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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답사 스크랩 행사날 가본 이순신묘와 원균장군 묘 (이순신 탄신일)
무심재 추천 0 조회 1,398 09.04.06 08:3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아산 염치면 현충사 경내에 자리잡고 있는 이순신 장군 고가지
 
이충무공 탄신일 다음날 볼일을 보러 아산(온양온천)에 갔다가 잠시 현충사에 들렸다. 현충사
들어가는 입구의 곡교천에선 한창 이순신장군 행사가 이어지고 있었는데 나는 일단 현충사 경내
로 들어와 이순신장군이 어린시절과 젊은 시절을 살았다는 고가지부터 들렸다
 
이곳은 이순신장군의 고향과 같은 곳이기도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도 고향이다. 초등학교때 소풍
왔다하면 단골로 가는 장소가 아산(온양온천) 신정호 아니면 이순신장군의 고가지가 있는 현충사
였다
 
어린시절부터 마르고 달토록 드나들면서 선생님들에게 이순신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무수히도
많이 들어왔지만 지금까지 확실한 기억에 남는것은 원균장군의 모함으로 인해 숱한 옥살이를
했다는 대목이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평택 도일동에 있는 원균장군 묘역과 아산(온양온천) 음봉면에 있는 이순신
장군 묘역을 사진에 담아 보기로 했다. 이순신장군 묘는 현충사 경내에 있지 않다. 이순신장군이
잠들어 있는 묘역으로 가려면 여기서 원균장군의 고향인 평택방향으로 20리 정도는 더 가야 한다
 
이순신장군이 어린시절과 젊은 시절을 살았던 아산과 원균장군의 고향인 평택은 아산만을 사이
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마을이다. 그러니까 이순신과 원균은 서로 이웃마을 사람이었던 것
이다
 
아산 염치면 현충사 경내에 자리잡고 있는 이순신 장군 고가지
 
이순신장군은 한성 건천동(지금의 서울시 인현동)에서 덕수 이정의 4형제중 셋째아들로 태어났
으나 몰락한 역적의 가문이였기에 8세 되던해, 모친의 친정이면서 외갓집이였던 이곳에서 자라
났다  
 
아산시 이순신장군에 대한 자료에서 중요한 부분 몇가지를 옮겨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545년 인종 1년           - 한성 건천동에서 태어남 (현 서울시 중구 인현동)
 
1552년 명종 7년    8세  - 어머니의 고향이면서 외갓집인 아산 염치면으로 낙향
 
1565년 명종 20년 21세 - 상주방씨와 결혼
 
1567년 명종 22년 23세 - 슬하에 맏아들 출생
 
1571년 선조 4년  27세  - 둘째 아들 출생
 
1572년 선조 5년  28세  - 여름 되던해 훈련원 별과에 응시했으나 시험도중 낙마, 골절상을 입고
                                     불합격
 
1576년 선조 9년  32세  - 2월에 무과에 응시하여 병과에 합격, 그해 12월에 함경도 권관의 직책
                                     으로 국경 수비대의 임무를 맡음
 
1577년 선조 10년 33세 - 셋째아들 출생
 
1579년 선조 12년 35세 - 2월 한성으로 돌아와 훈련원에 근무, 그해 10월 비로소 충청도 병마절
                                     도사의 군관이 됨
 
1583년 선조 16년 39세 - 7월 함경도 병마절도사 휘하의 군관이 되고 그해 11월 여진족 토벌에
                                     공을 세워 훈련원 참군으로 승진, 그리고 곧바로 아버지의 사망으로
                                     인해 관직을 쉬고 이곳 충청남도 아산 염치면 고가지에서 3년상을 치름
 
1587년 선조 20년 43세 - 8월 함경도 두만강 부근에서 둔전관을 겸임할때 여진족의 기습을 받게
                                     되어 격퇴 하였으나 이일의 무고로 파직, 백의종군함
 
1588년 선조 21년 44세 - 충청남도 아산 염치면으로 다시 낙향
 
1589년 선조 22년 45세 - 2월 전라도 감사 휘하의 조방장이 되었다가 그해 전라도 정읍 현감이됨
 
1591년 선조 24년 47세 - 2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승진하고 곧바로 전라좌수영에 부임.
                                     그 다음해인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  
 
이순신은 출생부터가 몰락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조부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처형 당한후, 부
친은 벼슬자리도 잃게되고 생활이 궁핍해지자 처갓집인 이곳 아산 염치면으로 내려와 숨을 죽이
고 살아야 했었다
 
위의 자료에서 보듯이 이순신은 누구보다 출세가 늦었다. 28세 되던해에 첫시험에 낙방하고 그
로부터 4년후인 32되던해에 비로소 무과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1576년부터 1587년까지 12년
동안 험악한 산악지대인 백두산과 두만강 부근에서 살을 깍는 추위를 견뎌가며 말단 수비 군관
으로만 돌았다
 
그리고 47세 되던 선조 24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그것도 친분이 두터웠던 서애 유
성룡 덕분이었다는데 수군절도사로 임명된 바로 다음해인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 하였다
그리고 1598년 남해 해상 노량 관음포 해전에서 셋째 아들 면과 함께 전사 했다
그때 그의 나이 54세였고 그의 셋째 아들은 21세였다
 
나는 이제 노량 관음포 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장군 묘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충남 아산시 음봉면 음봉 삼거리
 
이충무공(이순신)묘역으로 가려면 이순신 고가지가 있는 현충사에서 평택방향으로 약 20리길을
달려와야 한다. 평택은 원균장군 묘역이 있는데 저 위에 화살표 표시방향으로 가면 평택 서해안
쪽으로 들어가게 된다. 원균장군 묘역은 평택 내륙 깊숙이 있기 때문에 음봉 삼거리에서 바로 직
진해야 한다
 
이곳에서 "이충무공묘소" 라는 표시를 따라 우회전하여 약 4~5백m 정도만 들어가면 이순신장군
묘역이 나온다
 
이순신 장군 묘소으로 들어가는 입구
 
이곳은 오전 9시쯤 개장하여 오후 5시가 되면 문을 닫는다. 이날이 이순신 탄신일 다음날인 4월
29일이였는데 내가 도착했을땐 오후 4시 정도였고 묘역안에는 사람이 딱 하나 있었다. 그는 다
름 아닌 이 동네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장군 묘역의 잡초를 뽑는 할매였다
 
이순신 장군 묘소로 가는 입구의 홍살문
 
저 앞에 걸어가는 할매가 그날 이순신 장군 묘역에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였다. 지금 이순간 이순
신장군의 고가지가 있는 현충사에는 이순신장군 행사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지만
이곳 묘소는 한산하기만 하다
 
아직도 이순신 장군 묘소가 현충사에 있는것으로 아는 사람들도 간혹 있는데 이순신장군 묘소는
현충사에서 약 20리 떨어진 이곳 아산 음봉면에 있다
 
충남 아산시 음봉면 이순신장군 묘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1545년 4월 28일 서울에서 출생하셨으며 임진왜란 때 삼도수군 통제사로
서 거북선을 장제하여 옥포, 당포, 당항포, 한산도 앞바다와 부산, 명량, 고금도 등 해전에서 왜선
수백척과 왜병 수만명을 무찔러 나라와 겨레를 구하셨다. 이 충무공 묘소는 처음 아산군 금성산
에 모셨다가 16년후인 광해6년 (1614년)에 이곳으로 옮겨 모셨다
 
- 이상 이순신 장군 묘소앞에 있는 안내판에서 옮겨온 내용 -
 
이순신장군이 명령 불복종이라는 죄명으로 삼도 수군통제사에서 파면되고 서울로 압송되어 옥
고를 치르고 있을때인 1597년 7월 15일, 원균장군이 이끄는 함대는 거제도 해역 칠천량 해전에
서 대패하고 말았다. 이건 조선 수군이 기사회생하기 힘들정도로 완벽하게 대패한 전투였다  
 
그때 이순신장군 후속으로 삼도수군 통제사가 된 원균장군도 전사하고 3백척이나 되던 무적의
조선 수군은 한순간에 모조리 격파당해 겨우 12척의 전선만이 빠져 나올수 있었다
 
조선 수군이 기사회생하기 도저히 불가능했던 시기에 선조와 조정 대신들은 이순신을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에 임명하였다. 어쩌면 선조와 조정대신들도 이순신장군의 명랑해전에서의 대승이
나 노량해전에서의 승리를 기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조선수군이 궤멸하고 호남지역의 육군마져 완벽하게 무너져 내린 참담한 상황에서 이순신은 선
조가 내린 삼도수군통제사라는 교서 하나만 달랑 들고 현장으로 달려 갔을것이다
 
그때 그에게 남은것은 겨우 기사회생한 전선 12척과 군사 몇몇뿐...
완벽하게 빈털털이된 상황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것이다
하지만 기적은 일어났다 
 
명랑해전에서 달랑 남은 13척의 전선으로 10배가 넘는 일본 전선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것이다
이 승리로 인하여 먹구름이 드리워졌던 조선의 운명에 한줄기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의 대승이였다
 
선조와 파당싸움에만 열중했던 조정대신들도 생각지도 않았던 승전보에 화들짝 놀라면서 깊은
안도의 숨을 쉬었을 것이다
 
충남 아산시 음봉면 이순신장군 묘소
 
이충무공 탄신일 다음날인 4월 29일 촬영한 사진
 
충남 아산시 음봉면 이순신장군 묘소
 
이충무공 탄신일 다음날인 4월 29일 촬영한 사진
 
요즘 듣자하니 이순신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지 않고 아들과 조카의 도움으로 도망쳤다는
풍문도 세간에서 떠돌고 있다. 이순신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를 했든 도망을 쳤든 분명한 사
실은 연패 당하기만 하던 조선육군과는 달리 연전연승으로 조선의 운명에 한가닥 희망을 심어
주었던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만약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또 무슨 명목의 누명을 씌우고 처형
을 시켰을른지도 모른다. 온 백성의 존망과 지지를 받고 있는 이순신이 두려운 나머지 왕족인 아
무개와 결탁하여 반역을 일으키려 한다는 모함으로...
 
이순신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를 했건 전사를 하지 않았건 이것은 이순신의 과오는 아니다
과오가 있다면 선조임금과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파당 싸움만 일삼던 조정 대신들인 것이다  
 
이충무공 탄신일 다음날인 4월 29일의 이순신 장군 묘소
 
저 앞에 놓여있는 하얀색 화환은 이충무공 탄신일을 맞이하야 해군 참모총장인 정옥근 대장께서
놓고 가신 화환이다. 지금의 해군참모총장이라 하면 아마 4백 몇십년전당시 이순신장군이 맡았던 
전라, 경상, 충청의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와 비슷한 자리였지 않을까 싶다
 

이충무공 탄신일 다음날인 4월 29일의 이순신 장군 묘소

 
이명박 대통령께서도 화환을 보내셨는데 같은 임진왜란 선무 1등공신이였던 원균장군 탄신일날
원균장군 묘소엔 왜 대통령이 보낸 화환이 없을까 ?
 
이 모습을 지하에 계신 원균장군께서 보신다면 서운해 하실른지도 모른다. 당시의 선조임금께서
는 손수 치제문까지 보내 넋을 위로 해 주었는데 이거 너무 하는거 아니냐고...
 
같은 임진왜란 선무 1등공신인데 이것은 형평의 원칙에도 어긋나는것 아니냐고...
 
충남 아산시 음봉면 이순신장군 묘소
 
이충무공 탄신일인 4월 28일, 해군 참모총장인 정옥근 대장께서 놓고 가신 화환과 이명대통
령께서 놓고가신 화환이 저녁 햇살을 받으며 빛나고 있었다. 묘소에는 하루해가 또 그렇게 저물
어 가고 있는것이다
 
이순신장군 묘소에서 내려다본 고요적막한 잔디밭
 
왼쪽에 저녁 햇살을 받으며 고요속에 서있는 비각은 정조대왕의 어제신도비각이다. 이제
나는 이곳 아산 음봉면의 이순신장군묘소를 내려와 평택 도일동의 원균장군 묘소로 발길
을 돌려본다  
 
이번 3월달에 가서 촬영한 사진이였는데 그냥 여기에 이어서 붙여볼까 한다 
 
평택시 도일동 원균장군 묘소 가는길
 
이곳에서 서평택 - 서안성간 고속도로 송탄 I.C 까지는 자동차로 5분 정도 밖에 안되는 아주 가까
운 거리에 위치해 있다
 
지난 역사를 이야기 할때는 법원의 판사들이 그랬던것처럼 모든 선입견을 버리고 양쪽의 말을
다 들어봐야 한다. 어느 한쪽의 말만듣고 그대로 판정을 내려 버리면 그것은 당사자들에게는
천추의 한을 남기는 일이 되고 말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역사속의 인물들을 이야기 할때 자신의 감정을 지나치게 표출하여 충신, 아니면 간신,
이렇게 규정 지어 버리면 공정한 눈으로 바라볼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마는것이다
 
아무리 대역죄를 저지른 역적이라 할지라도 그 길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어떤 절박한 이유가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을것이고 만고의 충신으로 이름난 사람들이 자신과 가족들만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그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내리마을 사당앞에서 바라본 원균장군 묘역
 
도일동 4차선 도로 신호등이 있는 내리 시내버스 간이 정류장에서 "원균장군묘" 라는 푯말을 따
라 약 500m 정도 올라가다보면 "모선제" 라는 마을 사당이 길옆에 자리잡고 있다. 이 "모선제"라
는 마을 사당 정문에서 정면을 바라보면 작은 저수지 건너편 언덕에 원균장군 묘지가 보인다
 
원균장군은 1540년 이곳 평택시 도일동 내리마을에서 태어 났으며 이순신장군보다 5살 연상이
였고 유성룡보다도 2살 연상이였다고 한다. 그리고 죽어서 고향마을인 이곳 내리의 낮은 언덕에
묻혔다
 
그러니까 좀전에 이야기 했듯이 충남 아산시와 경기도 평택시는 아산만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마을이기에 이순신장군과 원균장군은 서로 이웃마을 사람인것이다
 
작은 저수지 건너 저 언덕에 보이는 원균장군의 묘는 이순신장군의 묘에 비하면 약간은 작아
보이지만 뭐 저 정도면 돌아가신 원균장군도 별 불만은 없을것같다 
 
사당의 크기나 묘지의 크기,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의 묘와 패전장군의 묘는 죽은사람들의 의사
와는 전혀 무관하게 늘 산 사람들의 몫이였다는것을 잘 알고 있으실것 같기에...
 
원균장군 묘지의 아래쪽 정중앙으로는 비석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이번에 새로 세워진 신도비
라 하고 오른쪽으로 작은 무덤과 작은 비석하나 있는곳은 애마총(愛馬塚)이라고 하는 말의 무덤
이다
 
신도비는 근래에 세운것으로 선조가 내린 교서와 원균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고 애마총 앞에 있는
비는 선조가 원균장군에게 내린 준마 한필에 대한 내력을 기록 하였다    
 
그 애마총 비석 뒤로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 1596년 선조대왕께서 원균 장군에게 준마 한 필을 하사하시니 장군은 이 말을 극진히 사랑하셨
고 말도 또한 영특하여 주인을 따르며 충성을 다 하였다. 1597년 장군이 순국하시자 말은 주인의
유품을 입에 물고 천리길을 달려 그 생가로 돌아와서 전사하신 소식을 알리고 슬피 울며 지쳐서
죽고 말았다. 이에 작은 무덤을 만들고 애마총이라 하여 주인을 따라 죽은 애마의 갸륵한 충성을
찬양 하노니 말이여 ! 장군과 함께 기리 명복을 누릴지어다 "
 
원균장군 묘역에서 내려다본 원균장군의 고향, 팽택시 도일동 내리마을 모습
이번 3월에 촬영한 사진
 
원균장군 묘지로 들어가는 입구의 홍살문
 
원균(1540~1597)장군의 자는 평중으로 조선 선조때의 무신이다.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을 거
쳐 조산만호 부령부사를 지냈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서 처음 옥포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왜선 30여척을 무찔렀다. 그후 합포해전
적진포해전등 여러차례에 걸친 크고 작은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선조 30년(1597)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하였다. 선조 36년(1603)에 권율, 이순신과 함께 선무 1등 공신에 추록되었다
- 홍살문 옆에 쓰여진 원균장군 일대기를 그대로 옮긴 내용 -
 
그런데 여기에서 선무 1등 공신이라고 하면 적과의 전투에서 후세에 길이 빛날 혁혁한 전과를
올린 장수에게 내려지는 시호로 알고 있는데 원균장군도 선무 1등 공신에 포함 되어 있었다
 
원균장군이 왜란 초창기에 크고 작은 전투에서 여러번 승리를 이끌어 냈었던 경력이 있었다 하니
선무공신이란 시호를 내려 주는것은 당연한 처사이다. 하지만 마지막 전투인 칠천량 해전에
삼도수군 통제사가되어 전투를 총지휘하다 근 일만명에 이르는 아군의 사상자를 내고 거의 모든
전투선이 몰살 당했지만 일본 전선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흔적이 전혀 없었다
 
당시의 상황은 이순신장군이 명령 불복종이라는 죄명으로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를 내놓고 선조의
명에 위하여 한양으로 압송된 후, 그 후임으로 원균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전투를 총 지휘
했던 것이다  
 
물론 자신도 그 해전에서 장렬하게 전사 하기는 했다지만 조선 수군이 복구불능 상태까지 이르게
되었던 대패였는데도 선무 1등 공신이란 시호를 내렸다는 것은 언뜻봐도 쉽사리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다. 2등 공신이나 3등 공신이라면 몰라도...
 
물론 지금 지하에 계시는 원균장군도 부담 스러워 하고 계실지도 모르고 자신의 분에 맞게 2등
공신이나 3등 공신으로 칭호를 바꾸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일은 꼭 죽은 사람들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하게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니 죽은
사람들은 권한 밖의 일이다. 할수 없다. 그냥 살아있는 사람 의도대로 선무 1등 공신을 하는
수밖에...
 
원균장군 묘소로 올라가는 돌 계단
 
묘소 올라가는 돌 계단 오른쪽에 있는 원균장군 일대기
 
임진왜란때 칠천량해전에서 전사한 원균(元均, 1540~1597)의 묘이다. 원균은 원주 원씨로 무과
에 급제한후 변방의 오랑캐를 무찌르는데 공을 세웠고, 임진왜란 때에는 초기의 불리한 전세에도
불구하고 경상우도수군절도사로서 조정과 이순신에게 원병을 요청하는 한편,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고군분투 하였다. 결과 옥포, 당포해전 등에서 승리를 거둘수 있었다. 그러나 포상 과정
에서 이순신과의 공로 다툼이 심하여 불화가 발생하였다. 급기야 선조 26년(1593) 이순신이 신설
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어 지휘권을 장악하자 크게 반발하였고, 얼마 후에는 전라병사로
전속되었다. 그후 이순신이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는 죄목으로 투옥되자 이순신을 대신하여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그러나 삼도수군을 이끌고 부산에 있던 적을 공격하던중 칠천량해전
에서 패하여 전사하였다. 원균의 묘역에는 봉분을 중심으로 묘비와 상석,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우는 장명등, 묘가 있음을 알리는 표시인 망주석, 묘를 수호하는 무인석 등이 배치
되어 있다. 이들 석물은 대부분 1981년 후손들에 위해 묘역이 새로 단장되면서 갖추어진 것이다.
묘역 아래에는 신도비가 있는데 역시 근래에 건립한 것으로 왕이 내린 교서와 원균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그 끝을 알수 없었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겨우 끝나고 조정에서는 나름대로 공신시호를 내릴
만한 사람들을 엄격하게 심사 하였다고 한다. 대부분의 조정 대신들은 원균장군의 공을 2등급으
로 해서 올렸다고 하는데 갑자기 시호가 1등공신으로 되어 버렸다
 
여기에는 분명 선조 자신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었던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을 자신의 명에 따르
지 않는다는 이유로 삼도수군통제사에서 직위 해제 시키고 한양으로 압송하여 처형직전까지 가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리고 원균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여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하게 만들었던것도 선조였
으니 그렇게라도 해야 자신의 망가진 위신을 조금이라도 회복할수 있는길이라고 생각 했었을지
도 모른다
 
여러 정황으로 볼때 당시 선조는 이순신을 매우 탐탁치 않게 여겼으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
본것만은 사실인것 같다. 하지만 돌격하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무모할 정도로 돌격할수 있는 
인파이팅 저돌형이였던 원균장군은 그래도 선조의 마음에 들었지 않았을까 ? 
 
그러니까 선조의 입장에서 봤을때는 용의주도하고 치밀한 전략가인 이순신보다는 말 한마디면
죽을둥 살둥 모르고 돌격 앞으로 하는 원균을 더 선택 했었을른지도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호남지방의 백성들에게 존망의 대상이였던 이순신 같은 사람이 왕실의 어느누구와 합심
하여 반기를 들기라도 하는 날이면 가득이나 갖은 구설수에 오르고 있는 선조로서는 감당할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는것을 경계 했었을른지도 모른다
 
이런 사실을 놓고볼때 선조의 입장으로서는 임란당시 백성들의 존망을 한 몸에 받고 있었던 
이순신을 경계해야 해야 하는 일을 게을리 할수 없었던 현실을 이해할수도 있을것 같다
 
선조가 직접 썼다는 치제문 ? (가운데 자를 잘 모르겠음)을 번역한 내용
묘소 올라가는 돌계단 왼쪽에 있음  
 
유만력 3월 3년세차 을사 정월 18일 계사에 국왕은 신단조정 랑유성을 보내어 조의정부 좌찬성
원균의 영전에 고하여 제사 지내오니 오직 영은 굳센 장군으로 이나라의 영걸이오 기품이 용맹
함에 만부중에 특출한 인물이라 일찌기 호방에 뽑혀서 의장의 창을잡고 여러차례 변방에서 시험
보아 늠늠한 찬망이 있었더라. 이에 정전의 금단을 위탁하여 남쪽바다를 지키게 하니 수로요충이
의연하여 금성탕지와도 같더라. 먼나라 땅이 수하지 못하여 사기가 충천하니 여러고을이 바람에
쓸려 더욱 창궐하여 극에 달했는데 오직 경만이 용기를 내고 나라를 위하여 죽기를 맹서하고
우리의 군사들을 격려하여 쳐들어오는 적을 방비하고 바다에 나아가 싸우니 날마다 승전첩보를
올렸도다. 우리의 바다를 보위함은 경이 아니고 누구를 의지하리요. 내가 그 빛나는 공훈을 가상
히 생각하여 특별히 승급을 시켰는데 적이 재차 침범함에 힘을 다하여 맞아 싸워서 승승장구 하
다가 리복한 적이 밤에 엄습 하여와서 불우의 변을 당하니 이는 하늘이 순리를 돕지 아니함이로
다. 한번 패하여 지탱하지 못하니 장군의 죽음은 나의 부덕함에 인함이로다. 장군의 웅도가 영영
사라지고 장엄한 계략을 펴지 못하니 자나깨나 가슴을 치는 탄식이 그치지 아니 하고 피로써 충
성을 맹서함이 여기에 이르니 더욱 슬픔이 간절 하도다 이에 종축에 명하여 약간의 제의? 를 가
추노니 영이여 알음 있거든 흠향할지어다
 
주...
이 치제문? 은 공이 순국 하시고 8년후인 1605년에 선조대왕께서 친히 단관을 보내시어 제문과
후한 부의를 하사 하시고 공을 이곳 안묘에 유폐토록 하시었는데 그때에 하사하신 제문?을 번역
한 것이다. 1981년 7월 16일 원주 중앙 종친회
 
그러니까 이 치제문? 과 묘역의 석물들은 대한민국이란 국가에서 새로 단장을 해 준것이 아니라
대부분 1981년 후손들에 위해 새로 단장 되어서 갖추어진 것들이라고 하는데 이런 일들은 후손
들이 하는것이 아니라 국가에서 해 주어야 하는것 아닌가 ?
 
결과야 어찌 되었든간에 원균장군도 항복하지 않고 나라의 명에 위하여 끝까지 일사항전을 불사
르다 결국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한 장군 아닌던가 ?
 
평택시 도일동 내리마을 원균장군 묘소
 
나는 이자리에서 누가 누구를 모함했는지, 누구의 공이 더 컸었는지, 따지고 싶지않다
조총의 총탄과 화살이 날아들고 창칼이 부러지는 치열한 전쟁터에서 같은 운명을 걸머지고 같은
배를탄 전우들끼리 누가 누구를 모함하고 누가 누구를 시기하고 또 누구의 공이 큰가를 따질수가
있겠는가 ?
 
파당싸움에 급급하고 피난 다니기에만 급급했던 조정대신들과는 달리 그런 오해에도 굴하지 않
고 풍전등화와 같이 위태롭게 꺼져가는 나라와 백성들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산화해간 장군들
의 넋앞에 고개를 숙일뿐이다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에 있는 이순신장군의 묘소에 비하면 약간은 작아 보이지만 그래도 지하에
묻힌 원균장군도 이정도면 흡족해 하실것이다. 다만 대한민국 정부에서 묘역을 단장해주지 않고
후손들에 위하여 단장 된점에 대해서는 좀 서운해 할른지도 모른다
 
결과야 어찌 되었든 원균장군도 나라의 명에 위하여 출전 하였고 칠천량해전에서 불사항전 끝에
최후를 마친 용장이 아닌가 ? 명장이라고 불러주진 못해도 용장이라고는 불러주고는 싶다
원균장군 자신도 그렇게 불러 주어야 격의에 맞는 소리라고 고개를 끄덕 거릴 것이니까... 
 
하지만 명장이라고 불러주든 용장이라고 불러주든 이미 지하에 묻힌 장군들께서는 별 관심이
없으실거다. 이것도 이미 죽은 사람들은 권한 밖의 일이고 어짜피 산 사람들의 몫이라는것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장군들이기에...
 
요즘 세간에서는 이순신장군과 원균장군을 가리켜 역사의 라이벌이라는 이야기들을 곧잘 한다
하지만 나는 이순신장군과 원균장군은 역사의 라이벌이였다기보다 파당 싸움으로만 일관하던 
조정 대신들의 사리사욕으로 인하여 한 격동의 시대를 파란만장하게 살다간 역사의 희생양들
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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