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한다는 것은 행복한 고통입니다
김상근 수도교회 전 담임목사
김상근 목사는 한국신학대학교(現 한신대학교)와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수도교회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했다. 그 후 수도교회 부목사와 담임목사를 거쳐,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총무와 총회교육원 원장, 대한기독교서회 사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실행위원으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발전과 개혁을 위한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김 목사는 법적 은퇴를 몇 해 앞두고, 후배를 위해 일찍 물러서기로 했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그는 강단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변함없는 열정으로 헌신할 것이다. 설교는 한 판의 씨름과도 같다고 말하는 김 목사는, 설교에 있어 삶의 정황(context)를 탐색하고, 공유하는 일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오늘의 물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분명한 문제의식을 담은 설교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막중한 임무를 늘 안고 사는 설교자이기에, 설교한다는 것은 행복한 고통이다.
저는 조만간 자원 은퇴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법적 은퇴인 70세까지는, 아직 두어 해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후배를 위해서는, 조금 일찍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후학이 있다면, 그때는 이미 은퇴목사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설교 강단에, 고정적으로 오른 지는 꽤 오래 되었습니다. 1982년에,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총무를 맡았고, 다음 해인 1983년 말에 담임하고 있던 교회의 설교단을 떠나면서, 설교자의 자리를 떠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매주일 설교를 할 때는, 그것이 언제나 큰 짐이었습니다. 그러나 강단에서, 정기적으로 설교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설교에 대한 애착은 무척 큽니다. 그때가 좋았고, 그때가 목사 같았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합니다. 목사는 역시, 매주일 설교를 하는 것이 정도(正道)인 것 같습니다. 매주일 설교한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말하자면, 행복한 고통이지요.
설교는 한 판의 씨름 저에게 있어서 설교는, 언제나 한 판의 씨름과 같았습니다. 저는 주일 설교를 처음 하게 되었을 때, 목요일 밤부터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금요일에도 짬짬이 쓰고, 토요일은 거의 온 종일 준비에 매달렸습니다. 그렇게 해도, 주일 새벽에야 겨우 끝낼 수 있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고, 힘들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혼신의 힘을 쏟아 설교했습니다. 어떤 때는, 손에 쥐가 나기도 했습니다. 강대상을 부여잡은 손이 떨어지지 않을 때가 자주 있었습니다. 발이 땅에 닿아 있는지, 공중에 떠 있는지, 가늠할 수 없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여름철에는 땀을 옷에서, 짜낼 만큼 힘을 썼습니다. 항상 긴장했고, 항상 최선을 다했습니다. 거드름을 피울 여유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준비하고, 그렇게 설교했습니다. 지금 저는 특정 교회의 주일 예배에 참석합니다. 가끔 이 교회, 저 교회를 순방해 보기도 합니다. 좋은 설교를 많이 듣습니다. 다행입니다. 온 종일 행복합니다. 아내와 방금 들은 설교에 대해, 꽤 긴 시간 대화를 나눕니다. 더 많은 것을 삶에 담습니다. 그러나 가볍게 하는 설교, 만담이나 교리, 교훈, 정체불명의 예화 일변도의 설교를 듣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날은 하루 종일 우울합니다. 교양 강좌 같은 설교를 듣게 되면, 그렇게 쓸쓸해질 수가 없습니다. 건성으로 하는 설교는, 정말 싫습니다. 특히, 젊은 목사가 그리할 때는, 정말 화가 납니다.
설교자가 더듬어야 할 두 가지 여러분에게 있어서 설교란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 우리의 상황, 우리의 문제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그것을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로서, 저는 언제나 촉각을 예민하게 세워, 두 가지를 더듬습니다. 먼저, 설교를 들을 대상을 더듬는 것입니다. 그들이 지금 부딪쳐 있는 삶의 현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처해 있는 삶의 상황을 탐색하는 것입니다. 그 상황이란, 어떤 특정한 이의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도 얼마든지 같은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나는 그런 처지에 처하게 될 것 같지 않지만, 공유해야 할 그런 것일 수 있습니다. 어느 때는 그것이 사회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역사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개인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사회-역사적 차원을 가지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는 신학이 말하는 콘텍스트(context)입니다. 소위 삶의 정황이지요. 이것을 정리하고 좁힙니다. 문제의식을 가지는 겁니다. 그리고 저의 촉각은 성서를 더듬습니다. 우리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답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설교할 본문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서는, 거기 등장하는 온갖 콘텍스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치심이고 계시입니다. 사실 콘텍스트를 가지지 않은 성서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서는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또 당면하지 않을 수 없는, 모든 상황을 모조리 담고 있습니다. 그것을 찾지 못하는 것은, 성서에 대한 탐구가 얕기 때문일 뿐입니다. 저는 교인들이 부딪쳐 있는 상황이든지, 역사현실이든지, 그것을 항상 가슴에 담고, 성서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어이, 하나님의 말씀이 보입니다. 들립니다.
설교 준비의 어려움 다음으로, 성서 본문의 콘텍스트와, 오늘의 상황(문제)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를 살핍니다. 억지로 가져다 붙이는 견강부회(牽强附會)적인 설교를 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때의 삶의 자리, 상황을 공유합니다. 이 대목에서, 주석을 깊이 참고하는 것은 필수입니다. 그리고는 씁니다. 그동안 주석에서 얻은 것들을 비롯하여, 말했으면 하는 것들을 일단 모조리 씁니다. 20분 설교이니, 원고를 길게 쓰려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여간 모두 씁니다. 그리고는 줄이고, 고치고, 앞뒤 순서를 바꾸고, 다듬기를 거듭합니다. 말투를 수려하게 하고자 함은, 전혀 아닙니다. 전하려 하는 메시지를, 짧은 시간 안에 옹골지게 전하기 위함입니다. 20분 설교, 너무 짧습니다. 잡은 콘텍스트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기에 1회 설교는 많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저는 주제 설교를 했습니다. 한 주제를 가지고, 세 주일 내지, 네 주일을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성서 본문을 읽기에 앞서, ‘오늘의 물음’이라는 간단한 프레젠테이션을 합니다. 문제의식, 상황, 콘텍스트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는 취지였습니다. 하여간 설교하는 것은 물론, 설교를 준비하는 것도, 그렇게 어렵고 힘들 수가 없었습니다.
설교의 시작을 콘텍스트로 저의 설교 방식에 문제가 있음을 압니다. 텍스트(text) 우선인 신정통주의 신학을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 하는 점이 관건(關鍵)입니다. 배운 바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우리에게 옵니다. 그 말씀을 받아 콘텍스트에 설교하고, 우리는 복종의 응답을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교실에서 배운 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콘텍스트가 예리하고 급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저와 같은 설교자는, 설교 본문 편식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즉 본문을 고르게 선택하지 못하는 결과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남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을 설교자가 의식한다면,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도 ‘콘텍스트→텍스트→텍스트 재해석’으로 이어지는 설교가 더 나은 설교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텍스트가 중요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칫 콘텍스트를 돌아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설교가 물음이 없는 답이거나, 물음이나 문제와는 관계없는 엉뚱한 답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을 공허하게 하고, 존재를 추상화시킵니다. 저는 콘텍스트, 즉 우리의 문제로부터, 설교를 시작합니다. 지금 우리를 싸고 있고, 우리에게 도전해 오고 있는 현실이 무엇인가? 저는 그것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 설교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여간 설교자는 행복한 고통의 자리에 있습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약력 수도교회 담임목사 역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총무와 총회교육원 원장 역임, 대한기독교서회 사장 역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실행위원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발전과 개혁을 위한 특별위원회 위원장, 기장 서울노회 은퇴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