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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동방의 독수리
(이사야 46:9-11)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하였노라. 내가 동방(東方)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謀略)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
1. 하나님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십니다.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라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이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인데 그러면 이 독수리가 누구일까요? 역사적으로 볼 때에 서방에서는 독수리를 높이 알았지만, 동방에서는 그리 높이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십니다. 여기에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1) 우선 서방의 독수리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① 세계 여러 나라의 국기들을 살펴보면 독수리를 그려 넣은 것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옛날 러시아 국기에는 쌍두 독수리가 있고, 독일의 국기에도 독수리가 있었습니다. 멕시코 국기에는 독수리가 뱀을 잡아 가지고 있는 그림이 있습니다. 제가 찾아본 국기들만 해도 적어도 10개는 됩니다. 그런데 미국 국기에는 독수리가 나오지 않지만, 미국의 국가 휘장에는 머리흰독수리 배후에 성조기가 휘날리는 그림이 있습니다. 이 독수리가 미국의 상징입니다.
또 휘장(徽章)이라는 것이 있지요? 학교에 배지가 있듯이 나라의 배지가 휘장입니다. 독수리를 휘장으로 사용하는 나라는 나치 독일, 러시아, 세르비아, 그리고 미국 등입니다. 그런데 짐승의 왕 사자나 바다의 왕 고래 같은 것은 국기에 들어가지 않고, 왜 독수리가 들어가 있을까요?
② 독수리는 원래 로마 제국의 상징이었답니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독수리 조각상 밑에 로마자로 군대 이름이나, “로마 만세” 같은 글을 적은 팻말을 들고 전쟁에 나갔습니다. 그래서 그 후 “독수리가 하늘의 제왕이듯이 로마는 지상의 제왕이다.”라는 뜻으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로마가 망하고 그 독수리 문양이 유럽 각 나라로 전파되었는데, 신성 로마 제국 때는 독수리를 마크로 삼았습니다. 동유럽은 거의 독수리 문양을 사용합니다. 루마니아 폴란드 등인데, 러시아 황제는 로마 황제보다 더 위대하다고 해서 쌍두 독수리를 문양으로 삼았답니다.
③ 그러나 독수리를 국기에 넣었다고 해서 다 로마처럼 위대한 나라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독수리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미국의 상징이 되었는데 미국은 세계를 제패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면 미국이 로마 제국을 이어받았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곧 로마 독수리의 아들이 미국 독수리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로마의 독수리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독수리를 찾아내고, 그 독수리를 나타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④ 미국은 동방의 독수리는 아닙니다. 서방의 독수리인 미국이 세상 그 어느 나라보다도 더 많이 도와준 나라가 있는데, 곧 이스라엘과 대한민국입니다. 이 두 나라는 미국이 낳은 나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나라가 오늘날 세계를 움직이는 일에 그 중요성이 점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서방 독수리가 낳은 동방의 독수리는 어느 나라일까요? 이스라엘은 위치상으로 보아 동방의 독수리가 아닙니다. 진짜 동방의 독수리는 대한민국뿐입니다.
2) 모든 것이 다 그러하지만, 독수리도 좋은 뜻으로 사용될 때가 있고 나쁜 뜻으로 사용될 때가 있습니다. 나쁜 뜻을 먼저 봅시다. 독수리는 부정한 동물입니다. 레위기 11:13에 “새 중에 너희가 가증히 여길 것은 이것이라. 곧 독수리와 솔개와 어응과…”라고 하였습니다. 곧 독수리는 다른 동물을 해치고, 죽은 시체를 찾아가서 피를 빨거나 살을 뜯어먹습니다. 예수님이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마 24:28)라고 하셨고, 욥기 39:30에는 “그 새끼들도 피를 빠나니 살륙 당한 자 있는 곳에는 그것도 거기 있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성질 때문에 독수리는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악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호세아 8:1에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의 심판하는 장면을 원수가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잠언 23:5에는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라고 하였습니다.
3) 독수리가 좋은 뜻으로 사용된 경우를 봅다.
① 능력과 복의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마가 들끓는 죄악 세상에서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자기 백성을 그의 능력의 손길로 붙들어 보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급에서 어떻게 구원하셨으며, 광야 40년 동안 어떻게 보호하셨습니까? “내가 애급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 19:4)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서운 바로의 권세를 꺾고 애급을 탈출하게 한 것과,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하고 구름기둥 불기둥의 기적적인 사건들을 전개하면서 그런 일을 힘이 있는 독수리의 날개로 표현하였습니다. 다윗은 성도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할 때,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신다.”(시 103:4-5)라고 했습니다.
② 은혜 받은 성도의 삶을 상징합니다. 이사야 40:30-31에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죄악의 공해로 피곤하고 지친 세상에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의 새 힘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치 창공을 날아오르는 독수리처럼 패기와 야망과 꿈을 펼쳐나가게 됩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욥은 인간이 감내하기 어려운 가장 큰 시련을 당했으나 인내하며 이를 극복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욥의 신앙행위를 칭찬하시면서 독수리의 생태를 설명하였습니다. 욥기 39:27-29에 보면 독수리는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또 그것은 낭떠러지에 집을 짓고 뾰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 데 거하며 멀리서도 움킬만한 것을 살피고 찾아내는 예리한 눈을 가졌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것은 모두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과 구별된 성도의 특징적인 삶을 묘사한 내용입니다(빌 3:20-21).
③ 하나님의 약속과 은총을 뜻합니다. 모세는 신명기를 기록하면서 출애급의 영도자답게 지난날의 일들을 회고하고 이를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고 규정지었습니다(신 1:10-11).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생각하고 그 약속을 지키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신 7:6-9). 신명기 32:4에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독수리 날개도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진실무망(眞實無妄)하게 언약을 성취하심과 강력한 은총의 의지를 표현하신 내용입니다.
2. 독수리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적인 삶을 나타냅니다.
1) 첫째 특징은 시련과 인내입니다.
① 신명기 32:11에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라고 하였습니다. 독수리가 조류계의 왕으로서 맹위를 떨칠 수 있는 것은 새끼 때부터 엄한 훈련의 과정을 거쳐서 되는 것입니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를 양육할 때 특별한 방법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독수리는 새끼가 어느 정도 자라게 되면 보금자리 안에 있는 깃이나 검불 같은 부드러운 것들을 물어내어 바깥에 버립니다. 딱딱한 집에서 가시에 찔리고 아픈 것을 참아야 하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때로는 보금자리를 흔들어 거기서 떨어뜨리기도 합니다. 새끼가 공중에서 떨어지면서 날개를 파닥거리다가 땅에 추락할 때가 되면 어미나 아비가 쏜살같이 날아와 날개로 받아 올리기도 하고, 혹시 물에 떨어져 허우적거리면 날개로 업어 건네곤 하는 것입니다(출 19:4). 이런 훈련을 반복하는 가운데 강한 체력과 전투력을 기르게 되고 여간 어려운 일도 참아내며 두려움을 모르는 담력을 키우게 됩니다.
②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세상을 사는 동안 여러 가지 시험에서 견디고 이길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킵니다. 독수리가 새끼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듯이 자주자주 우리의 보금자리를 흔들어서 경각심을 갖게 하고 인내력과 담력을 키우는 훈련을 반복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7)라고 하였습니다.
③ 세계 역사를 볼 때에 가장 시련을 많이 받은 민족은 이스라엘이고, 또한 대한민국입니다. 물론 더 큰 시련을 받은 나라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나 민족들은 다 없어졌습니다. 시련과 고난이 극심해도 기어이 이것을 이기고 민족을 보존하고 나라를 세워 나간 것은 이렇게 두 나라뿐인 것입니다.
2) 성도의 구별된 생활
① 욥기 39:27에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의지함이냐?”라고 하였습니다. 28절에는 그것이 낭떠러지에 집을 지으며 뾰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 데 거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독수리의 생태 가운데 특별한 경우를 나타낸 것입니다. 독수리는 집을 지을 때 층암절벽 위에나 깎아지른 벼랑 끝에다 둥지를 튼다고 합니다. 팔레스틴에서는 주로 요르단 계곡이나 그 주변에 있는 험준한 바위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들고 있어서 다른 동물이나 해치려는 세력이 접근을 못하게 합니다. 이것은 그들만의 활동영역이요 외부와 차단된 요새지일 수도 있습니다.
② 이는 세상과 구별된 성도들의 거룩한 삶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하나님과 교통하는 성별된 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솔로몬은 그의 반려자인 술람미 여인을 향해서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아 2:14)라고 하였습니다.
③ 거룩한 생활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금광석을 용광로에 넣어 뜨거운 불로 녹여서 찌꺼기는 다 떨어버리고 순수한 금만 뽑아내는 것같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 시련을 주시고 성결한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지난 8월 15일 아침에 훼드럴웨이에서 건국대통령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 주최로 건국 62주년 기념 조찬기도회가 있었습니다. 저에게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기 위한 기도를 하라고 해서 기도를 했습니다. 과연 무엇이 선진국입니까? 선진국은 과학문명이 발달하고 GDP가 높아야 하겠지만, 그보다 훨씬 더 시급한 것은 도덕성입니다. 도덕이 무너지면 결코 선진국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선진국이라고 하던 구라파와 미국 같은 큰 나라들이 도덕적으로 말할 수 없이 타락해가고 있지 않습니까? 실로 오늘날에는 선진국이라 할 나라가 없습니다. 동성 간의 결혼을 허락한다니 짐승들의 세계에서도 꿈 꿀 수 없는 일을 어떻게 인간들이 합법화시킨다는 것입니까? 그래 가지고 어떻게 선진국이 됩니까? 우리나라는 도덕적으로 반듯한 나라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그런 도덕성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의 심판을 의식하면서 거룩하게 살아가게 될 때에 비로소 선진국이 되는 것입니다.
3) 신령한 세계를 보는 환상입니다.
① 포로시대의 선지자 에스겔은 그발강 가에서 신비로운 하늘나라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독수리의 얼굴이었습니다(겔 1:10). 독수리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두 날개로 크게 뻗어 구만리장천을 주유하며 세상을 내려다봅니다. 또한 독수리는 예리한 눈을 가지고 있어서 멀리서도 움킬 것을 찾아내고 날쌔게 잡아챕니다. 욥기 39:29에는 “거기서 움킬만한 것을 살피나니 그 눈이 멀리 봄이며”라고 하였습니다.
② 하나님의 백성은 신령한 눈을 가지고 있어서 세상을 살면서도 하늘나라의 환상을 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마음의 눈이 밝아질 때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의 소망과 하늘나라에 예비된 기업의 풍성함과, 날마다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능력의 원천이 무엇임을 발견하게 됩니다(엡 1:18-19). 이처럼 신비로운 계시의 환상을 품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고상한 소망을 향해 전진하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빌 3:20).
③ 우리나라는 마지막 때에 신령한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아담은 생령이었기에 짐승들을 다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영의 사람이 되면 육의 사람을 다스릴 수 있게 됩니다. 육은 육으로 다스려지지 않습니다. 힘써서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이제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를 신령한 사람이 되게 하시지 않습니까?
3. 동방의 독수리는 복음의 마지막 주자(走者)입니다.
성경상의 기원으로 볼 때 한국인과 유대인은 뗄 수 없는 유대관계가 성립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 조상 에벨로부터 분리된 형제족속이기 때문입니다. 에벨의 큰 아들 벨렉의 후손 중에서 유대민족이 나왔고, 작은 아들 욕단의 후손 중에서 우리 한민족이 나왔습니다(창 10:21,25,30; 11:10~30). 그런데 성경은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잠 17:17)라고 말씀합니다. 형제란 자기의 형이나 아우가 위경에 처했을 때 끝까지 돕는 존재란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세우신 것은 누군가를 도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난 8월 15일 아침에 신호범 박사께서 인사말을 하는 중에 빌리 그래함 목사님을 만났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분이 신 박사께 말하기를 “장차 21세기에 미국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될 것인데, 그때에 이 나라에 와서 이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해 줄 백성은 한국 사람들뿐이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격적인 말씀입니까? 우리는 기도하는 민족입니다. 6.25때에는 미국이 우리의 친구가 되어 우리를 도와서 살려냈습니다. 이제 서방의 독수리인 미국이 어려움을 당하여 신음하고 있을 때에 동방의 독수리인 한국이 이 나라를 도와서 살려야 합니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이 어려움을 빠져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유대민족을 구원할 도구로 우리 한국 백성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이사야서가 말세에 유대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동방’에서 예루살렘으로 복음을 전할 자들이 갈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근본적 이유입니다.
바울이 예언한 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롬 11:25,26)라는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겠습니까?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유대민족에게 능히 복음을 전하게 하시어(롬 10:10~15) 마침내 온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을 받게 하실 것입니다.
1) 본문은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동방의 먼 나라’에서 시온으로 사람을 부를 것이라고 분명히 예언하고 있습니다.
① 12절입니다. “마음이 완악하여 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나를 들어라.” 여기에서 ‘의’란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지요? 로마서 3:22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② 또한 “마음이 완악하여”란 말씀은 유대인들이 완고하게 복음을 거부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롬 11:25하).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롬 11:7).
③ 즉 12절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마음이 완악하여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유대인들아. 나에게 청종하라.”라는 뜻입니다. 왜 하나님은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나에게 청종하라.’고 말씀하시는가요? 그 이유는 13절에 있는데, 그들에게 구원을 베풀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나의 구원이 지체치 아니할 것이라. … 내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
여기에서 ‘나의 의’란 ‘하나님의 의’로서 ‘복음’을 뜻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즉 12~13절 전체의 뜻은 하나님께서 마음이 완악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멀리’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을 ‘가까이’ 가져가시어 그들을 구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④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유대인들을 복음으로 구원받게 하실 것인가? 그 구체적인 하나님의 계획이 11절 말씀입니다.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여기에서 ‘동방’이란 말과 ‘먼 나라’라는 말은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은 ‘동방의 먼 나라’에서 그분의 계획을 집행할 사람을 부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동방’이 아니고 ‘먼 나라’ 동방입니다! 즉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해가 뜨는 ‘동방’에 있는 나라로서 그 나라는 ‘멀리 떨어진 땅’에 있는 동방의 나라입니다. 그곳은 어디입니까? 바로 한국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동방의 먼 나라’라고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당연히 이스라엘을 중심해서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나라들 가운데 ‘가장 먼 땅’에 있는 나라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가장 먼 땅을 ‘땅 끝’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행 1:8; 사 41:9). 이스라엘로부터 ‘동쪽’에 있는 땅 가운데 가장 먼 땅, 즉 ‘땅 끝’이 어디입니까? 바로 극동의 한반도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11절이 의도하는 ‘동방의 먼 나라’는 우리나라를 지목한 것입니다!
중국은 본문이 의도하는 ‘동방의 먼 나라’로 간주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국은 영토가 광활하여 서쪽이 이란과 국경을 같이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동부 국경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며, 중국은 용을 상징으로 삼고 숭배하는 무신론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정도의 거리라면 이스라엘에서 결코 ‘먼 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도 역시 ‘동방의 먼 나라’로 해석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도는 국토의 대부분이 동방보다는 남방으로 위치해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처럼 이스라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땅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더 동쪽에 있으니까 땅 끝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일본은 섬나라이지 땅 끝은 아닙니다. 더구나 일본은 복음의 나라가 아닙니다. 일본은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도 아닙니다. 남을 침략하고 전쟁을 좋아하면 성경적 독수리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들을 일컬어 ‘독수리’를 부른다고 말씀하실까요? 13절에 “… 나의 구원이 지체치 아니할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빨리’ 구원하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면 이스라엘 백성을 ‘빨리’ 구원하시기 위해 시온에 복음을 전할 자들을 ‘빨리’ 가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독수리’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큰 날개를 가지고 높은 하늘을 나는 독수리는 누구보다 빨리 이동하기 때문입니다(애 4:19). 하나님은 ‘합당한 때’를 지키십니다. 그러므로 때가 차면 ‘서둘러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복음을 전할 자들을 독수리처럼 빠르게 동방의 먼 나라, 즉 극동의 대한민국에서 시온을 향해 달려가게 하실 것입니다! 이사야 52:7~10은 바로 이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2) 독수리를 부르신다는 말의 의미는 계시록 4장에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 있는 네 생물에 잘 나타납니다.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다고 했습니다(계 4:6-7).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이승만 대통령은 사자였습니다. 소련과 중공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 마귀의 침략을 맨주먹으로 막아내었습니다. 한편 박정희 대통령은 황소였습니다. 이 두 분이 첫째와 둘째 생물에 해당하는 위인들로서 우리나라를 세워 일으켰습니다. 이 두 사람이 우리나라를 낙원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참 인물들입니다. 셋째 생물인 사람 모양의 인물은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장차 천년왕국에서 다스리실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이제 나타날 대통령은 독수리 같은 사람입니다. 하늘을 높이 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사람입니다. 멀리까지 보는 사람, 민족의 앞길을 밝히 비추어줄 수 있는 사람, 큰 능력을 가지고 강력하게 일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분명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이 일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감격이 새로워집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말고 열심히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3) 이 일을 위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이 세상을 구원할 자가 없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 없이 지상낙원을 세워보겠다는 자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세상이 가는 길과는 반대로 가야 합니다.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한국은 세계의 제사장 나라요, 오늘날 세계만방에 2만 명 이상의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있는 선교대국입니다. 또한 그들을 뒷받침하고 있는 경제대국이기도 합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세계의 재물을 다 모아주십니다. 앞으로 더욱 훌륭한 인물들을 계속하여 보내주실 것입니다. 예수의 사람, 진리의 사람들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에서 이런 참신한 일꾼들이 많이 나와서 한국과 미국, 나아가 온 세계를 살려내는 큰 역사를 이루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동방의 독수리]를 읽고
오늘도 귀한 나균용목사님의 설교를 읽고 많은 은혜 받았습니다.
독수리는 원래 로마 제국의 상징이었답니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독수리 조각상 밑에 로마자로 군대 이름이나, “로마 만세” 같은 글을 적은 팻말을 들고 전쟁에 나갔습니다. 그래서 그 후 “독수리가 하늘의 제왕이듯이 로마는 지상의 제왕이다.”라는 뜻으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마가 망하고 그 독수리 문양이 유럽 각 나라로 전파되었는데, 신성 로마 제국 때는 독수리를 마크로 삼았습니다. 동유럽은 거의 독수리 상징을 사용합니다. 루마니아 폴란드 등인데, 러시아 황제는 로마 황제보다 더 위대하다고 해서 독수리를 상징으로 삼았답니다.
동방의 독수리는 복음의 마지막 주자(走者)입니다.
성경상의 기원으로 볼 때 한국인과 유대인은 뗄 수 없는 유대관계가 성립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 조상 에벨로부터 분리된 형제족속이기 때문입니다.
에벨의 큰 아들 벨렉의 후손 중에서 유대민족이 나왔고, 작은 아들 욕단의 후손 중에서 우리 한민족이 나왔습니다.
이렇게 동방의 독수리인 우리 한반도는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제사장 민족입니다.
그리고 저 북한 복음화를 위해서 우리 탈북민들을 불러주셨고 복음통일의 일군으로 준비시키고 있습니다.
이제 제사장민족, 동방의 독수리인 우리 한반도가 땅끝까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실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어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45. 옛 언약을 성취할 새 언약의 백성
(출애급기 19:3-6)
3)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4)내가 애급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보배로운 소유가 되겠고 6)너희가 나에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출애급기 20장에는 십계명이 나옵니다. 그런데 십계명과 제반 율법을 주시기 전인 19장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 산에 오르게 하시고는 내가 이제 여러 계명을 줄 것인데 그것들을 너희가 지키겠는가를 먼저 나와 언약을 맺자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언약 맺기를 거절한다면 율법을 주실 필요도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언약을 맺고 지켜 행하면 세 가지 복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 같으면 어떤 복을 달라고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려는 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너무도 다른 복입니다. 우리는 흔히 복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그런 것입니다.
①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보배로운 소유가 될 것이다.”라는 것이었고,
② “너희가 나에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다.”라는 것이고,
③ “너희가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정말 복입니까?
1.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복의 특징
1)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꼬? 너는 내게 구하라.”라고 하실 때에 그가 무엇을 달라고 하였습니까? 돈이었습니까? 권세였습니까? 적국을 멸하고 자기 나라 영토를 크게 확장하는 일이었습니까? 아니면 200살쯤 살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지혜가 무슨 큰 복입니까? 그런 것은 없어도 돈이나 권세 같은 것만 있으면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지 않습니까? 당신도 정말 지혜를 구하겠습니까?
솔로몬은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고 했는데,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이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도, 부도,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왕상 3:9-12)라고 하셨습니다.
2)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되, 먼저 약속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도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실 땅으로 가면, 아브라함으로 큰 민족을 이루고 그에게 복을 주어 그의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아브라함은 복이 될 것이라(창 12:1-2)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믿고 순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복(의 근원)이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3) 야곱은 형을 속이고 장자권을 빼앗았습니다. 그런데 그 장자권이 그렇게도 좋은 것입니까? 또 야곱이 장자권을 가졌다고 해서 에서가 당장에 야곱에게 “형님!”이라고 부르게 됩니까? 갑자기 큰 부자나 권력자가 됩니까?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히 12:16)라고 정죄합니다. 장자권이 야곱에게 옮겨오자 야곱은 형에게 맞아죽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그것이 복입니까?
4)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여 구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느 것이 더 좋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 그런 것은 무엇에 쓰는 것입니까?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가 최고가 아닙니까? 우리는 세상이 말하는 복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복이 어떻게 다른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복을 받기를 더욱 사모해야 합니다.
5) 이스라엘은 율법을 잘 지키겠노라고 철석같이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잘 아는 대로 그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하여 결국 남북 왕조가 모두 망하고 백성들은 뿔뿔이 온 세계로 흩어져 무려 1900년 동안이나 유리방황하며 살았습니다. 2차 대전 후에 고토에 돌아와서 1948년 5월에 겨우 나라를 세웠지만,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대적하고 있는 무신론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약속하신 모든 복이 아직도 그들에게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앞으로도 성취될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살아 있습니다. 에서가 장자권을 소홀히 여겨서 빼앗겼던 것처럼 야곱과 같은 새로운 나라, 새로운 민족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그 복을 빼앗을 것입니다. 그 나라가 어느 나라일까요? 그 민족은 어느 민족입니까?
2. 모세에게 약속하신 세 가지 복
1) 너희는 열국 중에 내 보배로운 소유가 되리라.
① 하나님의 보배로운 소유가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땅은 우리가 영원히 살 땅이 아닙니다. 잠시 후면 우리는 모두 이 땅을 떠나야 합니다. 그 다음엔 어디로 갈까요? 무신론자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다음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죽은 다음에 정말 아무 것도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상을 가진 자들은 사람의 생명을 짐승의 생명보다도 더 가볍게 여깁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없음은 물론이고,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습니다.
이런 자들의 종말이 얼마나 비참하게 되는지 여러분들이 잘 알지 않습니까?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도 너무도 가난해져서 70년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중공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습니까?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그 살아가는 방법이 다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 죄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습니다. 따라서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사람의 생명을 경시하여 짐승처럼 취급하며,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가장 악랄한 무신론 독재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잘 섬기는 성도가 다스리는 나라는 인권을 존중하고, 최대한의 자유를 허용하며, 법을 지켜 질서가 확립되며, 부정과 부패가 사라집니다. 백성들의 삶이 평안하고 항상 희망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② 하나님의 백성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의 모든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의식주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것은 조금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스스로 거절하여 버렸기에 눈만 뜨면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찾느라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소원이 충족되지 못할 때에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 많은 나라가 있지만, 하나님을 잘 섬기는 나라는 부강하고, 복지제도가 잘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병자나 사고를 당한 사람이 생기면, 나라에서 전적으로 비용을 부담하여 치료해 줍니다. 그러나 가난한 나라는 긴급한 상황에 놓인 환자에 대하여서도 돈을 먼저 내지 않으면 입원도 할 수 없다고 하여, 충분히 살 수 있는 사람도 돈 때문에 죽어야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지 않습니까?
요즘처럼 재앙이 많고, 테러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던 때가 과거에 언제 있었습니까? 참으로 한시도 마음 놓고 살 수 없는 너무도 위태한 때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의 소유가 되면 그런 걱정은 조금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습니까? 본문 4절을 보세요. “내가 애급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애급에서 압제를 받으며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엄청나게 많은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함부로 대적하던 애급은 산산이 깨지고 말았습니다(삼상 2:10). 하나님은 그들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 인도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때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소속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 어떤 재앙이나 재난도 전혀 두려워할 것이 못 됩니다.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자신 있게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부모가 부자면 자녀들이 호사하면서 삽니다. 그러나 부모가 너무 가난하면 자녀들에게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못하고, 학교 공부도 시키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우리들은 그분이 전능하신 분이고, 온 우주의 주인이 아니십니까? 그러나 저 바깥세상 사람들은 그런 것을 알지도 못하고, 가르쳐 주어도 믿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가 해결해야 하니까, 눈만 뜨면 돈 걱정에 정신없이 바쁘게 뛰어야 하고, 밤에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고,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주님을 믿기에 항상 편안합니다. 하루하루가 즐겁습니다.
③ 하나님의 것, 곧 그의 백성이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이 항상 함께해 주시므로 날마다 기적을 체험하면서 살게 됩니다. 믿음에는 기적이 따라옵니다. 당장 내 눈 앞에 보이지는 않아도,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갈 때에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행하십니다.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요단강도 갈라졌습니다.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죽은 자가 살아납니다. 풍랑을 잠잠케도 하고, 물 위를 걷게도 됩니다. 나아가 이 땅에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됩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행할 수 있게 됩니다. 비록 조금 힘이 들지는 몰라도 이런 사람이 되어야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천국의 영광을 이 땅에서도 체험하면서 자신만만하게 살아갑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항상 함께하심을 알고, 또한 믿기에 하늘의 능력이 늘 충만한 것입니다.
2) 너희는 나에 대해 제사장 나라가 되리라.
① 하나님은 세계 모든 나라와 민족 중에서 한 나라를 세워 제사장 나라로 삼으십니다. 우리가 제사를 드릴 때에는 반드시 제사장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온 세계 인류를 위하여 하나님이 제사장 나라를 택하여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 이스라엘이 이 제사장 나라가 되지 않겠느냐고 물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제사장은 가장 어른이었습니다. 레위기 21:4-15에서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이라고 하시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백성의 어른인 제사장은 자기를 더럽혀 욕되게 하지 말지니라.”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제사장들은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하지 말며, 수염 양편을 깎지 말며 살을 베지 말고, 절대 거룩해야 하며, 결혼을 해도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이나, 이혼당한 여인을 취하지 말고, 처녀를 취하여 아내를 삼을 것이며, 예복을 입은 대제사장은 그의 머리를 풀지 말며 그 옷을 찢지 말며,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하지 말지니 부모로 인하여도 더러워지게 말며, 성소에서 나오지 말며 그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② 호세아 4:6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라는 무서운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결코 제사장이 되지 못합니다. 옛날 엘리와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모두 제사장들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그 나라가 얼마나 어두웠고, 전쟁으로 인해 얼마나 고통스러웠나 하는 것을 우리가 잘 알지 않습니까? 제사장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많이 있었으나,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바른 제사를 드릴 참된 제사장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제사가 열납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제사를 드려도 하나도 받아주시지 않으니 헛수고만 열심히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재앙입니다. 전쟁입니다. 비참한 종말입니다. 또한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라고 하셨으니,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무방비 상태에 버려져서 재앙으로 멸망합니다. 제사장이라는 사람이 자기 자녀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호소해도 하나님은 대답하시기를 “나는 모른다.”라고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제사장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더욱 잘 알기 위하여 몸부림쳐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동족들을 보면서 안타까워 외쳤습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에도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 하나님이 왜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나? 그 크신 사랑, 그 깊으신 뜻을 압니까? 우리가 이를 위해 주님과 더욱 가까이 사귀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고 하였고, 이를 위해 자기가 자랑할 수 있던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③ 그런데 예수님이 친히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려고 육신을 입고 오셨고, 그 거룩한 일을 이루어주셨습니다. 히브리서 4:14에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라고 하였고, 이어서 7:26에서는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면 영원하신 제사장을 모시고 사는 것이요, 우리도 제사장이 되어 세계 만민을 위하여 기도하고 제사함으로 만민의 죄를 용서 받고, 온 인류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거룩한 사역을 감당하는 복된 백성들이 되는 것입니다.
3) 너희는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①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명령하셨습니다(레 11:44-45). 이 말씀은 곧 “너희는 나를 닮아라.”라는 말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닮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닮은 줄로 착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올바로 일깨워주셨습니다.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마 15:8). 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심이 대단하였지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 아비는 마귀다.”(요 8:44)라고 하여, 저들의 분노를 격발시키시기도 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자기들이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고, 하나님을 가장 잘 닮았다고 생각했겠지만, 주님은 그들을 가리켜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마 23:33)라고 무섭게 질책하셨습니다.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착각하지 말고, 겸손히 자기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② 거룩한 백성이란 성별된 백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분별력이 없으면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참과 거짓을 분별하고, 의와 불의, 선과 악, 지혜의 길과 우둔의 길을 분별해야 합니다.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드리다가 제단으로부터 불이 나와서 직사했던 일을 기억하십니까? 이런 무서운 일이 있은 후에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은 모름지기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게 되어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하신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칠 수 있게 된다.”(레 10:10-11)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자기들이 먼저 거룩해져야 한다는 이 말씀을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에스겔 22:26에 보면 “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였으며 나의 성물을 더럽혔으며 거룩함과 속된 것을 분변치 아니하였으며 부정함과 정한 것을 사람으로 분변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유대 나라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때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때입니다. 극심한 혼돈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종교도 혼합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너도 옳고, 나도 옳다. 모두가 옳다. 그러니 아무 것을 믿거나 상관이 없고, 심지어 믿지 않아도 괜찮다. 지옥은 없으며, 누구나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세상에 온통 가득합니다.
③ 이 패역한 세대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께 “아버지여.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거룩해지는 첫째 방법은 이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고, 진리를 가져야 비로소 거룩해집니다.
또한 둘째 방법은 거룩한 영, 곧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거룩해집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우리가 거듭나고, 성령이 충만해짐으로 성결함이 이루어집니다.
3. 이스라엘은 왜 실패했을까요?
① 광야의 이스라엘을 봅시다. 그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속에 남아 있던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하였고, 따라서 그들은 걸핏하면 불평과 원망을 일삼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애급에서 살 때에 우상 숭배하던 나쁜 버릇을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방의 우상만 보면 유혹을 받고, 그런 우상들을 가져다가 섬겼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실은 하나님과 우상을 전혀 구분하지 못하고, 옛날의 습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 진노의 대상이 되어 광야에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② 또한 이스라엘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였지만,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마 15:8). 예나 이제나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그의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 앞에 가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여기에서 불합격이었습니다.
③ 나아가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되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지 아니하고 의문의 묵은 것으로 하였습니다(롬 7:6).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습니다”(고후 3:6).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그들은 성령으로 행하기를 버리고, 다시 우상숭배와 노예근성에 돌아갔습니다. 따라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④ 예수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영생의 길을 묻는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 19:21)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지켜 행하면 하늘의 보화가 임합니다(신 28:12).
시편 49:20에서는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하늘 보화의 가치도 모르고, 그 보화를 사모할 줄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짐승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타락한 인간들을 “개, 돼지, 여우, 이리, 뱀, 독사” 등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자기를 볼 줄도 모르는데, 어찌 하늘의 보화를 볼 수 있겠습니까? 땅엣 것을 찾지 말고 하늘엣 것을 찾을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4.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 제안을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모세를 통해서 주신 약속은 옛 언약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당신 손의 못 자국을 보여주시면서 새 약속을 맺자고 하십니다. 옛날 모세 때에는 온 이스라엘이 합심하여 “우리가 하겠습니다.”라고 했고, 큰 감격과 결심을 가지고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계명을 영으로, 마음으로부터 지키지 못하고, 형식적으로만 지켰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외식하는 자가 되어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무서운 책망을 받아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정이 다릅니다. 예수님이 계십니다. 성령이 계십니다. 영의 사람이 되어 마음에 새기고 지켜 행하라고 하십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성경이 있습니다. 열심히 읽고 듣고 깨달아 진리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렘 5:1) 한 명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바로 그러한 백성이 될 수 있지 않습니까?
오늘의 세상을 보세요. 얼마나 살벌하고 위험합니까? 그런데 누가 있어서 이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며, 제사를 드리고, 이들을 위해 복음을 전합니까? 주님이 우리 민족을 부르시지 않습니까? 주님이 당신을 부르고 계시지 않습니까? 주님의 음성을 들으세요. 주님이 얼마나 안타까워하시는지 당신은 아시나요?
하나님과 약속을 맺고 이제부터 성령의 충만을 받아 주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는 복된 사역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옛 언약을 성취한 새 언약의 백성] 을 읽고
오늘도 귀한 나균용 목사님의 설교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면서 너무 많은 은혜 밷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되, 먼저 약속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도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실 땅으로 가면, 아브라함으로 큰 민족을 이루고 그에게 복을 주어 그의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아브라함은 복이 될 것이라(창 12:1-2)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믿고 순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복(의 근원)이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저와 같은 탈북민들에게 먼저 저 북한땅을 탈북하게 하셨고 자유의 나라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셨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의 모든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의식주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것은 조금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제가 한국에서 신학공부를 하면서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섬겨야할 사명 때문에 많은 재정의 어려움을 겪을때가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멀리에 있는 나균용목사님을 통해서 섬김을 받게 하시고, 귀한 하나님은혜를 받아 북한에 전달할수 있는 통로로 쓰고 계시고 있습니다.
오늘도 나 균용목사님 설교를 읽으면서 예서 언약을 성취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복음으로 믿게 되고 이 복음을 저 북한과 사마리아 땅끝까지 전해야 할 사명을 받았다는 것을 다시한번 깨닫게 되어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46.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
(신명기 4:5-6)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가 들어가서 기업으로 차지할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하리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으로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정탐꾼을 뽑을 때에도 각 지파에서 가장 지혜롭고 지식이 있는 사람들을 택하라고 하셨고(신 1:13), 솔로몬이 지혜와 지식을 구할 때에 크게 기뻐하셨습니다(대하 1:10). 솔로몬은 지혜만이 아니라 지식도 충만하였습니다. “잠언은 3,000 가지, 노래는 1,005 편이며, 초목에 대하여는 레바논의 백향목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그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왕상 4:32-33). 놀라운 지식입니다. 주변 모든 나라의 왕들과 사신들이 값진 보물들을 가지고 그의 지혜를 들으려고 찾아왔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선민을 통해 이루시려는 계획입니다.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이 뜻을 깨닫지 못했고, 유다의 왕들은 지혜와 지식을 구할 줄도 몰랐으며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척하다가 다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배달겨레라고 부릅니다. ‘배달’은 산스크리트어로 ‘베다딸’(veda-tal)인데,
① 베다(veda)는 ‘지혜’입니다. 베다경전이란 바로 인도 힌두교 지혜의 경전이란 뜻입니다.
② 딸(tal)은 옥스퍼드 범어 사전에 ‘달성하다, 도달하다’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산스크리트어 어원상으로는 ‘배달민족’이란 지혜에 도달한 민족이란 뜻입니다. 이제 우리 배달민족은 지혜와 지식을 온 세계에 배달(配達)하는 배달의 민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지혜와 지식을 가진 민족(개인)이 받는 복
솔로몬은 왕위에 오르자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렸고, 그는 하나님께 지혜와 지식을 간구하였습니다(대하 1:10-12). 하나님은 그 소원을 이루어주셨고, 이스라엘을 영화로운 나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1) 참 평화가 있습니다.
① 하나님은 다윗에게 “보라. 한 아들이 너로부터 나리니 그는 온순한 사람이라. 내가 그로 주변 모든 대적으로부터 평온을 얻게 하리라.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그의 생전에 평안과 안일함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대상 22:9)라고 하셨습니다.
② 백성들이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소식을 듣자, 왕을 크게 두려워하게 되었고 따라서 범죄가 없어지고 율법을 잘 지키게 되어 나라가 평안하였습니다.
③ 주변 여러 나라의 왕들이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와 그를 만나 지혜의 말씀을 듣고자 했고, 솔로몬에게 자기 딸들을 바쳐서 인척관계를 맺으려고 하였습니다.
④ 말세에는 거짓 선지자와 거짓 그리스도가 많이 일어나고, 전쟁, 기근, 지진이 처처에서 일어나며, 무서운 전염병이 창궐하고, 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고, 불법이 성해진다고 하셨습니다(마 24:6-12). 도덕적 타락도 심각해집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합니다”(딤후 3:2).
⑤ 그러나 하나님의 성도들에게는 큰 희망이 있습니다. 다니엘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하리라.”라고 하였고, 이어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위하여 원한을 풀어 주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들이 나라를 얻었더라.”(단 7:18,22)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롬 11:25-26)라고 하였습니다.
⑥ 또한 이사야는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사 60:2-4)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분명히 이 날이 옵니다. 온 세상이 아무리 캄캄해져도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우리 위에 임합니다. 그래서 온 세상이 이 밝은 빛을 향해 모여옵니다. 대환난의 소용돌이 속에 놀라운 평화의 땅이 있습니다. 제2의 이스라엘, 영적 이스라엘, 곧 대한민국입니다.
2) 부귀와 영화가 있습니다.
①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다윗이 성전 건축을 그렇게도 원했지만, 그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을 하였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대상 22:8; 28:3; 왕상 5:3). 이어서 하나님은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지라. 그는 내 아들이 되고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어 그 나라 왕위를 이스라엘 위에 굳게 세워 영원까지 이르게 하리라.”(대상 22:10)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약속에 따라 솔로몬 생전에는 큰 영광이 있었습니다.
② 주변의 왕들이 많은 보물들을 가져왔고, 특히 스바의 여왕은 금 120 달란트와 심히 많은 향품과 보석을 솔로몬에게 주었습니다. 그때엔 “은을 돌같이 흔하게 하고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같이 많게 하였습니다”(왕상 10:27; 대하 9:27).
③ 솔로몬의 영화를 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솔로몬의 세입금의 무게가 금 666 달란트요, 그 외에 또 상인들과 무역하는 객상과 아라비아의 모든 왕들과 나라의 고관들에게서도 가져온지라. 솔로몬 왕이 쳐서 늘인 금으로 큰 방패 200개를 만들었으니 매 방패에 든 금이 600세겔이며, 또 쳐서 늘인 금으로 작은 방패 300개를 만들었으니 매 방패에 든 금이 3마네라 왕이 이것들을 레바논 나무 궁에 두었더라. 왕이 또 상아로 큰 보좌를 만들고 정금으로 입혔으니, 그 보좌에는 여섯 층계가 있고 보좌 뒤에 둥근 머리가 있고 앉는 자리 양쪽에는 팔걸이가 있고 팔걸이 곁에는 사자가 하나씩 서 있으며, 또 열두 사자가 있어 그 여섯 층계 좌우편에 서 있으니 어느 나라에도 이같이 만든 것이 없었더라”(왕상 10:14-20).
3)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이 제사를 받아주셨다는 것입니다.
① 제사를 받아주신 것이 왜 큰 복이 됩니까? 성경에 아주 충격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스테반은 아모스 5:25-27을 인증하여 “이스라엘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40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라고 유대인들을 책망하였습니다. 모세가 영솔(領率)하였고, 초대 대제사장 아론이 집례하여 날마다 제사를 드렸건만 이게 무슨 말씀이란 말입니까?
②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요 2:14-16).
③ 이사야서도 첫머리에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 1:11-12)라고 무섭게 책망하셨습니다.
④ 그러나 이사야 60장에서는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 그 때에 네가 보고 기쁜 빛을 내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이방 나라들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 허다한 낙타, 미디안과 에바의 어린 낙타가 네 가운데에 가득할 것이며 스바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게달의 양 무리는 다 네게로 모일 것이요 느바욧의 숫양은 네게 공급되고 내 제단에 올라 기꺼이 받음이 되리니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사 60:4-7)라고 하였습니다.
⑤ 제사가 열납된다는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복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일천 번제를 받으시고 그에게 꿈에 나타나셔서 소원을 물으셨고, 그의 소원대로 지혜와 지식을 풍족히 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졌고, 기도가 응답되었고, 범사에 주님이 함께해 주셨습니다.
4) 참 지혜와 지식은 곧 진리입니다. 진리를 찾는 사람은 죄 사함 받고 영생에 이릅니다.
① 인류의 영원한 스승이라는 사람들, 곧 성인들이 있다. 이분들은 평생을 바쳐 도(道)를 깨달으려고 하였다. 공자, 석가, 노자, 소크라테스 등은 넓은 바닷가에서 작은 조개껍질 하나를 주웠을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성인이라 추앙받고 만인의 스승이 되어 있습니다.
②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아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렘 5:1)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시 14:1-3; 53:1-3)라고 하였습니다.
③ 진리란 성삼위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a. (요 17: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b. (요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c. (요 14:17; 15:26; 16:13)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2. 지혜와 지식이란 무엇인가요?
1) 지혜(智慧)란 무엇인가요?
① 국어사전에서는 “사물의 도리나 이치를 분별하는 정신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라고 물으면서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단정합니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고전 1:20-21). 여기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②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고 가르칩니다(잠 9:10). 따라서 하나님을 더욱 경외할수록 지혜가 성장합니다. 또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잠 8:13)라고 하였으니,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모든 악을 미워하고, 마음의 교만과 거만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③ 야고보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라고 하면서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다.”(약 1:5,17)라고 일깨워줍니다.
2) 지식(知識)이란 무엇인가요?
① 하나님은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탄식하시면서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곧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참 지식입니다. 또한 이 지식은 머릿속으로 아는 지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남으로 변화된 체험적인 지식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고, 늘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사는 것이 참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그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 곧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바울이 이 지식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빌 3:7-9a)라고 하였습니다. 나아가 성령을 알아야 합니다.
② 성경에서 말하는 지식은 또한 죄를 아는 지식이요, 죄를 미워하는 삶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가 옴으로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인생의 모든 고난과 슬픔이 찾아왔습니다. 나아가 모든 사람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롬 3:20,23).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속죄의 길을 여셨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③ 성경은 우리에게 자기를 아는 지식을 줍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비로소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게 됩니다. 베드로가 고기잡이 이적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자 드디어 자기를 발견하고, 예수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비로소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라는 약속을 받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매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딤전 1:15)임을 고백하며 주님을 위해 목숨도 바치게 되었습니다.
④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모두 제사장이었지만, 그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였습니다(삼상 2:12). NIV는 “하나님을 아랑곳하지도 않았다”(no regard for the LORD)고 했고, KJV는 “엘리의 아들들은 벨리알의 아들들이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고의적으로 하나님 알기를 거절하였다는 말입니다. 직분이나 종교가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3) 더 나아가 지혜와 지식은 ‘그리스도’십니다.
①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강조하였습니다(고전 1:24). 이 말씀에 앞서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이 세상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가장 지혜롭다는 사람도 하나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알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인데,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십니다. 지혜 있는 자는 어디 있으며, 선비(학자, scholar)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셨습니다”(고전 1:19-20).
② 지혜를 예찬하고 있는 잠언 8장에서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공의도 그러하니라.”(잠 8:17-18)라고 하면서,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다.”(잠 8:22-23)라고 선포합니다. 더 나아가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다.”(잠 8:30)라고 말합니다. 이 지혜가 바로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③ 진실로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신비)입니다(골 2:2-3).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신 사람에게 지혜와 지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 16:22)라고 무서운 저주를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지혜자와 우매자, 의인과 악인, 착하고 충성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 천국민과 지옥민” 등으로 구분하여 설명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놀라운 지혜와 지식의 사람이 됩니다.
3. 지혜와 지식을 얻는 방법
1) 지혜문학인 욥기에서는 심각하게 지혜와 지식을 찾고 있습니다.
① 욥은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 그 길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는 찾을 수 없구나. 깊은 물이 이르기를 내 속에 있지 아니하다 하며 바다가 이르기를 나와 함께 있지 아니하다 하느니라. … 모든 생물의 눈에 숨겨졌고 공중의 새에게 가려졌으며, 멸망과 사망도 이르기를 우리가 귀로 그 소문은 들었다 하느니라.”(28:12-14,21-22)라고 하였습니다.
② 욥은 지혜와 지식 얻기를 간절히 사모하였습니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 107:9)라고 말합니다.
③ 유다가 멸망한 근본원인은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렘 5:1)이 아니었습니까? 진심으로 구하며, 전심으로 구하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2) 지혜의 왕 솔로몬으로부터 그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① 솔로몬은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번제는 헌신의 제사입니다.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하여 자기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원래 인류의 역사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갈라졌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과 섬기지 않는 사람,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과 형식적으로 섬기는 사람으로 갈라졌습니다.
② 솔로몬은 겸손했습니다. 첫째로 그는 아버지인 다윗과 자기를 비교하여 “나는 작은 아이입니다.”라고 고백했고, 둘째로 그는 이스라엘 나라가 너무 크고, 백성들이 너무 많다고 고백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자기에게 지혜와 지식이 없어서 바른 재판을 할 수 없음을 고백했습니다(왕상 3:7-9).
③ 하나님은 그에게 이르시기를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왕상 3:11-13)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평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온전히 백성을 위하여 은혜를 구하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3) 성경 전체에서 설명하는 바 지혜와 지식을 얻는 방법
① 본문에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라고 하셨습니다. 듣기만 하고 지켜 행하지 않으면 죽은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말씀을 지켜 행하는 일은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되는 지름길이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신 28:1),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도 이것을 명하셨고(수 1:7-8), 다윗도 솔로몬에게 이것을 유언하였습니다(왕상 2:3).
② 하나님을 경외(敬畏)해야 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요(잠 1:7), 또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잠 9:10).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의 지식이나 지혜는 세상적인 것이고 거짓된 것ᅟᅵᆸ니다. 우리가 속지도 말고 착각도 말아야 합니다.
③ 경외의 신이신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예언 중에서 하나님의 영을 가리켜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권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사 11:2)이라고 하였습니다. 지혜와 지식은 성령의 은사로 옵니다(고전 12:8).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뿐 아니라, 지혜를 구하여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약 1:5).
④ 모세는 “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라고 기도합니다. 욥은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욥 12:12)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살아온 날이 얼마인가? 내가 앞으로 살아갈 날은 얼마나 남았는가?”를 자문해보아야 합니다. 또한 내가 곧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터인데,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자문하면서 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여기에 지혜가 있지 않습니까?
⑤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셔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2b-3)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귀한 보물을 찾아내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이렇게 가르쳐주었어도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서 지혜와 지식을 찾아 얻으려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요?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을 읽고
오늘도 나균용 목사님 설교를 읽으면서 우리민족의 자긍심을 가지게 되었고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게 되어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으로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특별히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이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들이 되게 하셔서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에 이름 있는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지혜와 지식은 ‘그리스도’십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가장 지혜롭다는 사람도 하나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알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때문에 오늘날 세상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에 불의가 난무하고, 거짓이 진리가 되어가고 있고, 공허함과, 혼탁해 지고 있습니다.
오늘 나균용 목사님 설교를 통해서 우리가 여호와께 돌아가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세상이 바뀌어 질 때 마귀에게 빼앗겼던 평안이 회복되고, 모든 불의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공의의 질서가 세워질줄 믿습니다.
47. 장자권을 받은 민족
(히브리서 12:16b-17)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펴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야곱이 자기의 쌍둥이 형인 에서가 사냥을 나갔다가 심히 피곤하고 허기진 몸으로 돌아왔을 때에, 그의 장자권을 자기의 팥죽 한 그릇과 바꾸자고 제안해서 무심코 승낙한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좀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에서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해서 정말로 장자권이 야곱에게 넘어갈까요? 사실은 이런 것이 영계(靈界)의 비밀입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에서는 여전히 형이었고, 야곱은 역시 여전히 동생이었습니다. 에서의 체격이 작아진 것도 아니고, 야곱의 체격이나 체력이 갑자기 커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겉으로 볼 때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계에서 보면 장자권이라고 하는 엄청난 특권이 이미 야곱에게 옮겨져 버렸던 것입니다.
이에 에서는 앙심을 품고 야곱을 기어이 죽이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가 급히 서둘러서 야곱을 자기 친정으로 빼돌렸지만, 그 후 20년이나 지났어도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는 마음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습니다. 대관절 이 장자권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입니까? 그런데 왜 현대 신자들은 이 장자권의 가치를 모를 뿐 아니라, 관심조차도 갖고 있지 않을까요? 정말 그렇게 해도 되는 것입니까?
또한 지금도 이 세상에 그 장자권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정말 지금도 있다면 우리도 야곱처럼 그것을 빼앗아서라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값비싼 보배를 주셔도, 그 보배를 보배인 줄 알지 못하거나 소홀히 여기는 자에게는 오래 맡겨두지 않으시고, 그것을 빼앗으셔서 그 가치를 아는 사람, 그것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주십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값진 보물이 멸시당하고 사장(死藏)되어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얼떨결에 장자권을 팔아먹은 에서가 나중에 그것을 다시 찾으려고 눈물로 구했지만, 이미 떠나버린 장자권은 그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야곱을 간교하다고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에서를 망령된 자라고 멸시합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라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룩한 것과 진주는 무엇일까요?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주님을 섬긴다고는 하면서도 하나님의 보물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있고, 또한 영계(靈界)의 이런 비밀들을 모르고 살고 있으니 딱한 일입니다. 당신은 이 보물을 아십니까?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있는 것도 빼앗깁니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사모하는 사람에게 주십니다. 우리가 이 보물을 소유하여 빛을 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1. 장자권이란 무엇일까요?
1) 장자권이란 창대해지는 복과 권리입니다.
① 아브라함에게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라고 하셨고, 하늘의 뭇별을 보여주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라고 하셨고,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창 22:17)라고 약속하셨습니다.
② 이삭에게는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 26:4)라고 하셨고,
③ 야곱에게도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 네가 동서남북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창 28:14)라고 약속하셨습니다.
2) 장자권이란 축복권(祝福權)과 저주권(詛呪權)입니다.
① 아브라함 -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 22:18).
② 야곱 -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창 27:28-29).
3) 장자권이란 천하 만민에게 복을 받게 해 주는 특권입니다.
① “너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라는 말씀은 아무에게나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 소원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람은 모두가 이기주의자입니다. 특히 어릴수록 심합니다.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수 있게 됩니다.
② 장자권을 가진 사람은 만민에게 복을 나누어줄 사람이기에 마귀의 유혹과 박해가 끊임없이 따라옵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고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패배자에게는 상이 없습니다.
③ 하나님의 소원은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일에 헌신할 사람을 찾으십니다. 우리나라와 민족이, 또한 우리 개개인이 이 거룩한 일에 쓰임 받아야 하겠습니다.
2. 장자권의 승계(承繼)
1) 장자권은 아브라함에서 출발합니다. 이는 선민의 역사와 궤를 같이합니다.
① 아브라함에게는 장자 이스마엘이 있었지만, “여종으로부터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로부터는 약속으로 말미암아, 또는 성령을 따라서 태어났기에(갈 4:23,29) 이삭에게 장자권이 승계되었습니다. 이는 장자권 승계의 대 원칙을 보여줍니다.
② 이삭에게도 에서와 야곱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지만, 장자권은 야곱에게 승계되었습니다. 배가 고프다고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먹은 에서는 육체의 힘을 믿고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보물을 귀중히 여기지 않았고, 하나님은 그를 망령된 자라고 정죄하십니다.
③ 야곱에게 12 아들이 있었지만, 장자권은 요셉에게 전승되었습니다. 다른 아들들은 장자권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형제들 중에서도 탁월한 요셉에 대한 존경심이 없었고, 오히려 시기질투심으로 죽이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격을 상실했습니다.
2) 야곱에겐 여러 종류의 장자들이 있었습니다.
① 르우벤은 혈통적인 장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기에 장자권을 상실했습니다(창 49:3-4). 우리가 영계의 이런 비밀을 알지 못하여 오늘도 얼마나 많은 특권을 놓치고 사는지 모릅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면 큰일 납니다. 당신이 가진 특권이 아무리 커도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입니다. 마귀의 온갖 술수와 유혹과 싸우되 목숨 걸고 싸워야 합니다.
② 레위는 종교적 장자로서 제사장의 복을 받았습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이라.”(삼상 12:23)라고 한 사무엘의 말대로 제사장의 임무는 막중합니다. 그러나 장자권은 없습니다.
③ 유다는 장자에게 주는 왕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장자권은 받지 못했습니다.
④ 요셉은 영의 사람이었고, 다른 형제들보다 두 배의 몫을 차지한 참 장자였습니다(신 21:17).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이스라엘의 한 지파씩이 되어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두 배의 몫을 차지했다는 말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부귀와 영광에 있어서 다른 형제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3) 요셉 다음에는 장자권이 누구에게 승계되었을까요?
① 요셉이 두 아들을 데리고 아버지의 축복을 받으려고 찾아갔을 때에 야곱이 말하기를 “네가 애급에서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이들 후의 네 소생이 네 것이 될 것이며”(창 48:5-6)라고 하였습니다.
② 그런데 창세기에는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아버지에게 빼앗긴 후에 요셉이 아들을 더 낳았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들 후의 네 소생이 네 것이 될 것이라.”라는 말씀은 공허한소리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예언 속에 놀라운 비밀이 들어 있습니다.
③ 신약성경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바울은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의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라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친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나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언된 요셉의 자손이란 곧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④ 이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사실들이 성경에 상징적으로 나타납니다.
a. 그리스도가 족보상으로 요셉의 아들로 오셨는데, 그 요셉의 아버지 이름도 야곱이었습니다(마 1:16). 구약의 요셉은 구약의 수많은 인물들 중에서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인물로 나타납니다. 야곱이 말했던 “이들 후의 네 소생”은 구약에는 안 나타나지만, 신약에 와서 이렇게 예수님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b. 예수님은 아리마데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셨다가 거기서 부활하여 나오셨습니다. 부활 때에도 다시 요셉으로부터 나오신 것입니다. 부활하심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어떤 관계인가요?
c.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며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3-4)라고 하였습니다. 육신으로는(곧 족보상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는 부활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습니다. 영적 계통이 중요합니다. 야곱의 12 아들 중에 부활을 체험한 사람은 요셉이었습니다. 형들이 구덩이에 던졌고, 보디발이 감옥에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두 번 다 이 죽음의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부활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애급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d. 야곱이 죽기 전에 12 아들에 대해 예언을 했습니다. 그때에 요셉에 대해서는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창 49:24)라고 했는데(개정판), 개역성경은 흠정역을 따라 “∽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왕권을 가지셨고, 영적으로는 요셉의 자손으로 오셔서 장자권을 가지셨습니다. 이것이 영권(靈權), 곧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권세입니다.
3. 우리는 우리 민족의 위대한 사명을 깨달아서 그 사명을 완수해야 합니다.
1) 이스라엘은 선민입니다. 장자권이 이스라엘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상실했습니다.
① 에서처럼 소홀히 여기면 잃게 됩니다. 육신에 속한 자가 되면 장자권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또한 르우벤처럼 죄를 지으면 그 권리를 빼앗깁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시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를 경멸히 여기십니다(삼상 2:30).
② 그런데 이스라엘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였으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이를 이사야가 지적하여 무섭게 책망하였습니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라고 하였는데, 예수님도 이 말씀을 인증하여(마 15:7-9) 유대인들을 무섭게 책망하셨습니다.
③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미리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8:11-12)라고 선포하셨고, 다시금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결정적인 사건은 십자가가 아닙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르우벤은 간음으로 장자권을 잃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자들이 장자권을 잃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영계의 법칙은 아주 세밀하고도 정확합니다. 아무도 거기서 피하지 못합니다.
2) 이스라엘 민족이 장자권을 잃었으나, 하나님은 제2, 제3의 장자 민족을 일으키십니다.
① 요셉 이후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장자권은 숨겨져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거듭난 성도,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장자권이 임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나라와 민족에게 장자권이 찾아왔습니다.
② 장자권은 복음과 함께 멀고도 긴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온 유대로, 사마리아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주변의 아시아와 유럽과 아프리카로 퍼져나갔지만 변질되어 성령 없는 종교로 전락했습니다. 1517년 루터의 개혁으로 복음이 활짝 꽃 피고 열매 맺기 시작했습니다. 구라파가 복음을 영접하자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특히 과학문명을 발달시켰고, 산업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인류 문명에 새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독일에서 영국으로, 다시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미국도 이 복된 권리를 소홀히 여길 뿐 아니라, 오히려 내쫓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복음과 함께 장자권은 태평양을 건너 아시아에 왔는데, 중국이나 일본에 먼저 왔지만, 기쁨으로 받아들인 나라는 우리나라였습니다.
③ 우리 민족은 복음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라를 지켜냈습니다. 월남이 월맹과는 비교도 할 수 없도록 막강한 군사력과 엄청난 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룻밤 사이에 왜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까?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다 그렇게 됩니다. 마귀의 세력 공산주의를 무슨 수로 막아내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나라는 왜 김일성에게 망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크게 번성하여 세계 10위권의 경제적, 문화적, 군사적 대국을 이룰 수 있었습니까? 이것은 21세기의 기적입니다. 국토의 크기나 인구로 볼 때에는 분명 작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작은 자를 들어서 큰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이렇게 발전하게 된 이유를 연구한 많은 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거의 모두 세속적인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한강의 기적, 미국의 도움, 남다른 교육열, 우수한 두뇌 등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看過)한 것이 있습니다. 곧 한국에는 교회가 많고,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대단히 뜨겁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합니다. 교회마다 새벽기도회를 하고, 산골짝마다 밤 새워 기도하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수많은 부흥회를 통해 성령을 체험하고 주님께 헌신한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성경을 사랑합니다. 진리를 사모합니다. 세계 선교에 열정적입니다. 미국을 제외하고 본다면 과거 어느 나라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일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애국가에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날마다 노래를 합니다. 김일성, 김정일이 무슨 수로 이런 나라를 이기겠습니까? 날이 갈수록 북한은 비참하게 망해갑니다. 핵을 가지는 자는 핵으로 망합니다(마 26:52).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망하는 자를 돕자고 하면 같이 망합니다. 이 마귀의 세력, 독사의 자식들은 빨리 망하도록 해야 저주가 빨리 끝나고 영광스러운 새날이 옵니다. 우리가 막연한 애족심을 들먹이지 말고, 이 일을 위해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3) 장자권은 이미 한국에 들어와 있습니다.
① 성경을 보면 장자권은 강자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자에게 왔습니다. 본래 이스라엘은 큰 나라가 아니지 않습니까? 신명기 7:6-7에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聖民)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라고 하셨습니다.
② 이스라엘이 얼마나 작은 나라입니까? 그러나 오늘날 노벨상을 가장 많이 탄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이 아닙니까? 누가 이스라엘을 작다고 함부로 얕볼 수 있겠습니까? 주변에 부유하고 강한 나라들이 즐비하지만 이스라엘을 이기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아직도 그들을 붙들고 계십니다. 언젠가 크게 깨닫고 온 민족이 주님 앞에 돌아오는 날이 있을 것을 기대합니다.
③ 그러나 그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들어서 쓰십니다. 이는 복음을 가장 잘 받아들인 나라가 우리나라라고 하는 사실 하나만 보아도 분명합니다. 우리는 단군 임금님으로부터 유일하신 창조주 참 하나님만 섬겨오던 독특한 민족이었고, 스스로 천손민족(天孫民族)이라고 일컬어 왔습니다. 가장 강대한 중국에 접경해 있으면서도 중국에게 멸망을 당하지 않고, 그들보다 훨씬 뛰어난 문자와 문화를 가지고 살아온 자랑스러운 민족입니다. 이제 주님의 영광의 촛대가 옮겨오고 있는 것입니다.
4) 우리는 인류의 장자입니다.
① 그래서 우리가 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처럼 세상 왕과는 아주 다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5-28). 우리는 세상 모든 나라와 민족을 섬기는 나라요 백성입니다. 또한 그렇게 할 때에 더 큰 복을 받습니다.
② 우리는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레 10:10; 겔 44:23). 또한 제사장은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이라.”(삼상 12:23)라고 말한 것처럼 기도의 사람이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③ 또한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인즉 스스로 더럽혀 욕되게 하지 말지니라.”(레 2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굴 모양도, 복장도, 행동도, 말도 모든 것이 제사장다워야 합니다. 이 제사장다움을 잃으면 이미 제사장권도 잃은 것입니다.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3) 우리에게는 갑절의 복, 곧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이 다 있습니다.
① 이삭이 장자권의 복을 가지고 야곱에게 축복할 때에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창 27:28)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의 보고를 여시고 하늘의 보물을 쏟아주십니다. 곧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신 28:12-13)라고 하셨습니다.
② 바울은 로마서 마지막 부분에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롬 15:29)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 바울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실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고칠 때에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행 3:6)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걷지 않았습니까?
③ 성경은 이렇게 장자의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에게는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해지는 복”(요삼 2)이 임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늘의 복’이라든가, ‘영혼이 잘되는 복’이라는 말을 알지 못합니다. 땅엣 것만 찾다가 땅에 묻히고 마는 것입니다.
원숭이를 인류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시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이것을 받을 때, 드디어 장자가 되는 것입니다.
[장자권을 받은 민족]을 읽고
오늘도 나균용 목사님의 설교를 읽으면서 하나님께 쓰임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복음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라를 지켜냈습니다. . 마귀의 세력 공산주의를 무슨 수로 막아내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나라는 왜 김일성에게 망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크게 번성하여 세계 10위권의 경제적, 문화적, 군사적 대국을 이룰 수 있었습니까?
이것은 21세기의 기적입니다. 국토의 크기나 인구로 볼 때에는 분명 작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작은 자를 들어서 큰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한국에는 교회가 많고,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대단히 뜨겁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합니다. 교회마다 새벽기도회를 하고, 산골짝마다 밤 새워 기도하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수많은 부흥회를 통해 성령을 체험하고 주님께 헌신한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성경을 사랑합니다. 진리를 사모합니다. 세계 선교에 열정적입니다.
우리는 애국가에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날마다 노래를 합니다.
이렇게 ᄒᆞ나님의 장자권을 받은 대한민국은 하나님이 지켜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장중에 붙잡고 지켜 보호하여 주시지만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북한땅은 날이 갈수록 북한은 비참하게 망해갑니다. 핵을 가지는 자는 핵으로 망합니다(마 26:52).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망하는 자를 돕자고 하면 같이 망합니다. 이 마귀의 세력, 독사의 자식들은 빨리 망하도록 해야 저주가 빨리 끝나고 영광스러운 새날이 옵니다. 우리가 막연한 애족심을 들먹이지 말고, 이 일을 위해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장자권은 이미 한국에 들어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장자의 사명을 받은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무기로 멸망으로 끌려가고 있는 저 북한의 우리 가족들을 구원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지상명령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결단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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