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문학기행
백제고등학교
교사 박종섭
Ⅰ. 시작하는 말
2003년 한 시민단체의 문학인 초청행사를 필두로 목포는 거의 매년 노겸 김지하 시인 을 비롯하여 전국단위에서 활동하는 문화예술인들을 초청하여 시민 학생들과 함께 따뜻한 고향 얘기와 목포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초청된 연사들과 함께 걱정하고 염려했던 여러 이야기 중 세계의 중심문화는 늘 변하여왔는데 유럽의 중심문화인 르네상스도 중세의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다시 태평양 건너 동북아인 중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목포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목포의 문화컨테츠 라고 갈파하였다. 꼭 노겸 선생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평소 이 고장의 많은 지식인들이 늘 고민하고 염려했던 문제라고 생각한다.
국제적인 문화학술 행사의 70%가 전체인구의 4분의 1밖에 안 되는 서울에서 열리는 서울중심의 대한민국 문화구조 현실에서 목포만의 독특한 정서와 향기가 뭍어나는 토속적이며 세계적으로 가치있는 문화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일본은 신칸센 고속철도 개통 이후 전반적으로 인구의 도쿄집중이 더 심해졌으나 손님을 끌 수 있는 분야를 집중 육성해 특화시킨 곳만이 신칸센의 혜택을 보고 있는데 도호쿠(東北)신칸센이 지나가는 나카신타쵸(中新田町)가 바로 그 경우이다.
인구가 1만4천명밖에 안되는 소도시지만 콘서트홀을 건립하여 문화중심지로 변신했는데 콘서트홀은 개관이 21년이 지난 현재 이용률이 96%(2003년 12월 현재)에 이를 정도로 대박이 터졌다는 곳이다. 지방소도시의 성패는 고속철도가 아니라 지역민 스스로의 각성된 노력에 의한 문화적인 힘이라는 것인데 강원도의 경우도 신남역을 김유정역으로 바꾼 후 수도권에서 실레마을 찾는 관광객이 급증했으며 여기에는 전상국교수가 10년 넘게 노력한 결과라고 한다.
이러한 고품격을 지속적으로 계승하여 발전시키려면 현재 목포시가 추진하고 있는 미항 가꾸기 사업 외에도 지역민의 혼과 아이덴티티가 담긴 역사적 유물과 문화 복원 사업도 함께 추진되면서 시민들의 올바른 정신문화가 고양되어 지역사회의 구조화된 틀 속으로 자리하고 지역민 다수가 이를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어야 문화의 스펙트램은 다양한 형태로 확대될 수 있다.
부산광역시에서는 1997년부터 매년 가을이 되면 (사)민족문학작가회의 부산지회 주관으로 부산시청과 부산시의회 그리고 60여 시민유관 단체가 후원하고 참여하여 요산 김정환 선생 문학제를 개최하고 있다. 즉 요산 선생을 통해 부산지역을 문화도시로 성장시킴으로써 부산이 한반도의 물류와 문화 관문임과 동시에 동북아의 새로운 문화관광 메카로 도약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전국 주요 도시와 읍․면 단위 지역에서도 실천적이고 수범적인 사례로 손꼽히고 있는데 대표적인 몇 군데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옥천의 지용 문학제, 평창의 이효석 문학제, 강진의 김영랑 생가 복원관리, 원주의 박경리 토지문화관, 통영의 윤이상 기념 음악제, 정철의 문학을 잉태한 담양의 가사문학관, 보길도와 녹우당의 윤선도와 윤두서, 벌교의 태백산맥 조정래, 남원의 혼불 최명희, 영광의 시조시인 조운,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 김승옥의 무진기행의 소재가 된 순천만, 당신들의 천국 소재가 된 소록도와 이청준의 진목 생가 복원, 고창의 미당 문학관, 부여의 신동엽 생가와 시비 등을 나열할 수 있다.
출신 작가와 문학작품의 소재가 작가의 고향과 연관되어 많은 탐방객들이 이런 현장을 찾아가 그 작품의 자취와 향기를 맛봄으로써 감동을 증폭시키고 있는 실정에서 목포에서도 문화와 관광을 접맥시켜 남도여행의 품격을 높임으로써 시민들의 문화에 대한 성숙도를 높이려는 준비와 노력이 시급하다고 사료된다.
이렇게 함으로서 문학과 예술이 진정 사람다울 수 있는 가치관을 정립하고 보편화함으로써 우리의 공동체 의식을 보다 크고 깊게 하는 작은 출발이 되리라 기대한다. 목포는 서남권의 관문임과 동시에 수륙으로 이어지는 가교역할을 하는데 인접한 무안 함평 해남 진도 완도 신안 영암 등 주변 지역과 문화의 상호작용을 통해 문학의 결정체가 형성되었기에 주변지역의 인물들을 포함하여 포괄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Ⅱ. 목포개항과 역사
1876년 근대적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수호조약 후 1897년 목포가 개항하게 된 역사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목포는 1895년1월6일 인천에서 서기생과 순사, 서울유지 등 일본인 관리들이 조주부호라는 기선을 타고 약 보름동안 전라, 경상, 서남해 등 반도의 남단인 전 지역 해안을 탐사한 후 무안(현 목포)을 개항하기로 건의하였고 이에 고종황제가 칙령인 자개항으로 선포함으로써 북쪽의 진남포(현 남포)와 함께 무안항으로 일장기를 휘날리며 부산, 인천에 이어 세 번째로 개항(1897년10월1일)하였다. 목포개항이 형식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하나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군사적(대동아 전쟁 준비의 가교기지), 경제적(일본의 잉여공산품을 수출할 배후도시로 나주와 호남의 곡창지대에서 생산된 쌀 수입으로 일본의 국내모순 해결) 필요에 의해 강요된 반 자주적이고 강요된(배종무〈1994〉, 목포개항사 연구, 느티나무) 수치스러운 억지 개항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한국근․현대사를 전공한 학자들의 일반적 견해다
당시 조선은 1875년 운요호사건, 1876년 강화도조약,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과 임오군란,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1895년 을미사변과 을미의병, 1897년 경운궁에서 대한제국(러시아와 일본의 세력균형 하에서 성립) 선포 등으로 자주국권이 상실된 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목포시는 개항일인 10월1일을 기념하여 시민의 날로 제정하여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지만 진보적인 시민단체와 종교계 등에서는 목포시민의 날 제고에 대한 문제제기로 아직도 미완의 과제다.
개항을 전후하여 조선이나 대한제국의 재정에서 당시 목포항의 관세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의 수입의 5% 미만이다.(한철호〈1987〉, 한말 목포개항과 무역구조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이런 상황에 대해 현장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사는 역사왜곡과 식민사관 극복이라는 교육의 책무성에 대해 더 많은 연구와 성찰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1920년대에 접어들면 일본의 식민지 공업화 정책에 따라 노동자 수가 증가하면서 노동단체들이 나타났고 이들은 다시 지역 연맹체를 결성하기도 하였고 농민 운동도 조직화되어 갔다.(김한종 외5인〈2009〉, 한국근․현대사, 금성출판사)
이에 조선의 노동자, 농민들이 대동단결하여 일제에 저항함으로써 1923년 암태도소작쟁의 사건이나 1926년 목포제유공장노동자파업 등과 같은 극렬한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이 전국적인 관심과 주목을 받으면서 식민지 저항운동으로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무안군(현재 신안군) 암태도에서 1923년 8월부터 1년 가까이
전개되었는데 이 쟁의는 악질 지주 문재철의 높은 소작료(수확량의 70-80%)착취에 맞서 일어났다. 투쟁과정에서 지주를 옹호하는 일본 경찰이 농민들을 체포 탄압하자 농민들의 쟁의는 반일 운동의 성격을 띠면서 격렬해 졌다. 결국 농민들은 쟁의를 통해 소작료를 40%로 낮추는 데 성공하였다.(김광남외 4인<2004>, 한국근현대사, <주>두산) 당시 목포 법원과 경찰서 근처에는 암태도에서 올려온 500여명의 농민들이 아사동맹이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동아일보는 그때의 사건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시인 김지하는 그의 회고록 『흰 그늘의 길1』에서 문재철은 암태도 대지주였고 목포조선면화회사 사장이었고 문태중학교 교주였고 소작쟁의 때는 농민들의 원한의 표적이었던 친일파 악질지주 장본인으로 시인의 증조부가 암태도를 떠나게 된 내력과 두 집안과는 불구대천지 원수가 내력을 전하고 있다.
개항 당시 목포에는 부산 인천에서 두량꾼 이라는 지식인 노동자 계층이 대거 몰려와 당시에는 돈 벌려면 목포로 가라는 신조어가 나돌 정도였다. 이로써 1935년에는 인구 5만으로 서울 부산 대구 인천 평양에 이어 전국 6대 도시가 되었으나 3백(쌀, 면화, 소금) 1흑(김)의 서남권 대일본 수출울 위한 수탈의 전진기지로 전락하였다.
개항이전 목포는 鎭이 설치되었고 萬戶鎭을 중심으로 적막한 寒村이었으며 유달산에는 호랑이 굴이 있고 가끔씩 비둘기 떼가 날아오는 한미하고 쓸쓸한 후미진 곳이라고 1914년 일본인이 쓴 『목포지』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중앙정부 재정의 ⅓를 감당할 정도로 호남의 곡창지대인 호남 나주평야를 배후지로 한 영산강 유역 입구에는 해남현의 부창과 영암의 서창, 나주의 영산창이 있어서 수륙을 연결하는 해운로의 가교역할을 수행한 바다의 고속도로였고 수산교통의 요충지였다. 지리적으로 목포는 영산강 하구의 끝자락으로 나주목 무안에 속하였고 후삼국시대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물아래군에서 물양군으로 다시 무안으로 지명이 변경되면서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영암 덕진과 무안 몽탄 그리고 신안 압해도를 경계하여 해전을 벌여 후백제의 수달장군을 수장시킨 곳이기도 하다. 이로써 왕건은 서남단 토호 사원 세력을 규합함으로써 강화만에 이어 서남부에도 해양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또 충무공 이순신은 해남-진도의 좁은 해협인 울돌목으로 불리는 명랑해전에서 1597년9월16일(선조30년) 12척의 병선과 군사로 해남 어란진에 머물고 있는 왜군병선 133척을 울돌목으로 유인하여 조류의 역류를 이용해 31척을 격파하였다.
그 후 고하도(보화도)에 진을 설치하여 군사를 조련하고 군량미를 비축한 후 완도 고금도로 가기 전까지 3개월간 머물렀던 고하진이 설치되었던 역사적 유적지이기도 하다.
1801년 음력 11월 21일에는 신유박해 사건으로 다산과 그의 중형(仲兄) 정약전이 생전의 마지막 동숙(同宿)을 위해 나주(羅州)읍의 북쪽 5리 지점에 있는 밤남정 주막집(栗亭店)에 도착한다. 지금의 나주읍 북쪽에 있는 동신대학교 정문에서 삼도면 방향으로 600-700m 떨어진 지점이 밤남정 주막거리인데 얼마 전까지도 ‘밤남정 식육점’, ‘밤남정 이발소’라는 간판이 걸려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져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다산은 강진으로 약전은 흑산도로 향하기 위해 배를 타고 출발한 곳이 목포항이다.
이렇듯 목포는 조선의 중죄인이 진도와 흑산도 같은 섬으로 유배를 갈 때 필히 거쳐 가는 길목이어서 노적봉에 깃든 원한과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보다 더 많은 비운과 설움이 서린 곳이다.
Ⅲ. 목포문학의 탄생과 작가소개
1. 자산서원과 곤재 정개청(1529-1590)
함평군 엄다면 엄다리에 있는 자산서원은 곤재 정개청을 배향하는 사액서원이었다. 1589년(선조2년) 정여립의 모반사건(기축옥사)이 일어나 관군에 쫓긴 정여립은 전북 진안의 죽도로 도망해 자결했다. 무수한 소문과 폭력과 광기만이 휩쓸고 지나갈 뿐 앞서 가버린 망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역모에 연루된 것으로 지목된 이들은 반역의 주모자도 없이, 변호해 줄 이들도 없이 고문 속에서 죽어갔다. 인구 5백만의 조선에서 1천여 명이 죽었다. 전쟁과 다름없는 피의 살육전이요, 마녀사냥이었다.
기묘사화, 을사사화의 광풍 속에서 큰 피해를 입었던 호남의 유림들은 기축옥사로 인재가 마를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동방의 진유(眞儒)로 이황(李滉)에 버금간다'는 평을 들었던 함평의 대학자 곤재 정개청(困齋 鄭介淸)도 살육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모반사건을 통해 서인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쥐어 동인들이 궁지에 몰린 상황이었으나 그는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았던 은둔의 학자였다.
자산서원 입구에 세운 곤재 정개청 시비에 일찍이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서 배웠고 홀로 절에 들어가 유학, 천문지리, 약학, 산수, 역학 등을 널리 공부하여 깊은 경지를 체득했다. 이후 41세에 지금의 함평 엄다 제동마을에 윤암정사를 짓고 학자들과 교류하며 후학들을 길렀다.
그의 호 곤재(困齋)는 '곤란함으로 지은 집'이다. 곧 그에게 있어 학문과 삶이란 역경을 마다하지 않고 스스로 닦아가는 의지실현인 셈이다. 문집 제목인 '우득록(愚得錄)' 또한 '어리석게 얻는다'는 뜻이니 그런 그의 의지를 짐작케 한다. 그는 우득록의 첫머리에서 '겸허'를 논한다. "내심에 아름다운 덕을 함축하고 있으면서도 이것을 말함에 신중히 하여 함부로 외부에 발설하지 말고, 겸양하는 마음으로 그 미덕의 성정(性情)을 키워 총명함을 자처하지 않고 비록 사물의 이치를 변별하여 알아챔이 있을지라도 그 알아챔을 자의로 이용하지 말고 사물의 이치를 알아도 그 아는 바를 자의로 이용하지 아니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곤재는 정여립에게 보낸 편지에서 "덕과 의를 사모하였고, 도(道)를 고명하게 본 것은 오직 존형 1인이 있을 뿐"이라고 썼다. 그러나 그가 쓴 편지는 역모 관계를 증명하는 증거가 되고 말았고 그는 옥중상소에서 "정여립과는 교정랑(校正郞)으로 처음 만났고 함께 강론하고 교정을 본 것이 겨우 10여일 이었는데 어찌 친밀함이 있었겠습니까? 무릇 편지는 친밀하면 말이 많으나 그렇지 못하면 공경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그 격에 맞는 예의입니다" 고 했다.
그러나 서인 권력의 대표로 역모사건을 조사했던 송강 정철은 "개청은 아직 모반하지 않은 여립이고, 여립은 이미 모반한 개청"이라고 몰아 세웠다. 미수 허목이 쓴 '곤재 선생전'에는 "곤재가 본래 정철의 사람됨을 탐탁히 생각지 아니하니 어떤 사람들이 그 청백한 지조가 취할 만 하다고 말해도 선생은 다만 답을 하지 않고 말하기를 '그 사람이 정(正)을 꾸미고 거짓 행세를 하니 바른 사람이 아니다' 함으로 이 말을 듣고 정철이 심히 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철 스스로도 심문의 과정에서 곤재와 정여립과의 관계는 분명치 않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정철 개인의 사적 관계가 개입된 듯한 흔적을 보게 된다. 곤재는 결국 매를 맞고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고 한 달 만에 장독으로 운명했다. 그의 죽음 뒤 동생 대청은 여러 사람 앞에서는 말을 하지도 웃지도 않았다.
사후 26년이 지난 1616년(광해군8년)에야 역적의 누명을 벗고, 그의 사우(祠宇)가 함평에 세워졌으나 당쟁의 소용돌이는 지속되어 훼철과 복설이 반복되었다. 1616년에 건립된 사우는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이르기까지 무려 5차례의 훼철을 당했으며 1988년에 복원되기까지 6번 건립되는 곡절을 거치게 되었다.
그의 곤(困)함이 자산서원의 운명을 예견했음일까? 자산서원은 조선 당쟁사의 굴곡진 자화상이기도 하며 현재의 우리를 비춰주는 소중한 거울이기도 하다.
(2006년 오마이뉴스 이철영 기자의 자료 인용)
2. 총지사와 초의선사(1786-1866)
목포는 무안현에 속한 만호진으로 육지와 섬을 연결하는 전초기지였기에 무안을 비롯하여 주변 다도해와 밀접한 상호관련성을 갖고 있었다.
승달산을 중심으로 총지사와 법천사 그리고 목우암, 서해 무역 항로의 길목에서 무사귀환의 등불을 밝혔던 무안반도의 해제의 원갑사, 화엄사상의 구현인 약사여래를 모신 무안읍의 남학사 등은 영산강의 안골 무안을 정토사상의 발원지로 발전시켰다. 총지사는 200여년이 지나는 동안 주민들의 의식 속에 전설로만 남아 있었을 뿐 실체는 없었던 호남 제일의 정교함을 갖추었던 사찰이 지역 세도가의 지나친 과욕에서 빚어진 조선조 후기 사회의 혼란함이 빚어낸 역사적 비극이다.
불교적인 색체가 일로의 백련지(白蓮池)와 삼향의 초의선사 유적 그리고 승달산의 총지사가 연결되어 불교문화 벨트를 형성한다면 불교도들의 성지(聖地) 순례도 가능할 것이다.
초의선사는 본관은 인동이며 무안 삼향에서 출생하여 조선 후기의 대선사로서 우리나라 다도문화를 정립하여 다성(茶聖)이라 부른다.
5세 때에 강변에서 놀다가 급류에 휩쓸려가 죽을 고비에 다다랐을 때 부근을 지나는 승려가 구해주었고, 15세에는 남평 운흥사에서 출가한 후 19세에는 월출산에 올라 떠오르는 보름달을 바라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한다.
다산에게 유학의 경서를 배우고 실학을 계승하였으며 시부를 익히기도 하였고 소치 허련에게는 그림을 사사하였으며 평생 친구로 추사 김정희가 있다.
초의선사의 사상은 선사상과 다선일미 사상으로 집약되는데 차안에 부처님의 진리(법)와 명상(선)의 기쁨이 녹아있듯 차와 선이 둘이 아니고, 시와 그림이 둘이 아니며, 시와 선이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흥사의 일지암을 중건하여 선에 전념하면서 불이선의 진리를 찾아 정진하였으며, 다선삼매에 들기도 하였다. 1866년 나이 80세. 법랍 65세로 대흥사에서 입적하였다. 일생을 통하여 선과 교의 한쪽에 치우침이 없이 수도하고 중생을 제도하였다. 선사는 조선 후기 불교계에 선풍을 일으켜 시, 서, 화, 차, 선의 대가로 대흥사 13대 강사와 종사로 추앙받고 있다.
선사의 작품 귀고향(歸故鄕)과 대흥사의 부도전을 통해 고향이 무안 삼향으로 확인되었고 당시 선운사 벽파스님과 선문수경 논쟁은 다음 법손에 까지 이어진다.
3. 무정 정만조(1858-1936)
◀ 목포시사 : 목포시 죽교동 유달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으며 1890년 하 정, 여규향 등이 이 고장 문인들에 게 시문을 가르치기 위하여 건립한 유산정에서 비롯되었다. 무정은 목 포시사의 전신인 유산시사가 1920 년에 결성될 때 창립 회원으로 활 동해 목포시사 발전에 기여했다.
부산 동래 출신으로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관련하여 1896년 진도에 유배되어 10여년의 세월을 보낸 후 목포에서 시 활동과 교육에 힘쓰다가 서울에 돌아간 뒤 일본 총독부로 부터 남작 직위를 받고 친일파 100인의 반열에 오를 정도였다. 경성제대 교수를 엮임 하였고 진도의 손재형 .허백련 등을 사사했으며 목포 시사에서 전국한시대회를 개최하는 등 목포문학에 대한 기반을 다지는데 기여했다.
유달산 중턱에 있는 유선각은 무정을 비롯한 많은 선비들이 시회를 열고 풍류를 읊었던 곳이라 하여 유선각이라 하였으며, 유달산의 이름은 놋쇠 유자를 쓰는 鍮達山이었는데, 무정이 유학의 창달을 의미하는 선비유자를 쓰는 儒達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진도역사관에 전시되어있는 <은파유필>은 무정이 진도에 유배되어 오기까지의 경로, 진도 유배생활 중에 겪은 여러 가지 신기한 풍물, 진도인과의 교류 유시 등을 모아 놓은 유배문집이다. 역사기록에 의하면 제주도, 진도, 거제도 ,남해도가 가장 많은 귀양지로 쓰였는데 진도 유배자는 102명에 이른다.
4. 김우진(1897-1926)
호는 초성(焦星)․수산(水山)으로 1897년 안동 김씨로 목포 개항 당시 무안 감리를 지낸 김성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목포공립보통학교(지금의 북교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915년 일본으로 건너가 가업을 이어받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구마모토 농업학교에 입학하였다. 16세 때부터 단편 <공상 문학>을 썼던 그는 문학에의 꿈을 꺾을 수 없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1919년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들어가 희곡을 전공하여 영국의 사회 개혁 사상가 쇼, 스웨덴의 표현주의 극작가 스트린드베리의 희곡에 심취하였고, 니체, 마르크스 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농업학교 재학 때는 시를 대학시절에는 연극에 관여하여 1920년에는 조명희, 홍해성, 고한승, 조춘광 등과 함께 연극단체인 극예술협회를 조직하였다.
1921년에는 동우회 순회연극단을 조직하여 국내에서 40여 일 동안 순회공연을 했고, 상연 극본인 아일랜드의 극작가인 던세니의<찬란한 문>을 번역했으며, 이 때 동경 우에노 음악학원에서 성악을 공부하던 윤심덕을 만났다.
대학 졸업 후 목포로 귀향해서는 영농사업체인 상성합명회사의 사장에 취임하였으나 아버지와 잦은 마찰을 일으켰고, 회사 재임시 시 50편, 희곡 5편, 소설 3편, 평론 20편 등 총 78편의 작품을 남겼다.
1926년 8월 4일 김우진은 그와 예술적 애정 관계를 맺고 있고, 사의 찬미를 불러 국내외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과 함께 일본 관부 연락선을 타고 돌아오던 중 현해탄에서 29세로 투신자살하였다.
사의 찬미는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시초였고 음악 엘리트였던 윤심덕이 이바노비치의 왈츠곡 <다뉴브 강의 잔물결>에 허무와 염세로 가득한 노랫말을 붙여 취입한 것 이었다.
1920년대에는 기존 신파극에 대한 반성과 극복의 움직임이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그 전환의 중심은 유학생 중심의 학생극이었다. 김우진은 이러한 학생극 운동의 중심에서 당대에 성행하던 신파극과는 다른 새로운 극의 실현을 위해 노력한 극작가였다. 또한 동시대의 그러한 노력들이 대체로 서구 지향적이고 관념적인 경향인 것에 비해 그는 현실의 구체적 체험에 기반을 두고 창작에 치중했다는 점에서 동시대의 다른 극 이론가나 작가와 명확히 구분된다. 이런 점에서 김우진은 1920년대 극이 지닌 문제와 그 특성을 드러내주는 대표적인 극작가이며 이론가이다.
김우진의 희곡 1910년대 극의 주류였던 가정극의 문제의식을 깊이 받아들이고, 그 속에 담겨 있는 개혁 의지를 사회 현실적인 차원에서 확대하려는 두 갈래 양상을 보여주었다. 전통 윤리와 서구적 윤리의 첨예한 대립을 그린 <두더지 시인의 환멸>(1926)과 <난파>(1926)가 가정극적인 양상을 좀더 강하게 나타냈다면, <정오>(1924)와 목포 유달산 밑의 사창가를 무대로 빈민들의 처참한 생활을 그린 <이영녀>(1925)는 사회적인 관심에 좀더 치중했으며, 나아가 동학농민운동을 소재로 한 대표작<산돼지>(1926)에서는 두 가지를 종합적으로 보여주었다.
평론<창작을 권함네다>에서는 표현주의를 체계적으로 소개하고, 전통적 인습타파를 주제로 삼은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표현주의가 가장 알맞은 창작방법이라고 내세웠다. 새로운 연극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한 평론<소위 근대극에 대하여>(1921), <구미 현대 극작가>(1926), <우리 신극운동의 첫길>(1926) 등을 발표하고, 문학이 사회성과 공공성을 지녀야한다는<조선말없는 조선문 단에 일언>(1922)과<이광수류의 문학을 매장하라>(1926) 등을 발표했다.
◀ 김우진의 대학시절 모습
․초성의 묘는 무안군 청계면 월선리 몰뫼산에 ‘문 학사 김우진지 묘’ 라고 새겨진 상석과 함께 조성 되어 있다. 당시 시신을 찾지는 못했기 때문에 묘 에 시신이 안치되어 있지는 않고 원혼을 끌어온 초혼 묘이다.
▲ 성취원 터 ․목포시 북교동 46번지 현재 북교동 성당이 자리한 지역의 일대가 방대한 대지 위의 대저택으로 유명했던 성취원이 있었던 곳으로 초성은 이 곳의 2층 양옥인‘백수제’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고 한다. 성취원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고, 극작가 김우진 문학의 산실이라는 작은 비가 있다.
극작가 김우진과 자녀 ▶
․김우진의 품에 안긴 아이가 김방한(전 서울대) 교수이다. 김교수가 작고하기 전 소장하고 있던 조부 김성규와 부 김우진의 유품 141점을 목포시에 기증 한 후 목포시는 현재 목포문학관에 전시하고 있다.
5. 박화성(1904-1988)
본명: 경순(景順), 호: 소영(素影) 목포시 죽동에서 박운서와 김운선의 사이에서 막내딸로 태어났다. 1915년 목포 정명여학교를 거쳐 1918년 서울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 영광에서 교편생활 중 시조작가 조운을 만나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시작했다.
1925년 단편 <추석전야>가 이광수의 추천으로 조선문단에 게재되어 21세의 나이로 문단에 등단하였다.
1926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 한 뒤, 일본여자대학에서 영문과 3학년을 수료하고 귀국하였다.
1932년 여성 최초로 장편소설 <백화>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면서 독자들로부터 성원을 받았고, 1938년까지 작품 활동을 계속하는 동안 일제의 침탈로 고통받는 도시 노동자나 서민 그리고 농민을 다룬 <하수도 공사>, <논 갈 때>, <홍수전후>, <한귀>, <고향 없는 사람들> 등의 소설을 남겼다.
장편소설에 의욕적이었던 작품세계는 대중성을 도입하여 서민들의 세대 의식이나 남녀 간의 애정문제 등을 다루었다.
해방 이후 주요 작품으로는 단편소설에 <광풍 속에서>,<샌님 마님> 등이 있고, 장편소설에 <고개를 넘으면>, <사랑>, <벼랑에 피는 꽃>, <바람 뉘> 등이 있다. 여러 문학 단체에도 관계하여 한국문인협회이사,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중앙위원, 한국여류문인회 초대회장, 한국소설가협회 상임위원 등을 역임하였고,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문학상, 대한민국예술원문화상, 문화훈장, 3․1 문화상 등을 수상하였다
1936년부터 1962년까지 거처하며 작품 활동을 했던 자택 세한루는 목포시 용당동 986번지에 위치하며 사라진 자리에 표지석이 있다.
박화성 문학을 해방 전후로 나눈다면 해방 전 <하수도공사>(1931), <홍수전후>(1934) 등 1930년대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일제 식민 치하에서 가난하고 핍박받고 굶주린 겨레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서술적으로 묘사하면서 겨레에게 스스로 이를 극복해 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준 저항 의식이 짙은 작품들이다.
그 무렵 대부분의 리얼리즘 작품들은 있는 현상을 묘사하는 데 그치거나 도피해 버렸으며 상황적인 진실을 인식하지 못했었다.
해방 전 작품은 일제 치하에서 겪어야만 했던 온갖 슬픔과 괴로움 속에서 우리 민족이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저항적인 의지의 미학을 창조한 것이다.
해방 후 <활화산>, <고개를 넘으면>, <사랑>, <태양은 날로 새롭다>, <벼랑에 피는 꽃> 등 일련의 장․단편은 해방 전에서 볼 수 있는 식민 치하의 저항적인 민족 의지의 미학을 분단 치하의 통일 의지의 미학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박화성 문학의 근본정신은 정의를 위해서는 어떤 난관이라도 딛고 넘어서서 새로운 시대와 세계를 향해서 전진해 나가는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에 투철한 전형적인 인간을 창조하는 데 있다.
<홍수전후>에서는 영산강 일대를 휩쓴 홍수를 배경으로 삶의 터전을 상실한 농민의 비참한 현실을 폭로하고, 오랫동안 길들여졌던 봉건적 세계관을 진취적인 것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태양은 날로 새롭다>에서는 4․19 때 희생된 어느 의학도의 애인이 유복자를 낳자 이것을 숭고한 아름다움으로 느낀 건축가가 집안 부모들의 반대에도 그 유복자를 입적시켜 4․19 정신의 계승을 승화시키고 사랑의 결실을 얻어낸다. 강인한 이념이 순결보다 더 위대함으로써 휴머니즘의 새로움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이미 전근대적, 보수 지향적인 세태가 서서히 붕괴되어 가는 전조를 보여 주고 있다
6. 수필가 김진섭(1903-?)
청천(廳川) 김진섭(金晉燮)은 1903년 8월 24일 전라남도 목포에서 풍산(豐山) 김씨 4형제 중 둘째로 출생했다. 본향(本鄕)은 경상북도 안동(安東)이지만 감리서(監理署) 관리였던 부친 김낙헌(金洛憲))이 목포에 근무할 때 출생한 것이다. 김진섭은 “나는 불행히도 故鄕에 對해서는 極히 散漫한 印象밖에 가질 수 없기 때문에 故鄕에 두고 온 이야기 亦是 記憶할 바이 없다.”라고 할 정도로 부친의 근무처에 따라 자주 옮겨 다녔다.
그의 집안은 선조 때부터 벼슬을 한 부유한 집안으로 조부가 판서(判書)를 지냈으며, 부친은 안동 군수를 역임했다. 부친은 관직에 있었기 때문에 고향을 떠나 목포, 제주, 나주 등지로 전전하였다. 그는 목포에서 7살까지 살다가 부친의 전근에 따라 제주도에서 제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보통학교를 졸업할 무렵인 11살 되던 해에 부친이 나주로 임지를 옮겨 나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나주는 김진섭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지만 지금도 금성산 자락에는 그들의 가족묘지가 있다.
그는 1918년에 부모를 따라 상경하여 양정고보(養正高普)에서 공부한 후 1920년에 졸업하였다. 양정고보 재학시 성적은 우수하였으며, 수학과 지리 성적이 매우 우수했다. 1921년 9월에 일본 도쿄 호오세이대학(法政大學) 전문부 법과에 보궐 입학하여 1년 수학 후 예과(豫科)를 마치고 독문학과를 졸업했다. 그의 나이 24살 되던 해인 1927년 3월에 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하였다.
김진섭은 1930년대 한국 수필의 기틀을 마련한 선구자이다. 그는 서울대 교수를 거쳐 성균관대 독문과 교수로 재직하던 중, 1950년 7월 서울 청운동 자택에서 납북된 후 오늘날까지 생사를 알 수 없다.
그는 수필과 평론을 주로 썼으며 1930년대「한국문예비평자료집」에 의하면 김진섭이 발표한 수필로는 1940년대까지 20여 년 동안 150여 편의 수필을 썼다.
1947년에 발간한 첫수필집 「인생예찬」과 1948년에 발간한 수필집「생활인의 철학」을 통해 그의 작품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김진섭 수필의 작품 경향은 서정적인 면보다는 사색적이고 논리적인 수필로 ‘인생’과 ‘생활’을 주제로 하고 있다. 그의 수필은 서양의 대표적인 에세이스트인 베이컨의 영향을 받아 신변의 이야기가 아닌 생활철학을 일반화한 지적이고 철학적인 중수필을 시도하였다.
(김한호<2005>,『광주문학』 5월호, 김진섭의 생애와 수필문학)
Ⅳ. 목포출신 작가의 소재가 된 작품과 배경
1. 김 현 (1942-1990)
전남 진도군 진도읍 남동리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광남이다. 진도에서 초등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목포 북교초등학교로 전학했다. 부친과 형은 목포 부둣가에서 구세약국을 운영하여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한다. 목포중학교를 졸업하고 목포 문태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곧바로 서울의 경복고등학교로 전학했다. 서울대학교 문리대 및 동대학원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국민학교 오학년 때의 일이다. 그때의 내 고향에는, 유식한 피난민들이, 할 장사가 없었기 때문에 벌여놓은 헌책방들이 숱하게 많이 있었고, 나는 깍듯한 서울말을 쓰며, 항상 깨끗한 옷을 입고 다니는, 이름도 계집애처럼 부용이라고 불리는 한 아이 뒤를 쫓아다니면서, 그 헌책방의 소설책들은 거의 다 읽어냈다. 읽었다고는 하지만, 지루하고 무슨 소린지 잘 알 수가 없는 지문은 성큼성큼 뛰어넘고, 멋진 대화같이 느껴진 것만을 읽어가는 괴상한 독법으로 읽은 것이었다. 겨울밤에, 가슴에 베개를 괴고, 해남 물고구마를 눌어붙도록 쪄가지고 먹어대며, 이형식에서 오유경에게로 허숭에서 임꺽정에게로 그리고 오필리아에서 파우스트로 정신없이 뛰어다닌다. 김현(1997),『한국 문학의 위상』, 문학과 지성사
1960년대 초반 김지하, 최하림 등과 함께 목포 오거리에서 문학적 감수성을 익혀 나간 김현은 1962년 서울대 불문학과 재학시절에《자유문학》애 문학평론 <나르시스의 시론-시와 악의 문제>를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했다.
같은 해 여름 김승옥ㆍ최하림과 함께 동인회 ‘산문시대’를 결성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동인지 《산문시대》를 창간ㆍ주도 했다. 2호부터 강호무ㆍ김산초ㆍ김성일ㆍ염무웅ㆍ김치수ㆍ서정인 등이 가세한 동인회는 1968년 이른바 ‘4.19세대’가 대거 참여하는 동인회‘68그룹’결성하기도 했다.
김현에 대해 “1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평론가”(시인 황지우)라는 말이 나올 만큼 당대의 한국문학에 넓고 깊은 영향을 미쳤다.
90년대 후반 연세대 대학원에서 조사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20세기 국내 학계에 가장 영향력을 준 학자로 리영희 교수 다음 순이었다.
김현은 240여 편에 달하는 문학평론과 저서를 남겼다. 김윤식과 함께 『한국문학사』를 펴냈으며, 고전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경향들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여 『존재와 언어』,『한국문학의 위상』,『분석과 해석』 등의 책을 펴냈다.
불문학자로서 좀더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관점으로 우리 문학을 읽어내고 거기서 의미를 끌어내기 위해 외국문학 연구에도 관심을 보여 『바슐라르 연구』(곽광수와 공저) 『현대비평의 혁명』,『문학사회학』,『미셸 푸코의 문학비평』,『시칠리아의 암소』등을 펴내기도 했다.
그의 사후에도 평론집 『말들의 풍경』,『유고일기』,『행복한 책 읽기』등이 나왔으며, 외국문학 논문상과 팔봉비평문학상 등을 받았다.
김현은 탁월한 비평가이자 동시에 프랑스 문학 연구자였다. “유럽 문학, 특히 내가 도취되어 있었던 프랑스 문학을 나는 나의 정신의 선험적 상태로 받아들였다.”「한 외국 문학도의 고백」고 그는 말한다. 김현은 프랑스 문학, 더 넓게는 서구의 인문적 교양과 서양적 이념에 경도되었던 사람이다. 4ㆍ19 세대의 문학에 대한 자긍심이 컸던 김현도 한국 문학 전체로 눈길을 돌리면, 유보적이고 자기 부정적인 태도로 바꾸어 “한국 문학은 주변 문학을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서구 문학에 대한 한국 문학의 콤플렉스, 즉 한국 문학이 중심이 아니라 주변부에 갇혀 있다는 쓰디쓴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주장은 현대 한국 문학이 우리의 생래적 기질과 무관하게, 거의 강제로 이 땅에 옮겨 심어진 서구 근대 문학 장르들의 무단 차용, 각종 문예 사조의 추종, 이에 따른 착종과 파행, 가위눌린 삶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혼미한 언어들로 얼룩져 있다는 점에서 그 한계성과 관련해 있다.
그는 자신이 연구한 프랑스 문학을 한국 문학의 화법으로 녹여내고, 그러면서도 편협한 주관성을 벗고 세계사적인 눈으로 한국 문학을 조망한다. 그에게 외국 문학은 좀더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관점으로 우리 문학을 읽어내고 거기서 의미를 끌어내기 위한 장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한국 문학 속에서 숙성되고 있는 보편성을 깨닫게 함으로써 외국 문학에 대한 우리의 근거 없는 열등감과 콤플렉스를 떨쳐내게 만들며, 나아가 오히려 우리 문학의 가능성을 길어 올린다.
프로이트와 융과 사르트르에서 시작한 김현의 서구 사상 편력은 바슐라르와 알튀세르와 지라르를 거쳐 푸코로 마감된다. 이런 궤적은 상상력 이론과 문화 사회학, 주제 구성과 구조 분석 등을 낳는 토대가 되고, 그의 비평적 지평을 넓히는데 이바지한다. 장석주(2007),『 20세기 한국문학의 탐험3』, 시공사
2. 천승세(1939- )
목포에서 소설가 박화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 승준은 문학평론가이고 동생인 승걸은 서울대 영문과 교수로 3형제 모두 문학을 전공한 문학가족이다.
목포고등학교를 거쳐 성균관대 졸업했고 1958년《동아일보》신춘문예에 단편 <점례와 소> 가 당선되었다. 현 목포의료원 건물이 들어서기 전 도축장이 있었는데 유년시절 도살장으로 끌려가던 소의 울부짖음과 작가의 사랑얘기를 담은 소재다.
김동리 선생의 권유에 따라 《현대문학》에 내일 과 견족(犬族) 이 추천되었다.
1964년 3월 국립극장 장막극 현상 모집에 <만선(滿船)-3막6장> 이 당선되어 희곡에도 열정을 보였다. 만선은 2008년 대학수학능력시험 언어영역에 희곡 단독지문으로 출제되기도 했는데 주된 배경은 목포 하당의 어촌 마을이다. 신태양과 한국일보 기자, 독서신문 취재부장 등을 지냈으며 소설 80여 편을 발표하였다.
1973년 북태평양 어선에 승선한 체험을 바탕으로 한국 어민사를 관류하는 대하소설 빙등(氷燈)을 연재(1986)했으나 안기부의 압력으로 연재 중단이라는 시대적 아픔을 겪기도 했다.
소설 감루연습(感淚練習), 황구의 비명, 신궁(神弓), 낙월도, 독탁행, 사계의 후조, 낙과(落果)를 줍는 기린, 순례의 카나리아 외에 시집과 에세이집, 콩트집 등이 있다. 70년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활동과 1980년대에는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수단으로 사실상의 집필을 중단하고 주로 콩트와 에세이를 쓰며 생계를 유지했다.
한국연극영화예술상, 만해문학상, 성옥문화상, 자유문학상을 수상했다.
성균관대학교 민주동문회 회장, 전국대학교 민주동문회(전민련)의장, 자유실천 문인협의회 상임고문, 민족문학 작가회의 상임고문 등을 엮임 하였고 현재는 한국작가회의 고문으로 고향 목포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3. 최하림 (1939- )
목포의 바닷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그의 집안은 학교를 다닐 수 없을 만큼 어려웠다고 한다. 유년시절 수화 김환기의 고향 신안군 안좌도 기좌리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다가 다시 목포로 나와 오거리 일대를 중심으로 문학청년기를 보냈다.
1962년 김현, 김승옥 등과 함께 산문시대 동인을 결성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동인지『산문시대』를 5집까지 발간하였다.
박석규ㆍ원동석ㆍ김소남ㆍ양계탁 등과 고도를 기다리며를 무대에 올리는 등 연극에도 관심을 보였다. 산문시대 동인으로 활동하던 1964년 <조선일보>신춘문예 시 빈약한 올페의 회상이 당선되어 시단에 나왔다.
80년대에는 30년간의 서울생활을 접고 10여 년 동안 전남일보 논설위원으로 재직했으며 충북 영동에서 살다가 경기도 양수리로 이주하여 창작에 전념하고 있다.
우리 시단의 균형주의자로 김현이 아폴로였다면 김지하는 디오니소스였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는 이 두 사람을 합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시 세계는 모더니즘에서 리얼리즘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이를 통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시적 사유도 서양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이 적당이 혼융되어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최하림의 시에 나타난 목포는 시집 『우리들을 위하여』에 집중되어 있다.
그는 문학청년시절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발레리의 시집 『해변은 묘지』에 경도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첫 시집에서 지중해의 몽환적 이미지가 넘실거린다.
<황혼>등 초기시의 주요 무대는 목포 대반동 바닷가이다. 바다에 관련된 모든 시가 이곳을 배경으로 창작되었다. 바다와 관련된 그의 시는 구체적인 삶이 살아 있는 건강한 것이라기보다는, 어둠과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 추상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시집으로 우리들을 위하여, 작은 마을에서, 겨울꽃, 겨울 깊은 물소리,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굴참나무 숲으로 아이들이 온다, 풍경 뒤의 풍경,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 등이 있으며, 시선집 사랑의 변주곡, 한국인의 멋, 김수영 평전, 자유인의 초상 등이 있다. 조연현문학상, 이산문학상, 올해의 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5. 김시라(1945-2001)
품바는 1972년 타계한 각설이대장 천장근의 파란만장한 일생에 대해 직접 극본을 쓰고, 연출을 맡아 ‘품바’란 1인극을 만든 김시라는 필명이고 본명은 김천동이다. 시인은 전남 무안군 일로읍 용산리 농장부락에서 태어나 목포중․고등학교를 다녔고 건국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 때 민중항쟁 시 40여 편을 집필했으며, 1981년 이후에는 광주민중항쟁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전국을 떠돌며 억압받는 민중의 틈바구니에서 권력층에 항변하였다. ‘품바’는 광주일보사 초청으로 광주에서 수 회 공연한 뒤 서울로 입성하여 2000년 말까지 8,000회로 기네스북에 기록되어 한국 연극 사상 초유의 기록을 세웠다.
품바에 관한 그의 집념으로 그는 ‘우리 시대의 명인(名人)’으로 선정 되었고, 미국 10개 대도시 60여회 순회공연 등으로 ‘백상예술대상’ ‘자랑스런 전남인’과 ‘자랑스런 무안인’에 선정되게 되었으며 진정한 민중 참여 예술을 승화시켰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각설이 품바 타령은 각설이패가 부르던 타령으로 장타령이라고도 한다. 옛날 거지나 문둥이들이 남의 집 앞이나 장터에서 손을 벌려 구걸할 때 부르던 잡가인데 비애가 서려 있는 타령조로 되었다.
사설의 내용은 장타령이나 판소리 중 한 대목을 따 이것저것 뒤섞어 가며 자유롭게 부르는데 청양(靑陽)지방에서 부르던 각설이 타령은 “얼씨구나 잘한다. 품바하고 잘한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으흐 이놈이 이래도 정승판서 자제요. 팔도감사 마다고 돈 한 푼에 팔려서 각설이로만 나섰네. 지리구 지리구 잘한다…”로 엮어지고 있으며, 부산 지방의 각설이 타령은 “일자나 한 장 들고 봐, 정월이라 대보름 온갖 세상 만나보고, 이자 한 장 들고 봐, 이월이라 매화꽃 각시타령 하기 좋다…”로, 지방에 따라 사설이 조금씩 다르다.
6. 김지하(1941- )
목포시 연동의 뻘바탕 수돗거리 물전 건너 옛 외갓집에서 출생하였다.(김지하 <2003> 흰 그늘의 길 1, 학고재) 이전의 다른 자료에는 목포시 대안동 또는 목포대 바위아래 일본식 목조가옥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연동 뻘바탕이 확실하다.
본명은 영일(英一), 호는 노겸(勞謙), 지하(芝河)는 필명이다.
시인의 증조부는 암태도 입금리에서 살다 줄포 그리고 김제로 옮겨가 동학에 입문하였고 조부는 기술자로 김제에서 법성포로 옮겨와 다시 목포에 정착하였다. 지금도 암태도에는 선산이 있다고 전한다.
외증조부는 정계 진출하여 중앙관리가 되었으나 천주교도이며 개화당이었던 관계로 제주도에 귀양(당시 제주에서 일어난 이제수 난 경험)경험이 있고 외조부는 해남에서 목포로 외조모는 해남 상공에서 중선배와 객주로 거부였으며 불교와 인연이 깊었다고 한다.
1953년 산정초등학교 졸업 후 목포중학교 입학하였으나 1954년 전 가족이 원주로 이사함에 따라 원주중학교로 전학하였다.
1959년 중동고등학교 졸업 후 1959년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하여 7년 반 만인 1966년 여름 졸업을 하였는데 어느 학기 때는 등록도하지 않고 한 학기 동안 계속 수강하여 시험도 치루었으나 학점은 부여되지 않았다 한다. 박정희는 이를 두고 언론에 고의적인 장기학적 보유자라 했으며 1964년 서울대학교 민족주의비교연구회 등 학내동아리들과 주축이 되어 6.3 대일굴욕외교 반대투쟁 참가. 弔辭 <哭! 民族的 民主主義>와 행진가 <탄아! 탄아! 최루탄아!>를 작성. 계엄령 선포로 투옥
1965년 한일조약 비준 반대운동 참가 지명수배와 도피생활
1969년 <황톳길> 등 5편을 월간 <詩人>지에 발표.
1970년 특권층의 부정부패를 신랄히 풍자한 <五賊>을 3일 만에 완성하여 월간 종합지인 <思想界>5월 호에 발표하였고 곧이어 야당인 신민당 기관지<民主前線>이 전문을 전재하자 박정희 유신정권은 이 시가 “북괴의 선전활동에 동조한 것” 이라고 발표. 이 사건은 당시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의 이유를 적용하여 작가와 잡지 및 신문 발행인을 체포 구속(100일)하고 동시에 사상계를 판매금지 시켰으며 전문이 게재된 민주전선은 압수 당함.
1970년 6․70년대 산업화로 인한 농촌의 피폐된 현상과 목포를 주된 소재로 한 초기 시집 <黃土>가 한얼문고에서 간행됨. 이 시집은 목포대학교 전신인 목포교육대학 도서관에서도 구입하여 소장되어오다가 1980년 신군부 정권에 의해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짓밟아지면서 목포대학 도서관에 보관된 다른 도서 1권과 함께 불온사상 서적이라는 죄목으로 분서갱유를 당했는데 그중 한 권이 <黃土>라는 시집이었을 정도로 시인의 작품도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시인과 함께 모진 시련을 겪어야 했다.
1971년 <아주까리 神風>, <구리 李舜臣>, <櫻賊歌>등이 월간 <다리>誌에 발표되었고 12월에는 日本 中央公論社에서 시인의 주요 작품이 일본어로 번역 출간됨
1972년에는 <蜚語>를 <創造>4월 호에 발표하여 해당 잡지는 판매금지 당하고 발행인 신부와 具仲書 주간이 연행 당하는 수모를 겪음. 제3공화국 당시의 현실을 풍자한 장편 담시 <五賊>과 <蜚語>의 발표는 시인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는 사태를 만들었으나 100일 만에 석방됨.
1973년 金玲珠 여사(토지의 작가인 朴景利 선생의 딸)와 결혼. 희곡<진오귀> 발표
1974년 4월 25일 흑산도에서 영화 <靑女>촬영에 시인은 조감독으로 참가하여 묵고있던 대흑산 예리관광 여관에서 체포되어 배가 목포항 대흥잔교(?)에 접안하여 여객선의 브릿지를 나설 때 짧은 순간 목포의 부둣가 전경과 수갑찬 모습의 시인을 강도나 절도의 파렴치범으로 쳐다보는 파지장의 가난하고 초라한 생선장수 아주머니들의 모습을 보고 이에 대한 시상을 <고행-1974>이라는 제목으로 1975년 2월 25일부터 27일 까지 3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발표하였는데 바로 이 옥중기와 인혁당 사건에 관한 기자회견 내용이 문제가 되어 반공법 위반혐의로 다시 체포 구속된 후 재판에 회부됨. 이때 옥중에서 양심선언 발표(훗날 이 양심선언은 고 조영래 변호사가 작성한 것이라고 시인은 양심 선언함) .
1974년 7월 민청학련사건(대통령긴급조치 제4호 공포)으로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긴급조치 4호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죄 등의 죄명으로 사형선고 받고 나중에 무기징역으로 감형. 첫아들 원보의 출생소식을 중앙정보부의 지하실에서 조사를 받던 도중에 알게 됨.
1974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민주사회건설협의회(의장: 송두율 교수)에 의해 김지하 시집이 독일어로 간행됨.
1975년 영등포교도소에서 출옥 후 2월25일 부터 27일까지 미국 일본 유럽 등지의 작가와 학자들에 의해 노벨 문학상과 평화상 후보에 추천됨.
1976년 반공법 위반 사건 재판에서 징역 7년 선고받음.
1979년 2월(?) 목포 북교등 성당에서 당시 주임신부의 용기와 자유에 대한 강한 의지로 <김지하 문학의 밤> 개최. 시인의 어머니 정금성 여사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소속 작가인 황석영, 조태일등 여러 문인들과 함세웅 신부 등 종교계 등 재야인사를 포함하여 시민 학생 100여명이 이곳 문학의 밤 행사에 참석하여 시 낭송회를 갖었는데 행사장 주변에는 사복 경찰관들의 경계로 삼엄한 분위기였음.
희곡으로 <나폴레옹 꼬냑>, <금관의 예수> 발표
1980년 형집행 정지로 석방됨.
1975년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로부터 제3세계 노벨 문학상으로 불리는 로터스 특별상 수상과 1981년 국제시인회의 위대한 시인상 수상, 브르노 크라이스키 인권상위원회의 인권상 수상, 1993년 이산 문학상 수상, 2002년 정지용 문학상 수상, 만해 문학상 수상, 대산 문학상 수상하였다.
시집으로는 <타는 목마름으로>, <大說 南>, <민족의 노래 민중의 노래>, <마침내 시인이여>, <이 가문 날에 비구름>, <별밭을 우러르며>, <꽃과 그늘>, <빈산>, <님>, <김지하의 화두>, <타는 목마름에서 생명의 바다로> 산문집으로는 <남녁땅 뱃노래>, <밥>, <나의 어머니>, <살림>, <생명>, <예감에 찬 숲 그늘>, <사상기행>, <사이버 시대와 시의 운명>, <생명과 자치>, <수묵시 화첩>, <붉은 악마와 촛불>, <모로 누운 돌부처>, <마지막 삶의 그리움>, <중심의 괴로움>, <지하의 묵란> , <생명과 자치>, <병든 바다 병든 지구>, <생명>, <동학 이야기> ,<생명학>, <미학사상>, <사회사상>, <철학사상> 강연 모음집 <율려란 무엇인가>등이 있다. 지금까지의 발표된 작품을 간추린 <김지하 전집>과 <김지하 회고록> 등 40여권의 작품집이 발표되었다.
예전 <五賊>이 발표된 1970년대 도둑놈 촌이라 불리는 동빙고동이 사회문제화 되었을 때 작가는 풍자와 해학으로 현실을 고발하면서 시인이란 본래 가난한 이웃들의 생의 한 복판에 서서 그들과 똑 같이 고통 받고 신음하며 가난한 이웃들을 희망과 결합시켜주는 역할과 사명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우리는 참된 시인을 민중의 꽃이라 부르기도 한다. 3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위정자들의 부정부패가 줄어들고 정경유착의 형태가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군사독재자들과 문민시대 역대 대통령들 자녀들의 봉건시대 황태자나 다름없는 부정축재 그리고 측근 비호세력들 역시 부패와 타락의 주범이 되어 글로벌 경쟁을 저해시킴으로서 국제언론으로 부터 세계인들의 비웃음거리가 된 사례에 우리 국민은 실망과 분노를 넘어 슬픈 냉소를 감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지금 IMF 때보다도 더 가혹한 경제적 시련과 대량실업 그리고 신용불량자 양산과 전통적인 가족제도 파괴와 인명경시 풍조를 만들어가고 있듯이 옛 <五賊>인 재벌, 국회의원, 장차관, 장성, 고급공무원의 부정부패 관행이 완전히 불식된 것이 아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정치적 삶과 문학적 삶을 하나로 통일시키려 했던 시인의 30년 詩的 편력을 모두 알 수 있는 작품 <五賊>은 시인의 개인사이면서 동시에 조국인 한국의 현대사이며 인류의 보편사를 담고 있어 권력이 스스로를 항상 반성하게 만들고 국민이 권력에 대해 항상 경각심을 갖도록 하는데 커다란 의의가 있다.
2003년 작가의 생명사상이 농축된「생명학Ⅰ,Ⅱ」(화남 刊) 출판 기념회가 서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환경재단 136포럼(이사장 이세중) 주최로 열렸다. 시인은 답사에서 "항상 잊지 않고 생각하는 것이 생명에 대한 모심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가까이 하고 사랑하는 민초학, 진정한 풍류를 더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백낙청 환경재단 포럼 공동대표는 인사말에서 "김 시인은 우리 시대의 화두를 계속해서 던져왔다"며 "그가 출옥해 생명학이라는 화두를 던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의아해 했지만, 돌이켜 보면 시대가 요구하는 화두를 일관되게 던진 것 이었다"고 말했다.
시인이자 철학자인 노겸 김지하의 궤적을 추적해 보는 것은 해방 이후 한국의 현대사를 반추하는 것임과 동시에 남한 思想史의 변화과정을 탐구하는 일이다.
폐결핵에 걸린 심약한 몸으로 한일협정 반대시위와 반유신 민주화 투쟁에 매진한 20대 초반을 거쳐 <五賊>과 <비어>, <타는 목마름으로>와 <황톳길> 등의 절창을 내놓으며 문학을 통한 인간해방에 기여한 20대 후반과 30대 초반 이후 동아일보에 발표한 옥중수기 <고행 1974...>로 재수감되기 까지 김지하는 박정희 유신과 대적할 몇 안 되는 상징적 대항마로 역할 했다. 이때까지의 시인은 파괴를 통한 새로운 세계의 건설을 꿈꾸던 청년 혁명가였다.
하지만 1980년 8년여의 투옥과 사형 등의 영어생활을 마치고 세상으로 나온 김지하는 달라져있었다. 이후 그의 행적은 이전과는 달리 진보진영에서조차 지탄을 받기도 했다. 1991년 이른바 분신정국에서 조선일보 지상에 발표한 칼럼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원제는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였다)"를 둘러싼 논란은 그 극단적인 예다.
20~30대 김지하와 40대 이후 김지하를 변별할 수 있는 잣대는 '혁명'과 '생명'. 무엇이 피 뜨거운 혁명가 김지하를 삶을 관조하는 생명사상가로 바꾼 것일까?
책은 김지하가 새로운 세기의 화두로 파악하고 있는 '생명' '평화' '상생'에 대한 깊이 있는 담론은 물론, 동서양의 생명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여기서 김지하는 유럽의 생태학과는 그 기반과 실천방식에서 대별되는 한국적 생명학을 설파한다.
겨울날 칼바람 같은 공포와 폭압의 독재에도 불구하고 봄은 1979년에도 왔다. 차가운 감옥바닥에서 맞이하는 봄. 극심한 고문 후유증과 밀실 공포증을 앓고 있던 시인에게 그 봄은 더 이상 희망의 상징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처참한 상황에서도 콘크리트 벽에 뿌리를 내리는 개가죽 나무에서 시인은 바로 거기서 생명을 봤고 깨달음인 생명사상을 얻었다고 한다.
서슬 퍼렀던 우리 현대사의 암흑시대(Dark Age)에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본 김지하를 그의 회고록에서 옮겨보면
「반민족적 비민주적 민족주의 장례식」에 부친다는 조사(弔辭)
시체여! 너는 오래전에 이미 죽었다. 죽어서 썩어가고 있었다. 넋없는 시체여! 반민족적, 비민족적, 민족적 민주주의여! 썩고 있던 네 주검의 악취는 「사꾸라」의 향기가 되어, 마침내는 우리들 학원의 잔잔한 후각(嗅覺)이 가꾸고 사랑하는 늘푸른 수풀 속에 너와 일본의 이대잡종(二代雜種), 이른바 사꾸라를 심어놓았다……시체여! 죽어서가지도 개악(改惡)과 조어(造語)와 금언(金言)과 번의와 난동과 불안과 탄압의 명수요 천재요 거장이었다. 너, 시체여! 너는 그리하여 일대의 천재(賤才)요 희대의 졸작 이었다…… 시체여! 반민족적 비민주적 민주주의여! 석학(碩學)의 머리로서도 촌부(村夫)의 의식으로서도 난해하기만 한 이즘이여! 너의 정체는 무엇이냐? 절망과 기아로부터의 해방자로 자처하는 소위 혁명정부가 전면적인 절망과 영원한 기아 속으로 민족을 함몰시키기에 이르도록 한 너의 본질은 과연 무엇이었드냐? 무엇이드란 마리냐? 말하지 않아도 좋다. 말 못하는 시체여! 길고 긴 독재자의 채찍을 휘두르다가 오히려 자신의 치명적인 상처를 스스로 때리고 넘어진 너, 박의장(朴議長)의 이른바 민족적 민주주의여! 너의 본질은 곧 안개다!
어느 봄날 새벽의 안개 속에서 튀어나온 너, 안개여, 너는 안개 속에서 살다가 안개 속에서 죽은, 우유부단과 정체불명의 조삼모사(朝三暮四)와 동서남북의 상징이요, 혼합물질이었다. 한없는 망설임과 번의, 종잡을 길 없는 막연한 정치이념, 끝없는 혼란과 무질서와 굴욕적인 사대근성, 방향 감각과 주체의식과 지도력의 상실, 이것이 곧 너의 전부다. …… 시체여! 고향으로 돌아가라! 우리 삼천만이 모두 너의 주검위에 지금 수의(壽衣)를 덮어주고 있다. 들리느냐? 너의 명복을 비는 드높은 목소리, 목소리들이. 이미 죽은 네 육신과 정신으로는 결코 반공도 재건도 쇄신도 불가하다는 저 민족의 함성이 들리지 않느냐? 저 통곡이 들리지 않느냐?…… 그러나 시체여! 지금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지금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지금 너는 무엇을 획책하고 있는가? 바로 지금 거기서 네 옆 사람과 후딱 주고받은 그 입가의 웃음을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 대량검거의 군호(軍號)인가? 최루탄발사의 신호인가?
나는 숨이 막혀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이전에도 아니 그 이후에도 이것만큼 통렬하게 5․16 혁명정부를 비판한 글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이 글의 필자가 누구인지 알아 냈오.』나는 간신히 말했다.
배석하고 있던 제3국장 전재구와 제1국장 김영민 등은 나의 표정에 나타난 변화에 당황하고 있었음인지 흠칫 놀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네, 알아냈습니다.』
『누구요? 그 학생이.』
『문리대 미학과(美學科)에 재적중인 김영일이란 학생입니다.』
『김영일이라…』
『전라도 목포출신이고 김지하(金芝河)라는 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포출신 김지하라…… 그 친구 연행해왔오?』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왜?』
『데모가 끝나기도 전에 어디론가 도주해 버렸습니다. 계속 눈을 떼고 있지 않았는데 슬그머니 일어나는 걸 따라 잡으려하다 혼란 통에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친구 숙소를 급습해 보았나?』
『김지하는 집도 절도 없는 가난뱅이 학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도 어디선가 잠은 잘 것 아닌가?』
『아무데서나 자고 다닌답니다. 여름이면 학교 캠퍼스에 있는 벤취에서 자고 겨울이면 교수들의 연구실 구석에서 자기도 하고. 그래서 자기 스스로를 바람 먹고 구름 똥 싸는 사나이라고 한답니다.』
『게 무슨 말이오?』
『풍운아(風雲兒)라는 말을 익살맞게 풀어서 그렇게 쓰는 모양입니다.』
『풍운아라……』( 김형욱․박사월<1985>, 김형욱 회고록 2부, 아침)
지하라는 필명을 갖게된 사연은 5. 16 군사 쿠데타 뒤 스물두 살 때다. 그 때 작가는 서울 동숭동 대학로 캠퍼스인 문리대 미학과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학교 앞에 학림이라는 음악다방이 하나 있었는데 그 다방에서 작가의 詩畵展이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때는 여름이었는데 한 가지 문제는 본명이 金英一인데 문단에 이미 같은 이름의 문사들이 여럿 있었다. 당시 서울대 학생이 개인 시화전을 여는 것은 마치 시집을 한 권 내는 것만큼 준문단적, 혹은 준준문단적���사건이었는지라 아무래도 필명(筆名)이 하나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어느 날 동아일보사에서 일하던 한 선배가 점심때 소주를 사줘서 실컷 먹고 잔뜩 취해 가지고 동숭동 대학가의 아지트였던 바로 그 음악다방으로 가려고 호주머니를 뒤지니 돈도 버스표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걷기로 했다. 여름 한낮의 태양은 뜨겁고 술은 오를 대로 올라 비틀거리며 종로 길을 갈지자로 걸어오던 때다. 그 무렵 막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 있었는데, 요즘에도 흔한 것이지만 길가에 자그마한 입간판이 주욱 늘어선 것이다. 다방, 이발소, 이용실 등의 입간판인데 술김에도 괴상하게 여긴 것은 그 간판 위쪽에 다 똑같은 자그마한 검은 가로 글씨로 모두 한글로 지하라고 하나같이 써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지하실에 다방, 이발소, 이용실이 있다는 얘긴데 왜 하필 그 글자만은 유독 똑같은 한글, 똑같은 검은 글씨로 맨 위쪽에 가로로 조그맣게 써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똑같은 것들이 여기도 지하���저기도 지하���저기만큼 가서도 또 지하, 지하, 지하������! 그야말로 도처에 유(有) 지하였다. 옳다! 저것이다! 저것이 내 필명이다!���이렇게 된 것이다 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목포에서 태어나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낸 시인은 억압과 굴종의 상황 속에서 결코 꺾이지 않고 온몸으로 의연히 저항하면서도 <五賊>과 <蜚語>같은 민족적 대서사시를 통해 민족문학의 금자탑을 쌓았고 당시의 부조리한 현실적 상황을 고발하고 핍박받는 민중의 아픔을 시로써 노래한 풍자와 참여 시인이자 민중 시인으로서의 시인의 올곧은 삶의 궤적을 추적하는 가운데 우리 스스로가 보다 향상된 사회와 가치문화를 계승․창조하자는 뜻에서이다.
시인은 조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염려와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였기 때문에 70․ 80년대부터 독재 권력에 맞서 자유의 증언을 계속해온 양심적인 행동이 때론 반독재 투쟁을 독려하는 선동가의 모습으로, 판소리 가락을 현대시어로 되살린 탁월한 시인의 음성으로, 또 영성 운동의 전도사로, 서양의 합리주의 전통과 동양의 인본주의 정신을 조화시키려는 사상가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다가와 시와 행동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에서 억압으로 고통 받는 이웃들에 대해 민주주의의 도래를 확신시켜 주었고 더 나아가 새로운 환경운동과 생명사상으로 깊은 사랑의 실천과 업적을 보여주었다.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비켜갈 수 없는 시인이자 한국 현대정치․사회사를 이해하는 길목에서 어김없이 만나게 되는 시인을 재조명함으로써 파란과 곡절 많은 정치사를 거쳐온 한국인의 고뇌를 보는 듯하지만 바로 이 같은 실천적 고뇌가 우리나라의 올바른 문학정신과 민주화에 대한 로드맵을 다져주었다고 생각한다.
한국현대문학 100년사 에서도 시인은 비켜갈 수 없을 만큼 우리문학사에서 거목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또 거대 담시라는 새로운 장르 형태를 보여줄 정도로 독특한 시와 생명사상의 담론으로 1970․80년대 우리사회에 늘 새로운 화두의 지평을 제시해준 "잠수함 속의 토끼" 같은 창대한 숲이기도 하다.
그 숲 그늘 속에는 태고와 현대,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철학 역사 미학 종교를 아우르고 있다. 작가는 고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습작 형태의 시를 써왔는데 초현실주의 경향의 작품에서부터 참여적인 경향의 실로 다양한 장르의 문학을 두루 섭렵하여 발표하고 있다.
풍자나 저항의지가 강한 이런 사상적 영향을 심어준 것은 유․소년기 고향 목포에서의 보도연맹사건, 서북청년단의 극우적 활동 형태, 목포형무소 탈옥사건, 한국전쟁 등으로 이어진 현대사의 격동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체득한 경험이나 재학시절 친구들과 토론, 대화, 독서 등이 상호작용을 한 것이라고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다.
시인의 출사표가 된 고향 목포와 관련된 작품 몇 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1 ) 황톳길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두 손엔 철삿줄
뜨거운 해가
땀과 눈물과 모밀밭을 태우는
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 속으로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밤마다 오포산에 불이 오를 때
울타리 탱자도 서슬 푸른 속니파리
뻗시디 뻗신 성장처럼 억세인
황토에 대낮 빛나던 그날
그날의 만세라도 부르랴
노래라도 부르랴
대샆에 대가 성긴 동그만 화당골
우물마다 십 년마다 피가 솟아도
아아 척박한 식민지에 태어나
총칼 아래 쓰러져간 나의 애비야
어이 죽순에 괴는 물방울
수정처럼 맑은 오월을 모르리 모르리마는
작은 꼬막마저 아사하는
길고 잔인한 여름
하늘도 없는 폭정의 뜨거운 여름이었다
끝끝내
조국의 모든 세월은 황톳길은
우리들의 희망은
낡은 짝배들 햇볕에 바스라진
뻘길을 지나면 다시 메밀밭
희디흰 고랑 너머
청천 드높은 하늘에 갈리든
아아 그날의 만세는 십 년을 지나
철삿줄 파고드는 살결에 숨결 속에
너의 목소리를 느끼며 흐느끼며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작품 배경) 목포에서 배를 타고 30여분 정도 넓은 서․남해 바다로 나가면 해남화원반도 앞 등대가 보이는 곳이 시아 바다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화합 차원에서 보도연맹 가입자에게 자수를 권유하였다. 그러나 자수자에게 대참극 가해졌듯이 목포에서도 1949-1950년 사이 보도연맹 가입 후 자수한 이들에게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두 손에 철사 줄로 묶어 해군 LST함정에 태운 다음 밤바다에 수장시켰다. 이때의 시신들은 물 따라 지금의 영산강 하구언 언덕까지 떠밀려오고, 유년기의 소년은 꽁치를 쫓는 밍크고래를 구경하기 위해 하구언 바닷가에 나갔다가 물고기가 파먹은 이 끔찍한 시신을 유년의 추억으로 간직한 후 성년이 되어 황톳길이라는 시로 표현하였다.
우리 민족 최대 비극인 보도연맹 사건과 6.25전쟁 그 과정에서 빚어진 편협하고 왜곡된 이데올로기로 인하여 목포에서도 이웃 간에 증오와 학살 등이 자행된 사건들을 기록한 시가 황톳길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영원히 지우고 싶을 만큼 아프고도 슬픈 질곡의 역사를 유․소년의 눈으로 보았던 당시의 역사적 사실들을 회상하여 꼼꼼하고 정직한 역사가의 안목으로 증언한 목포 지역의 최초 비극의 현대사이기도 하다.
시인의 작품이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오르면서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 그리고 목포교도소 탈옥사건은 서로 맞물려있는데도 오늘의 우리 역사는 그런대로 진상이 규명되어 위령탑도 세우고 추모 행사 때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도 참석하여 국가권력의 부당성을 공식 사과할 정도의 전국적인 행사가 되어 다시는 이런 슬픈 역사가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역사의 교훈을 전해주고 있건만 이곳 목포에서는 아직 착수조차 못하고 있다.
당시의 상황을 시인은 이렇게 적고 있다.
어머니와 나는 바로 그날 저녁 무렵 차남수 방죽과 일로를 지나 갓바위 호풍이네 과수원을 지나가게 되었다. 노을 무렵의 과수원 숲길, 붉은 햇살에 빛나는 짙푸른 나뭇잎 새들의 그 이 세상 빛깔 같지 않은 기이한 그늘! 그 아래 짙어지는 황톳길의 우중충한 흙빛깔! 집으로 돌아가며 우짖는 새들과 갓바위 바로 밑물 위로 뛰어오르는 돌고래 떼 위에서 번뜩이는 저녁햇살, 멀리 벽돌섬 붉은 기슭 너머로 푸륹 영암 월출산과 흰 돛단배들. 갓바위에서 소픙놀이 했던 소중한 기억을 떠올리며 어머니와 나는 바삐 숲을 지나고 하당도 지나 첫 별이 돋을 무렵엔 부엉산 밑에 이르렀다. 부줏머리 입구가 보이고 그 건너 둥구섬의 검은 모습이 요요히 물위에 떠 있었다.
부줏머리! 나의 맨 첫 번 시로 알려진 <황톳길>의 배경이다. 영산강가의 작은 마을 바로 이웃한 오감리가 경찰관 몇 사람 출신지역이어서 우익 동네로 찍힌 데 비해 부줏머리는 공산당에 친척 몇이 연줄이 있어 좌익 동네로 꼽혔었다. 실제로 두 동네 사이에 보복극이 있었다. 언젠가 한 번 오감리 입구의 감나무 밑에 갓난아기 송장이 가마니에서 삐죽이 나와 있는 것을 보았고, 부줏머리 갯가에서 또 가마니 엎인 송장을 본 것 외에 부줏머리 학살극을 본 적은 없다. 그러나 어른들은 쉬쉬하면서도 두 동네가 철천지 원수지간이란 말을 터놓고 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
산천에도 역사가 있다. 인간의 피비린 비극이 있어온 산천, 그리고 있게 될 산천은 다른 산천과 달리 음산한 기운이 가득 서리는 법이다. 풍수가 묘자리나 찾는 유복한 사람들의 호사스런 취미만은 아니다. 인간과 자연을 일치시켜 파악하는 초생태학으로 거듭나야 할, 기막히게 효력 있고 놀랍도록 심오한 학문이 곧 풍수학인 것이다.
물론 내가 풍수를 아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어린애였다. 그러나 뭐라 할까? 그저 단순한 기감이라 할까? 어둑어둑한 초저녁 땅거미 속에서 드러나는 부엉산과 부줏머리 입구의 밭길과 검은 둥구섬, 검푸른 영산강과 먼 월출산의 시커먼 그림자를 처음 바라보는 내 마음에 어떤 스산함과 기괴한 불길함이 가득 찼던 것을 지금도 기억한다. 마치 에드거 앨런 포우의 작품에서처럼 산천 자체가 비극으로 느껴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첫 느낌의 연장선 위에 나의 시 <황톳길>의 이미지 체계가 서 있다. 죽음과 반역의 땅, 부줏머리! (김지하<2003>, 흰 그늘의 길1, 학고재)
( 2 ) 성자동 언덕의 눈
지금도 너는 반짝이느냐
성자동 언덕의 눈
아득한 뱃길 푸른 물굽이 굽이 위에
하얗게 날카롭게
너는 타느냐
산 채로
산 채로 묻힌 붉은 흙을 해치고
등에 칼을 꽂은 채 바다로 열린 푸른 눈
썩은 보리와 갈리진 논바닥이 거기서 외치고
거기서 너의 비탄은 새파란
불꽃으로 변한다 너는 타느냐
마주한 저 월출산 아래 내리는
저 용당리 들녘에 내리는 은빛
비행기의 은빛 비늘의 눈부심, 독함 눈부심 위에
아아 푸른 눈
침묵한 아우성의 번뜩임이 거기서 타느냐
지금도 너는 반짝이느냐
성자동 언덕의 눈
하얗게 날카롭게 너는 타느냐.
( 3 ) 비녀산
무성하던 삼밭도 이제
기름진 벌판도 없네 비녀산 밤봉우리
외쳐 부르던 노래는 통곡이었네 떠나갔네
시퍼런 하늘을 찢고
치솟아 오르는 맨드라미
터질 듯 터질 듯
거역의 몸짓으로 떨리는 땅
어느 곳에서나 어느 곳에서나
옛이야기 속에서는 뜨겁고 힘차고
가득하던 꿈을 그리다
죽도록 황토에만 그리다
삶은 일하고 굶주리고 병들어 죽는 것
삶은 탁한 강물 속에 빛나는
푸른 하늘처럼 괴롭고 견디기 어려운 것
송진타는 여름 머나먼 철길을 따라
그리고 삶은 떠나가는 것.
아아 누군가 그 밤에 호롱불을 밝히고
참혹한 옛 싸움에 몸바친 아버지
빛바랜 사진 앞에 숨죽여 울다
박차고 일어섰다
입을 다물고
마지막 우러른 비녀산 밤봉우리
부르던 노래는 통곡이었네 떠나갔네
무거운 연자매 돌아 해가고
기인 그림자들 밤으로 밤으로
무덤을 파는 곳
피비린내 목줄기마다 되살아오르고
낡은 삽날에 찢긴 밤바람
외쳐대는 곳
여기
삶은 그러나
낯선 사람들의 것
( 4 ) 서울길
간다
울지 마라 간다
힘 고개 검은 고개 목마른 고개 넘어
팍팍한 서울길
몸 팔러 간다
언제야 돌아오리란
언제야 웃음으로 화안히
꽃피어 돌아오리란
댕기 풀 안스러운 약속도 없이
간다
울지 마라 간다
모질고 모진 세상에 살아도
분꽃이 잊힐까 밀 냄새가 잊힐까
사뭇 사뭇 못 잊을 것을
꿈꾸다 눈물 젖어 돌아올 것을
밤이면 별빛 따라 돌아올 것을
간다 울지 마라 간다]
하늘도 시름겨운 목마른 고개 넘어
팍팍한 서울길
몸팔러 간다.
(작품배경) 1960년대 초부터 산업화 도시화로 인해 특히 가난한 전라도 농어촌 출신의 소년 소녀가 보릿고개의 배고픔을 벗어나기 위해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이 정들었던 부모형제와 고향의 산언덕을 뒤로 한채 공장 밀집지역인 수도권과 영남지역으로 향했던 이촌향도 현상을 목가적 슬픔으로 그리고 있다. 이들 노동자들은 도시에서 공장지대의 도시근로자 계급을 형성하였고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시간은 주당 48시간에서 53시간으로 우리 나라가 ILO기준 세계최고의 장시간 노동이라는 불명예를 안겨주는 오명을 받기도 하였다. 작가는 우리의 공업화 과정에서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몰려들었으나 산업재해 등의 사고로 밀물저간 노동자들의 비극적 삶에 대해서는 <蜚語>에서 安道라는 이름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이 웬짓들이란 말이냐
헐벗고 굶주리고 죽도록 일했는데
매맞고 억눌려도 말 한마디 안했는데
쉬지도 눕지도 잠들지도 못했는데
어허 이것이 웬짓이여
내가 무슨 죽을 죄라
이리도 벌이 모질드란 말이냐
“날아가는 기러기야
너는 내 속을 다 알리라
수수 그림자 길게 끌린 해설핀 신작로 가에
우리 어메 날 기다려 상기도 거기 서 계시더냐
철지난 옷을 입고 몇번이나 몇번이나
서울쪽 바라보며 소리없이 우시더냐
아아 어머니
고향에 돌아가요
죽어도 나는 돌아가요
천갈래 만갈래로 육신 찢겨도 나는 가요
죽음 후에라도 기어이 돌아가요
저 벽을 넘어
저 담을 넘어
怨鬼되어 저 붉은 벽돌담을 끝끝내 뚫고 넘어
가요 어머니
죽음 후에라도 기어이 돌아가요 .........”중략
여기에서는 농촌의 피폐화를 미리서 예견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암울했던 시대 정직한 사명감의 시인은 잠수함속의 토끼가 되어야만 했을까?
<五賊>에서도 전라도 농촌에서 흔히 쓰는 꾀수라는 기이한 이름을 등장시켰다.
“때는 노을이라.
서산 낙일에 客愁가 추연한데
외기러기 짝을 찾고 쪼각 달 희게 비껴
강물은 붉게 타서 피 흐르는데
어쩔거나 두견이는 설리설리 울어 쌌는데 어쩔거나
콩알 같은 꾀수 묶어 비틀비틀 포도대장 개트림에 돌아가네
어쩔꺼나 어쩔거나 우리 꾀수 어쩔거나
전라도서 굶고 살다 서울와 돈번다더니
동대문 남대문 봉천동 모래내에 온갖 구박 다 당하고
기어이 가는구나 가막소로 가는구나
어쩔거나 억울하고 원통하고 분한 사정 누가 있어 바로잡나
잘가거라 꾀수야
부디부디 잘가거라.
꾀수는 그 길로 가막소로 들어가고 .....”중략에서 처럼 당시의 가난한 보통 사람은 한을 안고 태어나 평생을 한속에서 살아가는 민중들의 삶을 나타내고 있다. 6․70년대 도시노동자들의 삶에 대해서는 조세희의 <난쟁이가 쌓아올린 작은 공>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서구 선진국이 산업화로 진입하는데 2․300년의 긴 역사의 시간을 필요로 했으나 우리 나라는 이들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개발독재와 함께 2․30년 만에 산업화의 도약국가로 성장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해외로는 달러를 획득하기 위해 우리의 젊은 근로자들이 독일에서는 간호사와 광부로 열사의 나라로 알려졌던 중동 지역에서는 노동자로 파견되어 장시간의 노동시간과 저임금의 열악한 근무조건 아래서도 국가경제를 재건하는데 일익을 담당함으로써 외화획득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이들 노동자가 음지에서 감내해야 했던 핍박과 억울함과 부당노동행위 등을 시에서 풍자와 해학으로 고발하였다.
( 5 ) 용당리에서
용당리에서의 나의 죽음은
출렁이는 가래에 묻어올까, 묻어오는
소금기 바람 속을
돌 속에서 흐느적거리고 부두에서
노동자가 한 사람 죽어있다
그러나 나의 죽음
죽음은 어디에,
무슨 일일까 신문지 속을 바람이 기어가고
포래포래마다 반짝이는 내 죽음의
흉흉한 남쪽의 손금들 수근거리고
해가 침몰하는 가래의 바다 저 끝에서
단 한번
짤막한 기침 소리 단 한번.
그러나 용당리에서의 나의 죽음은
침묵의 손수건에 묻어올까
난파와 기나길 노동의 부두에서 가마니 속에
노동자가 한 사람 죽어있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
작은 손이 들리고
물 위에서 작고 힌 손이 자꾸만
나를 부르고.
( 6 ) 山亭理 日記
나를
여기에 묶는 것은 무엇이냐
뜨거운 햇발 아래 하얗게 빛날 뿐
고여 흐르지 않는 둠벙 속에 깊이 숨어
끝끝내 나를 여기에 묶는 것은 무엇이냐
눈부신 붉은 산비탈
간간이 흔들리는 흰 들꽃들조차
가까이 터지는 남포 소리조차 아득히 멀고
흙에 갇힌 고된 노동도 죽음마저도
나를 일깨우지 않는다.
흐린 불빛이
가슴을 누르는 소주에 취한 밤
목쉬인 노래와 칼부림으로 지새우는 모든 밤
뜬눈으로 지새우는 알 수 없는 몸부림에
기어이 나를 묶는 것은
아아 무엇이냐 무엇이냐
깨어 있지도 잠들지도 않는
끝없는 소리 없는 이 어설픔은 무엇이냐
밤마다 취해서 울던
붉은 눈의 海州 영감은 죽어버렸다
열여섯 살짜리 깨곰보도
취한 채 잠을 이루지 못한다.
어디에 와 있는 것이냐
나는 살아 있는 것이냐
무딘 느낌과 예리한 어둠이 맞서
섞이지 않는다 부딪히지도 않는다
또다시 시퍼런 새벽이 온다
남포가 터진다
흙차가 돌아간다
나는 흙 속에 천천히 깊숙히
대낮 속에 새하얀 잠의 늪 속에 빠져들어간다
이것이 대체 무엇이냐
( 7 ) 고행 -1974
나는 작년 4월 25일 새벽 흑산도에서 체포되었다.
나 자신도 조감독으로 참가한 영화 ‘청녀’의 촬영반이 투숙하고 있던 대흑산 예리 관광여관에서였다. 목포경찰서 흑산 지서의 민 경사는 정중한 인사를 한 뒤, 내 두 손에 수갑을 채웠다. 음울하고 황막한 바다를 내내 나는 넋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서 지나왔다.
그러나 배가 목포항에 도착했을 때 내귀에 문득 계면조의 대금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에 빠져 들어갔다. 10여 년을 그리던 고향, 그 고향에 나는 수갑을 찬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얼마나 그리던 유달산의 모습이었던가! 그리고 얼마나 초라한 내 모습이던가! 가슴 저 밑바닥에서 갑자기 오열이 터져 올라왔다. 내 시의 어머니. 굽이굽이 한이 얽힌 저 핏빛 황토의 언덕들. 사잣밥을 주워 잡수시던 할머니의 갈퀴 같은 손. 굶어 죽은 내 조카 진국이의 시체를 묻으며 뻘밭에 이마를 짓찧으시던 외할아버지의 통곡. 대창을 휘두르며 비녀산을 내려오던 뚜갱이의 그 핏덩어리 같은 두 눈. 생매장당한 아버지를 찾기 위해 캄캄한 밤, 송장들마다 들치며 소리죽여 울던 창남이의 모습. 아아 그 고향에 나는 수갑을 찬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가까스로 울움을 참으며 브리지를 내려설 때, 나는 그러나 파지장에 몰켜선 수많은 생선장수 아주머니들의 그 삶에 지치고 볕에 그을린 얼굴들 속에서, 수갑 찬 나를 강도나 절도로 파악하는 얼굴들, 그리하여 자기들과 똑같이 헐벗고 굶주리고 팔자 사나운 놈으로 생각하는 그 얼굴들 속에서 비로서 나의 귀향을 맞이해 주는 고향의 뜨거운 인사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나는 이제야 내 고향에 돌아온 것이다. 이제야 내 핏줄에 다시금 떳떳이 복귀한 것이다.
저주받은 땅 전라도의 아들답게 수갑을 차고, 천대받은 사람들 ‘하와이’의 시인답게 한과 미칠 듯한 분노와 솟구치는 통곡을 가슴에 안고, 10여 년 전 옛날과 똑같은 낡고 먼지 이는 그 가난한 거리에 못난 아들이 이제야 돌아왔노라 인사를 드리면서 나는 서서히 내 가슴속에 미소가 돌아오고 있음을 느꼈다.
(작품배경) 고행이라는 옥중기는 인혁당 사건의 기자회견 내용과 관련되어 반공법 위반 혐의로 시인이 다시 구속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중죄인처럼 취급되어 수갑을 찬 채로 배를 타고 흑산도에서 목포 유달산이 올려다 보이는 목포항 대흥잔교(?)에 이르는 긴 바다의 여정 속에서 여객선이 목포항에 도착했을 때 시인은 먼지가 이는 길거리 한 켠에 바구니나 생선 다라에 고기 몇 마리를 담아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옹기종기 앉아있는 가난하고 초라한 생선장수의 아주머니들의 구리 빛 얼굴 속에서 우리 어머니들의 한과 다정한 이웃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 즉흥적으로 작성한 한의 내용인데 부둣가에서 오고간 얘기를 시인은 이렇게 회상 하고 있다.
원두와 제작진 및 아는 스태프들과 작별을 하고 부두로 올라서는데 그곳에 몰려섰던 군중들 속에서 여러 소리가 쏟아졌다.
“옴메, 못 보던 얼굴인디.....”
“신인이랑게! 신인이여!”
“뭔 배우가 저렇게 쬐죄죄 다냐?”
“독립투사여! 독립투사!”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잘난 체하고 미소를 보낼 수도, 그렇다고 잘못한 체하고 고개를 숙일 수도 없었다. 어물쩍 속히 빠져나와 대기하던 경찰차를 타고 목포경찰서로 향했다.
이때 떠오르기 시작한 아버지의 영상! 그리고 그 숱한 민중들의 이미지! 아, 나는 혹시 잘못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영웅주의는 아닌가? 잘 가고 있는 것인가? 기침, 끊임없이 기침이 터져 나왔다. 목포서 정보과장이 흐뭇이 웃으며 말했다.
“귀향을 축하합니다. 그 수갑 좀 얼른 끌르랑꼐!”
나는 가까스로 미소를 지엇다.
“어디 잘 아시는 음식점 있는가요? 우리가 밥 한 끼는 대접해야 예의잉께, 잉.“
“상해식당 자장면이오.”
정보과장은 또 흐뭇이 웃으며 말했다. “입맛은 변함없지라우, 잉.”
그렇게 심한 기침 속에서 자장면 한 그릇을 마저 다 못 먹고 출발하여, 그 무렵에 운행되기 시작한 고속버스를 탔다. 호송하는 두 경관은 권총을 찼고 내 손의 수갑은 소매 속으로 감추어 졌다. 그 경관이 호의를 배풀어 서비스했다. 고향의 인사엿다. 그날 신문이었다. 신문에는 수십 명의 민청 지도부와 인혁당 관계자들의 얼굴이 계보에 그려져 나와 있었다. 그 중 얼른 눈에 띄는 게 조영래 아우의 얼굴이었다. 아아! 만사 다 끝났다! 그 순간부터 깊은 잠에 빠져 들엇다. 깊고 깊은 지옥의 잠! 눈을 떳을 때는 서울이었다. 나는 그날로 정보부 6국으로 들어갔다.
Ⅴ. 맺는 말
목포는 다른 지역에 비해 유달리 눈물과 한숨이 많은 곳이다. 노령산맥 마지막 등줄기로 유달산 일등바위에서 서남해의 다도해를 조망해 보면 목포역과 여객선터미널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가운데 이별의 눈물이 더해져서 큰비가 오면 영산호와 목포항 앞 바다의 푸른 물이 흘러넘친다고들 한다.
유달산 아래 노적봉이라는 바위산은 임진년에 원혼이 된 조선수군과 민족의 한을 간직한 채 지금도 유장함과 도도함으로 목포항을 굽어보고 있으며 산 중턱 바위에 음각된 목포의 눈물 이난영의 노래비는 작사자 문일석의 가사와 함께 지금도 청호의 넋처럼 목포의 설움을 간직한 듯 처연하고 애상적인 목소리로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는데 최승구와 나혜석, 부용산에 얽힌 비련의 사례를 소개한다. 육당과 춘원이 우리문학을 주도하던 1910년 2인 문단시대에 비슷한 수준의 시를 썼던 최승구(1892-1917) 역시 목포와 인연을 갖고 있다. 보성전문학교를 거쳐 일본의 게이오대학 예과에 입학한 1915년께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면서 『학지광』4호에「벨지엄의 용사」를 발표했다. 소월이라는 필명을 쓴 까닭에 문학 연구자들도 한때 소월 김정식과 혼동하기도 했지만 1972년 동아일보와『주간조선』에 기사화되면서 그의 존재가 비로소 일반에 알려졌다.
최승구는 동경유학 시절 나혜석과의 사랑으로 유학생 사회에서 큰 화제를 일으키지만 폐결핵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고흥 군수이던 둘째 형 집에서 요양 중 스물다섯 살에 요절하자 나혜석은 발광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는다. 나혜석은 몇 해 뒤에 변호사 김우영의 청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몇 가지 조건을 내세우는데, 이 가운데 하나가 목포에 있는 최승구의 무덤에 빗돌을 세워주고 함께 참배할 것을 요구한다. 나혜석이 최승구를 얼마나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했는지를 짐작케 하는 일화다. (장석주<2000>, 한국 문학의 탐험1, 시공사)
목포여고 교정과 벌교에 세워진 부용산 노래비는 우리 현대사의 질곡만큼 가슴 아픈 사연을 담고 있다. 작사자 박기동의 여동생이 폐결핵으로 순천 도립병원에서 입원치료 중 스물네 살로 죽기 전 벌교의 부용산에 묻어 달라고 오빠에게 유언하여 부용산 언덕에 묻고 내려오다가 시상이 떠올라 창작했다는 주장과 경기여중에서 목포 항도여중(목포여고 전신)으로 전학 온 문학소녀로 책을 많이 읽어 조숙하고 늘 수석을 유지할 정도의 성적으로 최고였던 김정희라는 학생이 3학년 때 폐결핵으로 죽어 전교생이 슬품에 잠겼고 이를 비통히 여긴 박기동 시인이 시로 표현하였다는 것이 부용산이다.
당시 같은 학교 음악교사였던 안성현(전설적 무용수 최승희의 남편 안막의 조카로 월북 후 2006년 북한에서 사망하였고 남한에 있던 부인은 생존하고 아들은 병사 함)이 작곡하여 지리산 빨치산들이 애송했던 관계로 50년간 금지곡이 된 부용산은 한국 가요사에서 특이한 전력을 갖고 있다. 금년 6월에 나주시가 주관하여 그의 고향 남평 드들강 수변공원에도 안성현 노래비가 세워져 그의 예술혼을 추모하고 있다.
박기동 역시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좌경이라면 좌경시인일 수 있겠다”는 체념어린 단정으로 시 창작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계속되는 가택 수색과 연행ㆍ구금을 당하다 2002년 작고했다.
부용산이 작곡되기 까지는 당시 항도여중 교장 조희관(1905-1958)의 역할이 컸고 그는 수필문학에도 남다른 열정을 과시하였다.
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에 곡을 붙인 안성현은 인천상륙작선 이틀 전 1950년 9월15일 최승희의 딸 안성희가 광주에 이어 목포에서 무용발표회를 하던 것을 끝으로 목포와 영원한 이별을 한다.
부용산 (박기동 작시/안성현 작곡)
1.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2.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없고
돌아서지 못한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2절 가사는 53년 만에 호주에서 작사)
이런 비운의 사연들을 목포앞 바다를 오가는 갈매기들은 아는 듯 수면 위를 날개쳐 오르고 찬란한 오색천을 나부끼며 황시리 돛단배 위에 누군가 청포를 입고 찾아오기를 기대했던 목포다.
목포는 이런 유무형의 예술적 영감을 더하면서 천혜의 복된 땅으로 마한에서 백제를 거쳐 고려 조선으로 흐르는 동안 정신적 미감을 휘어도는 무지개 빛처럼 꿈을 키워 왔다.
목포를 거쳐간 이들의 삶의 역정과 흔적들은 수려학 유장한 목포의 명품 유적 보태는 일이다. 이 고장의 문학 예술인들의 재능에서 피어난 우리의 민족혼들은긴 세월과 함께 앞으로도 영산강폭에 수량을 더해 큰 울림으로 파문지게 될 것이다. 그리스 로마의 문화유적이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 풍요를 만들어 가듯이 목포의 근현대 유물과 유적이 목포를 찾는 수많은 사람들의 미감과 감탄을 자아내는 상징으로 자리 자리매김 될 떄 영산호의 풍광을 아우르면서 서남해의 드넓은 해양으로 나아갈 것이다. 집념 푸른 시인 묵객들이 스쳐간 흔적들은 목포에서 하늘의 별무리와 지상의 꽃들로 새롭게 피어날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표현처럼 본질을 바로 알고 나면 시각이 달라지듯 이번 문학기행으로 목포를 처음 방문한 선생님들께 일상의 항구 도시같이 정제되지 못한 거친 투어와 저항의 도시에서 인문학과 예술이 공존하는 문화의 도시로 거듭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인식의 전환을 형성하는데 작은 출발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