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목사님, 큰 신학자를 만나다 조용기의 '희망'과 몰트만의 '희망'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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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의 신학자로 불리는 몰트만 박사와 희망의 목회자 조용기 목사. 둘 다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희망의 내용은 다르다. (<국민일보> 갈무리) |
독일의 대표적인 조직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이 한국에 왔다. 내게 있어서 그는 석사 할아버지시다. 나의 석사과정 지도교수의 박사 아버지(Doktorvater, 박사과정 지도교수)가 바로 몰트만이기 때문이다. 몰트만의 첫 번째 한국인 제자이며, 몰트만의 서적의 대표적인 번역자답게 나의 지도 교수는 대학원 세미나에서 줄곧 몰트만을 읽히셨다. 다행히 몰트만은 독일인답잖게(?) 글이 명확하고, 논리 구조가 선명하여 읽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다. 하여튼 나에게 몰트만은 너무 익숙하달까나.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이번 내한에 대해 심드렁했다.
더욱이 몰트만의 이번 내한은 처음이 아니다. 한국인 제자가 많아서인지는 몰라도 1975년 3월 이래로 수시로 내한하였다. 심지어 자신이 먼저 방문을 제안할 정도로 말이다. 여하간 이번이 아마도 십여 번째 방문일 게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한국의 교계가 좌우를 막론하고 그를 환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이번에 그를 만난 조용기 목사는 "나는 목회 인생 전체를 통해 희망의 신학을 실천했다. 당신의 신학은 내 목회의 강력한 기초였다"라고 말할 정도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나, 나로서는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정치적 희망과 풍요의 희망
▲ 몰트만 박사는 민중 중심의 교회 공동체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신앙한다. 그가 말하는 희망은 지배 체제와의 투쟁을 통해 실현된다. ⓒ뉴스앤조이 이규혁 |
물론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자이고, 조용기는 희망의 목회자이다. 그런데 단어가 같다고 내용이 같을까? 우선 몰트만의 출세작 <희망의 신학>에서 연원하는 이 희망은 어떠한 희망인가? 원래 그는 좌파 사상가인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를 탐독하고 여기에서 혁명의 동력으로서의 종말론적 희망 개념을 신학적으로 변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희망이라는 어휘에 정치적 맥락을 도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를 정확하게 말한다면 체제 저항적 희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지배 체제와의 비판적 거리를 상정하고 있다.
반면, 조용기 목사는 어떠한가? 말했듯이 우리는 그를 희망의 목회자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그 희망은 전쟁의 참화 위에서 가난을 극복하고 풍요를 갈망하던 이의 희망이다. 조용기의 시야에 군사독재 정권의 문제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마음 아파한 것은 경제적 가난(과 육체적 질병)이었을 따름이다. 다시 말해 그가 갈망한 것은 풍요의 희망이었다. 거기에 정치적 맥락은 배제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체제 지속적 희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희망은 지배 체제 안에서 풍요와 성공을 획득하는 것을 지향한다.
투쟁의 힘과 신념의 힘
몰트만은 결코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위에서 말한 그의 출세작 <희망의 신학>은 칼 바르트가 미완으로 남긴 종말론 연구를 계승한 것이다(바르트를 자유주의자로 보는 분들에게 별도로 드릴 말씀은 없다). 몰트만은 초월의 희망을 현세 변혁의 동력으로 보았다. 그는 초월, 즉 하나님의 좌소(坐所)를 전통적인 공간적 은유(하늘)에서 시간적 은유(미래)로 변용시켜 설명하고 있다. 곧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서 미래에 계신 하나님으로 전환된 것이다. 그에 따르면, 미래는 초월적 가능성이고, 그 미래의 강림으로 인해 현실에서의 정치, 사회적 변혁이 가능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초월적 미래의 도입(강림)은 종말론적 구원의 공동체로 인해 가능하게 된다. 몰트만은 후속작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을 통해 성령 안에 존재하는 메시아적인 공동체를 이야기한다. 교회는 다가오는 하나님의 미래를 선포하며, 그 미래 성취에 헌신하는 공동체인 것이다. 이는 곧 세상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초월적 미래(가능성)의 실현을 위해 세상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면, 세상(지배 체제)과 불화하는 것이 당연하다. 다시 말해 희망은 세상과의 투쟁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다.
반면, 조용기는 어떠한가? 그가 말하는 풍요의 희망은 적극적 믿음을 통해 가능해진다. 이게 무슨 말인가? 간단히 말하면, 돈을 생각하면 돈이 온다는 끌어당김의 법칙이다. 나는 <거대한 사기극>에서 이러한 관점을 신비적 패러다임으로 명명한 바 있다. <시크릿>의 론다 번과 <긍정의 힘>의 조엘 오스틴은 그의 정신적 후배이다. 조용기의 멘토는 오랄 로버츠이며, 그의 절친은 로버트 슐러이다. 이들은 이른바 신사고(new thought) 운동의 가르침을 기독교적으로 전유하여 성서가 말하는 믿음과 다른 주술적 믿음을 가르치고 있다.
조용기 목사의 희망은 믿음에서 기초를 발견하는데, 이 믿음의 성격은 세상 안에서 세상을 달래며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주술적인 것이다. 따라서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이의 주된 내용은 '적극적 상상'이다. 물론 그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한 죄의 용서를 믿는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삼중 축복(영적 구원, 경제적 부요, 신체적 건강), 즉 기복적 믿음의 한 가지 항목으로 자리할 뿐이다. 이것은 <요한삼서> 2절의 일반적 관용어구로서의 간구를 구체적 축복 사항으로서의 약속으로 오독(誤讀)한 것이다.
하나님의 무력(無力)과 세상의 권력
▲ 조용기 목사는 세속적 축복의 복음을 강조한다. 그가 말하는 희망은 지배 체제 안에서 풍요를 누리고 성공하는 것이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
이 모든 것이 힘에 대한 그들의 생각과 연결된다. 힘에 대한 이들의 견해 또한 극명하게 다르다. 몰트만은 무력의 능력(power of powerless)을 말한다. 애초에 무력의 담지자는 평범한 민중 공동체로서의 교회 혹은 기초 공동체이다. 그들의 무력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발현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에 역사하시는 방법이다. 그렇게 보면 좌파 신학자라는 분류는 결국 그의 눈이 향하는 데가 바로 민중(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그는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의 아버지가 되었던 것이다. 몰트만은 정치신학의 수호성자이다.
반면 조용기는 어떠한가? 물론 그도 민중을 대상으로 목소리를 낸다. 앞서 말한 주술적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서 말이다. 허나 그의 눈은 권력을 지향하며, 따라서 국가의 최고 권력자를 축복한다. 불법으로 권력을 쟁취한 독재자건 아니건 상관이 없는 것이다(6.25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개발 독재 시대를 열어 간 박정희의 멘토임을 자처한다. 그에 따르면, 자신이 새 마음 운동을 제안하자, 박정희가 새마을운동으로 명칭을 바꾸어 수용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그는 권력자를 애절하게 바라본다.
몰트만은 무력한 민중 중심의 교회 공동체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신앙한다. 이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통해 널리 천명한 바와 무관하지 않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무력하게 십자가 위에서 죽음의 고난을 감수하는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하신다. 하지만 조용기는 권력자에 대한 인정과 축복을 통해 암시되듯이 힘(power)으로서의 신 개념에 기울어진다. 현세적인 힘을 주력 상품으로 제공하는 신에 대한 전망에서 우리는 세상과의 투쟁과 공의의 추구 대신에 (지배) 권력에 대한 긍정을 발견한다. 이는 십자가의 신학이 아니라 영광의 신학이다.
반짝이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다
이것이 큰 목사님이 큰 신학자를 만나는 것이 큰 사건이 될 수 없는 이유이다. 사실 둘의 만남 자체는 오래된 것이다. 이미 17년 전(1995년 9월)부터 만났고, 가장 최근에 만난 것이 작년 5월(1년 4개월 전)이다. 몰트만이 이번에 내한한 것도 역시 <국민일보> 창간 25주년 기념 컨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다른 한 면으로는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개교8주년 기념 컨퍼런스에의 참석을 위한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히 둘이 친구라고 할 수도 있겠다. 절친(베스트 프렌드) 몰트만과 열 살 젊은 영맨 조용기.
나는 둘의 "개인적 우정"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허나 그렇다고 하여 "희망(의) 목회"와 "희망의 신학"이 하나가 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둘이 생각하는 희망과 둘이 이해하는 권력 개념이 다르다. 둘이 신앙하는 복음 또한 다르다. 한쪽은 전적인 초월의 강림을 강조하며, 다른 한쪽은 세속적 축복의 복음을 강조한다. 반짝인다고 모두 금은 아니다. 세계 최대 규모 교회의 설립자가 말한다고 하더라도 도금이 순금으로 바뀔 수는 없다. 그러나 모두들 금이라고 우기고 있다. 여기에 애먼 몰트만을 끌어들이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이원석 / <거대한 사기극> 저자, 신학과 문화학을 전공하고 책을 통해 세계를 해석하고 구성할 뿐만 아니라, 책을 통해 진리로 나아가려 한다. 탈근대 사회 속에서 신음하며 살아가는 근대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