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 김메리 부부가 도시탈출(exodus)에 성공했다.
백덕산 자락, 높은 산골의 수가솔방이 그 증거다.
강원도 평창군 방림면 운교2리 558-1, 여우재 아래(아래 그림1) 띄엄띄엄
자리잡은 집들이다.(아래 그림2)
저 솔숲이 주인으로 하여금 암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했다 해서 더 주목
받고 있다는데, 맑은 공기 마시며 흐르는 물처럼 사는 것이 비법이라고.
찜질과 민박을 하면서 족구와 여름에는 수영, 겨울에는 눈썰매를 즐길 수
있는 시설까지 갖추고 있단다.
지형적으로는 산책과 등산에 알맞는 곳이고.
산모의 산후조리와 병약자의 요양 및 가족과 단체모임에 좋은 환경이라면
나같은 외로운 나그네와는 궁합이 맞지 않겠다.
(이 그림은 수가솔방 홈피에서 전재)
해발640m 여우재는 낮은 고개가 아니다.
그러나 500m ~700m인 평창의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높게 느껴지지 않을 뿐이다.
한 백발 노인이 재마루에 나타나서 과거길의 선비들과 장사꾼들을 괴롭힘으로서
모두 재넘기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느날 기골이 장대한 젊은 장사도 이 노인으로 부터 괴롭힘을 당할 처지였다.
노인의 두루마기에 가려진 여우의 꼬리를 본 청년은 한주먹에 노인을 때려눕혔다.
죽어가는 노인은 서서히 여우로 변했다.
태기산의 지맥으로 방림면을 동서로 가르는 이 재를 여우재(아래 그림1)라 부르게
된 전설이란다.
(고개마루에'여우재'표석도 있으나 애초의 여우재는 먹골로 내려가는 옛길에 있다)
도농 불문하고 고령화 사회가 됨으로서 마을마다 노인들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노인정, 경로당 등의 간판이 붙은 집이다.
내 집 근처에 새로 들어선 경로당이 있는데 통장이 내게 경로당 회장이 되어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으니까.
도로를 따르는데 고개마루의 한 집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운교2리강녕관'(康寧館)이다.(아래 그림2)
같은 집이지만 노인정, 경로당 등 흔한 이름과 다른 느낌이잖은가.
노인들이 모이는 집, 노인을 공경하는 집보다 노인들에게 가장 우선인 평안한 집이.
누구 말마따나 머리는 쓰라고 있는 것.
돈을 따로 들이지 않더라도 머리를 쓰면 효과도 비례상승한다.
해발1.350m 백덕산(아래 그림1, 2)은 평창군 방림면 운교리와 평창읍 원당리,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등 3행정구역에 걸쳐있다.
내가 친구 K로부터 '멧돼지', '산토끼' 등의 별칭을 받은 산이다.
그래서인지 안내판 앞(운교리 먹골)을 지날 때 그 생각이 간절했다.
K는 Y대 농구선수 출신으로 한 대형 은행의 부장이었다.
커리어(career)로 인해 그 은행의 여자농구부 감독이기도 했다.
1970년대 어느 겨울날, 그가 백덕산 산행을 내게 제의했다.
나는 운동으로 다져진 그의 체력을 믿고 흔쾌히 동의했다.
그러나 그는 팔도 산을 섭렵한 내 산행 커리어를 과소평가했던가.
K는 이 날 그로기(groggy)상태가 됨으로서 스타일을 구겼다 할까.
이것이 우리 산행의 처음이며 마지막이었으니까.
그는 좀처럼 화내지 않는 호인으로 늘 내 샌드백(sandbag)이 되어 주었다.
한데, 내가 평창 일대를 산행중이던 어느 날 돌연 가버렸다.
산에서 부음을 듣고 달려가 그의 몸에 흙 한 삽을 뿌릴 때 죽은 그보다 살아있는
내가 더욱 가엾게 느껴졌다.
내 화와 푸념을 받아줄 사람이 없어졌기 때문이었을까.
하관식을 집례하던 목사에게 남달리 각별한 친구로 비취었던가.
유가족보다 나를 위로하려 했으니까.
1월 초니까 한겨울이지만 운교리 한 마을도 음지와 양지가 확연히 갈린다.
마음 편히 걷기가 거북한 길인가 하면(아래 그림1) 길가 음식점(들림집) 뒤쪽에서
경로 우대를 받고 있는 노율목(老栗木)은 따스하게 느껴진다.(아래 그림2)
내가 통과하기 불과 23일 전(2008년 12월 11일) 문화재청이 천연기념물 제498호로
지정했다는 이 나무는 키14.2m, 둘레6.38m, 가지폭 동서25.5m,남북20m로 전국의
재래종 밤나무를 통틀어 최고령이란다.
게다가 생육이 양호해 과실수로서의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나.
나이 370여세로 추정된다니까 고산자가 평해대로를 지나갔다면 이 젊은(당시에는)
밤나무를 보았으렸다.
문재터널은 동의 평창군 방림면과 서의 횡성군 안흥면을 연결한다.
굽이굽이 돌고돌아 재를 넘어야 했던 때에 비하면 행복하기 그지 없다.
(진부와 대화간의 모릿재터널과 더불어)
문재는 백덕산의 들머리중 하나다.
터널 이전의 고갯길은 임도로 강등되었고 등산로로 활용되고 있다.
지루하게 걸어(아래 그림1) 터널 앞(아래 그림2)에 도착했을 때,모릿재
터널통과를 도와준 젊은 한쌍의 역할을 운교리 우리교회의 담임목사인
천병창님이 담당했다.
오랫동안 해외 오지 선교에 종사했다는 분이다.
횡성의 특산물은 한우와 쌀, 더덕과 찐빵 및 장류(醬類)란다.
특히 안흥은 찐빵에 명운을 건 듯 온통 찐빵 홍보다.
버스정류장 표지판의 엠블럼(아래 그림1)과 마을 표석(아래 그림4)이 모두 찐빵이다.
처음 찐빵을 만들어 팔게 된 것이 길손들에 대한 배려에서 였겠는가.
호구지책으로 시작했던 초기에 안흥이 찐빵의 대명사처럼 되리라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스트(yeast)대신 막걸리로 발효시킴으로서 쫄깃한 맛을 시종일관 유지하며, 무설탕
국산팥소 사용과 핸드메이드(handmade) 등 전통 수호가 인정을 받는 것 아닐까.
이같은 진정성이 입소문으로 퍼져 나감으로서 지역경제의 효자로 자리매김 되었다면
시사하는 바가 크며, 안흥찐빵의 성공사례야 말로 벤치마킹(bench-marking)감이다.
안흥1리는 찐빵마을의 1번지일 뿐 아니라 예전에는 안흥역(安興驛)이 있던 지역이다.
관말(아래 그림2)은 옛 이름이며, 이 외에도 관촌, 역촌, 장터 등으로 불리었단다.
가던 날이 장날이었다.
3, 8일 장인 안흥장이 섰으나(아래 그림3) 예전처럼 붐비지 않으니 신명이 날 리 없다.
장에 모일 사람이 없는데 어쩌란 말인가.
이같은 현상은 전국적이다.
오원리(烏原)는 까마귀가 많이 날아들어 붙여진 이름이란다.
옛 오원역이 있던 오원3리 일대는 아파트단지인가 공단인가.
정지작업이 한창이라 막막했다.
마침, 지근에 오원3리 경로당(아래 그림1, 2)이 있어 찾아갔다.
나를 상대해준 이는 여러 대에 걸쳐 이 마을 토박이라는 74세의 강인원 옹이다.
귀찮은 듯 도도하던 그는 나이로 수하(誰何)를 트려 했는가.
내가 자기 연상임을 확인하고는 태도가 달라졌다.
밖으로 나와서 오원역터(양달말)뿐 아니라 전재로 오르는 옛길까지 지목해 가며
소상히 설명하고 내 건강까지 축수해 주었다.
나이 덕 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