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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해대로 스캐치6(방림)
평창읍 대하리 '동그라미황토방'의 노변정담(爐邊鼎談)은 날짜가
바뀌는 것도 모르도록 정담(情談)이었다.
황토벽돌 하나하나를 곡절로 빚은 집이다.
하늘과 대지의 조화와 형상화를 꾀했다는 이 높고 둥근 집은 훈.
소정네 가족사 전편의 타임캡슐(time capsule)에 다름 아니다.
훈과 나는 주호 축에 들만 하나 분위기를 고조시키려 함일까.
술과 거리가 먼 소정도 기꺼이 동참했으니까.
그러나 이 가족의 지극한 환대는 나를 억누르는 짐임이 틀림없다.
더구나 새 해 벽두부터 폐(弊)를 끼치고 있으니까 더욱.
방림(芳林)발 시각이 평소보다 많이 늦은 10시였다.
훈.소정부부와 아들 종욱이 방림까지 배웅하고 돌아간 후다.
멋다리 만남의 광장(옛 芳林驛?)에 도착했다.
옛날, 이 지역에 미녀들이 많았던가.
주막에 유숙하던 과거길 선비들이 예쁜 처녀를 유혹하기 위해 멋
내기 경쟁을 벌였다 해서 '멋다리'라 했다니까.
미녀들이 아른거려 과거 제대로 보기나 했을까.
지금은 계촌천에 현대식 다리(하방림교)가 놓여 있지만 예전에는
징검다리 정도였지 않았을까.
방림삼거리에서 상방림교를 건너면 가이드를 자임하는 듯 길안내
하던 평창강이 멋다리에 이르러서는 백덕산을 출발해 계촌제(堤)
에서 숨을 고르다가 내려오는 계촌천을 받아 남행해버린다.
그래도 4km의 빼어난 계곡 하나를 선물하는 배려를 잊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찾고 있는 뇌운계곡이다.
여기, 천(川)과 강(江)이 만나는 지점이 합천소(合川沼)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도 만나고 물도 만나는 운명의 장소인가.
42번국도 좌우는 북고남저(北高南低) 현상이 뚜럿해 북의 절개에
반해 남쪽은 자그마하나마 평야가 발달해 전답을 이루고 있다.
어제 무리한 강행 탓인지 다리가 처음 얼마동안 말썽을 부렸다.
운교리 수가솔방(찜질방)이 실제보다 멀게 느껴질 만큼.
솔방은 백덕산 골짝, 여우재 아래 솔숲에 살포시 앉아있다.
2000년에 오픈했다는데, 주인이 도시를 떠나 이곳에 정착해 투병
중이던 암을 퇴치했다는 사실이 홍보에 크게 기여하는 듯.
장작불로 달구는 구들장 황토방에서 생솔잎 한증, 약쑥 찜질과 숯,
허브목욕을 하고 산모의 몸조리와 요양에 적합한 장소란다.
수가솔방 입구(상)와 솔방(하)
백덕산과 가버린 친구 K
그렇다면 동그라미황토방과 다를 게 별로 없지 않은가.
체험 기회 놓친 것에 미련 없이 640m여우재에 올라섰다.
여우재는 높지 않으나 태기산 지맥으로 방림면을 동서로 가른다.
재마루에 나타나서 과거길의 선비들과 장사꾼들을 괴롭히는 백발
노인이 있었는데 어느날 기골이 장대한 젊은 장사와 조우했다.
역시 앞길을 막는 노인의 두루마기 속에 감춰진 여우의 꼬리를 본
청년은 한주먹에 노인을 때려눕혔다.
죽어가는 노인은 서서히 여우로 변했다.
여우재로 불리게 된 사연이란다.
(고개마루에 '여우재' 표석도 있으나 애초의 여우재는 먹골로 내려
가는 옛길에 있다)
여우재에서 운교리 지름길을 시도하다가 쌓인 눈때문에 포기하고
도로를 따르는데 고개마루의 한 집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강녕관'(康寧館)이다.
같은 집이지만 노인정, 경로당 등 흔한 이름과 다른 느낌이잖은가.
누구 말마따나 머리는 쓰라고 있는 것.
재물의 힘 아니라도 머리를 쓰면 효과도 비례상승한다.
여우재(상)와 강녕관(하)
해발1.350m 백덕산(白德) 등산로 앞(운교리)을 지날 때는 친구 K
생각이 간절했다.
그가 내게 '멧돼지', '산토끼' 등의 별칭을 붙여준 곳이 바로 이 산
이라 그랬을 것이다.
Y대 농구선수 출신인 그는 당시 한 대형 은행의 부장이었다.
커리어(career)로 인해 그 은행의 여자농구부 감독이기도 했다.
그가 하루는 백덕산 산행을 내게 제의했다.
운동으로 다져진 자기 체력은 과신하고 팔도 산을 섭렵한 내 산행
커리어를 과소평가했던가.
K는 이 날 그로기(groggy)상태가 됨으로서 스타일을 구겼다 할까.
이것이 우리 산행의 처음이며 마지막이었으니까.
그러나, 좀처럼 화내지 않는 호인으로 늘 내 샌드백(sandbag)이
되어준 그는 내가 이 일대를 산행중이던 어느 날 돌연 가버렸다.
산에서 부음을 듣고 달려가 그의 몸에 흙 한 삽을 뿌릴 때 죽은 그
보다 살아있는 내가 더욱 가엾게 느껴졌다.
내 화와 푸념을 받아줄 사람이 없어졌기 때문이었을까.
백덕산 안내도(상), 겨울백덕산(중상), 운교리(중하),
천연기념물 밤나무(하)
운교리(雲橋)는 방림역과 20리 어간으로 옛운교역창(雲校驛倉)이
있던 곳이다.('교'의 한자가 상이하나 까닭을 규명하지 못함)
길가 음식점(들림집) 뒤쪽에 커다란 밤나무가 있다.
내가 통과하기 불과 23일 전(2008년 12월 11일), 문화재청이 천연
기념물 제498호로 지정한 밤나무다.
키14.2m, 둘레6.38m, 가지폭 동서25.5m, 남북20m로 전국 재래종
밤나무를 통틀어 최고령이란다.
게다가 생육이 양호해 과실수로서의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나.
나이 370여세로 추정된다니까 고산자가 이 옛 대로(평해)를 지나
갔다면 이 젊은 밤나무를 보았으렸다.
안흥과 찐빵
평창과 횡성을 잇는 문재에도 터널이 뚫려 고개 넘을 일은 없으나
역시 모릿재처럼 터널 통과가 문제였다.
대관령과 비슷한 고도인데도 평창 지역의 표고가 워낙 높아 별로
높게 느껴지지는 않으나 이즈음 길들이 사람을 대접하는가.
소비가 미덕이라는데 소비유발이 없는 보행이 대접받겠는가.
한데, 평창유스호스텔 입구에서 모릿재와 유사한 행운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교회 목사다.
오랫동안 해외선교에 종사했다는 운교리 우리교회 목사 천병창.
그도 안흥까지 간다지만 터널을 지나 횡성땅에 든 후 곧 하차했다.
역시 모릿재에서 처럼 걷고 싶은 한적한 시골길이잖은가.
평창지역과 달리 제법 너른 평야가 풍요로운 느낌까지 들게 했다.
문재에 오르는 길(상)과 무재터널(하)
찐빵의 고장답게 버스정류장 표말을 비롯해 선전판마다 안흥찐빵
엠블럼(emblem) 일색이다.
옛 평해대로였으며 영동고속국도의 개통 이전까지 경.강교통 중요
노선(42번국도)의 중간지점인 이곳(安興)에서 빵이 만들어졌다.
피로와 허기에 지친 길손들을 고객으로 빵을 팔기 시작한 것.
양방향 나그네들은 도중에 주막이 흔하지 않으므로 샛거리로 빵을
사가지고 떠나기도 해서 더욱 팔렸다.
혹, 옛 대로때 보래개떡을 만들어 팔았다는 기록은 없는가.
찐빵마을 엠블럼
이스트(yeast)대신 막걸리로 발효시키므로 쫄깃한 맛을 시종일관
유지하며, 무설탕 국산팥소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란다.
게다가 기계화, 자동화와 현대적 빵의 맛과 이미지 등을 거부하고
전통을 고집함으로서 신뢰도가 높단다.
이같은 진정성이 입소문으로 퍼져나감으로서 재래식 빵의 대명사
처럼 되었단다.
호구지책으로 시작한 빵이 전국을 커버하는 명품브랜드(brand)로
성장함으로서 안흥과 찐빵은 동의어에 다름 아니도록 유명해졌다.
마침내 지역경제의 효자로 자리매김 되었단다.
매년 10월에 안흥찐빵축제를 개최할 정도로.
또한, 횡성한우와 어사진미, 횡성더덕, 전통장류와 함께 횡성 5대
특산물중 하나란다.
어사진미는 횡성의 옛이름 어사매(於斯買)+진미(珍味)의 합성어로
임금님께 진상하던 쌀이라는 뜻이라고.
안흥쪽 사자산자락 상안리에 서울 서초구 연수원이 우뚝하다.
지자체 자립도가 가장 높은 부자고을임을 과시하나.
벼락부자들의 꼴 사나운 행태를 졸부근성이라고 폄하한다.
지역에 대한 기여도와 지역민의 위화감 간의 손익계산은 해봤나?
가진 자의 배려가 요망되건만.
찐빵마을을 지나는 중이므로 점심을 빵으로 갈음하려 했다.
안흥찐빵을 벤치마킹했다는 황둔찐빵 마을을 통과할 때도 그랬다.
그러나 원조, 시조빵집이 하도 많아 지나치기를 거듭해 411번도와
만난서 안흥삼거리 관말공원 앞까지 나아갔다.
주천강가 안흥1리로 옛 안흥역(安興驛)이 있던 지역이다.
관촌, 역촌, 장터 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강 건너 '말무덤이'는 역
관리하에 있던 말이 죽으면 묻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전에 동그라미황토방을 다녀오던 때 들렀던 집을 비롯해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렸는데 공교롭게도 장날(3, 8일)이라 모두 북적댔다.
결국 복잡한 장마당을 지나고 주천강(안흥교)을 건너 조금 조용한
'할머니안흥빵집'에서 소원(?)을 성취했다.
관말공원(상)과 안흥장(중) 및 찐빵마을 표석(하)
차존인비(車存人卑)의 현실을 개탄한다
국립공원치악산권 매화산의 안부인 전재는 안흥면과 우천면을 동
서로 가르는 고개다.
'전재고개'라 함은 재와 고개의 불필요한 겹말이며 옛길의 전재는
현 위치(42번국도)에서 풍취산쪽으로 비켜있다.
전재와 우천 여우재를 동일시 하는 일부 등산인들도 있는 듯 하나
여우재는 전재에서 오원리쪽으로 약간 내려가야 한다.
한데, 전재를 넘나드는 길은 위험천만이다.
안흥에서 우천을 향해 오르는 쪽의 경사와 굴곡이 다소 완만하다
해도 갓길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전재마루가 얼마 남지 않은 커브지점에서 한 대형 덤프트럭이 내
왼쪽 배낭을 치고 달아났다.
늘 위태위태하던 염려가 현실이 된 것이다.
대형차가 교행하기 벅찬 좁은 고갯길이기 때문이었을뿐 고의성은
없었겠지만 이후 한동안 공포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조금만 더 깊이 건드렸으면 큰 사고로 번질뻔 했으니까.
실은, 나는 늘 차량과의 동행을(우측통행) 고집하는데 그 까닭은
인체역학적 판단에서다.
동일방향일 경우 왼쪽 등을 치게 되고, 그러면 시계방향으로 돌게
되므로 치명(致命)의 확률을 낮추게 된다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막상 현실이 되었을 때는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걸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정신적 공황상태인 내 앞에서 한 청년이
차를 세웠다.
창백해진 내가 아마도 병났거나 지쳐있는 늙은이로 보였던가.
고개마루 ~ 평지(옛 烏原驛)는 구절양장의 심한 내리막이라 더욱
겁을 먹고 있었던 것.
이 순간은 청년이 나의 구세주였다.
사연을 들은 그는 고맙기 그지 없게도 걷기를 중단하고 원주까지
동행하자고 제의했으나 매번 그랬던 것처럼 평지에서 하차했다.
그를 보낸 후 전재를 넘어 질주해 내려오는 차량들의 곡예 행렬을
바라보는 동안 청년이 더욱 고맙게 다가왔다.
그리고 차존인비(車存人卑)의 현실이 마냥 개탄스러웠다.
길을 걸을 때 반상(班常)의 신분 차별은 있었을 망정 인간이 기계
에게 차별당하는 일은 없던 옛 선인들이 부럽기 까지 했다.
어쩌면 가공스런 음모가 숨어있는 것 아닐까.
차 없는 사람의 공간을 없애야 차가 잘 팔린다.
차가 잘 팔려야 공장의 가동률을 높이고 실업률을 내리며, 그래야
경제가 살아난다고 도로관리당국과 차량메이커가 작당을 하는.
터널은 물론 도로의 갓길 한 줄 만들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도 행복한 하룻길
안정이 돌아왔는가.
지근의 오원3리 노인정을 찾아가고 있었으니.
까마귀가 많이 날아들어 오원(烏原)이라는 이 마을은 옛 오원역터
라지만 큰 규모의 택지정리중이라 짐작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이로 수하(誰何)를 트려는가.
여러 대에 걸쳐 이 마을 토박이라는 74세의 강인원옹은 내가 자기
연상임을 확인하고는 태도가 달라졌다.
밖으로 나와 오원역터(양달말)뿐 아니라 전재로 오르는 옛길까지
지목하며 소상히 설명했다.
나이 덕 본 셈인가.
옛 오원역터인 오원3리 경로당(상)과 마을 표석(하)
강원도 산행길에 무수히 오갔던 좁디좁은 새말삼거리가 영동고속
국도 개통으로 기죽으리라는 예상과 달리 날로 더욱 활달대로다.
고속도로의 수용 한계를 극복하는 보조도로일 것으로 예상했으나
주변의 개발로 기능성 도로의 교차점이 되어 더욱 붐비고 있다.
학곡삼거리에 도착할 즈음에 구룡사 입구의 치악산드림랜드에 막
점등이 시작되었다.
학곡저수지에 모여든 태공들도 하나 둘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많이 걸어왔고 위기도 겪었으므로 중지할 만도 한데 또 고집이다.
산과 길 불문하고 다리에 날개가 달리는 시점인데 당연한 일.
남동쪽 치악산의 제봉이 어스름했다.
단풍이 절경이라 해서 적악산(赤岳山)이었다.
꿩(雉)의 보은 전설이 단풍을 능가하는가.
치악산(雉岳山)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岳'자 돌림 산 대표답게 1.288m높이에 비해 꽤 애먹인다.
오죽하면 "치가 떨리고 악에 받쳐 치악산"이라 했을까.
원주시권에 진입하면서 42번국도는 소초면을 따서 소초로다.
교향리(橋項) 석조불두(石造佛頭: 문화재자료 제124호)와 평장리
(平庄) 마애공양보살상(磨崖供養菩薩像: 도유형문화재 제119호)
등의 자료를 미리 점검하고 떠났으나 유감스럽게도 확인할 만한
밤길이 되지 못했다.
원주시 소초면 소재지에서 강행을 접고 버스에 올랐다.
지긋해 보이는 기사는 지리에 서투른 늙은이를 위해 정류장 아닌
지점에서 정차하는 위법을 스스로 했다.
미국에 있는 외손녀가 온다 해서 일단 귀가하려 하는데 원주역의
여역무원(한채랑)은 없는 좌석을 인내심으로 뒤져서 구해줬다.
한 번의 등골이 오싹해진 일 외에는 운교리 목사로부터 시작하여
행복한 일만 계속된, 좀처럼 드문 하룻길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