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차도 없이 여행을 다닌 지 10년이 넘었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눈을 감고도 마을의 세상살이를 다 안다. 신새벽 완행열차를 타고 길을 나서보면 간이역마다 사람들이 오른다. 열차가 역 하나를 자나갈 때마다 타는 사람들의 말소리도 달라지고 세상사는 이야기도 달라진다.
당골 이장댁 며느리는 삼신을 미신이라고 욕하더니만 기형아를 낳았고, 박달재 동신제에 누구 애비가 돈을 얼마 부조했으며, 장가 못가 죽은 뱀골 김총각 넋건지기가 며칠날 있고, 한산호 김선장은 청춘다방 아가씨와 붙어서 며칠 째 바다에 안 나가고, 박실댁 맏며느리는 신병나서 집 나간지 열흘이 넘었고, 담뱃골 문총대는 도깨비에게 홀려 발가벗고 집에 왔고.... 차창 안으로 불어오는 바람 냄새만으로도 그 동네가 풍년인지, 흉년인지 안다.
여행의 묘미는 목적지에 가서 보는 풍광의 즐거움 뿐만 아니라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차창 밖으로 함께 달리는 산수와 마을들을 바라보는 것도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을 준다. 그 즐거움은 정겨움과 평화로움에서 온다.
우리네 옛집들은 어딜가나 배산임수(背山臨水)가 기본이다. 뒤로는 나트막한 산이 연이어 있고, 그 산자락을 밟고 ‘백양숲 사립을 가린 초가집’(김상옥 <사향(思鄕)>)들이 그림같이 어깨를 맞대며 점점이 또는 길다랗게 연이어 달린다.
집들은 어울어져 동네가 되고, 동네는 어울어져 마을을 이룬다. 집과 집 사이에는 정겨운 고샅길과 고불고불한 골목길이 나있다. 경상도 하회마을이나 전라도 낙안마을에는 옛 정이 묻어있는 그런 길이 아직도 남아있다. 어디 거기 뿐이랴. 사람들은 그 작은 길을 통해 내 집으로 들어오고 나간다. 이 작은길들은 열림과 닫힘의 기능을 절묘하게 해낸다. 골목길에 있는 동네우물은 담장에 둘러싸인 집과 집, 사람과 사람들 사이를 열어놓는 또다른 길이다. 그래서 우물은 우리의 옛 마을에서 전형적인 이웃 문화를 형성해온 정보의 로터리이다.
골목길은 마을길로 이어진다. 집 앞으로 구불구불 마을길이 나 있고, 그 길은 또 전화줄처럼 집집이 이어져 있다. 충청도 외암리 마을길도 그러하고, 경상도 양동마을도 그러하고, 현대인들이 버린 고향길이 다 그러하다. 마을길이 구불구불한 것은 집들의 앉음새[坐向] 때문이다. 옛 글〈산림경제〉를 보면, 이어붙은 3채의 집이 같은 방향으로 앉으면 좋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위에서 내려다보면 이웃들은 모두 기러기 형태로 앉아 있다. 이러한 형태를 깬 요즘의 아파트 구조는 심심찮게 사생활 침해와 일조권(日照權) 문제를 일으켜 이웃과 티격태격하게 된다.
우리네 길은 끊어지는 법이 없다. 심지어 마을 뒤 산으로도 길은 나있다. 암자로 가는 오솔길이 나있고, 성묘길도 집 뒤로 나 있다. 삶이 힘에 부대낄 때 사람들은 쌀을 이고 불당을 찾았다. 거기에 가면 또 극락으로 가는 보이지 않는 신앙의 길이 있었다. 그 뿐만 아니다. 강진으로 유배온 다산이 오솔길 너머 백련사를 드나들면서 시름을 달랜 것도 바로 그런 오솔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을 하직한 조상들을 만날 수 있는 길도 산으로 나있다. 다산이 누워있는 양수리의 묘소도 마을 뒤로 난 오솔길 끝에 있고, 파주의 율곡묘도 그러하다. 봄가을이면 후손들은 그 길을 걸어가 죽은 조상들과 만나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보슬보슬 / 가랑비 맞으며 / 혼자 가는 오솔길 / 이십 리 학교길을 / 구름 따라 가는’(<분교장 아이>박근월 작) 그런 길도 있다.
건너편 산그늘에도 옹기종기 집들은 어울어져 있다. 건너편 마을과는 넥타이처럼 풀어진 길이 보일 듯 말 듯 이어져 있다. 그것은 가르마같은 논길일 수도 있고, 눈을 가만 감으면 굽이 잦는다는 풀밭길일 수도 있고, 개울물 돌돌돌 길섶으로 흘러가는 개울길일 수도 있다. 더러는 길가에 서낭당․나무․정자 등으로 마을 표시를 해놓기도 한다. 개발로 인해 마을이 사라진 곳에도 서낭이나 당나무를 보고 옛 마을을 짚어낸다.
마을과 마을 사이의 개천에는 어김없이 연결의 징검다리가 놓여있다. 액년에 드는 사람은 정월 열나흗날 밤에 개천에 나가 남몰래 큰 돌이나 오쟁이로 징검다리를 놓는다. 이것을 ‘오쟁이 다리놓기’ 또는 ‘월강공덕(越江功德)’이라고 하였다. 징검다리를 놓을 수 없는 조금 더 깊은 곳에는 섭다리를 놓아서 길이 끊어지지 않도록 했다. 섭다리는 굵은 나무를 베어다가 다리를 세우고 그 위에다 솔가지를 놓고 다시 흙을 덮어 만든 다리이다. 섭다리 놓는 날은 건너편마을 사람들과 한바탕 신명나게 어울어지는 것이다. 남한강 상류인 정선땅 신동마을에서 보았던 섭다리도 그 중 하나이다. 이 밖에도 길을 넓혀주거나, 장애물을 치워서 자신의 액을 막는 조상들의 속 깊은 민속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다.
강마을에는 나루가 있다. 강이 깊어 삽다리를 놓을 수 없는 곳에는 나루를 만들어 배를 띄운다. 그래서 ‘뱃길’이라고 했다. 특히 남한강의 나루들이 예로부터 유명했다. 영월․단양․청풍․충주․목계․여주․이포․팔당 등이 당시의 유명한 나루였다. 서울에도 강남과 강북을 이어주는 광나루․용산․노량진․마포 등이 유명했다. 나루를 중심으로 상업이 번창하고 탈놀음과 같은 독특한 문화가 꽃을 피운 것도 나루라는 이름의 또다른 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서로 마주보는 마을 사이로는 먼지 뽀오얀 신작로가 새로 났다. 모든 마을길은 끝없이 이어진 전깃줄처럼 신작로로 이어져 있다. 그 신작로는 멀리멀리 어디론가 이어져 있다. 이따금 버스가 지나다니면서 사람들을 실어내기도 하고 실어오기도 한다. 이 신작로를 통해 아낙들이 읍내에 장보러 나가기도 하고, 동네 아저씨들이 잠시 일손을 놓고 면소에 일보러 가기도 하고.... 해가 지면, 버스는 십릿길 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통학생들을 내려주기도 하고, 장꾸러미를 손에 머리에 이고 진 장꾼들을 내려놓기도 한다. 더러는 대처에 나갔다가 오랜 만에 고향을 찾아오는 반가운 손님들도 내려다 놓는다. 그런가 하면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나그네> 박목월 작)들을 내려놓기도 한다.
그 신작로가 이어주는 고을고을에는 저마다 향교나 서원이 자리잡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고을에서 가장 큰 집은 교육기관이다. 향교가 그렇고, 서원이 그렇고 지금의 학교가 그렇다. 지금도 남아있는 전라도의 여러 향교며 경상도의 여러 서원들이 지금껏 남아 그 옛날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고을마다 서는 장(場)은 또다른 길이다. 장은 글자 그대로 ‘모이는 곳’이다. 조선시대의 5일장은 하루 걸어서 왕복할 수 있는 30-60리 간격으로 생겼다. 처음에는 물건을 사고파는 단순한 상행위의 장으로 시작되었겠지만, 서로 만나 안부를 묻거나 새로 사귀거나 하는 만남의 광장으로 차츰 바뀌었다. 새로 나온 물건들을 사고 팔거나 새로운 일꺼리도 찾는 생활정보의 광장이다. 삼남의 물산이 모였다는 안성장이 그랬고, 김천의 소시장도 그랬다. 이렇듯 모든 길은 장으로 이어져 있다. 그래서 지금도 시골장은 대개 버스터미널 부근에 있다.
장날이 있어서 농사일을 잠깐 쉬기도 한다. 각설이나 약장수들의 구수한 재담과 노래가 있고, 반가운 사람과 만나 먹고 마시는 즐거움이 있어서 장은 고된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유흥의 광장이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장에 가서 보고듣는다. 일제가 전통장을 폐쇄하려고 안간힘을 쓴 것도 연결의 고리를 끊어 어진 백성들을 우민화시키고자 함이었다.
마을과 마을 사이에 큰 산이 막혀있을 때는 고갯길을 냈다. ‘비 그친 언덕길 먼저 내려와 구절초 같은 당신을 기다리던’(<가을동화> 이상권) 그런 고개도 있고, ‘아편 먹은 듯 취해 나자빠진 / 능구렁이 같은 등어릿길로 / 임은 달아나며 나를 부르고...’하던 시인 서정주의 고향 고창 질마재 같은 고갯길도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실크로드였다. 지척의 거리라도 산이 막혀 있으면 이 고개를 넘지 않고는 달리 길이 없는 것이다.
경상북도 문경은 전형적인 소백의 산간마을이다. 그 옛날 삼국시대 때 소백은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이었다. 문경에 새재가 생기기 전에 그 옆에 계립령이 있었다. 고구려로 보면 남하정책의 최전방이었고, 신라로 보면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해 가는 일선이었다. 두 나라 사이가 나쁘면 그 고갯길이 막히고, 사이가 좋으면 길이 열렸다. 평화는 길이 열린 데서 시작되는 것이다.
길은 끊임없이 새로 생긴다. 사회구조의 산업화로 날이 갈수록 더욱 많은 길이 생겨나고 있다. 옛날보다 더 넓고 빠른 길이 자꾸만 늘어나고 있다. 그러면서도 길은 또 끊임없이 사라져간다. 특히 이농현상으로 사람들이 떠난 마을이 점차 늘어나면서 옛길은 가시덤불 속에 묻혀 사라져가고 있다.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길도 마찬가지이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해지면서 사람들 사이에 사연은 없어지고 용건만 오고가는 시대가 되어간다. 요즘 사람들은 용건이 없으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길을 만들지 않는다. 길이 없으면 마을이 생기지 않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길이 없으면 정이 메마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오가는 사람들이 더욱 낯설게 보이는 오늘날이다. 사람들 사이에 길을 만들고 다리를 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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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담백한 관조의 세계, 그 속에 촌철살인의 세태 비판 .....김재일 회장님 그립습니다.
지난시간의 아쉼은 그리움으로....좀더 조금만 더 ......