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공주는 왜 구리시에 왔을까? | ||||||||||||
바보온달 산악회 20년 동안 추모제 지내 | ||||||||||||
경기도 구리시에는 고구려가 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광개토대왕’ 동상이 있고, 시청정문 앞 고구려 고각에는 고구려 북이 있다. 그리고 남한에서 제일 많은 1500여 점의 고구려 유물이 쏟아진 아차산 보루성이 있고,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의 아름답고도 슬픈 이야기가 있다. 중국은 3∼4년 전부터 고구려사를 자기네 나라 역사에 끼워 넣기 위해 동북공정이란 일감을 만들어 날뛰고 있다. 중국은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에 불과하다”는 글귀를 집안시 박물관에 버젓이 붙여놓고 우리나라 손님을 맞고 있다. 말 같지 않은 얘기지만 국제사회는 무슨 조약이나 역사의 기록보다 힘의 논리가 앞서다보니 웬만큼 단단한 논리와 역사적 증거물을 내놓지 않고서는 당하기 십상이다. 이런 가운데 구리시가 '고구려의 기상 대한민국 구리시'라는 시정구호 아래 그 기상을 살리기에 온 힘을 쏟고 있는 가운데 구리시 바보온달 산악회(회장 백건우)는 20년 전부터 해 마다 ‘온달장군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구리시가 고구려 도시임을 드러내는 행사이다.
온달장군에 대한 얘기는 삼국사기 권45 열전5(온달전)에 쓰여 있다. 열전이란 역사상 특기할 만한 개인의 행적을 후대에 전하여 교훈으로 삼고자 하는 의도에서 쓰여 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치고 온달장군과 평강공주 이야기를 모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오는 얘기가 아니라 정사(正史)에 오른 역사기록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다 아는 얘기지만 정리해보자. 고구려 평원왕(25대) 때 마음씨는 착한 온달은 집이 가난하여 동냥으로 어머니를 봉양했다. 사람들은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다. 평원왕은 어린 공주가 울어대자 크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놀린다. 이윽고 공주가 자라 왕이 상부 고씨에게 시집보내려고 하자 공주는 어렸을 때 들었던 왕의 말을 내세워 왕명을 거역한다. 왕의 노여움을 사 보물들을 싸 가지고 궁을 나온 공주는 온달의 집을 찾아가 온달과 어머니를 설득하여 결혼 한다. 공주는 온달에게 말 고르는 법을 가르쳐주어 병든 나라말을 사오게 한 뒤, 말을 잘 먹여 튼튼하게 기르고 무술을 닦게한다. 그 뒤 온달은 왕이 참석한 제천행사에서 두각을 나타내 왕을 놀라게 한다. 온달이 후주와의 싸움에게 큰 공을 세우자 왕은 온달을 사위로 맞아들이고 대형의 벼슬을 하사하였다. 양원왕이 왕에 오르자 온달은 신라에게 빼앗긴 계립현과 죽령의 서쪽 땅을 회복하겠다며 출정한다. 온달은 신라군과 아단성(구리시 아차산)에세 싸우다가 적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여 장사를 지내려고 하나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평강공주가 아단성에 와 관을 어루만지면서 온달의 넋을 위로하자 관이 움직여 장사를 지냈다는 내용이다.
온달산악회가 주관하던 온달장군 추모제향은 10회 째인 1996년에 구리문화원 문화사업으로 격이 오르고, 2002년에는 경기문화재단에 ‘온달장군보존회’로 정식 등록해 경기문화재단으로부터 인정받는 단체가 됐다. 해마다 10월 7일에 구리시 흰다리(白橋)마을 돌무지 쉼터에서 열리는 온달장군 추모제는 올해에는 한가위 연휴 때문에 9일에 치러졌다. 관례에 따라 초헌관은 구리시장이, 아헌관은 구리문화원장이, 종헌관은 온달산악회 회장이 각각 맡는다. 제례의 순서는 성균관 유도회의 지도를 받아 고구려의 제례의식을 재현했다. 먼저 식전 행사로 국악협회 구리시지회 이숙자 회장이 살풀이춤을 춘 뒤 초헌관이 신위 전에 폐백을 올렸다. 또 향을 사르는 전폐례, 신위 전에 첫잔을 올리고 축을 읽는 초헌례,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아헌례, 세 번째 잔을 올리는 종헌례, 초헌관이 제사음식을 음복하는 음복례, 축문과 폐백을 태우는 망예례 순으로 진행됐다.
맨 처음 온달장군 추모제를 지냈던 온달산악회 유덕화(73) 고문은 “20여 년 전 산악회 동료들과 아차산을 자주 오르던 중 아차산 산성을 발견해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한 결과 고구려 산성이라는 고증을 받고 삼국사기의 온달열전 기록을 찾아 온달장군 추모제를 지내게 됐다”며 “추모제가 대대로 계승 발전해 구리시가 고구려의 웅대한 정체성을 이어 받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현장학습을 나온 인창고 1학년 최재천 학생은 “삼국사기에 평강공주가 구리시에 왔다갔다고 기록 된 사실을 처음 알고 보니 구리시가 고구려도시라는 사실이 실감났다”며 “3∼4년 밖에 안 된 중국의 동북공정에 비해 20년 전부터 고구려 관련행사를 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고 느낌을 밝혔다. 한편 구리시는 중앙정부와 경기도의 지원에 민간자본을 보태 고구려유적기념관과 고구려테마공원 건설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