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정의파다
노래 : 다큐멘터리 '우리들은 정의파다' 중에서
우리들은 정의파다 좋다좋다 같이죽고 같이산다 좋다좋다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단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좋다좋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70년대 똥물사건’으로 기억될 일 아니다
다큐멘터리 <우리들은 정의파다>
여성주의저널 일다 김윤은미 기자
<우리들은 정의파다>는 민중가요에서 따온, 그 뜻이 명백한 제목처럼 ‘여공’에서 시작된 여성노동운동 30년사를 당사자의 입장에서 재기술하겠다는 정공법을 택한 다큐멘터리다. 이 다큐멘터리는 구성상 현란함이 없고, 기승전결의 서사도 따르지 않는다. 그 대신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의 복직투쟁에 대해, 당사자인 여성노동자들의 인터뷰에 전적으로 기댄다. 제작부터 여성영상집단 <움>과 동일방직해고노동자들이 공동으로 만들었다.
과거를, 화석화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이전에 전제되어야 할 태도가 있다. 과거를 ‘나’와는 상관없는 하나의 사건으로 바라보아선 안 된다는 것이다. 통상 노동운동사에서 1970년대는 중요한 기점이 된다. 1970년대 후반 거세게 일어났던 여성노동자들의 민주노조운동이 촉발점이 되어 이후 1980년대 노동운동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1970년대가 지나면, 여성노동자들의 운동을 노동운동사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즉 민주노조운동은 1970년대에 일어났던 하나의 사건으로 여겨질 뿐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정의파다>는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민주노조운동이 화석화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임을 명백하게 이야기한다. 동일방직투쟁 후, 그녀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생계 자체가 막막해지고 ‘빨갱이’로 찍혀 일상적인 생활 자체가 일그러졌으나 지금까지 버텨오며 복직투쟁을 하고 있다.
“16살 사춘기… 하루 14~15시간의 노동을 타이밍과 왕소금으로 버티던 대가는 남자들의 임금의 반도 안 되는 일당 70원. 게다가 남성관리자들의 인격적인 모독과 폭력, 성희롱 등을 견뎌야 했다.” 여성노동자들의 진술은 힘든 공장생활에서 소모임 활동 등을 통해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어간 일상에 기반하고 있어 때로는 유머러스하고 담담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 저변에 깔려있는 그들의 심정은 결코 지나칠 수 없는 무게감을 갖추고 관객들에게 다가온다.
▲ 일명 '똥물 사건'. 회사는 여성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대의원선거 당일 노조사무실과 여성노동자들에게 똥물을 투척하는 야만적인 노동탄압을 저질렀다.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복직추진위원회 제공
이 다큐가 오직 인터뷰만으로도 긴장감을 잃지 않고 카메라라는 물질을 뛰어넘어 생생한 전달력을 확보하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제작과정까지 이어진 그녀들만의 끈끈한 연대감, 그리고 과거의 고통을 털어놓으면서 생겨난 치유의 힘 때문일 것이다. 그녀들에게 동일방직투쟁 경험은 고된 노동과 억압을 뜻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을 향해 힘있게 외칠 수 있는 동료들을 얻은, 일평생 지울 수 없는 중요한 시공간으로 남아있다.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은 오랜 기간 동료들과 함께 공부하고, 또 그들을 설득해나가면서 남성중심의 어용노조를 뒤엎고 최초의 여성지부장과 여성집행부를 탄생시킨다. ‘이번에는 남자가 아닌 여자를 뽑자’는 그들의 구호는 실로 절박했다. 그러나 정부, 기업, 어용노조 삼자가 공모해 민주노조를 깨기 위해 애썼다. 특히 박정희 정권은 동일방직노조를 국가와 자본에 대항하는 상징물로 여기고 공권력을 동원해 철저하게 탄압했다.
이들의 노동투쟁에 대한 경험, 예컨대 어용노조가 똥물을 뿌리는 등 온갖 더러운 방식을 사용하였으며 이에 대항해 여성노동자들이 옷을 벗고 저항한 이야기들은 상당히 알려진 편이다. 그러나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았던 이들이 그 동안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때 그 시절 공장에서 경찰들과 맞서 싸울 때 울부짖던 소리가 개구리 울음소리 같아서 봄-여름 사이 개구리가 울어댈 때마다, 몇 년이나,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하며 눈시울을 붉히는 한 여성노동자의 아픈 고백은 관객들에게 그 상처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반추하게 한다.
또한 인터뷰들은 이들이 어떤 일상적 환경 속에서 운동을 했는지 세심하게 보여주며 30년 세월을 함께 한 여성공동체의 힘을 느끼게 한다. 이들은 동일방직에서 해고된 후 ‘블랙리스트’에 올라 사회적으로 매장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속에서 산업선교회에 자리를 잡고 복직투쟁을 계속한다. 옷을 공동으로 입으면서 하루하루 복직투쟁을 하던 날들, 신군부가 계엄령을 내리기 직전 복직이 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다가온 짧은 행복감,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감과 그로 인한 다툼, 가족들과 남편에게 핍박 당하던 일들. 이 모든 일들은 50대 중년이 된 지금까지 투쟁을 함께 하는 그들의 공동경험이다. 2006년의 어느 날, 복직투쟁을 하느라 길거리에 모인 이들의 모습은 강인하면서도 정겹다. 길에서 자야 한다며 아이에게 밥 잘 챙겨먹고 학교 가라고 전화하던 여성노동자의 모습까지도 지극히 따뜻하다.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200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민주화 투쟁으로 인정 받고 국가에서 복직권고까지 내렸지만, 동일방직 측에서는 ‘어찌 보면 기업도 독재정권의 희생자’라는 변명으로 일관하며 이들의 복직을 거부하고 있다. 2006년 현재, 급속도로 늘어난 여성비정규직, 그리고 여성노동현장에서 여전히 이루어지는 탄압의 실상은 이들의 복직투쟁이 왜 계속되고 있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는 듯 하다. 영화상영이 끝난 후 마련된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이 강조한, ‘70년대 똥물사건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 1978년 출근도중 기숙사로 몰려온 남성노동자들이 뿌린 똥물
▲ 이혜란 감독
[우리들은 정의파다] 이혜란 감독 인터뷰
가족은 가난하고 아들은 공부를 시켜야 한다. 산골 어느 벽촌에 살던 열 여섯 앳된 소녀는 돈을 벌어야 했고 도시로 와 여공이 되었다. 기계소리, 흩날리는 실밥 속에 사춘기를 났다. 하지만, 남는 시간 배우고 싶었고 그래서 모임을 만들었다. 같이 모여 한문을 배우고 기타를 치고 돈을 모아 책을 사 읽으며 차츰 세상을 알아갔다. 민주적인 선거를 거쳐 최초의 여성지부장이 탄생했고 노동법을 쟁취하고 서로들 숨통이 트이던 나날이었다. 하지만 험난했던 시절, 돌아오는 것은 인권모독, 똥물 투척, 계속되는 구류 감금이었고 결국 해고였다. 일하고 싶었지만 주민번호까지 선명하게 박힌 블랙리스트 때문에 받아주는 곳은 없었고 빨갱이라는 낙인은 가족에게까지 족쇄를 물렸다. 살기 위해서는 투쟁해야 했고 30년이 흘러 50이 넘은 중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복직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부당함에 휘둘린 해고 통지가 아니라, 내가 말한 정의를 믿고 내 손으로 사표를 내고 돌아오는 그날까지, 혹은 모든 종류의 억압이 멈추는 그날까지 ‘우리들는 정의파’다. 4기 다큐멘터리 옥랑상 지원작인 서울여성영화제 상영작 [우리들은 정의파다]의 이혜란 감독을 만났다.
70년대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다. 왜 그들의 이야기인가?
노동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민주노조의 시작과 87년 노동자 대투쟁 과정에서 궁금했던 부분은 그 가운데 여성 노동자의 역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1200명 노동자 중 여성 노동자가 1000명이 되는 동일방직의 경우처럼 지난 역사에는 상당수의 여성 노동자들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역사는 소외되고 배제되어 왔던 것 같다. 그래서 70년대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부분을 조사하던 와중에 여성 노동자들을 만났다.
그럼 처음부터 동일방직의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나?
그렇다. 기획하는 과정에서는 동일방직의 이야기만 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취재과정에서 당시 동일방직의 3대 여성지부장이었던 이총각(그녀는 여성이다) 선생님을 만났다. 70년대에 그렇게 끈질기고 조직적인 여성의 투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당사자들의 입을 통해 들으며 이 이야기가 많은 것을 담을 수 있겠다 생각했다. 단순히 노동운동의 과정만이 아니라 여성의 이야기까지. 또한 그네들의 투쟁은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끝나지 않는 기록을 담는다는 의미도 생각했다.
과거의 역사를 당사자들의 입을 빌어 끄집어낸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대개의 경우 그들이 겪은 상처는 함구되기 마련인데.
물론 쉽지 않았다. 영화를 2004년 초에 기획하고 그 해 말에 취재를 했는데 본격적인 촬영을 2005월 9월에야 할 수 있었다. 여성 노동자들의 경우 그동안 TV프로나 이론가들의 취재 등 많은 인터뷰를 했었는데 그 과정에서 오히려 다시 한번 다친 경험들이 있었다. 자료차 가지고 간 사진이 돌아오지 않아 유실된 것들도 많고, 당사자들의 이야기가 대상화되어 본질을 왜곡하는 부분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시작 과정에서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태도를 취하다가도 자신들의 목적한 바가 끝나면 그걸로 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속적인 취재과정 속에서 내 진심이 읽히고 받아들여지면서 마음을 여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 영화에는 성장하는 여성의 모습이 보인다. 17살 풋풋한 소녀에서 자기 주체성을 가지고 부당함을 말할 줄 아는 여성으로. 염두에 둔 것인가?
당시를 회고하고 또 현재를 말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지고 가고 싶었던 것은 호명과 성장이다. 역사를 말할 때는 당사자들의 인터뷰가 가장 중요한데 그녀들의 역사이기도 한 만큼 그 삶을 겪어낸 당사자들의 이름을 호명하고 불러주고 싶었는데, 다행히도 30년이라는 지난한 시절을 함께 해온 언니들에게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정남이가, 명자 걔는...’ 하는 식의 이름들이 흘러나오는데 함께 투쟁하고 저항하면서 여성이라는 연대,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자매애’가 투영되어 있었던 것이다. 성장은 이야기를 구성하면서 자연스레 도출된 것이었다. 소모임을 통해 배우고, 교감하고, 참노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해고되고 다시 복직투쟁을 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그들은 지속적으로 성장해왔다. 여성으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이런 흐름을 받아들이고 이해했으면 했는데 그 부분을 관객들도 많이 느끼는 것 같다.
인터뷰를 하며 자신감에 차있는 그들의 얼굴을 마주하고 감독 개인도 어떤 변화의 느낌을 받았을 것 같다.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가장 고민을 했던 주제가 대상화의 문제였다. 인터뷰를 하고 영화를 찍으면서는 어느 정도 찍는 자와 찍히는 자의 관계라는 것이 있다. 작품은 끝나지만 이후 그 관계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그 단절을 극복하는 문제에 대해 고민이 많았는데 이번 영화를 하면서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작업하면서 굉장히 벅찼다. 이런 역사, 이런 여성들이 있었다니 하고. 그들은 오랜 투쟁의 과정에서 서로에게 식구, 동지라는 끈끈함이 굉장히 크다. 그것은 투쟁이라는 녹록찮은 경험들을 통해 이해하고, 지지하고, 연대하는 힘이 자연스레 길러진 것이다. 그런 여성들과 소통하고 풀어가면서 어떤 관계를 맺느냐는 문제보다는 진행형인 투쟁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는 사람이 돼버렸다. 함께 하는 것, 감독으로서가 아니라 후배이자, 동생이자, 같은 여성이라는 디테일한 결이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얻었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여전히 복직투쟁 중인 모습이 보인다. 과거의 투쟁을 단순히 기억으로 묻어두지 않고 이를 현대적 의미로 계승한다. 그만큼 달라진 것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동일방직 투쟁은 2001년도에 민주화운동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명예회복이 되었지만 사측은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무단결근 3일 이상이었으니 해고는 정당한 것이었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다. 당시 회사의 사장이었던 사람은 지금 회장이 돼있고 여성 노동자들이 지난해 4일 동안 본사 농성을 하고 면담을 요청했을 때 월급사장인 지금의 사장은 정작 본인에게는 결정권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들에게 노동자들의 복직은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이제는 투쟁은 동아투위나 전교조, 다른 노동자들의 투쟁과 연대해 가는 분위기다. 서로들 원하는 부분이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올해는 그런 연대 투쟁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나, 비정규직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여성문제, 세부적으로 내려가면 갈수록 30년 전이나 지금은 달라진 것이 없다. 그래서 투쟁도 새로워지고 깊어지는 것이다.
여성영상집단 ‘움’에서 활동하고 있다. 앞으로 계속 이런 작업들을 해나갈 것인가?
노동문제, 그 가운데서도 여성의 노동문제는 사회 전반적으로 그 폭이 대단히 넓다. 빌딩 청소나 간병인까지. 또한 차별과 부당함에 대해 싸우고 계신 분들도 많다. 이 넓은 폭 안에서 여성에 관한 좀더 구체적이고 세세한 결을 다루는 작업을 할 것이다.
"민주주의가 이루어졌다고?"
[전태일통신 35] 동일방직, 그 후 30년
정명자/동일방직 해고노동자
동일방직 노동조합운동 이야기가 여성 영상집단 움에 의해 만들어지기 시작한 지 1년만에 『우리들은 정의파다』라는 제목으로 여성영화제에서 상영이 되었다. 1978년 민주노조를 했다는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들 124명이 집단으로 쫒겨난 지 28년. 화면으로 나오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나는 음식을 먹고 체한 것처럼 다시 가슴이 울렁거렸고 우리들의 20대에 겪은 부당한 일들이 하나둘 떠올라 불꽃에 녹아 촛물이 흘러내리듯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나뿐이 아니고 영화를 함께 관람한 해고자들과 관객들 모두가 놀라움과 충격으로 대부분이 나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떤 젊은 친구는 커다란 돌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같은 충격을 받았다고도 하였다.
최초의 여성지부장 탄생…민주노조의 기틀을 잡다 내가 해고당한 동일방직 회사의 당시 현장 작업조건은 그야말로 사람이 일하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1분간에 140 걸음을 걸어야 하는 표준동작은 기본이었다. 생각해보라. 거대한 방직기가 끝도 없이 늘어선 밀폐된 작업장 안에서 실을 만들기에 적당한 온도 섭씨 32도를 훌쩍 넘은 더위 아래 한여름에도 휘날리는 솜먼지를 뒤집어쓰고 단 1초도 숨돌릴 틈 없이, 눈코 뜰 새 없이 땀에 절어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십대, 이십대 젊은 여성들을. 하루 3교대 8시간 노동이었지만 작업시간에는 식사시간도 없었다. 무좀과 위장병은 다반사였고, 폐병 또한 흔하디 흔한 병이었다. 이런 조건을 개선하고자 노동조합이 법으로 정해져 있지 않은가. 우리는 그나마 법에 나와 있는 최소한의 노동자 권리를 되찾고자 했을 따름이었다. 동일방직 노동조합은 1972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여성지부장이 선출되면서 민주노조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여성중심의 노동조합 집행부가 구성되면서 산업선교회와 천주교회를 중심으로 조합원들이 그룹 활동을 하며 노동법과 노동의 역사를 공부하고, 노동자의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깨닫게 되어가는 것은 그러므로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이런 지극히 당연한 공부와 이른바 '의식화'였다. 그러다보니 조합원들이 시키는 대로 묵묵히 일만 잘하는 순종이 아름다운 미덕이라며 배웠던 권위적인 틀을 과감히 깨고 부당한 행위를 거부하는 불복종운동에 나서게 되었고, 노동자는 기계가 아닌 사람이라며 인간답게 살아 가기 위한 희망으로 노동조합운동을 펼치게 되었던 것이다. 노동운동은 우리들에게는 고단한 노동으로 지친 몸과 고향을 떠난 외로움을 극복하는 생명수같은 삶의 활력소였다. 실제로 조합원들의 폭발적인 참여를 무기로 노동조합이 적극 단체행동에 나서면서 동일방직의 근로조건은 비약적으로 개선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주변의 노동자들은 동일방직 노동자들을 부러워 할 정도가 되었으며 동일방직에 입사하기 위해 '빽'을 쓰려는 여성노동자들이 줄을 이을 정도였다. 이렇게 되자 회사와 당시 박정희 유신정권의 동일방직 민주노조 파괴 시도가 본격화되었다. 대의원들을 찾아가 돈으로 매수 협박해 대의원대회를 방해하기도 하고 핵심 집행부 간부에게는 부서이동, 임금인상 누락 등을 통해 보복하는 등 온갖 파렴치한 부당노동행위가 자행되기 시작했다.
노동조합을 통해 달라진 나의 삶
나는 열여덟의 나이로 동일방직에 입사했다. 어부였던 아버지의 배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집안 식구 모두가 고향을 떠나 동일방직 바로 옆 만석동 판자촌으로 이사를 왔다. 가진것 없이 자리를 잡은 우리 가족은 딸 다섯에 아들 하나까지 해서 모두 여덟 식구였다. 아버지의 고기잡이와 엄마의 막노동으로는 도저히 먹고 살 수가 없었다. 당시 20킬로 정부미 한 포대를 사면 며칠을 먹지 못해 동이 나기 일쑤였다. 쌀이 떨어지면 누룽지를 끊여서 한 그릇씩 나누어 마시며 끼니를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벌어 가족의 살림살이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나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언니 이름으로 어떻게 어떻게 동일방직에 들어갔다. 처음 들어가서 8시간 일하고 나니 발바닥은 부르트고 일 끝나고 집에서 잠을 잘 때도 시끄러운 기계소리가 환청으로 들려 자다가도 몇 번씩 식은땀을 흐르며 깨어나기도 했다. 내가 들어갈 당시인 1975년도의 동일방직 노동조합은 회사측의 노조파괴 책동이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을 때였다. 나는 노조 대의원 언니들의 자상함과 친절함이 너무나 좋았다. 노동조합은 현장관리자들의 눈총과 일 독촉에 주눅이 들은 나에게 엄마의 품처럼 따뜻한 안식처였다. 나는 노동조합에서 비로소 노동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합법적인 기구라는 것도 배웠다. 내게는 눈이 번쩍 뜨이는 신천지가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자연히 나는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며 몸을 사른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도 듣게 되었고 청계피복 노동자들과 함께 시위 대열에 참여도 하게 되었다. 사회를 보는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동아일보 기자들의 집단해고와 광고방해 사건들을 보고 들으며 노동운동을 통한 민주사회 건설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는 사람으로 변했던 것이다. 나는 동일방직을 3년을 다니다 해고될 때까지 한 번도 기계 앞에 서지 못하고 쓰레기 치우는 일과 운반 일만 하다가 해고당했다. 현장에 들어가자마자 열성적으로 노동조합 활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회사의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옷 벗은 처녀들 몸에 누가 손을 대랴!' 1976년 7월 23일 회사는 매수한 대의원들만 모아놓고 도둑처럼 불법으로 대의원대회를 치뤄 회사측 남성노동자를 신임지부장으로 선출했다. 이에 분노한 조합원들은 자발적으로 불법연행한 지부장 석방과 회사의 노조활동 개입중지, 자율적인 노조활동 보장 등의 요구사항을 내걸고 파업농성을 하였다. 회사측이 단전, 단수를 하자 농성은 자연스럽게 단식농성으로 이어졌다. 3일째인 25일. 무장한 전투경찰 수백 명이 농성장을 에워싸며 연행해 가겠다고 협박했다. 너무 무서웠다. 겁에 질린 우리들은 누구의 제안이라고 할 것도 없이 여성으로서 수치심도 마다하고 모두 옷을 벗어들고 저항했다. 옷을 벗으면 설마 경찰이 손을 대지는 않을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우리들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의 나체시위였다. 그러나 그게 통하리라고 생각한 우리는 세상 물정 모르는 너무도 순진한 나이어린 여성노동자들에 불과했다. 우리는 무자비하게 개처럼 끌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 강제 연행당했다. 그 사건으로 충격을 받고 두 명의 여성노동자들은 정신병원에서 6개월 이상 치료를 받아야 했다. 대의원 선거장에 똥물벼락 웬말인가!
1978년 2월 21일은 노조 대의원 선거 날이었다. 나체 시위 이후 우여곡절 끝에 그래도 민주노조를 지킨 우리로서는 또다시 회사 측에 노동조합을 넘길 수는 없었기에 그 선거는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새벽 6시 야근반 퇴근자들이 선거를 하기 위해 노조 사무실을 향해 가는데 갑자기 몇몇 남자조합원들이 방화수통에 똥을 퍼 가지고 손에는 고무장갑을 끼고 닥치는 대로 똥물을 끼얹기 시작했다. 이들은 굶주린 야수처럼 투표장인 노조 사무실과 조합원들의 얼굴과 몸에 마구잡이로 똥물을 뿌렸다. 이런 모습을 보고도 노조에서 요청한 수 명의 정사복 경찰과 회사직원, 그리고 섬유노조 본부에서 파견된 간부들은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하고 있었다. 다급해진 조합원들이 말려달라고 호소하면 이들은 "야! 이 썅년아! 가만 있어. 이따가 말릴 거야"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한 술 더 떠 남자조합원과 한국노총 섬유노조 소속의 조직행동대란 깡패들이 노조 사무실을 아예 점거하고 있었다.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섬유노조는 동일방직 노조를 와해시키기 위해 한국노총 산하 각 산별노조와 전국지부들로부터 협찬금이라는 명목으로 기금을 모아 경비로 충당했다. 이 똥물 사건으로 대의원대회가 무산되자 섬유노조 본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동일방직 노조를 사고지부로 규정하고 지부장과 부지부장, 총무를 제명시켰다. 중앙정보부와 한국노총 섬유노조가 이미 기획한 음모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던 셈이다. 그 뒤부터 우리는 노조사무실에 아예 들어 갈 수조차 없게 되었다. 회사와 섬유노조, 그리고 유신정권은 동일방직 노조는 도시산업선교회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며 도시산업선교회는 빨갱이 단체라고 선전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교회 단체를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홍지영이 쓴 『도시 산업선교 무엇을 노리나』라는 책자가 전국에 배포된 것도 이때였다. 시위, 구속, 가택연금, 그리고 블랙리스트 그 뒤 우리는 3월 10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리는 노동절 행사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하고 명동성당에서 목숨을 건 단식을 하기도 하면서 우리들의 억울한 사정을 알리기에 온 힘을 다했다. 단식이 길어지자 이것을 걱정한 종교계인사들과 회사측은 우리 모두를 조건없이 받아들이기로 약속을 해놓고 현장을 무단이탈했다는 이유로 124명을 해고 시켰다. 나는 3월 26일에는 여의도에서 열린 부활절 연합예배에 당시 남영나이론의 김현숙, 진혜자, 원풍의 장남수, 삼원섬유의 김지선 언니(지금은 노회찬 의원의 부인), 대농방직의 김정자와 함께 참석하여 "노동3권 보장하라",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다"라는 구호를 외치다 구속이 되었다. 또 김옥섭, 권분란, 추송례, 공인숙, 박양순 등은 당시 섬유노조 위원장이던 김영태가 부산의 통일주체국민의 대의원으로 출마한다고 하여 김영태의 비리를 적은 유인물을 부산에서 돌리다 연행되어 구속이 되었다. 그 이후 우리들 동일방직 해고자들은 1980년대까지 어디서도 취업을 할 수가 없었다. 섬유노조 위원장 김영태가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전국에 배포했기 때문이다. 블랙리스트에는 해고자들의 주민등록번호, 일하던 부서, 집주소까지 기록하여 '업무에 참조바람'이라는 도장과 함께 전국 사업장으로 돌려졌다. 형벌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요시찰'이라고 담당형사들이 따라 붙어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가택연금을 당했고 취업하는 곳마다 몇 번씩 해고를 당해야만 했다. 심지어는 식모, 버스안내양, 식당 등에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위장취업을 해서 일하다가도 형사들에게 뒤를 밟혀 다시 해고를 당해야 했다. 블랙리스트 철폐를 주장하다 김옥섭, 김용자, 김지선, 서귀화, 신정희가 다시 구속되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먹고는 살아야 하는데, 취직도 못하고 항의하면 구속되는 악순환의 세월은 우리에게는 풍전등화처럼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절이었다. 박정희가 죽고 1980년 민주화의 봄 때 잠시 복직의 꿈에 부풀기도 했지만 그마저 광주학살과 함께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민주화운동으로 인정은 받았으나 복직은 안돼
2000년에 우리는 민주화운동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 명예회복 신청을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동일방직 사건은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가 개입해 일어난 것이라는 당시 중앙정보부 최종선 씨(고 최종길 교수의 동생)의 양심선언 덕분에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도 받게 되었다. 위원회는 후속조치로 회사에 복직권고도 내렸다. 그러나 1970년대로부터 30년이나 지난 2000년대인 오늘, 우리는 복직이 되지 않고 있다. 복직을 위해 몇 차례 회사 앞에서 농성도 하고 정부종합청사 앞에서도 농성을 했지만 회사 측은 예전과 하나도 다름없이 해고는 정당했으므로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살기 좋아졌다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나는 천만의 말씀이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 우리 사회는 더욱 깊어진 빈부격차로 이게 과연 더불어 함께 사는 공동체인지 의심이 들 정도다. 참여정부가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예나 지금이나 노동자들의 참여는 배제되고 있다. 노동자들에게 명예회복이란 두말할 여지없이 현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부당한 해고에 대한 명예회복조차 이루어지지 않는 참여정부를 나는 도저히 노동자들이 참여하는 민주주의로 봐줄 수가 없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노동 현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음을 나는 다시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일 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리 해고자들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언젠가는 우리들의 언어로 쓰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 열여덟 꽃다운 사춘기 질풍노도의 시기에 우리의 생존권을 빼앗고 우리의 인생을 바꿔놓은 우리의 아픔이자 삶의 뿌리가 된 30년 세월, 그 아픈 삶을 되새기면서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영상으로 찍어보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을 다잡고 기꺼이 촬영에 응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계약직이라는 이유로,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불안하게 살아가는 노동자들과, 케이티에프 여승무원들, 그리고 해고의 위협 속에서 싸우고 있는 수많은 노동자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시작에 불과한 다큐멘타리 『우리들은 정의파다』가 잘못된 역사의 진실을 바로 알리고 고통당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본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고 나는 30년 삶의 질곡을 헤치고 고난 속에서 단련된 중년여성으로서, 엄마로서 굳세고 힘차게 당당하게 오늘을 살아가는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 영화제에서 소감을 말하는 동일방직 조합원들
우리들은 정의파다(2006)
감독 : 이혜란 장르 : 다큐멘터리
시간 : 105분
[시놉시스]
16살 사춘기, 하루 14~15시간 노동의 대가는 남자들의 임금의 반도 안 되는 일단 70원. 게다가 남성관리자들의 인격적인 모독과 폭력, 성희롱 등을 견뎌야 했다. 우리들은 부당한 현실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남성 중심의 어용노조를 뒤엎고 우리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최초의 여성 지부장과 여성집행부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정부, 기업, 어용노조 삼자가 공모해 우리들의 여성민주노조를 깨기 위해 조직적인 폭력과 협박으로 탄압했다. 목숨을 걸고 저항했지만, 결국 우리들은 해고됐다. 30년이 흘러 50살 중년이 된 지금도 끝이 없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 영화제에서 소감을 말하는 동일방직 조합원들
[연출의도]
한국노동역사는 남성노동자와 남성노동운동위주의 기록과 해석들이 대부분이다. 산업화초기 1970년대 경공업분야의 핵심 노동력이었던 여성노동자들의 기록은 ‘동일방직 똥물사건’이나 ‘YH 여공 신민당 점거 농성 사건’ 등 사건위주의 기록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70년대 여성노동운동의 역사를 당시 여성노동자들의 경험과 입장에서 재해석하여 여성노동자들이 자신의 삶과 역사의 주체가 되는 ‘주체에 의한 새로운 역사쓰기’가 될 것이다. 또한 2005년! 27년간의 원직복직투쟁을 해오고 있는 7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의 기록을 통해 30년 전과 같은 구호를 외치며, 여성이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해고당하고 차별 받고 있는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여성노동자들에게 희망과 연대의 기록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