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릉에서 출토된 금동 갑옷 조각>
<고조선의 철로 만든 고기비늘 모양의 갑옷 조각>
< 주변국과의 비교로 부터 본 고구려 복식의 고유양식과 정체성 인식> 저는 중국고대사를 전공하면서 고대의 한국과 중국 및 북방지역을 비교해왔습니다. 그 결과 한민족의 문화와 중국이나 북방지역의 문화는 발생 초기부터 서로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고, 그 높낮이에서 고대의 한국이 중국이나 북방지역보다 훨씬 우수한 수준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간 우리 문화 특히 복식에 관한 연구들을 대하면서 우리 복식문화의 원형이 중국이나 북방지역의 영향으로부터 이루어졌다는 내용에 매우 혼란을 느꼈고 큰 모순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의 고대 복식을 중국이나 북방계통으로 보는 가장 중요한 근거였던 여밈새에 대해 종래의 잘못된 견해들이 갖는 모순을 검토하는 작업에서 출발하여 한민족 복식 전반에 걸쳐 그 원형을 복원하는 연구에 전념해 왔습니다. 한민족의 복식이 갖는 고유한 원형은 한국의 고대사회, 특히 고조선에서 찿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고조선의 복식과 이를 계승한 고구려의 복식을 알지 못한다면 한민족의 복식을 바르게 인식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저는 앞으로의 글에서 바로 한민족의 고대 복식의 내용들 가운데 고조선시대로 부터 지속되어 고구려로 계승된 고유한 양식들을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흔히 한민족의 복식이 세계적인 우아함을 지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찬사와 자부심에 앞서 전통문화의 正體를 바르게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 같은 한민족의 전통문화를 잘 지키고 발전시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한민족은, 문화의 국경 없이 하나의 무대가 되어가는 국제화시대에, 외래문화와의 접촉을 통하여 더 창조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고구려 복식의 전반적인 것을 간략히 밝힙니다. 저는 고구려 복식의 원형이 중국이나 북방지역의 영향으로부터 이루어졌다는 종래의 통설을 전면적으로 부인합니다. 고구려 복식을 중국 및 북방지역 복식과 비교 분석하여 우리 고대 복식의 원형을 복원하고 그 독자성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고구려 복식의 원형을 복원하기 위해 먼저 복식재료에 대해 설명하고 이를 토대로 하여 복식의 각 부분을 세분화하여 간략히 설명하겠습니다. 고구려 복식의 기본이 되는 의복의 재료로는 가죽과 모직물, 마직물, 사직물, 면직물 등이 있습니다. 종래의 연구에서는 이들 재료들이 대부분 중국이나 북방지역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가죽과 모직물 및 마직물의 경우 고구려 보다 앞선 고조선은 중국이나 북방지역보다 그 가공과 직조의 시작연대가 앞설 뿐만 아니라 그 기술수준도 높아 중국에 수출하는 교역상품 이었습니다. 종래의 연구에서 한국과 중국 및 일본학자들은 한결같이 고대 한국의 양잠 기술은 중국에서 수입된 것이라고 하였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중국과 같은 시기인 서기 전 2700년경에 실크섬유를 독자적으로 생산하였고 이러한 실크 섬유의 생산은 그후 계속 이어져 우리 나라만의 고유한 제품들이 생산되어 대중화되었습니다. 면직물의 경우 일반적으로 한반도에서 면직물이 짜여진 것은 고려 공민왕 때 문익점 선생이 원나라에서 목면 종자를 들여온 것이 그 시작이라고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달리 고대 한국에서는 적어도 삼국시대 이전부터 문익점 선생이 원나라로 부터 들여온 것과 다른 품종인 초면으로 면직물을 생산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초면을 이용하여 동아시아에서는 가장 섬세한 면직물을 생산하여 중국에 예물로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한국 고대 복식의 원형에 대하여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종래에는 한국 고대의 관모에 대해서 그 원류를 스키타이계로 보았고 금관에 대해서도 스키타이와 시베리아 유목민족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관모와 금관은 외부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고대에 한민족이 널리 사용하던 관모의 변화위에 고조선 초기부터 사용되어온 한민족 고유의 장식 양식이 계승되어 금관의 주요 양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를 확인 시켜주는 고구려의 금관이 광개토대왕릉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지난날의 복식연구에서는 일반적으로 웃옥과 겉옷의 경우 여밈새와 소매 폭 등을 기준으로 삼아 중국 계통은 오른쪽 여밈과 넓은 소매로, 북방계통은 왼쪽 여밈과 좁은 소매로 구분하여 왔습니다. 이 가운데 북방계통의 요소가 우리에게 들어 온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따라서 고구려 복식의 성격은 원래 호복 계통으로 구분되며 그 후 중국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게 되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고조선에서는 소매가 큰 옷을 입었으며 이는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에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이 같은 여밈새와 소매에 관한 비교와 검토의 결과는 고구려 복식의 원형이 중국이나 북방의 호복계통으로부터 이루어졌다는 종래의 통설을 수정하도록 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중국이나 북방지역의 복식양식에서 보이지 않은 고구려의 웃옷과 겉옷의 고유한 선의 양식과 옷고름의 여밈새 처리방식 등은 고조선시대부터 줄곧 이어온 고대 우리 민족의 고유한 복식 양식입니다. 종래의 연구에서는 고구려의 아래옷인 바지는 북방민족 계통에서 유입된 것이고 여자의 치마의 원류는 중국 계통의 의복에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고구려의 바지와 치마는 중국이나 북방지역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고조선시대부터 게승해 내려온 우리 민족 고유의 복식 양식입니다. 그 간 우리민족이 세운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무기에 관해서는 비교적 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갑옷에 관한 연구는 매우 부족하였습니다. 이는 고조선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갑옷이 생산되지 않았으리라는 선입관 때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선입관으로 인해 우리나라에서 갑옷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시대에 이르러서야 생산되었던 것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또한 이 시대에 착용한 갑옷들을 고조선으로부터 계승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원류를 북방민족의 무장형태에서 찿거나 중국계통의 무장방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보는가 하면 북방계통의 무장모습을 기본으로 하고 그 위에 중국계통의 무장벙법을 들여와 복합적으로 형성시켰을 것으로 설명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고조선은 뼈, 가죽, 청동, 철 등을 재료로 하여 동아시아에서 가장 이른시기에 독자적으로 다양한 갑옷을 생산하여 주변 나라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고조선의 뒤를 이어 건국한 고구려의 갑옷은 고조선의 갑옷을 계승하여 고구려 고유의 특징을 지닌 갑옷으로 발전시킨 것이며 같은 시기의 중국이나 북방지역 갑옷 보다 훨씬 우수하였습니다. 여러나라시대 동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의 대외 활동은 이 같은 주변국 보다 뛰어난 무구와 무력의 우월성이 그 기반이 되었던 것입니다. 말갑옷의 경우도 고구려에서의 말갑옷 생산시기는 중국이나 북방지역 보다 적어도 2세기 정도 앞선 것으로 확인 됩니다. 이상의 내용으로 복원된 고구려의 복식은 우리 민족의 고대 생활사를 풍부하게 설명해 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문화수준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것으로 기대합니다. < 고구려 갑옷의 우수성 -고조선 갑옷의 종류와 특징 > 고구려의 갑옷은 고조선 갑옷의 특징을 그대로 이어 생산되었기 때문에 중국이나 북방지역의 것과 그 모양이나 재료가 다릅니다. 고구려의 갑옷을 설명하기 전에 오늘은 고조선 갑옷의 특징에 대하여 우선 간략히 설명드립니다. 고조선은 뼈, 가죽, 청동, 철 등을 재료로 하여 동아시아에서 가장 이른시기에 다양한 갑옷을 생산하여 주변나라(중국과 북방 및 일본 등)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고조선시대부터 우리 문화는 해외진출사에서 한류적 성향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선 고조선 갑옷의 재료와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조선은 일찍부터 특수한 고급가죽과 일반가죽을 많이 생산했습니다. 특수한 고급가죽들은 중국과의 무역상품이었고 다양한 종류의 일반가죽들은 일반복식과 특수복식인 갑옷의 재료로서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한민족이 금속을 갑옷에 사용한 것은 언제부터 였을까요? 근래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한민족의 청동기문화 시작연대는 서기전 2500년경인데, 서기전 2000년기 전반기의 유적들에서 이미 매우 발달된 청동가공 기술을 볼 수 있습니다. 한반도와 만주에서 출토된 고조선시기의 여러 청동 제품들은 동(Cu), 석(Sn), 연(Pb)등의 3원소 합금으로 제조된 것인데, 각 성분은 기물에 맞게 그 함유량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또한, 고조선의 청동기에는 초기부터 많은 량의 연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연은 석과 함께 청동합금의 강도를 높여주고 녹이 스는 것을 방지해 주며 주물온도를 낮추어줍니다. 서기 전 2000년기에 속하는 중국의 청동유물과 같은 시기의 고조선의 청동유물을 비교한 결과, 서기 전 2000년기에 중국 청동기는 거의 자연동에 가까운 성분을 보이고 야련의 과정을 거치지 못했으나, 고조선의 청동기들은 제각기 용도에 맞는 성분으로 석과 연의 함량이 배합되어 있었습니다. 서기 전 16세기부터 서기 전 13세기까지의 중국 청동 유물을 보면, 동과 석 및 연의 합금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나, 연과 석의 비율이 너무 높거나 낮고, 석이나 연이 섞이지 않는 등 합금의 성분이 기물에 용도에 적합치 못했습니다. 고조선 초기의 청동기들은 석과 함께 합금의 기계적 성질과 강도 및 연신율을 제고시키는 아연을 사용했으나 중국에서는 상시대에 아연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으며, 서주초기부터 비로소 소량이 사용되기 시작하지만 청동의 질을 높이는 그 밖의 고조선 청동기에서 보이는 성분들, 곧 비소(As), 안티몬(Sb), 비스무트(Bi), 코발트(Co), 은(Ag) 등의 성분은 보이지 않는다. 이 같은 사정은 진시황 통일정부 멸망이후에 세워진 서한시대에 만들어진 청동갑편에서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는데, 석의 함유량이 부족하고 연 등의 기타 성분도 보이지 않아 청동 주조 수준이 고조선에 미치지 못합니다. 이 같은 청동 가공 기술은 비소를 많이 사용한 시베리아지역이나 독립국가연합지역과도 큰 차이가 있으므로, 고대 한국의 청동 가공 기술은 중국이나 북방지역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발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의 청동기와 청동갑옷에 아연이 함유되어있고 중국의 청동기와 청동갑옷에 아연이 없다는 이유로 한국의 청동기가 스키토-시베리언 계통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다고 하는 주장은 성립될 수도 없으며, 한국 청동기의 기원을 중국 상시대의 청동기에서 찿는 것도 잘못이라 하겠습니다. 평양지역의 강동군 송석리 1호묘에서 서기 전 12세기경의 강철로 만든 쇠거울이 출토되었는데, 강철은 연철이나 선철의 생산 공정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고조선의 철기 생산 시작연대는 이보다 몇 백년 정도 더 앞 설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전국 초기까지 생철이 그대로 생산되어 제철 제강 수준은 거의 발달되지 않았습니다. 생철에서 주철로의 발전은 전국 중 후기에 와서야 보편적으로 나타나지만, 연강 기술은 여전히 초기 단게에 속하여 농기구 등에 강철 제품이 생산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고조선은 같은 시기인 서기 전 6세기경 거의 모든 지역에서 주철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주철로 부터 연철, 선철, 강철을 만들어 무기와 공구 및 농기구 등에 널리 사용했습니다. 중국은 서한시대에 와서야 주철 생산 기술이 비교적 발달 하지만, 그 수준은 여전히 고조선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철은 탄소 성분의 함유량 정도에 따라 굳기와 세기가 달라지는데, 고조선 후기에 해당하는 서한에 이르기가지 철기 제품의 탄소 함유량이 적절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철기제품이 용도에 맞게 제조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동한 중기에 이르러 제철제강 기술이 비교적 발달하고 위진남북조시대에 와서야 고조선의 수준에 이릅니다. 중국 보다 앞선 이와 같은 고조선의 제철제강 기술은 갑옷의 용품에 그대로 이용되었습니다. 이상과 같이 고조선은 청동이나 철로 만든 갑옷 등을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독자적으로 생산했으며, 이같은 우수한 갑옷 생산기술은 고구려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고조선 사람들이 청동을 갑옷에 이용한 것은 언제부터 였을까? 중국학자들은 서기 전 9세기에서 서기 전 11세기에 속하는 상나라 후기와 서주초기의 유적들에서 출토된 청동 장식단추를 전쟁 옷에 달아 방어용 갑옷으로 사용했다고 보고, 이를 중국 갑옷의 기원으로 여기고 있다. 고조선의 영역에서 발굴된 청동 장식단추로 가장 연대가 앞서는 것은 서기 전 25세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평양 부근 강동군 룡곡리 4호 고인돌유적에서 출토되었다. 고조선의 청동 장식단추생산연대는 중국보다 적어도 14세기 정도 앞선다. 따라서 중국의 청동 장식단추는 고조선의 영향으로부터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잇는 것이다. 이는 중국 상왕조가의 청동기가 고조선 초기의 문화인 하가점하층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중국학자들도 상왕조 청동기 주조의 최초의 기원이 고조선 초기의 문화인 하가점하층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고있다. 이 같은 견해는 고조선의 청동 장식단추가 갖는 고유한 특징에서 확인된다. 즉, 중국의 경우는 몇개 지역에서만 청동 장식단추가 발견되지만 고조선의 영역이던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는 거의 모든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다양한 크기와 문양의 청동 장식단추들이 발견되고 있다. 또한 중국의 청동 장식단추에 보이는 문양은 중국의 청동기나 질그릇 및 가락바퀴 등에서 볼 수 있는 상왕조의 특색을 나타내는 문양과는 전혀 다르고, 오히려 고조선의 청동 장식단추와 같거나 고조선 청동 장식단추의 모양에 가깝다. 고조선의 청동 장식단추는 원형과 타원형의 형태가 주류를 이룬다. 더욱이 이는 고조선의 영역에서만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신석기시대부터 출현했던 가락바퀴나 질그릇 및 청동기 등에 보이는 것처럼 새김무늬의 모양을 나타내거나 혹은 청동거울이나 비파형동검 검집에 보이는 것처럼 잔줄문양을 나타내기 때문에 고조선의 유물이 갖는 특징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이 같은 청동 장식단추를 일반 의복의 화려한 장식으로 이용한 것은 고조선만이 갖는 복식의 특징으로, 중국이나 북방지역에서는 찿아 볼 수 없는 것이다. 고조선의 경우 청동 장식단추는 복식의 여러부분에 다양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에 장식품으로 구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출토된 청동 장식단추가 소량일 때는 장식용으로 사용되었겠지만, 그 수량이 다수일 때는 방어용 전쟁옷의 구성물로서 역활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조선은 청동투구의 경우에도 청동 장식단추를 장식하여, 중국의 짐승얼굴 모양을 특징으로 한 투구와는 크게 구별된다. 그러면 철갑의 사용은 어떠했을까? 서기 전 3세기경으로 추정되는 고조선 후기의 유적인 평양시 낙랑구역 정백동 1호묘에서 철로 만든 갑옥조각이 발견되었다. 그 형태는 아래쪽이 둥근 긴 네모 모양과 타원형의 것 그리고 긴 네모 모양의 것으로, 그것을을 꿰어 붙인 상태는 물고기 비늘과 같은 모양의 갑옷이었다. 갑옷 전체의 모양은 알 수 없으나, 이 출토 유물을 통해 고조선에서는 적어도 서기 전 3세기 이전부터 물고기비늘 모양의 철갑옷을 생산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조선이 거느렸던 숙신에서 이미 중국보다 앞서 뼈나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생산했다는 점과 고조선이 중국 보다 약 4세기 정도 앞선 서기 전 12세기 이전에 철기 생산을 시작했다는 점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중국은 춘추시대에 철갑을 생산하지 못했다. 중국에서 철갑이 출현하는 것은 전국말기에 와서인데, 둥근네모 모양의 철갑편을 그대로 이어서 만든 투구가 발견되었을 뿐이다. 진시황 통일정부 시대에는 철갑편이 출토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철갑옷을 생산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진제국시대의 갑옷은 갑옷조각 모두가 가죽으로 만들어졌고 주로 앞가슴과 등 뒷부분 및 어깨만을 덮는 것이었다. 중국은 철갑이 서한시대에 와서야 보급되기 시작한다. 서한 초기인 무제 이전까지 군대는 보병 위주였으며 철갑이 크게 보급되지 못했다. 그러나 무제시대에 이르면 흉노와의 전쟁으로 개갑으로 무장한 기병의 수가 크게 증가하며 갑옷조각의 모양도 큰 크기의 철갑에서 비교적 세밀한 물고기비늘 모양으로 발전한다.그러나 여전히 가죽 갑옷이 철 갑옷 보다 많이 사용되었다. 고조선 철갑옷의 전체 모양은 알 수 없으나 고조선 철 갑옷의 갑옷조각 모양과 그 생산 시기를 중국과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1) 고조선의 경우 철 장식단추는 철기문화의 시작연대인 서기 전 12세기 경부터 생산되어 갑옷의 구성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는 고조선 갑옷만이 갖는 특징이다. 2) 고조선의 경우 물고기 비늘 모양의 갑옷조각이 발굴된 정백동유적이 서기 전 3세기경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발굴자료에 따르면 고조선에서 물고기비늘 모양의 갑옷이 생산된 시기는 중국에서 물고기 비늘 모양의 갑옷이 생산된 서한 중기보다 훨씬 빨랐음을 알 수 있다. 3) 고조선의 물고기비늘 모양의 갑옷조각의 형태는 긴네모 모양인 것과 아래쪽이 둥근 긴네모 및 타원형인 것이 특징인데, 중국의 서한 초기 무덤들에서 출토된 철 갑옷조각의 형태는 대체로 고조선의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무제시기에 오면 비교적 아래쪽이 긴 타원형으로 변화한다. 4) 고조선의 철갑옷 조각과 중국의 철갑옷 조각은 그 연결 구멍에서 차이를 보인다. 5) 고조선의 갑옷조각은 연결구멍을 쇠줄로 연결했으나 중국의 갑옷 조각은 비단끈이나 가죽끈으로 연결했다. 이상과 같이 고조선은 뼈갑옷, 가죽갑옷, 청동갑옷, 철갑옷을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독자적으로 생산했음을 알 수 있고 이후 고구려에 그대로 계승된다. 중국은 무제때에 와서야 군대에서 철갑옷을 입은 기마병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한다.
고구려는 위에서 설명했듯이 고조선의 갑옷 생산기술을 계승하여 보다 발달된 철갑옷을 생산했다.
서기 4세기에서 5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고구려벽화에 나타나는 고구려 갑옷의 특징과 같은 시기의 중국 및 북방의 갑옷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은 삼국양진시대에 군대에서 일률적으로 같은 모양의 용수개를 입었고, 남북조시대에 이르러 기병이 군대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면서 양당개가 생산되었다. 고구려벽화에서는 이 같은 중국의 용수개와 양당개에서 보이는 모양의 특징을 지닌 갑옷을 일률적으로 착용한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는 군대의 구성과 역할에 따라 매우 다양한 갑옷을 입었다. 따라서 철갑옷 조각의 형태와 크기가 다양하게 나타나고 갑옷의 형식도 매우 다양하다. 이 같은 현상은 고구려가 중국보다 앞서 뼈 갑옷, 가죽갑옷, 청동갑옷, 철갑옷을 생산했던 고조선의 기술을 계승하여 이미 중국보다 뛰어난 생산기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갑옷은 중국의 영향과는 무관하게 부여의 갑옷과 마찬가지로 고조선의 갑옷을 계승하여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것임을 알 수 있다.
북방의 경우 북위시대에 속하는 맥적산 맥찰 127굴 벽화에 보이는 갑옷과 말갑옷 그리고 돈황 285굴 서위벽화에 보이는 기병의 옷에서 가죽갑옷 위에 철갑옷 조각을 드문드문 박아 넣은 모양을 볼 수 있다. 이 같은 모습들은 고구려의 갑옷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의 갑옷과 중국 및 북방지역의 갑옷의 또 다른 큰 차이는 목 부분의 처리에 있다.중국의 갑옷과 북방지역의 갑옷은 목부분을 특별하게 처리하지 않았으나, 고구려의 경우는 다양한 여밈새의 목을 덮는 부분 갑옷으로 귀밑까지 보호하게 되어 있어서 매우 우수함을 알 수 있다.
집안에 위치한 광개토대왕릉에서는 광개토대왕이 입었던 질이 우수한 금동과 철로 만든 고기비늘 모양의 갑옷조각이 다량 출토된 바 있다. 갑옷조각의 폭은 약 2.3쎈티미터 정도로 위의 그림에서 보이듯이 아랫부분이 둥근 고기비늘 모양으로 겹쳐져 만들어져 칼이나 창 또는 화살의 공격으로 부터 잘 보호될 수 있도록 하였다. 투구와 말갑옷의 경우도 마찬가지 였다.
말갑옷(개마)의 경우 고구려는 그 생산시기가 중국이나 북방지역 보다 적어도 2세기 정도 앞서기 때문에, 중국이나 북방지역의 말 갑옷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클것으로 추정된다. 서기 4세기 중엽에 속하는 고구려의 안악 3호 고분벽화에서 보이는 개마는 중국의 북조 초기에 속하는 초장파 1호 고분의 도용에서 보이는 개마보다 그 연대가 훨씬 앞선 것이다. 그런데 안악 3호분보다 앞선 서기 3세기경에 속하는 강원도 철령유적에서 개마모형들이 출토되었다. 이 개마모형들은 고구려 개마가 보여주는 모습을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에서 개마의 출현시기가 3세기 이전으로 올라갈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케한다. 이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보이는 동천왕 20년(서기 246년)에,
"왕(동천왕)이 모든 장수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위나라의 많은 군사가 도리어 우리의 적은 군사만 같지 못하다. 관구검은 위의 명장이지만 오늘에는 그의 목숨이 나의 손에 있구나'하고 곧 철기 5,000을 거느리고 쫒아가서 쳤다."
고 하여, 갑옷을 입은 개마기병이 5,000이었음을 알 수 있고, 서기 3세기 이전에 개마가 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서기 3세기 이전에 개마가 출현했다는 사실은 물고기 비늘 모양의 철갑옷의 출현이 이보다 훨씬 앞섯을 것임을 알려준다.
집안 동구 12호 고분벽화와 장천 2호 고분벽화 및 삼실총에 보이는 개마무사들은 갑옷과 함께 철이나 금동으로 만든 정이 솟은 신을 신고 있다. 실제로 집안 지역에서 이 같은 신들이 출토되었는데, 발굴자들은 이 신들이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다고 했다. 이 같은 모양의 신은 중국이나 북방지역에서는 생산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장수산성유적과 철령유적에서 출토된 기마모형들 가운데는 간혹 등자(말을 탈때 발을 놓는 발걸이)가 보이고 있어, 고구려의 등자 생산 연대가 주변국 보다 앞선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연개소문 드라마에서는 연개소문을 비롯하여 많은 군사들이 고기비늘 모양의 겹쳐져 이어진 청동 또는 철갑옷조각으로 만들어진 활동성이 편리한 갑옷과 투구를 입은 모양새가 시청자들에게 보여져야 할 것이다. 또한 갑옷과 함께 정이 솟은 스파이크 신발(고구려 갑옷의 우수성 2 에서 그림제시)을 신고 얼굴까지 갑옷을 씌운(마면갑+말갑옷) 말을 탄 기마부대가 중국의 군대와 차별화되어 보여져야 할 것이다. 무사와 말이 모두 갑옷을 입었기 때문에 고구려에서는 가시돋친 모양의 무기를 사용하여 이를 갑옷에 걸어 끌어내리기도 하였다.
갑옷과 말갑옷 및 투구들은 벗게되면 이어진 부분들이 접혀져 납작하게 되기때문에 수천벌의 갑옷도 보관하기에 편리하였다. 갑옷의 색상도 청동갑편으로 만들어진 갑옷은 금과 같은 색이 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철로 만든 갑옷도 철갑편 위에 금색의 칠(황칠수라는 나무에서 금색의 칠이 생산되었음)을 하기도 했으므로 군청색이나 잿빛의 색상으로 만 표현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된다. 또한 고조선의 갑옷과 이를 그대로 계승한 고구려의 갑옷에는 (고구려 갑옷의 우수성 2) 그림에서 제시한 장식단추를 투구나 갑옷에 많이 사용하였다. 이러한 고구려의 특징들이 당나라의 갑옷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연개소문 드라마에서 당나라 군사들의 투구와 갑옷에 둥근 장식단추를 많이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 장식단추는 특히 고조선시대의 한반도와 만주 전지역에서 골고루 출토되고 있고 중국이나 북방지역에서는 출토되지 않기 때문에 고조선의 문화권과 고조선의 강역을 확인할 수 있는한민족 고유의 특징있는 복식 출토품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고구려의 갑옷에서 엿볼 수 있는 고조선으로 부터의 한민족 고유성의 계승은 그들이 추구했던 다물이념이 단순히 지난날의 한반도와 만주 지역을 강역으로 했던 고조선 영토의 병합 만이 아니라 통치질서와 사상의 재건까지를 의미하는 것임을 말해준다. 이 같은 실천 노력은 일반의복에서 뿐만 아니라 군복에서도 예외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고구려 갑옷과 복식 등에 관한 보다 학술적인 상세한 내용은 저의 저서 {한국 고대 복식}-그 원형과 정체, 지식산업사 를 참고해 주시길 바랍니다.
박선희 교수님은 중국고대사를 전공하셨고 고대의 한국과 중국 및 북방지역을 비교, 연구 해오셨습니다. 현재 상명대학교 사학과에 재직중이시며, 고조선과 고구려 복식에 관한 여러 논문과 저서를 기술하셨습니다.
저서 「한국 고대 복식-그 원형과 정체」로 대한민국 학술원 기초학문분야 우수학술도서상을 수상하셨으며 고대 우리 민족의 복식문화를 바탕으로 우리 역사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주력하고 계십니다.
SBS 대하사극 '연개소문' 홈페이지 內 '박선희 교수의 고구려 갑옷과 복식'에서는 고구려 갑옷의 우수성과 복식문화에 대해 소개해 주실 것 입니다.
출처 :Lets go Liber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