御定)인 <전당시>(全唐詩) 권8에는
‘신라국왕자’(新羅國王子)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김교각과 동시대 사람인 비관경(費冠卿)이 지은
<구화산화성사기>(九華山化城寺記)에는
‘신라국의 왕자인 김씨의 가까운 친족’(新羅國王金氏近屬)으로 기록되었고
송(宋)의 찬영(贊寧)이 쓴 <송고승전>(宋高僧傳) 권20권과
명(明) 태조(太祖)의 어제(御製)인 <신승전>(神僧傳) 권8에는
‘신라국왕의 가까운 일가’(新羅國王之支屬)라고 기록되어 있어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즉 비관경의 기문은 당(唐) 헌종(憲宗) 8년(813)에 지은 것이니
김교각 스님이 입적(入寂)한지 20년째이므로
‘김교각 스님은 국왕과 가까운 친족’임이 확실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김교각 스님 본인은
‘수혜미’란 시를 통해 본인은 ‘왕자’라고 기록하였다.
거기가 바로 구화산(九華山)이라고 한다.
지금 구화산에는 94곳의 사찰과 1만 여기의 부처,
그리고 2000여건의 문물과 700여명의 승니(僧尼)들이 있으며
해마나 지장보살 김교각 스님의 탄신일인 음력 7월 30일을 계기로
구화산에서는 묘회(廟會)를 한달간 진행한다.
문도들이 탑을 세워 그곳에 육신불로 안장했고
그 탑의 이름을 육신보전이라 했으니
스님 이후 주화산은 중국 4대 불교성지의 하나가 되었고,
현재 99개의 사찰이 들어서 있으며
구리로 만든 높이 99m의 지장보살 대등상도 세워져 있다.
스님은 입멸 당시 자신이 1200년 뒤에
고국을 방문할 것이라고 예고했다고 전하는데,
김교각의 등신불이 열반에 든 지 1200년 만에
2004년 1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장왕보살 친견행사위원회가
중국 안후이성(安徽省) 주화산(구화산)풍경관리위원회와
김교각 스님의 등신불을 한국으로 옮겨 친견행사를 열기로 합의한 결과이다.
조계종 태고종 천태종 진각종 등 각 종단 지도자들로 구성된
‘김교각지장왕보살 봉안법회 봉행위원회’는
2007년 11월 23일 오후 2시 서울 삼성동 봉은사(주지 명진 스님)에서
‘김교각 지장왕보살 입상 한국봉안 한중합동법회’를 가졌다.
모든 중생이 구원 받을 때까지 자신은 부처가 되지 않겠다
는 서원을 세운 ‘지장보살’과
스님의 수행ㆍ교화 활동이 흡사하다고 해
스님은 중국인들로부터 ‘지장왕보살’로 불린다.
이번에 봉안법회를 갖는 스님의 입상은
높이 2.5m의 목조불상으로, 중국 정부가 제작해 한국에 기증했다.
중국 구화산 현지에서 점안법회가 열렸고,
120여명에 이르는 한국측 이운단(移運團)과 함께 22일 ‘귀국’한다.
봉안법회에는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이 참석해 법어(法語)를 발표하며
조계종 태고종 천태종 진각종 등 불교계 인사들과 닝쿠푸이 주한중국대사와
중국 정부관계자도 참석한다.
김교각 스님의 입상은 봉안법회 후에는
‘고향’인 경주 동국대 캠퍼스로 옮겨지게 된다.
중국 항주 영은사의 5백나한상 한 가운데
4대 보살 중 김교각지장보살이 있다.
김교각 스님은 신라에서 중국으로 건너 갈 때
‘차종자(金地茶)와 황립도(黃粒稻-볍씨),
오차송(五叉松) 그리고 선청(善聽)이란 개를 데리고 갔다’고 하는데
차에 대한 기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개옹다사>(介翁茶史), 작자 유원장(1669년경),
구화산에 공경차(空梗茶)가 있는데 이는 김지장이 심은 바이다(是金地藏所植)...
김지장은 신라스님으로 당나라 지덕(至德)연간 바다를 건너와
구화산에 거처하며 이 차를 심었다(植此茶).
② <구화산지>(九華山志), 중화민국 67년 영인본 발행.
금지차(金地茶)는 나무줄기가 속이 비어 작은 대나무와 같다(梗空如).
전하는데 김지장이 신라로부터 가져온 차씨였다고 한다(相傳金地藏携來種).
③ <전당시>(全唐詩), 팽정구(彭定求),
1703년 저작. 동자를 보내며(送童子下山)/ 돌
샘 물길으며 달 보기도 이제는 그만,
차 달이며 꽃 회롱하기도 이제는 그만(烹茗中罷弄花).
④ 기타 <청양현지>에
‘금지차란 서역으로부터 가져 온 것이다’고 하였는데
‘김지장이 서역(인도 등)에 간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이는 동쪽(신라)의 오기로 판단된다.
이 외에 구화지남<九華地南>, 속다경<續茶經>등에 기록이 있다.
지금도 구화산의 차와 술이 유명한데
그 찻잎은 김교각 스님이 신라에서 가져간 것으로
전통재배방법으로 키운 것을
지금에서도 그 방법 그대로 전래된다고 하니
중국 속의 우리 문화라 할 수 있겠다.
중국 당시집(唐詩集)에 김교각 스님의 차시(茶詩)한 편이 실려 있다.
호랑이에게 구해준 고아 아이가 자신의 동자가 되어 절에서 살다
적막함을 못 이기자 시 한 수를 지어 마을로 돌려보내니,
이 시는 우리나라 최초의 茶詩라고 할 수 있다.
送童子下山(송동자하산)
空門寂寞汝思家 禮別雲房下九華(공문적막여사가 예별운방하구화)
愛向竹欄騎竹馬 懶於金地聚金沙(애향죽난기죽마 나어금지취금사)
漆甁澗底休招月 烹茗遼中罷弄花(칠병간저휴초월 팽명료중파농화)
好玄不須頻下淚 老僧相伴有煙霞(호현불수빈하루 노승상반유연하)
산을 내려 가는가
고요한 절 한나절 하도 길 때면
먼 산 바라보고 옛집 그리더니
함께 머물던 흰 구름 떠나
산을 내려 가는가
난간에 뛰어올라
죽마 타던 아이야
이곳은 황금땅 부처님 나라.
금모래 모으는 일도 이제 싫으냐
칠병 속 시냇물엔 밝은 달
찾아올 일 없겠고
차 달인 단지에는
향긋한 꽃 필 일 없겠네
부처님 그리는 이는
자주 울 일 없나니
노승은 노을을 벗하고
노을은 노승을 벗하리
조계종 태고종 천태종 진각종 등 각 종단 지도자들로 구성된
‘김교각지장왕보살 봉안법회 봉행위원회’는
2007년 11월 23일 오후 2시 서울 삼성동 봉은사(주지 명진 스님)에서
‘김교각 지장왕보살 입상 한국봉안 한중합동법회’를 가졌다.
모든 중생이 구원 받을 때까지 자신은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운
‘지장보살’과 스님의 수행ㆍ교화 활동이 흡사하다고 해
스님은 중국인들로부터 ‘지장왕보살’로 불린다.
이번에 봉안법회를 갖는 스님의 입상은 높이 2.5m의 목조불상으로,
중국 정부가 제작해 한국에 기증했다.
중국 구화산 현지에서 점안법회가 열렸고,
120여명에 이르는 한국측 이운단(移運團)과 함께 22일 ‘귀국’한다.
봉안법회에는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이 참석해 법어(法語)를 발표하며
조계종 태고종 천태종 진각종 등 불교계 인사들과 닝쿠푸이 주한중국대사와
중국 정부관계자도 참석한다.
김교각 스님의 입상은 봉안법회 후에는
‘고향’인 경주 동국대 캠퍼스로 옮겨지게 된다.
다음은 무상선사 이야기.
ㆍ신라 성덕왕의 셋째 왕자 출신인
無相禪師(684~762, 속성 김화상(金和尙))스님은
1300년 전 당나라에 건너가 당 제일의 고승이 되어 지금까지 추앙을 받고 있다.
스님은 왕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동진 출가하여 스무살 나던 해(719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의 출가 유학을 촉구한 것은 그의 막내 여동생으로 말미암았다.
그 여동생은 자신의 혼담이 오가는 상황에서
칼로 얼굴에 상처를 내고 출가 수행의 결심을 보였다.
이에 충격을 받은 무상은 ‘연약한 여인조차도 정조를 아는데
강건한 장부인 내가 어찌 무심할 수 있겠는가’하고 드디어 머리를 깎고
부모와 작별한 뒤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당나라에 이르렀다.
당(唐)나라에 건너온 뒤로는 스승이 될 만한 인물을 찾아 각지를 유력하였으며,
마침내 자주 덕순사(資州 德純寺)에 이르러 당화상(唐和尙)을 뵙고자 했다.
그런데 마침 당화상 처적(處寂)은 병중이라서 면접할 수 없었다.
이에 무상은 손가락을 잘라 불을 달인 후 이를 화상에게 바쳤다.
화상은 이에 무상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2년간이나 자신의 곁에 머물게 했다.
《송고승전》에 의하면
무상이 군남사(郡南寺)에서 득도한 후 바다를 건너
당나라 서울에 도착한 것은 기원 728년이었으며,
곧 현종(玄宗)을 알현하고 선정사(禪定寺)에 머물렀으며
뒤에 촉(蜀)땅 사천성(四川省)의 덕순사로 갔다.
무상이 아직 도착하기도 전에 처적은 제자들에게
‘내일 외국 손님이 한분 오실 것이니 경내를 깨끗이 하고 그를 맞으라’고 일렀다.
다음 날이 되자 과연 한 손님이 찾아왔는데
처적은 그에게 ‘무상’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무상(無想)’이란 법명은 그리하여 태어났다.
무상의 본격적인 수행생활도 이때 이루어졌다.
뒤에 무상은 스승을 떠나 사천성 관현(灌縣) 서남에 있는
천곡산(天谷山)에 들어가 수도한 뒤 다시 덕순사로 돌아왔다.
처적은 입적 직전 무상선사를 수제자로 인정해
선종의 법통을 잇는 ‘목면가사(木棉袈裟ㆍ
석가모니가 물려준 가사로 인도의 달마대사가 중국에 들고 와
선종의 수제자에게만 물려준 것으로 전해짐)’를 물려받았다.
가인(家人) 왕굉(王굉)을 보내 은밀히 전법가사(傳法袈裟)를 전하고
‘이 옷은 달마조사의 전법가사다. 측천무후가 지선(智詵)화상에게 주고
지선스님이 내개 전한 것이다.
나는 지금 그대에게 맡기노라’라는 전갈도 있었다.
스승으로부터 법과 가사를 전해받은 후
무상은 천곡산의 바위 절벽아래에 은거하였다.
《역대법보기》는 그때 무상의 수도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풀잎으로 몸을 감싸고 단식하다시피 음식을 줄였다.
먹을 것이 떨어지면 흙을 먹었다.
짐승들도 그의 힘에 감화되어 그를 지켜주었다’
《송고승전》의 묘사는 더욱 신이로운 지경에 이른다.
‘무상의 앉은자리 바로 앞에서 두 마리의 검은 송아지가 싸웠으며
털투성이의 차디찬 손이 그의 소매로 들어가서 배를 만지기도 하였으나
그는 그런 일에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한번은 두 마리의 맹수가 무상에게 다가오자
그는 자기 몸을 깨끗이 씻고 맹수들에게 바쳤는데
그들은 냄새만 맡고 물러가 버렸다.
그는 자주 깊은 선정에 들었는데
간혹 손을 자리 밑에 넣어보면 호랑이의 털이 손에 감촉되곤 했다.
산중에서 오랜 수도생활을 보낸 결과
그의 옷은 누더기가 되었고 머리는 길게 자라서
그 모양이 짐승을 방불케했다. 수
염과 머리털이 온몸을 덮었고,
나무열매나 풀뿌리를 캐 먹으며,
풀로 엮어 만든 옷을 걸치고 생활하였으므로
사냥꾼이 그를 보고 짐승으로 오인하여 활을 겨눌 정도였다.
무상은 산에서 나온 뒤에도 주로 묘지나 숲속에서 두타행(頭陀行)을 했다.
그것은 순수한 선종(禪宗)의 수행자로서 당연한 생활이었다.
일반적으로 수행자는 몸의 중요한 곳만 가리는
간단한 옷을 걸치고 걸식을 하되 곡식을 삼가며 나무아래나 묘지에 살며,
앉을 때는 가부좌를 하고 바로 앉아야 하며 잘 때에도 눕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특히 선의 수행자들은 사람들이 겪는 쾌락과 고통을
전생의 업보라고 보고 어떤 모욕에도 성내지 말고 고통을 참아야 한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고통을 참는 힘을 기르는데 두타행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무상은 엄청난 신통력을 지니고 있었다.
사나운 호랑이 두 마리를 마치 강아지 끌고 다니듯이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성도태수 ‘양익(楊翌)’은
무상이 삿된 술법으로 백성을 현혹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를 체포하도록 20명의 병졸을 보냈지만,
갑자기 큰 바람이 불고, 모래와 돌이 날아와
관사 대청의 주렴과 집기들을 날려 버렸다.
양익이 용서를 빌며 개종하고 후원자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무상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으며
그를 위한 절들도 잇달아 세워졌다.
무상선사가 선종에 입문한 곳은
중국 쓰촨(四川)성 네이장(內江)시 쯔중(資中)현의 영국사(寧國寺)로
한나라 헌제때인 서기 200년 세워진 중국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현재 영국사 대웅전에는
무상선사와 스승인 처적(處寂)선사,
그리고 처적선사의 스승이며
중국 선종의 계파(保唐禪派)를 만든
지선(智詵)선사(세수 93세로 서기 702년 입적) 등
3명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서기 742년, 절도사의 초청을 받아 영국사를 떠나
쓰촨성 청두(成都)로 옮겼고,
당시 안사(安史)의 난으로 피난왔던 당나라 현종을 만나는 기회를 가졌다.
현종은 무상선사에게 대자사(大慈寺)사를 하사했다.
스님은 20년 동안 선종의 일파로 염불선 위주의 정중종(淨衆宗)을 세웠다.
무상이 정중사 김화상이란 칭호를 받은 것도 여기서 비롯했으며,
그를 따르는 선승들이 정중종(淨衆宗)이란 일파를 형성한 것도
이를 기반으로 해서였다.
무상은 정중사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포교활동을 폈으며
높은 법력으로 사람들 마음속에 지장신앙을 일으켜
당 황제와 문무조신들을 불법에 귀의하게 했다.
그는 서기 762년, 대자사에서 앉은 채 입적했다. 세수 79세.
스님은 중국 선종(禪宗)의 제 팔조(八祖)인 처적(處寂)을 사사하여
대자사(大慈寺)의 전신인 정중사(淨衆寺)에 들어가
당대(唐代)의 극유명지고승(極有名之高僧)으로
중국 선종(禪宗)의 법통을 이었으며
초기 선종의 대표적 계파인 정중종(淨衆宗)을 일으켰고,
그 행하는 것에 영이(靈異)로운 것이 많았다.
또한 무상은 설법(說法) 위주보다 염불(念佛) 위주의 포교로
신라 원효불교의 법통을 중국 불교에 접목시켰다.
한국 스님으로는 유일하게 오백나한(五百羅漢) 가운데
455번째로 끼였다는 것으로도 무상이 얼마나 이름을 떨쳤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오백나한은 석가모니가 첫 번째이고
유명한 달마대사가 307번째이다.
안녹산의 난(755년)을 피해 온 현종도
쓰촨(四川)에서 무상선사를 특별히 만나
무상으로부터 제왕으로 선정을 베푸는 선법(禪法)을 듣게 된다.
무상과 현종은 안록산의 난 이후 관계가 두터워져
대자사(大慈寺)를 칙명으로 건립할 때
그 공역(工役)을 주관하는 등 전력을 다했고
그 주지로 무상을 임명하는 등 현종은 무상에게 극진한 예우를 아끼지 않았다.
황제뿐만 아니라 당대의 수많은 승려들이 그
를 찾아와 구원을 묻고, 선(禪)을 배웠다.
그는 남종(南宗)도 북종(北宗)에도 속하지 않고
독특한 일문(一門)을 열어 초기 선불교의 맹주가 되었고
2001년에 중국 5백나한 중 455번째 조사(祖師)에 올랐다.
그는 한국 선종의 대부격인 신라 구산선문의 원조다.
그가 오랫동안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져 오다가
1908년 영국의 탐험가인 펠리오에 의해 발견된 돈황문서 속에
무상의 게송인 『무상오갱전(無相五更轉)』과
『무상어록(無相語錄)』이 발견되면서
비로소 그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고
1903년대부터 중ㆍ일 학자들 사이에 무상연구가 치열하게 이루어졌다.
중국의 석학 호적(胡適)과 일본인 학자 야마구찌(山口瑞鳳) 등을 비롯,
많은 학자들의 무상 연구가 속속 나왔다.
그에 비해 국내 학계의 연구는 지극히 미미하다.
중국 선종의 조상은 달마대사로부터 시작하여
육조(六祖)인 혜능(慧能)으로 끝난다.
그러나 둔황에서 발견된 불교고문서 가운데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에서
선종의 법통이 육조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선(智詵)-처적(處寂)-무상(無相)-무주(無住)까지
십조(十祖)에 이르고 있음이 밝혀졌다.
측천무후(則天武后)가 혜능에게 법통을 보증하는 가사(袈裟)를 내리고
그 가사를 3대 만에 물려받은 구조(九祖)가 무상 스님으로 밝혀진 것이다.
실학자 홍만종(洪萬宗)은
“신라인 김가기(金可已)가 중국에서 우화등선한 선인(仙人)임을
비록 아녀자라도 모르는 이가 없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식자층에서도 아는 이가 없어
중국 사람이 와서 물어보아도 대답을 못하니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했다.
무상선사가 티베트불교에도 영향을 준 것은
사천(四川)-운남(雲南) 루트이다.
사실 북종계의 마하연(摩訶衍) 선사에 의해
781년 티베트에 불교가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돈황자료에서 김선사(金禪師) 『선록(禪錄)』이 발견되면서 이를 전면 뒤집어졌다.
당시 무상선사는 ‘김화상(金和尙)’, 혹은 ‘김선사(金禪師)’라고 불렸으며
중국불교의 대표적 선승으로 티베트에 불교를 최초로 전한 선승으로 밝혀졌다.
티베트의 고서 『바세전(sba bzed)』에 따르면
티베트의 티송데첸(khri srong lde btsanㆍ742~797) 왕이
중국으로부터 불법을 받아들이고
사신 등을 보내 귀국할 때 익주(益州) 김화상을 만났다는 것이다.
무상은 왕의 죽음과 파불(破佛),
새 왕조가 장차 불교를 도입하게 될 것을 예언한다.
그리고 삼예사원의 세르난이 중국에 사신으로 왔다가
무상에게 불법을 배운 사실 등을 알려준다. 이
와 같은 사실에서 5백나한 신앙 또한
티베트불교와 어떤 연관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중국 선종사를 장식하는 걸출한 인물인 마조(馬祖, 709~788)가 무상의 제자다.
마조도일(馬祖道一)은
중국 선종사 전체의 분위기를 장악했던 핵심인물로
중국 선불교의 중흥조에 해당한다.
마조의 문하에서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여덟파가 배출됨으로써
그는 한국불교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에 그치지 않고 무상은 티베트에 중국불교를 소개한
최초의 승려가 됨으로써 동서불교 교류사에 획기적 발자취를 남겼다.
남부 사천의 검남(劍南) 출신의 마조도일은
흔히 6조 혜능과 하택신회(荷澤神會), 남악회양(南嶽懷讓)을 이어
남종선을 후세에 떨친 장본인이자
신라9산 선문의 개산조들이 모두 그에게서
지도와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특별한 인물로 평가받아 왔다.
마조도일은 훗날 자기 제자들에게
신라의 선사들을 잘 이끌어주어
해동에 선종이 성황하도록 특별히 당부하였으며
실제로 신라의 선종 구산선문 중 7, 8개가 마조도일의 문하에서 나오게 되었다.
신라승
범일(梵日)은 마조의 제자 염관제안(鹽管齊安)에게서 배우고
신라에 돌아와 명주(溟洲) 굴산파(堀山派)를 개산했으며,
무염(無染)은 25년간 당나라에 머물면서
마조의 제자 마곡보철(麻谷寶徹)에게서 수학하고 돌아가
성주산파(聖住山派)의 개산조가 되었다.
또 신라승 쌍봉도윤(雙峰道允)은
마조의 제자 남전보원에게서 수학했으며
혜목산(慧目山) 현욱(玄昱)은 마조의 제자 장경회휘(章敬懷暉)를 이었다.
또 진전도의(陳田道義)와 동리혜철(桐裏慧徹)
그리고 실상홍척(實相洪陟)도 모두 마조의 제자 서당지장에게서 수학하고
신라에 돌아와 각기 선문을 열었던 것이다.
무상 정중종의 선맥은 중국뿐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전해져 오고 있으나
유감스러운 것은 그것이
중국에서나 우리나라에서 후세 무상의 선맥으로 인식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호방하면서도 평상심을 강조했던 그의 선풍(禪風)은
그 제자인 백장(白丈, 749~814)에게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백장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를 먹지 말라”
등 청규(淸規)를 만든 인물로 유명하다.
특히 무상은 차 문화를 가꾼 핵심인물이기도 해서
그의 선사상과 다예를 결합할 경우
그의 사상이 우리 실생활과 연결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