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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치유의 영원한 행복: 이영지 론(2)
이병용(문학박사, 시인, 문학평론가)
나무를/심으리라/한 그루 심어놓고 기다림 심으리다//
둘레를/심으/리다//
사랑 법 심어드리니/사랑 올 때/보이소
-<사랑 법-새벽기도․1715 전문>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린도전서 13장 13절>
Ⅰ. 들어가며: 사랑시야(視野)
나는 지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사랑의 시조집을 읽고 있는 중이다. 누구나 가슴 저미게 하는 동서고금의 위대한 사랑은 그 절실한 울림으로 말미암아 못내 여운을 남긴다. 우리는 그 시공간적 다양성의 각별한 의미로 말미암아 불멸의 위대한 사랑, 즉 영원한 사랑을 동경하게 된다. 이영지의 그 근작 시조집 『행복의 물을 먹으며, 사랑으로』(창조문학사, 2008)는 행복한 사랑의 질서를 보여주는 일련의 종교시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녀는 첫 시조집 『하오의 벨소리』를 제외하고 그 이후로 초지일관 <새벽기도>와 관련된 연작시조를 발표해왔는데, 작금에 와서 그 수가 무려 8권의 시조집에 해당하는 1727편에 이르고 있다.
한국 근대 시조시(時調詩)에 있어서 한 주제로 대작(大作)을 엮은 사례를 찾아보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이영지의 <새벽기도․1~1727(?)>는 일관된 ‘사랑’의 주제를 가지고 다층의 변모를 보여주는 역작이 아닐 수 없다.1) 또한 다른 한편에서 그녀의 ‘사랑시조’ 편들은 한국 기독교 종교시의 전범(典範)을 이룬다. 그러므로 그녀의 연작시조의 형식적 ‘크기’는 다시 종교시라는 내용의 ‘깊이’와 만나면서 시인 자신이 경험적으로 말하는 ‘사랑시야’(<사랑시야(視野)-새벽기도․1716>)를 터득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시인은 ‘사랑시야(詩野)’란 ‘사랑시야(視野)’라는 관계식을 통하여 시조의 미학적 비젼을 몸소 사랑으로 형상화하려는 소명을 완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나는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이영지 시인의 심상이 한마디로 ‘사랑 법’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게다가 나는 시인의 ‘사랑 법’이 근원의 사랑을 노래하던 감성적 습성으로부터 점차 종교적인 사랑의 이타적 실천으로 확장해나가고 있는 자아의 성숙한 변천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2) 사실 세속적 연애시의 관습을 따르던 시인의 초기 작품 세계도 후기로 나아가면서 확연히 달라져 본격적인 종교시의 면면(綿綿)들로 구체적인 윤곽을 드러내고 있음이 목도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은 독실한 신앙을 가진 시인 필생의 사랑의 요체와 그 변주법을 면밀하게 궁구해 보는 것을 일차적인 목표로 하기로 한다. 그렇기에 나는 성서에 나오는 <고린도전서> 십삼장의 한 구절을 빌려서 시인의 작품 세계가, 첫째 믿음을 어떻게 형상화하고 있는가, 둘째 소망의 마음 상태는 어떠한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의 언약으로 행복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가를 고찰해보기로 한다.
Ⅱ. 믿음: 청지기적 사명
믿음은 영혼의 소경들이 진리를 보도록 만들어준다. 이 때 진리는 우리의 근원이요, 우리 영혼을 잉태한 토양과 같다. 우리는 그 진리를 추구하지만, 장님과 다를 바 없는 미약한 존재자인 인간이 우주와 같은 거대한 진리의 실재(實在)를 어떻게 밝혀낼 수 있단 말인가? 그 발원을 이영지 시인은 하나님의 형상성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음을 다음의 단시조가 확인시켜주고 있다.
1) 이 나의 하나님이 얼굴에 씨줄 날줄 한 겹씩 넣으시면 가로로 세로로 짠 눈썹이 두 개 나란히 그려지고 귀 쫑긋-<사랑 쫑긋-새벽기도․1647 전문>
위의 시조는 창조주인 하나님이 스스로의 형상을 입혀서 피조물인 인간을 창조하신 거룩한 행위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얼굴’의 형상은 ‘씨줄’과 ‘날줄’로 얽힌 복합물로 표현되어 있어 그 구성의 질감을 단번에 파악할 수 없다. 또한 ‘눈썹’과 ‘귀’와 같은 신체의 부분들의 나열만 반복되어 있어 얼굴의 정확한 모습도 그려볼 수 없다. 실제로 시조집 속에서 몸을 형성하는 신체의 부분들로는 눈(동자)・머리・이마・(속)눈썹・볼・뺨・보조개・목(덜미)・가슴・심장・배・배꼽・등・살(갗)・손・엄지손가락・발・꼬리・귀・코・입・입술 등이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신체 부위들은 각각의 시편들로 나누어져 세부적인 이미지를 정밀하게 그려 나가지만, 전체적인 몸의 형상을 일괄적으로 구성하는 방식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분의 합이 전체 또는 그 이상을 구성할 수 있다는 전일론적 혹은 통전적(holistic)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이성적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장님의 코끼리 만지기’의 비유에서처럼 통찰력을 십분 발휘하여 ‘각자’ 혹은 ‘부분’의 경험을 올바르게 조합한다면 존재의 실상에 제대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조집의 여기저기에 산재하는 신체기관의 이미저리를 유기적으로 종합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완전한 형상으로 탈바꿈되어 믿음의 확실한 전거(典據)가 된다.
이와 같이 이영지는 믿음의 대상인 유일한 존재의 형상을 동원할 수 있는 신체 부분의 총합으로 지탱가능한 몸성을 어떻게든 복원해내려는 혼신의 노력을 보이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있어 믿음은 하나의 절대적인 대상의 발견이요, 그로부터 시작되는 기나긴 시작(詩作) 과정을 통해 그 대상을 온전한 형상으로 완성하여 그녀의 믿음을 구체화하는 실천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방법도 주로 ‘몸의 형상’을 감지해낼 수 있는 감각 기관과 그 지각 작용을 중시하고 있는데, 시인이 사용하고 있는 시조시 이미저리의 문법이 어떠한지 아래의 예를 통하여 정리해보기로 한다.
2-ⅰ)어여쁜 연분홍 볼 연분홍 살 얻으면-<꽃 따라 길을 가다>
햇볕이/등에 붙어/따듯한 말을 한다-<사랑햇볕>
ⅱ)새파란 손으로 내민 하늘 잎의/내음새-<사랑이면>
봄 곁에/봄의 손이/봄 꽃씨/심어놓아-<봄 손>
ⅲ)행복이 하애질랴/입술이 부풀도록 그릴랴-<사랑병>
빠알간 잎술을 열어/주렁주렁/웃음을-<행복잎․사랑입>
ⅳ)파도의 발걸음이/바람의 목소리로-<바다구슬>
[사랑의/사람 음성 들리면]/물이 이네-<사랑 음성 들리면>
위의 시구(詩句)에는 한 눈에도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과 같은 오감(五感)의 이미저리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묘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두 가지 이상의 감각적 이미지를 즐겨 사용하므로 공감각적인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음도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2-ⅰ)에서 신체 부위를 형용사와 서술어를 사용하여 감각적 이미지로 확장하고 있다. 즉 ‘연분홍’이라는 색채 형용사로 신체언어를 수식하면 시각적 이미지가 되고, 이와는 달리 ‘등’이란 신체언어를 ‘붙어’라는 서술어로 표현하면 촉각을 나타내는 이미지가 된다. ⅱ)에서 ‘새파란 손’은 본래 손의 뜻이지만, ‘봄의 손’은 비유적인 뜻이다. 전자는 색채형용사의 수식에 의한 시각적 이미지에서 ‘내음새’라는 후각적 이미지로 전환한다면, 후자는 비유적 주체인 ‘손’이 ‘꽃씨’를 심는 구체적 행위를 기술하고 있다. ⅲ)에서 ‘입술이’는 주격 조사가, ‘잎술을’은 목적격 조사로 사용되고 있다. 전자는 ‘부풀도록’이라는 서술어에 의해, 후자는 색채언어와 의태어의 수식에 의한 시각적인 이미지로 표현되어 있다. ⅳ)에서 앞의 문장은 단문이지만, 뒤의 문장은 조건절이 포함된 복문이다. 둘 다 청각적인 이미지를 잘 활용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영지의 시적 수사는 구문을 다양하게 병치할 뿐만 아니라 감각적인 이미지의 복합적인 결합으로 신체기관의 단조로운 묘사에서 탈피하여 위대한 존재자의 궁극적인 형상성을 가시화하는데 이상적으로 기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영지의 종교시에서 무엇보다도 창조주와 피조물의 상호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그 시혼(詩魂)을 규명하는 핵심이다. 그리고 그 문제의 발단은 존재자의 분리에서 비롯되지만, 창조주의 ‘영’과 피조물의 ‘몸’은 친밀함을 형성하여 사실상 하나의 구성체를 운용한다. 다시 말해 그녀의 시조에서 창조주의 형상은 태양(햇빛)・(반)달(빛)・흰 눈과 같은 ‘영성’으로 나타나고, 피조물의 형상은 꽃・산・나무・새・사슴・책・별 등과 같은 ‘몸성’으로 표현되어지는데, 그 길항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예로 아래의 시조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3-ⅰ)그대의 문지기로
햇빛이 제일먼저 나무에 돌아들면
그대는 커다랗게
태양을 가득 실어와 노래 얹어 주었오-<산-새벽기도․1572> 중에서
ⅱ)햇
빛을 잘 받은 새 안고서 누워보면
금시 곧 열이 묻어 꿈 망울 피어
나는
나는 새
날개를 펴고 날고 있다 햇빛
새-<사랑햇빛 행복 새-새벽기도․1618> 중에서
ⅲ)흰 눈이
내리는 날 온 산이 하애지며
내려온 행복함을 펄펄펄 끓게하며
사랑을 껴안고 있는 날을
눈빛 날개
쌓이어-<행복한 사람-새벽기도․1584> 중에서
우선 위의 시조 3-ⅰ)과 ⅱ)에서 주체들이 ‘그대’와 ‘나’로 명시적으로 드러나고 있고, ‘문지기’라는 구체적인 시어를 통하여 그 관계성도 엿볼 수 있다. ‘햇빛’으로 상징되는 창조주의 영성(뜻)은 곧 그대로 ‘나’라는 시적 화자의 몸성(생명)으로 전이되어 개별 작품들에서 각자 ‘나무’와 ‘새’로 등장한다. 또한 그 시정(詩情)도 ‘노래’와 ‘꿈’과 같은 충만함으로 가득한 정조로 갈무리되고 있어 두 주체 간의 친밀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하여 ⅲ)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이 ‘흰 눈’으로 상징되어 지상을 행복의 축복으로 가득하게 변화시킬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이영지의 ‘믿음’ 시편들은 신의 뜻을 좇는 유한자 인간의 소임을 다하려는 한결같은 염원(念願)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최고의 예술가인 하나님이 창조를 통하여 피조물의 인간에게 자신의 형상을 부여했다면, 그 보답으로 인간은 청지기적 사명으로 하나님의 인격을 확고한 믿음으로 올바르게 회복하여야만 할 것이다. 하여 누구보다도 믿음을 확신하는 시인은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그 자체로 언제나 느끼고 있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성을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여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통한 영육간의 통합을 유기적으로 이룩할 수가 있다.
Ⅲ. 소망: 마음의 생태(신비)
지상의 속된 구속에서 영성의 참생명을 바라는 이영지 시인의 간절한 소망은 미망의 현실을 바꾸려는 진솔한 마음의 힘으로 구현되어 있다. 이 경우 마치 시인의 마음은 정원이며, 시인은 정원사와 같이 비유할 수 있다. 한편 시인은 그 정원을 잘 가꿀 수도 있고, 아니면 황량한대로 내팽개쳐 둘 수도 있다. 왜냐하면 시인의 시어는 만 가지의 상상을 통하여 생명을 건강하게 지탱할 수 있는 생태환경을 조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훗날 시인은 그 정원에서 심은 대로 거두어들이게 되는 것인데, 우리가 관심을 두는 이영지 시인의 소망도 아래와 같은 심상(心狀)에서 빚어지는 마음의 신비한 언어 작용이라 할 수 있다.
4-ⅰ)맑은 물
마음 하늘
그 사일 거닐면서
마음의 하늘에서 사랑이 솟아나는-<사랑시 인-새벽기도․1708> 중에서
ⅱ)사랑의 옷자락 끝
한 올만 나를 주오
봄빛이 닿는 거기 세밀한 언어들의
사랑의 숨소릴 들어 두근두근 하아오-<사랑봄행복길-새벽기도․1619> 중에서
위의 시조 구절에서 시인의 마음 운용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삶의 방편이지만, 끝내는 시심(詩心)으로 발전하고 있음도 관찰할 수 있다. 4-ⅰ)에서 맑은 심정에서 사랑의 감정이 솟아남을 토로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ⅱ)에서 시인은 일단 시어를 조탁하며 감정을 추슬러 보고 있다. 종합하면 시인의 정신 메카니즘은 우선 마음의 정화를 통하여 시정(詩情)을 고르고, 다음으로 시작(時作)을 통하여 삶의 숨소리마저 반성적으로 조율하고 있는 일상적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영지의 ‘소망’ 시편들은 삶 속에서의 성찰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철저한 내적 여정을 보여준다. 이것은 시인이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깨어 있는 의식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시인의 관상은 특별히 ‘빛(색)’과 ‘물’의 유동적인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그 다채로운 마음의 상태, 즉 ‘행복’을 구체화하여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빛(색)’은 창조주의 모상으로부터 출현하는 것이다. 사실 이영지의 시작(詩作)의 제목에 한결같이 <새벽기도>가 들어있음으로 미루어보아 이영지의 시조에서 색상의 이미지는 단순한 시인의 심리만을 특화한 것이 아닌 영적 환상의 심오함을 보여주는 수사적 표현으로 보아 마땅하다. 그 색상의 시어로 사용된 예를 들면, 보라색(<도라지><가을이면>)・(연)분홍(<꽃 따라 길을 가다><분홍호 수>)・흰(<행복한 사람><바다구슬>)-하아얀(<신부><협주곡><가을이면>)・붉은(<고마와요>)・(새)파란(<행복필리리><분홍호 수><가을이면><사랑스며들자><사랑달의 연인>)-푸른(<행복눈썹편지>)・(새)빨갛다(<가을호수><사랑꽃비가 행복내립니다>)・노란(<가을호수><사랑달의 연인>)・은색(<가을이면><사랑물나비비>)・초록(<사랑물나비비><초록사랑덩이>) 등을 들 수 있다. 이처럼 같은 색도 구체적 상황을 통하여 시인의 비젼을 가시화하는데 효과적인 수사로 활용하고 있다. 다음으로 ‘물’은 피조물의 존재적 연결을 구체화하는 단계적 상태를 보여준다. 즉 물은 고체-액체-기체의 유동적이고도 상승적인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피조물이 순간적으로 처한 존재 상태가 어찌 보면 그와 같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영지의 시편에서 눈물・비・바다 등으로 유전(流轉)하는 물의 심상은 곧 존재의 변환을 위한 고통과 시련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시조들로 다음의 작품을 살펴보기로 한다.
5-ⅰ)행복이 엎드렸을
반달을
감청푸른 하늘에
달콤하게
반쯤을 찾느라고
반쯤은 곰삭아 있는 노랗고도 분홍의
사랑이 엎드렸을
끝 푸른
귀를 열고 하늘을 밝히느라 하늘의
노란 창의
반쯤은 행복 잠이 든 노랗고도 분홍의
반달로 엎드렸을
청 푸름 빌려다가
물에 떠 초롱불을 켜들고 반달 귀를
쫑긋 펴 하늘 위로 가
노랗고도
분홍의-<사랑반달 행복찾기-새벽기도․1607> 전문
ⅱ)물기둥
하늘로만 오르는 버릇이다
과수원 하늘열매
꿈으로
반쯤 감고
마지막
남은 반쪽은
기둥으로
서 있다-<행복과수원-새벽기도․1632> 전문
ⅲ)물들이
빨주노초
꽃물의 기둥으로
파남보 버릇으로
웃음의 유혹으로
솟아서
빨주노초파남
보라
꽃이
솟는다-<물사랑기둥-새벽기도․1635> 전문
위의 시조에서 ‘빛’과 ‘물’의 이미지가 단편적으로 사용될 때는 각각 본유적으로 기능하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얼개로 보아 요소요소에서 유기적으로 상호 작용하고 있음도 동시에 살필 수 있다. 5-ⅰ)에서 먼저 ‘반달’은 ‘행복’과 ‘사랑’을 감지하고 있는 영성체이다. 시인은 두 가지 두드러진 색상 대조를 통하여 중심과 주변의 경계를 분명히 구별하고 있다. 다시 말해 바탕이 되는 하늘은 ‘감청푸른’・‘끝 푸른’・‘청 푸른’으로, 그리고 그 중심에 자리를 틀고 있는 반달을 ‘노랗고도 분홍’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을 색채 심리의 관점에서 다시 분석하면, 파랑은 슬픔과 우울과 죽음을, 노랑은 기쁨을 그리고 분홍은 행복을 상징한다. 결국 반달은 항상 기쁨과 행복을 전하며 주변의 슬픔과 우울과 죽음을 불식시키는 거룩한 존재임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ⅱ)에서 물은 ‘하늘로만 오르는 버릇’이라는 서술에 의해서 고채-액체-기체로의 상승적 변환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그 물은 다시 ‘꿈’과 ‘기둥’으로 양분된 상태로 존재한다. 여기서 ‘꿈’은 상위 단계를, ‘기둥’은 하위 단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지적하였듯이 이영지의 시조에서 물은 피조물 존재의 연쇄를 보여주는 대표적 매개체인데, 그것을 특히 인간으로 상정(想定)한다면 ‘꿈’은 영혼을, ‘기둥’은 몸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상승하려는 영혼과 하강한 채 머무는 몸의 분리는 곧 합일에 이르지 못한 영과 육의 반목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ⅲ)에서 물이 완전히 솟아남으로써 영과 육이 하나로 상승하여 궁극적 합일에 이르는 것을 무지개의 일곱 가지 색과 같은 극적 수사로 서술하고 있음도 빼놓을 수 없다.
지금까지 내용을 종합하면 이영지 시인의 영적 환상은 각각 상황마다 달리 표현하던 빛(색상)을 합쳐 마침내 칠색 무지개라는 고도의 상징을 통해 통전적인 영성을 완성하고 있다. 다시 말해 물은 ‘꿈’의 영혼과 ‘기둥’의 몸이 합쳐져 끝내는 물성이 변환됨으로써 존재의 상승적인 전환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의 상승 변환은 세속의 타성에 젖은 ‘마음’을 치유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영지의 ‘소망’ 시편에서는 끊임없는 신앙인의 수련에 의한 치유의 과정이 여실이 드러나는데, 그 가운데 가장 도드라지는 것이 바로 ‘웃음의 치유’라 할 수 있다. 한 예로 성경에는 실제로 창조주의 웃음에 대한 명시적인 구절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행적을 더듬어보면 그분의 모든 창조의 행위는 다름 아닌 웃음으로 드러난다고 한다. <창세기> 1장 마지막 절에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다.”라는 기록이 전해진다. 바로 이 표현 속에서 하나님의 웃음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비약하면 하나님은 웃음을 창조하셨고,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도 심각함이나 엄숙함보다는 기쁨과 웃음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영지의 ‘소망’ 시편에서도 ‘빛’과 ‘물’의 관상에 의한 존재의 행복한 변환은 결국 웃음으로 확연하게 밝혀지게 되는데, 그러한 시조의 좋은 예로 아래의 작품들을 꼽을 수 있다.
6-ⅰ)해에다
물을 섞어 아침을
사랑 띠를
햇살이 살집 안에 햇볕을 널어놓아
숨구멍 하나하나에 별이 송송
사랑 띠
웃음에 별이 뜨고 울음이 앉는다며
예쁘게 콩콩거릴
바람의
물방울이 숨구멍 햇살을 열러 포롱포롱
사랑 띠-<사랑 띠를 매-새벽기도․1629> 전문
ⅱ)웃음의
사랑 봐 다
하늘의
사랑 봐 다
웃음을 바다에다
철
철
철
뿌려
뿌려
바다가 몽땅 채워
씻어져
내리느라고 해당화가 웃는다-<사랑 봐 다-새벽기도․1706> 전문
위의 시조에서 웃음은 저마다의 서사 진행에서 결정적인 국면 전환을 가져오며 시적 긴장과 갈등을 해소시키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6-ⅰ)에서 우선 ‘해’의 영성에 의해 ‘물’의 존재성을 변화시킬 때 혹은 ‘햇살’의 영성체 안에 ‘별’의 몸성을 의탁할 때조차도 이들의 관계를 묶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 띠’라는 진술이 먼저 나온다. 그리고 개별자인 별은 ‘웃음’으로 ‘울음’을 잠재우고 사랑의 주체로 정립할 수 있음도 보여준다. 또한 ⅱ)에서 병치 관계의 두 시문에서 ‘웃음’=‘하늘’이라는 등식을 얻을 수 있다. 즉 웃음의 주체가 하늘이고 보면 그 무한한 하늘웃음의 사랑은 광활하지만 황량한 ‘바다’도 다 채워 씻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놀라운 은총으로 말미암아 바닷가의 척박한 모래땅에서 자라는 ‘해당화’마저도 더불어 웃을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사랑의 전면적 치유에 대한 최고의 마음 찬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Ⅳ. 사랑: 행복의 언약
인간이 살아가는데 행복을 필요로 한다.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행복이라면, 우리는 행복을 어떻게 정의내리고, 또한 어떻게 찾을 것인가? 행복은 신의 선물인가, 아니면 실존적으로 탐구해야 할 그 무엇인가? 어느 철학자가 던져준 그 명제에서처럼 아마도 행복이란 정복의 대상이 아닌 우리를 온전히 만족시키고 완전한 충족을 가져다주는 그런 사랑의 실천에서 찾아야 할지 모른다. 이영지의 ‘사랑’ 시편의 행복 추구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다.”라는 다분히 종교적이지만 동시에 보편적인 그녀 나름의 ‘사랑 법’(<사랑 법-새벽기도․1715>)에서 찾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녀의 그 시법을 따르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지으셨고, 사랑으로 우리를 돌봐주시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다시 그분에게로 돌아가야 하는 이상, 궁극적인 행복은 결국 사랑일수밖에 없다는 것이 된다. 그 사랑의 언술행위는 결국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 관계로부터 출발하고 있는데, 이영지의 그러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대표 시조로 아래의 두엇 작품들을 참고할 수 있다.
7-ⅰ)이리로
와
누으라
하시곤
일으키신
하늘의 약속이다-<사랑버릇-새벽기도․1709> 중에서
ⅱ)가슴에 불을 달고 온
봄이
짜안
사랑의 돛이어라
닻올린 5월로만
웃어준 빛의 언약은 사랑의 물
이랑의-<짜안-새벽기도․1703> 중에서
위의 시구에서 공통적인 계약의 행위는 어떤 의미에서 일방적이고도 수직적인 관계로 드러나고 있음을 주의해서 관찰해볼 필요가 있다. 7-ⅰ)에서 피조물과 ‘약속’하는 또 다른 주체가 ‘하늘’과 같은 인간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한 지위의 존재성을 가지고 있다. 동사 ‘누으라’와 ‘일으키신’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늘’은 능동적으로 ‘약속’을 정(명령)하고 또 그것을 몸소 실천하신다. ⅱ)에서 쌍방 간에 용인하는 ‘언약’은 ‘빛’과 같이 세속적인 잣대로서 절대로 평가를 내릴 수 없는 내용의 것이다. 게다가 ‘빛’의 화신인 ‘불’로 인해 역시 계절(‘봄’)의 이행이 능동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봄’=‘사랑의 돛’이고, ‘빛의 언약’=‘사랑’이라는 서사의 흐름도 무리(無理) 없이 전개되고 있다. 이와는 달리 두 시조의 시적 화자는 명실 공(共)히 수동적으로 ‘약속’과 ‘언약’을 받들며 섬기고 있을 따름이다.
물론 사랑을 육체적・감정적 사랑의 에로스(Eros), 심리적・사회적 사랑의 필레(Phile), 그리고 영적・신적 사랑의 아가페(Agape)로 구분하여 조명할 수도 있겠지만, 이영지의 경우 사랑은 마땅히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에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은 사랑의 반대말로 ‘증오’가 아니라 ‘자기중심’인 것이 규정되므로, 그 사랑은 주체와 타자 간에 주고받는 대등한 행위라기보다는 오히려 절대적인 헌신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문학인으로써 감성으로 체험하고 또한 목회자로써 다시 영성으로 소생해서 실천하는 이영지에게 사랑은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도 결코 소극적인 의미로 축소되지 않았을 것이다. 기실 그녀의 사랑은 보다 적극적인 행복의 관상으로 부단히 확장하게 되는데, 하나님 사랑의 언약으로써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것만 같은 행복의 양상이 이영지의 작품 세계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진되고 있는지를 아래의 시조들을 중심으로 정리해보기로 한다.
8-ⅰ)사랑의 가슴으로만
행복가슴-<행복필리리-새벽기도․1591> 중에서
ⅱ)사랑이 앉으신다
약간은 오른손을 구부려 주먹 쥐자
행복은
이끌려서
그 안에 아주 깊숙이 들어가서 앉는다-<사랑바다 행복-새벽기도․1617> 중에서
ⅲ)사
랑
의
비단방석
사슴의
눈이 된다
비늘이 벗겨지자 아침의 미소로 온
행복이 손을 이끌면 암 사슴의
꽃비로-<비단방석-새벽기도․1579> 중에서>
ⅳ)허리를 돌릴 때와 꽃 보라 철쭉보라 물결이 울렁울렁 행복이 몽올몽올
사랑 잎 함께 어울려 행복으로 돌리며
허리를 돌리느라 사랑이 행복 감고 봄빛을 불러오니 아아아 어지러워
봄 감는 하루 종일의 봄이 오게 돌리며-<행복별 띄-새벽기도․1586> 중에서
위의 시조에서 행복의 전제 조건이 사랑임을 명약관화(明若觀火)하게 확인할 수 있다. 8-ⅰ)에서 사랑=행복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기에 사랑의 가슴만으로도 ‘행복가슴’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두 변수 중 선후 관계가 존재하는데, 이후의 시조들은 변함없이 그것을 중시하고 있다. 특히 ⅱ)에서 ‘사랑’이 먼저 자리하고 그것에 이끌려서 ‘행복’이 찾아오는 주종(主從) 관계를 명시하여 기술하고 있다. ⅲ)에서 사랑과 행복의 연이은 교체로 ‘새 삶’이 찾아든다는 것인데, ‘비단방석’은 매개체로 사랑과 행복이 뒤바뀐다. 이 때 존재자는 사슴인데, 1연에는 존재의 변환이 사슴의 ‘눈’에서 ‘꽃비’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3연에 가서 사랑의 행복 전환으로 존재자의 ‘새 삶’이라는 질적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ⅳ)에서 행복의 소용돌이로 ‘사랑 잎 함께 어울려’와 ‘사랑이 행복 감고’와 같은 묘사에서처럼 사랑과 행복의 불리 불가능성, 즉 동질화의 과정을 집약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사랑의 행복 전환은 단계적인 질적 변화를 동반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존재자의 내면의 변화, 곧 치유와 성장에 의해 하나님과의 친밀감의 형성으로 나아가는 계기로 작용하는 연행적 과정이다. 이영지의 작품 세계에서 이러한 사랑의 행로(行路) 혹은 통로(通路)는 존재의 상승적 변환의 척도로서 작용하므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시조에서 존재를 점층적으로 상승 견인하는 다양한 의미장의 예로는 길・계단・그네・바구니・물레・두레박 등이 등장한다. 다른 한편에서 이것은 치유의 최종 심급을 보여주는 ‘도약’ 혹은 ‘비상’의 출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인간나라 시간이 종국(終局)에 끝난다 할지라도 곧이어 하나님나라 시간의 도래(到來)를 의미하는 영원한 순간(행복)으로의 입성(入城)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영지의 ‘사랑’ 시편에서 사랑의 행로에 관한 대표적 예를 찾아 고찰해보기로 한다.
9-ⅰ)꽃 따라 길을 가다
오늘도 길을 가다
어여쁜 연분홍 볼 연분홍 살 얻으면
나는 늘
분홍 수줍음
사랑으로
웃어라-<꽃 따라 길을 가다-새벽기도․1571> 중에서
ⅱ)행복의 흙에서 온
대추를 낳아놓아
맴도는
돌
계단의 사랑을 오르면서-<대추나무의 행복-새벽기도․1588> 중에서
ⅲ)아
아주
작은 잎이 바람에
그네 뛰면
풀잎은 바람그네 숨소리 하늘하늘
하늘이 그때부터 높아져서 뽐낸다
풀잎에 파란 꿈이
가만히
엎드렸다
숨소리 하늘그네
아
아주 작은 숨을
하늘에 얹어 놓고는 마냥마냥 즐겁다-<작은 풀잎과 사랑사이-새벽기도․1726> 중에서
위의 시조에서 주체의 공간 이동이 처음에는 수평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점차 수직적이고 상승적인 단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역시 확인할 수 있다. 9-ⅰ)에서 먼저 꽃길을 따라 수평적으로 걷는 일상의 수행 과정에서 ‘연분홍’의 ‘볼’과 ‘살’이라는 존재성을 획득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분홍’색은 행복을 대변하는 대표적 색상인데, 시적 화자로 나오는 ‘나’는 언제나 그 ‘분홍’의 화신으로 행복의 절정에 도달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ⅱ)에서 ‘행복의 흙’이 상징하듯이 지상의 행복한 존재자로 지음 받았기에 응당 고난과 시련을 상징하는 수직의 ‘돌 / 계단’을 사랑으로 오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ⅲ)에서 ‘그네’는 “하늘이 땅 아래로 오려면 / 그네이다(<사랑해의 U-새벽기도․1634>)”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늘의 계시를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지상의 작은 미물인 ‘(풀)잎’이 ‘그네 뛴’다는 것은 하느님의 부름에 응(호흡)함을 나타낸다. 그리고 지상에서 아주 작은 존재의 ‘숨소리’로 참생명을 사는 것이야말로 바로 천상의 지극한 삶을 그대로 이어가는 동일한 길임을 ‘하늘에 얹어 놓고’라는 구절에서 암시받을 수 있다. 이 어찌 하나님 사랑의 언약으로 지상에서 아무리 혹독한 시련의 길을 거치게 되더라도, 궁극적으로 하늘의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인간의 무한한 축복을 영원한 행복이라 일컫지 않을 수 있겠는가?
Ⅴ. 나오며: 내심낙원(內心樂園)의 열림
종교시는 신앙인의 실천의 문학이다. 신앙인에게 주어진 그 어떤 성품이나 속성들도 소중하고 영원하기로는 믿음・소망・사랑의 세 가지를 능가할 것이 없을 것이다. 하여 이 세 가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고 베풀어 주신 모든 것들의 총합이라고 부를 수 있다. 또한 이 셋은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운 본성을 부여받은 갱신된 마음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으로 인간의 낡은 본성으로부터는 솟아나올 수 없다. 그렇기에 이영지의 ‘사랑시조’ 편에서 극단적인 두 세계의 경계를 설정하고, 그 안과 밖의 대조를 통하여 내심낙원(內心樂園)의 향방을 결정짓는 시조를 한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10-ⅰ)오
오오 밤이 깊으디 깊은 밤엔 나서지
말아라
불을 켜고 있어라 불 밝혀라-<행복단지-새벽기도․1623> 중에서
ⅱ)지금은
돌아오라
보라색
옷을 입고
도라산 문 안으로
도라지 꽃피우라
도라지
바구니 철철
넘치도록
오너라-<도라지-새벽기도․1570> 전문
위의 두 시조는 선과 악을 가르는 행동반경이 명암(明暗)과 안팎의 이원론(二元論)적인 경계로 확정된다. 다시 말해 선(善)의 시공간(크로노토프)은 ‘봄’・‘지금’・‘새벽’・‘아침’의 시간과 ‘창’과 ‘문’의 안쪽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또한 선의 주체는 ‘청지기’ 혹은 ‘문지기’로 역할이 정해져 있다. 결국 선의 행위는 시공간의 선택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10-ⅰ)에서 어둠의 세계인 ‘밤’은 금기의 시공간이므로 빛의 세계로 이동해야 한다. 이영지는 바로 이 ‘불’의 모티프로 <새벽기도>라는 그녀 평생의 ‘신앙’과 ‘시작’의 순례를 떠나게 되는 것이다. ⅱ)에서 ‘보라색’은 고통을 치유로 바꾸는 힘, 곧 완성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지금’과 여기(‘문 안’)가 피안(彼岸) 또는 천국의 시공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존재자에게 있어 ‘안’은 내면(內面)을 의미하므로 안의 ‘꽃’ 혹은 안의 ‘넘침’은 어쩌면 내심낙원의 열림을 표현하고자 한 것인지도 모른다.
필자는 지금까지 이영지의 ‘믿음’ 시편에서 하나님께 관한 지식이 자라날수록 그분을 향한 믿음과 신뢰가 커져가고, ‘소망’ 시편에서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의 실현과 기대가 새로운 마음의 차원으로 승화되어가고, 그리고 ‘사랑’ 시편에서 사랑이 이 땅에서 계속 자라듯이 하늘에서도 끊임없이 자라나서 마침내 영원한 행복에 다다랐음을 고찰해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영지의 불멸의 연작시조 <새벽기도․1~1727(?)>가 크게 보아 ‘사랑시조’ 편으로 포용되는 종교시라는데 논란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십삼장 십삼절에서 “왜 사랑이 믿음과 소망보다 큰가?”라는 역설적인 결말과도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는 우리가 믿음이나 소망을 가질 수 없듯이, 이영지의 신간 시조집 『행복의 물을 먹으며, 사랑으로』는 ‘믿음’ 시편・‘소망’ 시편・‘사랑’ 시편으로 나누어 그녀의 행복의 궤적을 더듬어 볼수록 그 구심력은 여전히 사랑임을 깨달을 수 있다. (2009년 4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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