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일 (日, 음력 8월 20일) 開天節
1996년 --- 폴란드의 시인 쉼보르스카(Wisława Szymborska), 노벨 문학상에 선정
폴란드의 여류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73)가 199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스웨덴 한림원은 1996년 10월 3일 "그녀 시에 나타난 정확한 풍자는 역사적이고 생물학적인 상황을 인간 현실의 단편속에서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선정이유를 밝혔다.
쉼보르스카는 1923년 폴란드 서부의 작은 마을 브닌에서 태어났으나 크라크프의 야기에보 대학에서 폴란드 문학과 사회학을 수학했다. 꾸며진 감상이나 시인의 인도주의적 치료 기능 따위의 감상에 늘 거리를 유지해온 그는 철학적인 명상의 세계에 가까운 시를 써왔다. 일상적인 언어도 자주 사용하지만 언어의 단편적인 나열의 효과에 기대는 일이 없이 철학적 문제를 극화하는 시적 구조를 만드는 것이 전형적인 그의 시적 스타일이다.
스탈린주의는 물론 정치세력에 비판적인 내용이나 존재의 의미, 철학적 관조, 사랑의 고통에 이르기까지 실로 폭넓은 작품세계를 유지해온 쉼보르스카의 일부 시는 사회주의 시대의 폴란드에서 금지된 적도 있다. 초기의 시를 제외하면 중기 이후로는 철학적인 시로 일관했다. 시인으로서 창조의 힘에 긍정하면서도 인간 소외의 한 구석을 응시하는 냉철한 시각은 늘 '여성의 입장'이라는 시점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chosun.com)
1991년 ---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여류소설가 고디머(Nadine Gordimer), 노벨 문학상에 선정
1923년 11월 20일 요하네스버그에서 출생하였다. 섬세한 감수성, 선명한 이미지, 암시에 넘치는 문체가 특징이다. 《사탄의 달콤한 목소리》(1952), 《금요일의 발자국》(1960) 등 5권의 단편집과 장편 《낯선 자의 세계》(1958) 등이 있다.
인종차별 문제를 다룬 작품이 많은데, 정면으로 항의하지 않고 인종간의 협조와 이해를 촉구하고 있다. 심리묘사에 뛰어난 서정적 사실주의 문학으로서 예술성이 높다. 1991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1990년 --- 동독-서독 통일
1945년 2차대전에서의 패배로 인해 동서로 나뉘었던 독일이 마침내 하나로 통일됐다. 서독이 1990년 10월 3일 오전0시를 기해 동독을 흡수통합하는 형식으로 독일연방공화국이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미ㆍ영ㆍ불ㆍ소 등 2차대전 전승 4개국은 이 날짜로 베를린을 포함한 독일에 대한 모든 권리를 공식포기, 기존의 관할권을 독일에 이양했다. 통일을 주도한 헬무트 콜 서독총리는 12월2일 실시된 전 독일 총선에서 승리, 초대 독일총리가 됐다. 독일통일은 단순히 게르만 민족의 통일차원을 넘어서 유럽내 독일의 위상은 물론, 기존의 국제질서에도 엄청난 변혁을 몰고 왔다.
통일의 순간은 독일인은 물론 전 세계를 감동시켰다. 옛 제국의회 건물 앞 공화국 광장에는 1백만명이 운집해 폭죽을 쏘아대는 가운데 흑-적-황의 대형 독일 국기가 서서히 올라갔고 "통일, 정의, 자유를 조국 통일에 ..."로 시작되는 독일 국가가 장엄하게 연주되고, 단상에 선 헬무트 콜 총리는 감동과 흥분으로 얼굴이 벌겋게 상기돼 있었다. 이윽고 3일 0시. 군중들은 일제히 '도이칠란트'를 외쳐댔다. 그 순간 독일 전역의 교회와 성당은 일제히 종을 울려 통일 독일의 탄생을 전세계에 알렸다. (chosun.com)
1970년 --- 북한의 조류학자 원홍구(元洪九, 1888~1970) 사망
평안북도 삭주(朔州) 출생. 1910년 수원농림학교를 마친 다음 일본 가고시마고등농림학교[鹿兒島高等農林學校]로 유학하였다. 수원농업시험장 기사를 거쳐 1920년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박물학(생물학)을 가르치는 한편 식물학에 뜻을 두어 국내는 물론 타이완에까지 원정하여 식물채집을 하였다. 그 후 조류채집 및 분류에 전념하였다. 1931년 평안남도 안주공립농업학교로 옮긴 이래 자신이 채집한 조류의 목록을 학술지에 발표하기 시작하였고, 수원고등농림학교 25주년 기념논문(1934)에 조선조류목록을 발표하였다. 전국을 채집여행하여 한국산 미기록 조류를 포함하여 10여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1929~1941).
1940년에 함경남도 영생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고, 함흥의학전문학교에서 생물학을 강의하였다. 1945년 평안남도 덕천공립농업학교 교장으로 옮겼다가 강서농업학교 교장을 거쳐, 1947년 김일성종합대학교 생물학부 부교수로 취임하였으며, 이후 북한의 조류학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생물학 박사학위의 수령과 함께 과학원생물학연구소장으로 재직하였다. 저서에 《조선조류원색도설》(1958) 《조선조류지 1~3》(1963~1965) 《조선짐승류지》(1968) 등과 30여 편의 학술논문이 있다.
1929년 --- 노벨 평화상을 받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 외무장관 슈트레제만(Gustav Stresemann, 1878~1929) 사망
베를린 출생. 제1차 세계대전 전 작센지방의 공업을 크게 발전시켜 공업가단체의 조직가로서 두각을 나타내어 국민자유당의 국회의원이 된 후, 타고난 웅변술과 활동적인 수완으로 정치지도자로 부상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 국민자유당의 지도자, 독일혁명 후에는 독일인민당을 조직하여 온화한 군주주의를 내세웠다. 1923년 8월 인플레의 대혼란 중 수상에 선출되자, 프랑스군에 대한 저항을 중지하고 통화의 안정을 꾀하였다. 1923년 11월~1929년 10월 죽을 때까지 역대 공화국의 외무장관으로 있으면서 정계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는 전승국(戰勝國)과 협조하여 독일의 국력을 회복시키는 정책을 폈으며, ‘로카르노조약’을 맺어 국제연맹 가입에 성공하였다. 또한 미국이 제안한 도스안(案:Dawes Plan)과 영안(案:Young Plan)에 의하여 배상금액을 경감시키고, 라인란트로부터의 점령군 철수를 확약받았다. 한편, 소련과의 친선에 노력하면서 독일을 다시 유럽의 패자(覇者)로 만들기 위해 동유럽으로 진출을 꾀하는 등 정치가로서의 야망을 보이기도 하였다. 1926년 ‘로카르노조약’ 체결에 노력한 공로로 프랑스의 외무장관 브리앙과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1928년 --- 후버(Herbert Clark Hoover), 미국 대통령에 당선
1928년 10월 3일 미국의 제31대 대통령으로 허버트 후버가 당선됐다. 당선된 후버는 1874년 8월에 아이오와주 웨스트브랜치에서 출생했다. 1895년 스탠퍼드대학을 졸업하고 미국과 호주에서 광산기사로 일하던 중 금광채굴에 성공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런던에서 미국구제위원회, 벨기에 난민구제위원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한 후버는 1921년부터 1928년까지 상무장관으로 있으면서 농업구제와 고율보호관세를 주창했다. 1929년 공화당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된 후 당시의 심각한 경제불황을 타개할 대책을 수립하고 군비축소를 추진하는 한편,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와의 우호관계 유지를 위해 노력했다. (chosun.com)
1900년 --- 경기고등학교 개교
우리나라 최초의 관립 정규 중등교육기관인 경기고가 1900년 10월 3일 개교했다. 경기고의 역사는 곧 한국 중등교육의 역사였다. 경기고는 처음 중학교에서 출발해 한성고(1906년), 경성고보(1910년), 경성제1고보(1921년), 경기중(1938년), 화동중-장안중(1952년), 경기중고(1952년), 경기고(1971년)를 거쳤다.
1974년 고교 평준화정책이 실시된 이후 위상이 약화됐지만, 1954년 고교입시가 실시되면서 경기고는 전국의 수재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1970년에는 졸업자의 81.8%가 서울대에 진학하기도 했다.
경기고는 정-관-재계를 망라해 수많은 파워엘리트를 배출했지만 반작용으로 반(反)경기 정서가 심화되고 입시병폐가 사회문제화되면서 평준화정책을 불러오기도 했다.
(chosun.com)
1900년 --- 미국의 소설가 토머스 울프(Thomas Wolfe, 1900~1938) 출생
노스캐롤라이나주 애슈빌 출생. 아버지는 묘비(墓碑)의 석재 조각사였다.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 졸업. 하버드대학교의 대학원에서 G.베이커 교수의 지도로 희곡을 전공, 극작가를 지망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뉴욕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여러 차례 유럽을 방문하는 사이에 J.조이스, M.프루스트의 영향을 받고 시정이 넘쳐흐르는 독특한 문체로 소설을 쓰기 시작, 1929년 《천사여 고향을 보라 Look Homeward, Angel》로 작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1935년에는 그의 최대 장편인 《때와 흐름에 관하여 Of Time and the River》를 발표하였으며, 38세의 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경탄할 만큼 많은 원고를 썼다. 앞의 두 작품과 그가 죽은 뒤에 출간된 《거미줄과 바위 The Web and the Rock》(1939)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You Can’t Go Home Again》(1940)가 그의 4대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이들은 셋째 번 작품부터 주인공의 이름이 바뀌기는 하나 대체로 ① 저자의 유년시절부터 대학시절, ② 하버드대학과 유럽 방랑, ③ 번스타인 부인과의 사랑, ④ 문단생활을 내용으로 한, 본질적으로는 연작으로 구상한 자전소설(自傳小說)들이다. 그것은 자신의 잃어버린 시절에 대한 탐구인 동시에 위대한 미국의 서사시이기도 하다. 이 밖에도, 단편집에 《죽음에서 아침으로》(1935) 《머나먼 산들》(1941), 희곡에 《매너하우스》(1948), 에세이에 《어떤 소설 이야기》(1936) 등이 있다.
1897년 --- 프랑스의 초현실주의를 주도한 시인, 소설가, 평론가 루이 아라공(Louis Aragon, 1897~1982) 출생
의학을 배워 제1차 세계대전에 군의관으로 출전하였으나, 전후인 1919년 A.브르통, F.수포 등과 함께 전위적인 잡지 《문학 Litt
rature》을 창간하여 다다이즘 운동에 참가하였다. 처녀시집 《축화(祝火) Feu de joie》(1920), 소설 《아니세 또는 파노라마 Anicet ou le panorama》(1921)를 발표하였다. 브르통이 쉬르레알리슴(초현실주의) 운동을 시작하자 그에 가담하였고, 소설 《파리의 농부 Le Paysan de Paris》(1926), 평론 《문체론(文體論) La Trait
》 등의 걸작을 썼다.
이 무렵부터 그는 자기의 사상과 쉬르레알리슴의 교의와의 모순에 번민하기 시작하여 1928년 여름에는 자살을 꾀할 정도로 창작상의 절박감을 느끼고 있었으나, 그해 가을에 러시아의 시인 V.V.마야코프스키를 만나고 또한 그의 의누이[義妹] E.트리올레트를 알게 되자 괴로운 역경을 벗어나 1928년에 결혼한 트리올레트와 함께 1930년 소련으로 가서 공산주의에 빠졌다.
귀국한 후에는 쉬르레알리슴에서 떨어져 나와 좌경 작가로 전향, 평론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위하여 Pour un r alisme socialiste》(1935) 《발의 종(鐘) Les Cloches de B le》(1934)으로 시작하는 연작소설 《현실 세계 Le Monde r el》를 내놓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단장 Le Cr ve-cœur》(1941) 《엘자의 눈 Les Yeux d’Elsa》(1942) 《프랑스의 기상나팔 La Diane fran aise》(1944) 등의 뛰어난 시편을 발표하며 레지스탕스운동에 참가하였다. 전후에도 《레 코뮈니스트 Les Communistes》(1949∼1951) 《성주간 La Semaine Sainte》(1958) 등의 걸작을 발표하였다.
1889년 --- 노벨 평화상을 받은 독일의 언론인, 평화주의자 오시에츠키(Carl von Ossietzky, 1889~1938) 출생
1935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1912년 오시에츠키는 독일평화협회에 가담했으나 육군에 징집되어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군복무를 했으며, 1920년 협회의 베를린 주재 간사가 되었다. 그는 1922년에 '니 비더 크리크'('전쟁은 이제 그만'이라는 뜻) 조직의 창건을 도왔으며, 1927년에는 자유주의적인 정치 주간지 〈 벨트뷔네 Weltbühne〉의 편집장이 되었다. 이 잡지에서 그는 일련의 기사를 통해 독일 군부 지도자들의 은밀한 재무장을 위한 준비를 폭로했다. 반역죄로 고발당한 그는 1931년 11월에 18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았으나, 1932년 12월에 사면을 받았다. 히틀러가 수상이 되었을 무렵 그는 다시 편집장을 맡았다. 독일을 떠나 피신하기를 완강하게 거부했던 그는 1933년 2월 28일 결국 체포되어 파펜부르크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1936년 5월 수용소 병원으로 이감되었고, 뒤이어 민간병원으로 옮겼으나 결핵으로 죽었다. 1936년 11월 24일 그는 1935년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이 수상은 나치즘에 대한 전세계적인 탄핵의 표현으로 해석되었다. 히틀러는 이에 대해 독일인의 노벨상 수상을 금지하는 포고령으로 대응했다.
1886년 --- 프랑스의 작가 알랭 푸르니에(Henri Alain-Fournier, 1886~1914) 출생
셰르주(州) 출생. 시골의 소학교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행복한 소년시절을 보내고 파리의 리세(고등중학교)에 진학하여, 거기서 급우 J.리비에르(후에 평론가)와 사귀어 평생의 친교를 맺었다. 고등사범학교 재학 중에 군에 소집되었고, 제대 후 곧 문필생활을 시작하였다. 1905년에는 한때 런던 근처에서 일하였고, 1910년에는 《Paris Journal》지(紙)의 문예란을 담당하고, 또 여러 잡지에 평론을 기고하며, 시인·평론가인 C.P.페기와도 친교를 맺었다.
1913년 《NRF》지(誌)에 소설 《몬대장 Le Grand Meaulnes》을 발표하여 유명해졌다. 이것은 아름다운 전원을 배경으로, 청년의 사랑과 모험으로의 동경을 추억 속에 그린 청춘문학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출정하여, 베르댕 근처의 생 레미 숲의 전투에서 부상하여 행방불명되었다. 시·평론 등의 유고집 《기적 Miracles》(1924), 친구 리비에르와의 1905∼1914년에 걸친 《서신 왕래 Correspondance》(4권, 1926)와 《가족에의 편지》 등을 남겼다.
1871년 --- 벨기에의 소설가 스트뢰벨스(Stijn Streuvels, 1871~1969) 출생
본명 라퇴르. 코르트레이크 근교 할레 출생. 시인 G.게젤레의 조카이다. 독학으로 여러 외국어를 공부하는 한편, 문학에 전념하여 유럽 사실주의 작가, 자연주의 작가의 주요한 소설을 독파하고, 20세기의 플라망어(語)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가 되었다. 1895년 잡지 《현재와 미래》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면서, 명쾌하고 발랄하기가 마치 태양과 같다는 평을 받는 등 북방 네덜란드 문단에서도 유명해졌다. 우주적인 비전 아래, 플랑드르의 농민생활을 자연의 리듬과 결합시켜 섬세한 필치로 표현한 걸작 《아마(亞麻) 밭 De Vlaschaard》(1907), 세 편의 중편소설을 모은 《일하는 사람들 Werkmenschen》(1927) 등이 있다.
1867년 --- 프랑스의 뛰어난 색채화가, 판화가 보나르(Pierre Bonnard, 1867~1947) 출생
파리 교외 센현(縣) 퐁트네 오 로즈 출생. 처음에는 아버지의 권유로 법률공부를 하였으나, 그림에 흥미를 느껴 틈틈이 아카데미 쥘리앙이나 미술학교에 다니면서, P.세뤼지에, M.드니, J.뷔야르 등과 가깝게 지냈다. 1889년 그림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고갱의 영향을 받은 그들과 반인상파인 나비파(派)를 결성하였다.
초기에는 주로 흑갈색을 기조로 한 차분한 색감으로 파리시민의 일상생활을 상징적으로 그렸으나 40대에 접어들면서는 회색조에서 서서히 밝은 색조로 이행하였다. 독특한 시각에서 잡는 기지적(機智的) 구도로, 풍경, 멱감는 나부(裸婦), 정물·사람이 모인 부드러운 실내정경 등을, 소박하면서도 감미로운 정감으로 그려, 뷔야르와 함께 대표적인 앵티미스트[親密派]로 높이 평가되었다.
색채에 대한 관심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깊어져 60세를 지나면서는 선명한 명색(明色)의 조화를 추구하였으며, 차차 대상의 설명에서 벗어나 현란한 명색이 교향(交響)하는 독자적인 색채의 세계를 확립,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남프랑스의 르 카네에 은거하여 제작에 몰두하였으며, 전후에 그곳에서 죽었다.
작품으로는 《빛을 등지고 있는 누드》 등이 알려졌으며, 또 유화 이외에 구아슈(gouache)·수채화·석판화에서도 많은 가작을 남겼다.
(a. 1974년 발행-'Flowers', b. 1984년 발행-'Dining Room Corner, at Cannet')
1867년 --- 미싱을 발명한 미국의 발명가 하우(Elias Howe, 1819~1867) 사망
16세 때 기계 견습공, 18세 때 기계 기술공이 되었다. 24세 때부터 재봉기(裁縫機)의 고안·제작에 착수하여 실용적인 재봉기를 완성, 1846년 특허를 얻었다. 시장 개척을 위해 런던에 건너가 코르셋 제조업자 W.토머스에게 영국에서 재봉기 제조권을 팔고 국내에 돌아와 보니, 미국에서는 I.M.싱어 등이 허락 없이 그의 발명을 기초로 한 재봉기를 제작·판매하고 있었다. 그는 싱어를 상대로 특허권 침해소송을 제기하여 1854년 승소(勝訴), 1863년 하루 4,000달러 특허 사용료를 취득하였다.
1853년 --- 아이슬란드의 시인 스테판손(Stephan G. Stephansson, 1853~1927) 출생
작품활동은 주로 북아메리카에서 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성서와 여러 영웅담을 들으면서 자랐으며, 20세 때 미국으로 이주했다. 농장과 철도건설 현장 노동자로 일한 뒤 36세에 이르러 앨버타에서 작은 농장을 갖게 되었다. 아이슬란드 이주민들의 문학 지도자로 활동했다. 대가족을 거느린 개척지 농민으로서 힘들게 살았으며, 대부분의 시는 하루 종일 일한 뒤에 쓴 것이었다. 6권으로 된 주요시집 〈잠 못 이루는 밤 Andvökur〉(1909~38)은 이러한 자신의 상황에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스테판손은 사회의 경제적·종교적 규격화에 맞서 싸웠으며 아이슬란드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시에 담았으나, 새로운 조국에 대해서도 그에 못지않은 뜨거운 사랑을 글로 표현했다. ...
1226년 --- 프란체스코회의 창립자, 가톨릭의 성인 프란체스코(Francesco d'Assisi, 1182~1226) 사망
1182년 이탈리아 옴브리아주(州)의 고대도시 아시시. 예수처럼 말구유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는 부유한 상인을 아버지로 둔 덕에 젊어서는 쾌락을 즐겼으나 곧 좌절과 고통을 겪어야했다. 이웃 도시와의 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히고 병까지 얻은 것이다.
27세때인 어느날, “무너져가는 나의 집들을 다시 세우라”는 예수의 목소리를 듣는다. 가족을 떠났고 재산과 명예를 버렸다. 성(聖) 프란체스코로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이때부터 갈색의 농민복장에 ‘청빈ㆍ순결ㆍ순종’을 상징하는 세 겹의 밧줄을 허리에 매고 가난한 자, 병든 자와 하나가 됐다. 몇명의 제자와는 수도회를 시작했다. 탁발(托鉢) 수도회였다. 그 수가 3000명에 달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자신은 무소유의 길을 걸었어도 물질세계를 부정하지 않았고 철저하게 사회속으로 파고들었다. 학문연구도 소홀히 하지 않아 많은 신학교수들을 배출했다.
1224년 9월 라 베르나산(山)에서 40일간 금식할 때였다. 새벽이 밝아올 무렵 양팔을 벌린 채 십자가 모양을 한 예수와 마주친 순간, 그의 손과 발목, 옆구리에 참을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손과 발에 못자국이 생기는 신비체험을 한 것이다. 이때 얻은 상처에 눈까지 멀어 이루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늘 미소를 잃지 않았던 그였지만 결국 1226년 10월3일, 고향에서 눈을 감았다. 2000년 기독교 역사상 예수를 가장 많이 닮은 성인이었고, 중세 최고의 지성이었다. (chosun.com)
첫댓글 출석했습니다....^ ^....오늘의 우표 '고디머'....오~~~!!!....슬라니아....^0^
우표는 기본앨범에 올렸습니다....^ ^
북한의 조류학자 원홍구(元洪九, 1888~1970)... 좋습니다. 꽝!!! 당첨. ^&^
고마워요, 마담~ ^.^)
판화가 아름답다.
지단샘 미술실력 뽀록나뿌렀네~ ^.^)
美痴
아닙니다. 꼭 판화같이 표현되었으니 할 말 없지요. 농으로 한 것이니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
종이 판화, 고무 판화, 목판화까진 해 봤는데 금속판화, 다이어먼드 판화는 아직 못해 봤습니다.
ㅎ ㅎ ㅎ 전세역전... 다이어먼드판화... 勝. 간빵출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