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삼은 황실(皇室)에서 반가(班家)에 이르기까지 내외명부(內外命婦)가 널리 착용하였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부인 예복이었다. 특히 조선 말기 이후에는 서민녀의 혼례복으로도 널리 입혀졌다. 이처럼 원삼이 대표적인 조선시대 여성들의 예복이었던 만큼,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원삼에 대한 이야기들은 대체로 조선 후기나 근세의 원삼에 대한 내용들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조선 전·후기의 반가 부인 묘에서 원삼 유물들이 출토됨에 따라 그간 베일 속에 있던 조선 전기의 원삼에 대한 새로운 견해들이 도출되고 있다.
조선 전기의 원삼제도
최근 한 연구에서 그간 발굴된 유물 자료와 문헌 자료들을 새롭게 정리하여 조선 전기의 원삼이 단삼(團衫)과 같은 옷이라는 것을 설득력이 있게 제시한 바 있다. 단삼은 조선 초기 명나라로부터 사여된 관복 기록 중에 나타나는데 [실록(實錄)]에는 1450년부터 ‘단삼’ 기록이 보인다. 그 형태는 최근 조선시대 묘에서 출토되고 있는 여성용 단령과 같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실록]에는 중국에서 보낸 왕비의 상복(常服)으로 대홍직금운견해당사계화저사단삼(大紅織金雲肩海棠四季花紵絲團衫)을 비롯하여 대홍직금견해당사계화단삼(大紅織金肩海棠四季花團衫),대홍직금운견만지교단삼(大紅織金雲肩滿地嬌團衫),직금화운견통수슬란저사협단삼(綠織金花雲肩通袖膝襴紵絲夾團衫),녹암화저사철수적보자협단삼(綠暗花紵絲綴繡翟補子夾團衫) 등, 1617년(광해군 9)까지 11건의 기록이 보인다. 그 중 색상은 3건이 대홍색이고 8건이 녹색이며 운견 또는 통수, 슬란의 직금 무늬와 해당, 사계화 등의 무늬가 있거나 꿩을 수놓은 흉배를 단 것도 있었다. 통수·스란 직금 무늬는 조선 후기의 이단하 부인의 녹원삼이나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화순옹주(영조의 2녀) 녹원삼, 국립고궁박물관의 영친왕비 홍원삼 등의 유물에서도 확인된다.
한편 ‘원삼’이라는 용어는 양성지(梁誠之, 1415-1482)의 [눌재집(訥齋集)]에서 처음 보인다. ‘반가의 부인들이 흉배를 단 원삼을 입고 대낮에 활보한다’는 비난의 글 속에서 원삼을 접할 수 있다. 1600년 [의인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懿仁王后殯殿魂殿都監儀軌)]에는 외재궁소용(外梓宮所用)의 대홍광사(大紅廣紗) 원삼(元衫)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처럼 조선 전기에는 사대부가 부인들만이 아니라 왕비도 착용하였던 옷이다. 단삼과 원삼이라는 용어가 혼용되다가 1627년 [소현세자가례도감의궤]의 단삼 기록을 마지막으로,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조선 후기 왕실에서는 왕비를 제외한, 왕세자빈(嬪)과 그 이하의 내명부를 비롯하여, 책봉 전의 간택녀, 공주와 옹주, 그리고 관례를 치른 궁녀들이 명복(命服)과 예복(禮服)으로 원삼을 착용하였다. 왕비가 원삼을 착용하지 않았다는 점이 특이하다.
1651년 세자(현종) 가례부터 1882년 세자(순종) 가례(1882)까지 원삼(圓衫) 기록이 확인된다. 겉감과 안감의 소요량이 단삼과 동일하지만 전기와는 달리, 대금형 원삼으로 변화하였다. 17세기 초 김확의 부인 동래정씨 묘에서 대금형(對衿形) 원삼이 확인된다. 뒷길이 앞길보다 긴 전단후장형(前短後長形)이고 광수(廣袖)의 소매 끝에는 색동과 흰색의 한삼(汗衫)이 달렸다. 고름이나 매듭단추로 앞을 여미고 보통은 긴 대대(大帶)를 둘러 뒤로 묶어 늘어뜨렸다.
1681년 [숙종인현후가례도감의궤]에는 왕비가 봉흉배를 사용한다고 하였는데 영조 때의 [국조속오례의서례]에는 왕비는 오조원룡보(五爪圓龍補), 왕세자빈은 사조원룡보(四爪圓龍補)를 달도록 하였다. 그리고 1847년 헌종의 후궁인 경빈김씨는 책봉 전의 ‘수(壽) 흉배’를 달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가례도감의궤]에 기록된 왕세자비와 왕세손비의 원삼은 모두 초록색이다. 신분에 따라 자적색이나 녹색, 흑색 등으로 원삼의 색상을 구분하였다. 또 직금이나 부금(付金)으로, 또는 문양으로 신분을 구분하였다. 1848년 무신년 진찬에 참석한 경빈김씨가 자적색 원삼을 착용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공주나 옹주는 직금이나 부금 녹원삼을 착용하였으며 상궁이나 궁녀들은 직금이나 부금이 없는 녹원삼을 착용하였다.
화순옹주 직금녹원삼(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덕온공주 초록금수복자원삼(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중요민속문화재 제211호)
전 황후 황원삼
(세종대학교 박물관 소장, 중요민속문화재 제49호)
동궁비 원삼
(세종대학교 박물관 소장, 중요민속문화재 제48호)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에는 왕비를 황후로 격상시켜 황원삼(黃圓衫)을 입도록 하고 황태자비는 홍원삼(紅圓衫)을, 그 이하의 신분에서는 녹원삼(綠圓衫)을 입도록 하였다.
세종대학교 박물관에는 순종비 윤황후의 황원삼(중요민속문화재 제49호)과 윤황후의 황태자비 시절의 홍원삼(중요민속문화재 제48호)이 소장되어 있다. 또 세종대학교 박물관에는 고종의 후궁이었던 광화당 이씨의 자적 원삼 유물(중요민속문화재 제52호)이 전해지고 있다. 그 외에 1906년 의친왕(義親王) 부인 연안 김씨와 1907년 발기에는 자적색 원삼 기록이 보인다. 신분에 따라 가슴과 등 혹은 양 어깨에 용보(龍補)나 흉배(胸背)를 부착하였는데 황후나 황태자비, 왕비는 오조원룡보(五爪圓龍補)를 달고 왕세자빈은 사조원룡보(四爪圓龍補)를 달았다. 그리고 공주나 옹주 등은 봉흉배를 달았다.
명복 원삼을 착용한 의친왕비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명복 원삼을 착용한 의친왕의 며느리
(코리아나 박물관 제공)
원삼의 착장법은 명복으로 입는 경우와 예복으로 입는 경우가 다르다. 명복으로 원삼을 입을 때는 하피와 후수, 대대와 같은 적의에 사용하였던 부속품이 원삼에 사용된다. 1847년 10월 헌종과 경빈김씨의 가례를 기록한 [정미가례시일기]에서 명복 원삼과 예복 원삼이 확인된다. 삼간택 의복의 내용을 살펴보면, 빈(嬪)으로 간택된 후 초록금수복자원삼(草綠金壽福字元衫)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책빈일(冊嬪日)과 조현례(朝見禮)에는 초록직금원삼(草綠織金元衫)을 입었다. 직금원삼은 명복 원삼이다. 명복 원삼에는 수식(首飾) 머리를 하고 패옥, 수정대, 청옥규를 갖추었다. 관례 때는 원삼과 봉대(鳳帶)를 한다고 하였는데 이 때는 예복 원삼을 착용한 경우이다.
1903년 순비의 황귀비 봉비의식에 마련된 복식을 기록한 [십일월초칠일귀비 가봉비시의복 긔] 에서도 원삼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홍직금구봉원삼(황한단내작)에 금치흉배, 후수, 대대, 상, 부금합폐, 전행웃치마 등이 더해졌음을 알 수 있다. 명복을 실제 착장한 모습은 의친왕비와 의친왕비 며느리의 사진에서 볼 수 있는데 의친왕비는 원삼에 원룡보를 달고 의친왕비의 며느리는 방형의 봉흉배를 달았다.
홍원삼에 어여머리를 한 황태자비 윤씨(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녹원삼에 큰머리를 한 궁녀(조선에서 온 사진엽서)
명복으로 원삼를 착용할 때는 우선 속옷을 입고 버선과 신발까지 갖춘다. 청색과 홍색의 스란 또는 대란치마와 전행 웃치마를 착용한 후, 저고리 3작과 원삼을 입는다. 원삼 위에 후수 달린 대대를 허리에 두른다. 대대 위에 다시 하피를 어깨에 둘러 앞으로 내린 후, 옥대나 서대, 수정대 등, 신분에 맞는 혁대를 두르고 혁대 좌우에 패옥을 걸어 늘어뜨린다. 마지막으로 대수(大首, 首飾)를 머리에 얹고 손에 규(홀)를 든다.
예복으로 원삼을 입을 때는 봉대를 허리에 둘렀다. 그리고 머리모양은 큰머리나 어여머리를 하였다. 1873년(고종 10) [고종실록]에는 원삼을 갖추어 입을 때의 머리장식이 기록되어 있다. 큰 다리[大髢]와 둥근 다리[圍髢]를 사용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큰머리와 어여머리를 말한다. 원삼에 큰머리를 한 경우는 원삼 차림의 궁녀 사진에서 볼 수 있고 어여머리를 한 모습은 윤황후의 홍원삼 사진과 황원삼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머리모양은 의례의 성격이나 시대적 변화에 의해 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
- 글
- 이은주 | 안동대학교 교수
-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문화재청 일반동산 문화재 감정위원과 안동대학교 박물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문화재보호재단 비상임이사, 국립 안동대학교 한국문화산업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현재 월간 문화재(한국문화재보호재단 발행) 고정 필자이다.
발행2012.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