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살짜리 손녀가 집 현관문 앞에서 시계추처럼 몸을 흔들고 있다. 아기의 거동을 눈으로만 쫓고 있다. 냉큼 안아서 데리고 들어갈 수도 있는데 하지 않는다. 지금 표정으로 예측하건데 힘으로 평정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기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내 쪽을 향해 몸을 홱 돌려 두 팔을 벌린다. 안아 줘!
아기의 눈동자는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연민으로 집중력을 잃었다. 아기는 계속 뭔가를 생각한다. 아무래도 아기는 평소와 다른 시간에 집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이 퍽 낯 설은 모양이다. 내 가슴에 안기자 비로소 잃었던 기억의 한 부분을 되찾은 듯 블루버블! 한다. 블루버블은 자판기 구슬 아이스크림이다. 그래, 바로 이거였다.
놀이방 앞에 있는 상가 자판기에서 블루버블 아이스크림을 빼어 먹던, 그 첫 번째 과정부터 생략한 것을 아기의 뇌가 뒤늦게 인지를 하는 것 같다. 아기가 냉큼 집 안으로 들어서지 못한 것도 허전해 하는 것도, 모두 몸에 밴 익숙함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난 아기를 안고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놀이방 문 앞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매일 하던 대로 놀이방을 나와 바로 곁에 있는 상가 건물 자판기로 간다. 천 원짜리 지폐를 넣고 아이스크림이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아기는 구슬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 장갑도 빼고 목도리도 끌렀다. 그래도 숟가락질하기가 수월하지 않자 먹여달라고 한다. 제비 새끼처럼 입을 쫙 벌린다. 입을 벌릴 때마다 하얀 입김이 쏟아져 나온다. 입에 찬바람 들어가면 목 아프다고, 그렇게 많이 벌리지 말라 해도 아기는 크게 벌린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아기와 나는 길을 걸으며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놀이터 곁을 지나자 아기는 그네를 가리킨다. 놀이 기구가 눈에 젖어 탈 수 없다고, 못 타는 이유를 설명하니 알아듣는 것처럼 고집을 더 피우지 않는다. 비디오 대여점에 들러 만화 비디오를 두 편 빌리고 제과점에 들려 야채 ‘고로케’도 산다. 슈퍼에 들러 저녁 찬거리를 산다. 깔끔하게 낫지 않는 콧물감기 때문에 병원도 들린다.
자랄 때 난 양보를 잘하는 아이였다고 한다. 할머니는 갓난아기 때부터 키운 내 바로 위 작은언니를 나보다 더 사랑했는데, 언니에게 양보하는 나를 늘 칭찬했다. 반찬 그릇 안에서 젓가락이 부딪칠 때면 먼저 젓가락을 거두는 건 나라고 하였다. 난 기억할 수 없는데, 할머니는 기억하고 계셨다. 가족이 모이는 날이나 동네 할머니 앞에서도 할머니는 내가 얼마나 마음이 깊고 넓은지를 설명 하셨다. 난 그 칭찬이 듣기 좋아 욕심을 부리고 싶어도 부릴 수가 없었다. 그 후 난 주로 언니에게 양보를 하는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언니는 자신의 몫을 용감하게 잘 챙긴다. 어른이 된 지금은 언니가 내게 양보를 한다. 나는 욕심을 부리고 싶어 하고 언니는 너그러워졌다.
삶을 되돌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확실하게 살고 싶다. 나를 위해서 좀 더 분명하게 욕심을 부리고 싶다. 한데 그 욕심도 내내 부리던 사람에게나 어울린다. 내게는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부려보니 빌려 입은 옷처럼 불편하다. 또 부린다고 얻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난 예전의 그 허술한 모습으로 살아가기로 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내가 갖고자하는 것 바로 그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임을 알았다.
땅거미가 지는 어둑한 시간에야 놀이방에서 귀가하던 아기가, 엄마의 바뀐 근무 주기에 맞춰 귀가시간을 조금 당기자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일찍 만나게 된 엄마의 얼굴도 낯설어 한다. 나도 같다. 아기처럼 방황을 한다. 지금의 이 자리가 당최 내 자리인 것 같지 않아 서성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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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성적표
아버지는 텃밭을 가꾸는 일로 소일하며 노년을 호젓하게 보내고 싶어 하셨다. 어머니는 달랐다. 도시적인 분으로 화려하게 살고 싶으신 분이었다. 손에 흙 묻히는 걸 좋아하시지 않았다. 어머니의 반대가 아니더라도, 여러 자식을 둔 부모 입장에서는 툭툭 털고 떠나기에는 이것저것 걸리는 사연이 많았던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교통사고로 장애가 된 둘째 아들 때문에라도 어머니는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하였다. 그럴수록 도시를 떠나고 싶은 아버지의 욕구는 강렬해 보였다.
명절 때면 어머니는 출가한 자식들을 애타게 기다리지만 아버지는 냉정했다. 아버지는 늘 조용하게 지내시고 싶어 하셨다. 구남매와 그에 따른 자손들이 모여 북적거리며 소란 떠는 것을 즐거워하시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도 우리들은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도 잊은 채, 모처럼 만난 형제들과 기쁨을 나누느라 시끌벅적하기 일쑤였다. 그간 못 나눈 이야기를 들려주려 마음이 서로 바쁘다 보니, 제각각 내어놓는 말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덩치 큰 소음이 되어 집안 전체가 들썩거렸다.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침묵하시던 아버지의 얼굴 표정이 뒤늦게 떠올랐다. 우리들은 아버지의 조용한 성품을 잘 알면서도 아버지이니까, 하면서 조심하지 않은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하였다. 나 역시 아버지처럼 자유스럽고 조용하게 지낼 수 있기를 항상 소원하고 있는 터라 아버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아버지는 가족과 아내에게 절대 무책임하지 않았지만 마음속 한편에는 독신자의 고적한 생활을 남몰래 동경하고 계신 듯 하였다. 물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사람들에게는 동경이며 이상에 불과하다는 것도 잘 알고 계셨다. 때문에 아버지는 아내의 잔소리도 싫고 자식들의 방문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셨다.
어머니가 떠나시고 아버지 혼자 남았다. 어머니 생전에 아버지는 어머니의 관리만을 받아 오셨던 분인 터라 어머니가 자리에 누우시자, 평소 어머니를 돌봐드린 경험이 없었던 아버지는 엄두가 나지 않으신 듯 몹시 당황하셨다. 아버지 건강도 좋지 않아 어머니를 부탁드릴 수는 없었지만, 밤 시간은 아버지께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힘이 들다’ 고 자주 불평을 하셨다. ‘너희 엄마만 아니면 차라리 시설로 가고 싶다’라는 말씀으로 자식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건 가당치않은 이기심이었다. 거동이 불편한 아내를 두고 혼자만 시설에 가신다는 것은 간병하는 자식들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의 심신을 편안하게 해드릴 수 있는 몇 개의 방안을 놓고 형제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한 후, 아버지와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눠보기로 하였다. 그 때 난 아버지의 이기심과 굽히지 않는 당신의 주장에 많이 놀랐었다. 아버지는 나이가 드셨어도 끊임없이 당신만의 조용한 공간을 갖고 싶어 하셨던 것이다.
그 꿈은 아내가 먼저 떠나고 난 팔십 육세에 이루어졌다. 아버지는 아내 없이 9개월을 혼자 지내셨다. 금슬 좋은 부부일수록 금세 따라간다는, 그와 같은 상황이 아버지께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뒤늦게 얻은 독신 생활이 아버지의 일생에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든 없든 그것은 크게 상관이 없었다. 차마 내색 할 수 없어 이따금 속마음으로만 원해오셨을 독신의 자유를, 얼마 남지 않은 삶을, 꿈꾸어 온 당신의 방법과 방식으로 행복하게 누리다 가실 수 있기를 바랐다. 어머니의 뒤를 서둘러 따라가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버지의 변화는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두 달 전쯤이었다. 혼자 있기를 그리도 소망하시던 아버지께서 찾아오는 이 없는 적막함을 하소연할 때, 문득 운명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자주 찾아뵈어야겠다고 하면서도 생각으로 그치고 말았다.
우리 형제들은 우리들을 보호하고 부양하는 정신적 지주를 멀리서 바라만 보며 자랐다. 아버지는 우리들에게는 가까이 할 수 없는 전지전능한 신과 같은 존재였다. 엄격하고 두려운 분이었다. 그 모습은 내가 결혼을 하고나서 깨졌다. 아버지를 남자로서, 사회인으로서 냉정하게 분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여유를 갖게 되었다. 아버지의 위상이 신에서 인간으로 하락(?)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는 가정적인 분은 아니었다. 자식의 미래에도 깊이 마음을 쓰지 않았다. 아버지는 오직 당신에게 주어진 역할에만 충실하셨다. 옛날 아버지들은 대체로 다 그랬다고 보면 옳았다. 자식들과 대화를 나누는 아버지는 극히 소수였다. 우리들의 아버지만 특별하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던 분이 말문을 여셨다. “너 이런 이야기 들어봤니?”라고 물으시는 건 말문을 쉽게 트기 위한 전주였는데, 난 처음으로 아버지의 세련된 화법에 깜짝 놀랐다. 아니, 감동했다. 아버지에게 이렇게 차분하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부분이 있는 줄 몰랐었다. 난 아버지를 울뚝 불 성질만 부리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머니를 통해서만 평가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아버지는 당신의 조부에 관해 들려주고 싶어 하셨다. 어릴 때, 족보를 들고 와 양반학(?)을 강의 하시던 할아버지의 모습 말고는 나는 조상에 관해 전혀 아는 게 없었다. 물론 아버지도 이미 돌아가신 조상들 이야기가 너희들한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회의적이었지만, 들려주어야 할 어떤 의무감을 갖고 계신 듯 하였다. 솔직히 나 역시 관심이 별로 없었지만, 아버지가 떠나시면 그나마 들을 수 없는 가족사였기에 귀를 기울였다. 아버지는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 전체를 한 자식에게만 들려주지 않았다. 일요일마다 다르게 방문하는 자식들에게 한 가지씩, 똑같지 않은 다른 내용을 유언으로 남겨주셨다.
김옥균이 개화파로 평가 받지만 당시에 개화파는 역적인 것을, 아버지의 조부는 개화파의 군자금을 담당하고 계셨다고 한다. 우리 조상이 그렇게 넉넉했나 싶었다. 그리고 왠지 멋져 보이기도 했다. 그 옛날 벌써 개화의 소신과 신념을 갖고 있었다니, 성공하지 못한 혁명가와 무슨 인연으로 그리 되었는지 궁금하기까지 하였지만 아버지께서도 그 이상은 알고 계시지 않았다.
아버지는 “너희들에게 아무것도 남겨 줄 것이 없어 미안하다.” 라고 말씀하셨다. 가끔 TV프로그램 중 진품명품 시간을 함께 시청하며 “아버지! 우리는 뭐 없나요?”라고 말한 무례가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줄 것이 없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것 같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내 “우리 가족 구성을 평가한다면 말이다.”라고 대화의 방향을 자연스럽게 트시는 노련미를 보여주시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자식들 아래 성적표를 그려놓고 한 가지씩 평가하고 계셨던 것이다. 사십여 년 간 학생들을 가르쳤던 아버지의 직업에서 오는, 교사다운 발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등줄기에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별안간 시험성적표를 받기위해 선생님 앞에 선 느낌이었다. 부끄러웠다.
아버지는 내 얼굴 바로 앞에서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고 계셨다.
“상중하로 평가한다면 중이라고 할까? 아니다~~중하쯤 될 거야.”
이번에는 내가 아버지의 얼굴을, 아니 아버지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떤 것을 근거로 매겨진 거죠. 라는 의혹을 담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 이의를 금세 알아차리셨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사는 모습이었다.
“봐라~~니 오래비들이 저렇게 되었고…”
자식에 대한 기대는 아들이 우선이었던 분들이었다. 기대치에 도달하지 못한 채 떠난 오빠들과 함께 싸잡아 평을 해버리는 바람에 아버지의 가슴에 우리들의 자리는 없었다. 아버지에게 딸들은 덤 같은 존재였던 것 같았다. 난 다시 아버지의 눈을 바라보았다. 자랄 때에는 감히 할 수 없었던 당돌함이었다.
“그리고 너희들도 다 잘 살고 있는 건 아니잖니?”
이쯤 되면 할 말을 더욱 잃는다. 우리들 사는 모습이 아버지 기준에 차지 않으시다는 데 할 말이 있을 수가 없었다. 죄송하고 또 죄송할 뿐이었다. 아들로 인한 좌절감은 딸들로서는 보상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충족되지 않는 마음은 그 누구로도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로 남아 영원히 외로우셨던 것이다. 아버지의 상대 평가에 이의를 제기한다면 자식들로 인해 받은 아버지의 아픈 상처만 자극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아버지와 나 사이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성적표를 들고 자신감에 차있던 나는 면전에서 무시당한 무안함에 머쓱해졌다. 아버지께서 당신 자손을 이렇게 낮은 점수로 평가하고 계실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상대평가 속에는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안정, 그리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가는 부부금슬이 들어있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인격이나 인품으로는 차마 평가 기준을 말씀하고 싶지 않으신 것들도 포함되어 있었을지도 몰랐다.
아버지가 작성하신 당신 자식들의 성적표는 곧 당신이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며 내린 바로 당신의 성적표였던 것이다. 항상 타인에게 후했던 분께서 자식의 성적을 중하로 결정하는 인색함은 바로 아버지로서의 자존심이고 자책인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자부심과 자긍심마저 떨어뜨릴 만큼 우리들의 삶이 상대적으로 그렇게 형편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문제는 아버지의 판단이신 것이다. 욕심 없는 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자식 욕심은 크셨던 것 같았다.
장애자가 되어 뒤늦게 부모 품으로 되돌아온 자식을, 차마 내치지도 뿌리칠 수도 없어 끌어안고 몸부림치다가 그토록 소망하시던 전원생활의 꿈도 이루지 못하셨다. 눈을 떠 잠자리에 드실 때까지, 아버지 곁에서 잠시도 침묵할 줄 모르는 어머니와 부부해로 하시느라 독신생활도 못해보셨다. 또 딸 여섯 중, 아버지의 꿈을 뻔히 알면서도 그 꿈을 이룩할 수 있도록 협조하겠다고 나서는 자식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삶에 높은 점수를 줄 수 없었을 뿐, 이승에서의 삶을 불행하셨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을 것이었다.
첫댓글두레반에 둘러앉은 식구들이 많아 나는 늘 발 하나만 틈새에 들여놓고 먼거리에서 젓가락질을 했습니다. 내가 좀 불편하면 남이 편할 것이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움직인 내 맘 때문이지요. "내게 조금의 불편이 오더라도 그것이 남에게 편함을 준다면 언제나 그 불편을 받아드려라." 내 아이들에게 이렇게 해주기를 지금도 나는 바란답니다. 댓번을 더 읽었지만 따라갈수 없는 필치에 그저 감복만 하고 있습니다.
절 보고 속 깊다 착하다 칭찬하시던 할머님의 진의를 이제야 알 것 같더라구요. 당신이 사랑하는, 바로 위 제 언니를 제가 귀찮게 하지도 않고 울리지도 않고 더욱 언니가 싫어하는 일로 속상하게 해주지 않아서일 겁니다,ㅎㅎ 틀림없어요. 저희 외할머니는 오직, 아기때부터 기른 제 언니만 찾으셨거든요. 제가 아기를 키우다 보니 충분히 이해가 가요. 오래 된 글인데, 바쁘신 중에도 또 읽어보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미안합니다.
한지붕 9남매...생각만해도 대단한 가족입니다. 전 7남매중 막내지만... 어릴적 아버지께 엎혀다닌 기억이 최초의 기억이고 그져 묵묵히 아버지는 아버지의 일만 하시며... 간간이 웃어 주셨습니다. 어머님은 좀 급하시고... 야단도 치시고... 새삼 부모님을 생각케하는 글 이제사 읽었습니다.
첫댓글 두레반에 둘러앉은 식구들이 많아 나는 늘 발 하나만 틈새에 들여놓고 먼거리에서 젓가락질을 했습니다. 내가 좀 불편하면 남이 편할 것이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움직인 내 맘 때문이지요. "내게 조금의 불편이 오더라도 그것이 남에게 편함을 준다면 언제나 그 불편을 받아드려라." 내 아이들에게 이렇게 해주기를 지금도 나는 바란답니다. 댓번을 더 읽었지만 따라갈수 없는 필치에 그저 감복만 하고 있습니다.
절 보고 속 깊다 착하다 칭찬하시던 할머님의 진의를 이제야 알 것 같더라구요. 당신이 사랑하는, 바로 위 제 언니를 제가 귀찮게 하지도 않고 울리지도 않고 더욱 언니가 싫어하는 일로 속상하게 해주지 않아서일 겁니다,ㅎㅎ 틀림없어요. 저희 외할머니는 오직, 아기때부터 기른 제 언니만 찾으셨거든요. 제가 아기를 키우다 보니 충분히 이해가 가요. 오래 된 글인데, 바쁘신 중에도 또 읽어보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미안합니다.
한지붕 9남매...생각만해도 대단한 가족입니다. 전 7남매중 막내지만...
어릴적 아버지께 엎혀다닌 기억이 최초의 기억이고 그져 묵묵히 아버지는 아버지의 일만 하시며...
간간이 웃어 주셨습니다. 어머님은 좀 급하시고... 야단도 치시고...
새삼 부모님을 생각케하는 글 이제사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